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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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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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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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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새벽기도회 에 관하여 ?
출처 : LA말씀침례교회 http://av1611.net/ 새벽기도회 에 관하여 ? 기도회는 새벽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심야이든 언제 해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가짜란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시각은 항상(always), 언제나(any time)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든, 저녁에 기도하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참이냐? 가짜냐? 판단할 것이 못됩니다. 아래 글은 저희 교회에서 한 새벽 기도에 관해 전한 말씀입니다. 참고해 주십시오. 예배에 관해서는 인간 중심적 예배를 지양하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경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 시각 역시 자유롭습니다. 주의 첫날(일요일)에 모이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배 시각은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주중에 몇 번이나 모이든 몇 시에 모이든 그것 역시 각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이란 말이 있어서 성경을 통해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유대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1:12절에,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노략 당한 자를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행위가 악하므로 나의 격노가 불같이 나가서 태우리니 능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 ). 바빌론의 군대가 밖을 포위하고 이제 곧 예루살렘은 죽음과 역병이 온 도시를 휩쓸고 도시는 불탈 것입니다. 그런 중에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라고 한 것은 심판을 집행하는 일은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란 주의 말씀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심판)은 다 의로우며"라고 할 때 그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밤이라고 하고, 아침 6시부터 낮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내려 주셨고, 성도들은 아침에 나가서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아침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매일 아침 주의 신실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오늘날 올빼미 족이 많고, 새벽 문화가 아닌 저녁, 심야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우는 새벽 문화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에 공의를 내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심판을 하고, 학대받는 자들의 손에서 백성을 건져내는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이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아침에 주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 아침형 인간(II) 렘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렘3:23). 주의 긍휼은 새벽마다 새롭습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아침마다"-매일 아침- 새롭습니다. 매일이란 말은 지속성인데 이것을 성경은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visit-방문하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욥7:18). 하나님이 방문했을 때 성도가 자고 있으면 주님은 자신의 은혜를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긍휼을 보이시고, 새벽에 만족하게 하십니다. [오 새벽에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시90:14). 주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주시듯이 아침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는데, 해가 뜨면 녹아 버렸습니다(출16:21).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음으로 영적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낮에 일터에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태워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태우되 등잔들을 정비(整備)하면서 그 위에 향을 태울 것이며](출30:7). 우리는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결코 대낮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고, 아침에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을 섬겼습니다. 아침은 헌신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봉헌 헌물을 아침에 드리게 했습니다. [제단 위에 있는 불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타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또 번제 헌물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고 화평 헌물의 기름을 그 위에서 태울 것이며](레6:12). 우리의 헌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헌신의 능력은 새벽에 주어집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성전 문을 열고,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그들이 하나님의 집 사방에 머물렀으니 이는 그들이 책무를 맡아 아침마다 그 집의 문을 여는 일을 하였음이더라.](대상9:27). 주를 섬기는 것은 매일 아침이어야 합니다. 아침은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새벽에 부활한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들이 늦잠 자고, 자기 할 일 다하고 동굴로 갔다면 그들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은 주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이것이 바로 새벽 기도의 효과입니다. 아침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아침은 주의 신실하심, 긍휼을 새롭게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에 단 한번, 단 몇 차례만 주의 은혜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맛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이는 새벽에 주를 만난 대언자의 증언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침에 주님이 공의를 빛으로 내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은 새벽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새벽보다 정신이 맑은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모두 새벽을 깨우고, 새벽에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고, 헌물을 드리고, 모임으로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영적 지식은 새벽에 가장 많이 주어집니다. 영적 깨달음은 새벽에 기도하고 성경 읽을 때 많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에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오전 11시 예배에도 제 때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 상태가 틀려먹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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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8
[글, 시] 잘 들을 줄 아는 사람
퍼온 글 http://blog.naver.com/fkbc/140019752993 1.들을 준비를 하고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 전에 대답하지 않는다. -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 말을 더디하고, 먼저 생각하며 서둘러 말하지 아니한다. - (잠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입은 악을 쏟느니라 - (잠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 (잠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3.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한다. -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4.진실을 말하되 언제나 사랑 안에서 말한다. 사실을 부풀려 말하지 않는다. -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5.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다투지 않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 (잠 17:14)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 (잠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6. 화를 내면서 대꾸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꾸한다. - (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7.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 상대가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사하심을 얻으리라 -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8.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 (잠 10:19) 말이 많으?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잠 20: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9.상대를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 시켜주고 격려한다. -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살전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하라 10.누가 말로 공격하거나 비판하거나 책망하면 똑같이 대꾸하지 않는다. -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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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출처 : 복음과 진리의 지식을 전하는 사람 | 복음전파 http://blog.naver.com/botomm/2004816015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 셨는가를 알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은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해오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가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세대적 진리를 알고 믿고 있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바로 "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끼리 미워하고 저주하고 어떤 사람처럼 "저런 자는 쓰레기 통으로 집어 넣어야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쓴 소리를 퍼붓는다면 과연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 예수님의 제자라고 보겠는지요............................... 세대적 진리를 알고 킹제임스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 안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질펀하게 뭍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뭍어 있는 누룩들을 제거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누룩을 제거시켜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들의 노력은 사랑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한다고 해서 그가 교만하지 않게 된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앞에서 교만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대로 믿지도 않고 성경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역시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도 자랑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우리의 일도 결코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 분께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신 일을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잘했다고 볼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 중에 하나님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것들도 있었으나 반면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싫어하시는 것들도 있었다는 것을 아신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되겠는가를 더욱 더 잘 아시게 될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거짓 교리로 부터 오염되어 왔었습니다. 교회가 생기기 전 제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는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서로의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서 서로의 종이 되기는 커녕 서로가 선생이 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교회의 배교함을 미리 아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선생이라 또 주를 부르니 너희 말이 옳도다. 이는 내가 그렇기 때문이라. 내가 너희 주와 선생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고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본을 남겼으니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해여야 하리라.] (요 14:13~15)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스카리옷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일을 알겠느냐?" 라고 질문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은 그 질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악한 세상에 살면서 누룩에 노출이 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제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더욱 더 강력한 속임수를 믿는 자들의 마음에 보내어 누룩을 심겨 놓습니다.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사탄은 누룩을 심겨 놓아 그 누룩을 자라게 합니다. 그 누룩이 자라고 나면 우리에게서 자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해 성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교회를 세우는 선한 일을 해야 하거늘,, 선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누룩은 우리를 막아 사탄의 일을 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 개인은 영적 전쟁을 하게 되며.. 그 영적 전쟁에서 패한 성도 개인이 교회를 이간질시키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새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누룩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누룩을 제거하려면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지식으로 서로 판단하려고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교도들과 이단들을 판단하는 것은 주 안에서 옳은 일이지만... 같은 믿음을 지니고 같은 성경을 쓰고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간에 판단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의 피 아래 있는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다 의로워서 하는 선행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들이 제거된 이후 선한 일들을 하도록 창조하신 그분을 통해서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선행을 하나님보다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 죄인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알려 주고,, 사랑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성도들의 필요를 살피는 일을 하고,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면서 주님께서 남기신 그 본을 따라 행하는 그 일이 과연 하나님보다 의로워지고자 하는 행위들이겠습니까? 또한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존재가 사탄이며.. 그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제도와 규례들을 제정한 존재이며 사형제도를 제정하여 악인들을 죽이기 보다는 의인들을 죽이려고 그 제도를 사탄이 제정했다고 밝히는 일이 과연 하나님보다 의로워서 그 일을 밝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라고 죄인에게 소망을 가져다 주는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악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요.. 악인들에게 저주를 퍼붓지 마십시요... 우리는 본래 악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악인들이었을때 우리는 서슴없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해왔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 일깨워주고 우리게에 복음을 알게 해 준 복음 전파자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계속해서 악인으로 살다가 결국 사탄에게로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부르시지 않았고 생명에 이르도록 부르셨기에 복음전파자들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악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사형장에 끌려가게 되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회개하라" 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악인들에게 "회개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든지 모두 "회개하라" 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향하신 사랑의 첫 명령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구원받은 형제와 자매들 간에 교제를 나눌 수도 없데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자비를 베풀 수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마귀를 대적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하나님을 아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느니라.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이는 그분이 우리에게 그의 영을 주셨음이라.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거하느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으니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느니라.] (요일 4:7~21)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안에 있는 누룩은 하나님 보다 더 공의로워 지려고 하는 것이 누룩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구절들을 구구절절이 제시하면서 악인들의 접근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의 접근을 엄금하셨습니까? 악인들과 위선자들은 다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악인들에게 화를 발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악을 행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인 위선자들에게 화를 발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악인을 의인되게 하시려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악인을 의인되게 하셔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려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죄값을 감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를 흘리셨으며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휴거의 때가 임박할 수록 사탄의 공격이 더욱 심해 질것입니다.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나 다툼이나 분노 같은 것들은 우리의 육신을 자극시켜서 교회의 분열을 가져다 주려는 사탄의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탄의 불씨를 끌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교회 밖의 세상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없기에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길이요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그들을 사망과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망과 지옥으로 들어갈 존재는 사탄과 그의 천사들(마귀들)입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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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도서]너는 내려놓으라, 내가 채워주리라!
너는 내려놓으라, 내가 채워주리라!” 당신이 내려놓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하버드 박사 이용규의 ‘천국 노마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바로 이 순간, 당신이 내려놓을 시간이다! 세상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으면 모두 빼앗긴다고 유혹하지만 하늘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온전한 우리 것이 된다고 약속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하버드 명예도, 미래의 보장도, 가족의 안전도, 심지어 헌신의 열매까지도 “너는 그저 내려놓으라”는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인도하심 따라 ‘천국 노마드’의 삶을 누리는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 우리는 그를 통해 크리스천의 제일 덕목이 되는 ‘내려놓음’의 진수(眞髓)를 맛본다. 이제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전능한 하나님이 일하실 순간! 당신이 내려놓을 시간이다. ‘천국 노마드’(heavenly nomad)란? ‘노마드’란 ‘유목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천국 노마드’란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또한 하버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 선교사로 헌신한 이용규 교수(몽골국제대학교)가 복음을 전하는 하늘나라 유목민이 된 것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진정한 영적 가치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사모하는 참된 크리스천이 헛된 가치를 내려놓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가 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소멸되고 가지려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우리의 삶 무엇으로 나의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내 것을 얻으려면 내려놓아야 한다!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점원이 바코드 판독기로 읽게 해야 했다. 그래서 점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라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려놓기 전에는 진정한 우리 것을 얻을 수 없다. 영적으로 아기인 우리는 내려놓으면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움켜쥐려 하고, 결국 그렇게 잡고 있는 한 그것들은 진정한 우리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게 된다. 우리가 잡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내려놓고 인생의 계획까지 내어드린다면 해결 받을 수 있다. 그러려면 잠시 내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차례 보기 프롤로그 1부 복의 통로가 되는 광야로의 부르심 1장 하나님은 왜 내려놓으라고 하실까? _ 15 2장 믿음으로 걷는 광야의 나그네 길 _ 28 3장 광야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_ 37 2부 가장 좋은 것을 붙들기 위한 내려놓음 1장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미래의 계획을 내려놓는다 _ 55 2장 텅 빈 물질 창고까지 하나님께 내려놓는다 _ 83 3장 생명과 안전에 대한 염려마저 내려놓는다 _ 118 4장 결과를 예상하는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는다 _ 134 5장 ‘죄’와 ‘판단’의 짐을 내려놓는다 _ 144 6장 명예와 인정받기의 욕구를 내려놓는다 _ 155 7장 사역의 열매를 내려놓는다 _ 175 3부 내려놓을수록 가득해지는 천국 노마드 1장 나의 길을 앞서 가시는 여호와 이레 _ 185 2장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_ 199 3장 버리고 낮춤으로써 얻게 하시는 오묘한 섭리 _ 212 4장 하나님 마음을 품을 때 보게 되는 큰 그림 _ 219 5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비 _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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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도서]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진정한 예배, 참예배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사 예배가 무엇인지 명확히 가르쳐주는 참예배 회복서 평생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 권의 책을 남긴 타협 없는 이 시대의 선지자 A. W. 토저, 규장에서 발간하고 있는 토저의 마이티 시리즈(Tozer Mighty Series), 그 여덟 번째 책 《이것이 예배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토저는 참된 예배가 실종되어가는 것을 이렇게 개탄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데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 예배는 ‘잃어버린 보석’(The Missing Jewel)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면류관이 있지만, 이 면류관에는 보석이 박혀 있지 않다. 지금 교회는 온갖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빛나지만, 정작 빛나야 할 보석인 예배는 실종되었다.” 토저의 이 말은 단적으로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빈곤하고 남루하며 변질되었는지 알려준다. 또 예배야말로 얼마나 더없이 소중한 것인지 그래서 더욱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역설한다. 있어야 할 가장 빛난 보석이 없는 빈 면류관을 가지고 어떻게 주 앞에 드릴 수 있는지 고뇌하는 토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예배의 본질을 확인하고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 진정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참예배의 회복을 외치는 토저의 격동어린 메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예배보다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없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난 존재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 역시 단연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 둘째, 죽은 껍데기 예배를 청산하고 살아 있는 참예배를 드리라고 촉구한다. 종교의 외피를 두른 변질된 예배를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여 일 중심이 아니라 예배 중심의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예배를 기억하며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이 드린 예배를 받으셨을지 고심하며 자신이 드린 예배를 돌아보고자 하는 모든 크리스천, 계속해서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사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원하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한 예배회복서로서 일독을 권한다. ‘4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으로 당신의 예배를 점검해보라. 당신이 드리는 예배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시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토저의 이러한 지적에서 오늘 한국교회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의 교회도 예배 횟수는 늘어나고, 곳곳에 떠들썩한 대형집회가 열리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은 넘쳐나지만 신령과 진정의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는 희소하다.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식수(食水)를 구하기 힘든 것처럼, 예배의 홍수가 난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참예배를 체험하지 못하여 영혼은 기갈로 헐떡이고 있다. 예배의 타락상에 대한 토저의 사자후(獅子吼)는 토저 당...대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경청해야 할 선지자의 음성이다. 토저의 이 책을 통해 당신은 참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격동될 것이다. 자신이 드리는 예배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내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겠노라고 결단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토저의 불덩이 같은 메시지를 경청하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데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 예배는 .1부 인간은 예배를 위해 태어났다. 1장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_ 11 2장 숨질 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예배이다 _ 41 3장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_ 61 2부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라 4장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라 _ 82 5장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참된 예배를 드려라 _ 114 3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라 6장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참예배이다 _ 145 7장 이제 예배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라 _ 163 4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 로렌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가 죽어갈때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당신도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로렌스 형제는 "나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했던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것을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상대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57 오늘 나는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일꾼보다 예배 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6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따라서 우리는 충만하고 깊은 예배를 드린 후에 일 해야 한다. ---------------------------67 성령님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불같이 뜨거운 예배를 통해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69 진정한 예배자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종교 프로그램에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70 이 시대에는 IBM에서 만들어낸 기계들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래알을 세고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세심하게 변해버렸다. 이런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장로들이 누구인지, 짐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이 헬라어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밝히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세부적인 것들에 신경 쓰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하여 감사한다. 나는 여기서 더 큰 그림을 본다. 내 눈에는 장로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보일 뿐이다. 만일 당신이 예배하기를 지겹게 여긴다면 아직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74 그런데 오늘날 나를 매우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를 자판기처럼 사용하려는 경향이다. '믿음'이라는 500원짜리 동전을 자판기에 넣고 레버를 당기면 '구원'이라는 상품이 떨어지고, 당신은 이것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면 그만이다. -----------------------------75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84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86 우리의 뜻대로 예배할 수 있다는 착각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회심하지 못한 시인, 회심하지 못한 지식인, 회심하지 못한 교양인들이 이 속임수에 아주 잘 넘어간다. ---------------------------87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체험하면서도 구원의 체험을 하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이방인들의 종교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에게도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있다. 이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88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없이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 가인도 그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닐 때에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90 가인의 예배는 속죄가 빠진 예배였다. ----------------------91 가인은 속죄의 핏기가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단지 예물을 가져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92 우리가 교육을 많이 받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손을 놀리는 법과 입을 여는 법에 능숙할지라도 우리에게 속죄의 핏기가 없다면 우리는 '가인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한다. 가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대수롭게 않게 여기실 것이라고 믿었다. ------------------93 잘못된 예배 중에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라는 것이 있다. ------------------------94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곧 '사마리안의 예배'이다. 이단은 모든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을 취하고 나머지를 버릴 뿐이다. --------------------------95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태기도하고 빼기도 하는 짓을 자행한다. 특히 심리학, 인본주의 및 온갖 종류의 종교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자행한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의 예배'이다. -----------------------97 또 다른 잘못된 예배를 들라면, '자연숭배'를 들 수 있다. -----------------98 어떤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로 착각한다. ---------------99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100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101 그들은 나름대로 감정을 느꼈지만, 하나님께 다다르지 못한다. 이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나 언제 하나님 앞으로 부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108 종교인들의 엄숙한 오르간 소리와 아름다운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할지라도 진리와 성령님이 없으면 참된 예배도 없다. --------------------------------112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크고 넓고 포괄적인가! 회개와 중생과 성령님의 임재는 필수적이다. --------------------113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예배는 태도이다. 내적 태도이다. 육체적 태도가 아니라 정신적 태도라는 말이다. -----------------115 예배는 마음으로 느끼고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감탄을 겸손히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다라서 예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119 모든 사람이 기술자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는 감정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목사'를 '영적 기술자'라고 부르는 시대가 장차 오지 않을까라고 추측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술적 개념, 과학적 개념 그리고 심리학적 개념으로 바꾸어버렸다. ----------------------120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말하자면, 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들에게 갑자기 예배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122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125 그들은 '나', '나를',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없애고 그 대신 '우리', '우리를',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라는 문장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고쳤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감히 '나'라는 표현을 사용 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주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137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집사와 장로와 목사들이 교회를 경영하면서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닌가?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건성으로 드리는 사람은 교회의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거나 투표할 권리가 없다. ------------149 예배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 이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다른 일보다 내게는 예배가 가장 소중하다. ----------------151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것이 예배의 묘미이다. --------------152 이런 감동을 얻기 위해 노력해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158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편 45:10,11) [출처]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작성자 빛의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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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9
[글,시]용서가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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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9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서론 @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풍성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용서의 3가지 요소 : 손해, 손해로부터 발생하는 빚, 그리고 빚의 탕감 1. 성령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갈5:22~23,25 갈5:19~21 갈6:7~8) 2. 다른 관계까지 파괴한다 3. 거부감에서 생긴 것을 부적절한 방법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4. 거절당한 마음을 보상 받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용서함으로 자유를 누리라 1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라 1. 용서 받아야 할 인간 - 하나님은 죄의 댓가 이상을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의 교제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원리 -죄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은 용서의 원리를 주셨다 2. 용서. 하나님의 선물 -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주신 유일한 해결책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3. 믿음은 용서로 통하는 문 -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용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법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미 용서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 4. 죄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이신다. 즉, 이말은 아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용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속히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는 데에 있다 5. 친밀감을 회복케 하는 고백 - 고백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미 받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제2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용서하라 1. 내적고통 - 내적 고통은 쉽게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이 우리 삶에 뿌리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깊이 상처 받았을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내적 고통의 영향 -육체적 질병 -관계의 파괴 -황폐한 영적 생활 #내적 고통의 극복 - 내적 고통을 다루기 위한 동기(눅6:36,37, 갈2:20) #내적 고통의 제거 - 상처목록 - 내 잘못 목록 - 하나님 용서 목록 - 나를 괴롭혔던 자를 하나님 손에 있는 도구로 보게 해달라고 간구 - 그 사람에 대한 고통 간직하고 있었던 것 용서해 달라고 간구 - 내 태도에 대한 전적 책임 - 용서 2. 상처를 안고 살아 갈 것인가? - 잊혀지고 묻어두었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용서하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수술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그 과정에서 흉터는 남겠지만 반드시 치유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의 10단계 1. 상처받는다 2. 충격을 받는다 3. 피하려고 한다 4. 잊으려고 한다 5. 부정한다 6. 숨긴다 - 거친기질, 예민함, 수줍음, 비판적 성격, 질투 등 이것은 모두 거부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7. 도망간다 -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존경심을 파괴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힘들었던 날들을 함께 견뎌 온 결혼 생활에 꼭 필요한 신의와 의무마저 손상시킬 수 있다 8. 진실을 발견한다 9. 고백한다 10. 벗어난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이유 -이기심 -자존심 -낮은 자존감 :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우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찮게 느낀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착각 : 대화 중에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꺼림직한 구석이 있다면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 곁에 가는 것이 여전히 편안하지 않다면 지난 일들 중에 자꾸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계속 긴장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때의 상황을 완전하게 해결한 것이 아니다 -고통의 두려움 -방법을 모름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 : 하나님께서 내가 한 모든 일을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하나의 의지적 행동이었음을 기억하라 그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오해 -상처 준 사람을 이해하면 용서한 것이다 -시간이 상처를 치유해 준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다 -찾아가서 용서한다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 -자신이 용서 받았음을 인식하라 -상대방의 빚을 사면하라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다른 사람들을 성장의 도구로 바라보라 -화해하라 *다시 상처를 준다면 : 용서가 우리 쪽에서 베푼 자비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오는 압박과 억눌림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용서한 뒤 변화 : 반감 사라짐 쉽게 용납함 행동보다 그 사람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김 4. 자신에 대한 용서 : 예수께서 모든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신앙 훈련도 소용이 없다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 감각 회복 -행복한 결말은 용서를 받는 데서 오는 것이지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즉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속하는 사실이지 우리의 느낌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시103:10~14)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결과 -죄책감 -불안 -무가치하다는 느낌 -강박적 행동 -가장된 겸손 :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현재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계속하실지 조심스럽게 주목하여 보는 것이다 -자기박탈 :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는 우리가 책임져야만 한다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이유 -용서 받으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 용서는 단순히 받고자 하는 이에게 자유롭게 제공되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다 -자신에 대한 실망 -죄에 대한 무감각 -또 다시 죄를 짓게 되리라는 생각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 -문제의 인식 -죄에 대한 회개 -신뢰의 재확인 -자유함을 고백하고 받아들임 3부 넘어진 형제를 도우라 1. 형제가 넘어질 때 : 넘어진 형제나 자매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책임이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섬세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는 근본 원인 -우리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적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언제 죄를 짓게 되는가?(갈6:1~5) : 부주의한 삶, 무지,유혹, 자만심, 유체적 피곤, 사탄의 공격, 중압감 *회복의 과정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 시각에서 볼 때 죄가 되는 경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게 한다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도록 인도한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처벌을 감사함으로 따르도록 인도한다 *회복을 돕는 자의 마음 가짐 - 온유함 (이해와 용납), 겸손함, 사랑함 결론 용서는 자유함을 준다 @용서 받을 주 없는 죄 - 강퍅한 마음(성령의 거스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단계 -다음과 같은 것들은 용서가 아님을 깨달으라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정당화 하거나 이해, 변명해 주는 것 +죄를 잊어버리는 것,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것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분노하고 화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 +당신이 상처받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 -종종 용서하기 위해 직접 대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한 계절 정도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라 -간구하라 -성령께서 마음 속에 가르쳐 주신 모든 내용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라 -의자를 두개 준비하고 그것들을 마주보게 놓으라 그리고 한 의자에 앉으라 -상처를 모두 들추어 내라 -의지적 행동으로서 단번에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라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고통스러웠던 상처에 대해 감사하라 -기도하라 : 나는 용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납하셨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을 용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때의 상처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당신도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아무것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워진 것입다. -고통스러웠던 상처에 대한 기도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주 예수여 이 상처 대신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해 주시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대적하는 영에게 내어 주었던 권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로 찾았습니다. ---를 향한 나의 태도 때문에 내 삶 속에서 사단에게 내어 주었던 마음을 도로 찾았습니다. 이제 이 마음을 공의로우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드립니다. [출처]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작성자 좋은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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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2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A. W. 토우저)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A. W. 토우저) 첫째, 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육적인 것과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 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 「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 즉,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위하지 않고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남이 나보다 높아지는 것을 싫어할 뿐아니라 내가 남보다 못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배가 아프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안다. 다섯째, 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 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 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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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3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디모데전서 1:18-20

본문 - 디모데전서 1:18-20

제목 -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내용 -

[서론]

박 청호목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자연을 통해서라든지,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마지막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가운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제에 대하여 일일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양심”이라는 기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양심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권면하기를 선한 양심에 의존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로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은“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7절과 18절 말씀을 보시면 이들과 합세한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데 필레토라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들은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던 바울 당시에 최초의 이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cf. 벧후 3:16).

양심이라는 영어의 어원을 보면 “~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con"과 ”지식, 과학, 원리“라는 뜻을 지닌 ”science"라는 단어와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성경을 통하지 않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지식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진리의 지식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낳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잘못된 믿음이 잘못된 양심을 낳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이 믿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양심과 뗄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양심”에 관해서 박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초의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연동되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의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와 더불어서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구원받으면 이런 파괴된 양심이 “선한양심”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선한양심을 소유했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양심이 제대로 기능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건전한 교리를 꾸준히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게 되면 그의 양심은 더럽혀지고 약해집니다. 결국에는 그 양심이 화인 맞아서 마귀가 제안해 오는 어떤 회유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귀가 제안하는 어떤 획책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을 수 있는 양심으로는 영적인 삶을 결코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까,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지금 파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파선된 양심”과“정상적인 양심”에 대한 가르침에 익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선된 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양심은 사람을 경고하고 인도하도록 완전하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제 기능을 못할 뿐입니다. 거듭나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내주하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양심과 영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양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로 본문의 권면과 마찬가지로“선한 양심”이 있습니다(딤전 1:18-19). 이와 반대로 히브리서 10:22에 보시면“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순수한 양심”이 있는데(딤전 3:9), 히브리서 9:14에서는 이 양심을 “정결한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순수한 양심”과는 반대로 디도서 1:15에서는“더럽혀진 양심”이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파선된 양심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4:1-2에서는“화인 맞은 양심”으로, 그리고 또 고린도전서 8:7과 12에서는 “약한 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양심상 결백하다고 해서 꼭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틀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고 우리의 양심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우리의 양심을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본론]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Ⅰ. “순수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딛 1:15).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텔레비전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들을 보면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분명한 양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이 불결하게 되고 건강한 양심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수한 생각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텔레비전과 무익한 인터넷 사이트나 세속적인 잡지나 책들에 오염되어서 많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악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양심을 위해서 순수하게 하여서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할 때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대부분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데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책임질 수 없다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다면 결코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양심이 정결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일들을 말해 줄 “믿음의 선배”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실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 옳고 그름의 선택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셨습니다. 목회자들이 우리의 양심이 전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우리의 양심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양심은 거짓말을 할 것이며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Ⅱ. 사랑해야 합니다(딤전 1:5-7).

“이제, 계명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헛된 언쟁에 빠져 율법 선생이 되고자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순결한지 우리를 인도해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랑은 거룩하고 이기심이 없으며 육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랑은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사랑은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Ⅲ.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딤전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에게 부탁하노니, 전에 너에게 주어진 예언들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하였느니라.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배우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바른 양심을 가지려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양심은 죄에 동화된 채 올바르지 못하게 되어서 곧바로 더러워질 것입니다.

죄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대게 의지에 문제가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의 양심이 마귀의 제안으로 꺾여 있기 때문에 확신들이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와 아론이 최초로 파라오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파라오를 두려워했던지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담대하게 표명하지 못했습니다(출 5:1). 그랬더니 파라오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력하게 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파라오가 말하기를 “주가 누구기에 내가 그의 말을 복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스라엘로 가게 하지도 아니하리라.” 하더라.”(출 5:2). 잠언 29:25에서“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고 했는데, 당시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도록 죄로 유혹하고 기세를 꺾고 의지를 공략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믿음안에서 큰 담력을 얻고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딤전 3:13).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Ⅳ.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기를 힘써야 합니다(행 24:16).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장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오니 즉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내가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리라는 소망을 저 사람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듯이 나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나이다. 이 소망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나이다.(exercise)”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그렇게 섬겼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제대로 지키려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의 양심은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이 원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중심이 잡혀가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진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친절도 없으며 진정한 사랑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양심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성도들의 필요에 흠뻑 젖은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양심은 건전해 지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Ⅴ. 매사를 정직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매사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은 신뢰할 수 없는 양심입니다. 그런 사람의 양심은 파선당한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서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거짓 조언을 할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Ⅵ. 구령을 해야 합니다(벧전 3:15-16).

베드로전서 3:15-16에 의하면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들이 행악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희를 비방하다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건전하고 건강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구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구령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양심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야말로 성령님의 인도를 가장 잘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Ⅶ.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

사도행전 8:37은 베드로전서 3:21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성경을 제외한 다른 변개된 성경들에서는 이 사도행전 8:37 말씀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이 철저히 무시된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침례를 말하는 구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자마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우리가 기꺼이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건강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들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성별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TV 프로그램에 자신을 내어준다든지, 영화관에 가서 세속적인 영화를 본다든지, 락 뮤직을 즐겨 듣거나, 인터넷을 통해서 무익한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오락이나, 세상 유행을 지나치게 따르려는 것은 모두가 양심이 깨어져서 더럽혀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 더럽혀진 양심을 가지고도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좀더, 좀더 하다가 마귀가 쳐 놓은 죄악의 올무에 깊게 빠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행에 여과 없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순간 자신의 양심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언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 보루를 진리 아닌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의 양심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양심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양심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양심의 지주대란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양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 보았으나 양심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이 기도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하십시오! 지금 곧 지금. 아멘.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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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7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가?
출처: 말씀침례교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 외에 성경이 말한 바 제자가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거함으로써(요8: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 *continue in my word. 제자의 제일 조건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사상이나 가르침, 연구 결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승의 가르침, 사상, 교훈, 생애 등을 사람들과 후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매일 읽는 것,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주님 안에 거하며 열매를 맺음으로써(요15:7-8).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나니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7-8).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면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상호 교제 속에서 하는 기도는 100% 응답이 됩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도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 기도 생활에 근거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지로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 기도와 같은 입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는 누구나 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온유, 친절,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함께 있는 이들이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누군가 그 과실을 먹습니다. 정직하고 행하고 남을 돕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를 맛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뿐 아니라 세상은 성도들에게 그런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서 얻을 아무 열매도 보지 못할 때 욕하고 저주합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이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다. 요즘 종교가 타락했다... 등등의 저주를 퍼붓습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모두가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남이 잘되기를 구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배를 섬길 때 자신을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많지만 제자들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넷째,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함으로써(요13:34-35).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즉 형제를 위해 죽는 사랑을 말합니다.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로써(요일3:18)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형제 사랑은 우리가 주의 제자란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떤 광고, 홍보, 전도보다 강력합니다. % 그리스도의 제자란 ... - 예수님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로 부름을 받았다. 누구에게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십니다.‣ 순종에로 부름을 받았다. 모든 제자는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순종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기 어렵다는 것은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종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은 없으며 제자도도 없다. - 섬김에로 부름을 받았다. 주님은 제자들을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명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야망대신 가장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단순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맘몬(재물)을 섬기질 아니할 때까지,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영적인 삶의 능력과 풍요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행실에 탐욕이 없게 하고 가진 것으로 만족할 때(히13:5), 먹고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로 알 때(딤전6:8) 제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 고난에로 부름을 받았다. 육신적인 성도는 내게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고, 신실한 성도는 어떻게 하든지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자들은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주를 위해 받을 고난이 나에게 있음에 감사하고,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고난 뒤에 주어질 영광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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