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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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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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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결혼과 가정- M. 더크센
결혼과 가정(1) M. 더크센 -------------------------------------------------------------------------------- 교회에 미치는 가정의 영향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서의 가정 하나님을 위한 가정이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너무도 자주 가정이라는 "대단위 계획"이 해결책보다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고, 또 우리는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우리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 자신들의 가정을 이룬 것으로만 만족해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 가정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은 가정을 향한 고유한 계획을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정에 대한 지침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침들을 통해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가정이 증인으로 부르심 받은 근거 하나님이 만드신, 혹은 제정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손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깊이 감동이 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에 허락하신 많은 축복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시 19:1-6). 또한 시편 기자는 계시의 완전함과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유익들에 의해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시 19:7-11).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는 두 가지 위대한 실체가 숨겨져 있는데, 곧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과 그 피조물에게 주신 축복 등이 있습니다. 놀랄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러한 위대한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가정은 하나님의 인격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개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 메시지는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한 어떤 목적과 및 더 많은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두려워 떨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며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흥미롭게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은 그 사람의 가정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이 세상을 향한 증인이 되는 근거로써, 그리스도인 부모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는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와 계속해서 다투었던 것도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with our sons and with our daughters: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출 10:9)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믿는 자로 만들 수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청지기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로써 가르치고 또 본을 보임으로써 "훈련하고", "다스리고", "교육하고", 또한 "인도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 가정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책임과 청지기 직분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증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두 가정이 그려져 있는데, 곧 하나님의 가정과 하나님의 사람의 가정입니다. 사람은 자기 집 온 식구들에게 증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노아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창 7:1)는 매우 은혜스러운 초청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자기 온 집에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창 18:19)키게 할 것으로 확신하셨습니다. 무엇을 증거할 것인가 그리스도인 가정의 간증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든지, 아니면 복음의 손실을 가져오든지 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받는 축복이 엄청나게 클 뿐 아니라, 그 책임에 있어서도 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하고 건강한 모임의 간증이 약하고 결점이 많은 가정들 가운데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증거할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 우리의 가족과 가정은 우리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모임이 거룩하고자 한다면 또한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해야 합니다(벧전 1:15-16).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근신하며 의로우며 경건함으로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딛 2:12). 따라서 야곱도 벧엘에 올라가서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영적인 전을 말끔히 청소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하나님의 성품에 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제하고"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돌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훈계의 말은 주님을 향한 전적이고 참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러한 사랑은 서로에 대한 관계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종종 베다니에 있는 한 겸손한 가정에 들리셨는데, 그 가정에는 참된 교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가정은 사랑이 없고 또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 세상에서 매우 특별하고 영향력이 있는 간증으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영구성 창세로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혼관계는 영구한 것이며, 가족관계도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6) 오늘날 "조건적인 헌신"과 결혼이 쉽게 깨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평생 헌신과 부부간의 정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정의 확고한 영구성은 행복의 발전과 잘 양육된 자녀들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증거할 믿음의 가정이 이혼과 슬픔에 의해 깨어지는 것을 들을 때,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진실과 성실 오늘날 세상에는 진실이 상대적인 것으로 변하고, 성실은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위에 세워지고 양육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가정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의 삶 속에 심는 가정이었는데, 그 어머니와 조모의 "거짓없는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와 사무엘도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순종할 때 큰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써 형성된 또다른 예들입니다. 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부모님들이 영적인 나라를 위해 사는 분들이며, 부모님들의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녀들이 자라서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강력한 증인들이 되는 일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요? 권위(Headship)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두신 합당한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족과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과 그에 대한 실험은 결과적으로 역기능적인 가정들을 낳고 있습니다. 부모가 다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는 독재적인 군주와 같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꼭두각시"와 같습니다. 또 오늘날 어머니들의 행동은 자녀문제에 관해 극성맞거나 수수방관하거나, 그 사이를 오락가락합니다. 두 부모의 징계행위에는 서로 일관성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사단의 공격 목표인 가정 가정,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공격 아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계획과 및 목적에 관련된 모든 것을 대적하고, 무효화시키려고 획책하며, 그리고 멸절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단은 최초의 가정을 불순종하게 하고, 부부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형제간에 대적하게 했으며, 살인까지 하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증인으로서의 가정이 좋지 못한 출발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 가족에게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일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실패는 결과적으로 그 나라에서 추방되도록 했으며(창 12), 야곱의 아들들의 배신행위와 잔혹성은 그 가족의 이름을 더럽혔고, 따라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창 34:30)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경우에 가정의 영역에서 실패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해야 할 모든 측면이 계속해서 대적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순결과 거룩이 강하게 도전을 받아 그 가치가 희석되고 있으며, 세상적인 윤리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의 책장에 비치된 책들과 비디오 테이프, CD 등을 살펴보면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악하고, 폭력적이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성적인 부도덕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과 눈에 대리적인 만족함을 주도록 허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는 슬프게도 예배에 있어서 무기력함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의 부족과 복음전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금방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사랑과 돌봄은 종종 물질주의적인 이익과 일시적인 쾌락에 대한 갈망에 의해 상실되곤 합니다. 아버지들은 돈을 버는데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영적인 지도를 등한히 하게 됩니다. 어머니들은 가정 밖에서 자아 추구나 성취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각자가 알아서 살도록" 방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왜 우리 자녀들이 자기 영혼 구원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없으며,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지 않은지 놀라곤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많은 비행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하는 공항과 같아서 인격적인 접촉은 거의 없으며, 있어도 피상적인 대화로 그치고 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족의 연대감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필요들이 충족되고 가족 간의 안락함을 누리는 피난처와 같은 장소라기 보다는 "잠자고 먹고 나가는" 하숙집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가정의 통치도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철학이 경건한 가정의 근본적인 토대마저도 지속적으로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권위에 대해 도전하고, 의심하고, 또한 불신하도록 교육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에서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의 가르침과 훈련에 대해서 조차도 법적인 제재를 가하려 하고 있습니다. 슬프지만 확실한 자녀교육에 대한 한가지 본보기로 엘리 대제사장에 관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문제를 "흐물하게" 가르쳤습니다. 엘리의 아무 효력이 없는 책망의 말과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는 일에 대한 실패가 결과적으로 성막 문앞에서 엄청난 패륜을 저지르도록 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러한 위기적인 상황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점차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대적의 잔인한 공격이 지속됨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책략을 바로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가정에 대한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세우고 지켜가고자 하는 경건한 부모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경건한 가정의 수가 늘어가길 바라며, "만민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우리에게 위탁된 명령이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 힘있게 되고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결혼과 가정(2)-교회에 미치는 가정 생활의 영향 훈육과 가르침의 현장인 가정 Ⅰ. 가정의 본질 1) 가정은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첫 번째 학교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하나님이 인간 조직체의 기본적인 단위로 정하신 가정은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배움터입니다. 예의바름, 공손함, 정직함, 공정함, 그리고 친절함 등등. 이러한 덕목들과 그 밖의 미덕들이 가정이라는 학교의 교과과정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원칙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첫 번째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부모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반드시 이러한 일에 책임을 감당하면서, 자기 자녀들이 법을 잘 지키며,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말로써 교훈해야할 뿐만 아니라, 친히 본을 보임으로써(말뿐인 교훈은 잔소리로 끝나기 쉽니다) 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이러한 일을 큰 손실을 보고난 후에 시작하곤 합니다(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처럼 중차대한 과업에 대해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러한 일생의 과업을 큰 혜택과 함께 시작하기도 하는데, 즉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절대적인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잠 17:6).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히 12:9). 자녀들은 어린 시절, 즉 그 생애의 초기에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더 존경하거나 우러러보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에 비견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국면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일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도 존경은 수고를 통해서 오는 것이며, 또한 (잃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가정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훈련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 대한 행복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여기에다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자녀들의 삶을 돌보아야 하는 추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마노아의 질문은 모든 부모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 13:12) 하나님은 장래에 삼손을 쓰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한 가정에 두시고, 모든 해로운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Ⅱ. 가정의 역할 성경에 나타난 몇몇 가정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가정과 가족이 자녀들을 위해 마땅히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항 중에서 몇 가지 항목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안전한 보호처를 제공함 - 삼손, 사사기 13장.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20세기말의 상대주의와 상황윤리학은 이미 사사시대에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한 기준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그 차이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자들은 변함없는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흐르는 모래와 같은 현대 사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삼손의 부모의 마음에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신 천사의 말은 그들을 확신케 했는데, 그 속에 담긴 진리가 나중에 시편에 기록되었습니다. "(보라) 그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그분을 위해서 양육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녀를 귀찮은 존재나 짐으로 생각하는 폐단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형성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니, 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그들의 손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에 대한 양육방식과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에 대해 들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우리의 손에는 자녀의 장래에 대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권위가 있으며, 가장 실현 가능성이 있는 대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녀들에게 새로운 이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방식을 따라 자녀를 양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말씀의 교훈을 잘못 이해하거나 또는 잘못 적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자녀 양육에 대해 가르치시고 있는 말씀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통해 자녀들에게 최선의 교육과 양육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들은 성경이 "징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체벌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효과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들에게는 비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볍게 볼기를 치거나, 아예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기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초리 사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단지 때려서 혼내준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잠 23:13)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순종을 요구하는 강력한 명령이 됩니다. 어떤 자녀들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서 "볼기를 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어떤 자녀들에게는 그 소중한 특권(징계: 역자주)을 잠시 보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훈계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저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회초리"가 병행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건전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삼손은 죄악과 세상의 어수선함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가정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삼손의 나실인으로서의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모든 것이 나실인으로 살기에 적합했는데, 바로 그러한 건전함이 그 가정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술의 발전은 부모들이 가정의 "문을 지키는 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이 구원을 받는 일이나, 구속함을 받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해가 될만한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자녀들의 삶을 통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인터넷이나 음란 비디오, 및 폭력성 텔레비전 프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깨어 경성하는 파수꾼이 되어 자녀들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하며, 가정의 건전한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견고한 터를 놓음 - 디모데, 디모데후서 3:15. 디모데는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이고 사려 깊은 훈육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홈 스쿨링(믿음 안에서의 가정 교육)"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됩니다. 우리는 유능한 전도자와 교사들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양육을 전적으로 전도자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시편 78편에는 4세대 이상이 나타나 있는데, 각 세대가 배운 진리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시 78:5-7). 3) 영적인 유업을 물려줌 - 모세, 히 11:23-27. 믿음으로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던 그 부모는 세상이 모세를 없애려고 했던 것을 막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의 부모들은 일찍부터 부유한 영적인 유업을 모세가 소유할 수 있도록 돕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으므로 상 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그 상급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자녀들에게 모임의 가치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바라며,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위해 삶을 허비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데 헌신하도록 도우시길 빕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모임 생활의 출혈을 가능한 일찍 막을 수 있으며, 우리를 도우사 우리 자녀들이 모임 안에서 하나님께 유용한 그릇으로 빚어가도록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중요성과 목적을 마음에 심어줌 - 사무엘, 사무엘상 1:27-28.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의 손이 자기 어깨 위에 얹혀진 그 느낌과 자기 어머니의 확신에 찬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는 나지막한 말을 따라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로 우리 자녀들을 사용하고자 하시는 은혜로운 목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을 함께 생각해봄으로써 부모된 우리의 마음에 큰 도전과 자극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매우 경건한 성도들조차도 자기 자녀들의 회심을 바라며, 위하고 기도했지만, 그 결국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받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거나, 우리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의 삶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큰 특권입니다. 부디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 자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의식을 크게 해주시고, 우리가 자녀들의 구원과 축복과 장래에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일에 대해 주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힘주시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교제 기간 일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문제는 젊은 청년들의 영적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선택 위기의 순간에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매일의 삶이라는 잔잔한 물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될 때, 비로소 폭풍의 시기에 배가 파선되는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이 연마될 수 있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잠언 8:33-34의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날마다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가운데 가능하면 일찍부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직후에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우 극적인 상황, 즉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위기적인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하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5,6)라며 이러한 일에 대해 간증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우리에게 엄습해 올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기를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우리의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관계인 결혼관계에 포함되는 내용들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일이 필요한데,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결혼 배우자를 만남으로써, 그 삶이 놀랍도록 보완이 되어 더욱 풍성해지고,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삶이 몰락되어 극심한 황폐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모호한 부분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단순하면서도 실제적인 지침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위한 성경적인 원칙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호하시는 능력에 대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시 17: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함으로써 얻은 원리와 원칙들만으로도 거의 대부분 우리의 의사결정이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환경의 도움 없이도 간단히 내려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기도의 가치를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성찰함으로써, 불순한 동기나 건전치 못한 기질 등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숨겨진 다른 동기가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주의가 요구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만을 묻고 다니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는 말씀이 참된 것은 틀림이 없지만,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는 말씀도 참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을 우리 주변에 두셨으며, 그들의 조언은 매우 유익합니다.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나, 부모님들, 또는 모임 안에 장로들은 우리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영적인 원칙들을 통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말해주는 상황적인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황적인 요소들은 위에 말한 지침들이 우선적인 자리를 잡고 있을 때에만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지침들을 따른 후에,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우리가 이미 배운 원칙들과 잘 들어맞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동적이기 보다는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행동한다면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적용해야 되는 원칙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상황적이고 환경적인 인도를 따르게 될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우리가 이미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에 정한 경우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상황적인 요소를 따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상황적인 요소들은 다른 모든 요소들이 고려된 후에 마지막으로 참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하나님의 뜻 감정은 또 하나의 위험 요소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경험 요소 가운데 필수적인 부분으로써,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의사 결정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사사기 14-16장에 나타난 삼손의 경험들은 감정이나 충동적인 마음이 일으키는 재앙에 대해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문제는 감정이 종종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결혼을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들을 미리 말해주는 모든 경고적인 조짐이나 징후들을 그냥 무시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한 후에 따라와야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44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간절히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한 후에야 기쁨이 온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기쁨은 정당한 발견 후에 따라왔으며, 따라서 이를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 혹은 그밖에 감정들이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될 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감정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일은 특히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위험스럽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큰 실수를 깨닫고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는 몇 주일이나 혹은 며칠밖에 안 걸립니다. 결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유쾌한 감정들은 비참하고, 불행한 관계 가운데서의 삶의 고통으로 쉽게 대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상상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결혼 관계를 그저 참고 견디면서 지속하고 있는 상태에 처한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현재와 같이 그저 황량하기만 할뿐이라고 느껴지게 되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생의 배우자를 찾는 일이 신비에 속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매일의 삶의 원칙들을 우리 삶에 적용해왔다면, 삶을 나눌 배우자를 찾는 일도 그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시다. 첫째, 우리는 한 사람과 일생의 관계를 맺는 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서로간의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만, 주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삶의 다양한 측면들은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가치를 같이 중요하게 보고 있는가? 미래의 배우자는 교회 생활과 성도간의 교제를 과연 가치 있게 보는가? 사회 생활이나, 믿음 안의 친구를 사귀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접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하는가?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삶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함께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다면,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러한 의뢰 가운데 자신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과 그것을 나누는 일을 고려해보기 전에, 우리 삶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목표가 비록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할 때,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함께 인생을 살기로 계획한 배우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로써 고려되지 않는다면 깊고도 지속적인 우정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가 요나단의 마음속에 다윗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진 듯해 보입니다. 이러한 존중하는 마음으로부터 평생의 우정이 꽃을 피웠습니다(삼상 18:1). 이러한 존중하는 마음이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한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의 말 가운데 최고의 칭송이 되었습니다(삼하 1:17-27). 이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상호 존중이 결혼관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면, 더욱 아름답고 복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 앞에서 우리 삶을 위한 타협할 수 없는 목표를 결정하고, 이러한 목표를 일평생 존중할 수 있는 어떤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배우자에 대한 인도를 주님께 구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인도를 구하며, 기도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다른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조언을 참고하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황적인 요소들을 고려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4. 관계를 세우고 형성하기 위한 행동지침 -A.J 하긴스 신중한 접근의 필요 여러분이 짐 비티가 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권면을 지혜롭게,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으셨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배우자로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 주님 앞에서 평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어떻게 그 관계를 진전시켜 가야 할까요? 당신은 어떤 접근방법을 택하시렵니까? 기도함으로 계속해서 주님이 모든 길의 걸음마다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급함이나 감정에 기초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상대편에게 당신의 관심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지에 대한 최선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예의 바르게 대화를 처음 시작하는 남자의 경우나, 혹은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하는 젊은 여자의 경우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삶 가운데 가장 민감한 영역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거절당하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젊은 형제가 자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면서 관계를 진전시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또한 더 좋은 관계형성의 기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당사자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예의 바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제 기간 중에라도 여러분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내함으로 결혼으로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당사자 모두가 계속해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추구해야 하며,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하는 것은 역시 잘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취하는 각 단계마다 주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는 일에 있어서 인내심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 인한 정신적인 압박감이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한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관계 진전을 위한 활동들 교제 기간 동안 많은 커플들이 관계 진전을 위해서 "합당하고 좋은" 여가 활동에는 무엇이 있는지 더 성숙한 크리스챤들에게 묻곤 합니다. 과연 교제 기간 동안 젊은 크리스챤 커플들이 결혼 약속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여가 활동이나 오락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후 결혼생활 동안 오래도록 추억이 될만한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적인 관심이야말로 음조를 맞추기 위한 첫 건반을 두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하고자 하는 활동(혹은 행동)이 결혼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현재 하고자 하는 활동이 단지 생각하기에 재미있을 것 같은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며, 상대방을 더 잘 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균형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활동에 매우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교제 중에 있는 커플은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습니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일을 하게 되면,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며, 이는 곧 서로의 관계 형성에 크게 도움을 주게 되고, 또 현재 교제 중에 있는 사람의 진정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크리스챤의 결혼은 2차원적이 아니라, 3차원적이라는 것입니다. 커플 두 사람의 관계는 주님과 그리고 여러분 각자와 삼각형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관계의 질은 곧 주님과 여러분의 관계의 질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과의 관계를 최상의 우선 순위로 두고 시작하십시오. 더 나이 많은 크리스챤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20대 초반인 경우, 더 나이가 많다는 말은 훨씬 더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더 성숙한 분들을 찾아 교제하게 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여러분을 격려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목적을 분명히 함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물론, 교제 기간과 약혼 기간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간은 함께 소풍을 가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시간이 다 매우 값진 시간입니다. 이 시기는 커플 쌍방 모두에게 결혼생활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들, 즉 자녀 문제, 재정 문제, 삶의 목표, 장래 희망, 그리고 삶에 있어서 영적인 우선 순위 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문제를 미루다가 결혼 이후에야 서로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대화 기술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타고난 재능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대화 기술은 따로 배워야 하는 분야입니다. 아마도 대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상대방을 참으로 존중해주고, 상대방이 말하는 바를 잘 경청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듣는 것이야말로 대화에 있어서 핵심요소입니다.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대화 기술과 함께, 여러분은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해결 방안을 찾고, 개발시키는 기술을 키우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고자 합니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떻게 대응하고자 합니까? 심지어 낭만적인 교제 기간 중에라도 겉보기에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불화나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일이 생길 때, 두 사람은 이 일을 주님 앞에서 크리스챤으로서 문제 해결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자라난 가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감정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자신의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까? 교제 기간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마음 속에 결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혼이란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음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주님 앞에서 결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험을 피함 서로에 대한 관계가 이제 상당히 진전이 되고, 서로에 대해 확신이 생기게 될 때, 이처럼 성공적인 관계형성은 "절제"라고 하는 일이 상당히 요구되어 집니다. 성공적인 관계형성은 때론 이제 내 스스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는" 무모한 생각으로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주일학교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가르칠 때, 여러분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가르치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제 마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다만 도망할 필요가 있는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황의 위험 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만일 제 자신을 믿는다면 그것은 제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시는 거룩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까? 오염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로 결정한 형제·자매님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참으로 기뻐하는 대상입니다. 거룩은 극단적인 상황, 즉 잘못된 상황 가운데 끝까지 가보자는 심사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은 관계 형성의 모든 단계마다 성경적이고 영적인 표준을 유지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에 대한 갈망과 나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지식은 위험한 상황을 피함으로써만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들을 피하십시오. 다음과 같이 경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이 많은 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도 같지만,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 형제·자매 여러분, 고린도전서 7:1-5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체는 결혼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순결을 지키십시오! 애정을 표현하는 것과 정욕을 자극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사랑은 결코 자기 만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5) - 편부모 문제 머레이 프렛트 -------------------------------------------------------------------------------- 편부모 문제는 다양한 환경에 의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각 경우마다 예기치 않은 특별한 고통과 상처가 남게 됩니다. 열왕기하 4:1절의 경우처럼, 배우자의 죽음은 편부모 문제를 일으키는 일반적이고 가슴 아픈 경우입니다. 또한 별거와 이혼도 오래전 하갈이 경험했던 것(창 21:14)과 같이 편부모 문제라는 슬픈 결과를 초래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편부모들이 경험해오고 있는 것처럼, 다말의 경우도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친히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창 38장 참조). 창세기에서 주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선언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편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둘이 아닌 하나, 곧 홀로 된다는 것일 것입니다. 홀로 책임을 떠안고, 한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하면서 다양하고 벅찬 의무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부모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홀로 울며 보채는 아기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고, 보다 큰 아이를 징계하기도 하고 양육하며, 또한 반항적인 십대와 대면해야 합니다. 후에 자녀들이 다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어 집을 떠나게 되면, 홀로 남아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편부모는 자녀를 홀로 기르고,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돌보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긴 밤을 배우자의 도움이나 조력도 없이 울어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새워야 하며, 이 일의 반복으로 인해 매일의 일과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데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고갈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빈자리로 인한 상처에 대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편부모는 자녀를 홀로 키우는 일로 인해 자녀들이 받게 되는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혼의 경우에 자녀들은 양부모로부터 서로 싸운 이야기를 양측으로부터 듣기 때문에 이중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편부모는 자기 나름대로의 편의를 따라 자녀 양육 기준을 설정하는 문제로 고민하게될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를 극단적으로 과보호하거나 아니면 아예 신경 쓰지 않고 풀어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조언과 조력이 없으면 균형 잡힌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의 삶에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또는 덜 중요한 일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다루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대의 경우 구원받지 않은 친구들과 그 집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친구 집에서 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이유가 매우 유감스러울 때도 있는데, 곧 자녀로 하여금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고, 또한 성숙하도록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지 집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주 이유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편부모의 상황이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사실일 때가 많습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가난과 정서와 생활의 염려에 관한 문제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편부모에게 있어서 더욱 큰 문제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과부에게 재정적인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욥이 말한 것처럼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정당치 못하게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욥 22:9)라고 말했지만, 욥은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욥 29:13)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돌봄의 정서적인 필요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편부모는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사실은 그들이 친교를 위한 모임에서 늘 제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이야기 속에서(눅 7장), 우리는 주 예수님이 그녀의 필요를 알아주셨고, 자기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돌려주심으로써,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도록 동정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편부모는 서로 터놓고 교제할 참된 친구를 필요로 하지만, 참견을 잘하거나 가십거리를 만드는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힘과 지혜과 인도, 그리고 도움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음과 같은 우리 구주의 약속이 없었다면 상황은 매우 절망적일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편부모의 정서 상태는 또한 매우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종종 독특합니다. 거기에는 절망감과 무력함이 어울려 극도의 불안 심리를 자아냅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 당혹감과 실패 의식 등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근심과 불안,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등은 마음의 평안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는 잠재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에 덧붙여 에베소서 1:6에 제시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붙드심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를) 거저 (받아)주시는바"(KJV 참조) 만일 편부모의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가 별거나 이혼의 경우라면, 거기에는 추가적인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양육과 후견에 대한 합법적인 투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쪽 부모를 자녀가 방문하는 일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그 자체 속에 자녀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위한 헌신된 삶을 사는데 어려움을 겪게될 잠재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편부모 상황은 한 쪽의 시간과 에너지를 크게 해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죄악되고 부정적인 행위를 발전시킬 위험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보복하고픈 감정에 휩싸일 수 있고, 심지어는 자녀를 협상의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쓴뿌리, 분노, 그리고 원한 등의 감정이 떠난 부모를 향해 표출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그 부정적인 행위나 생각을 깊게 하게 되면, 곧 우울증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과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쓴뿌리나 분노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신자는 그 생각 패턴이 빌립보서 4: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변화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 할 줄로 압니다. 결혼과 가정(6)-독신생활의 유익과 고통 레슬리 웰즈 -------------------------------------------------------------------------------- 1세기 이래로 허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고전 9:5)도 결혼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개역성경에 따르면 이 구절은 "나머지 사도들(the rest of the apostles)"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의 형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도들이 결혼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후 수세기에 걸쳐서 잘 알려진 주의 종들은 모두 결혼을 했습니다. 윌리암 캐리, 조지 휫필드, 존과 찰스 웨슬리, 허드슨 테일러, 데이비드 리빙스톤, 조지 뮬러,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 아도니람 저드슨, 디 엘 무디, 찰스 스펄전, 그리고 해리 아이언사이드와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틴 루터는 42세까지는 독신으로 있었지만, 후에는 전직 수녀였던 케이티 폰 보라 양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섬김을 위해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던 탁월한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1세기에 살았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더욱 최근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존 넬슨 다비, 인도와 페르시아의 선교사였던 헨리 마틴, 그리고 동시대 인물로는 아프리카 차드에서 선교했던 호주 출신의 존 올리와 캘리포니아 출신의 W. J. 맥클루어가 있는데, 이들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독신으로 남아서 주님을 섬김으로써 얻는 유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독신의 유익 첫 번째 유익은 마음이 나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인 사람은 영적인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생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주님을 섬기기 위한 일에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독신인 사람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가장 관련이 있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은 "…에 대하여는"이라는 구절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24절까지로, 혼인한 자들과 및 하나님이 복음으로 부르신 각 사람에게 부르신 그 상태로 지낼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25절부터 40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부분에서 25절부터 38절까지는 혼인한 일이 없는 처녀들에 대한 권면의 말과 39절부터 40절까지는 재혼하지 않은 과부들에 대한 말씀으로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소단락의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혼인하지 않은 남자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34절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여자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의 두 경우를 비교해서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장가가지 않은 형제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하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 자매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장가간 형제의 경우,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33절)하며 염려하게 되고, 시집간 자매의 경우에는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34下)하며 염려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너희로 하여금…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문자적인 의미로 '계속 곁에 앉아 있도록' 혹은 '자신을 부지런히 헌신하여'의 의미가 있음-W. E. Vine의 신약 단어사전 참조)하려 함이라"(35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의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 뿐 아니라, 그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전심 사역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사실 주님을 더욱 섬기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7절). 이에 처녀들에 대한 말씀에서 "(형제가)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28절)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헌신적으로, 또한 희생적으로 섬기기 원한다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은 독신생활을 하도록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결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독신상태는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는데 위험한 장소나 상황에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영역을 넓혀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독신인 형제는 더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그러한 곳일지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매 선교사의 경우 남편과 자녀들이 지속적인 테러의 위협을 받는 곳일지라도 기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적인 고난" 혹은 핍박에 대해서, "이런 (혼인한)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고 말하면서,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下)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젊은 형제들이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복음화되지 않은 많은 나라들이 현재 이처럼 전적으로 헌신된 일군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적진으로 뛰어들 준비가 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 때, 섬김에 있어서 또다른 유익은(이미 암시를 드렸지만), 주님을 섬기기 위해 움직이기 쉬운 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신인 형제는 주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정 문제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즉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집에 반드시 돌아올 필요도 없이 다른 포도밭으로 이동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주의 일의 최선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문제에 관한 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가 있으면, 그는 모든 것을 처분하고,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가는데 자유롭습니다. 주님이 어떤 사역에 그를 적합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더욱 용이한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의 경우에 이러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그들이 감당해야 할 짐은 더욱 무겁습니다. 같은 경우라도 독신인 형제는 자신의 몫만 감당하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감당해야 할 짐이 더욱 가볍습니다. 독신의 고통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물론 이상적이지만, 실제로 독신인 형제도 일상생활의 의무적인 일들을 감당해야 하며, 특히 아내의 몫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가사 일에 대한 시간을 줄임으로써, 주님의 복된 사역에 자신을 더욱 헌신하기 위한 계획들에 매진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어딘가에 살아야 하고, 그 집은 주님을 위한 하나의 간증이 됩니다. 그는 집안을 지저분하게 해놓거나, 소홀히 한 상태에서 집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집안도 돌보아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정돈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만, 항상 적당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쇼핑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바깥 허드렛일도 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옷을 세탁하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주의 일을 위한 시간은 기대한 만큼 그리 많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도 당면해야할 하나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은 어떤 문화에 있어서는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결혼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이러한 문화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아내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무슨 은밀한 죄악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도덕적으로 부패하거나, 혹은 피폐된 삶을 사는 사회의 범죄자로 오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집을 비운 부재기간 동안, 혹은 불규칙적으로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바로 그러한 증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증거나 간증은 효력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어려움 없이도 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 특히 여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계략을 써서 미궁에 몰아넣고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부정한 행위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경험은 영적으로 해로운 것이며, 심지어 주님을 위한 사역에 치명적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신인 형제는 섬김에 있어서 그러한 두려움을 잘 감당할 수 있지만,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일에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슬픔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거기서 위안을 얻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분야에 많은 동역자들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누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시련과 제반 문제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통한 마음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긴장과 그의 영을 압박하고 있는 걱정과 짐으로 인해 자신이 섬기고 있는 분야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있는 동역자와의 교제에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만, 또한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느끼는 마음의 평안도 더욱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은 아담에게 배필이 필요한 것을 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와가 창조된 이유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은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인 주님의 종은 예고된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각 경우를 충분히 고려해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결혼과 가정(7) - 결혼을 결정하기에 앞서 개리 N. 샤프 -------------------------------------------------------------------------------- 지금까지 우리는 결혼과 가정 시리즈를 연재해 왔는데, 이제 결혼전 상담이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매우 유익한 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조쉬와 카밀라 얘기 들어봤어? 그 두 사람 말야 무척 사랑스런 커플로 보였잖아. 서로 잘 어울리는 사이였던 것 같았는데….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해오고 있잖아!" "우리가 미리 알았더라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분명히 무언가 숨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패한 결혼에는 무언가 징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징후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가족과 성도들과 교회들은 더욱더 이러한 문제들과 그로 인한 당혹스러움에 봉착하고 있으며, 결혼이 깨어지는 재앙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러한 비극이 우리 가정들을 덮칠 때,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해결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고, 무능해 보이는 상황에 처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히 고백해야 할 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잘 준비되어 있는 결혼, 가장 잘 구비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을 오염시키는 문제들에 의해 우리는 전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준비라고 하는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상고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줄로 압니다. 1. 결혼전 상담 그 필요성 우리는 결혼 면허증을 획득하는 일보다 운전 면허증을 따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운전자를 위한 도로주행 연습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을 결혼에 완전히 헌신하기 이전에 상담을 받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일,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차량은 세심하게 관리하며, 과연 안전한지 잘 점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모양과 형편이 다른 도시나 고속도로를 운전해야 할 때,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자동차 정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혼 전에 취할 수 있는 모든 경계조치를 취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산산이 부서진 삶과 그에 대한 간증들은 우리가 다만 함께 사는 인생의 여로가 우여곡절이 많은 길이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만 했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가 상담해야 하는가? 그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만이 상담에 응해 왔으며,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상담을 시작하면,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결혼생활을 해보면, 상담을 받아야 하는 범위와 또 상담을 받는 시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부모로서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한 좋은 가이드라인과 안전장치 등의 성경적인 교훈들을 잘 따르기만 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더 나이 많고, 경건한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는 부분을 맡도록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딛 2:3-5). 제가 믿기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적으로 빈틈없고 본이 되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평판이 좋은 성도들도 상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상담에 응할 수 있는 인격과 성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아보고 책임지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지역교회의 장로들의 자격과 같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감독들은 그들 사역의 결과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상담할 것인가? 충분한 기도와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 체계적인 상담이 필요합니다. 상담이 시작되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잠 18:13). 제가 확신하는 바로는 미리 준비된 질문지에 의해 체계적인 질문이 이루어지고, 문제점들이 충분히 검토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기록된 것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약 1:19 참조). 무엇을 상담할 것인가? 결혼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문제는 그저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에 다루어야 할 주제들은 다양하지만,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이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필요성. 2. 결혼과 가정을 세우는 원칙과 우선 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 3. 개인의 독특성 및 서로를 용납하는 일. 4.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 및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성 차이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담긴 그 엄청난 잠재 력. 5. 결혼의 필요성 - 세 종류의 사랑: 에로스(결혼 관계를 통한 친밀성), 필레오, 그리고 아가페, 그 차이점과 독특성이 결 국 사랑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룸. 6. 가족계획 - 자녀의 수. 7. 욕구의 충족 - 욕구의 다양한 측면이 고려되어야 함. 8. 역할, 서로를 존중함과 책임 - 여성의 위치와 남성의 위치. 9. 의사 결정 - 의사 결정에 있어서 쌍방이 차지하는 비중. 10. 배우자 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길 것인가? 아니면 원수로 여길 것인가? - 선택 사항! 11. 의사소통 -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이해함. 12. 갈등과 해결 - 무엇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가? 부지 중에 "소리를 지르며" 싸울 것인가? 아니면 신사적으로 "그래요. 함께 풀어봅시다!"라고 할 것인가? 용서에 대한 서로의 책임. 13. 성생활 - 이 부분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음. 그러할 때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게 됨. 14. 서로에 대한 헌신. 15. 재정 및 그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 숙고할 부분 한 젊은 부부가 제게 자신들을 상담해준 상담사가 서로에게 러브 레터를 쓰도록 조언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느끼고 있는 특별한 감사와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을 흐뭇하게 할 뿐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문장은 그때 상담사가 그 부부에게 읽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또다른 제안을 말씀드리자면, 각자 개인적인 영적 성장 기록을 하도록 권하고 영적인 목표 등을 써보도록 함으로써, 함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에 대해 참으로 열리게 될 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이 되겠습니까! 함께 힘쓸 일(미 6:8) 1. 정직 - 결혼할 상대와 상담자와 및 주님 앞에서 서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일의 필요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겸손 - 결혼과 의사소통 모두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태도 한 가지는 "우리"라고 하는 연대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자기 중심과 교만과 자기 주장으로 점철된 "나" 혹은 "내 생각" 때문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는 신앙 태도를 함양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태도를 바르게 고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 소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3. 소망 - 결혼과 이를 통한 연대감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그렇게 하셨고, 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값진 축복들을 경험하도록 도우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4. 들을 수 있는 귀와 순종할 마음의 자세 -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준비를 하십시오. 상담 참여 횟수 이것은 이처럼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상담자를 포함하여 개인들의 수용성, 즉 시간을 내는 문제라든가, 상담을 통한 문제 해결 정도 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전심 사역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은 그 일의 특성 때문에 보통은 필요로 하는 만큼 충분히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주의 양 무리를 맡은 목자는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 재정 문제 이 부분도 결혼 전에 충분히 의논되어야 하는 영역으로 이미 말씀드린바있지만,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통계들은 재정 문제가 별거나 이혼사유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탐욕과 탐심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따라서 재정 문제가 크던 작던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점차 물질주의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많은 결혼이 부채의 짐을 안고 시작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비 외에 추가된 여러 금융 비용들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수입을 초과하여 외식 비용이 지출되고 있다면 체면 유지는커녕, 오히려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과도하고 무책임한 소비는 다만 재앙을 부를 뿐입니다. 질병이나 예상치 못했던 사고는 잘 계획된 가계부에 차질을 줄 수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경고의 말씀이 히브리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선언하신 후에, 곧 이어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최고한 자원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계십니다. 즉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날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큰 확신이 따라 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매우 실제적인 영역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재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부분과 우리가 한 몸 지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를 위한 부분과 우리가 진보를 보기 원하는 주의 사역을 위한 부분을 따로 떼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라고 하는 원칙을 망각하고,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물질적인 축복을 위한 위대한 회계사이시며, 경영자이신 분으로 마땅히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번성케 해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정직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심지어는 미래를 위해 예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의 마땅한 바입니다(딤전 5:8). 적당한 수입과 여러 가지 혜택들이 보장된 좋은 직장을 갖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와 동시에 주님은 우리에게 때에 맞는 하나님의 요구를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균형감각을 갖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시간외 근무를 많이 함으로써, 아내나 가족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재정 예산과 균형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결혼과 가정(8) - 친밀함으로의 여행 데이빗 올리버 -------------------------------------------------------------------------------- "그 사람과는 대화가 되질 않아", "우린 서로 통하질 않아", "그는 전혀 이해를 못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이러한 말들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5)가 돌아다닌 흔적을 보여주는 발자국들입니다. 무언가 부부간의 기쁨의 원천을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주님과의 깊이 있는 사귐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요 15:5).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이 땅의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관계인 결혼관계에 설레는 감정을 가져다줍니다. 결혼의 주춧돌인 사랑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갈 5:22)에 의해 꽃을 피웁니다. 친밀함은 결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숭고한 목표입니다. 친밀함은 육체적·정서적·영적인 연합을 통해서 실현되는 실체입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의 주된 주제는 곧 부부가 서로 나누는 순결하고, 친밀하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사랑입니다. 이 "노래 중의 노래"(아 1:1)는 하나님과 사람,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엡 5:32) 사이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그러한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상적인 관계가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지, 아가서에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의 부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반면에, 신부의 부족함은 교훈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결혼관계에 있어서 결코 어느 한쪽에만 잘못이나 결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결혼관계를 발전시킬 주요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남편에게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상호간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 자체만으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보존하며, 향유하는 일에는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필수적입니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은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대화의 문이 닫힐 때 아가서에 보면 관계의 발전에 방해를 받는 장면이 두 번 나타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아가서 3:1-4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자의 존재를 당연히 여겼는지, 그녀는 너무 바쁜 나머지 그의 필요에 반응하지 못한 것 같이 보입니다. 물론 앞서서 그는 자신의 기대하는 마음을 이미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아 2:14)고 표현했었습니다. 하지만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부부간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대화는 그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를 통해 사랑이 성숙되어지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을 나누는 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깊어 가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신뢰하는 친밀함은 결혼관계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결코 처음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초기에는 다만 친밀함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존재하며, 그 목표를 향한 자원함과 약속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목표를 향한 움직임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기대들에 대해 함께 대화하며 그러한 기대들에 서로 반응할 때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경청이야말로 배우자의 욕구를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는 말씀은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킬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를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인도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헌신이 없는 결혼은―그밖에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로―의미 있는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화에 있어서 두 번째 실패는 아가서 5:2-7에 나타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사랑하는 자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해 신부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감싸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아로 가득했습니다. 이기적이지 않는 것, 곧 이타심이 대화에 있어서 두 번째 열쇠에 해당합니다. 그저 나 자신의 관점에서만 결혼관계를 바라보는 것은 대화를 제한합니다. 다른 관계에도 그렇듯이, 부부 사이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쌍방이 동시에 듣는 것은 분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자의 말에 반응하며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임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바로 그 순간에 대화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배우자의 필요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선 쌍방간에 자신의 필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배우자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하는 권리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섬기겠다고 하는 선택입니다. 배우자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자의 필요를 알아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결혼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를 닮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3).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경청이야말로 조화를 이루는 열쇠입니다. 경청 여부에 따라 배우자의 영적·정서적·사회적·경제적·육체적 필요들이 채워질 것도 결정됩니다. 대화는 종종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손을 붙잡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침묵이 더욱 풍성한 표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침묵은 다른 한편으로 파괴적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 하거나, 혹은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방편으로 침묵을 사용하는 것은 대화에 있어서 두 가지 열쇠 모두를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할 것을 택하는 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선택입니다.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한 침묵은 자신의 필요를 알리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남편이 감정이 격발되어 화를 낼 때에라도 아내가 잠잠히 순종하고 따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내들은 남편의 원자로의 시동 장치가 막 가동되는 순간, 남편을 대하는데 있어서 친절하고 지혜롭게 행동하기보다는 움츠러들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 남편이 남편 자신과 결혼생활에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꼴이 됩니다. 그 어간에 아내들은 기대하고 존경했던 남편에 대한 실망을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남편에 대해 원한을 쌓게 되어 부부간의 친밀감을 제한하게 됩니다. 남편이 격분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필요를 다루고 해결하고자 남편 눈앞에 들이대서는 안됩니다. 너무 나중은 아니더라도, 전처럼 위협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합당한 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는 것과 대화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만일 서로의 필요를 배려해주는 마음과 비이기적인 마음이 대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면, 말 그 자체는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듣는 사람이 대화 중에 사용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전혀 대화가 아닌 것입니다. 연료 탱크에 기름 채우기 언어는 연료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화를 친밀함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이탈리아 형제를 알고 있는데, 그는 스페인 이발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둘 다 라틴계(Romance) 언어이기에 서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연락(聯絡: connect-삼상 18:1 참조)"되지는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사랑의 밀어(romance: 필자는 여기서 라틴어를 뜻하는 'Romance'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뜻하는 'romance'가 같은 단어로 되어있음에 착안해 언어 유희로 부부사이의 언어생활에 관한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다-역자주)로 말한다면, 그들 역시 서로 연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남편들은 남성 언어로 말하고, 아내들은 여성 언어로 말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배울 때까지, 대화는 이루어지질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서로 다른 역할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공동의 책임을 주셨지만(26-28절), 2장에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성취하기 위해 각각의 구별된 역할을 주셨습니다(남자는 15-20a절, 여자는 20b-24절). 아담은 가정 밖의 영역을 돌봐야 했고, 하와는 가정 안의 관계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남자는 행동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데, 행동의 언어란 효과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에 대한 분석이나, 성취의 결과로 성공여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감정의 언어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목표달성을 위한 편안한 방법의 강조나, 관계에 미치는 영향으로 성공여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남편은 결혼관계 밖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취함으로써 중요성의 개념을 생각합니다. 반면, 아내는 결혼관계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취함으로써 안전의 개념을 생각합니다. 남자의 언어에 있어서, 성취는 A에서 B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언어에 있어서, 성취란 여행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에게 계획이란 A에서 B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을 발견하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여행을 하는 동안 경치 좋은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성취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성취를 증명해주는 보상(돈, 지위, 완전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자들은 "성취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단지 "나는 결과에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의 언어로 성공은 "내가 선두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자의 언어로는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틀림없이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 언어 모두가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퇴색되어 왔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남녀 각각의 역할들에 알맞는 언어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또 결혼의 친밀함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부부는 각각 서로의 언어를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서로 배우자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매력적인 사랑 표현 아가서에서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다양한 로맨틱한 언어로 서로의 사랑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적어도 다섯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가서 1:8에서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9-11절과 15절에서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현대의 애정 표현으로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와 같이, 사랑하는 자를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말들이 배우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낮(아 1:7)과 밤(1:13)같은 뜻 깊은 시간으로도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와 같은 표현은 단어 자체가 명백하게 애정을 듬뿍 담은 표현입니다. 아가서 1장 8절("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과 11절("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에 나타난 친절한 행동은 그 사랑하는 자가 자기 배우자를 돌보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가 그녀를 자기 잔치 집으로 데리고 갔을 때(아 2:4), 그 사랑하는 자는 적합한 선물을 주면서(상대방의 입맛, 혹은 기대에 맞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은 사랑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사랑의 표현들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것들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순서대로 열거한 다섯 가지 표현들을 가장 효과적인 것부터 그렇지 못한 것까지 차례대로 생각해보십시오. 120가지의 조합이 가능하고, 각 조합에 잘 맞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로맨틱한 어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결혼이라고 해서 부부가 같은 로맨틱한 어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만원 상당의 선물이 자기 사랑을 표현하는(적합한 선물을 주는 것) 남편의 방법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실제로 남편의 사랑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적합한 선물을 받는 것보다 격려의 말이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정이 가득한 마음으로 경청할 때, 우리는 배우자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만("왜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거죠?"), 소망("저는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쓰레기를 치워주시길 바래요")과 인정("당신이 제 손을 잡을 때면, 정말 좋아요.")의 말들이 배우자의 마음을 아는 데에 실마리가 됩니다. 배우자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관계를 원활하게 해줍니다.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인지 알 때에,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의 숭고한 목표로 나아가게 됩니다.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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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 알버트 N. 마틴
기록:알버트 N. 마틴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알버트 N. 마틴 전적인 무지와 완전한 무시가 비극적이지도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다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가 있다. 황소가 녹색 풀을 먹고 흰 우유를 내는 것에 대해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우리들 중 거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유를 즐긴다. 우리들 중 다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전적으로 무지하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설명해보라고 강요받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만 무지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중 대부분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다; 즉 우리의 무지와 무시는 비극적인 것도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지와 무시가 비극적이고 치명적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다음의 질문에 답할 때이다.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누구인가?" 다시 말해, 성경에 의하면, 한 남자가, 여자가, 소년 혹은 소녀가 언제 "크리스챤"이란 이름을 합당하게 가질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가 진실한 크리스챤이라고 가볍게 확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거짓 결론은 비극적이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질문에 대한 성경 답안의 4가지 면을 당신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 의하면, 크리스챤은 그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와 실제적으로 직면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챤 믿음을 세상의 다른 범주의 것들과 구별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는 크리스챤정신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죄인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근접한 탄생을 알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기록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누가복음 5:31-32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스쳔이란 그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와 실제적으로 직면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 각 한사람 한 사람은 죄와 관련하여 2중의 개인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는 나쁜 기록(bad record)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나쁜 마음(bad heart)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항과 죄로 인한 그의 타락의 비극적 결말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 계시록까지를 통하여 내내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추적해 간다면, 우리는 성경이 죄에 대한 교훈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모든 것을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범주- 나쁜 기록의 문제와 나쁜 마음의 문제-로 요약하는 것이 결코 과도한 축약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쁜 기록의 문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로 인한 인간의 범죄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우리 앞에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용어를 채택하였다. 우리가 지상에 어떤 개인적 존재를 가지기 전에 우리는 나쁜 기록들을 오랫동안 획득해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모두"가 언제 죄를 지었는가? 우리는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온 인류의 표상으로 지명되었다. 그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죄인되었고 그와 함께 그의 첫 번째 죄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하였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죄없이 창조되었으나; 아담이 죄를 지은 순간부터, 우리 역시 유죄로 판결 받았다. 우리는 그와 함께 그의 첫 번째 죄에 가담하였고 우리는 정죄 아래 있는 종족 중 하나가 되었다.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가 태어난 이후, 우리 자신의 개인적 죄과들을 통해 우리에게 죄를 가중시켰음을 말씀하신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신다; 모든 개별 죄는 죄를 가중할 뿐이다. 천국에서의 우리의 기록은 형편없는 기록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불변하는 기준으로 우리 인간의 모든 경험들을 관측하신다. 이 기준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 영혼의 바로 그 동기까지 다루신다 - 바로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부당한 화를 발하는 것이 살인의 시발점이며, 음욕을 품은 시선이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5:22, 28). 하나님은 상세한 기록을 보유하고 계신다. 그 기록은 심판의 날에 펼쳐질 "책들" 사이에 있다(계20:12). 그 책들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기준에 반대되거나, 혹은 그 기준에 맞추는데 실패하거나 혹은 그것을 범했던 모든 생각, 모든 동기, 모든 의도, 모든 행동, 그리고 모든 인간의 경험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나쁜 기록- 우리가 지은 죄에 관한 기록-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진리 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실질적인 죄에 대한 실질적인 범죄를 가지고 있다. 전 인류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롬3:19). 당신 자신의 나쁜 기록의 문제가 뜨겁고, 간절한, 개인적 문제가 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아버지 아담이 죄인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죄인이라고 판결하셨던 진실과, 그리고 당신이 완전한 거룩, 공의, 순전함 그리고 의로움에 반하여 언급했던 모든 개별 단어들에 대하여 당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신 사실과 직면한 적이 있는가? 그분은 신성한 소유권에 대항하여 당신이 만지고 취했던 모든 물체들을 알고 계신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항하여 말한 모든 단어들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분 앞으로 호출하셔서 당신의 영혼에 죄에 대해 인식시켜왔던 그분의 법에 반대하는 모든 개별 행위에 대해 설명할 것을 당신에게 요청하실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 사실들이 당신을 깨뜨린 적은 없는가? 그러나 이 나쁜 기록의 문제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부가되는 문제-나쁜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리의 죄 문제가 우리의 행위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담이 죄인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뿐 만 아니라 그는 또한 그의 본성에서 흠있고 타락되었다. 이 흠은 예레미야 17:9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수님은 막7:21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후 매일 매일 모든 신문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죄상들을 열거하셨다 - 살인, 간음, 악독, 교만. 예수님은 이것들이 오염된 우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퍼올려지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사회의 압력과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의해, 살인과 간음과 교만과 도적질이 나왔다"고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하라. 그것은 다만 우리의 소위 사회학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범죄와 반항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의 상태"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본성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성경이 "심히 부패"하다고 설명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불의의 출발지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7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이, 즉, 하나님에 의해 결코 정화된 적이 없는 마음은 일종의 원수이며; 그는 그것이 원수 자체라고 지적했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나니".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의 마음의 기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반대하여 형성되는 꽉 쥐어진 주먹처럼 그려질 수 있다. 이것은 나쁜 마음-죄를 사랑하는 마음, 죄의 근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의 내부 문제이다. 당신의 나쁜 마음의 문제들이 당신을 괴롭게 하는 개인적 관심사가 된 적이 있는가? 나는 당신이 인간의 죄성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이론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죄성과 죄인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내 질문은 당신의 나쁜 기록과 당신의 나쁜 마음이 당신에게 있어서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문제가 된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당신은 죄에 대한 실질적이고,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양심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공포를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성경적 크리스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중하게 마음으로 부딪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죄의 두려움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나쁜 기록과 나쁜 마음을 양심으로 자각하게되는 시간의 길이도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지만, 그러나 위대한 의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인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치유를 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 성경적 크리스챤인가? 2.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유일하게 거룩한 처리법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 죄인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음을 성경은 거듭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처방을 준비하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KJVB-요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모습은 당신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당신 자신을 치유할 때 종교적 자기-도움의 계획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신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참된 도움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아준다는 것이 또한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신조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태까지 오셔서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방이 최소한 세 가지 단순하지만 심오하게 경이로운 초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우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한 분(a Person)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한 거룩한 처방을 진심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은 그 처방이 마치 다른 철학이나, 제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일련의 사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한 분(a Person)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KJVB-요3:16);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14:6) 죄를 위해 준비된 신성한 처방은 한 분(a Person)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며,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신성(神性)에 진실된 인간의 본성을 연합시키며 인간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이시다. 여기 바로 인간의 나쁜 기록과 인간의 나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처방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구세주로서, 두 본성이 그 분 안에서 영원히 연합되었다. 만일 당신의 개인적 죄 문제가 성경적 방법으로 처리된다면, 오직 당신이 주 예수님 개인과 개인적 관계를 가짐으로 인해 치유되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특성이다: 다급한 죄인이 구주의 은혜에 충만하여 구주와 연합되고,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구세주는 직접적으로 복음 안에서 화목시키신다. 그 실상이 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좋은 소식의 영광이다. (b) 둘째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저주받은 나무 사형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에 연관된다. 우리가 성경으로 향할 때, 독특한 방식의 거룩한 처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중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희생양이라는 구약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1:29)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복음의 신실한 가르침은 골고다의 죽으심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바울은 예수님 죽으심의 기록이며 그에 관한 메시지라고 기록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이 고린도-주지주의와 그리스 이교 철학의 중심지-에 갔을 때 그는 그들의 수사학적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했다. 나무 사형틀에서 피흘리심을 추상적 사상이나 혹은 종교적 상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리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의미한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나무에 못박히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죄를 전가시켜, 사람들의 죄를 쌓은 곳이다. 그 사형틀에서 대신하여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은 막연하고, 애매한 자기에게- 주는 사랑의 상징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여전히 죄인들을 용서하심을 보여주는 기념비이다. 사형틀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의 죄들을 예수님에게 전가하시고 그분의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그분의 아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 나무 사형틀 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마27:46)고 절규하실 때까지 가차없이 그분의 분노의 잔을 쏟으셨다.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죄들과 내 죄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지옥의 바깥 어둠 속으로 그분의 아들을 몰아넣으심을 온 인류에게 알게 하시려고 완전한 흑암으로 하늘을 덮으셨다. 예수님은 범죄한 죄인의 자세로 사형틀에 달리시고; 그에게 사회는 오직 하나의 판결을 내렸다: "그를 떠나라" - "그를 못박으라" - "그를 죽여라" - 그리고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신다. 인간들이 볼 수 있는 극장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예수님이 그분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내려져야 할 모든 맹렬한 분노를 담당하도록 하셨다. (c)셋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법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양심에서 자각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은 바뀌게된다. 우리는 티끌과 같은 작은 벌레로, 그 생명과 호흡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피조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천사들이 하나님께 반항하였을 때 그들을 영원한 어둠에 회부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히 도전하여 왔음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과오들, 인간의 마음들의 부정함의 표출을 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 후에 우리는 말한다, "오 하나님, 어찌 당신이 공의로우실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제 죄가 받아 마땅한 것을 저에게 주신다면, 저에게는 분노와 심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용서하시고 어찌 여전히 공의로우십니까? 어떻게 당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대항한 그 천사들과 함께 영벌에 저를 처하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실제로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죄사함이라는 가장 벅찬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 그 때, 인자, 대신 희생되신 한 분, 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치료법을 준비해놓으셨다는 것과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예수님의 방법에 다른 조건들이 자리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나는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확실히 나는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속박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리게 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이 주시는 아름다운 은혜의 초청을 보라! 우리는 천국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정당하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말씀 안에 자유로운 은혜의 초청장을 가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두 가지의 거룩한 단어가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 예수님의 최초의 사역에 관하여 기록된 바에 의하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15)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다(행20:21). 3.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심으로 그 조건을 채우고자 하는 자이다. 거룩한 치유법을 얻기 위한 거룩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한다. 이것들을 분리된 개념으로 논해야하지만, 회개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해서 혹은 믿음을 회개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실한 믿음은 회개로 충만해있으며, 그리고 진실한 회개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다. 거룩한 죄 처리법을 올바르게 적용할 때, 그것들은 서로 흡수되며, 당신은 믿는 회개자 그리고 회개하는 믿는 자를 발견하게 된다. 회개란 무엇인가? 숄터 카테치즘(Shorter Catechism)의 정의는 탁월한 것이다: "삶에서 회개란 한 죄인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가책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이며,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과 증오심과 아울러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순종하기 위해, 이후로 노력하며 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게 된다." 회개는 먼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탕자이다. 그의 아버지 지배 아래 집에 있는 것보다 그는 자신의 상속을 먼저 받기를 청한 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고 거기서 그는 그것을 낭비했다. 그의 죄들을 통하여 궁핍하게된 그는 자신에게 돌이켜 말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충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탕자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시를 쓰고 또는 그것을 집에 계신 아버지께 전보로 보내지 않았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20). 그는 죄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버리고, 그는 그 삶의 방식들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무엇이 그를 집으로 데려간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올바른 규칙과 넓은 마음을 가지신 은혜로운 아버지가 그곳에 계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 여기서는 모든 것들이 나빠져갑니다. 밤마다 제 양심은 발작을 합니다. 치료할 수 있도록 제게 돈을 보내주십시오 아니면 제게 한 번 오셔서 저를 좀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는 단순히 낫는다고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나아야만 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먼 나라를 떠났다. 그가,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라고 했을 때, 우리 주님의 그림 속에 아름다운 일필이 가해진 것이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그의 아버지께 뽐내며 오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에 와서, 잠시 기도하고, 자기들이 내린 결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것은 진실한 회심과는 상관이 없다. 진정한 회개는 위대하고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그리고 내가 그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죄를 떠나 그것으로부터 등 돌려 순전히 돌아온다면, 만일 진실로 나를 위한 은혜가 존재할까하고 의아해할 때, 놀라고 놀랍게도! - 아버지께서 나를 맞아 주시고, 화해의 사랑과 나에 대한 은혜가 넘치는 그분의 팔을 벌려주신다. 나는 감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미리 용서해 놓으시고 속해주시는 사랑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을 감싸주신다. 그러나 탕자가 여전히 돼지우리에서 살고 음녀의 팔 안에 있을 때는 탕자에게 그분의 팔을 던져주시지 않았다. 그 영혼이 세상과 결혼하고 세상의 방식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개인적 삶에서, 혹은 당신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혹은 그 체제의 신성함을 그토록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신의 사회적 삶에서, 당신은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들 중 몇사람은 간음하고 있거나, 혹은 몹시 언짢아있거나, 혹은 텔레비젼 속의 물건들을 선망하거나, 혹은 당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영화에 빠져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당신은 돼지우리에 살면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집에 다닌다. 부끄럽지 않은가! 당신의 돼지우리와 당신의 죄의 소굴들을 버려라. 당신의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행태들과 행위들을 버려라. 회개는 당신의 죄를 중단할 만큼 충분히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당신이 여전히 당신의 죄들과 함께 동거하며 살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회개는 죄로부터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며, 그것은 항상 믿음과 함께 동반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복음에서 그에게 제시된 대로 예수님에게로 영혼을 던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혼이 갈급할 때 생수되시는 예수님을 마시는 것처럼, 믿음은 예수님을 마시는 걸로 비유된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리고 예수님께로 도피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유사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려울 때 구세주가 갈급한 죄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나에게 주실 것을 믿고 나 자신을 구세주께 던지는 것이다. 믿음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거기에는 예수님과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은 죄들에 대한 완전한 용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내 것이 된다. 그분의 죽으심이 내 것으로 간주된다. 그 분 안에 성령의 선물이 있다. 양자됨, 정화, 그리고 완전한 영광스러움 그 모든 것이 그 분 안에 있다; 예수님을 택함으로 인한 믿음이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에 대해 준비하신 거룩한 처치법을 획득하기 위해 거룩한 조건들을 전심으로 충족시키려는 사람이다. 그 조건들은 회개와 믿음이다. 나는 종종 그것들을 경첩삼아 구원의 문이 회전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첩은 두 받침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는 문에 달려있고 다른 하나는 문설주에 달려있다. 그것들은 핀으로 함께 달려있고, 그 경첩 위에서 문이 회전한다. 예수님은 그 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는 누구도 그분을 통하여 들어갈 수 없다. 오직 회개로만 구성된 진정한 경첩은 없다.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 회개는 세상법적인 회개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죄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처럼, 믿음으로만 이루어진 진정한 경첩도 없다.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믿음이란, 내가 죄 속에 그대로 있는 상태(in)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죄로부터(from)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은 분리할 수 없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고하신 말씀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4.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챤은 회개와 믿음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 진실임을 자신의 삶에서 증거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26:20)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2:8-10)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한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자라게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 있게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14:21-24)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순종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순종을 생산하지 못하는 믿음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사랑의 역사는 아름다운 별밤에 앉아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에 대해 시를 읊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진실한 믿음은 성경이 당신에게 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당신이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어머니에게 순종하게 하거나, 혹은 당신의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을 사랑하게 하거나 또는 당신의 학교 혹은 당신의 일터로 돌아가서 당신의 동료들의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의로움을 위한 입장을 취하게 한다. 진정한 믿음은 당신이 기꺼이 바보 혹은 미쳤다는 소리를 감당하게 하고- 기꺼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소리를 감당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윤리와 도덕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당신은 기꺼이 인간 생활의 순결과 존엄을 믿으며, 낙태를 반대하고 혼전순결을 중시하는 당신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오, 그래, 나는 내가 나쁜 기록과 나쁜 마음을 가진 죄인임을 안다. 나는 죄인들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치료법이 예수님과 그분의 나무 위 사형틀에서 흘리신 피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값없이 주어진 것도 안다. 그것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것도 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회개하고 믿는가?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다면, 당신은 그 고백을 예수님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9)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당신은 크리스챤이라는 당신의 고백이 성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삶이 회개와 믿음의 열매들을 보여주는가? 예수님께 접붙힌 생활, 예수님께 순종하는 생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들을 생활로 옮기는가? 당신의 행동들은 예수님의 방식에 충성함으로 구별되는가? 완전히는 아니다-결코! 매일 매일 당신은 기도한다, "주님 저같은 자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당신은 또한 기도할 것이다. "제 삶이 주를 위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혹은 다음 찬송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수여, 내 사형틀을 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릅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예수님을 따른다. 진실한 성경적 크리스챤은 얼마나 되겠는가? 당신의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골방에서 그 답을 생각해보도록 당신에게 맡기고 싶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항상 그 답을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불원간 찾아올 임종시 평안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외에는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말라. - 아멘 -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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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남자와 여자 무엇이 다른가?
[가정클리닉]남자와 여자 무엇이 다른가? 추부길 쇼핑갈 때마다 싸우는 부부 “우리 부부는 백화점갈 때마다 싸웁니다. 남편은 저더러 뭐 쓸데없이 그렇게 시간 보내느냐면서 짜증을 냅니다. 그럴 때마다 화가 얼마나 나는지요. 오랜만에 이런데 왔으면 함께 시간 보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도대체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쇼핑갈 때마다 싸운다고 그러면서 하소연하는 이 부부. 쇼핑 때문에 싸우는 부부는 이 부부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부부들이 갖는 공통적인 싸움 주제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싸울까? 한마디로 쇼핑에 대한 남녀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는 쇼핑이라는 것이 사야할 물건을 사러가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물건만 빨리 빨리 사면 더 이상 그 백화점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TV도 보고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곧 남자에게 있어서 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 쇼핑하는 것도 일이고 집에서 TV나 보면서 그냥 퍼져서 누어있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우선 쇼핑이라는 것 자체가 단지 물건 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쇼핑이라는 것은 아이 쇼핑(Eye Shopping)도 당연히 포함되고, 더불어 백화점 자체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쇼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물건만 사고 그것을 떠나려고 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여자는 물건도 사지만 여기 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요즘 옷들은 어떤 것들이 유행인가, 또 요즘 식탁이나 주방기구들은 어떤 것들이 나왔나, 저런 것들이 우리 집에 이렇게 설치하고 저렇게 놓아보면 참 좋을 것 같다든지 온갖 행복한 상상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뿐인가? 사지도 않을 것이며, 살 돈도 없지만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 보면서 동화속의 공주, 드라마 속의 신데렐라가 잠시라도 되어 본다는 것 자체가 신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자신 혼자 즐기기 보다는 그러한 행복에 남편도 동행해 주기를 원하고 그러한 행복을 남편하고 함께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자신이 그런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남편도 인정해 주고 동의를 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지도 않을 옷이지만 아내가 백화점에 걸린 옷을 한번 입어 보았을 때 “역시 당신은 예쁘다, 탤런트 누구보다도 더 예쁜 걸.”하는 칭찬을 엄청나게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사지도 않을 옷을 뭐하러 입어봐? 백화점 직원들 미안하지도 않아?”하면서 힐난하는 소리나 해댄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열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백화점에 갈 때 싸우지 않는 방법은 딱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 곧 입구에서 찢어진 다음에 한 시간 후쯤에 만나자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찢어지면 남편은 당연히 자신이 관심이 많은 전자 제품이나 운동기구 코너를 돌아본다든지 지나가는 여자들 흘낏 흘낏 쳐다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찢어진다는 것은 평생 서로에 대해 모르고 살겠다는 무지한 결정이라 할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아내는 가능한 한 쇼핑 시간을 줄이고 남자는 아내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 주고 아내하고 함께 감정을 느껴준다는 생각을 하면 된다. 그것이 간단한 헌신이지만 부부에게는 엄청난 행복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그렇게 서로가 배려를 해 줄 수만 있다면 부부는 날마다 깨가 쏟아지는 행복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알아야 면장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부부 “남편이 운전하고 가다가 저보고 지도를 봐달라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이 상합니다. 사실 저는 지도를 잘 읽을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대학까지 나온 여자가 지도도 못 본다고 짜증내는 남편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지도 때문에 싸운다. 아니 지도 때문에 이혼 위기까지 가는 부부도 있다. 남편이 운전을 하고 가다가 아내에게 지도책을 봐 달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몇 번 국도로 가고 있는지, 얼마쯤 더 가야 어디가 나오는지 물어 본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지도에 대해 까막눈인 아내는 이리 돌려보고 저리도 돌려 보지만 그 지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쩔쩔 맬 수밖에…. 그럴 때마다 남편의 무시가 아내의 가슴을 찌른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하실 때부터 공간 지각력에 차이가 있도록 만드셨다. 남자는 뛰어난 공간 지각력 때문에 차 두 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도 T자 주체를 쉽게 해 낸다. 그러나 여자들은 보통 대여섯 번 정도는 왔다 갔다 해야 겨우 집어넣고 그것도 삐딱하게 세워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보면서 남편은 말한다. “당신은 왜 그렇게 운전을 잘 못하느냐, 좌측으로 핸들을 돌리라니까, 아냐, 우측으로…. 정말 짜증나네….” 아내가 그렇게 주차를 잘못하는 것은 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여자들의 공통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을 볼 때도 그렇다. 관광지에 가보면 남자들은 지도책을 보면서 금방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식별해 낸다. 그러나 여자들은 지도책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 보지만, 심지어 엎어 보기도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저기가 어느 것인지 분별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것이 여자이다. 그러니 쇼핑센터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는 어디에 주차를 했는지 자주 헷갈리는 것이 여자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여자들의 공간 지각 능력이 남자의 그것과 비슷한 사람은 10%도 채 안될 정도라고 하니 그 차이로 인한 부부갈등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기술 분야에 남자들의 취업이 많은 것이다. 실제로 보면 집에서 남자들은 그 쉽다고 생각하고 아이들도 척척해내는 비디오 조작하기도 여자들은 참 어려워하고 아예 만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남자들은 여자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쭐대는 남자들도 참 많다. 그러나 이 모두가 참으로 어리석은 남자들의 전형이다. 남자가 공간 지각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은 그런 일들을 남자들이 주로 하라는 창조자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자들은 다른 부분에 할 일이 많으니까 그런 일들은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인트 맨(첨병)의 역할은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한다. 기계를 만지는 일도 당연히 남자 몫이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그런 일을 시키거나 부탁한 것 자체를 미안해하는 남편이 정상적이지, 그런 일 못했다고 아내를 무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남자들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여자는 그런 일에 익숙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남자들이 내가 먼저 솔선하고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된다는 생각만 가져도 그만큼 싸우고 갈등할 소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의 뜻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잘난 체 하지 마라. 오히려 그 일을 내가 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라.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가정클리닉]남자와 여자 무엇이 다른가? 2 추부길 어디 갈 때마다 꼭 한번씩 싸워요! “남편이 운전하고 가는데 길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더니 남편이 마구 화를 냅니다. 하도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아니 내가 길을 가르쳐 준 것이 뭐가 잘못했냐, 그렇게 화를 낼 필요가 무엇이냐? 결국 그 날 서로 얼굴만 붉히고 약속 장소에 가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운전하다가 부부간에 싸울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난다. 친구네 집에 집들이를 가는데 남편이 약도대로 운전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아내가 말을 툭 던졌다. “여보, 저기 저 남자한테 물어 보고 가면 안 될까?” 그러자 남편이 열을 내면서 말을 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 길이 분명히 맞아!” 머쓱해진 아내가 이내 입을 닫았지만 남편이 찾아간 길은 결코 분명 맞는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보, 내 생각에는 저 쪽에서 좌회전 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랬더니 남편이 발끈한다. “에이, 씨.. 그렇게 길을 잘 알면 당신이 운전해!” 어이가 없어진 아내가 다시 말을 받는다. “아니, 왜 그렇게 화를 내? 그 길이 맞지 않냐고 말을 했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 열을 엄청 받은 남편이 또 이렇게 대꾸를 한다. “그냥 집에 가면 될 것 아냐?” 객관적으로 아무 말도 아니고 화를 낼 일도 아닌 상황이지만 남자가 이렇게 열을 내는 대는 다 이유가 있다. 우선 남자들은 아내가 자기 가정의 일을 다른 남자에게 부탁한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부부가 가야할 길을 다른 남자에게 물어 본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상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가 길을 가는 다른 남자에게 “여기 저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라고 묻게 되는데, 이 말은 남편은 이렇게 받아들인다. “우리 남편이 무식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길 좀 가르쳐 주실래요?” 그러니 남편이 열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운전하고 가다가 절대 길을 물어 보지 않는다. 물론 자기 혼자만 있을 때는 물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자가 있을 때는 절대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운전할 때는 아무데서나 차를 세우고 아무 남자나 붙들고 길을 물어 보는 습성이 있다. 그것이 남녀의 차이이다. 뿐만 아니다. 남자들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내가 자신에게 뭔가 충고를 하거나 권면의 말을 할 때 객관적으로 보면 아주 좋은 말인데도 남자들은 그것을 잔소리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아내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아내가 무슨 말만 하면 화를 내고 오히려 청개구리같이 반대의 길을 가 버린다. 운전하고 가다가 남편이 길을 헤 맬 때 “여보, 좌회전 하라니까!” 하고 아내가 말을 하면 그리 안 해도 좌회전 하려고 했던 남편은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간에 절대 좌회전 하지 않는다. 일단은 우회전부터 해 보고 나서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쪽으로, 저쪽으로”라고 말하는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게 되는 것이고 괜히 혼자서 열 받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남자들의 속성을 반영하는 재미있는 유머가 있다. 왜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을까?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웃으면서 정신 차리기 바란다. 남자는 왜 물건 찾는 것을 어려워할까? “제 남편은 물건을 그렇게도 못 찾아요. 바로 옆에 있는 물건도 못 찾아서 꼭 나를 불러요. 냉장고에 있는 물건 좀 갖다 달라 그랬을 때 제대로 찾아 준 적이 거의 없어요. 정신을 어디에다 두기에 그렇게 물건을 못 찾는지 모르겠어요. 애정이 식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요?” 많은 아내들의 호소중의 하나가 남편들이 물건을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남편이 정성을 다하지 않고 대충 대충 자신의 말을 듣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섭섭해진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정말 남편이 그렇게 정성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물건도 잘 찾지 못하는 것일까? 남자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데는 정성이나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여자들은 태초에 둥지를 지키는 사명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시야가 아주 넓다. 어느 정도 넓은가 하면 코를 중심으로 해서 좌로 45도, 우로 45도, 위로 45도, 아래로 45도 정도는 그냥 한 눈에 다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냉장고 문을 열게 되면 무슨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렇지 않다. 원래부터 남자는 시야가 좁다. 남자는 원래 창조 시부터 안구(눈동자)가 여자보다 훨씬 크다. 그렇기 때문에 먼 거리를 쳐다 볼 수 있는 터널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을 보는데 훨씬 적합하다. 꼭 망원경과 비슷하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은 잘 볼 수 있지만 대신 주변 근처는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직선으로 코앞에 보이는 것만 잘 볼 수가 있다. 당연히 물건을 찾을 때도 눈이라는 레이더를 통해 한 눈에 파악한 다음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있는 물건만 잘 보기 때문에 결국 눈을 물건에 맞추어야만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물건을 찾을 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찾고자하는 물건과 남자의 눈이 바로 앞에 마주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각도가 빗나가면 그 물건의 존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남자들의 답답함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코앞에 넥타이를 두고서도 “여보, 넥타이 어디 있어?”라고 묻는 것이 남자이다. 그럴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바로 앞에 있는 물건도 그렇게 못 찾아요? 당신 두 눈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예요?” 그럴 때 남자는 또 한 번 비참해진다. 아내들이여! 남자들이 정신을 어디다 두기 때문에 물건을 못 찾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내 남편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 입을 바지를 찾느라고 옷방을 다 뒤져도 내가 찾고자 하는 바지를 찾지 못했다. 무려 10여 분을 투자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그 바지 어디 둔지 몰라? 혹시 세탁소에서 안 찾아 온 것 아니야?”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옷방으로 들어간 아내는 단 30초도 안되어서 그 바지를 찾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하는 말. “나는 왜 쉽게 찾는데 당신은 그렇게 못 찾을까?” 나는 그 날 아침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남자이다. [가정클리닉]남자와 여자 무엇이 다른가? 3 추부길 남자는 왜 한눈파는 것을 자주 들킬까? “요즘 내 남편이 이상해요. 지난번에도 백화점 갔을 때 자꾸 지나가는 여자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예요. 저하고 팔짱끼고 길을 가다가도 괜찮은 여자들만 지나가면 또 한 눈을 팝니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는 제가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몰라요.” 부부간에 자주 싸우는 주제 중의 하나가 남편이 자주 한눈을 판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아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비참해지면서 대판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한 눈을 팔았던 남편은 억울하다는 표정이고 그렇다고 내가 바람 피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무시해도 되냐고 하소연한다. 한번은 백화점 안에서 아내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어디다 눈깔을 팔아?”하고 소동을 지르는 바람에 창피하여 혼났다고 말하는 남편도 있었다. 왜 남자들은 이렇게 한 눈 파는 것을 아내에게 자주 들키는 것일까? 또 그렇게 한 눈 파는 것이 영적인 면하고 관계가 있을까? 곧 새벽기도를 안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우선 남자들은 저 멀리 있는 것은 잘 찾지만 직선거리 앞에 있는 것 밖에 보지를 못한다. 그만큼 주변 시야가 좁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에게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물건을 잘 못 찾는 것도 그렇고 또 멋있는 여자가 지나가게 되면 남자는 반드시 고개를 돌려야만 그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다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기 까지 고개를 45도 내지는 90도 정도까지 돌려야만 그 여자를 자신의 눈에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게 어떻게 안 들킬 수가 있겠는가? 아내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그렇게 한 눈을 파는데 자신이 없을 때는 얼마나 여자들에게 홀려서 침을 흘리게 될까를 생각하니까 한심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한 것이다. 아내가 노발대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남편의 입장에서도 억울하고 분하다. 자신이 뭐 외도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한번 쳐다봤을 뿐인데 타락한 남자로 취급하니 속 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 눈 판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속으로만 이렇게 다짐한다. “두고 보자!” 그렇지만 여자들이여! 사실 한 눈은 여자들이 더 많이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사실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에게 들키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여자들은 좌우상하 45도뿐만이 아니라 180도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광폭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남자들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멋있는 남자가 지나가도 고개를 구태여 돌릴 필요가 없다. 그저 앞만 쳐다보고 있는 듯 하지만 지나가는 남자를 끝까지 쳐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 그런데 남자들은 자신이 고개를 돌리니까 아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만 생각한다. 당연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 아내를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자들이여! 남자들이 한 눈 파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 남자들이 그렇게 한 눈을 파는 것은 단지 본능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 여자와 어떻게 해 볼까하는 그러한 음흉함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유를 가지라.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남편이 지나가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려가며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오는 그때까지 아내는 인내를 가지고 그저 기다리라.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라. “다 봤어요? 이제 갑시다!” 이렇게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아내가 멋있는 여인이다. 운전하면서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 “얼마 전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친구네 집에 가는데 아니 운전하면서 버젓이 립스틱을 바르는 게 아닙니까? 제가 깜짝 놀라서 그러다가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야단 쳤더니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나요! 아내의 운전 습관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참 별 일로 다 싸운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아내의 그러한 행동이 걱정되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 때문에 그럴 것이리라. 그러나 남편들이여! 안심을 하라. 남자들은 담배 피우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여자들은 립스틱 바르면서 운전을 해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이다. 남자는 좌뇌와 우뇌 사이를 연결하는 조직(뇌량)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가늘다. 곧 여자들의 그것이 남자들보다 10% 이상 두껍다. 한마디로 양쪽의 뇌 사이를 연결하는 광통신이 남자들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양 쪽 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남자들보다 30% 이상 원활하다. 당연히 여자들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곧 여자들은 요리를 하면서도 동시에 친구들과 수다를 아주 잘 떤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라면 남자들은 요리를 잠시 멈추든지, 전화를 나중에 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그만큼 양 쪽 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운전을 하면서도 여우같이 화장을 잘한다. 거기에다가 운전대 위의 거울까지 쳐다보면서 말이다. 곁에 있는 남편이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들은 핸드폰 받다보면 좌회전, 우회전을 깜박하고 지나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그것을 생각하면 여자들의 그러한 행동을 보면서 아찔해 지는 것이다. 그러한 남편의 단점은 집안에서 자주 일어난다. 남편들은 신문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내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건성 건성으로 대답은 할지라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을 해내지 못한다.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속이 상한다. TV보는 남편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고 다짐도 받았지만 도대체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항의를 한다. “여보, 왜 그것 안 해 주세요?” 그럴 때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제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 그러니 어찌 여자들이 속 터지지 아니하겠는가? 이것이 불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의 두뇌는 각각의 능력에 따라 구획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한 번에 딱 한 가지 일 밖에 할 줄을 모른다. TV보는 남편에게 이것저것 부탁해 보라! 남편은 당연히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지금 남편이 화를 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내가 옆에서 잔소리를 하니까 TV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그런 남편의 속도 모르고 더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뭐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니 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남편들이여! 그렇게 양쪽 뇌가 원활한 아내들도 단점이 있다. 양 쪽 뇌를 동시에 쓰다보니까 실수를 많이 한다. 머리로는 좌회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우회전’하고 외친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핀잔을 자주 듣게 되는 것이다. 아내들이여! 핀잔을 들었는가? 그래서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으면 이렇게 해 보라! 남편에게 못을 박아 달라고 그런 다음 한참 망치를 두들기고 있을 때 갑자기 말을 걸어 보라! 그러면 틀림없이 그 망치로 남편은 손을 치게 될 것이다. 면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렇게 좋은 방법이.....(?) 제 5화 말 싸움하면 이길 수가 없어요! “아내하고 말싸움을 하다보면 갑자기 내가 궁색해 지기도 하고 어쩐지 손해 보는 느낌을 가진 적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싸움을 시작할 때는 분명히 내가 명분도 있고 당당했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쩐지 내가 지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만해’ 그러면서 나 스스로 싸움을 중단시킬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 말싸움해서 아내를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는 인간문화재에 등재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말은 곧 말로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말을 잘 하는 남자가 있다 할지라도 여자들의 달변과 끊임없는 수다에는 이길 장사가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아내하고 싸우다가 말이 막히면 몸으로 말을 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남자와 여자의 뇌 구조를 알게 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감정 기능이 오른 쪽 뇌에 있는데,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기능은 정반대인 왼쪽 뇌에 있다. 그런데 그 양쪽 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른바 광통신으로 비유하면 좋을 것이다)이 여자의 그것보다 가늘기 때문에 서로의 정보교환이 대단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감정을 수시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감정 표현에 서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여자들은 감정을 다루는 영역이 양쪽 대뇌에 고루 퍼져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뇌량의 두께도 더 굵다 보니까 양쪽 뇌의 정보 교환이 남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당연히 남자보다 더 감정적이고 자신의 의사도 훨씬 부드럽고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남자가 당할 수 있으랴! 우리나라에도 남자들 가운데 말 잘하는 선수들이 여럿 있다. 정말 구수하고 재미있게 말 잘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을 보고 칭찬하는 것은 남자들 가운데 말 잘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진짜 여자 말 잘하는 사람을 보고 나면 역시 여자가 낫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자들 가운데 말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숨도 안 쉬고 줄줄줄 너무너무 재미있는 말들을 쏟아 낸다. 내가 들어도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말하는 데 있어서는 남자들과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그 주특기를 여자들은 실컷 써 먹으려고 그런다. 물론 힘으로는 남자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라는 무기라도 제대로 활용해야 남자와 대등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비장의 무기를 너무 함부로 쓰다보면 그 순간부터 비장의 무기는 힘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비장의 무기는 항상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남편과 싸울 때마다 그저 말싸움으로 남편을 제압하려 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입을 다물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침묵으로 맞대응할 때 아내는 더욱 열 받을 수밖에 없고 스트레스의 융단폭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비밀을 안다면 여자는 말하기를 절제해야 한다. 남편을 즐겁게 하기 위한 말이라면 몰라도 남편을 잡기 위해 말로써 말을 한다면 그 말은 힘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것은 말로 남자를 대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감정 기능이 그렇게 활발한 것은 그러한 기능으로 이 세상을 부드럽고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 주신 것이다. 원래 여자는 감정에 사로잡혀 사랑을 꿈꾼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눈물섞인 감동의 언어에 남자들은 항복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을 남편과 자녀와의 관계에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아내로 인해 가정의 분위기가 따스하고 화목하게, 그리고 분위기 있게 변해가는 것이다. 잊지 말라.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만든다는 사실을... “함부로 내뱉는 말은 비수 같아서 사람의 속마음을 깊숙히 찌르나, 슬기로운 이는 하는 말마다 고통속에 헤매는 이의 용기를 북돋운다.(잠언 12장 18절, 현대인의 성경)” 제 6화 존재 자체에 대한 칭찬을 좋아하는 남편 “생전 부엌에도 들어가지 않던 남편이 어느 날 식사를 다한 다음 밥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더라구요. 그래서 당신의 그런 행동이 너무너무 고맙다고 그랬더니 그 다음 날은 식탁을 다 치워 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제가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잔소리가 아니라 칭찬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남자들은 이 세상에 태어 날 때부터 인정받고 격려받기 위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자들은 자신이 훌륭하지도 못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힘과 능력을 키우는데 인생의 목적을 둔다고 말을 한다. 당연히 남들에게서 최고라고 인정받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래야 존재 자체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 자체의 인정은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남자들은 우선 자기 집안에서 자기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특별히 아내로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이 세상 최고의 남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성(性)적인 부분, 가정에서의 위치 등등 모든 부분에서 아내에게 최고의 남자로 여김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엄지 손가락을 내 밀면서 “당신이 최고”라고 말해주면 흐뭇해 하는 것이다. 부부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생활을 하고 나서 아내가 “당신 때문에 내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 순간 남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면서 흐뭇해한다. 그런데 아내가 아무 말도 없으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서 아내에게 묻는다. “어땠어?” 남편들의 그 질문에 대한 의미를 아내들은 아는가? ‘당신이 최고’라는 말을 구걸받고 싶은 남편들의 그 간절함을 아내들은 과연 아느냐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최고라고 인정받으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아내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자신의 가슴을 쫙 벌려 아내를 품에 안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내가 시큰둥하면 그 순간 아내로부터 사랑을 거두어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여자를 찾아 다닌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남자들은 아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그저 어떤 일에 대해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까지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엄청난 비밀을 안다면 아내들은 그 비밀의 열쇠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내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남자를 칭찬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아내가 제일 못마땅해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부엌 근처에는 아예 들어오지 않고 투정만 하는 남편이 있다고 치자. 이 남편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쩌다가 남편이 부엌 근처라도 오면 그 순간 즉각 아내가 반응하면 된다. “당신이 부엌에서 나와 함께 있다니, 내가 너무나도 행복해요.”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그 다음부터 부엌에 자주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쩌다가 숟가락을 들어서 뭔가를 해 주면 또 다시 집중적으로 칭찬하라.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본 남편은 스스로에 대한 가치감과 존재감을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잊지 말라.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는 사실을.... 9화 : 예쁘다고 말해주면 어쩔 줄 모르는 아내 “아내가 미장원에 다녀왔길래 ‘어, 예쁘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요. 그러면서 무엇을 먹고 싶냐? 저녁 식탁을 신경 좀 써야하는데…하면서 너무나도 좋아하더라고요.” 남자들이 존재 자체에 대한 칭찬을 좋아한다. 그러면 여자들은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신의 마음 문을 확 열게 된다. 그래서 아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남편들이 착각을 한다.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아내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아내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의 많은 경험을 보면 남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반면, 많은 아내들은 남편이 제대로 사랑해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남자들은 아내들의 그러한 욕구에 대해 너무나도 무관심하다. 그래서 잘 채워주지를 못한다. 그렇게 정서적 욕구가 메말라 있으니까 중년기의 우울증도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아내들은 이렇다. 남편이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서 대화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특별히 아내들은 남편이 자신의 생김새나 입는 옷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면 너무나도 행복해한다. 문제는 남자들은 그러한 면에 대해 너무나도 둔감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남자들은 이웃 집 여자들의 머리 모양새가 바뀐 것은 얼른 알아채지만 자신의 아내가 뭐가 바뀐 것에 대해 너무나도 둔감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오랜만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하고 왔다. 지금 아내가 바라는 것은 딱 한가지이다. 집에 들어 온 남편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어, 머리 모양이 바뀌었네. 예쁘네!” 그 말을 고대했지만 집에 들어 온 남편은 한번 힐끗 보더니 이내 거실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TV 리모컨을 들고 여느 때처럼 쿡쿡 누르는 데 여념이 없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서서히 열을 받는다. 그래서 남편 앞에서 머리를 흔들어 본다. 제발 내 머리 좀 봐달라는 신호이다. 그런데 남편은 정작 이 여자가 왜 여기서 머리를 흔드는지 모른다. 그래서 남편은 이렇게 말을 한다. “이봐, 안 보여! 저리 비켜!” 아내가 열을 받을 수 받게 없도록 만든다. 그 날 저녁 분위기는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워진다. 남편들이여! 아내들을 칭찬하라! 그것도 남자와 같이 존재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사소한 것에 칭찬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당신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 다음 날 식탁은 더욱 진보된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얼굴에 기미도 끼고 주름살도 늘어가지만 그러한 얼굴을 보면서 남편이 이렇게 말해 주라! “당신 얼굴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성숙해 보여! 멋있어!” 나이가 들어가는데 얼굴이 뭐가 멋있겠는가마는 남편의 그러한 말 한마디에 날마다 거울 보면서 우울해하는 아내의 가슴을 펴게 만든다. 뱃살 때문에 걱정하는 아내가 있는가? 그래서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고민하는 아내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주라! “나는 몸매가 약간은 통통한 여자가 훨씬 좋아! 살 빼지마. 나는 당신의 지금 그대로가 좋아!” 그 말 한마디에 아내의 마음은 그저 행복해 진다. 나는 그래서 나의 아내에게 자주 칭찬해 준다. 가끔 쓰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 뭘 믿고 그렇게 예뻐?” 아내의 입이 찢어진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꾸한다. “당신 믿고….” 이 말을 들어 봤는가? “여자를 칭찬하면 죽은 여자의 심장도 뛴다.” 10화 : 아내의 변신에 대해 둔감한 남편 “남편은 도대체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마리가 바뀌었는지, 옷이 새것인지 아닌지 전혀 몰라요. 칭찬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요? 아마도 애정이 식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런 남편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한심해요.” 결혼하고 2-3년만 지나면 아내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대표적인 하소연 중의 하나이다. 연애할 때는 머리 모양이나 심지어 립스틱 색깔까지도 그렇게 관심이 많던 남편이 결혼하면서부터 그저 무관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열 받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겠냐고 말한다. 그런데 아내들이여! 그 점에 대한 남자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위안이 될지, 아니면 더 화나게 될지 모르겠다. 실은 이렇다. 한마디로 남자들은 이웃 집 여자의 머리 모양 바뀐 것은 금방 아는데 자신의 아내가 변신하는 것에 대해서만 유독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아내들이여! 열 받지 않는가?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아내에게는 정작 무관심하고 왜 이웃 집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있는 것일까? 왜 그럴까? 예를 들어 보자. 아내가 오랜만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고 왔다. 이 아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아내가 그리는 남편의 모습은 이렇다. 남편이 귀가하면서 아내를 힐끗 본다. 그러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운다. 그리고 칭찬을 해 준다. “야, 머리 멋있는데…. 당신 그러고 나가면 미혼인지 알겠다.” 바로 이런 상상을 하면서 괜히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밤늦게 들어 온 남편의 리얼한 모습은 이렇다. 일단 한번 힐끗 본다. 그때 아내는 남편의 행복한 반응을 기대한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의 머리를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르나 아무 말 없이 거실로 간다. 양복을 휙 벗어 재끼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치켜들고 TV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아예 넋을 잃는다. 약간 열이 나기 시작한 아내가 TV보는 남편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TV를 적당히 가리도록 앉는다. 아내는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봐 달라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 아내의 마음도 모른 채 이렇게 말을 한다. “어이, 머리 비켜, 텔레비전 안 보여!” 이 말에 아내의 심장은 부글부글 끓게 된다. 좀 더 아내들 속 터지는 소리를 한번 해 볼까? 의외로 많은 남편들이 10년 넘게 산 아내의 구체적인 얼굴 모양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실감이 나는가? 연애할 때는 그렇게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막상 결혼하게 되면 별 관심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그저 대충 보고 산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렇게도 이미 자기 것(?)이 된 아내에 대해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내 남편만 그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거의 모든 남편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그럴까? 왜 자기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하고 남의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내를 그토록 서운하게 만드는 남편의 본성 중의 하나가 성취 지향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설명을 한다면 이미 아내는 성취가 된 존재이고, 그 외의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은 이미 다른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기 때문에 성취 대상에 온 에너지를 쏟아 버림으로 인해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대충 대충 보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 성취 대상이 승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에 있어서 다른 정복 목표일 수도 있다. 거기에 올 인하고 있으니 어찌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 올 수 있으랴! 남편들이여! 아무리 남자의 본성이 그렇다 할지라도 제발 자기 것에만 관심을 쓰라! 그렇게 하도록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것에 더 이상 눈 돌리지 말라! 아내의 피눈물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아내들이여!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질 글을 기대해 보라! 제11화 결혼하고는 변해 버린 남편 “결혼 전만 해도 그렇게 무드 있던 남편이 결혼하고는 완전 딴판 이예요.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모르겠어요. 결혼 전에는 생일날 정말 황홀하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케이크 하나 달랑 사다주고는 끝 이예요. 벌써 애정이 식은 것일까요?” 남자는 결혼 전에는 그야말로 저돌적인 황소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남자라도 사랑하는 연인이 40일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면 결혼해 주겠다고 했다 치자. 이 남자는 그야말로 코피를 쏟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거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교회에 열심이던 남자가 결혼한 후에도 그렇게 뜨거운 신앙을 보여줄 수 있을까? 대답은 이러하다. 전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 남자가 40일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은 이유는 그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고 나면 남자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버린다. 한마디로 이미 내 것이 된 순간부터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또 다른 성취 목표를 향해 돌진해 가는 그 남자들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성취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남자는 성취 목표가 있어야 세상을 사는 맛을 느낀다. 그 성취 지향을 향해 달려갈 때같이 흥분되고 신나는 일은 없다. 어떻게 보면 그 목표가 있기에 인생도 사는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정도이다. 문제는 사랑도 그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남자는 성취 목표를 소유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진다. 그리고 온갖 것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래서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평소에 차를 마셔도 분위기라고는 전혀 없던 사람이 연애를 할 때 되면 모두가 시인이 되고 센티멘털한 감성 청년이 된다. 음악을 들어도 분위기 있고 감정이 있는 그런 것만 골라 듣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찌 그리 이 가사가 자신의 마음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감성적 접근에 여자들은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평생 분위기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분위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무데서나 코를 탁탁 풀고 커피도 ‘다방 커피’ 일색이다. 종이 컵 하나면 족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속았다는 느낌도 들고 자신의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결혼하기 전의 남자는 제 정신이 아니다. 그저 멋있고 화려하게만 보이려고 애를 쓰는 가면 족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남자의 낭만은 결혼을 위한 낭만이지 그 사람의 본성이 낭만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자는 결혼하게 되면 그 즉시로 현실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제 정신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날로부터 구름 위에서 내려와서 땅바닥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남자이다. 남자가 결혼 전과 결혼 후가 그렇게 다른 중요한 이유가 바로 성취 지향적이라는데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여자들은 좀 더 자극적인 말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말이다. “이미 잡은 물고기에는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는다.” 성취 지향적인 남자들은 이미 성취를 한 자신의 여자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이제는 새로운 성취 대상을 향해 온 몸을 던진다. 그래서 직장에서, 아니면 인간관계에서, 아니면 또 다른 세상의 무엇에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남자의 변심은 우리 집 남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전혀 동의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다음의 말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남자의 변심은 무죄이다!” 제12화 남편만 변했나요? 아내도 변했어요! “아니 나만 변했습니까? 이 여자도 변했다구요. 결혼 전에는 등산도 따라 다니고 야구장도 곧장 놀러 갔던 아내가 요즘에는 꿈쩍도 안합니다. 모두가 귀찮다는 겁니다. 아니, 벌써 아줌마가 다 된 것인지… 나 원 참.” 결혼 전과 후. 남자만 그렇게 변심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다’가 정답이다. 여자도 결혼 전과 후가 확연히 구별된다. 결혼 전의 사랑에 빠진 여자는 그 이가 가자는 데는 어디든지 따라간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면서 야구장에 기꺼이 동행한다. 세 시간 가까이 야구를 본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언어의 영화를 세 시간 보는 것만큼이나 고역이겠지만 이 여자는 끄떡없이 함께 앉아 있다. 낚시? 사랑하는 그이가 가자고 그러면 두말 않고 따라 나선다. 시간 죽이는 게 대수인가? 등산? 하이힐 신고도 따라 나선다. 지금 발이 아픈 게 대수인가? 발이 아프면 나중에는 하이힐을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면 되는 것이고 그것도 정 안되면 사랑하는 그 이가 어떻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충만하다. 그랬던 여자가 결혼하고부터는 너무나도 변해 버린다. 남편이 쉬는 날, 야구장 가자고 그런다. 그럴 때 아내는 이렇게 답변한다. “저녁에 뉴스에 다 나올 텐데 뭐 하러 그런 데를 가? 하나도 재미없는데….” 등산 가자고 말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어차피 내려올 것. 뭐 하러 올라가? 다리 아프게?”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속이 확 뒤집힌다. “아니, 이 여자가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거야?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더구만….” 남편들이여! 괜히 열 받지 말라. 열 받아 봤자 손해 보는 것이 바로 그대들이다. 열 받기 전에 여자들이 왜 그런지 원인부터 분석을 해 보자. 한마디로 여자들이 결혼 전에 전국 어디든지 남자를 따라다녔던 이유는 등산이 좋고 낚시나 야구가 좋았던 것이 아니다. 그저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사랑하는 남자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그렇게 따라 다녔던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냥 행복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팔짱까지 끼고 가끔은 손도 잡고 그러니 그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미 결혼을 했다. 그 말은 곧 지금부터는 구태여 남편을 따라 다니지 않아도 날마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제 남편이 된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여기저기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언제든지 둥지로 확실하게 돌아 온다. 그 얼마나 위안을 주는 일인가? 여자들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 엄청난 위로와 함께 평안을 가져다준다. 이런 상황에 야구장에는 뭐 하러 가겠는가? 등산? 그저 지겨운 단어일 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하게 되면 남편과 여가를 함께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들은 그렇게 변한 아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여자가 벌써 아줌마의 근성을 닮아가고 있구나! 그저 퍼져 집에 눌러 앉아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지고….” 문제는 그런 아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이 여자에게서 싱싱한 모습, 풋풋한 모습은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아내들이여! 남편만 변한 게 아니다. 그 대들도 변한 것이 많다. 그 점을 잊지 말라! 더불어 남편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은가? 그렇다면 결혼 후에도 남편과 여가 시간에 자주 동행하라. 자칫 배드민턴 치고 등산 자주 하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 성취 목표로 변해 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닌가? 자기 것을 확실히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이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 나서는 것이다. 그냥 생각을 바꿔서 나도 남편의 여가를 즐기겠다고 생각하면 만사가 OK이다. 세상의 남자들은 마음만큼은 항상 20대인 아내를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13화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구요? “퇴근해서 집에 갔더니 아내가 갑자기 차 한 잔을 하자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차는 무슨 차? 밥이나 먹자’고 그랬더니 아내가 그러는 겁니다. ‘당신은 도대체가 분위기가 없어! 당신하고 차 한잔 하자고 말한 내가 잘못이지!’ 그러는 겁니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그러는거지요?.” 남자들이 정말 모르는 것 중의 하나가 여자의 마음이다. 특별히 여자의 감성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대목중의 하나이다. 여자 나이 50이 넘어도 그 마음 속에는 18살의 청춘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그러니까 소녀적의 가슴 부푼 시절, 세상이 모두 자기 것 같고 꽃 망울을 보면 어쩐지 시가 금방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기고 하며, 사랑하는 님의 얼굴을 보면서 차를 한 잔 하고 싶은 그 낭만. 중년의 남자가 어찌 그 마음을 알랴? 아내는 연애 시절에 남편이 아주 분위기가 있었던 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이가 먹어도 그렇게 분위기를 찾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연애 시절의 남자 모습은 그 남자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쓴 허구라는 것을 여자들은 결혼후 2-3년이 지나면 다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로맨스적 분위기를 다시한번 맛보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또한번 시도를 해 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분위기만 썰렁해지고 마는 것이다. 형광등 다 끄고 촛불 켜 놓고 집에서 분위기를 살려 차 한 잔 하자고 그러면 남자들은 우선 그 분위기를 아주 어색해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됐다. 밥이나 먹자!” 그럴 때 아내는 또한번 절망에 빠진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이렇게 무드를 모를까? 남자는 감정 기능의 뇌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은 정 반대인 왼쪽 뇌에 있다. 그런데 이 양쪽 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여자보다 훨씬 가늘다. 그러다보니까 정보 교환이 원활치가 못하다. 그래서 남자들은 논쟁을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잘 흥분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더라도 감정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당연히 남자들은 분위기를 찾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꼭 그렇게 해야만 대화가 되고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감정을 다루는 영역이 양쪽 뇌에 다 펴져 있기 때문에 감정 표현이 능수능란하고 수시로 감정 모드로 들어가기가 쉬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흩날리는 꽃잎을 보면서 마음이 슬퍼지기도 하고, 비가 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울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연고로 감정적 표현도 잘하고, 감정에 사로 잡혀 사랑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양쪽 뇌의 정보교환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잘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언어 구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화를 해도 여자는 감정적 대화를 많이 하지만 남자들은 큰 차, 최신의 컴퓨터, 그리고 명예와 부 같은 현실적인 대화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정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여자들은 일단 그 분위기에 취해 있다. 그럴 때 남편이 따스한 감성의 언어를 말해주면 여자들은 너무나도 행복해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오늘따라 당신의 얼굴이 소녀다워 보인다”든지, “당신하고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옛날 데이트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등의 말을 해 주면 그지없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러한 말을 잘 할지 모른다.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할 때는 그런 말이 술술 나오지만 자기의 여자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렇다. “어때? 이 집은 값이 좀 비싼 집이야! 내가 큰 맘 먹었다.”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데 초점이 있지 아내의 감성적 분위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돈 쓰고도 별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가끔은 분위기 있는 남자가 되어주면 어떠할까? 아내를 사랑한다면 이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죽이고 무드파로 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좀 쉬운 방법을 하나 전수해 드린다면 이렇다. 아내를 자기의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처음보는 여자라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오늘 작업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놀랍게도 자신이 분위기파로 변신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내 역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번 시도해 보고 싶지 아니한가? 14화 아내마저도 경쟁상대로 여기는 남자 “아이들 노는 것을 보면 어찌 그리 남자와 여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남자들은 맨날 전쟁 놀이에 게임을 좋아하는데 여자애들은 병원놀이나 줄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것도 타고나는 것일까요?” 정말 신기한 것중의 하나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혼자서 놀기보다는 팀을 형성하는 놀이를 즐기고 장난을 해도 승패가 있는 장난을 한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다. 또 팀을 형성하게 되면 먼저 대장이 누구이고 누가 부하인가를 잘 따지게 된다. 혼자서 인터넷을 하더라도 게임하는 것을 보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누군가와 이기고 지는 게임을 즐겨한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짝꿍끼리 작은 그룹 안에서 놀고 승패와는 상관이 없는 놀이를 한다. 그래서 줄넘기나 집짓기, 병원 놀이들을 즐기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위계질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명령하지 아니한다. 단지 친구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어린 시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먹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남자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곳에 승패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남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팀과 동일시되어 그 팀이 이기면 그저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사실은 그 동기가 약간 다르다. 남자들이 승패라는 요인이 스포츠에 빠지는 중요한 동기라면 여자들은 경기장의 분위기, 응원장의 분위기 자체에 쉽게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승패 그 자체보다는 열광하고 환호하며 쉽게 하나가 되는 그 분위기에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은 TV의 스포츠 중계를 혼자 앉아서 보지는 않는다. 길거리 응원이든지 아니면 경기장에 직접 가서 즐긴다. 그러나 남자들은 혼자서 주먹도 불끈 쥐기도 하고 혼자서 관전 평도 하고 감독도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녀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혹시 아침에 남자와 여자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남자들은 몇 명이 팀을 이루어서 하는 운동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축구를 하고 배드민턴을 해도 팀을 이루어 대항 경기를 하자고 그런다. 그런 연고로 남자들은 동호회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 동호회 안에서 또 다른 작은 팀을 만들고 대항 경기를 하려고 한다. 그 안에 여자들도 끼어 넣으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그렇게 뭔가를 만들면 반드시 회장과 총무를 뽑는다. 그런데 여자들은 남자들의 그러한 행동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저 혼자서 하는 놀이를 좋아하거나 기껏해야 둘이서 즐기는 놀이를 좋아한다. 배드민턴이나 테니스를 치더라도 남자들은 ‘몇 대 몇’을 자주 외치지만 여자들은 ‘몇 대 몇’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지금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나와 함께 운동을 즐기는 동료이지 경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운동을 하는 상대자는 그저 경쟁자일 뿐이다. 거기에다가 ‘몇 대 몇’이라는 게임이 이루어져야 남자들은 운동하는 것도 신이 난다. 그리고 승부욕이 생기면서 운동에 더욱 깊게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어찌 여자들이 이해를 할까? 부부가 배드민턴을 한다. 거기서도 남자들은 아내하고 ‘몇 대 몇’을 찾는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마누라한테 질 수는 없지!”. 자기 아내에게 배드민턴 이겨서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마는 남자들은 아내마저도 경쟁 상대로 삼는다. 그리고는 아내를 이겼다고 혼자서 신나한다. 그런 모습을 보는 아내의 마음이 과연 어떠할까? “아이구, 이 남자는 언제 철이 들까?” (추부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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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칭찬을 통해 누리는 행복
[가정클리닉]칭찬을 통해 누리는 행복 추부길 참으로 우리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다. 사랑이 무너지고 가정이 훼파되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지금 와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나의 생각으로만 사랑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기주의적인 사랑만이 판을 친다. 나를 쳐다 봐 주고 모두가 나를 향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눈빛’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섬김과 헌신의 사랑이 가득해야할 우리의 가정마저도 탐욕적인 사랑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그릇’은 텅텅 비어가고만 있다. ‘고통과 두려움이 가득한 마음’, ‘상한 마음’으로 우리는 ‘울음소리’마저 숨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부부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는 채워 가야 한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바로 가정에서 채워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동기와 사춘기의 전문가요 정신과 의사인 ‘로스 캠벨(Ross Campbell)’은 가정에서의 사랑의 충족을 강조하면서 “모든 아이들은 내면에 사랑으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감정의 그릇이 있다”고 말하면서 “아이가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아이는 정상적으로 발육하지만 그 사랑의 그릇이 비었을 때 아이는 그릇 행하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들의 탈선은 빈 ‘사랑의 그릇’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데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뿐일까?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가족 관계안에서 사랑이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창 밖’을 넘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주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한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주는 게 있어야지 뭘 주지...’하면서 사랑주기를 회피해 버린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강권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요 13:34)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요일 4:8)이라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랑을 배우고 키우는 장소”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적인 나의 의지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의 코넬대학 연구팀은 남녀간에 애정이 지속되는 기간은 18개월에서 길어야 30개월이라고 단정을 내렸다(1999년 8월 5일자 조선일보). 2년간 37개의 다양한 문화집단에 속한 5000명을 인터뷰 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상대방을 보아도 더 이상 가슴이 뛴다거나 손에 땀이 나는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신혼 부부의 “깨가 쏟아지는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 본연의 사랑의 에너지는 그 정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어디로부터인가 사랑을 공급받아야만 사랑을 주는 존재로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에게서만 그 사랑을 채우려 한다. 그러다보니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후회도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의 원천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요일 4:7)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 배우자와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을 채워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미워지고, 아내가 꼴보기 싫어질 때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나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한번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 가운데 긍휼의 마음을 갖자.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차고 넘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훈련하고 배워야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방법을 모르면 그 사랑을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을 주는 아주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바로 칭찬과 격려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아내의 그 한마디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그렇게 힘들어할 때 아내는 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힘내! 내가 있잖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어?’ 저는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다시금 추스리게 되었습니다.”(남자, 43세, 최집사) “나이가 이렇게 먹은 지금도 아내가 나를 칭찬해 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특별히 설교 마치고나서 아내가 내게 다가와서 ‘여보, 당신 말씀에 너무 은혜 받았어요’ 이럴때는 정말 너무너무 신나더라구요. 교인들 수십명이 칭찬해 주는 것 보다 더 좋은 거 있죠. 이 맘 이해하시겠어요?” (남자, 48세, 신목사) 특별히 아내들이여! 남자는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남자는 인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남편을 왕같이 대우해 주어야 한다. 최고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인정해 주는 방법이 바로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아내의 칭찬은 남편에게 보약이다.’ 격려와 위로, 칭찬은 남편에게는 명약중의 명약이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말이고 상대방에게 자존감과 가치감을 주게 된다. 그래서 잘한다고 하면 더 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를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라 한다. 똑같은 원리가 자녀에게도 적용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인생상담 칼럼인 ‘디어 애비’에 실렸던 글을 한 토막 소개할까 한다. 중학교에서 수학을 담당하던 여자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관계도 안좋은데다가 얼마나 거세던지 수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생각 끝에 선생님이 색다른 숙제를 냈다. 자기를 제외한 학급 전원의 좋은 점, 좋은 성격, 좋은 말, 기억나는 훌륭한 일 등을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주말에 그것을 정리하여 월요일 아침에 아이들에게 아무 말없이 다 나눠 주었다. 반응은 대단했다. “정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나를 이처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 그 일 이후로 학생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호감도 감추지 않았다. 몇 년뒤에 그 선생님은 월남전에서 전사했던 제자의 부음을 듣게 된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 선생님을 그 제자의 부모가 집으로 초대를 했다. “선생님께 꼭 보야 드릴게 있습니다. 아들은 죽는 순간에도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중학 친구들이 지적했던 아들의 장점 목록을 꺼내 놓는 것이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애는 이것을 항상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기고 살았어요.” 그 때 한 친구도 수줍어 하면서 “저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어요. 책상 맨 윗서랍에 두었다가 틈틈이 꺼내 봐요”라고 말하자 너도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저는 일기장에 넣어두고 매일 봐요”, “저는 결혼 앨범에 끼워 놓았어요.”.... 선생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고 한다. 아마도 감동에서 우러나온 눈물이었으리라. 상담자 ‘애비’는 조지 허버트(1593-1633)의 말로 칭찬의 위력을 대신하고 있다. “칭찬 하는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단하다.” 우리는 양궁 신동 김수녕을 기억한다. 88 서울올림픽에서 개인과 단체전을 휩쓸면서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로 2관왕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한 김수녕은 자신이 세계 최고의 궁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때 지도교사의 칭찬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수녕이 네가 제일 잘한다.” 이 말 한마디. 그 후로 수녕은 선생님의 기대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러는 가운데 세계 최고의 궁사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칭찬과 격려의 힘이다. 특히 사회 생활을 하는 남편들에게 아내의 칭찬과 격려는 보약중의 보약이다. 돈도 필요 없고 약간의 마음과 정성만 있으면 언제든지 지어 줄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보약이다.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 엔돌핀이 발생되어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기게 되며 일에 대한 의욕도 넘치게 되며 자신감도 솟아나게 된다. ‘오늘따라 당신이 멋져 보여요’라고 출근할 때 던진 이 말이 남편의 하루 일과를 승리하게 만든다. ‘역시 당신은 옷걸이가 좋아서 옷이 참 잘 어울려요’라는 칭찬에 남편은 외모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나의 남편. 다른 남편보다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주신 나의 남편. 그 재능과 능력을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내가 계발하고 살려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책망할 때 가정의 영적 지도자인 남편은 설 곳을 잃게 된다. 자녀의 눈에도 아빠는 용기없고 힘없는, 어머니로부터 구박과 잔소리만 듣는 아버지로 비춰지게 된다. 가정에서 책망 받는 남자가 이 세상 어디에서 대우받고 살겠는가? 남편들이 술집에 가서 돈 뿌리고 허세부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내들이여, 두 아들을 키운다는 자세로 남편을 돌보아 보자!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를 보아도 남자가 강한 것 같지만 심리적으로 더 기대고 싶어 하고 여자보다 더 칭찬 받기를 원한다고 한다. 잔소리와 바가지로 나쁜 습관이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상대의 약점과 결점을 보지 말고 장점만을 보기로 결심하자. 남편을 존경하며 칭찬하고 격려하면 남편의 장점은 계속 개발되기 때문에 약점과 단점은 자연스럽게 고쳐지게 된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격려해 주자. 오늘도 남편들은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탈진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는 잠언 말씀도 있지 않는가? 경우에 합당한 칭찬과 격려는 풍성한 부부의 삶을 보장받는 첩경이다. 힘들어하는 남편들에게 보약을 주자. 칭찬과 격려라는 보약을 주자. 남편이 이 보약을 먹고 힘이 철철 넘치면 몇 배의 힘을 붙여 아내에게 돌아오게 된다. 칭찬할 거리가 없는가? 지금 당장 상대의 좋은 점 20가지 이상을 찾아 적어 보자.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았던 남편의 20가지 장점을 회상해 보자. 남편이 미남 탤런트보다 더 멋있게 보일 것이다. 어찌 남편뿐이겠는가? 아내 역시 칭찬을 목말라한다. 이런 말이 있다. “여자를 칭찬하면 죽은 여자의 심장도 뛴다.” 얼마나 칭찬을 좋아하면 그러하겠는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내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이 있다. 내가 가끔 써 먹는 칭찬이다. “당신, 뭘 믿고 그렇게 예뻐?” 그 말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 믿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눅 6:38) 지금 생각해 보자.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칭찬과 격려, 사람을 세워주는 말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영을 죽이는 비난과 책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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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사랑은 선택인가? 순종인가?
[가정클리닉]사랑은 선택인가? 순종인가? 추부길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 일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온통 ‘사랑’천지이다. 유행가의 노래들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사랑 노래일색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지금 사랑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반면 그렇게 사랑 타령이 많다는 것은 홍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사랑을 외쳐 대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갈급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내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입만 열면 사랑, 사랑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 마음에는 사랑의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어느 정도 넘쳐나면 행복해 하지만 비어있으면 그것 때문에 갈급함이 생겨나고, 그래서 그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 마음에 그릇에 채워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많은 부부들의 결국의 문제가 바로 사랑의 마음이 텅텅 비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쉽게 답을 주고 있다. 미국 코넬대의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녀간에 생겨나는 애정의 관계는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계 37개 문회집단의 5,0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이다. 그 말은 곧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사랑의 에너지는 길어야 30개월밖에 되지를 않고,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랑의 에너지는 소멸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한마디로 눈에 뵈는게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눈에 뭔가가 씌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곧 사랑의 감정이라는 홍수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고 이 세상에는 그저 둘만 존재하는 듯, 그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허니문의 기간이요, 깨가 쏟아지는 기간이리라. 문제는 그 기간이 결코 평생동안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길어야 1년 반에서 2년 반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깨를 털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깨를 털다보면 계속 그 깨가 쏟아질 것 같은데 두세번 털다보면 쭉정이만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혼 초의 그 뜨겁던 사랑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점점 약해져 가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랑의 그릇에 사랑의 에너지가 비어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눈에 씌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단계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꿈이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마음이 가득할 때는 모든 것이 다 덮어지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만 그 사랑의 두께가 엷어지면서 점점 상대방의 좋은 점들 보다는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그 단점들마저도 사랑스러웠고 그것이 또한 매력의 포인트이기도 했는데 날이 갈수록 자신의 이목을 끌었던 바로 그 점들이 꼴 보기 싫은 존재로 변해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그렇게 변해가는 지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그릇이 비어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당연히 상대방이 문제라고만 믿어 버린다. 그래서 그때부터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잔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하고 서로를 지적하는 손길이나 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 사람의 뭐가 좋아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 싸움 현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과 함께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을 보면 그 답이 보인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기서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곧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들이 갖는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와야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 사랑을 독점하려 하고 사랑을 요구하며 또 갈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갖는 사랑의 에너지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요구하고 원하는 사랑을 채워줄만한 능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원초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넘칠 때에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가 곧 사랑의 표현이고 또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말이나 행동은 그대로인데 그것이 사랑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은 사랑의 그릇에 사랑을 채워 넣으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분노가 나고 그것이 부부간에 갈등으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인간적인 행동에 대해 그래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사람으로부터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왜 사람에게서 그것을 채우려하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의 수혈이 필요한데 그 수혈의 대상으로 사람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으로 표적을 옮기라는 것이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경고도 빠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사랑 방법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저 사랑하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도 무슨 조건이나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드릴 수 있다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사람은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텅텅 비게 되면 가만있지를 못한다. 그 그릇이 비게 되면 살아가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채움받기를 원하지만 도저히 그 사람이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세상의 그 무엇들로부터 채워 보려 한다. 명예로, 권세로, 술로, 여자로.... 별 시도를 다해 보지만 결국에 느끼는 것은 ‘헛되고 헛되니 모두가 헛되도다’는 탄식밖에 남지를 않는다. 그래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와서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외치게 된다. 그 외침이 바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맞대응을 한다. “왜 나한테 화내고 그래? 내가 뭘 잘못한거야!” 그렇게 맞대응을 하는 순간, 상대방의 그 마음의 그릇마저도 깨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은 상대방이 지금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를 안다. 곧 “아, 지금 저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텅텅 비어 있구나! 지금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하는 갓이구나!”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달려가서 꼭 끌어 안아주면서 “당신, 지금 사랑이 고프구나! 그래.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퍼 부어줄께!”라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 도대체 그런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얼굴만 쳐다보면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만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역시 성경이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곧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사실이다. 다름아니라 사랑은 먼저 행동하는 것이다. 곧 내 마음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더라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결단으로 자신 안에 넘쳐나는 미움과 분노를 죽이고 그저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라도 일단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말대로 행동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먼저 순종하고 나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상대방을 진짜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서 부부간에는 다시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사랑하는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때 결단하는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그 기도마저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을 먼저 하면 그 행동에 감정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 상담학에서 말하는 행동요법(Behavior Therapy)이다. 잊지 말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앙적 결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의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일방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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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마음을 휘어잡는 말 한마디
마음을 휘어잡는 말 한마디 추부길 내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있다. “너는 앞으로 크게 될 놈이여!” 어머니도 그러하셨다. “너는 복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 어쩌면 부모님의 그 말씀들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푯대와 같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의 자아상 가운데는 “나는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는 자신감과 함께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소망이 가득하다. 가끔 쓰러지고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나는 어차피 잘되도록 되어 있다”는 내적인 힘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렇게 그 마음을 강하게 휘어잡는 말 한마디가 다 있다. 그 말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 부모가 깨어 있어서 승정적인 말을 남겨 주었다면 그 자녀는 행복을 향한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지만 반대로 상처와 아픔, 좌절할 수 밖에 없는 말을 남겼다면 그 자녀의 행로는 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할지라도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들려주어서는 안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한 그 말들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부정적이 되도록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 놓고는 나중에는 또 자신의 문제는 되돌아 보지 않고 환경을 탓하고 자식을 탓한다.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 없는 노릇이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연애를 하고 또 결혼을 하고..... 부부가 만나서 살다보면 어찌 행복한 날만 있을 것인가? 싸우기도 하고 냉전을 치를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든지 해서는 안될 말들은 결코 입밖으로 내어서는 안된다. 그 말한마디를 감정의 노예가 되어 뱉어 놓았을 때, 그 말들은 살아 역사하면서 한 사람의 마음을 휘어 잡게 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나는 당신만 보면 내가 살 의미를 느끼게 돼! 사랑해!” 볼 때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해 준다면 그 말이 배우자의 마음 가운데 살아 역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말한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축복하는 기도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자녀에게 기도할 때 계속해서 반복해야 할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자녀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반복되는 축복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하는 우리 정훈이.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5년, 10년, 20년 동안 일어설 때나 누워 있을 때나 그러한 축복의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기도를 해 주게 되면 바로 그 메시지가 그 자녀의 일생 내내 푯대와 같이, 안내자와 같이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축복대로 이루어져 가도록 되어 있다. 그뿐인가? 할아버지만 생각해도 그 축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해 주셨던 그 축복을 떠 올리기만 하면 행복해 진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신앙 전수의 방법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들 가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한마디의 말이 힘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는 말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엄청난 물질적 유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휘어 잡는 언어의 유산이다. 그야말로 돈도 들지 않고 세금도 없으며,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그러한 유산 상속의 방법. 바로 행복을 주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지런히 행복의 언어를 선물하자. 아침, 저녁으로 줄기차게 행복의 언어를 선물하자! 행복한 가정, 행복한 가문은 바로 그러한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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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 클리닉]어머니의 사랑
[가정 클리닉]어머니의 사랑 추부길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노래 중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를 부르며 어머니 생각에 괜시리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 노래를 잘 부르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 두 소절 부르다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로 넘어가 버릴 정도로 헷갈린다고 한다. 어찌 보면 노래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나 은혜에 대해 헷갈리는 요즘 세대가 아닐는지.. 20여 년 전만 해도 아버지는 야단치고 어머니는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일반적인 어머니의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래서 ‘아버지의 은혜’라는 노래는 없어도 ‘어머니의 은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아이들을 재촉하고 다그치는 돌격대요 투사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자비와 인내의 어머니보다 슈퍼우먼, 철권형 어머니가 판치고 있는 요즘, 어머니의 본성을 되찾고 그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감으로써 아이들에게 순기능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소망해 본다. 오늘 본문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대비하면서 그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진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엄마가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신의 배에서 난 자식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그 강하고 진한 사랑을 쉽게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를 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흡사한 것이 바로 모성애요,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어머니는 사랑, 그 자체이다. 주고 또 주어도 항상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옛날 어느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부근에 사람의 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뼈들 가운데 여자의 뼈를 골라낼 수 있는가?” 제자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스승이 뼈 하나를 집어 들면서 말을 한다. “이것이 여자의 뼈이니라. 여자의 삶을 생각해 보아라. 어려서는 여자기이 때문에 늘 남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고, 결혼해서 아기를 갖게 되면 온 몸의 영양분을 아기에게 주게 된다. 아기를 낳을 때면 몸속의 많은 피들을 아이를 위해 흘리고, 젖을 먹이며 또한 자기 몸의 일부를 아기에게 준다. 그러다보면 여자의 살과 피 뿐만 아니라 뼈 속에 든 영양분도 남아 있지를 못해 쓰디 쓴 여자의 삶은 그 뼈를 이렇게 가볍고 검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그 온 몸이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분이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두 번째로 어머니는 스승 그 자체이다. 영국 속담에 “한 사람의 좋은 어머니는 백 사람의 학교 선생에 비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도 “나를 만든 것은 어머니다”라고 말하고, ‘헨리 위드 비치’라는 사람도 “어머니의 가슴은 어린이의 교실”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영국의 국민적인 영웅이었던 처칠(1874-1965)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런던의 한 신문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쳤던 교사와 교수들을 취재해서, '위인을 만든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보도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본 처칠이 신문사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귀 신문의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이 빠졌습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바로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머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자녀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세 번째로 어머니는 신앙의 베이스캠프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보라.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19명의 자녀를 성자처럼 믿음의 자녀로 키워 감리교의 어머니로 유명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마흔 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홉 명의 자녀를 길렀던 무디의 어머니.그 어머니가 있었기에 무디라는 영적 지도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무디는 "내가 성취한 것 가운데 위대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어머니의 덕택이고 은혜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신앙의 지도자들은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 기도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자녀의 일생을 만드는 기도의 일꾼이며, 그 가슴은 사랑을 가르치는 인생의 학교이며, 그 눈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통로인 것이다. 네 번째로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이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힘은 어린이에게서 나오는데, 그 어린이는 훌륭한 어머니들로부터 비롯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 어머니들에 의해 국가의 미래도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당시, 어머니의 영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유명한 참회록을 후세에 남긴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였다. 아그리피나는 그녀의 남편 클라우디오 황제를 암살시키고 그녀의 아들인 '네로'를 곧바로 왕위에 즉위시킨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자신이 했던 그대로 자식인 네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이 그의 내적 갈등과 정신적 고뇌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 그래서 방탕의 길을 걸었을 때, 자식을 위한 눈물의 기도로 아들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든다. 이렇듯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으며 위대한 어머니의 배후에는 반드시 위대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어머니는 친구요 또한 애인이다. 어머니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분은 없다. 그분에게만큼은 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어머니. 무슨 일이 생겨도 감싸 주고 덮어주는 어머니. 그러한 어머니가 계셨기에 우리들은 그렇게 그 어머니를 평안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머니는 애인이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에도 그 마음은 어머니께 돌아간다. 외로워도 슬퍼도 그 마음은 어머니를 찾는다.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 아이는 드물다. 고향이 주는 그리움과 평화와 안심이 모두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또 자녀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된다. 어머니의 격려 한마디가 자녀에게는 엄청난 위로를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스위스에 있는 한 육군병원에서 한 병사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아버지는 급히 아들에게 달려왔다. "넌 죽어서는 안 된다. 여기 돈도 있고, 약도, 음식도 원하는 대로 주마." 그러나 아들은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때 아버지는 가방을 열고 빵 보따리를 꺼냈다. 그리고 한 덩이를 떼어 조용히 아들의 입에 넣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먹어라. 네 어머니가 만들어준 거다." 그 병사는 힘을 내서 그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때부터 점점 기운을 차려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힘을 주는 원천이 된다. 따스한 손길 하나가 쓰러져가는 자녀를 일으켜 줄 수 있다. 눈물 한 방울이 방탕 속에서 건져내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만큼 진실하면서도 위대한 힘을 어머니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로 어머니는 치료자라고 말한다. 필자의 기억 속에서도 어머니는 완벽한 의사였다. 아프다고만 말하면 민간요법도 동원하시고, 손으로 배를 문질러 주시기도 하고, 머리에 물수건을 얹어 주시기도 하시며, 이 방법, 저 방법을 써 가면서 낫게 해 주셨다. 그렇게 인자하고 자상한 의사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슈바이처보다도 뜨겁고 진한 체온과 정신을 느낄 수 있었던 어머니의 약손, 그 고목껍질 같은 어머니의 손은 실로 모나리자 손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여덟 번째로 어머니는 평안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보기만 해도 평안을 느낄 수 있는 분, 그 분이 바로 어머니이다.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어머니의 평균 80%가 자기 아이를 왼쪽 팔에 안고 아이의 머리를 왼쪽 가슴 쪽으로 대며 어르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가 아기의 귓전에 울리도록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아이의 머리를 대고, 아이는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에 편해지고, 심장과 더불어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 쌕쌕 잠든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의식적인 현상이 아니고 본능에서 오는 자연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숨소리, 어머니의 심장 소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소리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우리의 어머니들의 이미지가 바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가? 아홉 번째로 어머니는 희생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영국의 한 젊은 어머니가 사우스 웨일즈 언덕을 가로질러 넘어가고 있었다. 그 어머니의 팔에는 작고 귀여운 아기가 안겨져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변덕이 심해서였는지 갑자기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그 눈보라를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죽게 된다. 어머니의 실종 소식이 알려지자 수색자들이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결국 눈더미 속에서 그녀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품안에는 어머니의 겉옷으로 꽁꽁 싸여진 한 사내아기가 있었다. 겉옷을 벗겨내었더니 놀랍게도 아기는 별탈없이 건강하게 살아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기에게 입혔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마저 어린 아기를 위해 바람막이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모성애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세월이 흘러 이 아기는 ‘데이빗 로이드 조지’라는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위대한 수상이다. 그 어머니의 희생이 영국의 수상을 만든 것이다. 열 번째로 어머니는 신비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전인 웹스터에는 어머니를 '여성인 부모(female parent)'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해석이 못마땅했던 어느 분이 그 사전의 발행인인 ‘웹스터(webster)’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는 백과사전이요, 또 일류 수리공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간호사이기도 하고 잃어버린 것을 쉽게 찾아내는 탐정이기도 하다. 피곤해 할 줄 모르는 재봉사이기도 하고 훌륭한 투자자이기도 하다. 더불어 어머니는 십자가에 달린 순교자이기도 한데, 그래서 어머니의 인내는 치약 튜브 같다고 말한다고 한다. 다 쓴 것 같아도 짜면 아직 남아 있는 그런 것 말이다. 어머니는 희생이란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희생한다. 어머니는 아픔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존재인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라는 존재는 계산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신비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그 본연의 어머니 모습들을 잃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어머니의 성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비교한 그 이유를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성취하기 위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본성들을 우리들의 자녀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그 마음에 그 씨를 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 자녀들이 세상적인 명예와 부귀를 쟁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모성애를 주신 분명한 이유이다.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자녀들은 장성해서도 하나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마음 속 깊이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자녀들은 하나님을 나와 거리가 있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유익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인가?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어머니로서 어떻게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계신가? 많은 깨달음과 함께 깊은 묵상이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해 본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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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내가 원하는 한가지
[가정클리닉]내가 원하는 한가지 추부길 가끔 아내와 함께 강단에 함께 설 때가 있다. 그럴 때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내가 너무 젊어 보인다는 얘기다. 그래서 아내가 꺼내는 말이 바로 이것, "너무 젊게 보여서 죄송합니다"이다. 내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추부길 목사의 아내라는 소개를 받는 순간, 여러 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정말이에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 봐요?"이다. 가끔은 바람피는 남자 정도로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해외 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입국 서류를 주는데 세관 신고서는 원래 부부당 하나만 주면 된다. 그런데 스튜디어스가 2장을 주는 것 아닌가? 그때 "아, 스튜디어스가 나를 바람 피우는 남자로 취급하나보다. 하기야, 워낙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러기도 하겠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기야 나는 아주 젊어서부터(?) 머리가 하얗다 보니까 가끔은 나의 선생님과 동격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니 문제는 순전히 나에게 있으렸다! 그렇다고 '나는 바람피는 남자가 아니라 정식 부부입니다!'라고 광고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의 멘토이신 원효식 교수님도 자주 나를 놀린다. '자기하고 같이 다녀도 친구라고 할 것이다'면서 한마디로 영감 취급을 한다. 그렇다고 머리 염색하는 것은 애당초 내 계획에 들어 있지 않다. 아내도 반대를 한다. 하나님께서 멋있게 염색을 해주셨는데 구태여 머리 속까지 염색약 침전물이 생긴다는데 염색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내 아내인데 그 단골 고객이 반대하는 염색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상담사역을 해야 하는 나는 그 흰머리가 오히려 더 유용하기도 하니 검은 머리로 염색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겨우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내가 너무 젊어 보인다는 것이 오히려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그 마음의 행복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얼굴 아니겠는가? 얼굴이 그만큼 젊어 보인다는 것은 나의 아내가 그만큼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자 나이 40이전에 얼굴이 예쁘면 그 여자가 얼굴을 어떻게 가꾸어 왔는가를 물어 보고, 40이 넘어도 전혀 40 나이답지 않게 얼굴이 예쁘면 그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해 주었는가를 물어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곧 내가 그런대로 남편 노릇을 잘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가끔 내가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해서 아내에게 정말 행복하냐고 물어 본다. 아내는 즉각 대답을 한다. "그~럼! 나 같이 행복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며 "당신 덕분에 살지요!"라고 한다. 아내가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인 나 또한 기쁘고 즐거운 일 아닌가?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외치는 찬양이 있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역시 나를 그야말로 열렬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이 그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것처럼 내 배우자의 기쁨이 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푯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그러한 간절함이 있는가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달려 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가? 만약 돈이나 명예를 위해, 아파트를 위해, 부귀를 위해 그저 달려 왔다면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재물이나 명예는 그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멋지게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가 각오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내 배우자의 기쁨이 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겠다는 결단이다. 서로가 기쁨이 되는 존재, 서로가 사랑을 주는 존재, 서로가 천국의 향기를 주는 존재로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도전하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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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상처받은 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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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가정클리닉]행복을 꿈꾸십시오.
[가정클리닉]행복을 꿈꾸십시오. 추부길 얼마 전의 일이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싱글 벙글이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전혀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백화점에 가서 당신 와이셔츠를 하나 사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자기 옷 사는 것도 아는데 뭐가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아내의 그 말이 가슴깊이 와 닿았고, 덩달아 행복해졌다.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 이 질문에 대해 아내가 하는 대답이 나를 더욱 감동시켰다. "이 와이셔츠를 당신이 입는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와이셔츠를 사줄 당신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은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라 하지 않는가? 아직 남편이 입어 보지도 않은 새 옷이지만 그 옷 속에 가려진 남편의 체취를 미리 맡으면서 행복에 잠길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여유로운 사랑의 향연인가? 당장 입어 보라는 아내의 재촉에 한번 걸쳐 보았지만 그 옷을 대충 입고 싶지가 않아서 오는 주일날 그 옷을 처음 입어 보겠노라고 답을 하면서 다시금 마음 깊은 곳까지 저미어 오는 행복이 있었다. 요즘 부부간에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고들 말을 한다. 이혼까지는 안 갔다 할지라도 '너는 너, 나는 나'같은 정서적 이혼 상태에 빠진 부부들도 많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고갈되어 버린 부부. 상대방을 위해 뭔가를 해 준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아까운 부부들을 본다. 그런 부부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 차디차게 식어 버린 사랑의 마음이다.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 똑같이 영하의 냉랭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찌 그들 가운데 화초와 풀이 자랄 수 있으랴!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의미가 되어 주는 것 자체가 삶의 에너지요, 원동력이 되지를 않았던가? 그 때의 사랑은 다 어디를 가고 지금은 껍데기만 남았단 말인가? 그럴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이 바로 첫사랑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사랑을 받게 될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 얼굴을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해도 그저 가슴이 콩콩 뛰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베푸는 그 조그마한 사랑으로 인해 감동받게 될 그 모습을 그리면서 흐뭇해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마음 같기만 한다면 어찌 문제가 생길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갈등도 생기고 마음도 차가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은 결단 밖에 없다. 내가 철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그 마음만이 우리를 첫사랑의 행복으로 되돌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기억은 다 제하여 버리고 오직 좋은 추억만을 마음 속 깊이 새기자. 그래서 내 마음을 우선 행복하게 채워 보자.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상대방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그마한 지혜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남편의 호주머니에 모른 척 넣어 놓은 만원짜리 한 장. 그 돈을 꺼내면서 횡재했다고 좋아할 남편의 모습을 그리면 그냥 기분 좋지 않는가? 기왕 시장 간 김에 남편을 위해 하나 더 산 속옷. 그리고 그 속옷을 입고 기분 좋아할 남편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저 좋지 않는가? 아내가 잠들어 있을 때 싱크대를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그 다음 날 그 사실을 발견하고 기분 좋아할 아내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신이 나지 않는가? 기왕 살아가야 할 부부인데 멋없이 사는 것보다는 신나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것 아닌가? 내가 먼저 미리 행복을 그리면서 상상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면 그 감동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오늘부터 꿈을 꾸자. 행복이 우리 가정에 넘치는 꿈을 말이다. 사랑이 가득한 우리 집을 마음속에 그리라는 것이다. 감동이 물결치는 행복한 우리 집을 날마다 상상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의 물결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리자. 그럴 때 행복은 우리 집 깊숙이 들어 와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것이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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