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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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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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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도서]너는 내려놓으라, 내가 채워주리라!
너는 내려놓으라, 내가 채워주리라!” 당신이 내려놓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하버드 박사 이용규의 ‘천국 노마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바로 이 순간, 당신이 내려놓을 시간이다! 세상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으면 모두 빼앗긴다고 유혹하지만 하늘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온전한 우리 것이 된다고 약속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하버드 명예도, 미래의 보장도, 가족의 안전도, 심지어 헌신의 열매까지도 “너는 그저 내려놓으라”는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인도하심 따라 ‘천국 노마드’의 삶을 누리는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 우리는 그를 통해 크리스천의 제일 덕목이 되는 ‘내려놓음’의 진수(眞髓)를 맛본다. 이제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전능한 하나님이 일하실 순간! 당신이 내려놓을 시간이다. ‘천국 노마드’(heavenly nomad)란? ‘노마드’란 ‘유목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천국 노마드’란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또한 하버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 선교사로 헌신한 이용규 교수(몽골국제대학교)가 복음을 전하는 하늘나라 유목민이 된 것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진정한 영적 가치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사모하는 참된 크리스천이 헛된 가치를 내려놓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가 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소멸되고 가지려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우리의 삶 무엇으로 나의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내 것을 얻으려면 내려놓아야 한다!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점원이 바코드 판독기로 읽게 해야 했다. 그래서 점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라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려놓기 전에는 진정한 우리 것을 얻을 수 없다. 영적으로 아기인 우리는 내려놓으면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움켜쥐려 하고, 결국 그렇게 잡고 있는 한 그것들은 진정한 우리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게 된다. 우리가 잡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내려놓고 인생의 계획까지 내어드린다면 해결 받을 수 있다. 그러려면 잠시 내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차례 보기 프롤로그 1부 복의 통로가 되는 광야로의 부르심 1장 하나님은 왜 내려놓으라고 하실까? _ 15 2장 믿음으로 걷는 광야의 나그네 길 _ 28 3장 광야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_ 37 2부 가장 좋은 것을 붙들기 위한 내려놓음 1장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미래의 계획을 내려놓는다 _ 55 2장 텅 빈 물질 창고까지 하나님께 내려놓는다 _ 83 3장 생명과 안전에 대한 염려마저 내려놓는다 _ 118 4장 결과를 예상하는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는다 _ 134 5장 ‘죄’와 ‘판단’의 짐을 내려놓는다 _ 144 6장 명예와 인정받기의 욕구를 내려놓는다 _ 155 7장 사역의 열매를 내려놓는다 _ 175 3부 내려놓을수록 가득해지는 천국 노마드 1장 나의 길을 앞서 가시는 여호와 이레 _ 185 2장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_ 199 3장 버리고 낮춤으로써 얻게 하시는 오묘한 섭리 _ 212 4장 하나님 마음을 품을 때 보게 되는 큰 그림 _ 219 5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비 _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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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도서]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진정한 예배, 참예배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사 예배가 무엇인지 명확히 가르쳐주는 참예배 회복서 평생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 권의 책을 남긴 타협 없는 이 시대의 선지자 A. W. 토저, 규장에서 발간하고 있는 토저의 마이티 시리즈(Tozer Mighty Series), 그 여덟 번째 책 《이것이 예배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토저는 참된 예배가 실종되어가는 것을 이렇게 개탄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데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 예배는 ‘잃어버린 보석’(The Missing Jewel)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면류관이 있지만, 이 면류관에는 보석이 박혀 있지 않다. 지금 교회는 온갖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빛나지만, 정작 빛나야 할 보석인 예배는 실종되었다.” 토저의 이 말은 단적으로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빈곤하고 남루하며 변질되었는지 알려준다. 또 예배야말로 얼마나 더없이 소중한 것인지 그래서 더욱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역설한다. 있어야 할 가장 빛난 보석이 없는 빈 면류관을 가지고 어떻게 주 앞에 드릴 수 있는지 고뇌하는 토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예배의 본질을 확인하고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 진정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참예배의 회복을 외치는 토저의 격동어린 메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예배보다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없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난 존재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 역시 단연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 둘째, 죽은 껍데기 예배를 청산하고 살아 있는 참예배를 드리라고 촉구한다. 종교의 외피를 두른 변질된 예배를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여 일 중심이 아니라 예배 중심의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예배를 기억하며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이 드린 예배를 받으셨을지 고심하며 자신이 드린 예배를 돌아보고자 하는 모든 크리스천, 계속해서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사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원하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한 예배회복서로서 일독을 권한다. ‘4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으로 당신의 예배를 점검해보라. 당신이 드리는 예배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시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토저의 이러한 지적에서 오늘 한국교회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의 교회도 예배 횟수는 늘어나고, 곳곳에 떠들썩한 대형집회가 열리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은 넘쳐나지만 신령과 진정의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는 희소하다.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식수(食水)를 구하기 힘든 것처럼, 예배의 홍수가 난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참예배를 체험하지 못하여 영혼은 기갈로 헐떡이고 있다. 예배의 타락상에 대한 토저의 사자후(獅子吼)는 토저 당...대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경청해야 할 선지자의 음성이다. 토저의 이 책을 통해 당신은 참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격동될 것이다. 자신이 드리는 예배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내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겠노라고 결단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토저의 불덩이 같은 메시지를 경청하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데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 예배는 .1부 인간은 예배를 위해 태어났다. 1장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_ 11 2장 숨질 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예배이다 _ 41 3장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_ 61 2부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라 4장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라 _ 82 5장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참된 예배를 드려라 _ 114 3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라 6장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참예배이다 _ 145 7장 이제 예배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라 _ 163 4부 예배에 관한 31가지 묵상 로렌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가 죽어갈때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당신도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로렌스 형제는 "나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했던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것을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상대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57 오늘 나는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일꾼보다 예배 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6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따라서 우리는 충만하고 깊은 예배를 드린 후에 일 해야 한다. ---------------------------67 성령님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불같이 뜨거운 예배를 통해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69 진정한 예배자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종교 프로그램에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70 이 시대에는 IBM에서 만들어낸 기계들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래알을 세고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세심하게 변해버렸다. 이런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장로들이 누구인지, 짐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이 헬라어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밝히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세부적인 것들에 신경 쓰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하여 감사한다. 나는 여기서 더 큰 그림을 본다. 내 눈에는 장로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보일 뿐이다. 만일 당신이 예배하기를 지겹게 여긴다면 아직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74 그런데 오늘날 나를 매우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를 자판기처럼 사용하려는 경향이다. '믿음'이라는 500원짜리 동전을 자판기에 넣고 레버를 당기면 '구원'이라는 상품이 떨어지고, 당신은 이것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면 그만이다. -----------------------------75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84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86 우리의 뜻대로 예배할 수 있다는 착각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회심하지 못한 시인, 회심하지 못한 지식인, 회심하지 못한 교양인들이 이 속임수에 아주 잘 넘어간다. ---------------------------87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체험하면서도 구원의 체험을 하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이방인들의 종교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에게도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있다. 이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88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없이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 가인도 그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닐 때에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90 가인의 예배는 속죄가 빠진 예배였다. ----------------------91 가인은 속죄의 핏기가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단지 예물을 가져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92 우리가 교육을 많이 받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손을 놀리는 법과 입을 여는 법에 능숙할지라도 우리에게 속죄의 핏기가 없다면 우리는 '가인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한다. 가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대수롭게 않게 여기실 것이라고 믿었다. ------------------93 잘못된 예배 중에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라는 것이 있다. ------------------------94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곧 '사마리안의 예배'이다. 이단은 모든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을 취하고 나머지를 버릴 뿐이다. --------------------------95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태기도하고 빼기도 하는 짓을 자행한다. 특히 심리학, 인본주의 및 온갖 종류의 종교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자행한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의 예배'이다. -----------------------97 또 다른 잘못된 예배를 들라면, '자연숭배'를 들 수 있다. -----------------98 어떤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로 착각한다. ---------------99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100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101 그들은 나름대로 감정을 느꼈지만, 하나님께 다다르지 못한다. 이것은 무서운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나 언제 하나님 앞으로 부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108 종교인들의 엄숙한 오르간 소리와 아름다운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할지라도 진리와 성령님이 없으면 참된 예배도 없다. --------------------------------112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크고 넓고 포괄적인가! 회개와 중생과 성령님의 임재는 필수적이다. --------------------113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예배는 태도이다. 내적 태도이다. 육체적 태도가 아니라 정신적 태도라는 말이다. -----------------115 예배는 마음으로 느끼고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감탄을 겸손히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다라서 예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119 모든 사람이 기술자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는 감정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목사'를 '영적 기술자'라고 부르는 시대가 장차 오지 않을까라고 추측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술적 개념, 과학적 개념 그리고 심리학적 개념으로 바꾸어버렸다. ----------------------120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말하자면, 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들에게 갑자기 예배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122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125 그들은 '나', '나를',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없애고 그 대신 '우리', '우리를',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라는 문장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고쳤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감히 '나'라는 표현을 사용 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주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137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집사와 장로와 목사들이 교회를 경영하면서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닌가?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건성으로 드리는 사람은 교회의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거나 투표할 권리가 없다. ------------149 예배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 이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다른 일보다 내게는 예배가 가장 소중하다. ----------------151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것이 예배의 묘미이다. --------------152 이런 감동을 얻기 위해 노력해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158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편 45:10,11) [출처] 이것이 예배이다. A.W 토저 |작성자 빛의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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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9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서론 @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풍성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용서의 3가지 요소 : 손해, 손해로부터 발생하는 빚, 그리고 빚의 탕감 1. 성령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갈5:22~23,25 갈5:19~21 갈6:7~8) 2. 다른 관계까지 파괴한다 3. 거부감에서 생긴 것을 부적절한 방법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4. 거절당한 마음을 보상 받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용서함으로 자유를 누리라 1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라 1. 용서 받아야 할 인간 - 하나님은 죄의 댓가 이상을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의 교제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원리 -죄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은 용서의 원리를 주셨다 2. 용서. 하나님의 선물 -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주신 유일한 해결책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3. 믿음은 용서로 통하는 문 -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용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법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미 용서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 4. 죄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이신다. 즉, 이말은 아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용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속히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는 데에 있다 5. 친밀감을 회복케 하는 고백 - 고백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미 받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제2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용서하라 1. 내적고통 - 내적 고통은 쉽게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이 우리 삶에 뿌리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깊이 상처 받았을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내적 고통의 영향 -육체적 질병 -관계의 파괴 -황폐한 영적 생활 #내적 고통의 극복 - 내적 고통을 다루기 위한 동기(눅6:36,37, 갈2:20) #내적 고통의 제거 - 상처목록 - 내 잘못 목록 - 하나님 용서 목록 - 나를 괴롭혔던 자를 하나님 손에 있는 도구로 보게 해달라고 간구 - 그 사람에 대한 고통 간직하고 있었던 것 용서해 달라고 간구 - 내 태도에 대한 전적 책임 - 용서 2. 상처를 안고 살아 갈 것인가? - 잊혀지고 묻어두었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용서하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수술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그 과정에서 흉터는 남겠지만 반드시 치유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의 10단계 1. 상처받는다 2. 충격을 받는다 3. 피하려고 한다 4. 잊으려고 한다 5. 부정한다 6. 숨긴다 - 거친기질, 예민함, 수줍음, 비판적 성격, 질투 등 이것은 모두 거부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7. 도망간다 -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존경심을 파괴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힘들었던 날들을 함께 견뎌 온 결혼 생활에 꼭 필요한 신의와 의무마저 손상시킬 수 있다 8. 진실을 발견한다 9. 고백한다 10. 벗어난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이유 -이기심 -자존심 -낮은 자존감 :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우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찮게 느낀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착각 : 대화 중에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꺼림직한 구석이 있다면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 곁에 가는 것이 여전히 편안하지 않다면 지난 일들 중에 자꾸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계속 긴장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때의 상황을 완전하게 해결한 것이 아니다 -고통의 두려움 -방법을 모름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 : 하나님께서 내가 한 모든 일을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하나의 의지적 행동이었음을 기억하라 그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오해 -상처 준 사람을 이해하면 용서한 것이다 -시간이 상처를 치유해 준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다 -찾아가서 용서한다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 -자신이 용서 받았음을 인식하라 -상대방의 빚을 사면하라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다른 사람들을 성장의 도구로 바라보라 -화해하라 *다시 상처를 준다면 : 용서가 우리 쪽에서 베푼 자비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오는 압박과 억눌림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용서한 뒤 변화 : 반감 사라짐 쉽게 용납함 행동보다 그 사람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김 4. 자신에 대한 용서 : 예수께서 모든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신앙 훈련도 소용이 없다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 감각 회복 -행복한 결말은 용서를 받는 데서 오는 것이지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즉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속하는 사실이지 우리의 느낌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시103:10~14)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결과 -죄책감 -불안 -무가치하다는 느낌 -강박적 행동 -가장된 겸손 :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현재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계속하실지 조심스럽게 주목하여 보는 것이다 -자기박탈 :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는 우리가 책임져야만 한다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이유 -용서 받으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 용서는 단순히 받고자 하는 이에게 자유롭게 제공되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다 -자신에 대한 실망 -죄에 대한 무감각 -또 다시 죄를 짓게 되리라는 생각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 -문제의 인식 -죄에 대한 회개 -신뢰의 재확인 -자유함을 고백하고 받아들임 3부 넘어진 형제를 도우라 1. 형제가 넘어질 때 : 넘어진 형제나 자매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책임이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섬세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는 근본 원인 -우리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적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언제 죄를 짓게 되는가?(갈6:1~5) : 부주의한 삶, 무지,유혹, 자만심, 유체적 피곤, 사탄의 공격, 중압감 *회복의 과정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 시각에서 볼 때 죄가 되는 경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게 한다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도록 인도한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처벌을 감사함으로 따르도록 인도한다 *회복을 돕는 자의 마음 가짐 - 온유함 (이해와 용납), 겸손함, 사랑함 결론 용서는 자유함을 준다 @용서 받을 주 없는 죄 - 강퍅한 마음(성령의 거스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단계 -다음과 같은 것들은 용서가 아님을 깨달으라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정당화 하거나 이해, 변명해 주는 것 +죄를 잊어버리는 것,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것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분노하고 화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 +당신이 상처받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 -종종 용서하기 위해 직접 대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한 계절 정도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라 -간구하라 -성령께서 마음 속에 가르쳐 주신 모든 내용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라 -의자를 두개 준비하고 그것들을 마주보게 놓으라 그리고 한 의자에 앉으라 -상처를 모두 들추어 내라 -의지적 행동으로서 단번에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라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고통스러웠던 상처에 대해 감사하라 -기도하라 : 나는 용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납하셨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을 용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때의 상처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당신도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아무것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워진 것입다. -고통스러웠던 상처에 대한 기도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주 예수여 이 상처 대신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해 주시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대적하는 영에게 내어 주었던 권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로 찾았습니다. ---를 향한 나의 태도 때문에 내 삶 속에서 사단에게 내어 주었던 마음을 도로 찾았습니다. 이제 이 마음을 공의로우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드립니다. [출처]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용서 - 찰스 스탠리 |작성자 좋은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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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2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A. W. 토우저)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A. W. 토우저) 첫째, 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육적인 것과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 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 「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 즉,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위하지 않고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남이 나보다 높아지는 것을 싫어할 뿐아니라 내가 남보다 못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배가 아프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안다. 다섯째, 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 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 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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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책> 프란시스 쉐퍼의 「진정한 영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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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5장 십자가와 방법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5장 십자가와 방법 Philip E. Howald, Jr. 십자가가 방법이다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이교도들을 교육시켜 점진적으로 그들을 얻기 원하는' 계획에 근거해서 선교사역이 진행되었던 그런 지역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한 은퇴한 선교사에 따르면 이 지역의 사역 초기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할 것인지 아니면 학교를 세워서 자라나는 세대를 키워 그 학생중 그리스도를 만나게된 학생들을 통해 그 나라를 복음화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후자를 선택하기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이 은퇴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 오늘날 와서 보니 너무 늦긴 했어도 우리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알게되었다. 그결과로 그 나라에서는 복음이 묶이고 말았다. 첫 번째 계획을 따랐더라면 박해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피흘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쯤은 구름이 걷히고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메시지는 물론 우리의 방법에 있어서도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위대한 원칙을 분명히 해준다. 메세지에 관해서 정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방법에 있어서는 십자가를 부인하기란 너무도 용이하다. 우리는 타락한 영웅의무덤가에서 열정적이고 먼지를 뒤집어쓴 선교사와 함께 서서 "성공을 보장해주는 모든 계획들 중 가장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것으로 한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주여, 주님이여, 우리로 위대한 밀알되신 분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증거하는 자들의 임무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옛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 "그리스도와 자기자신을 동시에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시라는 인상을 동시에 줄 수는 없다 우리의 최고의 임무는 전심으로 복종하고 순복하는 자세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슈를 창조해 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들로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생명과 죽음, 하늘과 지옥을 보도록 해야한다. 그들의 답변은 긍정(Yes)이든 부정(No)이든 나와야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중립적 입장이 아닌 어느 한 결정이든 내리도록 촉구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께서는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부여받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오늘날 복음은 이 권세를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힌 손에 의해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만 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복음의 대사로서 우리가 지닌 권위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복음이 영혼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타협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전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사람만을 기름 부으실 수 있다. 한 나이든 군인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어떤 유보적인 자세를 지닌 채로 나에게 오는 사람은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않는 군인들을 전쟁에 보내고 싶다." 두가지의 강력한 동기 꺼지지 않는 열심을 갖도록 해주는 두가지 강력한 동기에 대해 그 위대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기에 우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노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로 이것이 사도적이며 성경적이며 신성한 순서이다. 바울은 멸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어 두려움과 연민에 의해 행동했다. 오늘날도 바로 이와 같은 순서가 다시 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설교는 너무도 "사랑스럽다." 우리의 설교는 그저 두려워 않는 이 세대의 겉만 핥고 있는 셈이다. 노아의 날들과 동일한 이 세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아는 자신과 가족을 도피시키기 위해 "두려움"에 의해 행동했다. 우리는 매년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람들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동기들 가운데 "두려움"이 무려 60-75%로 나타났다. 나머지 동기들로는 평화, 기쁨, 안식, 해방을 얻기 위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5-10%정도가 사랑이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100명의 대상중 단 한명도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이번 조사에서도 66%는 두려움 때문에 구원을 받게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영혼을 구원시키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실에 근거해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감상주의에 입각해 "사랑"만을 외쳐대서는 안된다. 바울은 또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고 권고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순서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중시해야할 첫 번째 것은 사랑스럽게 혹은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영어로 보면 Speaking the truth in love 임을 염두에 둘 것)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이 순서를 뒤바꿔버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계명을 지키기 위해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한답시고 하나님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아울러 눈물어림, 다정함 이 두 가지가 초대교회들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온 "침입자"들처럼 강력한 주님의 군사가 될 수있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이 두 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로 이끌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도 살 것이라" 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갖고 있었기에 능력으로 두려움 없이 진리를 말하였으며 사랑으로, 건전한 영으로 진리를 말하였다.이와 같은 영으로 제시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모습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겠는가? 그들이 로마제국을 뒤집어 엎고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게 한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이는 주님의 "침입자"들에 대해 A.J.고든(Gordon)박사가 증언한 바를 들어보자 : 이들은 세상으로부터의 도움과, 통치자들의 후원과, 재정적인 채무와 세상적인 방법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는 그들의 왕을 세상과 타협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들 침입자들은 보이지 않는 기지로부터 유지되고 있었고 로마제국의 도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사령관의 리더쉽을 더 신뢰하였다. 이것은 이교도들을 매우 당황케 하였고 화가 나도록 만들었다. 사실 이들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신들을 내버리지 않은 채로 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제시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를 수용하고, 불평을 아니하며, 타협을 아니하고 담대하고 철저하게 "자아"라고 하는 우상을 거부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은 고통 다시 한번 권면하며 동시에 경고하거니와 독자 여러분들중에는 육신적인 방법을 버리기 위해서 수많은 죽음으로 여러분을 이끌고 갈 고뇌와 내적 고통을 통과해야만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 여러 위원회의 결정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혹은 자기자랑, 으스대기, 혹은 자기선전 등에 빠져 결국에는 십자가가 삶에 적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경우도 있다.그러나 당신의 회중들의 세속적인 모습 뒤에 십자가를 적용하기 전에 당신 자신부터 먼저 "육신에 대한 신뢰"를 전부 포기하여야만 한다. 좀더 담대하게 말해보도록 하자. 솔직히 말해 나는 평범한 사역자들을 괴롭히는 비극적인 문제에 대해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노선을 걷고 있다. 실로 가장 비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가 이렇게말했다 : 우리는 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통은 거의 없다. 우리는 많은 일을 했으나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분의 강력한 사랑에 너무도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문을 닫아버려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그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였던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당신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근심과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당신은 사울처럼 자신의 왕국을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십자가를 붙든 사역자보다 실제로는 더 큰 고통을 당했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구했을 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마저 그 생명을 잃은 셈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일을 망칠 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과 평안도 망치기 때문이다. 당신의 문제는 당신의 유일한 영감으로 그리고 당신의 유일한 매력으로서의 십자가를 붙드는 대신 당신의 목표에 모든 것을 바쳐왔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의 사역을 일으키는데 야심을 품었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이용했던 것이다. 당신의 육신적인 야심과 육신적인 계략들을 잘라내려고 결심해보라. 그러면 당신은너무도 두려워 온몸이 마비되는 것같을 것이다. 그때부터 당신은 달라진다. 당신은 바보와 광신자로간주될 것이다. 당신의 성도들, 주일학교 학생들,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낮출 때 당신이 겪게 될 수치는 작은 것이 결코 아니다. 동료 사역자들앞에서당하게 될 경멸은 또 어떠한지... 나는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 당신을 어떻게 위로해줄지 알고 있다. 자 힘을 내라. 일단 당신이 하나님의 용광로의 불안에서 빚어지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종교적인 자아의 냄새를 더 이상 풍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식주의, 냉랭함, 육신적 완고함과 같은 것들에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옛 가죽에다 새포도주를 담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죽음을 맞이하라. 무엇보다도 더 이상 "죽은 것들, 쓸모 없는 것들, 겉치레들"을 주님께 바치는 것을 거룩한 마음으로 중단하라.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라. "효과적인 독특함이 비효과적인 평이함보다 천배나 낫다"(D.M.Thornton) 온전하지 못하고 반쯤 품은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계산된 사랑이야말로 교회의 수치요, 하늘의 슬픔이며 지옥의 경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것들은 받지 않으신다.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 아직도 부서지지 않는 의지 아직도 부서지지 않고, 완강한 마음과 자기 의지로 가득 차있다면 T.C.Uphan 교주의 충고를 듣기 바란다 : (그는 지난 세기에 살았던 사역자요 신학자였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배우는데 게을렀고 마땅히 순복하기를 꺼려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것이 되기를 원하셨고 의도하셨으나 그들의 내적인 구속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우선 한가지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주었으며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유업으로 갖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이외에 뭔가를 더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우상들을 동시에 갖고 싶어하는데 이는 헛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잠시동안 그런 상태로 머물러 꼼짝달싹 아니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따라서그들이 친절한 방식으로 배우기를 원치 아니한다면 그들은 두려운 방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섭리의 칼, 성령의 칼이 그들과 세상을 묶어놓은 모든 줄을 다 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재산, 그들의 건강, 그들의 친구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길 앞에 추락하고 말 것이다. 소망과 기쁨으로 짜여진 내적 사람, 자기사랑과 교만으로 살진 속사람은 먼지처럼 안팎으로 떨어버리게 될 것이다. 불로 태워지고, 물에 휩쓸리며 깎여지고, 다듬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될 것이고 이 두려운 침례를 통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어 하나님께서만이 참되시고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배우게 될 것이다." 불같은 시련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불같은 시련을 통해 그분의 영적 지도자들을 선택하신다. 이와 같은 지도자들은 어떤 인간이나 인간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공회도, 대회도, 노회도, 학교도 그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빚으신다. 이것은 사역자들 뿐 아니라 일만 성도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진리의 전위대로서 영적지도자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심령이 가난한 영혼들에게 권면코자한다. 포위된 가운데서 혹은 전장터에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는 군인들처럼 영적인 자유를 갈구하라. 성령의 능력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을 온 마음을 다해서 믿으라. 앉아서 대가를 계산해보라. 당신의 삶과 당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날카로운 날이 느껴지게 될 것을 분명히 확신하라.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오늘날 가장 부족한 것은 거룩한 해방을 가져다준 내적인 십자가처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강력한 해방이다. 이 영적 해방이 없는 큰 자나 작은 자앞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저 없이 말씀을 전파할 수가 없다(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영적인 해방대신 육신적인 경박함만이 난무하고 있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의 기독교회가 전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을 당시(행4장)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의 영적 담대함이란 다름 아닌 주저 없는 복음전파였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들 어부들에게는십자가가 실제적이고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못박혔고 결국 자아로부터 해방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입을 열었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했다. 종교인들은 진노했으나 이들 그리스도의 포로들은 자유로웠다. 그들이 세상의 그 어떤 육체에게도 아첨하지 않았고 그 어떤 육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초기의 무시무시한 위협 속에서 초대교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들은 위선자들의 회심을위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조심하여 더 부드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를 제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생명은 더욱 위험스러운 지경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기도에 몹시 기뻐하셨고 (그들의 기도는 담대함과 비타협적인 영으로 드려졌다.) 이에 온 회중앞에서 집이 진동하도록 하심으로써 응답하셨다.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목표도 주장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살아계신 머리셨다. 그들에게는 성공도 실패도 안중에 없었다. 그분은 최고로 나약함 가운데서 죽으셨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죽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들은 사람대신 하나님께 복종하였다.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에 그들의 운명을 맡겼고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서 전파했을 때 십자가의 말씀이 양날선 칼처럼 그들의 "마음을 찔러왔던 것이다." 날카롭고 천상의 기질을 지닌 양날선 칼. 그 상처 또한 이중적이로다. 이 칼날이 번쩍이는 곳에는 죄에 대해 탄식하는 모든 자에게 죄에 대한 죽음과 생명이 있도다. 칼이 번쩍이자 싸움은 가라앉았고 전쟁이 있었으나 그 속은 화평이로다. 육신을 자랑하고 모두가 능력을 경배하는 요즘 세대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무기는 의인화된 "어리석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다." 바울을 이렇게 말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가치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고전1:27-29). 바로 이것이 Charles Fox(찰스 폭스)가 "인간의 나약함을 줄이는 하나님의 "나약한" 부대" 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다. 이 군대에 입대하려면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지혜를 얻기 위해 그분을 의지할 만큼 충분히 어리석다면 그분의 능력으로 덧입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나약하다면 하나님의 명예 이외의 그 어떤 명예도 갖고있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낮아져 있다면 그분의 발밑에 머물러 있을 만큼 충분히 멸시를 받는다면 그분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격려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복음을 전해 받은 "가난한 자들"에 속해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으며, 강한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경멸받기에 조차도 합당치 않은 그런 미천한 자들을 택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가난함, 어리석음, 무의미함, 심지어는 덧없음을 결코 멸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이모든 것들은 장애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실 때 중요하게 간주하신 요소들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의 숨겨진 전능하심에 내어 맡김으로써 그분께서 주신 기회를 붙들어야 할 것이다. 작은 자의 능력 성경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미미한 것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가 많이 있다. 이, 메뚜기, 파리와 같은 미물은 이집트를 괴롭혔다. 시리아의장군 나아만을 치유하고 재생토록 하는데 쓰임받은 하녀를 생각해보라. 물맷돌로 무장한 어린 소년이 민족을 구원한 것을 기억하라. 손바닥크기만한 자그마한 구름이 엄청난 비를 가져왔다. 여리코성은 믿음의 외침과 나팔소리에 무너져내렸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린아기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 아이 안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이 숨겨져 있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이가 수많은 사람을 먹였으며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135,000명 되는 군인들을 나팔과 등불과 항아리로 멸망시켰다. 이 모든 것과 그밖에 수많은 일들이 "그분의 임재앞에서 그 어떤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의 등불을 위한 항아리들- 들으라! 외침이 뻗어간다. 만드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깨질 준비가 되어있는 그 자세가 주님의 도구들의 특징이니 빛나는 말씀을 운반하기에 합당한 도구로구나. 빛나는 말씀을 운반하기에 합당한 주님의 도구중의 한 사람은 마틴 루터였다. 그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능력이 "십자가의 숨겨진 말씀"안에 담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담대한 진리 선포는 로마의 우쭐했던 종교를 당혹케 만들었고 생명과 빛과 자유의 흐름에 불을 당김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모든 교황을 괴롭히고 있다. 보잘것없는 한 수도승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 나의 올바른 주장 옆에는 교황에게 치명타를 가했던 나의 비천함과 나의 보잘 것 없음이 놓여있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한낱 일개 수도사에 불과한 녀석이 감히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 장을 끝마치면서 모든 사역자, 선교사, 주일학교 선생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들 모두에게-우리 중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닌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꼭 한마디 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 모두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아님과,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과,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함으로 십자가의 무한한 능력을 충만히 받아서 이 불신의 시대에서 오히려 이와 같은 우리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하나님을 위한 강력한 군대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끝-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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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4장 십자가와 왕관(면류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4장 십자가와 왕관(면류관) Philip E. Howald, Jr. 십자가를 짊이 상급임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박해했을 때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 "일본은 일부러 노력하려고 했을지라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더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악의 사태가 우리에게 최고로 유익한 상황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도들이 일곱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불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박해받는 것 그리고 야수에게 원형 경기장에서 물려 뜯기는 것, 총살당하는 것, 화형을 당하는 것 그리고 온갖 고문에 시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보좌로 올라가는 계단인 것이다. 교회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보헤미아 출신의 한 귀족이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도끼로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 예수회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신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아니요,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소. 이제 나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이에 대해 그 예수회 신부는 "그런 약속은 사도에게 주어진 것이지 당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오"라고 반박했다. 그렇지만 이 신실한 성도는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그 다음 구절을 잊으신 모양이구려,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니라'." 고난으로 부름을 받음 우리는 죄인으로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성도가 된 우리는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에게도 역시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그의 속죄의 역사에 있어 그 누구와 아무런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은" 여러 순교자들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신 최초요, 최고의 본이 되셨던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진" 셈이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순교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자신의 고통과 영광을 연관지으셨다. 골고다와 영광은 구세주의 생각 안에 하나였다. 골고다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 십자가는 분명히 보상을 가져온다. 영광에 앞서서 십자가는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는 의가 있는 동시에 의의 면류관이 있고 생명이 있는 동시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왕국의 자녀가 되는 것과 왕국에서 보상을 받고 면류관을 쓰는 것은 다르다. 면류관은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들의 몫이다. 십자가로의 부르심이 면류관으로의 부르심이란 사실은 확고부동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있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의 "저주받으신" 왕께서는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우리를 사로 잡으셔서 우리를 자신의 병거바퀴에다 붙들어 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가장 나약한 순간에 그리고 모든 것을 잃으시는 그 순간에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교만과 허황된 자아를 멸하시고 왕으로서 통치하신다. 높이달리신 그곳에서 우리의 왕께서 다스리신다. "유다지파의 사자"이신 그분께서는 "보좌의 한가운데 서 계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다윗이 노래부른 그 진리 여기에서 깊이 성취된다네 "온 땅에 주께서 왕이시라 말하라" 보라! 왕께서 십자가에서 다스리시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모순"으로 인해 -물론 겉보기에 그러한 것이지만-매우 당혹스러워 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왕이신 메시아와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는 메시아가 동시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메시아와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 즉 두 분의 메시아가 있는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풀리게 된다. 십자가의 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는 다만 속죄를 위한 것뿐 아니라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말고 그 누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실 자격이 있단 말인가? 머리와 지체는 하나이어야 한다.우리는 십자가의 교리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의 인내를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구원받는 것을 금하시고 아울러 십자가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금하신다. 제자는 그의 주님보다 나을 수 없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남겨두신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 피어슨(Pearson) 주교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본질상 이 세상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기독교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1.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를 정죄한다. 2. 기독교는 육신과는 맞지 않는 명령들을 요구한다. 즉 원수들을 사 랑하고 십자가를 지라. 3. 기독교는 믿기지 않는 약속들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서는 성취될수 없고 달성할 수 없는 것들로 부활의 기적에 근거하는 약속들이 그것이다. 4. 기독교가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박해"를 받을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근거 있는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이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성공하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제시되었다. 십자가위에서 기독교신앙과 생활의 모든 원칙이 분명히 보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그를 따르는 우리들이 지고 갈 십자가)에서 "해아래의 삶"이 제공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를 포기하고 "잠시동안" 고통 당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A.D.100년경에 살았던 한 이교도 루시안(Samosata 출신의 Lucian)은 이렇게 말했다 :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위인을 아직도 경배한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산다고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많은 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십자가로 인해, 기독교가 이방종교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두려운 반응들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근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참기 어려운 고통과 고문과 죽음속에서도 무모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성도들은 완전히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에 타락한 이 사회의 관습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 가증스러운 "제 삼류 인종"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굴욕과 하늘나라의 의복으로 옷을 입었고 이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영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교도들에게는 십자가의 교리가 보이지 않고 신비스러운 능력을 지닌 것으로 전염병이나 열병처럼 보였다. 일단순진한 사람이 이 십자가에 사로잡히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교리였다. 순교는 면류관의 길 당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께서는 그분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려졌었다. 그들은 면류관에 대해 너무도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십자가를 꼭 붙들었다. 그들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삶을 향한 길이요 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어째서 죽음을 그처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너무도 죽음을 무시하는 것 아니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한 고행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생명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빌2:5)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셨다. 이 한가지에 그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보상과 관련하여 이렇게 기본원칙을 요약하셨다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원칙을 실천해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높은 영광의 보좌에서 즉 신격의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분은 생명을 버리고 죽음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그 죽음 또한 평범한 죽음이 아닌 범죄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최고로 낮추신 그분은 높임을 받으시되 "최고의지위"에 오르셨다. 그분이 낮추어지신 데 비례해서 그분은 최고로 높임을 받으셨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칙을 마음속에 새기고 앞으로의 모든 생활을 이 보상의 원칙에 근거해서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심어놓지 않은 것을 어떻게 거둘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과연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될 것인가? 이 중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게으르고 무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란다. 보상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결코 책망하지 않으셨다. "가장 좋은 은사(선물)를 열심히 사모하라."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택하여 목표로 삼아야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견뎌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네. 그분의 최고의 선물을 받지 못할 자들은 그 다음이라네." 이 고백에 있어 처음 두 구절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으나 후반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저것 골라잡는" 자들은 실은 거부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낮춤은 결코 강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원해서 택해야 한다. 우리는 최고의 것을 택해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택할 때에만 우리에게 면류관이 보장된다. 바로 이 때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합당하게 고백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십자가 밑에 있는 그곳 이외의 것을 이 세상에서 사모한다면 그때 나는 갈보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천한 출생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마구간에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은 크리스마스 시즌에나 갖게되는 감상적인 이야기나 아닌지? 마귀는 이 놀라운 신비를 철저히 가려버렸다. 잠깐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잉태하시기 전에 자신의 어머니와, 출생지와 그의 거주지를 선택하였던 유일한 인간이셨다. 그분은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셨다. 즉 그분은 인간의 교만의 뿌리에 하나님의 도끼를 놓으시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탄생에는 그분이 후일 가르치실 내용이 전부 집약되어있다.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한단계 한단계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을 비우셨다"(Monle). 욥은 타의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셨다. 그분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타적인 "밀알"로서 땅에 떨어져서 죽으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낮추심을 어떻게 바꾸셔서 그분을 높이셨는지를 보자. 그분은 저 낮고 낮은 곳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려 올리셨으니" 이는 그분의 이름과, 명성과, 지위와 통치를 가장 최고의 위치로 높이셨던 것이다. 이 높임은 그분의 영원한 영광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자신을 낮추신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으로,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던 그 생명을 가장 높은 하늘을 채웠던 그 생명에다 더하신 셈이다. 이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드높이셨고 그분 안에서 많은 면류관으로 관을 씌우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영광은 그분의 높으심은 물론 그분의 깊으심에 의해서도 측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깊이가 높이를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의 영광에 대해 Gracey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인간성은 드높여지니 영원한 보좌의 오른쪽까지 놓여지리라. 그러나 그 영광스럽고 장엄한 보좌에서도 참된 인간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 보좌는 영원부터 그분의 것이었네! 그런데 새로운 영광이 이마에 쓰여졌으니 모든 무릎이 그분께 무릎을 꿇는다네! -F.M.Pitt- 공동 상속자 성경에 따르면 그분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했다. 자, 독자 여러분 잘 들어보시오. 당신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오만 ) 왕되신 그분과 피를 나눈 의형제요. 우리는 한 가족이란 말이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인 것이오. 그분께서는 당신과 나에게"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소. 영원하신 아버지의 자녀요 영원하신 아들의 신부이며 성령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며, 이리하여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되었네: 천사들보다 뛰어난 기쁨을 받고서 그분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니 그분의 사랑하시는 분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나의 마음의 원하는 바를 허락하고 모든 것을 내것으로 하였네 악한 권세들에 의해 두려워하나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영광의 주님과 함께 걸으리 신성한 궁전을 지나간다네 왕궁 안에서 왕비가 되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내것이 되었네 이 세상이여, 그래도 내가 자네를 시기할 것 같은가, 어디 말 해보게나? -Ter Steegen- 고난을 받던 캠브리지의 시므온이 강제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던 구레네 사람 시므온에 관한 구절을 성경에서 읽은 후에 즉시로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얹으소서" 라고 기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받고있던 박해를 승리의 면류관으로 이마에 묶은 것이었다.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허락하기를, 나도 이겨서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과 같게 하리라"(계3:21). 요셉은 주님께서 언급하고 계신 승리자였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드높이기 위해 마련하신 길은 그를 낮추시는 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요셉은 거짓 음모와 이로 인한 투옥을 통해 낮추어졌다. 그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난을 받았다. 그는 오직 "의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것이다. 그는 13년이란 기간동안 모욕과 비방과 의심과 음모를 겪었고 시험과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그를 통치자로 만들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나로 나의 고난의 땅에서 다산하게 하셨다." 고 고백을 하였다. 우리는 파라오와 함께 앉아서 그를 팔아치운 형제들을 용서하고 먹이고 돌보고 있는 요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한없는 이타적인 태도가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그 생각"을 갖기를 배운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의의 면류관이 부여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5).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기 직전 하워드(Howard)장군은 특수사단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때까지는 셔먼(Sherman)장군이 사령관으로 있었다. 워싱톤에서 군대의 인사조치를 조정하고 있던 사령관은 하워드 장군을 불렀다. 그는 하워드에게 다른 장군의 친구들이 그 사람을 그 부대의 책임자로 임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하워드는 "그러나 그것은 나의 명령 하에 있는 것이고 내가 그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데요" 라고말했다. 이에 셔먼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 "물론이요, 당신이 죠지아주와 캐롤라이나주에서 부하들을 지휘하셨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나 하워드장군,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니 실망도 잘 참아낼 수 있지 않소." " 당신께서 그와 같은 이유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신다면 답변은 하나뿐입니다. 그 사람을 지휘관으로 삼으시지요." 이에 대해 셔먼 장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좋소, 그 사람이 가 자리를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당신은 9시에 나에게 보고를 하게 될 것이며 전군의 책임자로 내곁에 앉게 될 것이요." 바로 이와 같은 일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아래서 자신을 낮춘 성도들에게도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우리를 높이신다고 약속하셨다. 자신을 낮추는 모든 일, 자아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조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모든 결단-그것이자기부인이든, 굴욕이든, 고통이든, 분리이든, 슬픔이든, 고난이든, 비방이든, 모욕이든 간에-이 모든 것들이 실상은 아래로 우리를 이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있어, 각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 주리라"(계22:12). 그분의 오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당신의 왕국이 임하소서"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십자가를 만들 만큼의 나무이면 충분합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내려오소서! 상처받으신 성전이시여 면류관을 쓰소서! 상처 입은 손이시여 홀을 붙드소서! 상처 입은 발이시여 왕좌의 발판은 밟으소서! 이는 왕국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감찰하실 그 시간을 기대하며 십자가에 못박혀 태어난 자들이여, 이는 메달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기 위함임을 잊지 맙시다. 네게는 상처자국이 없는가? 발과 옆구리와 손에 숨겨진 흉터가? 나는 네가 그 땅에서 높임 받는 것을 보노라. 나는 사람들이 너의 빛나는 별을 보고 만세 부르는 소리를 듣노라, 네게는 흉터가 없는가? 네게는 상처가 없는가? 그러나 나는 활로 상처를 입었고, 지쳤으며 죽기 위해 나무에 매달렸도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짐승들에 의해 찢겨서 기절했도다. 그런데 네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가? 상처도 없고 흉터도 없는가? 그러나 종은 주인처럼 되야 하고 나를 따르는 발은 창에 찔린 발들이라. 그러나 네 것들은 온전하니, 상처도 흉터도 없는 자가 어찌 나를 끝까지 따르겠는가? -Amy Car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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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3장 십자가와 왕의 지위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3장 십자가와 왕의 지위 Philip E. Howald, Jr. 참된 왕의 정신 그의 형은 그가 그리스도인 추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방금 전에 독살 당했다. 단 10여명의 그리스도인들밖에 없는 그 이교도 부족은 지난 경험에 의해 크리스챤 추장들은 다른 추장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 "당신은 이 이교도부족의 추장직을 맡으실 생각입니까?" 선교사가 물었다. "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직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줄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형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독살을 당했습니다." "예. 저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언제 독살 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족을 섬길 수 있는 귀한 기회지요."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한 채 그는 추장직을 수락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왕의 지위라고 하는 것은 희생적인 봉사정신이 선제조건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삶에서부터 왕이란 지위는 생겨난다. 대시인 호머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왕들은 백성의 목자라." 실로 멋있는 말이다. 참된 목자만이 참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목자가 되지 못한 왕은 왕이라 할 수 없다. 왕의 권위는 양을 돌보는 사랑 위에 근거한다.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그의 의지가 왕이 되기 위한 선결조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왕좌를 빼앗은 자아 첫 번째 아담은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는 왕으로서 창조된 것이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합당한 왕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의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자기 자신이 그 보좌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죄 아래로 팔리고" 만 것이다. 스스로가 노예가 되고 만 인간은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었다. 자아가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자아가 퇴위하리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아보다 더 강한 왕이 와서 자아를 퇴위시키고 통치하기까지는 인간은 자아 중심적인 삶을 결코 치료받을 수 없다. 자아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는 셈이다. 자아, 그대는 나의 가장 큰 배반자 나의 가장 거룩한 친구이자 가장 치명적인 원수 내가 어디로 가든지 방해하는 장애물. -Christina Rossetti-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규율을 새로 부과할 것인가? 자아에 갇혀있는 인간을 자기중심주의로부터 어떻게 해방시킬 것인가? 그를 어떻게 해야 그 묶임에서 분리시켜 그를 침탈하는 자로부터 끊어버릴 것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떻게 인간을 자아에 대해 죽게 만들 것인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단순한 능력과 거친 힘은 하나님에게는 부차적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는 섬들을 아주 작은 것으로 여기는 도다." 그가 말씀하시면 세상들은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그처럼 힘이 세신 분이건만 어떻게 하면 인간을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신중한 방법을 쓰셨다. "죄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영원히 버리도록 인간을 인도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해방 받아야만 한다. 강제적인 힘에 의해 억지로 믿고 억지로 복종한다면 그것은 창조주께 결코 영광이 될 수가 없다. 오 우리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지혜여 모든 것이 수치와 죄였을 때 두 번째 아담께서 싸우시려 또한 구원하시려 오셨다네. -Newman- 십자가로 왕좌를 회복하신 예수님 이 새로운 아담이 오신 것은 새로운 인류의 창시자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셨으며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몸값으로 주셨다. 그분께서는 죽으러 오셨고, 반역자들을 화해시키려고 왔으며, 인간을 자아로부터 내려뜨려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려고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최고의 영광의 보좌"로부터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사랑의 순종을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분께서는 완전히 자아에서 벗어난 참 인간의 모습으로 자원하여 죽음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심으로써 교만의 통치를 영원히 끝장내셨다. 그분께서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 그는 십자가를 향하여 가셨으며 그는 십자가를 왕관으로 여기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와 같이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 그의 뜻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신 것이다. 그분은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이다. 그분은 또한 죄에 대해 죽으셨다. 갈보리라고 하는 신성한 시련의 불 위에 복종하고 승리하는 생명을 새겨놓으신 그분이 이제는 "이 세상의 심판"이 다가왔다고 하신다. 인간이든 마귀든 간에 자아의 생명은 영원히 정죄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십자가에 근거해서 인간을 다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을 "설득"하신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신의 교만을 버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십자가 앞에서 서있기만 한다면 즉 만약 인간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기를 거부함으로써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면 그때에는 하나님께서도 다른 도리가 없으시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철장"이 동원된다. 이것이 하늘의 신성한 규율이다.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원수들은 흙의 먼지를 핥게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포로를 잡으신다. 갈보리는 이 세상의 모든 보좌들의 권세를 없애버린다. 이 지상의 그 어떤 권세가 인간의 자아를 보좌로부터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을 이 세상의 야망에서 끌어내릴 권세가 지상에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중의 왕(만왕의 왕)이시다. 그분은 십자가로부터 다스리신다. 이 세상 왕들은 눈짓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죽이신다. 그분은 인간을 그의 교만에 대해 죽이시며 모든 다른 이기적 욕망에 대해 죽이신다. "십자가가 한 성도의 생명을 붙들 때 왕께서도 자신의 신하의 심장을 결코 붙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이기적인 욕심을 끝장내는 심판이었기에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Huegel) 이와 같은 사랑이외의 다른 사랑들은 그것이 가족과 친족과 고국과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일지라도 저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위에서만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불멸하는 뿌리가 놓여있다. 의사들이 깨진 갈비뼈 사이에서 박힌 총알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 프랑스병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조금만 더 깊이 보십시오. 그곳에 황제폐하가 계실 겁니다." 실로 그는 그의 국왕을 심장에다 묻고 다녔던 것이다. 이것이 참 사랑이다. 오늘날 우리를 시험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환경, 상황, 가시관...등등. 그러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이 모든 일들에서 "충분히 이기고도 남는 것이다." 갈보리는 왕들을 재생산해 낸다. 이 왕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왕들로 모든 상황에서도 왕의 체통을 지킨다. 순교자 스테반은 늑대들에게 둘러싸였으나 왕처럼 군림하였다. 똑바로 바로 보는 그 머리위로 쏟아진 돌들은 왕위에 퍼부은 것들이었다. 살인자 사울은 천사의 얼굴을 지녔던 이 사람에게서 비춰지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보았을 것이다. 환난, 고난, 박해, 기근, 벌거벗음, 위협, 칼,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그 어느 때보다 깊이있게 시험할 때 그들은 자아가 내려온 그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즉 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을완전히 정복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상황에서 당신의 왕이 되셨는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통해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쇠사슬에 여전히 매여있는 동안에는 결코 왕의 직분을 누릴 수 없다. "쇠사슬을 끌고가는 자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인도의 하나님의 사람인 "기도하는 하이드(Hyde)"가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의사가 검진을 했을 때, 이 위대한 기도의 용사는-그는 지성소 안의 실질적인 왕이었다.-너무도 기도를 많이 하여 심장이 잘못되어 버렸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캘커타의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감옥에 갇혀 결국은 사형에 처해진 순교자의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너무도 기도의 사역에 전념한 때문에 기도의 부담으로 인해 심장이 잘못되어 때 이르게 무덤으로 가게 된 순교자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도다." 이에 대해 인도의 또다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 "아니오, 친구. 그 죽음은 때이른 죽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향하는 죽음이었소." 존.하이드는 그의 생명을 인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조용히 그리고 자원하여 바치었다. 누가 그의 뒤를 따라 왕관을 얻을 수 있을지? 주님 저로 포로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면 제가 해방되겠나이다. 나의 칼을 포기하도록 해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승리자가 되리이다. 나의 뜻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신께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실 때까지. 그것이 군주의 보좌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왕관을 포기한 것임에 틀림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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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2장 십자가와 사탄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2장 십자가와 사탄 Philip E. Howald, Jr. 사탄과 육신적 성품 필자의 친한 친구중 한 사람은 선교지에서 본 장의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빛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체험을 한 바있다. 그의 이름과 선교지는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때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탄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생애에 커다란 시련을 허락하시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는 오랫동안 사역을 하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가 돕고자 하는 자들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내 친구는 수많은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비록 그는 구원을 받은 터였지만 그는 두 마음을 품음으로써 완전히 패배당하고 말았다. 그는 그들(원수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온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등을 벽쪽에다 댄 채로 패배하고 말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간의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자연인"으로서의 삶과 같았다. 그는 이제 그의 원수를 사랑하고 죽음보다도 더 큰 상처를 안겨 준 그 일에 대해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그저 "나는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있노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를 알고 계신다. 나는 나의 구속주께서 이 모든 일에서 어떻게든 나를 끄집어 내실 것이라고 하는 은밀한 확신과 절망적인 희망(이 소망은 결코 죽지 않는 것이었다)으로 인해 완전한 절망과 자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탄은 한때 나에게 자살하도록 미혹하였었다. 이 사건은 결국은 나에게는 선을 이루었다. 나는 사도들 중 한사람 역시 형제들을 돕기 전에 사탄에 의해 키질을 당했었음을 기억했다. 이 어마어마한 마귀의 공격 앞에 나의 영적인 상태는 큰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장난감 총을 들고 있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크게 놀란 것은 이와 같은 지옥의 화신들이 내안에서 요새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자신의 육신적 성품과 이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스스로가 대적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나는 "자아"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유일하고 분명한 해결책이었다. 예외에는 결코 승리가 보장될 수 없었다. 이들 어두움의 권세들은(마귀들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실제적인 분이신 것만큼 실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의 은밀한 이기심이 제공해 준 요새 위에 굳게 서서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에게는 대항하고 적군에게는 홍수처럼 밀려들어올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왔던 나의 자아생명을 어떻게 제거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 엄청난 의미가 내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나에게 마련해 주셨던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서는 그 순간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의 무덤위에 나의 옛 생명 즉 옛 사람을 묻는 그순간에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순간부터 악한 영들의 군대들은 내게서 물러갔고 완전히 축출되었다 우선 이 사람의 체험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도들이 마귀와 그의 역사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내면에서 자아와의 "내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엄청난 대적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성도들과 원수와의 싸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는 우리의 씨름이 . . .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항하는 것임이라." 그리스도 안에와 내 안의 그리스도 강하지만 보이지 않는 원수가 높은 처소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고 우리는 이들에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세상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이와 같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 1장과 3장에서 이와 같은 영적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악한 현 세상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3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도록 함으로써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력해질 수 있는 법을 보여준다.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난 후에 이곳 즉 아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대체하시고 내란을 끝내시게 되어 내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나니"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될 때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비로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적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사자의 입에서 혼들을 구출해 내는 용사가 된다. 다시 반복하지만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 앉음으로써만이 해결된다. 엡1장). 그 다음에는 육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체험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가능하다. 엡 3장). 이 두가지가 선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된다. 성도들이 세상이나 육신을 위해 사는 한 그는 마귀에게 그 어떤 상처도 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기까지는 마귀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 위대한 성경교사가 "느슨해"지고 난 후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설교자들에 대해 "싸구려" 동정심을 표현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설교자들은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 성경교사는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마귀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그가 말하는 마귀란 도대체 어떤 마귀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자아와 사탄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자아는 죄가 머무는 거처와 좌석일 뿐 아니라 죄의 생명 자체이다. 마귀의 모든 역사는 자아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아야말로 마귀가 일하는 작업장인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하고 있는 가장 교묘한 일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모든 책임을 마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내주고 나서 마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무슨 짓인가? 마귀의 교두보는 우리가 허락하는 자아의 생명이다. 자아는 결코 자아를 내어쫓지 않는다. 사탄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도 사탄에 대해 "이 세상의 통치자(군주)가 올 것이나 그는 내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노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아가 전혀 없으셨다. 사탄은 그분 안에는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마귀를 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에게 틈을 주는 순간 우리는 지옥과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자아는 십자가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사탄은 우리 앞에서 패배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보자 :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치리라"(약4:7).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순서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탄에게 성공적으로 대항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다.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마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농담에 불과하다. 순종이 없는 자들에게 마귀는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 마귀를 올바로 대적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나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고 난 후에야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그분과 함께 설 수 있다. 사탄을 이기는 길 십자가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심판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진정 유다지파의 사자로서 사탄을 심판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십자가에 돌리셨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이 세상의 통치자는 심판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가? 그분은 나약함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닌가?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비극이 어떻게 그와 같은 엄청난 승리가 될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 않은가? 본서의 저자도이 문제로 고심했다. 그리고 나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믿었다. 이런 태도는 매우 올바른 태도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대로 믿는 것은 옳은 것이다. 살인마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갈보리에서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너의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의 때라"고하셨다. 주님께서는 그 순간 열두 군단의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셨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마귀와 그의 수하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사탄을 그가 있을 곳으로 보내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시다. 도덕세계에서의 승리는 물질을 재는 저울로는 무게를 달수 없다. 도덕과 물질은 다르기 때문이다. 불신자인 한 변호사가 이렇게 물었다 : "당신네들의 신은 전지전능하다면서 어째서 마귀를 이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거요?" 이 질문은 꽤 똑똑하고 그럴싸한 것처럼 들린다. 수많은 성도들도 이에 대한 답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실로 하나님의 길을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사탄은 얼마 후 1000년 동안을 묶이게 될 것이나 다시 한번 "풀려나게 될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길은 예측 불허이다. 마지막으로 사탄이 가야 할 곳은 불못이다. 하나님께서 왜 처음부터 마귀를 묶어 놓지 않으시는 것일까? 왜? 왜? 왜? 마귀는 늘상 "만약" "만약", "왜" "왜" 라고 파고든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신뢰한다. 주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성도들은 이미 맛본 자들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임이 그들에게 입증되었다.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죄악을 치료하였고 그들의 삶에서 마귀의 올무를 부숴 버렸다. 성도들은 마귀는 단지 종에 불과하고 그들의 구세주께서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탄의 희생자들은 갈보리의 전능한 이끄심을 통해 사탄의 눈앞에서 주님께로 찾아온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천사들과 권능들을 노획하사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공개적으로 수치거리를 삼으셨느니라"(골2:15). 주님의 승리의 비결은 육체적인 힘의 행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 모두 어린양께서 골고다의 십자가로 내려가시는 모습을 바라보자. 그분은 무방비 상태로 십자가로 가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고 아무런 저항없이 그곳으로 가셨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자아를 비우신 채 한 인간으로서 원수를 무시무시한 장소에서 만나고 계신 것이다. 사탄은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그의 주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셨고 그의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셨다. 그분은 자기연민을 버리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거절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를 거부하셨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외면하신 채 세상의 저주를 지고 가시는 그의 아들을 내리치셨을 때 그 두려운 순간에서조차도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하나님!" 하고 부르셨다. 그분의 순종은 죽기까지의 순종이었으며 그것도 십자가의 처형을 감수한 순종이었다. 그분의 승리는 그분을 온 우주의 보좌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사탄은 더 이상 딛고 설 곳이 없게 되었다. 그는 갈릴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그는 혼들을 죽인 살인자이다. 그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멸시키려고 이 세상에 온 자이다. 그는 거짓말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뱀이다. 그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함께 거룩하시고, 죄없으시며, 깨끗하신 분을 살해하였다. 자, 이제는 이 세상의 심판이있게 된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쫓겨났고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마귀들의 군대들을 괴멸시키신 것이다. 그분은이들을 포로로 잡으셨다. 그렇다. 십자가 사건으로 즉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쟁취하신 승리로 인해 이 세상과, 세상적인 원칙과, 세상의 통치자의 결정적이고 적대적인 심판은 이미 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보셨듯이 십자가는 마지막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도덕적 영적인 원칙들이 그 참모습을 드러낸 그곳이 바로 십자가의 심판이었고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승리하신 것이다.(Huegel이 인용한 Mabie박사의 글에서) 십자가로 이기는 사탄 우리 모두 이 어두움의 통치자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믿고 신뢰하며 이에 동참하도록 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지니고 있던 그 자를 파멸시키셨다. 그분께서는 평생동안 죽음을 두려워하여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오늘날도 구원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마귀로 우리를 괴롭히고 이 세상을 장악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우리와 대적 사이에 십자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여 구속주의 상처안에 숨어있게 되면 사탄은 우리 발밑에서 맥을 못쓰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지탱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는 내 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자기 사역과 오늘날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F.J.Huegel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시기 이전에 나의 선교사역을 뒤돌아 볼 때 (당시 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무지했었다) 실로 부끄러운 생각뿐이다. 그 당시 나의 사역이 왜 그렇게 열매가 없었는지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시 내가 빈약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허공을 치는 영적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고 몇몇 촌들을 불가운데서 끄집어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는 영적전투의 참 성격도 몰랐고 대적의 특성도 알지 못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볼 때 "그때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가져가 버렸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당시는 깨닫지 못했던 것같다. 왜 그처럼 많은 씨를 뿌렸는데 어째서 그토록 열매가 적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수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변화가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와같은 영적위기를 겪게된 이래로 이 하나님의 사람은 멕시코라고 하는 메마른 땅에 생명수의 강물을 흘려 보내고 있다. 그때부터 수천명의 병사들이 주 예수그리스도께 몰려왔다. 전투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사탄의 권세 또한 무시무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전진하였다. "약탈물을 용사로부터 빼앗을 수 있으며 적법한 포로를 건져낼 수 있으랴? 그러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길 것이요 포악한 자의 약탈물도 건져내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너와 싸우는 자와 싸워서 네 자녀들을 구해낼 것임이라."(사49:24-25).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토록 버림받은 것과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좁은 속안에 우리의 구원의 대장께서 갇혀 버리신 많은 경우를 깨닫게 된 이 하나님의 사람은 멕시코에서의 체험을 통해 성도들의 영적전쟁에 눈을 뜬 후 주님의 몸된 교회가 "깃발을 높이 든 군대처럼 강력"하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저귀를 벗어버리고 영적전투에 참여할 만큼 성숙하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군대로서의 모습이다. 교회의 활동에 대한 사도바울의 상징들 가운데 선한 군사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고 항상 군인이어야 한다. 그는 민간인으로서의 세상적인 삶을 끊고 군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딤후2:4). 군인은 항상 거칠고, 치열하며, 목숨을 건 전쟁에 종사하는 자이다. 소심한 겁쟁이들만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전쟁에 대해 듣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바울은 군사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군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자주 묘사된다. 다시 한번 Huegel씨의 말을 인용해보자 : 십자가가 희생과 고통과 죽어가는 혼들을 위해 피를 흘리며 애써야 할 사역으로 우리를 부를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달콤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마귀적인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요람에 머물고서 자신의 구원에만 만족하면서 영적인 유아기를 자장가속에서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많지만 않더라도 이 세상은 또다른 심판을 향해 술취한채 굴러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요한복음 14장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그것만 붙들고 안주하고 있는 것이 혹시 마귀의 간계가 아닌가? 왜 기저귀를 내던지고 로마서 6장이나 마태복음28:18-20절 그리고 골로새서 1:24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당신의 어리석은 자족감을 조각내어줄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질책 앞에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는 해방받았고, 구속되었으며, 피로 산 바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 육신에게 붙들려서, 그리고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지 아니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뒤로 물러나서 패배한 채 서서 떠내려가고 있다. 완전한 패잔병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주여!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있어야 합니까? 오 주여 얼마나 더 이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여, 멈추어서 얼굴을 들라. 그리고 "세상"과 "육신"에 못박았음을 선포하고 해방받으라. 마귀가 심판받은 바로 그곳에서 당신도 못박혔고 그리하여 위대한 승리가 주어졌음을 주장하라! 이제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울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이 세가지는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무기가 된다. 우리는 대적을 묶고 허를 찌르기 위해 그리고 그의 불화살을 꺼버리기 위해 주님의 피를 의뢰한다. 보혈앞에서는 마귀가 설 수 없다. 두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증거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뱀을 죽일 수 있다. 세번째로 우리는 죽기까지 우리의 목숨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마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도록 하라. 우리는 이미 "죽음"에 서있다. 이 죽음안에서 사망과 마귀는 이미 제거되었고 심판받았다. 우리 모두는 "희생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굳게 서있는 주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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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1장 십자가와 성취(2)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1장 십자가와 성취(2) Philip E. Howald, Jr. 환경의 십자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승리의 삶에 관해 말할 때 대개 커다란 것만을 생각할 뿐 조그마한 일 즉 경건한 만족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 중얼거림, 혹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배정하신 장소 혹은 환경을 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십자가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승리의 삶으로 많은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길을 제시해 준 바 있는 귀용 부인은 한때 매우 심각한 질병을 앓고 난 후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호수에서부터 몇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자기가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에 대해 귀용 자매는(그녀는 French Society 소속이었다) 이렇게 말했다 : 그 집은 매우 가난한 집으로 보였다. 그 집에는 부엌에만 굴뚝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통과해야만 방으로 갈 수가 있었다. 나는 나의 딸과 하녀에게 큰방을 양보했다. 나에게 배당된 방은 매우 작은 것이었다. 나는 그 방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사용해야 했다. 그 방에는 작은 침대 몇 개 외에는 아무런 가구가 없었다. 나는 값싼 의자 몇 개를 샀고 필요한 그릇들을 조금 샀다. 나는 금속 접시보다는 나무로 된 것을 좋아했다. 이 오두막집에서보다 더 큰 만족을 느낀 적은 없었다. 실로 그리스도인에서의 참된 삶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박함과 단순함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음 편지는 죄와 현대사회로부터 놀라운 해방을 체험한 바 있는 우리 학교출신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온 편지이다. 이 편지는 졸업을 일년 앞두고 요양소로 떠나게 된 그녀가 그곳 요양소에서 동료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 안에는 십자가의 원칙들을 보여주는 깊은 영적 통찰력이 담겨 있기에 길긴 하지만 인용코자 한다 : 오늘은 "네 십자가를 지라", "육체의 가시"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수치를 당하는 것" 에 관해 묵상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내 생각에는 때로 서로 혼동되는 것들이다. 나에게 편지를하거나 직접 방문하는 친한 친구들은 "오, 불쌍한 친구여, 네 십자가가 매우 무겁겠구나, 등등"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고통당하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시오, 자매님."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위로의 말들이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되며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는 나의 병이 심지어 내 육체의 가시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이 가시라고 한다면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나는 이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본적이 없다. 오히려 이 질병은 나에게 축복이었다. 이것은 또한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선택에 의해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이것은 또한 그분의 이름을 위한 고통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내 병은 나에게는 축복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구절을 아무데서나 뽑아 그것을 제멋대로 아무 상황에다가 마구 적용하는 것 같다. 이런 짓을 볼 때면 때로 화가 나기도 한다. 한 번은 훌륭한 그리스도인 부인으로부터 실로 "낙담케 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서 홀로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나는 큰 소리로 외쳐 그녀가 들을 수 있었으면 하면서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 "나는 나의 병으로 인해 그 어떤 십자가도 지고 있지 않으며 나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이 편지를 받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시가 우리를 찌를 때면 우리의 머리를 들고서 우리의 희생정신에 대해 갈채를 기대한다. 아니면 우리는 한숨을 쉬면서 "내 십자가는 무겁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고 가겠다"라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는 "가시"가 아니다. 십자가는 가시와는 다르다. 십자가는 훨씬 쉽게 피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는 무엇이다. 그러나 가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피할 수가 없다. 때론 건강 악화가 가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밀턴에게는 눈이 먼 것이 가시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주님을 위해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 어느 정도 장애가 된다는 면에서 나의 질병을 나의 가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요양원에서 퇴원한 후 오히려 내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가시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애를 십자가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령 충만한 삶에 있어 실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가"사랑"하는 무엇이며 기쁘게 지고 가려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자랑하며 십자가는 우리가 통과하는 모든 쓰라린 일들을 달콤하게 만들어 준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에게 더해지는 보너스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는 특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인용 끝) 이 편지는 많은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왔다. 육체의 질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녀는 그녀의 장애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용하였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였기에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에 대해서조차 완전히 잊고 있다. 십자가는 그녀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사무엘 러더포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져 보았던 짐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라고 고백한 것과 동일하다고 하겠다. "십자가는 새에게 날개가 자연스러운 것인 것처럼, 돛이 배에 당연한 것처럼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십자가는 나를 내가 가야 할 항구로 데려가는 안내자였던 것이다."(러더포드) 독자 여러분은 이 자매가 놀라운 영적 성숙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러분에게도 좋은 경고가 될 것 같아서 밝히고자 한다. 사실 우리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당시 그녀는 상당히 건강이 좋아져 있었는데 그녀는 전적으로 세상적인 삶속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십자가의 삶과 옛 습관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따라서 한번 십자가를 붙드는 결단과 체험 뒤에도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그의 고통의 친교"를 알기 위해 더욱 전진해 나가야만 하며 "그분의 죽음에 일치"하기까지 계속 전진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을 가야 할 길이다. 진정 죽은 자는 하나님께 산자임을 의식하고 있는 자임 독자 여러분에게 다소 재미있는 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주제와 관련해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한 번은 선교 단체 지도자가 수치의 길을 택하기로 작정한 한 젊은 설교자를 선교지에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이 그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 당신은 그 젊은 설교자가 엄격한 죽음을 맛보지 못한 채로 사역지로 간다는 것은 무덤으로 가고 있는 시체를 낚아채는 일과 같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에게로 가야 합니다. 무덤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영구차가 따르지 않는 장례는 안됩니다 후일 이 젊은 설교자는 사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그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 이제 나는 엄격한 죽음을 완전히 맛보았습니다 앞서 말한 내 친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 청년 설교자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 주게. 그리고 그에게 장례식에서 시체가 시체인 것을 모르는 자는 그 시체 자신뿐임을 말해 주게. 이 법칙은 변함이 없는 것일세. 5000년이나 된 미라도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네. 만약 시체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죽지 않은 셈이지. 맥박을 짚어 볼 필요도 없네.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니까 우리가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이루었음을 알고서 우리의 눈을 우리와 그분이 죽음 안에서 하나된 사실에 고정시킬 때이다. 우리의 승리의 기반은 결코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하나됨이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음을 체험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 산 자" 즉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있는 자들이다(사는 것이 죽음을 체험케 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타락한 천사들에 관해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 "천사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즉 그들이 불순종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자신들을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가 아닌 주님을 쳐다보며 나아갑시다. 가치 있는 성취를 이룩하는 길은 "그분의 죽음에 일치"하려는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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