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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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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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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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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6
1. Dispensational Truth --저자 클래어런스 라킨
서 문   이 책을 준비하고 출판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놀라운 결과이다. 나의 직업은 원래 기계 기사이며 설계사였다. 34세가 되던 해 나는 본업을 버리고, 신학 교육도 받지 않은채 복음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나는 제도하는 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제도 용구만 남기고 제도에 관한 모든 전문 서적들과 도구를 모두 팔아 버렸다. 나는 조그만 시골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15년간 목회를 했다.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천년 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나 몇몇 책을 읽어가며 성경을 공부하던 중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설교에 이용하기 위해 "예언적 진리"에 관한 거대한 색채 도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목회와 관련된 두 성경학교에 초빙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이 무렵 "예언에 관한 도표"를 얼마정도 만들어 널리 보급시켰다. 그러자 "예언적 진리"에 관한 도표를 그려 넣은 책자를 발행해 달라는 요청이 내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1915년 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도표를 삽입한 "경륜적인 진리" (Dispensational Truth)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God's Plan and Purpose in the Ages) 에 관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인도하셨다. 도표를 고안하고 그리는 일과 도표에 자세한 설명을 써넣는데 무려 3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허둥지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성경의 예언서를 30년에 걸쳐서 세심하고 끈기 있게 공부한 결과이며 인간의 견해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만을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권위 있는 책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 책이 발행된 후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이런 종류의 책을 모두가 몹시 열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초판은 10개월만에 다 매진되었으며, 초판은 이런 책이 독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가를 알아보는 "평가판" 이었기 때문에 최저 가격으로 출판하였다. "예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보다 실용적이고 편리하게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이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재판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소리가 빗발쳐 어쩔 수 없이 초판의 형태로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나온 3판은 초판과 재판보다 2배나 많은 도표와 설명을 추가하여 개정 증보판으로 발행하였다. 그리고 도표는 해설 내용 사이에 끼어 넣게 되었다. 책의 크기는 11인치 정도의 "도해서" 형태로 인쇄하고 천으로 제본하여 휴대하기 편리하게 했다. 초판과 재판에 실렸던 도표의 크기와 모양은 축소하지 않았으나 구형판화로 인쇄하였으며 책을 펴면 두 페이지에 펼쳐지게 하였다. 따라서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인쇄함에 따라 비용이 훨씬 늘어나게 되어 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따르지만 반면에 먼저 것보다도 2배 이상이나 늘어난 귀중한 내용으로 더 나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책 속의 도표는 170페이지에 달하는 양면이지만 단면으로 계산하면 340페이지인데다 각 페이지의 분량은 보통 책의 1.5배 이상으로 실제로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셈이다. 만일 내가 도표를 그리기 위해 제도사를 고용했다면 책값은 엄청났을 것이다. 더구나 도표를 제도사에게 맡길 경우 그도 나와 꼭 같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현재의 도표와는 다르게 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표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고안하고 전개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내게 모든 도표를 한꺼번에 그리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종종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면 한 밤중이나 잠에서 깬 아침에 그 해답을 얻곤 했다. 나는 모든 도표가 완전 무결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중심 되는 도표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일"에 관해 그릴 때(사실 이 도표는 다른 부분적인 도표나 전체적인 도표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가장 합당한 도표이다) 오류를 범했더라면 그 잘못은 부분 도표나 전체적인 도표에서 즉시 발견되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모든 도표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부분 도표와 전체적인 도표를 주요 도표와 검토했을 때 그 결과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 저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하여 비평가들이 서로 무자비한 언어로 부당하게 몰아 부치는 경향에 대해 항상 개탄하였다. 하지만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같은 비평을 외면한 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일에만 힘써 왔다. 성령의 가르침만을 기쁘게 따르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왔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개정 증보된 제 3판을 내놓으면서 먼저 나온 초판과 재판을 발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판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기를 바라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속이는 자들에게는 이 책이 마음의 변화를 받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저자 클래어런스 라킨 Clarence Larkin, 1920년 3월 25일 "Sunnyside" Fox Chase, Philadelphia, Pa ------------------------------------------------- - SiteLink #1 : http://meltingpot.fortunecity.com/cameroon/602 위에있는 사이트 주소로 들어가면 "Dispensational Truth --저자 클래어런스 라킨 "의 책의 모든 목차의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 Dispensational Truth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목적 (Clarence Larkin 저) ----- 목 록 ------------------------------------------    서문:책을 쓰게된 동기 1. 예언의 말씀 2. 전천년설 3. 예언의 산봉우리들 4. 재림 1)재림의 개요 2)재림의 사실성 3)재림의 방법 4)재림의 필요성 5.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1)말씀을 나누는 이유 2)창조 시대 3)7일간의 회복 사역 4)안식일 5)에덴의 시대 6)타락 후부터 홍수이전 시대 7)홍수 이후의 현시대 8)시대들의 시대 6. 악한 현재 세상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적 사역 1) 개 요 2)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3)창조후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4)성육신후부터 승천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5)미래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 8. 성령의 시대적 사역 1)성령의 시대적 사역 2)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 3)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 9. 유대인들 1)유대인들에 관하여 2) 유대인들의 과거 3)유대인들의 현재 4) 유대인들의 미래 10. 이방인들 1)이방인들 2)느브갓네살 왕의 꿈 3)"네 짐승들"에 대한 환상 4)"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5)"북쪽과 남쪽 왕"에 대한 환상 6)"칠십 주"에 대한 환상 11. 교 회 1)교회에 대한 잘못된 개념 2)교회란 무엇인가? 3)교회의 기원 4)교회의 사명 5)교회의 미래 12. 왕 (THE KING) 13. 왕 국 (The Kingdom) 1)왕국의 출현과 연기 2)천국의 신비와 비유 3)왕국의 모습 14. 영의 세계 15. 영성술 16. 부 활 들 1)민족적인 부활 2)영적인 부활 3)실제적인 부활 4)부활의 방법 17. 심 판 들 개 요 1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심판 2)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 3)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4)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5)죄인들에 대한 심판 18. 사 탄 개 요 1)사탄의 기원 2)사탄의 현재와 그의 왕국 3)사탄의 전략 4)사탄의 미래와 운명 19. 적그리스도 1)적그리스도의 개요 및 그리스도와 대조 2)이사야의 예언 3)다니엘의 예언 4)바울의 예언 5 )요한의 예언 6)적그리스도의 미래와 운명 20. 사탄의 삼위일체 21. 네가지 복음 22. 일곱 교회 23. 대환란 24. 큰 바빌론 25. 땅이 불타버럼 26. 언약들 27. 신비들 28. 예표와 실상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나무 30. 주님의 명절들 31. 제사들 32. 피라밋의 경륜적 가르침 33. 성경의 숫자들 34. 시대의 표적들 ---- ( 예) 상세 내용 조회시 - - 1. 예언의 말씀   성경은 신학, 도덕, 역사, 과학 또는 어떤 다른 주제에 관한 체계적인 논문이 아니라, 하나님, 인간의 타락, 구원의 방법, 그리고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다. 성경이 다루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네 가지 인격 :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사탄 2. 세 가지 장소 : 하늘, 땅 그리고 지옥 3. 세 부류의 백성 :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성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조금씩,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약 B.C.1492년경부터 A.D.100년에 걸쳐서 약 1600년간 말씀이 선포됐다.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으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약 42명으로 다윗, 솔로몬과 같은 왕이나 정치가인 다니엘, 느헤미야, 제사장 에스라, 이집트의 지혜를 갖추었던 모세, 유대 율법에 정통한 바울, 목자인 아모스, 세리 마태, 어부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등은 '배우지 못한 무지한 자들'이었으며, 누가는 의사였고, 이사야, 에스겔, 스카랴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들도 있었다. 성경이 비록 아시아에서 기록되었다 하여도 결코 아시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시내 광야, 아라비아 절벽, 팔레스타인 언덕과 도성, 성전들, 벧엘과 여리코의 선지자 학교, 페르시아의 수산궁, 바빌론의 세바 강변, 로마의 토굴, 외딴 팟모섬, 그리고 에게 바다 등지에서 기록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편집된 어떤 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대중요법, 동종요법, 수치료법, 안마요법등과 같은 다양한 치료 방법에 대해 40명의 내외과 의사들이 1600년간 걸쳐 내려오면서 66권의 비법을 저술하여 그것을 한데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후 그 책의 처방에 따라 환자를 치료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것이 얼마 만한 효과가 있겠으며 그 치료 방법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겠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경은 고대 역사, 신화, 전설, 교리와 미신등을 "여러 가지 뒤범벅"해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와 교리에 있어서 진전이 있다. 족장들보다 재판관들이, 재판관들보다는 선지자들이, 선지자들보다는 사도들이 더 많은 것을 알았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된 별개의 책이 아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레위기는 히브리서를,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을, 그리고 유월절이나 이사야서 53장은 사복음서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이지만 그것은 초인간적이거나 천상의 언어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만일 그런식으로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나랏말로 번역되든지 그 언어의 순수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말씀의 활력이나 능력을 주는 영적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성경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의 언어는 세 종류가 있다. 즉 비유적(Figurative)이고 상징적(Symbolical)이며, 문자적(Literal)이다.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말씀은 비유적이므로 전후 문맥을 통해 그 뜻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느부캇네살의 '신상', 다니엘의 '네 짐승' 혹은 '일곱 촛대'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관해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은 성경의 동일한 장이나 그 외의 곳에 추가로 설명되어 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은 일반 문법과 수사법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경 말씀을 은유적으로나 영적으로 풀이하는 대신 다른 책들을 볼 때와 같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을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한 결과 수많은 교파들이 지금까지 난립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잘못 해석 2. 성경을 잘못 적용 3. 성경의 위치를 바꿈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이 계시하시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된 이유는 사람들의 전통, 환경, 편견, 혹은 성경을 구미에 맞는 교리에 갖다 붙여서 가르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는 진리를 전하는 "비유적인 방법"을 알아두자. 예수님께서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그 분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로 이 방법을 사용했다. 신약 성경에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신비적인 형태"이다(마13:10-17). 신비란 한 동안 숨겨져 있어도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내가 당신에게 봉한 편지를 보낸다고 할 때 바로 봉투 안에 든 내용이 신비가 된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으면 신비란 밝혀진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가 쓰여진 편지일 경우에는 그 용어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비도 이와 같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게 되면 모든 신비들은 자연히 풀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이 생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인가? 아니면 인간의 책인가?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단지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책을 쓰셨다면 진리임이 분명하며,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할 수 있다. 성경은 그 특징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이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쓸 수 있었다고 해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모든 죄, 즉 어리석음, 배반, 교만, 간음, 비겁, 살인, 음욕 등을 가혹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배은망덕하고, 우상 숭배와 불신과 반란으로 일관된 굴욕적인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들을 그들의 역사책에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이 기록되었는가? 성경 자신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딤후3:16) I. 성경에 "영감(Inspiration)"을 불어 넣으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 분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명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 율법, 교리, 역사적인 사실, 계시들, 혹은 그 분 자신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기록된 문자) 영감(The-op-neu-stos)에 의해 주어졌는데, 즉,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시거나, 또는 성령을 통하여 옛 성별된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므로 친히 말씀도 하시고 또 쓰시기도 하신다. 그 분은 친히 두 개의 증거판인 돌판을 새기셨으며(출31:18; 32:16) 벨사살 궁전 벽에 친히 글자를 쓰셨다(단5:5,24-28).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성막 및 성막 내부의 양식과 레위기에 적힌 모든 율법과 의식 절차를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또한 그 분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마3:17)와 변화산상에서도(마17:5) 말씀하셨으며, 한번은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을 때도 말씀하셨다(요12:27-3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딤전3:16, 요1:5-14).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총 49장에 1950절이 들어 있는데, 그 중 3/5, 즉 1140절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할 것과 이른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12:49-59).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글로 쓰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명하여 대신 말씀하시고 글을 쓰게 하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II.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는가? 그렇다. 무미건조한 연대기로부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말씀 전체가 그렇다. 또한 성경 두루마리에 기록된 기록되어 있는 모든 문장, 단어, 일점, 일획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고(마5:17-18) 말씀하셨을 때 일점 일획이란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점과 가장 작은 획을 가리키며, 이것까지도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말과 악한 사람들과 영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들, 사람들의 족보, 인류의 타락에 관한 설명, 노아홍수, 그리고 그 밖의 역사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들도 성경의 기자들이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꼭 필요한 역사적인 사건들만을 기록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고 구약 시대의 여러 전통과 신화들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세상의 역사서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각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필요한 것들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III. 성경의 기자들은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가? 성경 기자들은 단순히 일종의 '마력'이나 '무아지경'에 빠져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기록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사용해야 할 정확한 단어들을 지시하셨는가? 생각은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생각도 불확실하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자는 단순히 받아쓰는 일만 옳게 하면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베드로후서 1:20에 이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즉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위 말씀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자신들도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기록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벧전1:10-11). 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뿐, 해석은 하지 못했다. 기록자 중에는 거룩하지도 않은 발람(민22:38;23:26), 벧엘의 예언자(왕상13:7-10;20:22,26), 사울왕(삼상10:10-12; 19:20-24), 카야파(요11:49-52)도 있음을 볼 때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말씀을 정확히 말하고 기록했다. 모세는 주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입과 함께 할 것이요, 네가 말할 것을 가르쳐 주리라"(출4:10-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그리고 나서 주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에스겔과 다니엘 및 그 밖의 선지자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등등 이와 같은 표현은 모세 오경에 560회, 역사서와 예언서에 300회, 선지서에 1200회(말라키만 해도 24회나 된다)로 구약 전체로 볼 때 2000회가 훨씬 넘는다. 이로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이 그대로 입증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즉 이사야의 문체는 에스겔이나 다니엘과 다르며 베드로서는 요한의 서신이나 바울의 서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법률적인 문서를 원할 경우 법률가를 찾고, 시적인 글을 쓰려면 시인을 택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상징들로 말씀하실 때에는 에스겔이나 다니엘이나 요한을 택하였고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다윗을 택하셨다. 신약의 기자들이 가끔 구약을 인용할 경우 문장 그대로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바꾸어 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면 아모스9:11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성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리라. 또 내가 그의 패망을 일으켜 옛날처럼 세우리니" 하지만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회의에서 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쓰러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또 거기에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워 일으키리라." (행15:16) 왜 말씀이 바꾸어 졌는가? 이유는 단지 두 성경 구절을 쓴 사람이 아모스나 야고보가 아니라,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뜻하는 바를 모순 없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낼 수만 있다면 그분이 쓰신 1장에 사용한 표현법을 10장에서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베드로전서1:11절 말씀이 뒷받침 해준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들로 이사야53:1-12절의 말씀과 같이 그분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도록 하셨다. 한편 "성경의 영감"과 소위 오늘날의 시인, 설교가, 웅변가 또는 작가들의 영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감(Inspiration)"과 "계시(Revelation)"와 "조명(Illumination)" 사이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영감"은 시인, 작가 그리고 대중 연설가의 영감과는 완전히 다르고 독특한 차이가 있다. "영감"이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성경 기자나 선지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Bible Revelation)"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각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 가운데 감춰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요한계시록에서 끝났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영적 조명(Spiritual Illumination)"은 성경의 영감이나 계시와는 다르다. 단지 성령의 역사는 믿는 자에게 역사함으로써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영의 눈이 뜨이는 것이다(요16:12;15). 자연인은 성령의 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1-14).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전하거나 그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옛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처럼 말씀을 기록하거나 선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 지각을 열어 주셔서 성경을 이해하며 그들이 성경을 깊이 상고할 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또한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그들에게 조명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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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교회와 왕국
교회와 왕국 전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교회와 왕국을 구분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천년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교회 시대가 펼쳐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은 후 왕국 시대가 펼쳐진다고 본다. 반면 후천년주의는 십자가 이후로 교회 시대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이므로 교회 시대는 동시에 왕국 시대가 되며, 그 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철저히 전천년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왜 후천년주의자들은 교회와 왕국을 동일하게 보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왕국에 대한 두 가지 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스리시는 것과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스리시는 것과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둘 다 말씀하고 있지만, 후천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다스리심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영적 다스리심은 현재적인 사건이다. 반면 하나님의 실제적인 다스리심은 미래적인 사건이다. 미래라는 것은 분명히 예언을 다루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땅의 통치는 성경의 수많은 예언들 가운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 예언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취된 예언들에 대해서는, 그 성취된 것들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설사 믿는다 해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사고는 "구약은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생각들에서는, 구약은 모든 것이 모형이고, 신약은 모든 것이 성취이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이 신약에서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성취될 것이 없고, 그 성취된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예언되었던 모든 것들이 신약에서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전혀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교회만이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 비록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재림을 믿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재림과 관련해서 언급되어지는 모든 예언들은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재림을 믿지 않으면 이단이 되니까, 단지 재림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뿐인 것이다.  물론 구약이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사법과 구속에 대한 말일 뿐이다. 분량적으로 말할 때, 구약성경의 대부분 예언인데, 이미 언급했듯이 그 예언들은 모두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면 구약은 성취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구약"이라고 말할 때는 "율법"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8:13은 『그가 말씀하시기를 "새 언약이라."고 하셨으니, 그가 먼저 것은 옛 것이 되게 하신 것이라. 이제 낡아지고 오래 된 것은 사라져 가느니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10:9도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율법에 따른 제사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이 되었던 수많은 동물제사들의 실체를 성취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의 용서나 구속을 위해서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속죄" 사역을 수행하셨으므로, 로마 카톨릭처럼 매주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반복하는 미사를 행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서 구약이 신약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말은 율법에 따른 모형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는 율법이라는 모형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기다리는 것들이 있으니, 바로 재림에 관한 예언들이다. 구약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그 예언들까지 모두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제시되는 예언들은 무엇인가? 예언들에는 초림에 관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예언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들이다. (96호 [성경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재림] 참조) 어떻게 초림이 성취되지 않은 가운데 재림에 대한 예언이 함께 등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지자들의 관점에서 초림과 재림은 둘 다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한 사건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초림과 재림을 나누어 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오심"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예언들은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재림 때에 성취될 메시야의 지상통치에 관한 것들이다. 이 왕국은 그들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함께 하고, 메시야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이 되시며, 그들을 책망도 하시지만 결국은 그 민족을 구원하신다(호 1:9-11). 그들의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다(렘 31:31,3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분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오셨던 것이고(요 1:11), 사도들 및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야와 함께 하는 실제적인 지상 왕국을 바랐던 것도 당연하다(행 1:6). 지상 왕국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7:12-16에서는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고, 창세기 15:18-21에서는 문자적인 팔레스타인 땅에 대해 언약을 주셨으며, 에스겔 48장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되는 예언을 주셨다. 시편 2:8에서는 메시야께서 받으실 땅과 이방에 대한 유업이 예언되어 있고, 요엘 3:17-21에서는 이스라엘 땅의 번영과 주변 이방들에 대한 저주가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들은 모두 메시야의 지상 왕국을 말하고 있지, 영적 왕국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영적 왕국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신약에 와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코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롬 14:17)는 말씀으로 인해, 이 왕국은 물리적인 나라가 아니라 거듭나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신약에서 실제적인 왕국의 개념이 통째로 영적 왕국의 개념으로 바뀌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신약에서도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왕국의 개념은 얼마든지 등장한다. 산상설교에서는 천국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서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천국은 율법으로 통제받는다는 것과(마 5:19,20), 심지어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실 때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신다. 즉 이 왕국은 구약에 그렇게도 예언되어있던 바와 같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메시야 왕국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약에서는 두 가지의 왕국, 즉 영적인 왕국과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이 둘 다 제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은 실제적인 왕국은 무시하고 영적인 왕국만 부각시키고, 실제적인 왕국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도 영적으로 해석해 버려, 교회를 위한 영적 축복으로 가져오고 있다. 그들은 누가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니라... 보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눅 17:20,21)는 말씀만을 가지고, 영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왕국만을 말하지만, 성경은 또한 『...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고 말씀하시어, 눈에 보이는 왕국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두 왕국이 있다. 또한 그들은 마태복음 21:43의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소출을 가져올 민족에게 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 왕국은 이스라엘이 거부했기 때문에 영적 백성인 교회에게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구약에 제시된 모든 왕국의 축복들이 교회에게로 주어졌다고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성경이 두 개의 왕국을 제시하고 있는 이상, 교회가 받은 왕국은 영적인 왕국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실제적인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교회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특별한 유기체로서(마 13:45,46), 그분의 몸이고(엡 1:23), 그분의 신부이다(엡 5:31,32).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분의 백성들인데, 이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란 각자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로서 영적인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여기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다. 따라서 비록 이 세상 정부에 속해 살고는 있지만, 우리의 참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목표로 살 게 아니라, 비록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받은 영적 왕국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그분의 왕국에서의 삶이다. 물론 교회는 미래에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의 통치권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몸이니,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것(딤후 2:12)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역시 미래에 세워질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으로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세우시는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는 것일 뿐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대적함으로 인해 멸망하거나, 아니면 유대인들을 대적하지 않은 경우에 그 왕국에 들어가 유대인들이 누리는 빛 아래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교회와 왕국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교회가 이 시대에 영적인 왕국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왕국이 곧 교회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국과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들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영적인 왕국과 실제적인 왕국이 둘 다 왕국으로 불릴 수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영적 왕국은 신약의 일부에 해당하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실제적인 왕국의 의미가 훨씬 강하므로, 수식어 없이 단순히 "왕국"이라고만 불리면 그것은 이 땅에 속한 실제적인 왕국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용례를 보이고 있다.) 1. 왕국은 하늘로부터 세워진다(set up). 왕국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발전되거나 건설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것이다(단 2:44). 반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건물로 세워져 나간다(엡 2:20). 2. 왕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다. 『...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것이 아니냐?』(약 2:5). 반면 교회에는 상속자가 없다. 교회라는 것 자체가 상속의 개념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상속이란 일반적으로 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마 5:5, 히 11:8). 3.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다. 『그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에 던져져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마 8:12). 반면 "교회의 자녀들"이란 것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롬 8:16)이지 "교회의 자녀들"이 아니다. 4. 왕국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누군가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귀인이 왕국을 받아서 돌아오려고 먼 나라에 가게 되었더라『(눅 19:12).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사람들이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 왕국은 몸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몸이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3), 진주같은 유기체이다(마 13:45,46). 6. 왕국은 성전이 아니다. 반면 교회는 성전이다(엡 2:21). 물론 교회 건물이 성전이라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이며, 그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 각자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들이다(고후 6:16). 7. 왕국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왕국이 임하도록 구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마 6:9,10). 그러나 교회는 임하거나 오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다. 초청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께서 오시는 날, 주님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부르실"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교회가 "임하도록" 기도하거나 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 에클레시아)이다. 무엇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는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성별된) 사람들이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이 세상과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왕국은 여러 모로 다르다. 교회는 절대로 왕국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며, 따라서 교회 시대와 왕국 시대는 절대적으로 다른 시대이다. 왕국 시대라고 말할 때 제시되는 천년왕국은 절대로 영적 왕국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천년통치를 거부하는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교리이다. 성경적 구도에 따르게 되면, 율법 시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나고, 교회 시대가 온 다음, 교회의 휴거를 기점으로 땅에서는 대환란이 펼쳐진 후,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으로 말미암아 천 년간의 왕국 시대가 도래하고, 그 후에는 백보좌심판과 더불어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현재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재림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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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재림
성경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재림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책은 아무래도 요한계시록일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써 있는 대로 믿기만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데도, 그 기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마 하늘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이 되고,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바다에서 괴물이 나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 기록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다 보니 그 예언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어 무지한 독자들은 책을 덮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구약의 예언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닫혀져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이사야가 어떻게 했다느니, 예레미야가 어떻게 고난당했다느니, 요나가 어떻게 불순종했다느니 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그들이 예언했던 내용들에 대해서는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해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전적인 불신이 그 이유이다. 에스겔 서 등에 있는 상징적인 언어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는 부분,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든지 메시야께서 어떻게 나타나신다는 예언들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약의 예언들은 모두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예언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분이 오심으로 모든 예언들은 성취되었고, 이제는 예언을 성취하신 그분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예언들이 그분의 초림 때에 맞춰질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재림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대부분 주님의 재림에 맞춰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약성경에서 재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이상 구약의 예언들이 재림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의구심이라도 가져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고 초림과 교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예언이란 분명히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선지자들이 말한 것들은 그 당시부터의 미래이므로, 짧게는 바빌론 포로부터 길게는 재림과 천년왕국, 또 그 너머 영원 세계에까지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때로는 포로 상황을 예언하고 때로는 초림을 예언하고 때로는 재림을 예언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러한 예언의 내용들 중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떤 예언들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문제의 핵심이며,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 성경 전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의 예언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이다. 재림과 연관되어서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과, 이방인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것과, 재림으로 온 이방에 큰 심판을 가져오신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어 그분의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고, 온 땅의 왕이 되시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내용의 예언들은 어떻게 선포되는가? 재림에 관한 예언들 예를들어 시편 45:5,6은 재림 때 전쟁에 임하시는 왕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들의 심장을 뚫으니 백성이 왕 아래 엎드러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로운 홀이니이다.} 그 후의 주님의 왕국은 의로운 가운데 영원히 번성한다. 이때 주님의 왕국이 "영적 왕국"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은 여기서 제시된 주님의 보좌는 "다윗의 보좌"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7:16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의 입을 통해 다윗에게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시편 24:7,8은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영원한 문들아, 너희는 들어올려질지라. 그리하면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시리라.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력 있으신 주시며 전쟁에 능력 있으신 주시로다.}고 말하여,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예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에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 있지만, 그때에는 분명히 영광의 왕의 모습도 아니셨고, 전쟁에 능력 있으신 주님의 모습도 아니셨다. 그분은 곧 죄인으로 처형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재림 때에 무서운 용모로 임하시는 요한계시록 19장의 재림 때 예수님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쟁으로 임하시는 승리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아마겟돈에 대한 예언에서 더 분명해지는데, 재판관기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은 카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를 물리친 후에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이러한 예언을 한다. {왕들이 와서 싸웠으니 그때 카나안 왕들이 므깃도의 물가 타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얻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싸웠으니 그들의 길에서 별들이 시스라와 싸웠도다}(판 5:19,20). 당시의 전쟁은 하늘의 전쟁도 아니었고, 별들이 싸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묘사한 것은 하나의 예언으로서 미래에 있을 전쟁, 즉 하늘의 군사들이 사탄과 싸울 전쟁을 이러한 언어로 예언한 것이다. 이 군대에 대해서 요엘 2:3-5은 {불이 그들 앞에서 삼키며 그들 뒤에서는 화염이 불타는도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는 에덴의 동산 같으나 그들 뒤에는 황량한 광야 같으니, 정녕, 어떤 것도 그것들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의 모양은 말들의 모양 같고 그들은 마치 기병들처럼 달리리로다. 그들이 뛰는 것은 산꼭대기들에 있는 병거들의 소리 같고, 그루터기를 삼키는 불꽃 소리와도 같으며, 전열에 배치된 강한 백성 같으리라.}고 말하며, 재림 시에 에돔은 큰 살육을 당할 것인데 [{주의 칼이 피로 찼으며, 기름짐과 어린 양과 염소의 피와 또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기름졌도다. 이는 주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이두메 땅에서 큰 살육을 내심이라.}(사 34:6)], 그곳은 불못이 되기까지 할 것이다 [{그곳의 시내들은 역청으로 변하게 될 것이요, 그곳의 흙은 유황으로 변하고, 그곳의 땅은 불타는 역청이 되리라. 그것은 밤낮 꺼지지 않을 것이며, 그 연기들은 영원히 올라가리라. 대대로 그것은 황폐하게 남아, 그곳을 통과하는 자가 영원 무궁토록 아무도 없으리라.}(사 34:9,10)]. 그 후에 주님은 온 땅의 왕이 되시어 화평으로 다스리실 것인데, 이사야 2:4이 {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을 책망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들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며, 자기 창들을 두들겨서 낫을 만들 것이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온 민족들을 심판하신 후에 세상을 평화로 치리하실 것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쫓겨났던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주의 속량받은 자들이 돌아오리니, 그들의 머리 위에 노래와 영원한 기쁨을 가지고 시온으로 오리라}(사 35:10). 예레미야는 {그 날들에 유다 집이 이스라엘 집과 함께 행하리니 그들이 함께 북쪽 땅에서 나와 내가 너희의 조상에게 유업으로 주었던 땅으로 오리라.}(렘 3:18)고 예언한다. 이 일은 바빌론 포로 회복에서 있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바빌론 포로의 회복은 유다의 회복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그 땅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북왕국에 속한 열 지파는 누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이 함께 돌아온다고 말하고, 예레미야 31:31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에스겔 48장은 열두 지파들이 제자리를 찾아, 그들의 약속의 땅에서 각각 유업을 받는 모습이 예언되어 있다. 이 땅의 분배는 여호수아가 분배한 것과 다르다. 이것은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이 분배받게 될 땅의 모습이다. 그때 이사야에 따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할 것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요,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할 것이다(사 11:6,7). 사람들은 이러한 예언들을 볼 때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되며, 흉악하던 죄인이 의롭게 변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틀린 해석이며, 예언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취하는 결론일 뿐이다. 우리가 성경의 예언들을 대할 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예언의 언어가 비유적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예언이 상징화되어서는 안된다. 예언은 말씀한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초림과 재림의 분리된 적용 그런가 하면 어떤 예언들은 두 개 이상의 사건에 적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초림과 재림에 동시에 또는 나누어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1,2이 고전적인 예이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에게 기쁜 소식들을 전파하게 하셨으며, 그가 나를 보내시어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감옥이 열림을 선포하며,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고} 이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인용하시며 자신을 백성 앞에 나타내 보이실 때 인용하셨던 구절이다(눅 4:18-21).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구절 전체를 인용하지 않으시고, 2절의 중간 부분까지, 즉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까지만 인용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주님은 여기까지 인용하신 후에 "이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이루어졌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사야 61:1,2 중에서 그 당시 이루어진 부분까지만 인용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럼 그 다음 부분은 왜 인용하지 않으셨는가? 다음 부분은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라는 부분인데, 이 부분은 명백히 재림 때에 성취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이시므로,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 아셨다. 그래서 당대에 이 부분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계셨다. 재림 때에 주님은 무서운 왕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복수하러 오시겠지만, 초림 때에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러 오셨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부분 인용하신 것이다. 이러한 면은 이사야 9:6,7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 데 끝이 없으리라...} 여기서 "한 아이가 태어났고"라는 예언은 분명히 초림 때에 적용되는 예언이다. 그분의 이름이 놀라운 분이요, 상담자요, 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하신 아버지라 함도 지금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나 화평의 통치자라 함은 아직 불리워지지 않는다. 이 이름은 영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서 화평으로 다스리신다는 의미의 이름이 아니라, 이 땅을 화평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지금 그분은 이 땅을 화평으로 다스리시지 않는다. 이 땅은 여전히 죄와 고통만이 점철되어 있는 악한 곳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온 땅을 심판하신 후에는 화평의 통치자가 되시어 다스리실 것이다. 그때 "그의 정부와 화평"은 증가할 것이고, 그것들이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즉 다윗의 보좌 위에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 앞에서 온 땅은 전쟁도 그치고 화평하게 된다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들은 왜 함께 있는 것인가? 초림과 재림의 시간 간격은 꽤 많이 떨어져 있는데 왜 선지자들은 한꺼번에 이 두 사건을 예언했는가?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오심은 초림이나 재림이 아니라 단순히 "오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 시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초림과 재림에 관한 많은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라킨(Clarence Larkin)은 "예언의 산봉우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선지자들은 첩첩이 싸여 있는 산들을 보듯이 예언을 보았는데, 그 산들 사이가 실제로는 커다란 공간이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산들은 한 산의 여러 봉우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림에 대한 산들이 있고 재림에 대한 산들이 있을 때 선지자들은 그 모든 산들을 한 산의 봉우리들로만 인식하고, 그 사이에 있는 거대한 교회의 골짜기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사건은 별도의 사건일 필요가 없었다. 초림과 재림이 구별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 두 사건이 이천 년이라는 긴 공백을 두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이 거부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들(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 만일 유대인들이 초림 때에, 적어도 그분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직후에만 받아들였다 해도 역사는 이처럼 긴 2000년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거부했고, 그로 인해 교회 시대가 생겼고, 그래서 그분의 오심은 초림과 재림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구약예언들은 초림과 재림으로 나뉘어서 적용되게 되었는데, 그 예언의 내용으로 볼 때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재림에 대한 예언이 훨씬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언의 이중 적용 예언은 이처럼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뉘어서 적용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예언들은 나뉘어서 적용된다기보다 이중적으로 적용된다. 즉 같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 11장에 나오는 북쪽 왕과 남쪽 왕에 대한 예언 중 북쪽 왕으로 알려진 자가 성전을 더럽히는 장면이다. {군대가 그의 편에 서서 견고한 성소를 더럽히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며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리라}(단 11:31).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을 알렉산더 이후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시킨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게 대했고, 성전에다 가증하게도 돼지의 피를 뿌리는 등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소를 매우 가증한 방법으로 더럽혔다. 또 예표적으로는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모형이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적용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예언이 안티오쿠스에게 한정되어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이 사건을 미래의 사건(예수님 당대로부터 미래)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마 2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한 번 예언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은 안티오쿠스에게 적용된다기보다는 다른 사건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듣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 그 말씀은 이미 성취된 예언 아닙니까? 그러면 성전이 훼파되는 그러한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면서,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씀드렸을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들에 성전과 그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었다. 결국 성전을 가증스럽게 만들었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취되었던 그 예언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또 많은 사람들은 A.D.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는 것에 적용한다. 이 적용도 전혀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어쨌든 그때 성전은 극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마 24:2) 하신 것이었는데, 그 예언 그대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은 단순히 A.D. 70년에 한정되어 적용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대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듯이, 그 전체 문맥은 미래에 있을 대환란 때를 향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전 파괴는 앞으로 다시 한번 더 있을 것이고,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는 예언은 자연스럽게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에게 적용될 것이다. 자, 이 예언은 삼중으로 적용되었다. 한번은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한번은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또 한번은 대환란 때의 적그리도에게이다. 이 중 앞의 두 적용은 역사적인 적용이고, 마지막 적용은 교리적인 적용이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나 티투스는 모두 미래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일 뿐, 이 예언을 이 두 사람에게 한정시켜 적용하는 것은 성경 예언의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한 바와 같이 성경의 예언들은 대부분 재림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서 예언을 뽑아 보면 대략 800개 정도의 예언이 있는데, 이들을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다루기는 무리이다(다만 대표적인 것들만 몇 개 비교해 보았다). 이 800개 중에서 300개 정도는 초림에 관한 예언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500개 정도의 예언은 재림에 관한 예언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런데 300개의 초림에 관해 성취된 예언들은 대부분 단독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재림에 대한 예언의 문맥 속에 함께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초림과 관계없이 단독적인 것이 많다. 또한 초림에 관한 예언들은 짧게 등장하지만,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한 가지 예언이 많은 절들로 이루어져, 큰 예언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성취된 예언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 성취될 예언들도 모두 문자적으로 정확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 성경의 예언을 올바로 공부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엄중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 1:19).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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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방법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방법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대를 나눈다는 것은 세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각 시대별로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달리 나타난다는 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 중에 우리는 이번 호에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살펴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대에 따라 구원의 방법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언약신학자들뿐 아니라 세대주의를 표방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어려워하는 "질긴 고기" 같은 부분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면 별 어려울 것도 없는데, 그들은 교회 시대의 관점에서 다른 모든 시대들을 보려고 하니 억지로 꿰어 맞추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언약신학에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으므로 성경의 모든 주제를 구속에 한정시킨다. 그리고 그 구속은 반드시 피에 의한 구속으로서, 그 구속의 효력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신 것도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아벨이 드린 제사도 피의 제사였고, 율법 하에서 드려진 제물들도 모두 피를 흘렸기에 이 피에 의한 구속의 교리는 성경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오늘날 신약 성도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매우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에 면밀히 흐르고 있는 "피에 의한 구속"이라는 교리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라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피가 누구의 피냐는 것이다. 그 피가 그리스도의 피인지 동물의 피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는 절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린 사람과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십자가의 죽음)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찌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히브리서 9:17에선 {유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으며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유언"이란 "새 언약" 즉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맺어주신 새 언약은 그분이 피를 흘려 주셔야만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여전히 옛 언약(구약)에 속해 있었고, 그때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한 상태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하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구속에 대한 진리는 예표였을 뿐이고, 감추어진 진리였다. 그들은 단지 모형만을 보았지만, 그것마저도 그것이 모형인지, 또 무엇에 대한 모형인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따라서 그림자요 예표로 제시된 구속을 주제로 삼기 위해 드러나 있는 왕국이라는 주제를 감추어버리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요, 모든 것을 교회에다만 맞추려는 제한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문제로,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각 시대가 나뉘어진다면, 그 시대별로 구원에 대한 계획도 달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각 시대별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 시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분의 신정통치 왕국의 관점에서, 이 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나뉘어진다는 것이다(본 지 93,94호 [언약들과 시대들 Ⅰ,Ⅱ] 참조). 따라서 구원에 대해서는, 나뉘어진 각 시대마다 모두 구원이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해서 본다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있는데, 첫째가 율법 이전 시대요, 둘째가 율법 시대요, 셋째가 교회 시대요, 넷째가 교회 이후의 시대이다. 1. 율법 이전의 구원 무죄 시대에는 구원이 따로 필요없었다. 그들에게는 죄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의 개념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때부터 인간에겐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은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던 그들의 영은 죽어버렸고, 그래서 창조 때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져 버렸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히 1:3)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복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양심 시대와 인간정부 시대와 약속 시대는 "왕국"에 대한 관점으로 하나님의 경륜상 나뉘어지는 시대이지만, 구원에 관해서는 동일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어쨌든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 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율법도 주어지기 전인지라, 그들의 양심에 심겨진 이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기준이 되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도 판단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선한 일을 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악한 범죄에 동참했지만, 노아는 그의 의로운 행위로 세상을 닮지 않았었다. 에녹도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예표였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범죄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법으로 심판을 하셨겠는가? 바로 그들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창세기 15:6에 따르면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또 그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노아처럼 의로운 행실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 가운데 은혜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아브라함의 구원을 위한 개인적인 택하심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택하심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또한 그가 신약 성도들과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거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주어지고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가 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 신약 성도들처럼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믿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씨가 번성한다는 것, 그의 씨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을 그의 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피를 믿었다는 말은 없다. 사람들은 "모형"을 말하곤 하지만, 모형으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모형은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도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을 만한 근거는 여전히 그들의 양심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당시 아브라함을 제외한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갔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2. 율법 시대의 구원 그 다음은 율법 시대다. 율법 시대에도 양심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위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되지만, 이때 이들에게 행위의 기반이 되는 것은 양심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시된 법령인 율법이다. 율법은 신정통치 왕국인 이스라엘의 통치 기틀이 되는 법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율례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명시된 규례들을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율법 시대의 구원의 핵심은 여타의 법적인 규례들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관한 법이었다. 사실 율법은 이들이 지키기에 매우 어려운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율법에 의하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인정받다가도 다시 범죄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들보다 "용서"였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에서도 동일하다. 신약의 죄인들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용서"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용서케 해주는 것이 누구의 피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동물의 피였다. 동물의 피도 비록 제한적이지만 분명 구속력은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동물의 피를 흘려야만 용서를 받았다. ("예표" 운운하지 말라. 예표는 어디까지나 예표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피는 제한적이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뿌려져야 했다. 그래서 구약의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성령님께서 임하실 수도 있고 떠나실 수도 있듯이 구원도 그러했다. (신약에서는 성령님께서 한 번 임하시면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 즉 이때의 사람들은 동물의 피로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되, 그 구원이 신약 시대처럼 온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구원을 받기는 받아도 우리와는 다른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앞으로 그분의 신부가 된다. 하지만 율법에 속한 구약 성도들은 그렇지 못하다. 율법에 속하여 그 마지막을 장식했던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신랑의 친구"라고 했다. 그들은 친구이지 신부가 아닌 것이다. 이 율법 시대는 십자가 사건까지 간다. 민족들을 다루시는 경륜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 이방인의 때가 도래하기도 했지만, 구원에 관해서는 여전히 율법 시대이고, 새 언약의 피가 뿌려질 때까지 율법은 계속 옛 언약(구약)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율법은 어디까지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는 여전히 "양심 시대"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고, 또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니만큼, 신약 성도들은 율법과 무관한 생활을 한다. 안식일도, 할례도, 십계명도, 동물제사도, 음식이나 의복이나 기타 여러 가지 규례들도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3. 교회 시대의 구원 교회 시대의 구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오직 믿음만이 이 시대의 죄인들이 구원받는 방법이다. 이때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어떠한 죄인도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 행위를 의지하면 안된다. 어떠한 의식도 의지할 수 없다. 그가 구원받으려면 오직 그분의 피를 신뢰해야만 한다. 이 피는 완전한 피고, 영원한 피인 하나님의 보배로운 피이다. 죄를 씻을 곳은 오직 그분의 피밖에 없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롬 7장).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죄인인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므로, 더 이상 어떤 악한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는 요소는 되지 못한다(엡 2:8,9). 하늘 위나 아래나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이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 한다. 이 보장은 오직 신약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아담 이후로 죽었던 영이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으로 회복하며, 미래에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또 그분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내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지위인 것이다. 4. 교회 이후의 구원 그러다 그리스도의 몸이 휴거되면서 교회 시대가 닫히게 된다. 왕국 시대가 펼쳐지기 전에 잠깐 동안 펼쳐질 과도기 같은 이 대환란 시대에는 매우 독특한 구원의 방법이 제시된다. 교회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은혜로만 구원받는 기회는 없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갑자기 무효화될 수도 없다. 그 피는 영원히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환란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추가해서 모세의 율법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교회에 대한 경륜이 사라지고 다시 유대인에 대한 경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자들은 십자가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완전히 관계를 단절하시고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분의 통치를, 그것도 영적인 통치만을 이루신다고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시한 처사로,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언약들을 교회에게로 빼앗아 오고자 하는 불경스러운 의도일 뿐이다. 그들에게 문자적인 예언은 철저히 무시된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이 회복된다고 말씀하고 있고(롬 11장), 그때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진 다음이다. 유대인들은 대환란 기간 동안 다시 심판받고, 연단받고, 정화되어 불경건한 것들이 다 제거된 후, 그들을 위해 예비된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대환란 때는 이방인들이 연합하여 유대인들과 대치되는 정국을 맞이할 것이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러셨듯이,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 즉 유대인들을 위한 경륜이 펼쳐질 것인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독특하게 주어진 율법이 다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환란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계 12:17). [대환란 이후에 펼쳐질 왕국 시대에는 행위가 더 강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기본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인데, 이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와 눈에 보이도록 통치하실 것이다. 누가 감히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산상설교에서 명시된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듯 왕국 시대의 법령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불못에 던져지는 처벌을 당해야 할 것이다. 마 5:29,30] 또한 대환란 때의 구원은 불완전해서 구원받고 난 후 범죄하면 그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때가 구약보다 더 엄격한 것은, 구약에는 그래도 다시 동물의 피를 흘리면 되었지만, 이때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다음이므로 다시 동물의 피는 흘릴 수 없고,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피도 다시 흘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 구원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히 6:4-6).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특히 히브리서나 야고보서 등에서 누군가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구절들을 대할 때 당황해 하거나 억지로 풀지 말 것은, 그러한 구절들은 교회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교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반드시 성경은 기록된 대로 믿어야 한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성경을 불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 등에서 보듯이 성도들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이 아닌 이상, 그러한 구절들은 다른 시대에, 다른 경륜 속에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또한 환란 때에 믿음과 행위로 이처럼 힘들게라도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으로 나타내시는 그분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덜 사랑하셔서 더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두 휴거되어 올라갔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멸절하시고 모두 지옥에 보내셔도 된다. 그들은 어쨌든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즉결심판에 넘기지 않으시고 유예기간을 주시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것이다. 단지 그들을 교회 시대와 동일하게 대우하실 수 없으신 것뿐이다. 이러한 식의 은혜는 성경 전체에 깔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대로 죽여 버리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그들을 모두 홍수나 불로 멸망시켜 버리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했을 때 그들을 모두 멸망시켜 버리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자리에서 죽이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번제물의 피를 가져 올 때까지 참아주셨다. 이것이 그분의 은혜이다. 신약 시대의 은혜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와같은 그분의 은혜는 환란 시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혜까지도 저버리게 되면 다시는 기회가 없게 될 뿐이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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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언약 과 시대들 II
언약 과 시대들 II 성경에서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경륜의 각 기점들이 된다. 그분의 경륜에 따른 시대들은 때로는 개별적인 구원에 있어서, 때로는 민족적인 구분에 있어서 각기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흔히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지는 기본적인 구분은 하나님의 경영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언약들이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혹은 여덟 개가 있다. 그 실로 다양한 언약들은 어떤 모습을 띠며, 각 언약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를 주관하시는가? 지난 호에서는 에덴의 언약과 아담의 언약과 노아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살펴보았고, 이번 호에서는 모세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과 새 언약을 살펴보자. 모세의 언약 - 율법 시대 출애굽은 그들의 민족적 탄생의 기점이 된다. 더 이상 그들은 부족이 아니라 명실공히 한 민족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낸다. 아직 그들에게는 이방 민족들과 같이 체계적인 왕의 제도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정통치 하에서 그분의 왕권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있었고, 그는 실제로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신 33:5). 그렇다. "신정국가"이다. 고대의 모든 국가들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정치형태를 띠고, 또 신적인 탄생이라는 건국신화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처럼 이방인들, 특히 당대의 최고 국가였던 이집트를 무참히 짓밟고 한 민족을 탄생시키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갖고 있지는 못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탄생시키실 때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군대 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었다. 출애굽기 5-12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통쾌한 승리를 보라. 그 위대한 파라오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드디어 출애굽을 하는 12장 마지막 절에서 이같은 기사를 읽는다. 『바로 그 날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더라』(출 12:51). 이스라엘은 위대한 왕의 인도함을 받는 "군대"로 탄생한 것이다. 하늘 아래 어떠한 민족도 이같은 방식으로 탄생한 민족은 없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래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이고, 그 택하심을 구체화시키시어 모든 민족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큰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만큼, 그에 합당한 요구사항들이 부가된다. 이 요구사항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율법"으로 대표되는 이 언약은 다분히 "조건적인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언약은 무조건적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씨가 어떠한 요구사항을 지켜야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저주받을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언약에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용어를 사용하려면 신약성도 개개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모세의 언약은 달랐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이 언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하면 벌을 받고 복종하면 복을 받게 된다. 그들의 벌은 심지어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언약의 기본적인 내용은 "율법"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를 "율법 시대"라고 한다. 이 율법은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제사법들, 모든 도덕법들, 음식과 의복에 관한 법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인 규례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이 율법의 형벌은 매우 엄격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 적용되고, 특정한 법을 어기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율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통치 기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것은 특별히 제사법에 관련해서 그러한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의 피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레위기, 특히 5장을 참조할 것). 만약 이 규례에 따라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고, 자기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율법을 통해 다루신다.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이고, 구원받는 길이었다. 신약과 연관해 볼 때 이 율법은 십자가의 예표가 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속죄제물이시고, 화목제물이시며, 그 피는 모든 동물들의 피가 가리키는 진정한 피다. 하지만 "율법이 십자가의 모형이므로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지킬 때 십자가를 보고 구원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적으로 아무도 십자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그림자이고 모형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림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누군가가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실체"를 통해서만 받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계시도 받지 못했거니와 구체적인 예언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율법이 모형이나 그림자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구약의 율법은 신약과 비교해 보니 모형이라는 것이지, 당시 구약 성도들에게도 모형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모든 삶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그림자로서의 삶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실체였다. 만약 구약 시대의 누군가가 "율법으로는 어떠한 육체도 구원받을 수 없어.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냐. 이것은 분명히 앞으로 올 무엇인가에 대한 모형일 뿐이야. 나는 그것을 기다리겠어."라는 마음으로 율법에서 제시한 제사 의식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려야만 용서받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시대의 구원 방법은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롬 3:20)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했고,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깨달음이 있다고 했지, 율법을 통해 "구원받지 못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이것을 하라.'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는 조항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누가 그것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 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율법에는 또한 "용서"에 해당하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사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의 핵심은 율법에 따라 주어진 제사로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지옥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인데, 이 형벌은 용서를 받으면 면해지는 것이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아무리 완벽히 지키려 해도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한 것이 되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셨고, 그것이 바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율법은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적 백성인 교회를 중심으로 다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은 율법으로 다스림받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겐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여전히 양심으로 다스림을 받는 양심 시대가 이어진다(롬 2:12-16). 한편 모세의 언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도의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땅"과 연관된 언약이다.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약속하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항상 주장하셨는데, 모세 때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 땅으로 나아간 것부터가 이 땅에 대한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전쟁으로 그 땅을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땅에 대한 같은 언약이라도 이 언약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른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는 이 땅이 당연히 유대인들의 것인 반면, 모세의 언약에서는 그들이 범죄하면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회개해야만 회복된다. 이것은 이 언약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단면이다. 특별히 신명기 28-32장에 걸쳐보면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저주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전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면 그들은 "그 땅에서 번성할 것이요," 그들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면 여러 가지 벌을 받게도 되지만 그 종국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신 28:58-64). 학자들에 따라서 땅에 대한 이 부분을 모세의 언약과 구별해서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스코필드, 라킨 등). 다윗의 언약 - 왕국 시대의 예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지만, 특별히 "다윗의 언약"이라 부르는 것은 사무엘하 7:12-16에서 제시된다. 『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곧 네 뒤에 올 네 씨를 세우고, 내가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삼하 7:12,13,16). 아브라함에게서 땅과 민족이 결정되었고, 모세에게서 통치 기틀이 결정되고 땅이 확정되었으니, 다윗에게서는 왕국과 보좌가 결정된다. 이미 다윗의 왕국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이 언약을 다윗에게 주시는 것은 앞으로 다윗의 씨를 통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예언이다.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이 이 언약을 이어받아 "다윗의 아들"로서 왕국을 안정시키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성전도 지었다. 그리고 성전을 봉헌할 때는 아버지 다윗에게 주신 이 언약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대하 6장). 하나님께서도 그 언약을 기억하시어 솔로몬이 죄를 지었어도 사울 때처럼 그 보좌를 빼앗지 않으시고(삼하 7:14, 15), 다윗의 이름으로 세워진 보좌는 견고히 유지하셨다. 하지만 이 예언은 단지 솔로몬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예언의 참다운 계승자는 미래에 오실 메시야다. 그야말로 영원히 세워지는 메시야의 보좌에 적용될 예언인 것이다. 솔로몬의 보좌는 다음 대에 갈라졌고, 바빌론 침공 때에는 끊기고야 말았다. 따라서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데, 그때 메시야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 그토록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신 것은 그분이 바로 이 언약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유대인은 영원히 그 땅에서 번성한다는 약속이 주어졌는데, 다윗의 언약에서는 그 왕국이 영원히 번성한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특이한 것은 이전의 다른 언약들에서는 언약이 주어짐과 함께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한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이 언약에서는 한 시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언약은 미래에 이루어질 예언이지, 모세의 언약 때처럼 당대에 경륜이 바뀌어버리는 언약이 아니다. 다윗이 이 위대한 언약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모세의 언약 하에 있고, 구약의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했던 한 사람이었다. 다윗이 이때 언약을 받았다고 다윗 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은 아니고, 이 언약은 미래로 넘어가 왕국 시대를 이끌 예언이 되는 것이다. 흔히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윗의 예를 들곤 한다. 즉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범죄한 후 죽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으니, 신약 시대와 동일한 은혜가 구약 시대에도 주어졌다는 것이며, 따라서 구약의 구원 방법도 신약의 구원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다윗이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행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다윗도 여타의 구약 성도들처럼 용서의 법을 적용받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은 도피시절 제사장들 외에는 금지된 성막의 차려놓은 빵을 먹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징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도 신약에서 이 예를 드시면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말씀하셨다(마 12장). 이것은 다윗이 받은 특별한 "확실한 자비"에 속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속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윗이 그랬다고 구약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외가 있다고 해서 규칙 자체가 무시될 수는 없다. 또한 다윗은 범죄했을 때 누구보다 깊은 "상한 영"으로 참회를 했다(시 51:17). 아무리 구약의 율법이 엄격해도 죄를 짓자 마자 즉결심판을 한 것은 아니다. 다윗은 심판을 받기 전에 참회를 했고, 그 후에 희생제를 드리겠다고 했다(시 51:19).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에 대해 적절한 보응을 하셨다. 또 다윗의 말년에 백성을 계수하는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을 때에, 다윗은 분명히 희생제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삼하 24:18-25). 새 언약 새 언약은 사실 두 가지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실 새 언약(New Covenant)이고, 또 하나는 교회와 맺으신 새 언약(New Testament)이다. [영어에서 이 둘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testament도 언약의 일종이며, 실제로 교회와 맺는 언약도 covenant로 사용될 때가 있다.] 신학적으로 이 두 "새 언약"들은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둘이 모두 한 옛 언약에 대한 새로운 언약이 되기 때문이다. 그 옛 언약은 모세의 언약이다. 1. 유대인과 맺는 새 언약 - 왕국 시대 이 언약은 예레미야 31:31에서 『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니』라고 말한 것처럼 오직 유대인들과 맺으실 언약이다. 그것도 아직 맺어지지 않고, 앞으로 맺으실 언약이다. 다윗의 언약은 이미 맺어진 상태에서 아직 그 시대가 미래에 온다는 예언이지만, 새 언약은 언약 자체를 미래에 맺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언약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손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던 날에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32절)라고 말한 것처럼 모세의 언약과 대조되는 언약이다. 모세의 언약, 즉 옛 언약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파기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고, 그들의 죄들을 용서하신다. 그때는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이웃과 형제에게 "주를 알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34절). 즉 주님에 대한 전파가 그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교회 시대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주님에 대한 전파가 더 지속적으로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언약은 메시야 왕국이 임할 때에 맺어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 반역하여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지만, 그들은 대환란 때에 심판을 받고 민족적인 회심을 할 텐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다(사 40:1,2). 그때 유대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위대하게 될 것이다. 2. 교회와 맺으시는 새 언약 - 교회 시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은 교리적으로는 왕국 시대에 적용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에 적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의 내용 중에는 그분의 법을 마음 속에 기록한다는 것과 그들의 죄악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 안에는 마음 판에 그분의 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입혀진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언약을 영적으로 적용하지 않더라도, 교회에 해당하는 분명한 새 언약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만찬자리에서 포도주로 예시하신 것인데, 이에 대해서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 26:28)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언약은 "그분의 피로 맺으신 새 언약"인 것이다. 이 언약이 새 언약인 것도 이전의 모세의 언약과 대조하여 새 언약이라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특별히 모세의 언약 중 동물의 피와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관점에서 새 언약이다. 구약에서는 용서를 받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것도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반복해서 피가 흘려져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피흘리심으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동물들의 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하고 완전하다. 따라서 신약의 구속은 구약보다 더욱 확실하고 안전하다. 이것이 구약에는 성령께서 임하셨다가 떠나가실 수도 있고, 구원을 받아도 잃어버릴 수가 있지만,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임하신 후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고,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이유이다. 이 언약은 피로 맺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야 효력이 발휘되었다(히 9:15).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아직 구약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존중하지만, 그분의 죽음 이후에는 새 언약에 따른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것은 바울 서신들에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언약이 "신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현재 신약 시대를 이끌고 있는 언약이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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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언약 과 시대들 I
언약 과 시대들 I 우리는 성경에서 몇 가지 언약들을 통해 시대들이 나누어지는 체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들을 통해 또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도 발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이 부분이 세대주의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잘못 이해되어 가장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약속을 하시는 것 중, 특별히 인간사 전체를 통괄하는 그분의 경륜과 관계된 약속들을 "언약"(covenant)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 나라 신학계에서 "계약"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이를테면 "계약신학"),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우리말에서 계약이라 함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합의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요구"하실 뿐이다. 모든 언약들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자신의 다루심을 어떻게 나타내 보이실지를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에 맞는 요구를 하시는 것이 이 언약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언약들에 의해 시대들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에 클라렌스 라킨은 세대주의를 정의하기를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라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른 정의라 아니할 수 없다. 자,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어떤 시대들로 나뉘어지며, 그것들을 구분짓는 언약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1. 에덴의 언약 - 무죄 시대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 만드시고 그에게 이 땅을 경영하라고 주시면서 맺으신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온 지면 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를 내는 나무의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들에게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8-30). 주로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이 언약은 아담에게 땅에 대한 통치권을 주시겠다는 언약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죄없는 상태에서 이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정복하며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 그 통치권은 약속 받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이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 원하신 계획은 이 땅을 죄없는 인류로 가득 채우시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 땅이 가득 차면 다른 별들에까지 이주시켜 죄없는 인류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우시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계획은 원래 그 이전, 즉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 갖고 계셨던 계획이기도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비롯한 영적 존재들로 우주를 가득 채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영원히 나타내려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잘 아는 바와 같이 사탄은 타락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주는 더럽혀졌다. 하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그분의 피조 세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고, 그때 우주는 큰 홍수로 심판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1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곧 이어 1:2에서는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1절의 창조를 6일 간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창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창조는 "태초"가 아니다. 또 이 창조가 6일 간의 창조 행위를 말한다면 사탄은 언제 창조되었으며, 언제 타락했겠는가? 6일의 창조 기간 가운데 사탄이 창조되었다는 말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또한 에덴으로 사탄이 침투했을 때는 그 이전에 타락한 사탄이 와야 하는데, 6일 가운데 창조되었다면 언제 타락했다는 말인가? 사탄은 분명 그 이전에 타락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탄은 그 이전에 창조되었음도 틀림없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는 6일 간의 창조 기간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원래의 창조"를 나타내는 "태초"인 것이다. 2절은 타락 후 심판이 있은 다음 황폐해진 우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운 물들의 표면에 거니시며 재창조를 준비하신다. 따라서 6일 간의 "재창조" 이후 새롭게 펼쳐진 세상에서 아담에게 새로운 땅을 약속하셨을 때 그에게 그 땅을 "다시 채우라"(replenish)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사탄의 타락으로 인해 무너진 계획을 이제 아담의 인류를 통해 다시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이때 주어진 또 하나의 명령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창 2:17)는 것이었다.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약속(창 2:16)과 더불어 주어진 이 명령은, 불복종하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형벌 조항까지 담겨 있었다. 이 언약으로 시작되는 시대는 거의 완벽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지된 열매를 먹은 다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지만, 아직 먹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죄가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라는 진리는 아담 이후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금지된 열매에만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는 어떠한 행동도 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무죄 시대"(innocence)라 한다. (가끔 이 말을 "순수의 시대," 또는 "순진무구의 시대"라고 번역한 책들이 있는데, 이는 세대주의의 이해가 부족해서 단어의 뜻만 갖고 잘못 번역한 것이다.) 2. 아담의 언약 - 양심 시대 하지만 이 무죄 시대는 매우 짧게 끝났다. 그들은 자식 한 명 낳아 보기도 전에 타락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도 성취시키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타락해 있던 사탄의 개입이 매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사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길고도 긴 영적 전쟁이 땅과 인간을 놓고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영적 전쟁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둘 중 하나의 편이 되어야 한다. 즉 사탄의 편이 되거나 하나님의 편이 되거나 하는 것이다. 다른 일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있으나, 영적인 문제가 개입되는 순간부터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 어디를 펴 보아도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과 사탄이 벌이는 이 거대한 영적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이 첫 번째 전쟁에서 우리의 조상은 지고 말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그들 안에 죄가 발견되었고, 이 짧았던 "무죄 시대"는 종결을 고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며, 남자와 여자와 뱀을 차례로 책망하시는 가운데, 남자에게는 수고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자에게 복종함을, 그리고 뱀에게는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 것이라는 형벌을 내리셨다. 땅도 아담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뱀에게 내리는 형벌은 단순히 흙을 먹으리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멸망에 대한 저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뱀에 대한 이 저주는 인간에게는 크나큰 축복의 언약이요, 또 하나님께는 사탄과 벌이는 모든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차지하시겠다는 선포이기도 하다. 바로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 3:15)는 말씀이다. 이 선포는 사실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과 싸우는 두 개의 큰 전쟁을 내포한다. 첫 번째 전쟁에서 뱀의 씨는 여자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 것이고, 두 번째 전쟁에서 여자의 씨는 뱀의 씨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전쟁이라 함은 십자가에서 벌어진 큰 전쟁을 말함이요, 두 번째 전쟁이라 함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서 사탄의 머리를 부숴버리시는 큰 전쟁을 말한다. 비록 인간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그 풍성한 축복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 후로 태어날 모든 인류를 죄 가운데 집어 넣었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이루어 드리지 못했지만,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최후의 승리를 약속해 주신 것이다. 물론 십자가 자체도 발꿈치를 상하셨다 해서 실패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승리하셨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속박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놓아주셨고(히 2:15), 친히 부활 하심으로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탄은 아직 그의 권세만 잃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패배자로 판결을 받은 셈이다.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비록 타락하여 낙원에서 쫓겨나는 인간들이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들이 사실임을 인쳐주시기 위해 한 표적을 주셨으니, 곧 가죽 옷으로 그들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이다. 왜 가죽 옷인가? 이 가죽 옷이 양의 가죽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시겠다는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것은 위대한 신약 시대를 예표하는 사건이다. 죄로 인해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분의 온전한 은혜로만 구원한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예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가죽 옷을 입었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 한들 그것이 예표는 되었을지언정 그것으로 구속을 이루는 효력은 발휘할 수 없었다.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예표가 아니라 실체여야 한다. 예표는 단지 앞으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그들 안에 죄가 발견됨으로 이미 "무죄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고 아직 율법과 같은 구체적인 법문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십자가로 구속이 완성되어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서 2:15,16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에 따라 판단받는다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 양심에 따라 판단받아야만 했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양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3. 노아의 언약 - 인간정부 시대 하나님의 경륜이 무죄 시대에서 양심 시대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이 양심에 따라 더 선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더욱 드러낼 뿐이었다. 이들의 죄는 극에 달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게 되었는데, 이 심판은 온 인류에 대한 완전한 대가로 "인류의 멸종"이라는 것이었다.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때 노아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전세계를 단독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아담도 그 이전에 있었던 존재들이 멸종한 다음에 새롭게 땅을 다시 채우기 위해 창조되었고, 노아도 그 이전에 있었던 종족들이 멸망한 다음 땅을 다시 채우기 위해 남겨졌다. 그래서 노아의 언약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맺었던 에덴의 언약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창 9:1,2). 여기에서 에덴의 언약에 추가되는 사항은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과 더불어, 즉 거기에 있는 피째 먹지 말지니라』(창 9:3,4). 즉 육식이 허용되되 피째 먹지 말라는 것과,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려지게 되리니』(창 9:6), 즉 사형제도가 제정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아의 언약이 맺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 땅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종족으로 가득 채우시려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창조 때와 똑같은 관점으로 그분의 계획을 실현시키려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온 인류를 멸종시키시고, 노아로 하여금 새로운 인류를 번성시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경륜과 다른 어떠한 것을 제시하실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무죄 시대였던 아담의 창조 때의 경륜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죄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타락한 성품은 다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었고,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아무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죄들에 대한 심판의 근거를 따질 때는 여전히 양심 시대가 연장된다. 그러나 이 양심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한다. 이들의 죄도 이전처럼 세상에 가득 퍼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단지 바벨탑에서 흩어버리기만 하신다. 그리고 이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각 민족들이 나뉘어지게 되고,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 정부를 구성한다. 최초의 왕국은 창세기 10:10에서 님롯을 통해 시날 땅(바빌론 지역)에 세워진 이방 왕국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갈라진 세 인종에서 파생된 민족들이다. 이때부터 세상은 이들을 통해 이방인들의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 아직 유대인이 선택되기 전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이다. 이 이방인들이 각각의 정부를 만들어 나름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때부터를 "인간정부 시대"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이 "인간정부 시대"라는 새로운 경륜은 무죄 시대나 양심 시대처럼 인간의 죄들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로서의 경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로 볼 때는 여전히 양심 시대이다. 여기서 시작되는 인간정부 시대는 다른 관점으로 시작되는 경륜인데, 그것은 왕국에 관한 경륜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은 단순히 인간을 죄인이 되게 하거나 죄에서 해방시키거나 하는 차원의 전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왕국을 사탄이 자신의 왕국을 일으켜 대항하는 차원으로 발전된다. 이때 이방의 국가들(정부들)이 생겨나는 것은 향후 나타날 하나님의 정부, 즉 이스라엘을 통한 신정국가를 대적하기 위해 생겨난 왕국들이다. 사탄은 항상 이방 왕국들을 통해서(단독 왕국이든, 연합 왕국이든)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여전히 양심 시대가 유지되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인간정부 시대인 것이다. 4. 아브라함의 언약 - 약속 시대, 또는 족장 시대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온 세상을 멸하지 않으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인류로 온 땅을 채우시겠다는 계획을 바꾸셨다. 물론 이 계획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 원래의 계획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후 죄와 죄의 기원인 사탄이 멸망한 다음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차피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는 순수하게 땅을 채울 수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신정통치로 인해 우뚝 설 수 있는 모델 국가를 만드시어, 그 민족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범 왕국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물론 아직은 "아브람"이었다.)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창 12:2)고 말씀하셨는데,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언약"은 창세기 13:14-17; 15장; 17:1-8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언약은 크게 하늘의 별처럼, 또 바다의 모래처럼 아브라함의 씨를 번성케 하신다는 "씨"에 대한 언약과(창 15:5; 22:17), 그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땅"에 대한 언약(창 13:14-18; 15:18-21)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소유로 주어 거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이다. 물론 이 "씨"에 대한 부분에서는 갈라디아서 3장에 따라 교회가 차지할 영적인 부분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하지만 교회는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그러므로 그 땅을 유업으로 받는 씨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가 아니라 육신적인 씨인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은 단지 그 땅에 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셔서 그들을 직접 통치하시는 가운데, 그 민족을 온 이방의 복으로 삼아, 이 민족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앞서 인간정부 시대에서 시작된 모든 이방 민족들은 사탄의 수하에 있지만, 아브라함을 통해 나올 한 민족은 그 모든 민족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이 약하게 되면 온 이방 가운데에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이스라엘이 위대하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높아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택함을 받는 시점은 하나님의 경륜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롬 4:11).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더라』(창 15:6). 사실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신약 성도와 가장 유사하게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브라함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약속을 믿음으로 의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의가 신약 시대의 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이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예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일 뿐, 실제적으로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신실하게 믿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상속된다. 성경은 그들을 "약속의 상속자들"이라고 말씀한다(히 11:9). 그래서 이 시대를 "약속 시대"라고 하며, 또 이 시대의 무대가 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이며, 이들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이 시대를 "족장 시대"라고도 한다. 물론 이방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양심 시대와 인간정부 시대가 이어진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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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세 부류의 사람들
세 부류의 사람들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비록 사탄이 공중 권세의 통치자로, 또 이 세상의 통치자로 그분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섭리적인 주관하심을 뛰어 넘지는 못한다. 이에 이방의 통치자였던 바빌론의 느부캇네살 왕도 『그분의 통치권은 영원한 통치권이요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져지나, 그분께서는 하늘의 군대에 있어서나 땅의 거민 가운데서나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시나니 』(단 4:34,35)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그분의 백성인 어느 한 종족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전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섭리적인 다스리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 섭리적인 다스림이 모든 사람들에게 같지 않고, 각 대상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 대상은 기본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기준인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곧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든 면에서 구별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실지라도, 구체적으로 이방 왕국들의 통치자요 신은 사탄이다. 사탄은 항상 자신의 왕국을 일으켜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해 왔다. 따라서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은 항상 적대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범죄하면 이방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이스라엘이 축복받아 장성해지면, 이방은 이스라엘에게 복종하며 평온하게 된다(왕상 4:20-34). 개인적인 심판에 관해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판단받고, 이방인들은 양심으로 판단받는다(롬 2:12-15).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새롭게 탄생된 백성이 있으니, 곧 교회다. 교회는 이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집단이다. 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는 그 출신이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겠지만,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으로도 불리지 않고 이방인으로도 불리지 않는다. 오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는 서로 같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들 셋을 다루시는 방법도 서로 다르고, 따라서 성경에서도 이 셋에 해당되는 말씀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성경을 나누어서 공부하라는 말씀은 단지 시대적인 구분만을 할 것이 아니라, 이 세 대상에 대해서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주시는 말씀과 이방인들을 향한 예언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책망과 축복들이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그 각 대상들을 향한 말씀들을 정확히 알 때에야 비로소 그 어우러져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총체적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유대인 아브라함 이래로 유대인은 택함받은 민족이었다. 그 택함은 지금까지 한 시도 변한 적이 없다. 이 시대에 유대인들이 버림받은 상태가 되었다고, 그 민족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바뀐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것은 그들 조상 아브라함의 선택에 의한 "무조건적인 선택"이다(창 12,13,15,17장).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당시는 아브람) 쌍방간의 계약을 위한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그에게 복주신 것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고 그 언약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다. 세상의 각 나라들은 나름대로의 법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정통치 왕국을 위해 구체적인 항목으로 법을 제정해 주신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 뿐이다(롬 9:4,5). 물론 이 율법의 언약은 다소 조건적이다. 율법에서 항상 하는 말은 "지켜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은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내가 명령한 모든 것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렘 11:4)는 말로 설명된다. 그들과 그들의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는 오직 그들이 율법에 복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 언약이 파기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 언약의 파기는 율법과 함께 주어진 주의 사항이기에 아브라함이 받았던 무조건적인 선택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모세에게 경고한 언약의 파기라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약속된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이었다. 신명기 28-32장에는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데,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청종하면 그 땅에서 번성하고, 그들이 율법을 져버리면 타국 땅으로 쫓겨난다는 것이다(신 28:58-64).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죄함으로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그분의 전지하심으로 미리 아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 조건적인 언약 가운데서 그들이 회복되는 조건 또한 말씀해 주신다(신 30:1-5). 그 언약의 내용에 따라 유대인들은 범죄하여 그 땅에서 쫓겨났다. 바빌론으로 잡혀간 것이 바로 그것이며(B.C. 606), 그들이 회복된 이후에도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로 다시 쫓겨나 2000년을 있게 된다. 그들의 쫓겨남은 단지 그 땅에서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것과 같이 되어 버려,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하나님께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현재 상태다. 그렇지만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이 유대인들은 회복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윗에게 주신 그분의 언약 또한 이들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삼하 7:16)는 언약이다. 이 말씀에 따라 다윗의 왕국과 그 보좌는 회복되어야 하고, 그것도 영원히 굳게 서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의 구절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야와 더불어 회복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에서도 유대인들이 회복된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롬 11:26). 물론 그들의 회복은 심판(대환란)을 통한 회복이고, 회복된 이후에는 가장 위대한 민족이 세상의 핵심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6). 2. 이방인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방인들의 위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시라면 이방 세계와 통치자는 사탄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왕국을 구성하여 하나님의 신정통치 왕국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각 개체로는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각 민족들의 특징이 어떻든, 개성이 어떻든, 민족성과 그 문화가 어떻든 완전히 무시되고 오직 "민족들"이라고 묶여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민족들"로 불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한 "민족"이다. 따라서 "민족들"이라고 묘사한 곳은 항상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이들"을 가리킨다. 이 두 용어는 동의어이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육신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아 갈라지고 서로 싸우지만, 반면 그들은 항상 하나로 통합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창 11장),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하거나,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경우인데, 이는 이 마지막 때에 극대화되어, UN이나 EU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뉴에이지 운동 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성경적 진리를 반대하기 위해 세워졌고, 또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다. 시편 2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예언이다.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의 결박을 끊고 그들의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그들의 이러한 연합은 마지막 날의 아마겟돈까지 이어질 것이요, 그 결국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쭉정이를 불태우기 위해 단으로 묶듯이(마 3:12) 지금 이방인들을 섭리적으로 묶고 계신다. 이방인들의 역사를 통괄하는 예언은 다니엘서에 잘 나와 있다. 느부캇네살이 불 속에 나타났던 형상(단 2장)과, 다니엘이 보았던 네 짐승의 환상(단 7장) 등은 마지막 때까지 펼쳐질 이방 왕국들의 역사를 보여 주는데, 그 관점은 주로 이스라엘과 메시야를 대적하는 위치에 있는 이방 제국들이다. 당대 최고의 왕국으로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바빌론, 또 당대 최고의 왕국이었던 메데-페르시아, 역시 당대 최고의 왕국으로 대표적인 이방 왕국이었던 그리스와 그 뒤를 잇는 로마, 그리고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 세속 역사가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쓰든지 간에,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방 세계의 역사이다. 이 역사적인 예언 가운데에는 교회 시대에 등장하는 이방 국가들에 대한 예언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자, 곰, 표범으로 묘사된 다니엘 7장의 환상들이 교회 시대의 이방 세계를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페르시아나 그리스나 로마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그 환상은 멀리 뛰어 넘어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간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말했듯이 성경에서 이방인들은 항상 유대인과 대치되는 상황 속에 등장한다. 그런데 교회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어버렸고 하나님께는 "버림받은" 상태가 되어 버렸으니, 이스라엘을 대적할 만한 특별한 이방 왕국이 예언 가운데 등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회복되기 시작하며서, 다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모이게 된다. 이런 일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 시대에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잠시 멈추어져 있지만, 교회가 휴거된 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다시 그들을 다루시게 되면, 이방인들은 지금보다 더욱 확실하게 연합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대적할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일어나 자기들의 역사를 종결지을 것이다. 3. 교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독특한 족속이다. 교회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나타나며, 그리스도께서 공중으로 오실 때까지 지상에 있게 되는데, 이 기간 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으로도, 이방인으로도 불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교회로 불린다. 교회 또한 한 "민족"으로 불리는데,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것도 아니다. 교회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백성"(신 14:2, 벧전 2:9)이라고 불리고, "거룩한 민족"(출 19:6, 벧전 2:9)이라고 불리지만, 이스라엘이 육신적인 민족인 반면, 교회는 영적인 민족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 중 영적인 부분에 속한 일부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예언된 모든 복들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특별히 땅과 왕국에 관련해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을 것이 전혀 없다. 교회가 이스라엘 대신 받은 것은 오직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뿐이다(마 21:43). 교회가 영적인 민족이라는 것은 또한 세상 가운데 미움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육신적인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이 세상 왕국들에게 대적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민족으로서의 교회는 이 세상 제도, 즉 영적으로 흑암의 세력 아래 있는 세상에게 박해를 받는다. 사탄은 두 가지 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측면으로, 이방 왕국들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신정통치 왕국을 대적하는 것이요(이것은 "천국"이라는 관점으로 제시된다.). 또 다른 면은 영적인 측면으로, 세상 제도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미혹하고 박해하여 배교하도록 만들며 무너뜨리는 것이다(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으로 제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유기체이다. 그래서 진주로도 비유되는데, 이는 진주가 보석 중에서 유일하게 유기물로 되어 있는 보석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지금은 단지 신랑을 기다리는 정혼한 처녀이지만, 신랑이 오시면 완전한 아내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순결한 상태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게 눈을 돌리는 간음하는 여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연합한 교회는 음탕한 교회라 불릴 수 있다. 대표적인 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인데,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불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성경은 그 교회를 "창녀들의 어미"라 부르고 있다(계 17:3).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카톨릭 교회와 연합한 교회는 창녀와 합한 교회가 된다. 또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참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지역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 비록 눈에 보이는 교회인 지역 교회 안에 쭉정이들이 들어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며, 교회는 그러한 자연인들을 빨리 구령해서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구원받지 않은 쭉정이들이 지역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데 방치해 둔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양무리"가 아니라 개, 돼지, 이리, 뱀 등이 모여있는 "동물원"이 되고 말 것이다.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들은 모두 이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었다. 거기에는 구원에 대한 교리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의 행실과 섬김과 헌신, 그리고 삶의 자세와 신랑을 기다리는 모습 및 교회가 받게 될 영광을 포함해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교회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탄생된 것이기에(행 20:28), 십자가 이후에야 자세히 제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이나 신약의 다른 책들은 교회가 중심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서신 외의 다른 책들에서 교회의 교리를 찾으려다 보니 그렇게들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관한 부분들과 유대인에대한 부분들, 또한 이방인에 대한 성경의 각 부분들, 또한 이방인에 대한 성경의 각 부분들을 제대로 나누어 보지 않으면, 성경 해석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도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제사의 규례들을 교회 생활에 적용하려다 보니 율법적인 제약 가운데 자유함 없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요, 환란 때의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려다 보니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든지, 통과한다든지 하면서 불안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시대를 나누는 것과 더불어, 이 세 대상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나누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확실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공부할 때 우리는 각각의 시대와 대상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들이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어 우리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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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전천년주의와 하나님의 경륜
전천년주의와 하나님의 경륜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을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로 제시하곤 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 년"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관계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에서 나온 것으로, 각 이론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요,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며, 무천년주의는 천 년이라는 기간은 불특정한 기간으로서, 하나님의 어떤 완성된 기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천 년이 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천년왕국 같은 세상이 일정 기간 지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 이론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지식일 뿐이다. 이 세 이론에 대한 진정한 차이점은 성경의 역사관과 성경의 해석 문제, 또한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까지 관계되는 성경 전체에 대한 각각의 관점이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고 해석한다.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발견되는 여러 다른 경륜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종말에 대한 자세에도, 단지 주님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오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한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구령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는다. 반면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 체계에서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 특별히 예언에 관한 부분에서 두드러지는데, 초림 때 이미 이루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믿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속한 예언 부분에서는 비유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종말에 관한 부분 또한 전천년주의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 두 체계에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신 다음에 천년왕국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천 년 또는 불특정한 일정 기간이 의롭고 아름다운 상태로 지난 다음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생각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개인의 구령보다는 오히려 사회와 세상에서의 역할에 더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악하니까 떠난다."가 아니라 "악하니까 고쳐야 한다."이다. 심지어 세상 문화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전천년주의와 나머지 두 체계는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겠다. 천 년이라는 기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천년주의가 무천년주의보다 문자적인 해석을 더 취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언제부터 천 년의 시점을 잡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긴다. 후천년주의자들의 천 년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복음 전파와 개혁 등을 통해 세상이 의롭고 아름답게 되는 천 년인데, 언제부터가 천 년이었는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1313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어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할 때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2523년에 재림하시게 되니 앞으로 500년 이상이 남았다. 아니면 아직 그 천 년이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1000년 이상이 남았으니, 아주 요원할 뿐이다. 결국 후천년주의를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입으로라도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후천년주의보다는 무천년주의를 택한다. 무천년주의를 택할 때 이들은 매우 편리하다. 일단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무 때라도 재림하실 수 있다는 "편리한"(?) 입장을 갖게 되고, 칠천 년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도 믿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되면 또한 왕국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이나, 모형들에 대해서도 믿지 않게 되며, 결국 성경은 전혀 나눌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만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 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믿지 않지만, 종말에 대한 관점은 후천년주의자들과 동일하다. 즉 인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의롭고 화평한 세상이 이루어지면, 즉 세상이 점점 발전되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또한 후천년주의도 무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말은 없다. 아무리 복음 전파를 하고 아무리 사람들을 계몽하고 교육시켜도 세상은 악으로 치닫는다. 이 이론들은 이 악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이 두 이론은 전천년주의를 반대하는 하나의 주의로 묶이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전천년주의는 단순히 재림의 시점만을 다루는 종말론 이론이 아니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을 대하는 모든 관점과 관계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성경의 구도이다. 흔히 말하는 시대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각 시대들은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달라지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은 매우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경륜은 대폭 바뀌게 된다. 십자가 이전에는 율법이 있었고, 동물의 피가 있었고, 이스라엘이 다루심을 받게 되었으나, 십자가 이후에는 한 번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만 있게 되고, 율법 대신 복음과 자유의 법(약 2:12)이 있게 되며,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다루심을 받게 된다. 자, 성경이 이 십자가 사건 하나로만 나뉘어진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무천년주의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이 바뀔 만한 사건은 그 외에도 여럿 있다. 인간의 타락이 그것이고, 노아의 홍수가 그것이고, 아브라함의 선택이 그것이며, 출애굽도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십자가 이후에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그로부터 1000년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또한 커다란 기점이다. 인간의 창조 때부터 타락까지는 그 기간이 매우 짧을지라도 한 시대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죄가 없었던 유일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때를 "무죄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자유롭게 교제하셨다.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으며, 하나님의 경륜은 무죄한 인간을 다룰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이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양심 시대"라고 불린다.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는 변화가 없지만, 홍수 이후에 노아는 마치 아담과 같이 아무도 없는 광활한 땅에 새로운 종족을 번식시킬 첫 인류가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노아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부터는 조금 다르게 경륜이 바뀐다. 홍수 이후에는 바벨탑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이 연합하여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이 흩어졌을 때에는 여러 민족들을 이루어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물론 인간의 죄성이나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간의 양심을 다루시기는 하나, 왕국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시대를 "인간정부 시대"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했던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처럼 온 인류를 멸하지 않으셨다. 이때 변한 하나님의 경륜은 온 세상이 아니라 한 민족을 택하시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될 한 민족, 즉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셨고, 그 민족을 온 세상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셔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심과 동시에 그분의 통치의 모델 국가를 만드시려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복으로 언약해 주셨고(창 12:1-3; 13:14-17; 15:18-21), 그 언약은 그의 아들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 간다. 이들에게 주신 민족적인 복은 아직 언약이었을 뿐이고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언약 시대"라고 하며, 다루어지는 사람들이 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이었기 때문에 "족장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이 언약이 구체화된 것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이었는데, 이때 그들은 민족적인 탄생을 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율법은 이 새로운 국가의 통치 기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으로 보자면 양심을 대체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거나 구원하실 때 구체적인 기준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은 여전히 양심의 통제를 받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이때를 "율법 시대"라고 한다. 십자가로 인해서는 교회가 탄생했고, 이때는 "교회 시대"라 불린다. 다른 말로 "은혜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약간 불완전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이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저변에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에 아무리 희생제사로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왜 그 사람을 죄를 지은 즉시 죽이지 않으셨는가?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때 주어지는 은혜는 다른 시대에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은혜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의 휴거로 끝나게 되는데, 그 후에는 왕국이 펼쳐지기까지 잠시 동안의 과도기로 "환란 시대"가 있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는 모든 경륜들을 완성하듯이 메시야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천 년 동안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이 세상은 의와 화평으로 회복된다. 이때를 "왕국 시대"라고 한다. 그 후에는 잠깐 동안의 마귀의 반역과 그에 대한 심판으로 땅과 하늘을 소멸시키시는 것과, 백보좌 심판이 있게 되고, 드디어 영원히 그분의 왕국이 펼쳐지는 "영원 시대"가 있게 된다. 이것이 전천년주의의 기본적인 구도이며, 후 무천년주의의 관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시대들을 나누는 것은 십자가를 기준하여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것인데, 사실은 이 둘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를 전후하여 시대를 나누지만,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구원에 대해서는 차이를 두지 않는다. 즉 십자가 이전에는 오실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받았고, 십자가 이후에는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구약에 있는 동물들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므로,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은 유대인들이 다루어졌고, 신약은 교회가 다루어지는데, 교회는 영적인 유대인으로서 구약 유대인들이 범죄한 이후에 그들이 받을 모든 약속들과 복들을 교회가 취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유대인과 교회에 대한 구분도 없어졌다. 결국 구약 성도들과 신약 성도들에 대한 구분도 없어지고,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신약에 모두 성취되어버려 더 이상 성취될 예언은 없고, 하나님의 경륜은 엉망이 되고 만다. 이처럼 전천년주의는 시대 구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구분은 단순히 구분을 위한 구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이러한 시대 구분은 하나의 종착적인 결론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국의 완성"이다. 바로 여기에서 후 무천년주의와 구별되는 전천년주의의 특징이 있다. 후 무천년주의자들에게 있어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로 인해 구속이 완성되었고, 사탄은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졌다고 그들은 믿는다. 따라서 성도들은 승리한 기반 위에서 복음과 더불어 계속 전진에 전진을 할 것이고(계 6:1,2을 해석하는 그들의 방법에 따라), 역사는 지속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 시점의 한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을 중심으로 삼는 후 무천년자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지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단지 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지, 아직 형의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집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야 있을 것이다(롬 16:20). 따라서 전천년주의는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하나의 축이 아니라, 십자가와 재림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발견한다. 구약의 예언들은 더러는 십자가를 예언하지만, 대부분이 재림을 예언한다. 재림으로 펼쳐질 그 의로운 왕국,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이루시고자 그토록 여러 경륜들을 펼치시면서 시대들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셨다. 아담에게 땅을 주신 것도 이 땅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의 위임이요, 노아에게 다시 땅을 주신 것도 새로 펼쳐진 땅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들의 정부를 세워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그분이 통치하실 하나의 모델 국가로 삼으셔서 이방 위에 우뚝 서게 하셨으나, 그들은 반역하여 이방 국가들처럼 왕을 요구한다. 결국 인간들에 의해 잘못된 왕이 선출되었으나(사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다윗)을 주심으로 그분의 통치권을 회복하셨다. 다시 그 왕국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범죄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고야 말았지만, 때맞춰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려 오시어 천국을 전파하셨다(마 4:17). 그분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릴 왕이셨다. 그러나 백성들의 거부로 그분은 대관식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인간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어떤 왕도 주어지지 않는다. 왕은 올라가셨고, 왕국은 연기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유대인)도 흩어졌고, 그 사이에 이 세상은 그 왕국을 차지하려는 이방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그분의 몸된 교회를 남겨 두시어 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지만, 그들은 영적인 백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백성들마저도 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흑암 속에 가리워져 버렸을 때, 인간이나 자연이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된 바로 그때에, 마치 역사의 클라이막스를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연출하시듯이 그분은 재림하시어 마귀를 멋지게 물리치시고, 처음부터 그분의 것이었던 그 왕국을 차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전천년주의의 역사관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누는 구도 자체는 전천년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지만, 성경 해석 방법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또 전천년주의 체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평화와 세상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세상이 악해진다는 것이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전천년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시대를 구분한다 하면서도 각 시대의 특징을 섞어 놓거나, 교회 시대에다가 구약의 규례를 적용하거나, 유대인의 경륜에 속한 표적들을 적용하거나(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 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의미의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전천년주의를 단순한 종말론의 한 부류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체계 정도로만 인식해서도 안된다. 전천년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참된 성경 해석 방법이며, 성경을 참으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체계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와 관련해서 각 시대들과 언약들과 예언들과 모형들, 그리고 각 부류의 사람들과 사탄과 왕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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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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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세대주의,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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