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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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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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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0
성장하는 교회로 도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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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0
첫사랑을 저버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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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5
기독교 위기(The Crisis of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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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5
성경적 신약 교회[지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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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1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 쿠퍼 아브람스 / 구정민 역   이 글은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에서 에서 바이블서원으로 들어가시면 확인하실 수 있고, 또 구입 방법 및 기타 다른 서적들에 대한 정보들도 볼 수 있습니다. --------------------------------------------------------------------------------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A Brief Survey Of What Are Independent Fundamental Baptist Churches And Baptist History 쿠퍼 P. 아브람스 (Cooper P. Abrams, III) / 구정민 옮김 이 책의 차례 1.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2. 침례 성도가 아닌 것은? 3. 누가 최초의 침례 성도들인가? 4. 역사 속에서 최초로 기록된 침례 교회는 언제 어디서인가? 5. 미국에서 침례 성도들의 시작 6. 무엇이 참된 침례 성도를 만드는가? 7. 다섯 가지 침례 성도의 특징들 8. 참고문헌 1.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 󰋯 󰋯 󰋯 󰋯 󰋯 󰋯 What Is An Independent Fundamental Baptist Church?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라는 명칭은 전통적으로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초대 교회의 모범에 따라 엄격하게 행하는 교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습니다. “독립적”이고 “근본주의적”이란 용어는 “침례 성도”(Baptist)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의 믿음을 충분하게 입증하지 못함으로 인해 침례 교회들이 덧붙인 것입니다. “침례 성도”(Baptist)라는 명칭은 이제 그들의 믿음에 있어 근본주의가 아닌 많은 교회들에 의해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침례 교회들은 과거에 신약의 교리적 가르침 위에 세워졌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들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러한 교회들 중 어떤 교회는 바른 진리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 등과 같은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들마저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를 “침례 성도”라 부르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은 참된 침례 성도들이 역사적으로 믿어왔던 것을 믿지 않고 또 실행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독립 근본주의 침례 성도들은 이러한 교회들과 연합 또는 교제를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약 성경과 상반되는 것들을 가르치며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 독립 침례 성도”라는 명칭은 최근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타협하고 거짓 교리들을 가르치며 실행하는 수많은 오늘날의 침례 교회들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많은 침례 성도들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버리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불건전한 침례 교회들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많은 침례 교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참된 침례 성도들은 자신들이 교리적으로 불건전한 어떤 침례 교회들의 거짓된 관행들 및 가르침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에 부가적으로 “근본적”이고 “독립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독립적”이라는 용어는 교회가 어떤 종교회의(종교 위원회), 협의회(교단)의 한 기관, 혹은 지역 회중 밖의 교회 교권 제도 조직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립 침례 교회는 남침례교, 미국침례교, 또는 지역교회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다른 침례교(단체, 교단)와 같은 국제적 침례교 단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독립적”이라는 용어는 교회가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르며, 성경의 권위 하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립 교회들은 권위에 있어서 그들 위에 어떠한 조직화된 협의회(단체, 조직)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간섭 없이 신약 성경의 권위 아래 그들 자신의 일들을 치리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목자장이시라고 가르칩니다(엡 5:23; 벧전 5:4). 지역교회의 목사는 목양자(히 13:17; 행 20:28; 엡 4:11) 또는 회중의 지도자입니다. 독립 침례 교회는 통치 방식에 있어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각 회원과 함께 운영해 나가는 회중적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모든 일들은 지역 회중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들은 서로 교제를 가지며, 복음전도와 같은 일들에는 많은 경우에 서로 협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같은 믿음을 가진 교회들과만 연합 모임에서 친교를 나누고 협력할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신약 성경에 분명하게 기초하지 않은 교회들과는 어떠한 외부적인 모임에도 함께 토대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의 근본주의적인 가르침들을 고수하고 있지 않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카톨릭 또는 교리적으로 불건전한 다른 교회 그룹들과는 연합 모임이나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등등).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는 이러한 교회들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교회들과 함께 하는 다른 침례교의 무리들로부터도 분리되어진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에베소서 5장 11절에서 언급된 분리의 성경적 가르침들을 실행합니다. 󰡔열매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라.󰡕 독립 침례 성도들은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실행하는 교회들과 함께 연합하는 것은 잘못된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고 심지어는 성경적 오류에 대해 승인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직분은 목양자(목사)와 집사입니다(딤전 3:1-16). 교회의 목양자(목사)는 회중의 다수가 투표한 것에 의해 부름을 받습니다. 또한 집사의 성경적인 자격 조건에 합당한 남자들은(딤전 3:8-13) 지역 회중으로부터 임명되며, 다수표에 의해서 승인됩니다. 많은 침례 교회들은 관재인(管財人)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임무는 교회의 법적 문서에 서명하는 법적 “서명자”들을 얻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집사이든 관재인이든 이것은 치리가 아닌 봉사의 자리이며 회중의 뜻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근본적”(Fundamental)이란 용어는 침례 교회가 믿음(교리)과 실행에 대한 전적 권위로써 엄격하게 신약 성경을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에 대중매체는 은사주의자와 오순절주의자 같은 교리적으로 불건전한 교회를 “근본주의자들”로 불러 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TV 복음 전도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근본주의자들”로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근본주의 침례 성도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근본주의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TV 전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과 모든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 교회들은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침례 성도는 그 명칭이 신약 성경의 오류 없는 가르침들의 근본을 붙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명칭을 엄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된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들은 신약에서 나타난 초대 교회의 가장 순수한 가르침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2. 침례 성도가 아닌 것은? 󰋯 󰋯 󰋯 󰋯 󰋯 󰋯 󰋯 What Baptists Are Not? 침례 성도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아닙니다! 개신교란 이름은 1500년 경에 시작한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나온 교회들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1700년대를 경유하여 루터교회와 영국성공회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장로교회와 감독교회, 감리교가 개신교 부류에 더하여졌습니다. 웹스터 사전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침례 성도들을 개신교로 언급할지라도, 침례 성도들을 카톨릭이 아닌 모든 종파들의 집합체로 간주하여 개신교로 분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침례 성도는 결코 로마 카톨릭 교회 또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종교 개혁(혁신)의 일부가 아니었으므로, “저항자들”(protesters) 또는 개신교인들(프로테스탄트, Protestants)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침례 성도들이 교리적으로 불건전하고 배도한 개신교회들의 반열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것과도 타협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확신 때문에, 그러한 교회들을 떠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고 그들 스스로를 침례 성도들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성경을 믿고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 성도들을 로마 교회를 떠난 카톨릭 “저항자”로 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 글을 위해 참고 문헌으로 모은 교회사에 관한 많은 책들 중에서, 침례 교회의 시작을 로마 카톨릭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한 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수 세기 동안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은 침례 성도들을 그들의 적들로 보았으며,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이름으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역사를 따라 내려오면서 자신들을 그렇게 미워하고 박해했던 집단에 대해 같은 “침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실로 하나의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로부터 로마 교회의 일부가 아니었던 신약 교회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사실 로마 교회의 시작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든 주후 313년으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주후 395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를 “기독교화”하였으며, 사형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한 우상숭배를 만들었습니다. 주후 400년경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가 종교로 선언했습니다. 이 때에 많은 교회들이 로마 정권의 통치하에 들어왔으며 신약 교회들의 존립이 중단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선언했을 때, 그는 대량으로 로마 제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이교도 떼거리들을 회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교도 사원들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회합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로마는 거듭나지 않은 이교도 제사장들을 소위 “그리스도인” 사역자들로 고용했습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이 심히 거짓되고 이교도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던 이러한 모든 배도 속에서도 결코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의 일부가 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 신약 성도들은, 그들을 로마 정권의 재물과 규율과 권위에 타협하고 이를 수용한 다른 교회들의 무리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거절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되어온 수많은 거짓되고 우상숭배적인 관례들의 성장은, 급기야 카톨릭 교회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고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마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을 등장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교회들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많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들이 부분적으로 그들의 믿음과 실행의 권위로서 성경을 믿는 것으로 되돌아 왔을지라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배도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 오류들과 거짓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개신교 교회들은 “국가” 교회들(국교)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정부에 의해서 징수된 세금으로 보조를 받고 있습니다. 독일의 국가 교회(국교)는 루터교회이며, 영국은 성공회입니다. 주님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포도쥬스)를 먹을 때 그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이 된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이지만, 개신교들은 이를 단지 살짝 변형시켰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개신교들이 주님의 만찬을 구원을 위한 수단, 또는 어떤 영적인 유익을 부여하는 하나의 성례(聖禮)로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약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러한 비성경적인 개념들을 거부해 왔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결코 가르치고 있지 않는 유아세례를 실행합니다. 많은 개신교 교단들은 여전히 교회 교리의 한 원천으로 교부들의 글을 붙들고 있으며, 성경을 자신들의 믿음과 실행을 위한 가르침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두 교회 통치에 있어서 교권 제도를 주장하며 지역교회의 자치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치성이란 각각의 지역교회가 외부 권위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침례 성도들은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믿음의 기반으로 삼으며, 이러한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런 교리를 실행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역사와 교리들은 침례 성도들이 개신교도들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누가 최초의 침례 성도들인가? 󰋯 󰋯 󰋯 󰋯 󰋯 󰋯 󰋯 Who Were the First Baptists? “누가 최초의 침례 성도들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선 당신이 언급하고 있는 것(침례 성도)에 대해 먼저 규명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침례 성도”란, 자신들 스스로는 침례 성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런지는 모르지만, 침례 성도들의 믿음을 견지한 사람들이나 교회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침례 성도의 믿음들을 견지하면서 침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에 속한 그룹, 즉 침례 성도의 믿음(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침례 성도라 불리지 않은 사람들은 역사상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침례교 역사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해보았지만, 많은 경우 사실상 순수한 침례 성도의 믿음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초기 침례 성도들과 같은 그룹들에 대한 언급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도 이후로 침례 성도는 교회들의 끊어지지 않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론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J. M. 캐롤 박사의 소책자 “피흘린 발자취”로부터 인용). 그리고 이러한 역사가들은 역사 속에서 침례 성도들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명백히 교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개념으로 말하자면, 참된 침례 성도란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전적 권위로 따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위 초기의 수많은 “침례” 교회들을 고찰해 본다면, 당신은 그 가운데서 많은 교리적 오류들과 거짓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많은 그룹들처럼 거짓된 교리를 실행하는 어떤 교회도 진정한 의미에서 침례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늘까지 그 명맥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침례 교회들(계승에 의해 : 역자주)에 대한 자취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강력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성경대로 참되게 실행해온 교회들은 그 명맥이 단절되지 않은 채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교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심지어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오늘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동일한 교회들(참된 성경적 침례 교회)이 오늘날에도 행하고 있는 그 방법으로, 그러한 교회들이 성경을 믿음과 실행을 위한 유일한 전적 권위로서 믿고 따랐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을 침례 성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침례 교회들의 단절되지 않는 명맥이 있다고 말하려고만 한다면 그 근거를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의 중요성은 그들의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실행했던 것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엄격히 성경의 본보기를 따랐으며,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의 승인된 합당한 교회들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주의 침례 성도들이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참된 유산입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유일한 권위에만 복종시켰던 교회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진리를 붙잡고 있었던 무리들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러한 무리들은 역사 속에서 거의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아일랜드의 “패트릭”(Patrick)이 있습니다. 패트릭은 주후 3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노예로 팔려가 아일랜드에 이송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도망쳤고 그리스도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를 자신들의 성인들 중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카톨릭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조차도 그 증거가 없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로마 교회의 관례(전통)들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 위원회들이나 신조들, 전통들, 또는 심지어 교황의 존재에 대해서도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웠던 교회들에는 어떠한 계급 조직도 없었으며, 그 교회들은 단순한 신약 성경의 모범적 형태를 따른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선교에 대한 강렬한 마음들이 있었고 설교자들과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선교 센터들은 이후 역사 속에서 로마 카톨릭의 영향하에 수도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러한 교회들이 처음부터, 그리고 적어도 9세기까지는 교리적으로 건전했고, 신약 성경의 믿음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했고, 그 영향에 의해 부패되지 않았던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의 좋은 본보기들입니다. 그들은 사실상 현대의 침례 성도들이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던 방식과 똑같은 신약 성경의 원리들에 따라 세워진 교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기 침례 교회들의 한 예로 재침례 성도들(anabaptist)을 지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역사 속에서 증명될 수 없습니다. 재침례 교도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어떠한 재침례교 그룹이나 교회도 침례 교회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재침례 성도들 계승자들의 대부분은 메노파(Mennonites), 아미쉬파(Amish)나 퀘이커 교도들(Quakers)이 되었습니다. 단 한 곳의 침례 교회도 역사 속에서 재침례 성도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재침례교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강력한 신약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재침례교 그룹들은 말씀으로부터 심히 벗어났으며 부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약 성경 교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승인 받은 참된 교회로서의 그 적합성은, 그 이름이나 교회들의 계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고수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4. 역사 속에서 최초로 기록된 침례 교회는 언제 어디서인가? 󰋯 󰋯 󰋯 󰋯 󰋯 󰋯 󰋯 When and Where Was the First Recorded Baptist Church in History? 스스로 침례 성도라 불렀던 교회들의 명맥은 1610년 홀랜드(Holland)에서 영국 교회의 주교였던 존 스미스(John Smith)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606년에 9개월 동안 신약 성경을 탐구하고 공부한 끝에 영국 교회의 교리들과 실행들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제직을 사임했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성경의 권위에 굴복하기를 거절하는 영국 교회의 박해 때문에, 존 스미스는 영국으로부터 도피해야만 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와 함께 지냈고, 36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직 믿는 자들에 대한 침례를 주창하였다고 알려진 최초의 영국인 침례 교회를 형성하였습니다. 스미스는 사도적 계승이 신양 성경의 성경적인 진리를 계승하는 것이지 영국 성공회나 로마 교회와 같이 외적인 의식들이나 눈에 보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사도적 계승은 사라졌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시 시작하는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그 다음 다른 회중들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몇 년 후에 그 교회는 메노파(Mennonites)와 홀랜드에 있는 다른 무리들에게로 간 10명의 회원들을 제외한 모든 회원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스미스가 1612년에 죽고 얼마 가지 않아 영국에서의 박해가 줄어들게 되자, 그 교회는 영국으로 되돌아 간 헬위(Helwy), 토마스(Thomas), 그리고 존 멀톤(John Murton)과 함께 홀랜드에서 끝을 장식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들은 영국의 토양에 최초의 침례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1626년 한 곳으로부터 시작한 교회는 다섯 교회로 늘어났고 1644년경에는 40개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설교함으로 인해서 복음은 강력하게 전파되었고 침례 성도 운동은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영국에서 형성된 이러한 최초의 침례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아르메니안이었습니다. 칼빈주의 또는 특수침례교(Particular Baptist)는 별도의 그룹이었으며, 이들은 오직 선택된 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제한된 속죄를 믿었습니다. 특수침례교(Particular Baptist)는 1616년경에 시작했는데, 몇몇의 “국교 반대자들”이 영국 교회를 떠나 교회를 이루었고, 헨리 제이콥(Henry Jacob) 목사에 의해 인도되었습니다. 1644년경 이 모임들은 일곱 개의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이때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로부터 나온 국교 반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교회에 개혁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아세례를 포함한 그러한 믿음들의 대부분을 여전히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국가 교회의 관행들을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 박해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교도들과 침례 성도들은 똑같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세계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한서드 크놀리스(Hanserd Kndleys)는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던 영국 국교회 반대자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국가 교회의 장로였고 선임 집사였습니다. 신약 성경을 설교해야 하고, 자신의 믿음의 규칙으로서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그는 교회 직분자가 입었던 성의(聖衣, the robe)를 입는 것을 거절했으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기를 거절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의례전”(order of service)을 읽는 것을 무시하고, 단순히 성경만을 설교했습니다. 그 당시 영국 교회의 의식 없이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1638년 그는 보스톤에 상륙하여 뉴햄프셔, 즉 지금의 도버에 해당하는 피츠카타웨이(Piscataway)에 잠깐 정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청교도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거주지들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사실상 청교도 교회는 세속적인 일과 종교적인 일들을 관장하고 있는 하나의 신정통치를 설립했습니다. 크놀리스는 유아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하고 이에 대항하여 설교했기 때문에, 저명한 청교도 통치자인 커튼 마터(Cotton Mather)에 의해 거주지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2년 후 크놀리스는 그의 부친의 요청으로 영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정직한 “분리주의자”이자 국가교회의 반대자가 되었습니다. 1645년에 그는 런던에서 침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후 영국 왕정이 전복되어 영국 교회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자 얼마 안되어 장로교가 그 국가에서 애호 받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장로교들은 박해의 직무를 넘겨받았고, 그들은 크놀리스가 교구 교회들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계속해서 설교했습니다.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 : 1640-1660)가 몰락하기 전 장로교도들이 마지막으로 행한 잔악한 행위들 중 하나는, “교리상의 8가지 오류들”(Eight Errors in Doctrine)이라 불리우는 것을 붙드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을 통과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 속에는 유아세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곧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함 : 역자주). 크놀리스는 여러 번 투옥되었으며 “국가 교회”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진리에 타협하지 않은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범한 “죄”란 (사람의 명령들이 아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5. 미국에서 침례 성도들의 시작 󰋯 󰋯 󰋯 󰋯 󰋯 󰋯 󰋯 The Beginning of the Baptists in America 순례자들이 청교도들이었다는 것과 청교도들이 영국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참된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과 혼동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과 실행은 영국 교회와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영국 교회만큼 타락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교회 예배의 엄격한 의식과 다른 것들 중에서 특히 유아세례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모든 국민이 정부의 교회 세금조로 낸 돈으로 보조받고 있었던 청교도교회에 굴복하지 않은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경건한 삶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신약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참된 신자라는 면에서 그들은 교리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특히 왜 침례 성도들을 박해했는지에 대해서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당시 거주지의 모든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국가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세금을 지불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지도자들의 진노를 초래하여, 공개적으로 매를 맞고, 벌금을 내었으며, 감금되고, 청교도 교회의 지도하에 있는 국가 권위들에 의해 거주지로부터 추방되기도 하였습니다. 회중 교회들이라 불리웠던 청교도 교회들은 1787년 미국 헌법이 제정되기까지 침례 성도들을 심히 박해했습니다. 참된 신약성도들에 대한 청교도의 박해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해 미국 토양에는 최초의 침례 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는 미국 땅에서 최초의 침례 교회를 설립했던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윌리암스는 1627년에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외관상으로는 영국 교회에서 임명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곧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의 개념들을 받아들였고 영국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1631년 그는 보스톤에 도착했고, 청교도의 신정(神政)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와 “개인 양심의 자유”(soul liberty)의 원칙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개인 양심의 자유”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개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그 믿음의 근거를 각 성도는 스스로가 다 제사장이며, 교회나 교회지도자, 성직자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신약 성경에 두고 있었습니다(히 4:15-16, 10:19-22).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들에도 불구하고 살렘(Salem)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곳을 떠나도록 강요당했으며, 잠시 동안 플러머스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보스톤에 있는 법정에 소환되어 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는 그의 공개적인 믿음들 때문이었으며, 그는 거주지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그의 혐의는 “행정장관들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롭고 위험한 의견들을 끄집어내고 누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명백히 그는 종교의 자유를 믿었고 신약 성경이 그의 믿음과 실행의 기초라는 사실을 믿고 가르쳤기 때문에 추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그러한 것을 믿지 않았고 그를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몰아냈습니다. 1638년에 윌리암스는 지금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인 로드 아일랜드로 발걸음을 옮겼으며 거기서 인디안들로부터 얼마의 땅을 샀습니다. 살렘에 있었을 때 그의 회중들이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와 동참했으며 그들은 하나의 거주지를 설립했습니다. 그 시작의 설립 헌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 거주민들과 가장(家長)들의 대다수의 동의 하에 이 아래 그름이 기록된 우리는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전체의 공익을 위해 제정된 모든 규례들과 대행 기관들에 대해 능동적이면서도 순순히 복종하며 거주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오직 정중한 방법으로 함께 협력했노라.” 1663년 찰스 2세는 그 거주지에 왕의 헌장을 수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왕실의 뜻과 기쁨은 위 거주지 안에 거주하는 어떤 사람도 이후로 어느 때든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종교의 문제로 인한 의견의 차이 때문에 결코 괴롭힘을 당하거나, 평온을 잃도록 처벌받거나, 심문을 받기 위해 소환 당하지 않을 것이며, 거주 시민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 정부가 설립되고 종교의 자유를 부여받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이 헌장은 미국 종교 자유의 초석이었습니다! 이 때까지도 윌리암스는 침례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신약 성경을 읽었고, 유아세례와 세례를 위해 물을 뿌리는 것,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임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진리 안에서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는 1639년 미국 땅에 최초의 침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사역을 시작했으며, 다른 10명의 회원들에게도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윌리암스는 교회로부터 물러나 스스로 “탐구자”라 불리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왜 그가 스스로 침례 성도라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미국의 최초의 침례 교회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점도 드러내지 않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교회는 사람에 기초해서 세워지지 않았고, 성경에 기초했습니다. 그 교회는 역사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침례 교회들의 명맥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구원받은 사람이 성경을 믿고서 참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모범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에 설립되었습니다. 윌리암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 교회는 성경을 계속해서 따랐으며 나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교회를 설립한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약 성경의 원리들이 이 교회를 세웠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침례 성도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상의 이름이었으며, 그 이름이야말로 자신들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임을 밝혀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와 어떠한 결속(연결)도 없었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그 어떤 침례 교회 만큼이나 분명한 침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약 교회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들 또는 사람들의 계승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교회를 신약 성경의 원리들에 따라 설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그들을 마치 바울이 만든 교회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통적인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참된 교회의 유일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설립자나 그 유산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교회가 바울에 의해 설립되었거나 스스로 특별한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정통화되었다는 암시를 주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타협하지 않고 서 있는 그러한 개인들과 교회들을 특징지워 부를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이름은 바로 “침례 성도”라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현재까지 전통이나 어떤 사람의 업적에 의하지 않고 성경에 기초하여 세워진 유일한 교회들입니다. 침례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 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의 챔피언들이었습니다. 역사는 침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했던 다른 무리들이 없었음을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로저 윌리암스가 사임한 후, 토마스 올니(Thomas Olney)가 로드 아일랜드에 있는 그 교회의 목사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땅에 설립된 최초의 침례 교회였을지라도, 이 교회로부터 나온 지교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미국 침례 교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그 교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 뉴잉글랜드와 미국 중앙에 위치한 거주지들에서 세워진 다른 교회들은 현대 침례 교회들의 실제적인 모교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의 시작에 대해 책임이 있었습니다. 1665년 5월 28일에 한 침례 교회가 유아세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토마스 골드(Thomas Gold)에 의해 보스톤에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에는 두 명의 여자를 포함한 9명의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소위 청교도들이 “저주받을 오류들”이라 불렀던 것을 설교했기 때문에 박해의 폭풍우가 몰아닥쳤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한꺼번에 또는 몇 번에 걸쳐서 벌금형을 받거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토마스 골드는 1675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는데, 어느 정도는 몇 번의 긴 투옥으로 말미암아 건강이 상하게 된 데에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1678년에 그 교회가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자마자, 정부는 문에 못을 박아 폐쇄했으며 어떤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경배할 경우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그 문은 다시 열려졌고 예배는 순서에 구애됨 없이 드려졌습니다. 행정장관들은 그들의 명령이 구속력이 없고 강제로 억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자 이후로는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1684년 메인(Maine)에 있는 한 침례 교회는 더 큰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찰스톤(Charleston)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뉴욕의 네덜란드인 거주지는 그 영토 내에 있는 침례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최초의 침례 교회는 1656년에 윌리암 휘센돈(William Wichendon)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과도한 벌금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벌금을 내지 못 할만큼 가난했으므로 그는 그 거주지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네덜란드인은 새로운 조례들을 만들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1700년 한 침례교 사역자인 윌리암 로드스(William Rhodes)는 롱아일랜드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으며, 1724년 거기서 최초의 침례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초기 침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형제 사랑의 도시”인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었습니다. 1684년에 토마스 던건(Thomas Dungan)은 콜드 스프링즈(Cold Springs)에서 1702년까지 지속되었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1688년에 한 침례 교회는 12명의 회원을 가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펙(Pennepeck)에서 조직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듬해에 필라델피아 도시에서 최초의 침례 교회를 시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1746년에 독립교회가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제안들은 많은 침례 성도들을 뉴저지에 정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1688년에 미들타운(Middletown)에 있었으며 다른 거주지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이듬해에 조직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침례 교회들은 거의 동시에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최초의 침례 교회가 1727년에 초완 카운티(Chowan County)에 있는 퍼키만(Perquimans)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침례 성도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독립을 획득하고 헌법이 제정되기 전, 버지니아에서 영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는 합법적인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2천 파운드의 담배 벌금형이 주어졌습니다. 버지니아는 특히 종교적 박해가 매우 가혹한 곳이었습니다. 감독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사람도 예배를 주관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다른 시민들과 함께 침례 성도들에게도 성공회를 보조하기 위한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모든 버지니아 시민들이 이런 것이 정당하다고 느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여기서 두 명의 종교 자유의 핵심 인물은 버지니아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패트릭 핸리(Patrick Henry)였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가 아는 몇몇의 침례교 목사들이 처한 곤궁으로 인해 깊이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부담감을 느낀 것으로 믿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휘트 카운티(Wight county) 섬에서는 물에 잠겨 받는 침례(Baptism by Immersion)에 대한 침례 성도들의 믿음과 유아세례에 대한 그들의 거부 때문에, 침례 교회 설교자들이 난사몬드 강에 끌려가서는 거의 수장(水葬) 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들의 몸에는 타르가 발라졌고 새깃털이 붙여진 뒤 그 카운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침례교 활동의 중심지는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었으며, 침례 성도들은 헌신과 복음전도의 목적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교회들의 “총연합 집회들”을 개최했습니다. 47개의 침례 교회들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이 있기 전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일곱을 제외한 모든 교회는 메이슨 - 딕슨 계열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침례 성도들은 대각성 기간을 통해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시까지 수적으로 계속 증가했습니다. 침례 성도는 전체적으로 애국자들이었으며, 많은 침례교 목사들은 독립 전쟁의 혁명 군대에서 군목들로 봉사했습니다. 대각성 운동이 거주지들에서 종교적인 관심들을 불러일으켰고 기록될만한 대부흥이 발생했습니다. 독립전쟁은 얼마동안 침례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켰지만, 독립을 획득하면서 모든 미국인의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성문법이 제정되자 침례 성도들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고, 오늘까지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6. 무엇이 참된 침례 성도를 만드는가? 󰋯 󰋯 󰋯 󰋯 󰋯 󰋯 󰋯 What Makes a True Baptist? 오늘날 스스로를 “침례 성도”라 하는 적어도 100개의 다른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의 대부분이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서로 상충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기되는 자연스러운 질문은 “무엇이 참된 침례 성도를 만드는가?”입니다. 침례 성도들의 역사를 검토하고 무엇이 진정한 참된 침례 성도를 구성하는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다섯 가지 특징들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특징적인 믿음들은 참된 침례 성도들을 침례 성도라는 이름을 잘못 취하고 있는 다른 그룹들이나 개신교도들과 같은 모든 비신약 교회들(non New Testaments churches)로부터 구분시켜 줍니다. 만일 그들이 실제로 참된 역사적 침례 성도라면 앞으로 제시될 다섯 가지 특징들의 견지에서 어떤 교회든지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섯 가지 특징들이 참된 신약 교회의 특징들이라는 사실 또한 주목할만한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참된 신약 교회를 구성하는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특색들입니다. 한 사람을 침례 성도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이 믿음과 실행의 규칙으로서 오직 신약 성경을 따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침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재”를 위해, 혹은 개인이나 그룹, 교단, 또는 교회의 “사적인 해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벧후 1:20). 침례 성도는 당신이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침례 성도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신약에 나타난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믿습니다(고전 15:1-4). 더 나아가서 만일 어떤 사람이 참으로 거듭났고 타협 없이 성경의 원칙들을 따르고 있다면, 그는 그 이름을 사용하든 안하든 어떤 점에서는 침례 성도일 것입니다. 또한 침례 성도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분이시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을 믿습니다. 근본주의 침례 성도는 성경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엄격합니다. 즉 성경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들은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단어들에 숨겨진 또는 특별하게 계시된 의미를 부여하면서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도들을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오늘날 소위 예언자들의 “성서들”이라 말하는 것들을 배격합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주후 약 90년에서 95년 사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서 성경은 더해지거나 뺄수 없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의 의미를 믿습니다. (갈 1:6-10; 딤전 6:30; 딛 1:9-11; 딤후 4:1-5; 고전 13:8-10을 참조하십시오.) 어떤 교회에 대해서도 이 다섯 가지 질문들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 질문에 참으로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참된 침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그 이름(침례 교회)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7. 다섯 가지 침례 성도의 특징들 󰋯 󰋯 󰋯 󰋯 󰋯 󰋯 󰋯 The Five Baptist Distinctives 1. 우리는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의 (전적) 권위로서 신약 성경만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약 성경을 제외한 어떤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전하며 그것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딤후 3:16-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분문으로부터 더하거나 빼는 것을 금하고 계신다고 믿으며(계 22:18-19), 또 “새로운 계시들”이라 여겨지는 것을 주고 계신다는 이론을 배격합니다. 우리는 신약 교회 위에 그리스도 그분 외에는 교황을 포함한 어떤 계급체제나, 교회 위원회들과 같은 어떤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 우리는 교회가 구원받고 침례를 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침례 성도는 유아세례를 단호하게 배격합니다! 교회는 오직 침례 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집니다(행 2:41-42). 유아는 믿을 수 없으며 책임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그분을 그들의 구세주로 신뢰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 즉 지역 신약교회의 한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교회와 정부의 엄격한 분리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불의와 의가 무슨 사귐이 있으리요? 그리고 빛과 어둠이 무슨 친교가 있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며, 교회는 절대로 국가와 멍에를 매거나 국가에 의해 통제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위에 정당하게 임명된 정부의 권위를 지지하고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4. 우리는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믿습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나 성직자에게 가지 않고도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히 4:16)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중재하기 위한 사제나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겼다는 사실로 인해서 단순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담대하게 즉시 만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탄원들과 죄에 대한 요청들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요일 1:19). 어떤 교회도 죄들을 용서할 권위를 갖거나 하나님께 대한 중재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5. 우리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믿습니다. 성경은, 거듭났고 침례 받은 신자들인 지역 회중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다고 단순 명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하며, 지역교회는 지상의 어떤 그룹의 권위 하에 놓여 있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에서 모임 자체만 있을 뿐이며, 오직 모임의 행위와 방향과 일에 대하여 오직 그분께만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2장 6절과 15절에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교리적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는 이단들의 모임은 지상 교회 안에 성직자 계급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 모두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는 역사적으로 침례 교회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질문들은 침례 성도들을 개신교나 어떤 조직화된 교회 또는 “기독교” 이단과 구별시키는 특징들입니다. 한 사람이 침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아왔고, 진리 안에서 그 이름을 붙잡기 위해 재산과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헌신과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들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복종을 대변합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지상명령, 곧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어디에서나 가르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흔들릴 수 없는 위임사항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참되고 성경적 신약 교회로서의 한 교회의 정당성을, 그리스도의 때로부터 계승되고 단절되지 않은 명맥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둘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교회이든 그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단절되지 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조차도 3세기 이전에 존재한 자신의 교회들의 명맥을 증명할 수 없으며, 또 카톨릭 교회가 오늘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초기의 신약 교회와 하나도 유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약교회는 눈에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조직의 외적인 계승이 아니라 성경의 믿음과 실행에 기초하고 있다는 요한 스미스의 의견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약의 가르침들에 엄격하게 기초하고 있는 교회는 어떤 곳이든 참되고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심지어 그 교회가 오직 과거 한 때에만 존재했었다 해도 말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은 그 이름이나 조직이 아니라 신약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실행인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한 오지 위를 날아가고 있던 비행기로부터 떨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곳 원주민들이 그 성경을 취하여 읽고서 그 내용을 믿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만일 그들이 신약 성경을 그들의 안내서로 삼아 믿는 자들의 지역교회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아들이시기에 합당한 교회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경의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정당성을 지닐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참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 오직 성경만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신들의 죄들이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이 참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언제나 믿어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인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침례 성도는 그 권위를 오직 성경 그 자체에 두고 있습니다. 침례 성도들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권위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그룹 또는 지상의 교회에 부여되는 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게 그런 권위를 결코 위임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성령님의 인격 안에서 단순한 믿음으로 믿는 자들에게 확신과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참된 성경적 교회는 신약 성경에 있는 본을 따라 자신들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경적 교회는 교제와 가르침과 복음 전도를 위해 지역 회중 내에 침례를 받아 조직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역 교회의 권위 위에 군림하는 사람에 의해 세워진 모든 계급(관료, hierarchy) 체제들은 예외 없이 교리적인 오류와 부패로 귀결됨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문헌 ∙침례교인들의 역사, 존 T. 크리스챤, 남침례회의 주일학교위원회 간 (A History of the Baptist, John T. Christan, Sunday Board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침례교인들의 역사, 로버트 G. 토베트, 벨리 포즈출판, 1987 (A History of the Baptist, by Robert G. Torbet, Valley Forge Press, 1987) ∙침례교인의 유산, 4세기의 침례교 증인들, 론 멕베드, 브로드맨 출판, 1987 (The Baptist Heritage, Four Centuries of Baptist Witness, H. Loen McBeth, Broadman Press, 1987) ∙침례교인의 유산을 위한 자료집, H. 론 멕베드, 브로드맨 출판, 1990 (A Source Book for Baptist Heritage, H. Loen McBeth, Broadman Press, 1990) ∙침례교인의 유산, J. M. 홀리데이, 보가드 출판 (The Baptist Heritage, by J. M. Holliday, Bogard Press) ∙역사 속의 침례교인의 행진, 로버트 A. 베이커, 컨벤션 출판 (The Baptist March in History, by Robert A. Baker, Convention Press) ∙세기들 속의 기독교, 얼 E. 카인즈, 존더반 출판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Earle E. Cairns, Zondervan Press) ∙그리스도인 교회의 문서들, 헨리 베튼슨, 옥스퍼드 대학 출판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Henry Bettenson, Oxford University Press) ∙팍스의 순교자노트, 마리 젠테르트 킹 편집, 스피어 북스 (Foxe's Book of Martyrs, Marie Gentert King, Editor, Spire Books) ∙교회사 매뉴얼, 알버트 뉴만, 1,2권, 미국 침례출판학회 (A Manual of Church History, by Albert Newman, Vol. I and II.,The American Baptist Publication Society) ∙밀러의 교회사, 엔드류 밀러, 존더반 출판사 (Miller's Church History, by Andrew Miller, , Zondervan Press) ∙침례교인들의 간추린 역사, 헨리 베더, 저드슨 출판 (A Short History of the Baptists, by Henry Vedder, Judson Press) ∙서부문명의 간추린 역사, 존 헤리슨, 리차드 설리반, 미시간주 대학출판 (A Short History of Western Civilization, by John B. Barrison and Richard E. Sullivan, Michigan State University) ∙피흘린 발자취, J. M. 캐롤, 애쉬랜드 아베뉴 침례 교회 (The Trail of Blood, J. M. Carroll, Ashland Avenue Baptist Church) “근본주의 독립 침례 교회”란 무엇인가? (A Brief Survey Of What Are Independent Fundamental Baptist Churches and Baptist History)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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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1
독립 교회와 제왕적 교주
참고 : 자세한 내용 ( 전문 )을 보고자 할때는 좌측상단 화일 아이콘 그림을 두번 선택하면 글을 볼수 있습니다. ============================================================= 이름: 서달석 목사 05_0422_independence.pdf (239KB, DN:31) 독립 교회와 제왕적 교주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재판하도록 우리에게 한 왕을 주소서, 한 말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사무엘이 주님께 기도드렸더니,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거절함이 아니요, 나를 거절하여 나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삼상 8:6-7) 사람은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감독이나 통치를 받기 싫어한다. 그것은 죄의 사람들의 아버지 마귀로부터 받은 속성이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 받은 영광스러운 천사였으나, 그의 영화로움이 그를 “교만”하게 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늘에서 공중으로 공중에서 땅으로 쫓겨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간 하나님에 의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가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간섭과 지배를 받기 싫어한 사실들이 있다. 모세가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더니, 가나안 정탐꾼들의 소식을 듣고 “우리가 한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민14:4)고 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거절한 본성이 결국에는 성령님의 통치를 받았던 사사들의 인도를 받지 않고 한 왕을 구했던 기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도전장을 내었던 마귀의 성품같이 인간은 늘상 홀로 있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이 듣기 좋게는 악으로부터의 ‘분리’나 ‘독립’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결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나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사실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를 알지 못하고 일부 교회들이 “독립 교회”라는 이름을 앞세워 넓은 의미의 한 몸 된 교회(한 몸)에서 분리되어 쪼개져 있는 상태의 “독립”까지 떨어져 ぐ」嗤?고립된 교회들도 있다.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주 예수님으로부터까지 떨어져나가 있는 주님의 교회에서 떠나 있는 주 예수님과 상관없는 상태이며 교회를 깬 상태의 독립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교회란 무엇인가? “또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너는 베드로(페트로스-조약돌)라. 그리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敎會)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내어 따로 있는 모임)는 예수님께서 반석(페트라-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져 있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결코 지옥의 문들이 이길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세우셨다는 의미는 여러 뜻이 있겠지만, 우선 예수님은 한분이시란 점이다. 하나님도 한 분, 예수님도 한 분, 성령님도 한 분으로 곧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교회도 한 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한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 엡4:12)으로 교회는 한 몸이다. 그 한 몸인 교회가 인종, 언어, 문화, 지리적 차이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나 인종을 초월하여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님, 한 분 성령님의 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면서 믿음도, 침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만나 믿음이 일치되면 한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이다. 여기에는 교제가 있고, 주님의 세우신 사역자들의 감독을 받는 생활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사역자를 목사(牧師)들이라고 한다. 이 뜻은 파스코(영어의 파스토 ‘pastor’ -먹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리스어로는 포이멘(ποιμήν -poimen)으로 ‘양치는 자’란 뜻이 들어있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한 몸에 속해 있게 때문에 교회에서 목사로부터 말씀을 들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의 젖(벧전2:2)이라고 하고, 먹이는 이유는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목사를 동시에 교사(敎師-teacher)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가르치는 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먹이고 가르치는 것인 목사에 해당된다. 두 번째 목사의 직분을 ‘감독(bishop or Oversee)’이라고 한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하고 올바른 진리 안에서 성경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감독’하는 목사는 그 자신이 가르친대로 생활의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역을 ‘장로(elder)’라고 한다. 그래서 목사, 감독, 장로는 한 사람의 세 가지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목사, 감독, 장로 세 사람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벧전5:1)라고 소개하면서도 예수님을 목자장(the chief Shepherd-벧전5:4)이라고 하였고, 또 사역자들을 목자(Pastor)라고 비유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 장로들(the elders, 행20:17)을 초청하여 이별의 말씀을 전할 때는 그들을 성령님께서 세우신 감독들(Overseers, 행20:28)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또한 디모데에게 목사들을 감독의 직분(딤전3;1)으로 부르고 있다. 이 모든 사역들과 칭호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적이란 점이다. 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목사를 통해 먹어야 하고 감독 받아야 하고 장로들의 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며 스스로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들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들이 반드시 회계(會計)보고 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즐거움으로 하게하고, 슬픔으로 하지 아니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이라.”(히13:17) 그러므로 진실로 죄를 시인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반드시 지역교회에 속하여 목회자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영적인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 가르침에서나 반드시 지역 교회에 속해야하는 신앙에서 결코 자유나 독립은 없다! 교회로부터 자유, 독립은 곧 예수님으로부터 자유, 독립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지역교회란 무엇인가?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님 안에서 간절히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전16:19) 교회는 고린도, 갈라디아, 골로새, 에베소 등지에 흩어진 교회들이 있고, 그 흩어진 교회들 중에 지역교회(the Church)를, ‘독립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는 교회를 가리키는 ‘독립(independence)’이란 단어가 없다. 이 단어를 오해하면 ‘분리(separation)’가 될 수 있고, 고립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건전한 표현은 지역(Local)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독립교회’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역교회(local Church)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독립교회는 완전 고립되어 소외되고 유아독존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지역교회는 같은 나라에 흩어져 있는 지역교회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나 고립이나 소외된 독립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함께하되, 지역적으로만 떨어져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교회는 일종의 독립교회 같으나 전세계 흩어져 있는 주님의 교회와 한 몸이며, 교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믿음과 교리와 진리가 일치될 뿐 아니라 동일하게 ‘감독’을 받고 동일하게 말씀을 먹고 동일하게 장로들로부터 신앙의 본(本)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님의 몸’ 즉, 한 몸인 교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세웠고, 나아가 사도들이 여러 지역교회를 세웠으나 사실상 한 몸이었기에 베드로는 여러 흩어져 있는 교회들인 갈라디아, 에베소, 골로새, 빌립보, 데살로니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 ‘지역교회’이지만 한 몸이기 때문에 목사로서, 사도로서, 교사로서, 감독과 장로로서 서신들을 보냈으며, 예수님께서도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에 있는 지역교회들(the churchs, 계2:73:22)에게 감독하시고 가르치시고 먹이시는 일곱 교회의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지역교회’, ‘독립교회’라는 핑계로 누구든지 감독받는 것에서 자유나 배우기 싫어하는 ‘교회’는 성경에 없는 것이다. 원래 교회는 ‘하나’이지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류가 온 세상에 흩어져 살다보니 ‘한 곳’에 한 마음으로(행2:1) 모일 수가 없어 여러 지역교회로 모이는 것일 뿐 몸은 천리길 떨어져 있어도, 마음과 믿음으로 한 곳, 즉 예수님의 이름이 계신 한 몸 된 교회에 있는 것이다. 지역교회라는 용어를 오해하여 하나님의 감독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독립교회’를 부르짖는 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감독을 받고 있는 여러 지역교회와 교제를 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더 나아가 성령님으로부터 독립해버린 뿌리 없고 소속 없는 정체불명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몸’이 아닌 고아와 같은 길 잃은 양이요, 곁길로 빠져나간 양이 될 뿐이다. 그러한 독립교회는 하나님의 감독을 받고 있다고 핑계하지만 그것을 입증시켜줄 교제권이 없기 때문에 그 교회가 성경적 바탕 위에서 진리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돌연변이 이단 사설을 가르치며 우물 안 개구리같이 숨어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 속에 있는 지체들은 ‘교회’의 원리를 알고 주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교주같은 목회자만 믿고 따라가는 영적인 맹인들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점점 ‘독립교회’라는 미명하에 고립되다보면 드디어 ‘제왕적 교주’가 탄생하게 되고, ‘이단’이 출현하게 되고, 폐쇄된 교회 우리 안에서 신도들은 맹목적으로 끌려다니는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를 낳는다 “이제 스데반에게 일어난 박해로 인하여 널리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는데”(행11:19)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셨고, 그 이후로부터 사마리아, 안디옥, 그리고 오늘날까지 주님의 교회들(the Churchs)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터(엡2:20-22) 위에 세워져 왔다. 즉 스스로 세워진 교회는 세상에 없다. 뿌리 없는 나무 없고,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이 있는가? 구름 없이 비가 있는가? 샘 없는 시냇물이 있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체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예루살렘교회가 사마리아교회를 낳았고,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낳은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는 지역교회들(local Churchs)일 뿐 서로 상관없는 ‘독립교회’는 아니었다. 그들은 감독을 받아야 하였기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것이다(행13:1-3).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안디옥교회가 완전 독립교회라면 굳이 남의 교회에 두 사람을 파송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는 ‘한 몸’이다. 예루살렘, 안디옥교회는 지역교회로서 한 몸이지 상관없는 독립교회는 아닌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으면 결혼하여 분가(독립)를 하였어도 평생동안 자녀는 자녀인 것이다. 결혼 했다고 남남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역교회가 세워지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목사는 일반 중,고등, 대학을 나오고 신학을 해서 정상적인 목사에게 교회를 위임하면 지역교회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독립은 아니다. 다만 이미 목사에게 교회 행정권(목회, 설교, 행정처리) 등의 권리를 위임했기 때문에 교회를 낳는 교회로서 그 문제를 간섭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성경의 진리 토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지는 수시로 교회끼리 상호 감독을 받고 상호 교제 중에 배워야 하는 것이다. 지역교회, 독립교회라면 목사가 세워졌기에 목사로서의 사역에 간섭을 할 수 없을 뿐이지 그 교회의 독립교회 목사가 성경에 있는 복음, 구원, 바른 독트린, 경건한 생활을 믿고 행하고 있는지는 상호 교제 가운데 감독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상 올바른 진리대로 믿고 행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힘 있는 자(창립맴버, 돈 있는 자, 기타 파워 행사하는 지체의 남녀)가 교회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거나 목사가 제왕적 교주가 되어 목사에게 편리한 자가용 교회법을 하나 만들어 성도들을 영적 문맹을 만들고 신앙적 노예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 폭군과 노예들이 우굴거리는 폐쇄된 독립교회가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사 이래 모든 이단들은 이렇게 단계적으로 변질하여 극단적 이단들이 된 사례가 허다하다. 그들의 변질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자신들의 입지를 활보할 때까지는 최대한 주변의 도움과 충성과 신뢰를 얻고, 그 환경의 도움으로 일단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면 그 다음부터는 재빠르게 자립?할 준비를 하면서 자신을 멀리하여 감추기 시작하고, 중요한 자료들을 미리 확보해두고 점점 거리를 두고 독립?(고립)해 가다가 나중에는 완전 독립하여 드디어는 이단의 교주가 되어 아무도 가르칠 수 없는 스승이 되고 자신이 자신을 가르치며 감독받는 삶과 배우는 것이 끝나버리고, 극단적 이단이 되는 절차를 밟게 되는 것이다. 과거 장막성전과 거기서 나온 신천지증거장막 이만희(이희재) 교주, 박태선, 일월산기도원 등이 이런 예의 모델들이었다. 성경에는 “두세 증인”(18:10)의 증언(입증)을 강조하고 있다. 특정 지역교회가 수많은 성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의 목회자가 두세 증인들의 증언 할 수 있는 교제와 상호 감독을 받고 있지 않고 있다면 이미 그 교회와 목회자는 ‘제왕적 교주’가 되고 있거나 되어 있는 상황인 것이다. 과거 오메가목회신학연구원에 많은 목회자 지망생들이 몰려 왔었고, 그들의 처음 태도는 완전히 주님의 감독과 가르침을 받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으나, 공부를 대충 끝내고 졸업장과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익은 알곡들 같다가도, 일단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고 나면 서서히 얼굴이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설익은 알맹이는 공중의 새들(사탄)이 빨아먹고 쭉정이가 되어 하늘로 고개를 뻣뻣이 쳐든 사례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배우고 배울 수 있는 스승도 있고,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니겠는가? 어려울 때만 주변 지역교회와 ‘한 몸’인 척 하여 도움을 청하는 독립교회가 아닌 몸만 떨어져 있을 뿐 마음은 항상 함께 비춰보고 드러내고 배우고 감독 받을 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전4:9-12). 다윗왕이 영광과 권력을 누릴 때 다윗에게 아부했던 시므이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할 때는 완전 돌변하여 다윗왕을 저주하다가 나중에 죽임을 당했으며(삼하16:5-8, 왕상 2:42-46),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로 왕의 상에서 먹으며 감독을 받고 배우면서 주님을 섬기다가 다윗이 도망갈 때 따라가지 못했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중에 환대받은 사실이 있었다(삼하9:3-13, 삼하 19:24-30).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주님 “이는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셔서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음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요17:21-22) “마음을 같이하여”(행1:14), “다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였는데”(행2:1),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2:46), “마음을 같이하여”(행4:24),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를 향하여 같은 마음을 갖게 하셔서”(롬15:5), “한 마음과 한 입으로”(롬15:6), “너희는 한 마음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모두 일치해서 하나의 생각으로 나의 기쁨을 이루라”(빌2;2), “화평의 띠로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홀로 있는 것은 악령의 뜻)을 힘써 지키라. 몸도 하나요 영도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3-4). 교회가 한 몸이라면 에베소에 있는 지역교회들(로컬 쳐치들)과 다른 지역 교회들 즉, 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교회들은 결국은 한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몸이 되는 “연합”(에큐메니칼이 아닌)은 성령님의 뜻이며, 몸을 찢는 분리는 독립이란 이름을 쓰든 지역교회란 단어를 쓰든지 주님과의 분리가 되고 죽은 아들의 어머니 같이 살아 있는 교회를 깨어버리기를 원하는(왕상3:16-26) 여인과 같은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 그리고 참된 주님의 교회는 ‘사랑’이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을 찾아 ‘하나’되기를 소원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교회들로부터 교제하는 가운데 믿음의 만나는 부족하지도 아니하고 남지도 아니한 “한 오멜” 신앙(출16:16-18)이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교회들이여! 지역교회, 독립교회란 용어를 앞세워 폐쇄적 자폐증 환자 교회가 되지 말고 바울 사도의 마음 같이 열린 마음이 되어 교제와 사랑,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가르치기를 좋아하기 보다는 고개 숙여 배울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린다. 아멘.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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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9
신약교회의 특징(6)
신약교회의 특징(6):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신약의 제사장 직분의 차이 신약교회의 특징(6) 오늘 공부할 내용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신약의 제사장 직분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벧전 2:5,9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구절의 주어가 “너희” 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어 영어성경의 YOU는 단 복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KING JAMES 영어성경에는 단수 복수의 구분이 있습니다. 바로 YE 라는 단어인데 여기서 YE 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너희”를 뜻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은 적고 대부분의 말씀이 “너희” 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너희”혹은 “우리”등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벧전 2:5 절의 “너희”는 살아있는 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명 한명이 모두 살아있는 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있는 돌들로서 사방에 흩어져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다같이 모여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 혼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들 말하는데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MASSAGE 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만인 제사장 직분,-‘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만인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오해를 하게 되면, 내가 교회 없이 나 혼자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 드리고 경배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성경은 단 한번도 “살아 있는 돌들”인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 인들이 따로 흩어져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들이 아름답게 모여서 건물처럼 집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희생물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즉 복수인 “너희”가 -AN HOLY PRIESTHOOD, 한명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교회가 하나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지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9절에서도 보시면 복수형 YE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A ROYAL PRIESTHOOD, 왕가의 제사장 왕족에 속한 제사장과 혈연 관계가 있는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의 핏줄 안에 있는 제사장이다. 여기서 “제사장”이라는 단어는 항상 단수로 나와있습니다. AN HOLY PRIESTHOOD, A ROYAL PRIESTHOOD (너희가 제사장이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제사장들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면 우리 한명 한명이 제사장이라고 이해하면 되지만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 한명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교회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라는 말씀이지요. 벧전 2:5,9절을 표시해 놓고 출애굽기 19장 5절 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기 직전에 하나님과 ISRAEL백성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는 광경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6절에 보시면-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에 의하면 ISRAEL 백성 모두 12지파모두가 제사장이 되어야합니다. 그나라 자체가 제사장 왕국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십계명을 두 번 받았습니다. 처음에 받은 것은 개져 버렸습니다. 십계명을 받고 돌아와 보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겠다던 ISRAEL 백성들이 계약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온 백성이 함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말씀 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니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께 전하며...” 이제 백성과 구체적인 계약이 맺어졌고 백성모두가 아멘! 했으며 주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40일 동안 성문법으로 친히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40일 사이에 ISRAEL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배반하여, 아론에게 신을 만들라고 주문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출32:4) 외치며 송아지 앞에서 날뛰고 춤을 추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5절 말씀입니다.(26절까지) 당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모두 음행과 난잡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진영의 문에 서서 외쳤습니다. “주의 편에 속한자기 누구냐?” WHO IS ON THE LORD"S SIDE? 내게로 나아오라!! 외칩니다. 성경은 레위의 아들들이 함께 모여 모세에게로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ISRAEL 12지파중 모든 레위지파가 다모여 모세에게로 모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편에 선자들은 칼로 음행을 저지른 자들을 쳐 죽였습니다. (27-28절) 그러한 일을 감히 두려워서 자원하여 할 사람이 없었는데 레위지파의 모든 사람들이 모세 옆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이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이 ISRAEL 백성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ISRAEL 전체가 제사장 직분이 박탈 당하고 이시간 이후로 ISRAEL의 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만이 감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를 제외한 어떤 다른 지파의 어떤 사람도, 그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믿음이 뛰어나고 신실해도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1:49-51절 말씀입니다. 레위지파는 계수 하지도 말고 ISRAEL 자손 가운데 넣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51절의 “낯선자가 오면 죽일지니라”에서 낯선자는 이방인이 아니라 ISRAEL의 레위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의 모든 자들입니다. ISRAEL 전체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고 ISRAEL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의도 하셨고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하고 오직 레위지파 만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고, 열심히 있어서 어떤 일을 도왔다면 그들은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섬길 수 있는 나라를 택하셨고 섬길 수 있는 지파를 택하셨습니다. 이방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어떤 다른 자들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과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레위지파만이 갖는 특권을 오늘 저희 모두가 갖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3장 6,12,13 절입니다. 여러분, 이집트에서 10번째 재앙은, 첫태생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ISRAEL의 첫태생은 다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ISRAEL의 첫태생도 다 죽었어야 하는데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ISRAEL의 첫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말씀에서 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ISRAEL민족 전체 첫태생을 다주고 그애들 대신에 레위지파를 갖기 원하셨습니다. ISRAEL 전체 첫태생을 대신한 지파가 레위지파가 된것입니다. 이 레위지파는 죽었어야 되는데 살아난 첫태생을 대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것이고 레위지파도 다른 지파들처럼 유업을 받는 대신에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제사장 지파 레위지파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시대 성전을 재건하는 그날에도 반드시 필요한 자들은 레위지파 였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 오려해도 레위지파가 없으면 못합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웃사”라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떨어질까바 붙잡았다가 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언약궤를 옮기고 만지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하6:3-8) 역대상 15장 2절입니다. 다윗의 말입니다. 레위인들이 영광과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입니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제사장 직분을 오늘 신약시대의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든지, 이방인 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막론하고 누구나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고귀한 직분을 우리같이 부정하고 불결하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이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부분을 내가 친히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의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지 오늘 우리는 밝히 알기 원합니다. 오늘날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거룩해 보이는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서 마치 구약시대의 제사장이 입고있었던 의복을 흉내내며 자신이 하나님의 제사장 들인양 나타내곤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이 입는 옷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어떤 특정한 사람이 그 옷을 입고 마치 그 사람만이 거룩한 직분을 가진 제사장처럼 행동합니다. 영어로 사제를 Prist 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이죠. 제사장이 하는 주된 일은 일년에 단 한번 금향로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금향로에는 향이 놓여져 있죠.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기도를 다 모아서 갖고 나가는 의식을 하는 것처럼 오늘날도 사제라는 자가 마치 제사장인양 자신을 통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올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 모든 기도를 다 모아서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 믿은 날들이 1500년간이라는 긴 세월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이 버젓이 있는데도 사람들의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제사장” 이라고 생명을 걸고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 나아가서 기도와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드린 “만인 제사장” 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드릴 영적인 제물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5에 보면은 영적인 희생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제물처럼 소나 양을 끌고 나오면 절대로 안돼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피를 흘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첫 번째 제물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나아올 때 잊지 말고 가지고 나와야 하는 첫 번째 제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입니다. 하반절에 보시면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드리실 때에 이 일을 단 한번에 행하셨기 때문이요..”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염소나 송아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드려야 할 영적인 희생물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입니다. 요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어떠한 제사장도 피 없이 나아올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양과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나왔다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나아가야 할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16절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 영적인 희생물은 바로 찬양과 감사의 제물, 선을 행하는 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물을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15절에서 보시는 것처럼 계속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2장 5절에 있는 영적 희생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6절입니다. 누구를 바쳐야 합니까?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일이 그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혼을 얻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그 사람을 바친다 곧 제물로 드린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명이나 이방인을 제물로 바쳤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들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물은 우리의 몸을 희생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섬김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말과 입술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모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입니다. 이말씀은 빌립보성도가 정성껏 준비한 믿음의 희생제물 위에 사도바울 자신을 헌물로 드려 붓는 제물이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붓는 제물은 전체를 적셔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나 는 없어지고 빌립보 성도들의 희생제물만 남아도 너희 제물이 하나님께 잘 드려지기만 한다면 내 자신이 제물 위에 부어져서 사라진 것처럼 없어지더라도 바울은 기쁘고 또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이지요. 사도 바울의 심정은 나 혼자 열심히 제물을 드려 상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가 없어지더라도 빌립보 성도들이 더 주님께 드려지고 더 주님께서 받으실만한 희생제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위하여 나를 희생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주님은 우리를 왕가의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왕가의 제사장으로 삼으심은 왕처럼 누리고 향유하고 살라고 하시는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귀한 직분으로 인하여 더욱더 주님께 드리게 하려고 주신 직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제사장 직분을 개개인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역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하나된 모습으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야합니다. 우리각자 개인이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혼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섬김은 받고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섬김을 받기 원하시는데 열심히 잘하면 온전한 섬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제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온 형제자매들과 어울려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의 제사장 직분은 놀라운 직분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직분을 갖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죄악과 실패로 말미암아 레위지파만 택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처음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섬겨야합니까? 교회가 섬겨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섬겨야합니다. 뛰어난 목사, 유명한 사제, 어떤 성직자 등 특별한 계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왕가의 제사장으로써 섬겨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존귀한 직분을 마귀의 역사로 우리 모두 빼앗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직접 섬겨야 우리 하나님을 섬긴 만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드려짐이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를 원합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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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9
신약교회의 특징(5)
신약교회의 특징(5): 구약의 성령의 사역, 신약의 성령의 사역 신약교회의 특징(5): 2004. 10.31(일) 제목: 구약의 성령의 사역, 신약의 성령의 사역(신약과 구약 차이 중) 오늘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공부입니다. 우리는 이내 성령께서는 세상에서 특정한 기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소 변화가 생겼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꼐서 “오셨다가 떠나기도 하셨습니다.” 잠시 후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성도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교회에서 사시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엡 4:30, 요 14:14) “그러므로 그분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는데도 아직 성령님께서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행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라고 말씀하시는데 아직 성령님께서 임하시기 전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성령님께서는 아직 임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행 2:33절을 마저 읽어 보시면, “……아버지께로부터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으셨으므로 너희가 지금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이심을 받으시고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비로소 성령님께서 이 땅에 부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가 바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때입니다(행 2:1-4).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성령께서 비로소 임하신 때 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만으로도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영광을 얻으시고 높임을 받으셔야 비로소 이 땅에 성령님께서 부어지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님께서는 주로 유대인들과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11장의 베드로의 간증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을 부어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 위에 임하신 것 같이 하시더라.”(행 11:15) 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 그들 위에 즉 이방인들 위에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언제처럼? 처음 오순절 때 우리 위에, 즉 유대인들 위에 임하신 것 같이 임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 떄에 내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였노라.” (행 11:16) 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은 구약의 성령님과 신약의 성령님께서 특별히 임하신 것의 차이입니다. 구약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주로 사역, 어떤 일을 해 내는 것, 그 일을 위해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성령님의 역할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령님은 한 분의 인격으로 완전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대신한 또 다른 분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요 14:26). 그분은 성령님이시며 “위로자”라는 이름으로 한 인격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을 인식할 때, 어떤 일들을 하기 위해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서 의지하는 것은 여전히 구약적인 방법으로 성령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움을 구한다든지 어떤 이적들과 또 다른 무언가를 어떤 이적들과 또 다른 무언가를 해내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구하는 모든 종류의 일들은 다 인격자이신 성령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수행해내기 위해 잠시 임하신 성령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령님은 사람들 안에 계셨지만 영원히 내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단 한번도 어떤 개인을 거점 삼아서 그 사람과 평생을 머물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령님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특정한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출애굽기 31장에서 브살르엘과 아흘리암과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성막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 성막을 하나님께서 다지안 하신대로 건축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브살르엘과 아흘리암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성막건축의 일을 해낸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도 말씀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힘으로 구출해 내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임하셨던 것입니다. 미디안의 침략자들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기드온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임하셨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구약시대에 성령님께서 사람들에게 잠시 머물고 거했던 일들이라면 오순절 이후에 주님께서 특별히 약속하신 성령님은 한 분의 인격자로서 다만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거하시고, 교제하시고, 이끄시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한 인격으로 오신 것과 우리의 모든 삶을 이끄시는 한 위로자로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특정한 일, 주님의 힘든 일, 어려운 일들을 해내기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나와 함께 영원히 거하기 위해 오신 신약시대의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성령님이 내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는 시대입니다.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 안에 성령님께서 오신 것은 그 사람의 행위와 관련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착하게 살려고 결심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내가 거듭났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오신 이 성령님은 나의 어떤 태도 때문에 떠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성령님께서 떠나셔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사람 위에 임하셨을 때 그 사람이 거부하면 떠나셨습니다. 삼손의 경우도 나실인으로서 머리에 손대지 말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그가 한 여인에게 유혹되어 머리가 깎였을 때 그의 머리가 깍은 것이 문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자임을 포기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삼손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령님의 임하심의 특징은 어떤 특정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한 개인에게 임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에 부합되지 못하면 떠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약시대에는 어떤 일을 해내시기 위해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쳐를 삼으시고 우리와 교제하시고 함께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알지 못하면, 오늘 누가 성령을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왜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 마음 안에 거하시는가를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악을 범하는 동안에도 큰 고통을 당하시며 내 안에 거하십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께서 나의 죄악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인격이심을 우리가 조금만 알아도 우리의 모든 생활 가운데 성령님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은 다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긴밀한 연관 가운데 절때로 떠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특징 중 한 가지를 말씀 드리자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전부를 말씀드린다면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을 따라 걷든지 성령을 따라 걷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수히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딱 두 가지만 구분하십니다. 육신을 따라 걷는 것인가,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인가 이 두 가지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보면 복잡한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주님께 나아가서 보면 얼마나 단순한지 모릅니다. 정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이라면, 그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한 분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내가 성령님을 따를 것인가, 내 마음대로 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착한 일을 한다 해도 육신을 따라 할 수 있으며, 주님 앞에서 좋은 일을 한다해도 그 냥 내 육신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다 육신을 따른 것입니다. 술마시고 담배피고 보기에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육신을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조율해서 그분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면, 그 일이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모든 것이 육신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지 그 외에 모든 것은 다 육신을 따라 행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이 말씀에서도 결국 육신이냐 성령이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13절 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 8:12-13) 이 말씀도 역시 육신을 따를 것이냐 성령을 따를 것이냐 둘 중 하나를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하는 일로 사람들을 다 속일 수 있고 사람들 앞에서 가장 좋게 보일 수 있지만, 다만 한가지 과연 내가 행한 일이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며, 계획된 것이며, 성령으로부터 나온 일인가 입니다. 성령을 따라 걸으셨습니까? 이나면 스스로 계획하여 당신의 길을 만들어 갔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이는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기 때문이라.”(고전 2:10) 이 말씀에서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감추어 높으신 모든 진리들입니다. “자신의 영으로 계시 하셨다”는 말씀은 진리를 알려면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통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나 느낌으로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영”으로만 하나님의 진리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이러한 일들이 다 좋지만 그냥 공부를 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것이 있다면 정말 값진 것이지요. 이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역사 하심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하십니다. 그 사실만 주의하시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약시대의 특징을 모르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서 신약시대를 살 수가 없습니다. 왜 지금 이 시대에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내 안에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성령님을 통해서 나와 교제하시고,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시기 위해서 내 안에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님을 무시하면, 가볍게 여기면, 누구든지 성령의 뜻에 복종치 아니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지식은 많이 알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 그 자체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성령님은 가장 중요한 분이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인식을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 잘 따른다 하는 것은 모두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 성령님으로만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그것을, 사람의 마음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깨닫을 수 없는 그것을 오직 “자신의 영으로만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을 힘입을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주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성령님께서 나를 움직여 주셨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입술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주님을 섬기는 것은 모두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은사는 성령님에게서 주어진다는 말씀이지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은사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분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문제는 성령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모르면 주님을 섬길 수가 없지요. 은사를 모르면 주님을 섬길 수가 없지요.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못한다는 말씀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신학교를 나오면, 성경을 어느 정도 공부하면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아는 것은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계획을 세워놓고 뭔가 하려고 할 때 능력이 좀 부족하여 이 일을 도우시고 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그분의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생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조금이라도 주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의 저자가 성령님이신데, 이 분과 상관없이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적용하고, 사용하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한다면 모두가 틀린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대의 주관자 이심을 우리는 깨닫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안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교제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 여쭈어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매사에 그분과 모든 일을 의논하고, 상의하고 조언을 받고, 그분의 위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섬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모든 것 다 모든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본질을 아는 것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인격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영원히 내 안에 한 인격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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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9
신약교회의 특징(4)
신약교회의 특징(4): 구약의 자비와 신약의 은혜의 차이 제 4 강 : 신약교회의 특징(4) 오늘은 구약의 자비라는 말과 신약의 은혜라는 말의 차이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 자비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로를 받아야 마땅한 자에게 그 진로를 참으시는 것”이란 뜻입니다. 매를 맞아야 할 것을 안 때린다는 말이지요. 은혜란 말은 이 자비에서 한단계 더 나아갑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빚에 억눌려서 죽으려는 자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자비라면 은혜는 더 나아가서 빚을 탕감 받은 자에게 어떤 사업체를 제시하며 인수 받아서 사장의 위치에서 경영하라 함으로써 자비를 넘어 은혜를 베푸는 것이지요. 신약성경에는 은혜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시기전 구약의 마지막 상황은 어떻게 끝납니까?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 4장 6절입니다. “그가 아버지를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말 4:6) “저주”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고 구약만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 까닭이 없는 저주가 아니었죠. 모든 자들이 그들의 죄들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가 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꼣 이땅에 오셨고, 놀라운 신약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비로소 참 은혜가 이땅에 임한 것입니다. 신약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2:21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구약의 마지막 절에서는 저주를 말씀하고 있으나 신약의 마지막 절에서는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 결론은 바로 저주를 은혜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주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굳이 신약시대를 은혜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은혜 위에 은혜가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 1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며 은혜 위에 은혜니” (요 1:16)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7절에도 보시면 은혜라는 말씀이 또 나오는데 이 은혜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은혜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창 6: 8절에 보시면 “노아가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같이 은혜가 한번도 없다가 갑자기 신약에서 은혜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약시대의 은혜는 “은혜 위에 은혜로서” 특별한 은혜란 말씀이지요. 이러한 특별한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말하지만 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은혜가 참 은혜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임한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이 신약시대가 정말 은혜의 시대임을 함께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2:11절 입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딛 2:11)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는데 언제 누구를 통해서 나타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씀이지요. 택함을 받은 자들도 아니요, 믿음이 크고 강한 자도 아니며, 착한 자도 아닙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같이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디도서 2:1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 죄로부터,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겨져 주시는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8-9)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9절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하는 말씀의 영어성경을 보면 “not of works”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카톨릭 신자들이 종종 구원 받는 예가 있습니다. 뭔가 많은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줄만 알았는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not of works” 즉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구원이 선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선물은 호의로 베푸는 것이지 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 사람을 평가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든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선물입니다. 구원을 은혜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5절 말씀입니다.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5) 여기를 보면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엡 2:5, 엡 2:8, 딛 2:11 말씀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어떠한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믿음을 하나의 행위로 여기며 의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고 신실하고 견고해서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믿음이 약하고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믿음의 적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며, 믿음이 좋고 견고하다고 믿는 자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처럼 여기므로 믿음이 또 다른 하나의 행위를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4:4절 말씀입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4) 누군가가 일정기간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면 업주를 찾아가서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여기지요. 일을 해주고 받는 것이니까 안주면 달라고 해서라도 받아야지요.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믿음을 하나님의 것이 어떤 것을 취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믿음이 강하다라는 착각으로 이런 큰 믿음을 소유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당연히 은혜를 베푸셔야 한다고 여기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교만해져서 하나님께서로부터 뭔가 받을 때에 은혜로 여기기 보다는,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고, 약하면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롬 4:4절의 말씀은 믿음이 일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일이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데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주셔야 할 빚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5절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는 것이지요. 결론적인 말씀은 조금 전에 보았던 엡 2:9절 말씀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9) 하나님께서 “나는 이러한 믿음이 있으므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속해서 은혜를 가르쳐 주시지만 사람은 뭔가를 행하여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종교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종교심을 하나님이 거져 베푸시는 은혜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뭔가를 행하여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행위, 저런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고행을 자처 해서라도 주님께 잘 보이려 합니다. 주님께서 좋게 봐주실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떠십니까?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은혜와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말이 있다면 “값없이”, “선물”, “일을 하지 않는다”,”경건치 못한 자” 이러한 말씀들입니다. 은혜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을 함께 보시지요. 로마서 11: 6절 말씀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라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롬 11:6)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먼저 앞부분은 은혜에다가 행위를 1%라도 첨가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99%의 주님의 은혜 + 나의 노력과 수고 1%’ 라고 했을 때 이미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요소 안에는 어떤 행위가 더해져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머지 말씀을 볼 때, 은혜와 행위를 함께 병행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행위를 말하던지 은혜를 말해야지 둘을 병행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4절 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너희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 우리 중에 누구든지 어떤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효력도 없으시며 우리는 은혜와는 관계가 없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말슴들 –형제 사람, 하나님 사랑, 영혼구령, 성경읽기, 기도하기, 신실한 삶, 죄를 멀리하는 것 등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모두 행해야 하는 부담으로 안는 것이고, 은혜를 아는 자들은, 주님께, 저 자신을 이러한 것을 행할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 드리며 주님의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행함 - Do의 개념 – 지금 무엇인가 행하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 Done의 개념 – 즉 주 예수님께서 다행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신 것입니다. 과연 주님으로만은 부족합니까?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부족해서 완전하게 이루어 놓으신 은혜라는 기초 아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 나를 자랑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많은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고백하는 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착하고 신실한 종 즉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스스로가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눅 17:10) 여러분 자신도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십니까? 오늘날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다 없애 버렸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열심히 무언가 행해야 하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상실되어 버린 후 교만만이 남았습니다. 은혜를 모르게 하면 교만함 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철저히 깨달은 자가 비로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조금의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여전히 그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 말씀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모두 동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 만큼 수고한자도 찾기 힘듭니다. 그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이 어떠했습니까? “그들 모두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수고조차도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때 가장 조심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주님을 섬기고 나서 주님의 은혜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입니다. 만일 그러한 고백이 없다면 차라리 섬기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섬김으로 교만해지고 높아져서, 어떤 위치에 이르렀다고 여기게 되면 더욱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 없는 자가 받는 것이고, 값없이 받은 것이고,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가 기대할 수도 없는 큰 은혜를 선물로 받았다면 우리의 일생은 그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없는 섬김은 모두 종교요, 교만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구약의 자비와 신약의 은혜라는 말씀에서 많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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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9
신약교희의 특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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