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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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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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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6
소명의 중요성(렘1:4)
출처 : I will sing unto the Lord //www. alleluia.egloos.com 임 동선목사 0. 소명의 중요성(렘1:4)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1:4) 소명은 부르심(calling)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려고 할 때는 소명을 주신다. 소명 없이 일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다. 모세의 경우를 보자. 그가 자기 동족을 위해 일할 마음을 품었던 것은 40세 때였다(행7:22-29).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에게 소명(calling)을 주시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동족을 위해 일하려고 했다. 선한 의도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애국적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동족을 위한 그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살인자가 되어 도망치는 사람이 되었다(출2:11-15). 그에게는 소명이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행7:30, 출3:1-6). 비로소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을 받게 된 것이다(출3:10). 그때 모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미 모세는 그가 가야할 이집트 사람들의 말을 잊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소명에 따라 순종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내는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소명은 그의 일의 성취를 가져온다. 소명으로 시작된 일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다. 소명 없이 일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다. 소명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요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하도록 소명을 받았다(욘1:1-2). 그러나 그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자기 몸을 맡겼다(욘1:3). 소명을 버리고 가는 자는 순탄하지 않다. 그가 만난 것은 풍랑과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었다(욘1:4-16). 마침내 그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가졌다. 소명에 충실한 사람은 자기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는 소명을 가지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위대한 본보기(빌2:5-8)가 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명은 이처럼 중요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소명을 받았다. 그는 그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행20:24). 소명이 있는 곳에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 1. 소명을 받드는 자에 대한 주의 약속 1. 내가 너를 통해 그들을 칠 것이다(렘1:18).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사람으로 세웠다. 결코 부드러운 말이나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그를 통해서 든든한 도시도 대적하실 것이다. 그를 통해서 왕들과 통치자들과 제사장들까지도 대적하게 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아이라고 느꼈지만 주께서는 그를 통해서 그 땅의 백성들을 대적하실 것이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1) 첫 번째, 대적하는 말의 기원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말들은 예레미야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소명을 주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 혼자 이스라엘을 대적했다면 그는 얼마 안가서 그의 사역을 끝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치는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예레미야는 거기에 쓰임 받을 뿐이었다. 2) 두 번째, 대적하는 말의 결말 예레미야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거기에 아무리 반대와 비난과 모함과 원망과 불평이 있더라도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성취된다. 예레미야가 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3) 세 번째, 대적하는 말을 다루는 자세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일들을 곧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생각과 통한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한 것이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라고 여겼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말씀이 또한 믿는 너희 안에서 효력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하)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하나님의 편으로 서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과 싸우는 일은 곧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담대해야할 것이며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렘1:19). 영리한 아이들은 종종 아버지가 사용하는 회초리를 감추어두려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을 매질해야 하는데 회초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찾아와라........아마도 예레미야를 통해 듣는 말들이 너무 힘들어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예레미야를 어디다 숨겨두려고 할 것이다. 격리시키고 멀리 보내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고........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매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대하기 싫은 존재가 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대적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I am with thee, 렘1:19)라는 주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소명을 받드는 자들이 반대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고 건져주실 것이다. 소명 받은 자들이여 그들이 너와 싸우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너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2.소명 받은 자가 각오해야 할 것(렘1:17) 1. 소명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허리를 동이라”(렘1:17).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태도로서 다시 한 번 언급되는 이 표현들을 보자. 이 표현은 문어적인 표현이다.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허리를 동이는 일을 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겉옷으로는 달리기를 한다든지, 전쟁을 한다든지, 밭일을 하기가 곤란하다. 중대한 일, 힘을 써야 할 일의 경우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허리를 동이는 일을 했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어찌 보면 그 일은 입으로만 하는 일처럼 보인다. 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어떤 일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허리를 동이라고 했다. 각오하고 시작하라는 권면이다. 목회자가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것이 칼이나 총을 사용하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문제와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비난과 불평, 또는 원망을 듣게끔 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야 한다면 허리를 동이는 자세로 각오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소명을 받드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다. “일어나라”(렘1:17). 앉는다는 것은 쉰다는 의미가 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구속사역을 끝내시고 쉬고 계시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도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변호사역에 힘쓰고 계신다. 그러나 앉는다는 것은 고난이나 고통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처절한 고통을 맛보셨다. 그분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더이상 고난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영광중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 일어나라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예례미야가 하게 될 일이 편한 일이 아니며 고난과 고통, 많은 어려움과 힘든 순간들이 있다는 뜻이다. 일어나라는 것은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안일하게 이 일을 다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가하게 처리하거나 여유롭게 행할 일도 아니다. 취미생활 같은 것이 아니며 목숨이 오가는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 많은 어려운 일이 따르게 되어 있다. 3. 소명을 받드는 것은 내용이 있는 일이다. “말하라”(렘1:17). 궁극적으로 그는 곧바로 시행될 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는 회개를 촉구하거나 하나님의 평안한 약속을 선포하는 대언자가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앞날을 정하셨다.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는 그들이 왜 그러한 재앙 가운데 들어가야 하는지를 말해야 했다. 그것은 그 민족에게 올바르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추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의 들춤이 없다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주께서 그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더하거나 빼지도 말고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아무도 어떤 잘못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갑자기 망하게 될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쓴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비록 그들이 끓는 가마 앞에 놓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소명을 받은 사람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 하나 정확하게 가르쳐주실 것이다. 소명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예레미야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4. 소명을 받드는 일에는 반대가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렘1:17) 주의 말씀을 전할 때의 오는 반응들을 아는가? 이것은 주께서 예레미야를 격려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아가서는 말씀을 전한 사람들을 대적하고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고, 그들의 위선을 들추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언자는 전혀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기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도 생긴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분은 위선에 빠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했다(마23장). 그것은 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의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실로 주께서 명하신대로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많은 대적자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는 대언자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을 신뢰할 때 결코 당혹스러워 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게 되는 이유는 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그 사람이 만든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은 죽이고 그 후에는 어찌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인 후에 혼과 몸을 함께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10:28). 만일 예레미야가 사람들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당혹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 이것은 만일 그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께서 명령하신 것만을 말한다면 결코 당혹스러워 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맺는 말과 적용: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주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그것은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유원지에 놀러온 것과 같은 태도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소명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것은 어떤 직장에 스카웃되거나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직원으로 채용된 것보다도 중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겠다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허리를 동여야만 한다. 소명을 받드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같은 일이 아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편한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아서 그것을 할 수 없다. 일어서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또한 소명을 받드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 나를 부리시는 분의 일이므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분이 말하는 바대로 움직이려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여러번 거론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명을 받드는 일은 위협과 반대와 비난과 모함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분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신 분이다. 그분의 부르심에 충실하려는 사람마다 그분 외에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 3. 소명 받은 자가 본 것들 (렘1:11-16) 소명 받은 자로서 예레미야는 두가지를 보게 되었다. 첫째는 아몬드 나무이며 둘째는 끓는 가마였다. 주께서는 이 두가지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셨다. 1. 아몬드 나무(렘1:11-12) 아몬드 나무라는 말은 히브리어(사케드, שקד)로 ‘지켜보다,’ 혹은 ‘깨우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되었다. 아몬드 나무는 “나무를 깨운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졌다. 왜냐하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그해에 싹이 트고 열매 맺는 나무 중에 가장 빠른 나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목련이 피면 봄이 온 것을 알듯이 아몬드 나무는 봄이 온 것을 말해주는 나무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Authentic Media p.556 참조).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몬드 나무를 보여주면서 “내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내 말을 재촉하리라.”(렘1:12)라고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급했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몇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알리시고 하시려는 일이 지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시겠다고 하는 표시이다. 둘째, 주께서 소명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소명을 갖게 된 자들에게 그분께서 주신 부르심이 헛되지 않음을 한 번 더 확신시키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어떤 통치자가 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보수 수구세력은 급진전 되는 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많은 국민들도 결국은 급속한 개혁에 대해 비난과 부정적인 말들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그러면서 교회나 하나님의 일들을 거기에다 비유하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 통치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지 못했다(사55:8-9). 성령님께서 사람을 바꾸실 때는 한 순간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구원받기 위해서 오랜 성경공부 과정을 거쳐야 했다든지, 또는 기초 성경공부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삭개오가 회개하는 데는 심사숙고의 기간을 갖는다든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절반을 내놓거나 누구의 토색한 물건을 네 배로 갚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서두르기를 원하신다. 소명을 받았지만 그 일을 나중에 하려고 하거나 혹은 천천히 하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지체할 필요가 없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까, 나중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하고 지금은 다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식의 신앙이라면 아몬드 나무가 말해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당장에 시작되어야 할 일이다. 지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아몬드 나무가 가진 이름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을 서두르신다. 주님은 “내 말을 재촉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읽었지만 서서히 순종하려고 하는 것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버티는 것들이 얼마나 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재촉하시지만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늑장을 부릴 때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부르심에 얼마나 충실하게 움직이는지를 지켜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신속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2. 끓는 가마솥(렘1:13-16) 끓는 가마솥은 재앙을 상징한다. 이 가마솥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가마솥의 열린 쪽이 남편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재앙이 북쪽에서부터 임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북쪽에서 재앙이 그 땅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임하리라.”(렘1:14) 주께서 부리시는 왕국들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의 성문어귀에 왕좌를 정하고 그곳의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의 모든 도시들을 칠 것이다(렘1:15). 이것은 유다의 상황이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은 상황이 된다(풍전등화, 風前燈火)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를 버린 것, 그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 그들이 사악한 것이 이 재앙의 이유였다(렘1:16). 이미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멸망을 담고 있다. 요시야 왕의 회개와 신앙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왕국은 재앙을 앞에 두고 있다. 예레미야의 임무는 무엇인가? 재앙에서 그들을 건져내는 것인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다. 왜 그 재앙이 임하게 되었는지, 왜 이제 그들이 멸망하게 되는지,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실 일들 가운데서 그들을 가르쳐 그들의 남은 자들이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철저히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누군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면 무지한 사람들은 멸망해가면서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 4. 소명받은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렘1:9-10) 1.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다(렘1:9)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렘1:9)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 입에 대셨다는 표현은 그가 주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현이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였다(사6:5). 그러나 스랍들 중에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불타는 숯을 취해가 가지고 날아와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사6:7)라고 했다. 이어서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즉.......”(사6:8)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되는 표시로서 이사야의 입술을 건드리셨다. 이것은 에스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겔2:8) 거기에도 입을 통해 받아먹으라고 한 것은 주의 두루마리로서 주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겔3:1 참조). 다니엘도 마찬가지다. 주께서 그에게 주의 말씀을 주시려 할 때에도 입을 어루만지셨다(단10:16). 이런 것을 보면 소명 받은 예레미야가 할 일은 명백하다. 주의 말씀을 가서 전하는 것이었다. 자기 계획이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술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 편에서 서술하는 게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그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소명 받은 자가 할 일이다.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며 소명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다. 2. 내가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웠다(렘1:10).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세자는 왕이며 가장 큰 권세는 왕국의 권세이다. 모든 이들은 왕께 복종해야만 한다. 침례성도들의 믿음 중에 하나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믿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의무까지도 면제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마땅히 바쳐야 할 것들(세금)이 있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와 그 자신을 위해 행하신 것처럼(마17:27) 정부를 위해서 해야만 한다(롬14:7). 그러나 이 소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이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그 어떤 권위보다 높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웠다. 그를 민족들과 왕국들을 초월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그 어떤 민족도 예레미야가 한 말씀대로 될 것이며 그 어떤 왕국도 예레미야가 한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 소명을 받은 자는 가장 높은 분의 말씀과 함께 귀한 권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소명받은 자는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 선포하라 하신 말씀에 대해 담대히 전해야만 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함께 눕기를 원했지만 요셉은 순종하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보다 큰 권위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 아내보다도 더 높은 주인이며 남편인 보디발에 의해서 권위를 임명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와 보디발의 권위 사이에서 더 높은 권위에 충실했던 것이다. 소명 받은 사람들은 최종 최고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권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소명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성경을 존중하고 거기에 충실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소명받은 자들을 향해서 모든 권위자들은 복종하고 두려워하며 존중해야만 할 것이다. 3. 내가 너를 통해서 하게 할 것이다(렘1:10) 소명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일을 긍정적인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이다. 다시 말해 세우고 심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세우고 심는 일이 있기 전에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고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 있다. 아마도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가 해야 할 이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고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놀라며 당황했을 것이다. 이런 예레미야를 놓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해야 할 일은 심판자와 복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일을 알리는 것이었다. 복을 주시려는 두 가지 일에 앞서 심판에 대한 네 가지의 언급이 있는 것에 주목하자. 한 개인이 구원받는 것도 생각해보자.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뿌리째 뽑히고 죄로 높아진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죄악 된 생각이 파멸되고 철저히 좋지 못한 습관이 파괴되는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너무 쉽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네 가지 일들에 대해 신중하지 않다. 그리고 세우며 심는 것만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회개하지도 않는 죄인들에게 값싸게 복음을 전해서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영접케 하려고 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삶에는 변화도 없고 열매도 없기 마련이다. 복음은 모든 것이 뿌리째 뽑히고 무너져 내리며 파멸하고 파괴되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자기 고집과 자기 세력과 자기의 애착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그는 뿌리째 뽑지 못한 애착으로 인해 자기 길을 가야만 했다. 주님은 뿌리째 뽑히지 않은 곳에 새로운 것을 심지 않으며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에 새 것을 세우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는 뿌리째 뽑는 일과 무너뜨리는 일, 파멸하는 일, 파괴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뿌리째 뽑아라(렘1:10). 뿌리째 뽑는다는 말은 다시 그것의 잔재가 남아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만큼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조금의 긍휼과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거기 거하는 이방인들을 그렇게 다루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훗날 그들에게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었다(민33:55, 삿2:2-3). 어떤 뿌리는 남아서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사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그 뿌리를 남겨두게 되면 무서운 쓴 뿌리가 된다. 쓴 뿌리는 숨어 있다가 적당한 환경만 만나면 다시 거세게 일어나 온 밭을 더럽힌다(히12:15)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뿌리째 뽑아야 한다. 주님이 하시려는 심판은 가지치기가 아니라 온전히 뽑아내는 것이다. 우리 개인이나 교회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엄중하게 뿌리째 뽑하내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하신 것은 뿌리째 뽑힐 터이니”(마15:13) 2) 무너뜨리라(렘1:10). 하나님의 종이 무너뜨리는 일을 한다? 아마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자. 주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거리나 시간 상으로도 충분히 살리실 수 있는 분이 나사로가 죽기까지 움직이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래야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 주님은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죽지 않고 다시 살지 않는다. 무너뜨리지 않고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픔과 눈물과 괴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철저히 무너뜨려야만 한다. 그 웅장한 성전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마24:2)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심판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전도자는 이것을 잘 알았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무너뜨릴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3:3) 3) 파멸하라(렘1:10) 하나님께서 시간을 많이 주셨다. 하지만 그래도 돌이키지 않은 것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유다는 파멸했다. 그들은 70년 동안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성전도 잃고, 절기도 잃고, 왕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이교도의 나라에서 어둡게 살아가야 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날, 예루살렘을 등지고 끌려가는 날, 그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 개인이나 교회에도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주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주님께서 내버려두실 수 있다. 그리고 내버려둠을 당한다면 파멸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이것을 교회에게 적용한다면 사역자는 떠나게 하시고 성도들은 흩어지게 하신다. 무서운 일이다. 4) 파괴하라(렘1:10) 자랑하던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은 파괴되어질 것이다.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사람을 가리켜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 또는 처치 빌더(church builder)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했던 일이 이와 같은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냥 되지는 않는다. 세우고 심기 전에 먼저 뿌리째 뽑아야 하는 것, 무너뜨리는 것, 파멸하며 파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예레미야가 파괴하는 말씀을 선포하며 파괴하는 행위들을 할 때,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어떤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반대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와 충돌했다(렘26장). 거짓 대언자들도 예레미야의 하는 일들에 대해서 반대했다(27-29장). 그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했던 사람들은 거짓 대언자들의 속임수에 빠져 평안을 믿고 따라갔다(렘6:13). 5) 세우라(렘1:10) 하나님께서 세우시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이며 왕국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돌이키심이 없다(롬11:29). 어떤 반대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고 있는 어리석음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식을 낳는다고 했을 때, 사라는 웃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웃음으로 그것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사라........하지만 그런 사라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얼마나 큰 긍휼과 사랑과 격려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려는 위대한 계획이 포기되어지지 않는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었던 약속도 결코 헛되지 않는다. 교회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간다. 떠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빠질 때 교회가 안될 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심어라(렘1:10) 만일 뿌리째 뽑혔다면, 무너뜨렸다면, 파멸하고 파괴했다면, 이제는 심어야 한다. “주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씨를 심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토양의 상태다. 가시덤불을 제거해야만 한다. 악기 연주를 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할 일은 튜닝이다. 줄이 맞지 않은 기타는 아무리 쳐도 소음이다. 왜 줄을 퉁기지 않느냐고 묻는 것처럼 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형제 사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형제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하모니는 교리적 일치, 정체성의 일치,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하모니이다. 적용과 맺는 말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 이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취미생활정도나 어떤 클럽활동의 회원이 된 것처럼 여기는 교인들이 있다. 이것은 소명을 망각하는 것이고 그 끝이 선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려 하신다. 그것은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또 그것은 세우고 심는 일이다.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순종하며 가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하신다. 오해와 원망과 불편한 시선과 노기에 가득찬 눈빛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명에 대한 신실함 뿐이다. 세상은 어떤 것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또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세우고 심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몫이다. ============================================================== 5. 소명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렘1:6-8)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명받은 자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나는 아이이니이다. 하지 말라(렘1:6-7). 하나님으로부터 큰 소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렘1:6)라고 대답했다. 이 표현은 경험이 없다든지, 능숙하지 못하다든지, 무언가 한계와 제약을 갖고 있으며 미숙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아이이니이다, 하지 말고.......”(렘1:7)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런 능숙하지 못한 점들, 한계, 제약, 어려움들이 소명 받은 사람이 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우리의 나이가 문제가 된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많거나를 이유로 삼아 힘들다고 대답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에 대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던 스펄젼이나 70세에 복음전도자로 헌신한 죠지 뮬러를 생각해본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소명만 분명하다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을 이유로 삼아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말에 능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뒤로 빼고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윌리암 캐리를 하나님께서 인도 선교를 위해 사용하신 것을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펄젼 자신도 신학교를 나온 경험이 없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회당에서 말할 때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행3:13-14). 제자들이 배우지 못한 것을 아는데 너무도 유창하게 변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모든 어려움과 모자람과 방해를 초월한다. 장애와 문제들을 걱정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레미야는 이것저것, 자기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이유로 해서 그 소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모세의 경우도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그는 소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출4:10) 그러나 이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나 주가 아니냐? ”(출4:11).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러한 상태의 모세라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소명은 그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엘 무디가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줄은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조사의 사용이나 말투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에 의해 무려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말을 잘 못한다든지, 배움에 부족하다든지, 가난하다든지 하는 것들은 소명에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바울의 연설을 듣고서 “그의 말이 형편없다.”라고 했다(고후10:10). 그가 남긴 글들은 대단하지만 그의 연설이나 말은 별로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은 그런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늘날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자기의 머리를 굴려서 교회를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소명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마치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과 일치하는 방법 안에서의 소명이라면 그는 어떤 장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되어진 소명은 “나는 아이이니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삼상3:9중)라고 해야 한다. 겸손은 부르심에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한다고 빼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은 자기의 약함을 초월해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에 못한다고 빼서 사람들에게 겸손해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겸손이 되는 것이다. 2. 내가 너를 보낼 모든 자에게 너는 가라.(렘1:7) 예레미야는 소명을 통해 보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가 갈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한 그 대상에게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가서 전해야만 한다.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해주어야 한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거기에는 다가가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것은 소명 받은 자에게 권위가 있다는 뜻이다. 이 권위는 모든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 예를 들어보자. 비록 노예였지만 보디발의 눈에 들었던 요셉은 보디발로부터 가정 총무로서의 직무를 맡도록 소명 받았다. 그리고 이 소명은 보디발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파라오의 반지를 끼고 영예로운 총리로서 이집트를 호령할 때, 그를 거역하는 것은 이집트 왕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소명에 의해 총리가 된 요셉을 모든 이집트 사람은 따라야 했으며 요셉은 파라오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은 일꾼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도 보여준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은 목사는 성도들에게 함부로 하거나 무례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소명을 주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을 느끼며 그 목회자의 다스림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를 존중해야만 한다. 예레미야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말 못할 대상은 없었다. 왕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백성들의 어른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또는 어떤 나라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역시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지금 그 자신을 아이처럼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까지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소명을 받은 자는 들어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소명을 받은 자는 포고령을 읽는 자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전하는 것이 소명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것이다. 3.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렘1:8) 소명 받은 자는 각오해야 한다. 그가 하는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그가 하는 말들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어떤 사람은 소명대로 일하는 사람에게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어디 너 잘 되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즐겁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얼굴이 아니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있다. 못마땅한 표정과 기분 내키지 않는 표정의 얼굴을 하고 소명 받은 자 앞에 설 수도 있다. 뭔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가? 잔뜩 긴장한 표정........이해가 안된다는 표정, 왜 그래야 되느냐는 식의 표정........여러 얼굴들이 소명 받은 자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소명 받은 자는 그 모든 얼굴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상처받는 얼굴들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상처받은 사람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다루어야 할 일도 덮어두기로 했고, 말해야 할 것도 참기로 했고, 해야 할 일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것이 교회를 위해 좋은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아마 예레미야에게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신상에도 좋으며 마음이 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회개했다. 주님께서는 소명을 받은 자에게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렘1:7)고 하신다. 마틴은 목사이고 고메즈는 선교사였다. 두 사람은 서로 함께 기도하는 친구지간이었다. 마틴은 새 사역지로 부임해 갔다. 그는 이것저것을 살핀 후에 새롭게 간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있었던 교회의 집사들이 그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마틴은 고민에 빠져서 기도하였고 이 문제를 고메즈에게 편지로 알렸다. 고메즈는 걱정에 빠진 그 마틴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첫째, 만일 자네가 걱정을 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열심히 걱정을 하게나. 그러나 걱정을 해서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일이라면 걱정을 중단하게. 오히려 걱정대신 자네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게. 둘째, 자네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는 일이라면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세. 자네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자네에게 올무가 될 걸세.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가 하나님의 편에 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골리앗 앞에 있었던 다윗에게 주신 결말을 생각하게........함께 기도하겠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에는 하나님의 보호 하심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적용할 문제들 그리스도인 진영에는 특별한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 교회 세우는 사람(Church Planter or Church Builder), 교사......등등.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목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렇게 해서 된 목사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온 소명,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만이 참되게 사역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소명받은 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것과 같은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아이(나이 어림)라는 한계처럼 소명자들에게는 여러가지 한계와 부족함들이 있다. 그러나 살인자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가 전한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처럼(살전2:13) 소명받은 자들을 존중하는 영적 분위기가 교회와 그리스도인 진영에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삶으로의 소명이 있다(엡4:1, 4, 13, 빌3:14). 거룩한 삶의 추구를 방해하는 여러가지 것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불충할 필요가 없다.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와 보호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받은 이 부르심을 방해하려는 어떤 노력과 유혹과 세력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며 권위를 주시고 함께 하심으로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들로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1:6) 오늘날 사역자들이 자기의 소명을 소홀히 다루는 것은 큰 죄다. 유대인들이 멸망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왕으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대언자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백성의 장로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조력자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더해지게 하셨는지, 그때의 소명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명을 잃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 6. 소명받은 대언자 예레미야(렘1:1-5) 1. 예레미야는 누구인가?(렘1:1) 예레미야는 본래 제사장 중에 하나이다(렘1:1). 그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이미 배워온 사람이다. 2. 예레미야의 활동시기(렘1:2-3) A. 왕국이 버림받는 시기에 활동한 사람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대 13년부터 예루살렘이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렘1:2) 활동했다고 알려준다. 이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해가는 때다. 요시야가 신앙부흥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대하 34,35장).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보수하며 절기를 지키도록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미 유다의 죄는 너무나 컸다.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에는 아주 심각하게 타락의 길로 달려왔던 것이다. 요시야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석달을 통치했다. 하지만 이집트 왕이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때 유대왕국은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집트인들이 세운 여호야김은 11년을 통치하다가 마침내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요시야의 손자이자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통치하게 되었다. 나이가 8살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은 석달 열흘, 곧 백일을 통치하고서는 느브갓네살이 보낸 군대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다시 요시야의 손자이자 여호야긴의 형님인 시드기야를 세워 통치하게 했다. 그때 유대왕국은 바빌론의 영향 아래 있었다. 시드기야는 11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해도 시드기야는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대하36:11-12). 느브갓네살을 배반하므로서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가 끌려갈 때 유다 왕국은 끝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가 그렇게 외쳤지만 왕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백성들은 타락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그 땅이 자기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셨다(대하36:21). 비록 隔痼?한 민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개인에게나 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한 개인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서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 악으로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잘못나가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은 권면하시는 것, 책망하시는 것,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렘2:30)에 대한 주님의 태도는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연합하였으니 그를 내버려둘지니라.”(호4:17). 하나님은 권면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책망하신다. 책망도 소용이 없으면 징계하신다.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버려두신다. 내버려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것은 사탄이다. 때문에 그런 자들을 가리켜 사탄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것이다.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은 구원을 받겠지만 사탄에게 넘겨진 육체는 멸하게 될 것이다(고전5:5). 육체가 멸하여진다는 것은 더 이상 주님을 위해 살아갈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B.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에 활동한 사람 유다왕조의 멸망은 성전의 무너져 내림으로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성전(고전3:16, 6:19)이라면 그것이 더럽고 온전하지 않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권고하심과 책망,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몸을 멸하실 수밖에 없다. 질병이나 죽음이 그에게 엄습할 것이고 그는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의 삶을 끝내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지만 외면하고 거절하고 불순종하면, 마침내는 무너져 내리는 성전처럼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수없이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그 모임들이 지금은 그 지역에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만일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에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게 된다면 구약의 이 같은 일들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게 이런 유대의 멸망은 거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고전10:6,11). 3.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택하심(렘1:4-5)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려고 구별하셨다. 주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너를 뱃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렘1:5)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을 구별하신 것과 비슷하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소명에 대해 “.......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갈1:15)라고 말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모태에서부터 준비되었다. 나아가 뱃속에 짓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소명이 철저히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나 바울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나가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두었던(구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바리새인으로 충실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실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을 듣게 되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대언자로 세우셨다(렘1:5). 목회를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나 전임사역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 그 일은 필요한 것인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주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소명이 없는 경우는 자기 이름을 내놓는 것이며 자기의 일로 끝나는 것이다. 특히 이 소명에 있어서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1:4)라고 했던 것을 보자.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나는 때때로 여자 목사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교회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로 부르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스스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주님은 바울의 입을 통해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2)라고 했으며 고린도 교회에게 주님의 뜻을 주실 때에는 “너희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34)라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떠드는 어떤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게 그 말씀으로부터 온다. ============================================================== < 부르심과 확신 >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무책임하다고 할까?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교차하면서 나는 정작 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는 마음 쓰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게 주시려는 일에도 확신이 없었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내야 했던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면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 언제고 부르심이 있을 때,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세리 마태도 세관을 버렸고(마9:9), 그물 깁던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다(마4:21,22). 그들 모두에게 그 일거리들은 이제까지 해왔던 중요한 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현재 하던 일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향한 체면이나 입장, 그런 것들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떤 부자청년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붙잡지 않으셨다(마10:21,22).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으로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누가 제의했기 때문도 아니고 누가 좋다고 얘기했기 때문도 아니라 그 일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려는 일인가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세관의 후임자를 구하거나 아버지를 도와 그물 깁는 사람들을 뽑아놓고 가거나........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주님은 더 멀리 가셔서 또 다른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그 일을 주님으로부터 나로 하여금 하도록 허락된 일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가는 것이며 그런 확신이 없다면 아예 깨끗하게 잊는 것이 상책이다. 확신 없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며 확신이 있을 때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강한 확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가야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다. by 魚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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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7
에즈워즈의 신학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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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8
설교자를 위한 100가지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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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5
목사의 권위
음성 독립침례교회(변경 : 음성 성경침례교회) http://www.usbbc.org 김희택목사 목사의 권위 1000년 동안 계속된 중세유럽의 암흑기는 교회와 교황이 하나님의 대리자 노릇을 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교회가 종교재판의 이름 아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원리와 정반대로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중세교회의 폭정은 보이는 지상 교회가 신의 이름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를 때 나타날 수 있는 불행과 비극이었다. 이를 방지하려고 하나님은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 국가와 교회를 서로 분리시켰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교회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무교(巫敎:무속종교, 무속신앙)는 오랫동안 한국인들 사이 뿌리 깊이 내린 전통 종교이다. 우리가 알듯이 무당은 신의 대리자로 취급되며 그 존재 자체가 신성시된다. 백성은 그를 신처럼 섬기며 어떤 말을 해도 순종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대리자 위치에 있음으로 인해서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당이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신의 이름으로 백성을 겁을 주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절대 권력이 존재하는 사회와 정치보다 더 무서운 종교의 이름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무당이 지배하는 사회가 후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목사는 무당과 달라야 이런 문제는 한국의 제도화된 개신교에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절대 권력을 가진 무당처럼 신자들 앞에서 처신하려고 한다. 그리고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베여 목회자는 신자들의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이 위에 세상의 성공 철학에 물들어 자신의 목회 길에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종의 이름을 빙자하여 신자들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이런 사고들은 한국 목회자들에게 한 가지 유혹을 준다. “목회자에게 도전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라고 강대상에서 신자들에게 자주 설교하고 싶어진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한국 신자들도 어릴 때부터 무교의 영향을 받아 이런 목회자들에게 신비한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하며 맹종하여 잘 따른다. 그 결과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며 거칠게 설교하는 교회에 의외로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기이한 그러나 비정상적인 현상이 제도화된 한국교회에 자주 목격된다. 문제의 목회자일수록 무당 같아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목회자들 중 간음죄를 비롯한 심증이 가는 죄를 지은 목사일수록 신성불가침의 종교적 권위를 아주 강하게 강대상에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자신의 죄로 인해 떨어진 영적 권위를 어찌하든지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는 내용의 설교를 자주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이 서슴없이 성경을 인용한다. 간음죄를 범한 다윗이 여전히 왕이란 통치자의 신분을 잃지 않았으며(삼하 12:1~12)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 왕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았음을 예로 말한다(삼상 24:2~7, 26:7~12). 더 나아가 이런 목회자들은 계속 자신을 반대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을 인용하며 교인들에게 위협한다. 그 예로 대머리 엘리사를 든다. 엘리사가 대머리라고 조롱한 아이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왕하 2:23~24). 이와 비슷한 예로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비난하여 저주 받은 함과 가나안(창 9:20~27)도 이들은 말한다. 결국 이런 인용들을 통해 이들 목회자들은 자신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며 사퇴를 요구하면 안 되고 그리고 계속 그렇게 자신에게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한다고 강대상에서 공공연히 말한다. 이렇게 되면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은 무교의 영향으로 인해 교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들 목회자들은 서슴없이 절대 권력을 가진 무당이 되고자 한다. 구약의 인물들은 전적으로 무당과 달라 그러나 이들 목회자들의 주장은 신학상 큰 잘못이며 모순이다. 구약시대 족장들이나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 목회자는 그런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약의 족장들과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의 사례를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런 신학적인 의미는 이미 2000년 전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받은 저주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출애굽사건 이전 창세기의 족장들은 메시아의 조상들로 자신의 집안에서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 같은 권위를 갖는 존재였다. 이 점에서 족장을 향한 순종은 부모 공경이란 도덕적 의미와 아울러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러므로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윤리를 어겼으므로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다윗의 간음죄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의 간음죄는 다윗이 참 메시아가 아닌 예표의 인물임을 구약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구약 성도들이 다윗이 아닌 앞으로 오실 참 메시아만을 더욱 소망하도록 조치했다(겔 37:24~25). 사울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 왕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인 하나님에 의해 직접 세움을 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환경을 통해 나타나 사울 왕이 폐해지기까지 다윗은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함부로 사울 왕을 비난하지 않았고 죽일 기회를 얻어도 그를 찌르지 않았다.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그도 역시 선지자로 앞으로 올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점에서 그에게 도전하고 조롱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그를 세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행위였고 동시에 앞으로 올 메시아를 비웃는 불경건한 죄에 속했다. 당연히 이 값은 하나님의 저주밖에 없었다. 엘리사 시대 하나님의 이런 저주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었다면, 신약시대부터 이 죄값은 뒤로 미루어졌을 뿐이다. 목회자들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와 달라 그럼 자신을 구약의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이들 목회자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이들은 자신을 메시아 같은 존재로 취급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오르려는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다.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이들 목회자들은 부활주가 주인인 교회에서 지체(고전 12:11~12)가 아닌 예수님을 대신한 주인 노릇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섬기는 자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의 지위를 찬탈하고 절대 권력을 가진 왕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때로 목회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미 잘 아는 바처럼 목회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교회란 몸의 한 지체에 지나지 않으며 몸을 섬겨야 할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다윗이나 사울 그리고 엘리사의 경우와 아주 다르다. 이들에 대한 순종은 메시아에 대한 순종이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목회자에 대한 순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준하여 목회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는 목회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목회자들이 하나님 말씀과 일반 상식에서 벗어난 말과 행위를 한다면, 교인들은 이들 목회자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달리 말과 행동에서 모순과 오류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도들과 달리 강대상에서 반드시 오류 없이 말씀을 선포하지 못한다. 그리고 목회자의 말과 행위에서 불완전함을 보인다. 즉 목회자들이 주의 종이라 할지라도 성경과 일반 상식에 항상 합당한 행위를 하지 못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실수와 잘못 그리고 실행(失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해를 준다면 신자들은 목회자에게 불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신자들은 불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 주님은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을 세웠고, 전체 회중회의를 교회 안에 조직하게 하셨다. 이 때문에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과 부활주인 예수님은 교회의 제직들을 직접 불러 세우지 않고 보이는 지상 교회의 조직을 통해 공적으로 불러 세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회의 권위 아래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고 사명을 준 사도들과 전혀 다르다. 즉 목회자들은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며 교회를 해쳐선 안 된다. 목회자의 실행(失行)은 교회의 회중회의나 그를 파송한 교회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무당 같은 목회자는 겸손치 못해 그러나 일부 한국 목회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무당 같은 존재로 취급하며 겸손을 모른다. 이들은 자신의 거취 문제는 기도 중 하나님의 응답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처음 교회의 외적이며 공적인 부름으로 목회자가 된 것을 잊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세움을 받은 사도나 선지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교인들에게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의 처신은 교회라는 자신의 몸을 세우고 그 몸의 우두머리인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고 모독하는 행위에 속한다. 이런 모습은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목회자 또는 소위 카리스마가 넘치는 목회자에게 자주 보인다. 이들은 스스로 무당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이들의 또 다른 잘못은 무엇인가? 이들은 무당처럼 하나님께 직접 물어 기도 응답을 받겠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세우고 통치하시는 교회를 무시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에 해를 끼치고도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하여 묻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가 아들을 거슬리며 이들 목회자의 기도에 응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렇게 이들 목회자들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를 또한 보호하시고 성령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위해 일하신다. 이 점에서 삼위 하나님 사이 절대로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행(失行)이나 잘못이 교회에 해가 된다면 목회자들은 자기주장을 삼가고 거취 문제를 교회에 맡기고 겸손히 교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참 경건이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도화된 한국 교회 내에서 자신을 무당 취급하는 목회자의 잘못이 무엇임을 생각했다. 특히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켜도 겸손치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옹호함으로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큰 죄를 짓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의 피 값을 지불하여 산 교회를 이들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조직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 영광을 더 탐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존재들이다(요 5:44). 이 지상에서 지금 이들은 한동안 억지를 부려가며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얼마나 큰 수치와 멸시를 당할 것인가! (장창수님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와 같이 제도화된 한국교회의 무당 같은 목회자가 나와서는 절대로 안된다. 성경적 목회자는 신약성경의 로마서로부터 빌레몬서까지의 바울 서신을 통하여 계시된 가르침을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보다 우위에 두어 바른 교리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아 신약교회의 교리에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한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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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부르심(calling) - (히3:1)
부르심(calling) 윤 성목목사 말씀: 히3:1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줄 때 나는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무의미하겠습니까? 여기에 착념하여 인식론이 나왔습니다.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존재의 범위만큼 그 사람의 인생의 폭과 깊이와 풍요로움이 결정 납니다. 여러분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저기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면 답답합니다. 어떤 이는 회사의 고문 변호사를 부르고, 어떤 이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부를 것입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복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긴급 상황에 경찰이나 소방서나 친구를 부르기 전에, 고문 변호사나 주치의를 부르기 전에 우리는 주님을 부릅니다.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주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여러분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떤 모델 지망생은 유명한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명함을 주면서 언제 한번 찾아오라고 하면 황홀해 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 그는 마냥 행복합니다. 구직자에게 어떤 회사의 사장이 불러 준다면 그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감독의 부름을 기다리는 대기석의 후보 선수들을 보십시오. 담당 PD의 눈에 들기 위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다리는 연기자들도 있습니다. 누구의 부름을 받는가? 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고 언제든지, 어디서나 급하면 급한 대로 전화를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부재중이신 적이 없습니다. 전화를 걸면 언제나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Call unto me. 내게 전화해라고 하십니다. 셀룰러 폰이 아니라 기도의 전화입니다.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예레미야 33:3입니다. 번호를 외우기가 너무 쉽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은 Answering Machine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받으십니다. 언제든지 들으십니다. 부르시면 응답하십니다. [그가 나를 부르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고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5). 크게 불러 보십시오. 주님께서 크게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에 계십니다. [너희는 만날 만한 때에 [주]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그가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가를 통해 우리의 삶의 질도 결정 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부르며 삽니까? 위기의 때에는 물론이고 매 순간 도움을 구하고, 조언을 구하고, 선택의 순간에 지혜를 구할 그런 분이 있습니까? 엘리야는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 하니 온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옳은 말씀이니이다, 하니라.](왕상18:24). 누구를 부르는가? 부르심에 응답하는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확실히 부를 수 있는 그분, 나를 구원하실 분을 부르십시오. [나로 말하건대 나는 하나님을 부르리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55:16). 주님은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토록 그분을 부르리로다.](시116:2). 부모와 원수처럼 지내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렀을 때 즉시 와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부를 때 응답해 주지 않을 때 관계성이 멀어지고, 깨어집니다. 부르면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라면 그것은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누군가 나를 불러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존재에 대한 가치는 누가 나를 불러 줄 때 빛을 발할 것입니다. 누가 나를 불러 주는가?에 따라 나의 존재 가치는 달라집니다. 매일 내게 오는 전화라고는 외판원 아니면 Congratulation...! 해대는 업체들이라면 전화기를 꺼 놓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러 주는 대상에 따라 존재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느껴 질 것입니다. 왕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신하가 있고, 사장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샐러리맨들이 있고, 시상식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어떤 때는 달갑지 않는 부름도 있을 것입니다. 군대로 오라는 국가의 부름,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고지서, 법원으로 오라는 판사의 부름은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나를 기쁘게 하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니라.](롬1:6).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면 그것은 부른 자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가나안 족속의 왕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분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국가의 부름을 받거나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도 가문의 영광이라 하고, 명예롭게 생각하는 판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은 비교할 수 없는 영예요,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첫째, 우리의 부르심은 하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이 땅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부름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만 ‘사울아, 사울아’하고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성도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땅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의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로되](딤후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부르심이란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살전4:7).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1:15). 셋째, 우리의 부르심은 높은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빌3:14). 주님의 부르심을 입지 않으면 아무도 존귀와 영광을 취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상이 있습니다. 높은 부르심의 상이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받게 될 다섯 가지 상을 말합니다. (*왕관들 참조- 썩지 아니할 왕관/고전9:25, 환희의 왕관/살전2:19, 의의 왕관/딤후4:8, 생명의 왕관/약1:12, 계2:10, 영광의 왕관/벧전5:4). 부르심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는 것은 높은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주 대열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되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취할 수 있느니라.](히5:4).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이나 누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 주는 것 등이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제사장의 직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면 결코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녁에 이곳에서 2시간 정도 말씀과 기도 사역을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피곤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아무나 합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T.V나 보고 잡지나 뒤적이고 컴퓨터로 인터넷이나 돌다가 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불러도 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을 내는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불러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불러도 못들은 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달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왜 부름을 받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주님은 자신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니께서는 고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제자로의 부르심을 말합니다. 둘째, 복을 상속 받기 위해서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반대로 축복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기 위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마음, 성령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복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셋째, 영원한 상속을 위해서.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성도들은 모두 언약의 상속자들입니다. 유업의 상속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약속하신 것들을 모두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늘의 맨션들이나 영광스런 새 몸, 천년 왕국의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통치 등이 모두 우리가 받을 상속들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롬8:17).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넷째,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8~29).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아무 쓸모없는 여러분과 나를 부르셨습니다. 뭔가 불러 줄 만한 것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근거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로되](딤후1:9).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거부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니 이는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니라.](마20:16).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우리는 택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택함 받은 세대입니다(벧전2:9). [이는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니라.](마22:14). 주님의 부르심에 응했다면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갇힌 자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며](엡4:1). 이제 우리는 부르심의 상을 쫓아 달려갑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잠시 후면 다시 나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설렘으로 나의 이름이 저 하늘에서 울려 퍼지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힘차게 달려갑시다. ☜ 암송할 말씀: 히3:1, 딤후1:9 ☜ 생각해 볼 문제: - 부르심의 종류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 말해 보시오. -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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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하나님의 마음,하나님의 사람,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마음,하나님의 사람,하나님의 방법 일산 갈보리침례교회 겉 보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한 특별한 것 이 없어 보였다. "오! 다윗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다.다윗은 그 연배의 다른 유대 소년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사무엘 은 단지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고만 말했다. 이것이 다윗의 외모에 관하여 묘사된 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그가 잘 생기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으며,안색이 건강해 보였다는 것을 안다. 그는 아마 빨간 머리였거나,아니면 더 가능성이 있는 추론은 그가 바깥 햇빛이 쬐고 바람이 부는 데서 지냈으므로 피부빛 이 붉거나 구릿빛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어쩃든 다윗의 외모는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목동에 불과 하였으며 ,그것도 아주 어린 목동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는 내가 기뻐하는 요소들,내가 찾는 자질을 갖고 있다.장차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이었다. 만약 우리가 유대 땅 구릉 지역에 있었던 다윗의 집 옆 농가에 살았었다면 이새의 막내 아들의 이름을 몰랐을지도 모른다.심지 어 그의아버지도 사무엘이 "다른 아들은 없는가?"라고 묻기 전에 는 다윗을 사무엘에게 선보일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사무엘 이 묻고 나서야 이새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아,막내가 있었군 요.걔를 잊고 있었는데... 그 애는 지금 양을 치느라 들판에 나 가 있었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가서 그를 데려오라."사무엘이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이 소년,심지어 그의 아버 지조차 잊고 있었던 소년이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다윗에 대해 알아보기 전 에,우리는 그가 살았던 세계를 잘 알기 위해 약 40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배경과 역사에 대해 대강 알아볼 필요가 있다. 프레더릭 오웬은 그의 책 아브라함으로부터 중동의 위기에 이르 기까지에서 그 옛날 시대를 한 문장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사람 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1 다윗은 그런 세상에 태어났 던 것이다. 대제사장 엘리와 그의 악한 아들들은 죽었다.하니님이 선택하 신 엘리의 후계자,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나이가 들었다.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강대국이었을 때와 사무엘이 자기 생애의 절정에서 블 레셋을 굴복시키고 가나안 땅을 지혜롭게 잘 다스리던 때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그것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들어서 알 뿐이었다. 그들이 확실하게 아는 것은 단지 사무렐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 과 그가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성경이 그에 대해 무엇을 말 하는지 잘 보라. 사무엘이 늙으매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삼으니 이제 그의 맏아들의 이름은 요 엘이요,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재판관이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길로 걷 지 아니하고 옆으로 돌이켜 이익을 추구하 며 뇌물을 취하고 재판을 굽게 하니라.(삼상8:1-3) 그래서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고 무언가 이대로는 단 된다고 생 각했다.그들이 내심 원한 것은 왕을 세우는 것이었다. 사실,사무엘의 아들들이 제멋대로였다고 해서 그것이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이스라엘의 장로 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정도 떨어진 구릉 지역에 있] 는 라마에서 사무엘과 일종의 정상 회담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사무엘이여,우리가 왕을 원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당신이 늙었다는 것이고,둘째는 ,당신의 아들들이 당신이 행했던 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셋째는,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그러니 다른 모든 나라들의 경 우처럼 우리를 다스릴 한 왕을 세워 주십시오"(삼상8:5참조). 사울:사람들이 선택한 자 사람들은 항상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기를 원하고,사람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것을 하기 원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 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진력이 났습니다.모 든 사람들이 '너희의 왕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그러면 우 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으응,우리 왕응 하늘에 계셔.' 사무 엘이여,우리는 여기 이 땅에 있는 지도자를 원합니다.우리는 다 른 모든 나라들과 같기를 원합니다.블레셋 족속과 모압 족속과 그 리고 다른 모든 나라들을 보세요.그들은 모두 왕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그들 모두와 같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까 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이것이 사무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고 그래서 그는 그 일을 가지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백성이 네게 말한 모든 것에서 그들의 음성에 귀 를 기울이라.이는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니라. 내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이 날까지 그들이 행한 모든 행위 에 따라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 을 섬긴 것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8:7-9)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했던 바를 정확하게 그대로 갖게 하 셨다.그분은 늘 그러시는 분이다! 그들이 선택한 자인 사울은 키가 크고 구릿빛 피부에 잘생긴 사 람이었다.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 왕으로 선택한다.그들은 멋지 게 보이는 사람을 찾았. "야,이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대표 할 멋진 이미지를 창출할 사람이 아닌가! 사울이 바로 우리가 찾던 사람이다." 그래서 사울은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 금 넋을 잃게 만들었다.처음에 그는 어느 정도 겸손한 태도를 가 지고 있었고 어떤 대의명분 아래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듯했 다.사울은 군대를 불러모을 수 있는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 고,머지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야말로 우리의 왕이 되기에 적격인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한 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사울이 통치하 기 시작했을 때 나이가 40세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그는 성마 르고,화를 잘 내며,주기적으로 우울증에 빠져,심지어 살인할 생 각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다.사람들이 선택한 사람이란 겨우 그 정도인 것이다. 다윗은 사울이 욍이 된 지 약 십 년 후에 태어났다.불안정한 시 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고,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자기들이 선택했던 지도자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렇지 만 당신의 왕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 가?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살지만 그것이 모두 잘못될 적에 당신 은 어떻게 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환멸스럽고 불안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당신은 정확한 이유를 규명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다.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개입하신다. 다윗:주가 선택한 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왕이 어리 석게 행하였오다.왕이 주 왕의 하나님께 서 왕에게 명령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이제 주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왕국을 영원히 세우려 하셨을 터이나 이제 왕의 왕국이 지속되지 못할 것 이라.주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자신의 마 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에게 명령하 사 자신의 백성의 대장을 삼으셨도다,하 고(삼상13:13-14) 14절에 있는 두 음절짜리 짧은 한 단어를 보라-사람,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셨다.단지 한 사람..... 그러나 그 사람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었는가! 성경의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다윗에 대해 기록된 것이 더 분량 이 많다는 것을 알면 놀라겠는가? 아브라함의 삶을 묘사하는 데 성경에서 14장이 할당되었다.요셉도 그렇다.야곱에 대해 기록된 것은 11장이다.엘리야에게는 10장이 할당되었다.그런데 다윗에 게는 몇 장이 할당되었는지 짐작이 가는가? 내 계산이 맞다면 무 려 66장인데,그것은 신약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약 59개 부 분을 제외한 것이다. 성경에서 다윗에 관해 얼마나 많은 것이 언급되었는지 알게 되 고,게다가 두 번은 그가"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특별 히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당신은 다윗이 어떤 초월적인 놀라운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놀라운 영웅적인 인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하나님이 왜 다윗을 선택하셨는지-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는지 그 문제에 관해서-나는 당신이 잘못된 개념 을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그래서 우리가 다윗이라는 인물으 매력 적인 생을 살펴보기 전에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시는가? 혹은 아마 이 질문은 다음 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가?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약 고린도전서의 몇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여 기서의 문맥은 여러 다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보느냐와 관계가 있다.바울의 편지를 읽은 수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유대 인이었는데,그들은 기적,즉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해 주 는 표적을 찾는 사람들이었다.그 편지의 수신자 중 일부는 헬라인 들이었는데 그들은 단지 외관적인 인상만 보는 사람들이었다.그 사람의 내면의 삶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그 당시의 헬 라인들은 지능(brain)과 근육(brawn)과 미모(beauty)에만 마음 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고린도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의 첫번째 편지 첫 장에서 바울이 뜻하는 요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나는 똑똑함이나 인간의 지혜로 여러분을 대하거나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인상적인 신체적 외모를 내세우는 것도 분명코 아닙니다.대신,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 러분에게 나아갑니다.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분명한 이유가 있습 니다." 바울이 한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보기 바란다. 형제들아,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 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 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 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바울은 말한다."고린도의 성도들이여,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당신들 중에 이렇다 할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 런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이 것은 우리가 잊기 쉬운 원리이다.왜냐하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 은 여전히 헬라인들 같기 때문이다.우리가 존경할 사람이나.우리 가 본받을 사람,혹은 우리의 영웅을 찾을 때,우리는 종종 사람들 의 자랑할 만한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움직인다.우리는 멋있 는 사람,똑똑한 사람,"성공적인 사람"을 원한다.우리는 최상의 것,근사한 것을 원한다.우리는 외적인 것에 너무 많이 매혹된다. 표면적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에게 대단히 영향을 끼친다.심지어 우리는 어떤 후보자가 텔레지전에서 멋지게 보이 고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를 대통령으로 뽑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방 식이 아니다.나는 하찮은 사람들을 택해서 그들을 대단한 사람들 로 바꾼다." 그리고 한마디로 말하면,이것이 다윗의 생애 대한 이야이 인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종과 같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우선 자질 하나님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며 온 땅을 두루 살피실 때에,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은 천사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 니다.하나님은 분명 완벽한 인간을 찾으시지 않는다.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하나님은 당신과 나 같은 남자와 여자 들,즉 육신을 입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찾으신다.그러나 하 나님은 동시에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할 어떤 자질들을 찾으 히는데,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찾으셨던 것과 똑같은 자질 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신 첫번째 자질은 영성이었다,"주 께서는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 생각에는,그것은 당신 이 주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됨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 당신에게도 중요한 것이다.하나님 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도 무겁게 해야 된다.하 나님이 "오른쪽으로 가라"하실 때 당신은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다. "네 삶에서 그것을 더 이상 하지 말아라"하실 때 당신은 그것 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하나님이 "이것은 잘못되었다.나는 네가 달라지길 바란다"고 하실 때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 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당신이 매우 영적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일에 민감한 마음을 지 니게 된다. 역대하에 나오는 관련 구절이 이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는 주의 눈이 이리저리 온 땅을 두 루 다니사 완전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향 하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강하심을 보 이시기 때문이니.......(대하16:9)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시는가? 하나님은 그 마음이 전적으로 하 나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남녀를 찾으신다-전적으로. 이 말의 의 미는 마음에 자물쇠가 채워진 골방이 없다는 의미이다.수치스럽 게 생각하여 숨겨 놓은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당신의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즉각 그것을 해결한다는 의미이다.당신은 잘못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며 슬퍼한다.당신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 드는 것들에 대해 우려한다.당신은 당신의 행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갈망한다.당신은 당신의 행위 뒤에 있는 동기 를 중시한다.이것이 참된 영성이며,이것이 다윗이 가진 첫번째 자질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서 보신 두번째 자질은 겸손이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다 스리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어느 때까지 애곡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내가 너를 베들레힘 사람 이새에레도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음이니라,하시니(삼상16:1) 주께서는 영으로 이새의 집에 가셨다.이새는 하나님이 거 기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하나님은 그 집에서 비밀스런 조사 활동 을 하셨고 이새의 막내 아들을 보시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 던 사람이다!"라고 말하신 셈이었다. 왜 그랬을까? 주님께서는 다윗에게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하는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그 소년은 부친의 양떼를 충실 하게 돌보고 있었다.하나님은 그에게서 겸손을 보셨다.종의 마음 을 보신 것이다.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더 확증하기 원한다면 시 편을 보라. 또 그분께서 자신의 종 다윗을 택하 시되 그를 양 우리에서 취하시고(시78:7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내 거룩 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시89:20) 하나님께서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나는 그 모든 교묘한 대중 이미지 조작에 관심이 없다.진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 을 내게 보이라.그러면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이미지를 내가 그 에게 주겠다.나는 어떤 특별한 기질을 요구하지 않는다.나는 그 가 많은 카리스마적 자질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체격이 어떻 든,그의 실적이 어떻든 개의치 않는다.내가 중시하는 것은 인격 이다! 먼저,그 사람이 영적인 삶에 진정 진실한가 혹은 가식적으 로 꾸미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두번째로는,그가 종의 마 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당신이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겸손해진다.당신은 들은대로 행한다.당신은 거역하지 않는다.당신은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한다.당신은 신실하고 조용하게 섬긴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둘러싸고 있는 산기슭의 들판에서 자기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며 충성스럽게 아버 지의 명을 수행하고 잇는 다윗을 보셨고,그를 인정하셨다. 종은 누가 영광을 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다는 것도 또한 우리가 주목할 사항이다. 그것을 기억하기 바란다.종은 하나의 위대한 못 표를 갖고 있는데,그것은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더 멋있게 보이게 하는 것이며,그 사람을 더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다.종은 자기가 섬기는 사람이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종은 누가 영광을 얻게 되든 개의치 않으며 단지 자기가 할 일만 한다. 그래서 다윗의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 중요하고 큰 전투들을 치 를 때 다윗은 혼자 외로이 양을 치고 있었다.그는 종의 마음을 소 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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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목사: 독립교회의 성직 책임자
출처 : 서울 중앙침레교회 목사: 독립교회의 성직 책임자 [성경적인 교리, 교회관을 위한 글] The Bible Baptist Church 목사의 칭호 목사(pastor), 장로(elder), 감독(bishop)은 교회에서 동일한 직분으로 한 사람이 수행하지만, 그 직분 측면은 각각 다르다. 목사는 목회 책임자를 의미하며, 신도에게 설교하고 신도를 육성하며 보호하는 직분을 수행한다. '목사(pastor)'란 단어는 헬라어 포이맨(poimen)에서 유래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16차례나 '목자(shepherd)'로 번역되었다(마 9:36, 25:32, 26:31, 막 6:34, 14:27, 눅 2:8, 15, 18, 20, 요 10:2, 11, 12, 14, 16, 히 13:20). 헬라어 신약성경의 '무리에게 먹인다(행 20:28, 벧전 5:2)'란 구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무리를 친다'란 뜻이 되며, '목사(pastor)'와 '목자(shepherd)'의 어근은 동일하다. 장로(elder)란 말은 교회 지도자의 성숙함과 책임감을 의미하며, 장로는 교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독(bishop)'이란 말은 교회 지도자의 권위를 의미하며, 감독은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감독(bishop)'에 해당하는 헬라어에는 '감독하다(oversee)'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행 20:28, 벧전 5:2). 이러한 용어들이 동일한 교회 업무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다음 용법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디도서 1:5, 7에서는 '장로(elder)'와 '감독(bishop)'이란 용어를 호환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0장에서는 위의 3가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직분에 적용되고 있다. 17절에서는 목회자를 '장로(elder)'라고 했다. 28절에서는 '감독(bishop)'과 '목사(pastor)'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도 이 용어들을 동일한 교회 직분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시편 1장에서는 '장로(elder)'에 대해 언급했지만, 2장에서는 이 장로들을 '감독자(overseer: bishop)'와 '목자(shepherd)'로 표현했다. 이 용어들을 호환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목사는 장로요 감독이다. 그 직분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목사의 소명 다음 성경 시험을 해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목사가 되도록 소명을 내렸는지 확인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목사가 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검토해 볼 수 있다. (1)부르심에 관한 시험(딤전 3:1) 이 구절은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이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는 강렬하면서 의무적인 원함을 말해준다. 바울은 그런 의무성에 대해 고린도전서 9:16에서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라고 했다. 장막(帳幕)을 건축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자들(출 36:2)"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인도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큰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자여야 한다. 이런 원함은 단순한 관심이나 흥미 이상이어야 한다. 정열적이면서도 강렬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 어느 누가 설교 임무나 목회직을 쉽사리 그만둘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런 직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강렬하면서도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는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렘 1)과 사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행 9)에서 볼 수 있다. 요나가 잠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잘못 이해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스펄젼(C.H. Spurgeon)은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 강의실의 어느 학생이 신문사 편집장, 채소상, 농부,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임금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늘과 땅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반면에 동서양의 온갖 재화가 보장되는데도 목회직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임무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지 못하고, 또한 감히 저버리지 못한다면, 그밖의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충분히 이 사도의 직분을 수행할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2)삶에 관한 시험(딤전 3, 딛 1) 부르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의 삶도 역시 신약성경에서 목회직에 관해 요구하고 있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목사, 집사, 전도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일을 하도록 부르고 있다고 믿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장로와 집사의 기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하나님 자신의 기준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이 하나님께서 목사나 집사가 되도록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성경에서는 그 일이 남성의 직분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라고 할지라도 지역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거나, 음주를 즐기거나, 화를 잘 내고 호전적인 기질이거나, 재물을 탐내거나,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친자식 외의 자식을 두거나, 부인을 여러 명씩 둔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사람이 목회직에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전도 직분에 관한 부르심이 목회 직분에 관한 부르심과 반드시 같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고속도로, 샛길, 감옥, 탁아소, 거리 등에서, 또는 버스 안에서나 가정을 방문하면서 전도할 수 있다. 목회자나 집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하기만 하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할 수 있다. (3)능력에 관한 시험(딛 1:9-11, 딤전 3:5, 벧전 5: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는 능력을 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그만한 능력을 주시지 않고는 절대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 하나님께서 모세 시절에 장막(帳幕)을 건축하길 바라셨을 때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켜 주셨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 31:2-3)." 우리는 여기서 특별한 직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주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그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었다. 둘째, 그 부르심은 특정한 일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직무를 완성할 능력이 따르게 된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사용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평범한 기준으로 볼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전도 활동을 하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목회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을 목사가 되도록 부르시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될 사람은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가 잘못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 특정한 교의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양들을 보호하고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 죄나 잘못에 맞설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목회직을 강렬히 원하고 기독교적인 생활을 하며 증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될 수 없다. (4)인증 시험(행 13:1-3, 16:1-3)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특정 전도 임무를 수행하도록 소명을 내리셨을 때에는 교회에서 그 부르심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다. 교회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나 육욕적인 사람이 지배하면서 그릇된 판단을 내릴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정 임무를 수행하도록 소명을 내렸지만, 교회는 그 부르심이나 도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사례도 있다. 사실 성경에 그런 실례가 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영접받지 못했다(요1:11). 바울은 갈리디아 사람들이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영접받지 못했다(갈 4:15-17, 고전 9:1, 고후 6:11-12, 3:1). 요한과 그밖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한 디오드레베에게서 접대받지 못했다(요한삼서 9-10). 그러나 정상적인 성경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개인의 소명과 직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교회 신도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관중들의 판단에 상당한 비중을 두어야 한다. 대체로 그 사람들의 판단에는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호소는 궁극적이지도 않거니와 오류가 없는 것도 아니므로, 자문 상대의 지성과 신앙심에 따라서 평가받아야만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만났던 가운데 가장 거룩한 기독교 부인의 영향을 받아 몹시 낙담하고 설교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필자는 그 부인이 제시한 의견의 가치를 솔직하고 인내심 있게 평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더욱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사 여러분, 학생 여러분은 인간으로서 서로 평가하는 데 있어 좀처럼 잘못이 없다고 하겠다. 전반적으로 살펴보아도 한 형제에 관해 대학 전체의 의견이 잘못되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여러분이 학급에서나, 기도회에서나, 대화 장소에서나 기타 여러 종교 행사장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평가를 하게 된다. 이때 현명한 사람이라면 학교의 판결을 급속히 제쳐놓지는 않을 것이다." (C.H. Spurgeon, 「학생들에게 드리는 강연」) (5)입증 시험(딤전 3:10, 고후 8:22) 성경에서는 교회가 목사안수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안수받을 사람은 안수받은 다음이 아니라 안수에 앞서 열정과 믿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 바꾸어 말하면 디모데는 목회의 직분을 안수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것이다. 디모데전서 5:17-26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안수하는 사람들은 안수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안수받도록 해 주셨음을 확신한다고 공공연하게 입증하는 셈이다. 따라서 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안수하는 사람은 자신을 안수받는 사람과 동일하게 본다. 교회가 성급히 굴거나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잘못 안수받은 사람의 죄에 가담하는 셈이 된다. 목사의 자격 "영원한 교회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좀처럼 취소하지 못하며 가장 암울한 결과를 빚게 된다(R.B.C. Howell)." 하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의 자격을 인간의 사고대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열거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끌 사람에게 언제나 엄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는 예상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에 대한 판단(출 18:21), 레위인에 대한 판단(레 10:8-10), 열왕에 대한 판단(신 17:14-20)에서도 그랬다. 교회 지도자에 대한 주님의 기준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지도자들에 대한 기준보다 더 엄격하다. 교회 지도자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이유 (1)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는 기준이 엄격하다(고후 6:3). 목회자들에게 결점이 있으면 그 신도들과 전체 교회가 명성과 축복을 잃을 것이다. (2)사탄의 행위에 대해서도 기준이 엄격해야 한다(딤전 3:7).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 지도자를 파멸시키려 한다. 목회자에게 결점이 있고 영적이지 못하면 악마의 덫에 빠져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3)성숙함에 대한 요구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신약성경의 기준에 따르면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엄격함을 인식할 수 있다. (4)목사의 행위도 기준이 엄격해야 한다(벧전 5:3, 딤전 4:12, 딛 2:7). 어느 누가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고, 목회자가 될 수 있으며, 무리에 대한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삶은 그 말보다 더 강력하다.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평가할 때에는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C.H. Spurgeon)." (5)목사의 판단 기준도 엄격해야 한다(약 3:1). 인간이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교회 지도자의 직위를 재삼 숙고해야 한다. (6)부르심의 시험에 대한 교회의 요구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소명을 주신 사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7)자기 판단과 수정에 대한 요구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목회자는 안수 뒤에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안수에 앞서서도 자신의 삶에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고 고치려고 해야 한다. (8)거짓 교사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기준이 엄격해야 한다(딛 1:9-11, 딤전 4:1-6). 성경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딤전 4:1-2, 고후 11:13-15),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엡 4:14, 갈 2:4, 롬 16:17-18), 교회에 대해 진정으로 위협이 되며(행 20:27-32, 살전 2:5, 고후 11:1-3), 종말이 될수록 점차 더 위협적으로 된다(딤후 3-4, 벧후 3, 유다서)고 했다. 이처럼 교회에 대해서는 언제나 위험이 존재하므로 목사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합리적이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전세계에 불고 있는 악한 영들의 거짓 교의란 바람에서 견디어 내려면 비상하게 영적인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두고 있어야 한다. 목사에게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자질은 무엇인가? (1)공식적인 성경 교육이나 대학 학위(행 4:13) 사도들은 공식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지도 않았거니와 신학 학위도 받지 않았다. 성경에서도 물론 그런 요구는 하고 있지 않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역량이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신학 학위를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신학자(Scholar)' 참조). (2)감명적인 모습이나 행위(고전 2:3-4, 고후 10:10) (3)재산과 인간관계(행 3:6) (4)뛰어난 언변(고후 10:10, 11:6) (5)뛰어난 천부적 능력(고전 1:26-29) (6)교회 지도자가 갗추어야 할 자격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따라 결점이 없어야지, 인간의 기준과 사고 방식에 따라 결점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1)성실한 인간이어야 한다(딤전 2:12, 3:1). (2)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딤전 3:1). (3)증명받아야 한다(딤전 3:10). (4)딤전 3:2-5, 딛 1:6-8에 열거된 분야에서 결점이 없어야 한다. 곧 아내에 대한 관계에서 결점이 없어야 하고(딛 3:2), 자녀에 대한 관계에서도 결점이 없어야 하며(딤전 3:4, 딛 1:6), 개인 생활에서도 결점이 없어야 한다(딤전 3:2-3, 딛 1:8). (5)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딤전 3:2). (6)사도적인 성경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어야 한다(딛 1:9). (7)거짓 가르침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딛 1:9-11). (8)초심자가 아니어야 한다(딛 3:6). (9)지역사회에서도 명성이 높아야 한다(딤전 3:7). 목사에 대한 교회의 책임 (1)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라(살전 5:12-13). (2)목사의 가르침에 따르라(엡 4:11-12). (3)목사의 본보기를 따르라(히 13:7, 벧전 5:1-3). (4)목사의 감독에 순종하라(히 13:17). 교회 신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목사의 권위에 순종함도 중요하지만, 목사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가르치려 한다면, 신도들은 그 지도자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 지도자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고 하면서도 판단에 성서적인 바탕이 없다면, 그 사람의 경고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는 성경에 따라 신도들을 인도하고 교화시켜야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범사를 헤아리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행 17:10-11, 살전 5:21). 또한 맹목적으로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된다. (5)목사를 위해 기도하라(히 13:18-19, 엡 6:18-19, 골 4:2-3, 딤후 3:1-2). (6)물질적인 요구에 응하라(딤전 5:17-18). "목사에게 물질적으로 인색한 교회는 성경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좀처럼 영적인 힘이나 진보를 얻지 못한다. 고린도후서 9:6-10에에 말한 원리는 참고해 볼 가치가 있다." (Paul Jackson, 「교회의 교의와 행정」) 목사의 권한 일부 일반적인 교훈 다음은 목사의 권위에 관한 성경상의 진리 가운데 일부이다. (1)교회에는 지도자와 감독자가 있다(행 20:28, 살전 5:12, 빌 1:1, 딤전 3:1, 딛 1:7). 기독교인이 누구나 독립 교회에서 동일한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독립 교회를 이끌어야 하지만, 교회가 목사를 이끌어야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없다. (2)교회 지도자를 3가지 용어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동일한 직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감독(bishop)을 장로(elder) 위에 두는 수직적 교회 통치 구조는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목사, 감독, 장로는 모두 목회자 한 사람을 두고 부르는 명칭이다. (3)교회마다 자기 지도자를 두고 자체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한다(딛 1:5, 행 14:23). 이 점은 분명히 신약성경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이와 다른 교회 통치 형태는 성경에 바탕을 두었다고 볼 수도 없거니와 매우 위험스럽다('교회(church)' 참조).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처럼 개척 교회의 인도자 교회는 있을 것이다. (4)목사는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안수를 받아야 하며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행 14:23, 딤전 3장, 딛 1장). 신약성경을 믿는 교회를 목사 안수받지 않은 사람이나 전반적인 목사 직분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 이끌어서는 안 된다. 목사는 누구나 교사이면서 지도자여야 한다(행 20:28, 딤전 3:2, 딛 1:9-11, 벧전 5:1-2). (5)집사는 교회를 다스리거나 감독하는 분야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집사는 심부름꾼이지 지도자가 아니다. 집사회에서 교회를 다스리는 행위는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며, 여러 집회에서 중대한 해악을 발생시키게 됨으로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주신 권한의 범위 책임이 그에 상응하는 권한을 의미한다면,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주신 교회 내의 권위에 대해 고찰해 봄으로써 목사가 지닌 권한의 분야와 범위를 분명히 밝혀낼 수 있다. 목사의 책임에는 3가지 주요 분야가 있으므로 권한도 또한 그에 상응하게 마련이다. (1)목사는 교회 식구를 가르치고 돌볼 책임과 권한이 있다(행 20:28, 엡 4:11, 살전 5:12, 벧전 5:1-4). 그러므로 목사는 그런 목회 업무의 모든 측면을 감독할 권한이 있다. 목사는 무엇을 누가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고, 가르침이 올바로 이루어지도록 정확히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전 14:29). (2)목사는 교회가 거짓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행 20:28-31, 고전 14:29, 딤전 4:1-6, 딛 1:9-13). 목사는 무엇을 누가 가르칠지 결정할 권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교사들이 수행하는 성경 연구라든지 성경에 바탕을 두지 않은 교리나 의식이 진행되는 회합 등 그릇된 행위에 신도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도 있다. 여기에는 음악 전도에 대한 감독도 포함된다. 음악도 일종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엡 5:19). (3)목사는 교회의 전반적인 임무를 감독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행 20:28, 살전 5:12, 벧전 5:1-2). 목사의 교회 감독 직분은 감독자나 관리자의 직분과 유사하다. 목사만이 전도 임무를 전적으로 수행해서는 안 되고 신도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는 그 임무를 모두 감독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목사의 권한과 감독의 직분을 저항하고 도전하는 불법 풍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런 저항 행위는 그릇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다. '육신적인 사람'은 목사의 권한을 싫어한다.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목사의 권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이끄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어리석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警醒)하기를 자기가 회계(會計)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목사가 지닌 권한의 영적인 특징 목사나 전도사나 그밖의 교회 지도자가 행사하는 권한은 세속의 지도자들이 행사하는 권한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1)그 권한은 전도를 위한, 곧 무리를 이끌 권한이다(행 20:28, 고후 13:10, 벧전 5:2). 목사의 권한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행위를 구축하고 보호하기 위해 행사된다. (2)그 권한은 순종적이며 겸허한, 곧 청지기와 같은 권한이다(고전 3:9, 4:1, 12:7, 딛 1:7, 벧전 4:10, 5:3-5). 목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성경말씀에 따라 다스려야지 자신의 마음이나 의지에 따라 다스려서는 안 된다. 성경적인 모임은 하나님의 재산이요,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그 성경적인 모임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청지기, 또는 지키고 감독하는 사람이다. 이 말을 거만하고 악의에 차 있는 디오그레베의 전도 활동과 비교해 보라(요한삼서 9-10). (3)그 권한은 사랑에 찬,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권한이다(살전 2:7-11). 목사는 하나님과 같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태도로 희생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배려해 주어야 한다. 목사의 다스림은 억압적이어서 안 되며 할 수 있는한 관용과 넓은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목사의 권한에 대한 한계 목사는 하나님에 자신에게 위임해 준 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교회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도하고 있는 사람은 본받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준 메시지를 충실하게 설교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이라도 그런 권한을 지니지 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갈 1:8). 기독교인은 복음 전도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누구라도 배척해야 한다. (1)목사의 권한은 자신이 전도하는 복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13:7에서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본받으라고 했다. 목사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것이지 자신의 말이나 소명에 있지 않다. (행 17:10-11, 살전 5:21). (2)목사의 권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행 20:28).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성령에게 임명을 받았다. 따라서 영적 권한의 근거가 되며, 기독교인들은 명백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3)목사의 권한은 자신의 삶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13:7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다. 이는 삶의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끄는 사람이 생활에 본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일상 생활에서 기독교적 삶을 올바로 실천하여야한다. 다른 사람을 이끌 권한을 소유한 목사는 모든 면에 본이 되어야한다. (4)목사의 권한은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12-13에서는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가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영적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수행되어야지 다른 사람에 대해 권한이 행사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church)', '집사(deacon)', '디오드레베(Diotrephes)', '복음주의자(evangelist)', '고라(Korah)', '권력(power)', '선지자(prophet)' 참조) 집사(deacon)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집사(deacon)'에 해당하는 말은 디아코노스(diakonos)이다. 단순히 '종(servant)'이란 뜻만 담겨 있다. 바인(W.E. Vine)의 다음 정의를 살펴 보라. "디아코노스(Diakonos)란 말은 본래 종(servant)을 의미한다. 노예와 같은 일이든 시중드는 일이든 그 업무의 성격과는 관련이 없다. 그 단어는 '서두르다', '추구하다'란 뜻이 담긴 'diokos'란 단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원래는 아마 '잔심부름꾼(runner)'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집사(deacon)'란 말의 용법 '집사(deacon)'란 말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말이 원래 신약성경에서 2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1)'집사(deacon)'란 말은 교회 내의 전반적인 일꾼들을 가리킨다. 다음 구절에서는 디아코노스(diakonos)란 단어가 '청지기'로 번역되어 있다. 곧 롬 16:1, 고전 3:5, 고후 3:4, 6, 11:23, 엡 3:7, 골 1:23, 살전 3:2, 딤전 4:6 등이다. 골로새서 4:12에서는 디아코노스(diakonos)가 '종(servant)'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들 구절에서는 모두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가 사용되었으며, 각각 '복음 전도인'과 '교회 내 전반적인 일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는 사도 바울, 디모데, 에바브라라든지 그밖의 전도자들을 데컨(deacon)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런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에 기독교인은 누구나 '집사(deacon)'이 되어야 하고 '종(servant)'이 되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고 잃어버린 인간 세상에 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 하며 교회 내의 비천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2)'집사(deacon)'란 말은 교회 내의 어떤 직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집사가 하나님과 교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에, 그 임무는 어느 기독교인의 임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집사의 직분도 있다. 곧 기준이 분명하고 엄격한 직분이며, 적절한 자격을 갖추고 선택된 기독교인만이 지닐 수 있는 직분이다(빌 1:1, 딤전 3:13).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데컨(deacon)이란 말은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여성 집사도 있는가? 로마서 16:1에 나오는 뵈뵈의 예는 여성이 어떻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데컨(deacon)이 될 수 있는지 가리켜 주고 있다. 곧 교회와 그리스도 복음 전도에 대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집사(deacon)라는 '직분'은 남성만이 지닐 수 있다. 그 자격에 대해 성경에서는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가지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12)"라고 했다. 이 기준은 여성들에게 교회나 집에서 남성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를 지니지 말라고 경고한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집사라는 직분은 목사라는 직분과 달리 우월적인 지위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집사는 영적인 지위가 높아야 하고 다른 신도들이나 외부 사람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집사의 의무 집사란 직분은 어느 기독교인들에게나 요구되는 것과는 달리 특별한 의미에서 볼 때에는 교회와 목사의 심부름꾼이 될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사도행전 6:1-4에서는 실제로 '집사(deacon)'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집사가 할 일을 성경의 말씀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떤 특정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 선택되었으며, 그 일차적인 임무는 목사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전도하고 기도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물론 집사는 목사나 교회가 배당해 주는 일을 무엇이든지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금전관리나 구제 사업(홀로 사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 등)에 중점을 둠으로써, 목사가 교회에 대한 감독, 연구, 가르침, 설교, 방문, 상담, 기도 등 목회 업무에 부담 없이 집중하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의 예를 바탕으로 '집사(deacon)'란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집사란 목사와 교회에 대해 특정한 봉사 업무를 수행하도록 선택된 사람으로서 목사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의무를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돌보고 도와 주는 심부름꾼이며 종이다." 집사의 권한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집사에게 교회를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으며, 목사를 다스리라고도 하지 않았다. 집사는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교회를 집사나 그밖의 사람들이 떠맡아 다스려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부재중이거나 목사직이 공석중일 때 등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교회의 위기를 관리하는 집사나 그밖의 사람들은 그 임무와 권한이 일시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교회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격 있는 목사가 오면 교회의 위기를 관리하던 집사와 그밖의 사람들은 그 목사에게 목회권과 감독권을 일임해야 한다. '목사(pastor)', '장로(elder)', '감독(bishop)'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한 사람의 직분으로 호칭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목사에게 해당되는 동일한 직분을 가리킨다. 그 직분의 3가지 측면을 설명하려면 상이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곧 '무리를 치기(shepherding)', '가르치기(instructing)', '이끌기(leading)'이다. 목사만이 교회 내에서 성경에 바탕을 둔 권한으로 감독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목사를 '감독자(overseer)'라는 뜻이 담긴 '지도자'라고도 부를 수 있다(사도행전 20:17과 20:28 비교 참조). 신약성경에서는 목사 외에 어떤 교회 집사 일꾼에게도 그런 칭호를 주지 않고 있다. 집사는 절대로 감독자, 다스리는 자, 이끄는 자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절대로 감독자인 목사 위에 또 다른 감독자를 세워서는 안 된다. 집사회라든지 그밖의 사람들의 모임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목사직에 순종하기는커녕 자신들을 권한 있는 목사직 위에 세워 놓으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이며 고라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민16장). 신약성경을 보면 목회자인 장로들이 잘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딤전 5:17). 그러나 집사들이 잘 통치하고 있는 사례를 찾아보려 한다면 시간 낭비일 것이다. 왜냐하면 집사들은 다스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성경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겪고 있는 고통중에는 집사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들이 많다. 집사들이 목사의 권위의 영역을 침해하고 집사들의 직분을 망각하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들의 집사들이 철저하게 목사에게 순종한다면 교회 내의 문제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고 교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집사에 대한 기준 (1)거듭나야 한다(딤전 3:9). (2)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딤전 3:8). (3)신약성경에 대한 믿음이 건전해야 한다(딤전 3:9). (4)성숙하고 연단을 받은 자여야 한다(딤전 3:10). (5)아내가 영적이어야 한다(딤전 3:11). (6)올바른 가정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딤전 3:12). (7)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어야 한다(행 6:3). (8)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행 6:3). (9)믿음이 있어야 한다(행 6:5). (10)믿음과 신뢰심이 있어야 한다(고후 8:22). (11)복음을 전도해야 한다(고후 8:18). ('교회(church)', '교회 사도(church disciple)', '목사(pastor)' 참조)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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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6
하나님의 사역자(The Ministers of God)
방 효일형제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하나님의 사역자(The Ministers of God) 성경: 고린도후서 6장 3~10 3.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고 4.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박해와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중에서 그리하고 6.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 8. 영예와 치욕으로 그리하고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으로 그리하였나니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며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 지난 주에 송은석 형제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딤전6:11; 딤후3:17).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이 본문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셔서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신다는 마음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자들의 사역자로 일하셨습니다(롬15:8). 또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롬15:16).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의 사역자를 세우셔서 그분의 일을 하십니다. 무엇 보다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일을 맡겨놓으시고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으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역자가 사역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함께 일하시며 돕습니다(고후6:1). 오늘 말씀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에게 귀한 말씀으로 심겨져 하나님의 온전하신 목적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먼저 바로 앞 장인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ambassadors for Christ)"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위임을 받아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곳 캄보디아에는 다른 나라 영사관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영사관은 한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캄보디아 땅에 있는 우리를 비롯한 한국인의 신변보호와 행정적인 일들을 감당하고 처리해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 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죄들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그분의 왕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와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요,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 신실하게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주게 될 것입니다. 본문 3절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비난을 하거나 우리를 통해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신실하게 일을 감당함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그렇지 못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물론 어떤 사역을 감당하다 보면 오해도 있고 비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부지런히 자신을 살피고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절에서는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입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꾼이요 사역자로 입증하는 것은 수 많은 영혼과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입증해야 할 것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는 것을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4,5절과 6,7,8절 중간과 8절 후반부, 9,10절로 나누겠습니다. 1. 그럼 먼저 나누고 싶은 것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입증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많은 인내(認耐)가 필요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성질이 급해 씨를 뿌리고 바로 열매를 기다립니다. 열매는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랜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합니다(눅8:15). 농부의 기다림과 같이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약5:7,8) 한 영혼을 대할 때에 그 영혼이 빨리 구원받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눈 앞에서 그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데에도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롬8:2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지금은 저희들에게는 없지만 박해와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아니라면 피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와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이 있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만약 이러한 일이 닥친다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명확한 입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많은 섬김으로 인해 때때로 많은 수고와 잠을 못 자는 일도 있고 금식하거나 먹을 것이 없어 밥을 못 먹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사람을 부릴 수 없습니다. 많은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뒤로 한 채 게으름을 피우거나 늘어지게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또한 옆에 못 먹는 사람이 있는데 남들이 먹는 것을 다 먹으며 지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산모가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영혼을 위해 흘린 땀과 수고를 통해 그 한 영혼이 유익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사역자는 기쁨을 얻고 자신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사역자의 길에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통과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다루심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을 잘 통과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입증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6절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순수함(pureness)으로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순수함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마19:14; 막10:14; 눅18:16)."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왕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갖는 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데에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상대방이 금방 알아차립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감을 갖고 접근하면 상대방은 싫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담이 아닌 하나님의 부담을 갖고 영혼을 섬겨야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지식(knowledge)으로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도 매우 뛰어납니다(빌3:8; 골1:9; 벧후1:2,8; 3: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지식을 전해 믿도록 해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혼이 지옥으로 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잘 연구하여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딤후2:15). 또한 우리는 사랑을 할 때에 오래 참음(longsuffering)으로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음은 사랑의 열매입니다(고전13:4). 하나님은 나에게 선하게 대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나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는 자에게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살전5;15). 그래도 몇 번 참았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100번 참을 것을 요구하시는데 99번 참았다고 포기한다면 오래 참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금방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아직까지 2000년 동안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을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음은 친절함(kindness)로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친절하게 대해야 영혼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친절하게 대하면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 캄보디아에서 우리 같이 잘 못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한국사람이라는 칭찬을 해줍니다. 하나님은 친절(엡2:7; 딛3:4)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골3:12). 다음은 성령님(The Holy Ghost)을 따라 행함으로 입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천연적인 육체로 일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육체를 통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체로 하는 섬김은 자신의 육체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상당히 교만해집니다. 자신이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길 때에 내 생각대로 하지 않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영혼들을 율법이 아닌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조문의 사역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의 사역자임을(고후3:6)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열정이 앞서다 보면 육체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것보다 그래도 섬김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더라도 섬기다 보면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서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처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모든 섬김은 성령으로 행함을 통해 하나씩 입증해야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와 같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공급 받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은 오래 하지 못하고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엡5:18). 기도와 금식은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도록 합니다. 또 하나는 거짓 없는 사랑(love unfeigned)으로 입증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하기는 매우 쉽습니다만 그것은 사실 거짓된 사랑입니다(요일3:18).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요일4:20). 하나님의 사랑은 대가 없이 베푸신 큰 사랑입니다. 영혼들에 대한 거짓 없는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참된 사랑이 더욱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진리의 말씀(The Word of Truth)으로 입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주 수준 높은 세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참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만이 모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도 가능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자신이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엎드러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죄들의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살전2:13; 히4:12; 벧전1:23).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잘 구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사람을 온전함으로 이끄느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권능(The Power of God)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금년 첫 번째 말씀을 대할 때에 예레미야 32장 17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성경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르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통해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은 오른 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The Aamour of Righteousness on the right hand and on the left)로 입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입니다(롬6:13). 우리의 오른손과 왼손으로 하는 섬김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귀하게 쓰여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6,17절에 따라 양손에는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악한 자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군가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에게는 영예와 치욕(Honour and Dishonour)이 있을 때에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예(존경)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기 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영예를 얻기보다 치욕(불명예)을 얻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부터 인정을 못 받고 치욕을 받는다 해도 주님의 십자가의 치욕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갈 수 있습니다(눅6;23).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해서 나쁜 평판도 있고 좋은 평판(Evil report and good report)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좋은 평판을 갖고 이는 부분도 이지만 나쁜 평판을 갖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칭찬만 듣기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하는 책망을 싫어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자로 준비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오해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살펴서 다른 사람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세번 째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당연히 거듭나지 않은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달라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사역자는 세상으로 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한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한 자(as deceivers, and yet true)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에 종교인이고 사람들을 세뇌시켜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속이는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 입증해야(고후 13:5)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실한 믿음의 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as unknown, and yet well known)입니다. 우리는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같으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서 그러하며 믿음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그러하며 앞으로 있을 보상에서 그러합니다. "의로운 자들은 자기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마13:43)."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죽는 자 같으나 살아 있습니다(as dying, and we live).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 날마다 우리 자신을 처형하는 자입니다(갈2:20; 6:14).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며(롬6:11)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 같이 대하면 죄는 우리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대해 교만하지 않고 겸손히 행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은 자 같이 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약해 보이고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성령의 새로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징계(벌)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합니다(as chastened, and not killed).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셨습니다(사53:4~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아서 죽는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징계와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보호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요10:28; 롬8:35~39). 이 땅에서 어떠한 징계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많은 일로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기뻐합니다(as sorrowful, yet alway rejoicing).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에 따라 주시는 근심이 있습니다(고후7:9~11). 얼굴에 웃음이 있으면 대하기가 좋습니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과 기쁨은 어떠한 외적인 환경으로 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것은 천연적인 사람의 본성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면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살전5:16). 기쁘면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as poor, yet making many rich). 하나님의 사역자는 개인의 소유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기억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대단한 섬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진 것을 통해 섬김을 받으시며 주님의 손에 들려진 것은 우리와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거나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 가로막는 생각중에 하나는 제대로 한 번 잘 섬겨야 한다는 부담입니다.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보면 작은 섬김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대단한 섬김을 요구하시거나 사람들을 향해 큰 섬김을 가지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작은 일에도 신실하게 섬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하나님의 사역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all things).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인식입니다. 세상의 것이 하나님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치없는 것이라는 마음은 우리를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것으로 부터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꿉니다. 이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우리는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 이렇게 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을 알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그러하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복음의 사역자(골1:23)로 교회의 사역자(골1:25)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딤전4:6)로 신실한 사역자(골4:7)로 입증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4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에 헛되이 받거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의 실실한 사역자로 잘 구비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캄보디아를 축복하시고 이 땅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필요를 풍족하게 채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6년 1월 29일 캄보디아에서 설교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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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5
사역의 원칙
출처 :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사역의 원칙 본문 : 고후 12:14-19 사역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모든 민족들 중에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하나님에게 뽑힌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되어 그 귀한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새언약을 맺으심으로 신약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레위 자파 가운데서도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지성소로 들어가는 거대한 휘장이 찢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구호로 외치면서 구원받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진리가 확실하게 드러난지 5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구약적인 관념 하에서 “사역”이라는 말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누가 섬겨야 합니까? 신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학위를 갖추고 안수를 받은 목사들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교회를 약하시키고 왜곡시킨 니골라파의 가르침입니다. 직분을 가진 집사들까지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헌신하고 열심히 있는 몇몇 형제들만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까?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형제, 자매들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인 이 신약 시대에 제사장들이며, 사역자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역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삶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들은 사람들이었고 영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역의 원칙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원칙이 곧 교회를 세우고 형제들을 세우며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을 몇 구절 참조하기 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항상 성경은 이처럼 성경의 문맥 아래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사소로운 해석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실제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2,33) 이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야말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들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형제들, 즉 교회를 실족케 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주의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참되게 주를 위하는 법은 바로 형제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역을 하지만 정작 형제들을 판단하고 무시하며 그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책망합니다. 롬 14:8,1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히여 살고 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다 설것임이라.』 이처럼 사역의 두 대상은 구원받지 못한 잃어버린 죄인들과 구원받은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구원간증을 통해 이 두 가지 사역의 방면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구원받은 목적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이 담긴 사도행전 22장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사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저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네가 보고 들을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행 22:14,15) 이와 같이 첫째로 믿지 않는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주 에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윈함입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행적들이 기록된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의 첫째되는 사명이 복음전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모든 사역의 기초가 되며 으뜸이 됩니다. 이 사역을 배제한 모든 사역은 결코 실제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좋은 전통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에베소 교회의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 20:24) 복음을 증언하는 이 사역은 결코 사도 바울에게만 위임된 사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당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임된 사역입니다. 이것은 목사나 선교사 복음전도자에게만 국한된 사역이 결코 아닙니다. 이 사역은 심지어 형제들에게만 위임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 관하여 자매들은 아주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가 있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감옥에 넘겨지는 일로 인해 그들이 얼리 흩어져 피신하면서도 그들이 남녀 모두 복음을 전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간증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곳인 사도행전 26장에는 한가지 목적이 더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너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곧 네가 본 이 일들과 또 앞으로 내가 네게 나타낼 일들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라』(행 26:16). 여기에는 증인이라는 말 외에 또 다른 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역자라는 말과 관련하여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이 복음의 사역자이며 또한 교회의 사역자임을 고백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으며나 바울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내가 교회의 사역자가 된 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함이니』(골 1:23,25). 특히나 사역의 대상은 주 예수님의 양떼들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내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면서 맡기신 사역과 동일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의 마음은 많은 섬길 대상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자신이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참된 목자의 마음과 삯꾼의 마음이 나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목자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채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들보다 그들을 탈취해 양젖과 양고기를 먹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의 순전하고 아버지같은 마음을 읽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적은 것이라도 오히려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길 원했으며,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려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왜곡시키려는 모든 악한 소문들을 잠재웠습니다. 참된 사역의 목적은 그들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얻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얻어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그들의 열심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이 오직 그들을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세우고 또한 그들을 위해 자신을 허비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밝히 말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이는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모아두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하기 때문이니라. 너희를 더욱 넘치게 사랑할수록 내가 덜 사랑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위하여 가진 것을 기꺼이 쓰고 또 나 자신까지도 쓰리라.』(고후 12:14,15)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섬긴 대가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을 향한 오해와 비방 속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조차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돌리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표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2장에서 자신이 어리석게 보이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자랑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더라도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잇습니다. 그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익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체험을 자랑해서라도 어리석은 고린도 상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바울의 간절한 태도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원칙을 분명히 새기게 합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평판을 신경쓰기 보다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오해를 무릎쓰는 태도는 참된 선한 목자인 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참된 사역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는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창녀와 세리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신 것,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모두 다 자신의 개인적인 평판이나 의로움, 명분보다도 양들의 참된 필요를 돌보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큰 사역이든 작은 사역이든 눈 앞에 형제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하고 순수해야 하며, 모든 사역이 원칙이 그들을 주 안에서 세우기 위함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의 주된 목적은 단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강한 부담이 있었으며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곳에서나 복음을 최우선으로 전한 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또한 이미 구원받은 연약하고 어린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교회를 관심하였습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들은 다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이 교회들,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교회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그는 사역을 하고 그들을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그가 개인적으로 보낸 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 또한 교회를 위한 그의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디모데서는 에베소 교회를 돌보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면서 그에게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돌볼지를 돕기 위해 기록한 것이며, 디도서 또한 크레테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 보낸 디도가 그 교회의 장로들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쓴 것입니다. 빌레몬서도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 잠시 인디옥에서 쉬다가 다시 2차 선교여행을 갈 때에 그 목적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전에 주의 말씀을 선포한 각 도시로 가서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가 알아보자, 하니』(행 15:36) 형제들을 방문하는 일 이것을 하나님은 사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방문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행 15:41) 또 그의 3차 선교여행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합니다. 『안디옥으로 내려가 거기서 얼마를 지낸 뒤에 떠나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온 지방을 차례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강건하게 하니라』(행 18:23) 이처럼 그의 사역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교회를 향하였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거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 4:11,12) 여기서 섬기는 일은 ministry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성도들을 위함이며 또한 교회를 위함입니다. 심지어 복음전도자조차도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형제들을 교회를 관심하십니까? 형제들을 사랑하고 관심하여 그들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사역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관심하지 말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통해 실제로 형제들이 유익을 얻고 주 안에서 세워지고 있는가를 관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주님의 일이라 여기면서 하시는 그 일이 참으로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면서도 내내 이러한 사역의 원칙들을 인식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을 잊은 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고 자랑을 일삼을 때에 은사의 목적은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고전 14;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이처럼 모든 사역과 예배순서와 은사들은 모두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찬송을 부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교리와 계시와 모든 지식과 말하는 것이 모두 다 형제를 세우는 일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을 세우기 위한 사역의 원칙을 따라 모든 일을 하였으며 반대로 형제를 실족시키는 일에 관하여는 결단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고후 8:13) 바울이 그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랑을 가장 뛰어난 은사와 덕목으로 꼽은 이유도 바로 가장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고후 12: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13;10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능이 바로 무너뜨리지 말고 세우라고 주신 권능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동일한 말씀이 고린도후서 10장에도 반복된 것을 볼 때에 사역의 권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그 권위를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데 전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고후 10: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라고 주신 것인즉 이 권위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만 교회를 섬기는 사역이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주님 앞에서 사역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두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허락하신 목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를 뽐내거나 자신의 지식이나 재능, 열심을 자랑하기 위해 사역에 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뛰어난 교회의 일꾼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다른 형제들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마음으로부터 믿고 참되게 시인하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왕가에 속한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교회의 일꾼이며, 사역자며 교회의 종입니까? 목사만입니까? 목사와 집사입니까? 형제들만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할 때에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자매였고 그녀의 이름은 뵈베였습니다. 그녀를 소개할 때 바울은 “교회이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바울이 사역한 동역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그들은 부부이지만 동일하게 이름이 언급되며 오히려 자매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 외에도 여러 자매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녀들의 이름은 “우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와 “주 안에서 수고하는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이며 또한 “주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버시”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서는 뵈베 자매를 통해 로마 교회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당시에도 실제로 예수님을 섬겼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있었고, 십자가 밑에까지 따랐던 대부분도 여인들이었으며, 예수님을 위해 몰약을 준비했던 여인은 심지어 부활이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역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은 철저히 권위를 여자에게 허락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만 한다면 자매들은 교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섬김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교회 안에서 목사나 집사의 직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혼란케하는 자들의 아버지인 마귀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고 평강과 질서를 위해 권위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몇의 형제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시고 직분을 주신것과는 별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서 분배하신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만 이러한 사역을 가지는데 중요한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은 전적으로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섬겨지는 모든 크고 작은 사역들이 모두 다 이러한 원칙 안에서 감당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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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4
교회의 길을 가려면...
교회의 길을 가려면... 송 은석형제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제목 : 하나님의 교회 말씀 : 롬 12:3-5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 이는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갖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롬 12:3-5) 우리들은 캄보디아에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다닌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 알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앞날을 궁금해 하며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모양은 많은 다른 선교사들과는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위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한 몸, 교회를 이루는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리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 ‘교회의 길’이 사람들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곳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깨달음이 지극히 부족합니다. 많이 들었지만 혹은 항상 들었지만 알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의 책이나 사람의 말, 지식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기까지 고민을 하였습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가만히 앉아서 다시 한 번 듣고 나서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들을수록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들을수록 그 진리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분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기름부음을 허락하셔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밝은 빛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표준을 보고 각 사람이 말씀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보기 위한 조건 로마서 1장부터 12장를 믿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단계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2장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음에도 나름대로는 믿음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3,4장에서 구원의 복음을 깨닫게 되어서 죄 사함 받은 기쁨을 누리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양 머물러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로마서 5,6,7장에서는 죄에서 해방되어 옛 생명은 죽고 새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더 나아가 로마서 8장처럼 성령을 따르고 생명을 풍성히 누리면서 하늘을 유업을 소망하는 삶을 살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로마서 12장의 삶,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풍성을 누리는 삶이 있습니다. 저는 로마서 12장에 있는 교회처럼 몸의 생활을 누리는 그러한 무리에 있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필요를 채웠다면 교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열망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모양만 갖출 수 있을 뿐 참된 교회의 길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전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알 수 있고 또 모두 다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가 계시되어 우리 각자에게 나타날 때 다만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1,2) 로마서 12장 3절 이후로 나오는 한 몸에 대한 가르침 이전에, 바울은 1절과 2절을 먼저 언급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이 두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배우나 깨닫지 못하고 교회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제시된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진리이지만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데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1,2절의 말씀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다음 말씀인 교회의 진리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나의 시간과 나의 몸과 나의 모든 것은 과연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아니면 내 자신의 것입니까? 어쩌면 고백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어떻게 고백을 하든지, 실제로는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내 생각대로 사는 한은 교회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진리들을 듣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헌신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어렵거나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귀한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않은 무리는 하나님의 교회로써의 본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심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큰 대가가 지불된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들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시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의 소유인 우리 몸을 억지로 드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원함으로 주님께 드리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알고 주님께 드리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무리를 통해서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가 교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소유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생각에서 새롭게 변화를 받음 2절에서는 세상과 동화되는 것으로부터 생각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것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엉뚱한 행동이나 비뚤어진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같은 생각을 하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면 또한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요란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없다고 해서 우리 속에 세상적인 것들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TV나 요란한 음악 같은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 속에 세상이 충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에서부터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어떤 모양으로든 세상이 들어오고 자리를 잡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세상과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은 절대로 우리 가운데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며 매일 새롭게 변화를 받는 삶을 살면서 아버지의 뜻을 얻고 입증하는 것이 교회를 이루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머리가 합니다. 우리들의 경험과 관점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적인 생각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머리로 삼는다면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실제적인 모든 것을 주장하시도록 내어드림을 통해서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로 모일 때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야 함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에 그리스도를 머리 삼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은 각각 다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머리삼아 모일 때(마 18:20),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흐르는 하늘의 생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들의 세상적인 생각들은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됩니다. 우리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모임 때 주님을 머리 삼지 않고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주님의 임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우리 각자가 겸손히 엎드리며 나올 때 주님은 우리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만약 우리들이 높아져 있다면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모임에 주님의 임재가 없으면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주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 드려진 믿는 이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머리 삼고 모여서 항상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생각이 변화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숙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진리를 받아 들여서 믿음의 길을 가는 모임 가운데는 주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가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와 표준의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3절 이후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도 갈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길을 가는 것은 믿음과 계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열심의 부족이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이 하신 말씀에 따라서 믿음을 갖는다면 그는 주님의 일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이 교회의 길을 보아야 함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3절) 12장 1절은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모든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체 형제들을 향해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각 사람에게 할 말이 있었습니다. 3절에 보시면 바울은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마다 믿음의 깊이는 다릅니다. 각자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정도도, 믿음 생활의 모습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의 분량이 다른 각 지체들이 동일하게 취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헌신과 세상으로부터의 새롭게 된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 후에 이것에서 더 나아가 각 사람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형제들이 함께 하며 같은 마음을 가지고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흩어지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더 전진하기를 원하지 않고 어느 정도만 주님을 따르는 자리에서 머무르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먼저 믿음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서 같은 것을 말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판단,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고전 1:10, 빌 2:2).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함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3절)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생각이 있는데, 바로 ‘자기’에 대한 생각입니다. 생각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기에 대해서 정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언제나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하나님 말씀처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자기를 과대평가한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분량이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좋은 것’만을 원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대신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부러워하면서 시기와 다툼 가운데 힘들어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교회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3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모두가 다 똑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두신 그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것 역시 감사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은사는 서로 시기하며 다투고 빼앗는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 안에서 손도, 눈도, 입도, 귀도, 발도 모두 서로가 서로를 돕고 위하며 한 몸이기에 조화롭게 활동하듯이 교회의 길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분명히 육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겸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있다면 교회의 길을 가는데 가장 큰 걸림이 되는 요소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많은 교회들의 모습의 특징은 주님이 없고 육체가 만연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각자가 교만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 더 있어 보이고자 하기 때문에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데 주님이 주신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주님이 주신 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몸인 교회 『이는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갖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4,5절) 교만한 생각은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전체적인 ‘몸’을 볼 때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높아져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보여야 스스로 기쁘고 만족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몸’ 안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난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은 손만 정말 대단해!’라고 생각하기보다 우리는 ‘그 사람은 참 대단해!’라고 생각합니다. 손이 어떤 일을 잘 하는 것은 손만의 자랑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 즉 몸 전체의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속한 모든 지체도 그 몸 안에서는 함께 그 자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생명이 같습니다. 속한 몸이 같습니다. 분리되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몸 안에서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 누군가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는 부스스한데 눈 화장만 매우 화려하게 했다면, 그 사람의 눈화장을 멋있다고 칭찬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매우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고 여길 것입니다. 누군가 키가 크고 다리가 길다고 해서 값지고 멋진 바지를 입었는데 상의는 누더기를 입었다면 그 모습 역시 매우 이상할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드는 이유는,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알맞은 자리에 두셨습니다. 자신이 몸 안에 있는 것이 맞다면 몸 안의 다른 지체들에게 주신 것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은 한 몸을 위하며, 또 그것은 각 지체들 서로를 위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지체들이 떨어져 나가고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매우 끔찍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몸인 교회에 서로 붙어있지 않고 분리되어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보기 싫은 장면도 없을 것입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으면서 주님이 주신 분량으로 서로를 섬깁니다.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직무를 다할 때 건강한 몸의 활동이 있습니다. 지체들에게는 기능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이런 기능들을 귀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다른 지체들의 기능들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와 다르기 때문에 시기하거나 무관심한 대신 감사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가장하며 분량 이상으로 넘어서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귀한 것을 나누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며 감사하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가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본다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몸을 귀하게 여기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영광과 존귀로 옷 입히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몸이 귀하기 때문에 몸에 속한 각 지체들도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귀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내게도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자연스런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자신의 몸의 모든 부분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내 몸이 지체들을 뭔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받지 못하고 어려워하며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을 그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주님의 간청과도 같은 주님의 갈망이지만, 아무나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주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주님이 각자에게 지정해 주신 위치를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교회가 얼마나 좋은 것임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몸 안에서 머물면서 머리로부터 오는 공급을 자연스럽게 누리고 서로 서로 지탱하며 성장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로마서 12장을 통해서 헌신을 자주 말하지만, 이러한 헌신이 어떠한 것인지 깊이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 각자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자원하여 드릴 때에 우리는 성경에 기록하신 주님의 모든 뜻들을 자연스럽게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축복 가운데 들어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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