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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 침례교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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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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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새벽기도회 에 관하여 ?
출처 : LA말씀침례교회 http://av1611.net/ 새벽기도회 에 관하여 ? 기도회는 새벽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심야이든 언제 해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가짜란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시각은 항상(always), 언제나(any time)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든, 저녁에 기도하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참이냐? 가짜냐? 판단할 것이 못됩니다. 아래 글은 저희 교회에서 한 새벽 기도에 관해 전한 말씀입니다. 참고해 주십시오. 예배에 관해서는 인간 중심적 예배를 지양하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경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 시각 역시 자유롭습니다. 주의 첫날(일요일)에 모이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배 시각은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주중에 몇 번이나 모이든 몇 시에 모이든 그것 역시 각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이란 말이 있어서 성경을 통해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유대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1:12절에,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노략 당한 자를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행위가 악하므로 나의 격노가 불같이 나가서 태우리니 능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 ). 바빌론의 군대가 밖을 포위하고 이제 곧 예루살렘은 죽음과 역병이 온 도시를 휩쓸고 도시는 불탈 것입니다. 그런 중에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라고 한 것은 심판을 집행하는 일은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란 주의 말씀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심판)은 다 의로우며"라고 할 때 그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밤이라고 하고, 아침 6시부터 낮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내려 주셨고, 성도들은 아침에 나가서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아침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매일 아침 주의 신실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오늘날 올빼미 족이 많고, 새벽 문화가 아닌 저녁, 심야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우는 새벽 문화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에 공의를 내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심판을 하고, 학대받는 자들의 손에서 백성을 건져내는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이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아침에 주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 아침형 인간(II) 렘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렘3:23). 주의 긍휼은 새벽마다 새롭습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아침마다"-매일 아침- 새롭습니다. 매일이란 말은 지속성인데 이것을 성경은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visit-방문하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욥7:18). 하나님이 방문했을 때 성도가 자고 있으면 주님은 자신의 은혜를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긍휼을 보이시고, 새벽에 만족하게 하십니다. [오 새벽에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시90:14). 주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주시듯이 아침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는데, 해가 뜨면 녹아 버렸습니다(출16:21).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음으로 영적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낮에 일터에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태워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태우되 등잔들을 정비(整備)하면서 그 위에 향을 태울 것이며](출30:7). 우리는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결코 대낮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고, 아침에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을 섬겼습니다. 아침은 헌신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봉헌 헌물을 아침에 드리게 했습니다. [제단 위에 있는 불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타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또 번제 헌물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고 화평 헌물의 기름을 그 위에서 태울 것이며](레6:12). 우리의 헌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헌신의 능력은 새벽에 주어집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성전 문을 열고,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그들이 하나님의 집 사방에 머물렀으니 이는 그들이 책무를 맡아 아침마다 그 집의 문을 여는 일을 하였음이더라.](대상9:27). 주를 섬기는 것은 매일 아침이어야 합니다. 아침은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새벽에 부활한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들이 늦잠 자고, 자기 할 일 다하고 동굴로 갔다면 그들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은 주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이것이 바로 새벽 기도의 효과입니다. 아침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아침은 주의 신실하심, 긍휼을 새롭게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에 단 한번, 단 몇 차례만 주의 은혜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맛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이는 새벽에 주를 만난 대언자의 증언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침에 주님이 공의를 빛으로 내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은 새벽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새벽보다 정신이 맑은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모두 새벽을 깨우고, 새벽에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고, 헌물을 드리고, 모임으로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영적 지식은 새벽에 가장 많이 주어집니다. 영적 깨달음은 새벽에 기도하고 성경 읽을 때 많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에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오전 11시 예배에도 제 때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 상태가 틀려먹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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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3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디모데전서 1:18-20

본문 - 디모데전서 1:18-20

제목 -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내용 -

[서론]

박 청호목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자연을 통해서라든지,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마지막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가운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제에 대하여 일일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양심”이라는 기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양심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권면하기를 선한 양심에 의존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로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은“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7절과 18절 말씀을 보시면 이들과 합세한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데 필레토라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들은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던 바울 당시에 최초의 이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cf. 벧후 3:16).

양심이라는 영어의 어원을 보면 “~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con"과 ”지식, 과학, 원리“라는 뜻을 지닌 ”science"라는 단어와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성경을 통하지 않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지식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진리의 지식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낳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잘못된 믿음이 잘못된 양심을 낳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이 믿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양심과 뗄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양심”에 관해서 박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초의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연동되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의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와 더불어서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구원받으면 이런 파괴된 양심이 “선한양심”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선한양심을 소유했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양심이 제대로 기능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건전한 교리를 꾸준히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게 되면 그의 양심은 더럽혀지고 약해집니다. 결국에는 그 양심이 화인 맞아서 마귀가 제안해 오는 어떤 회유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귀가 제안하는 어떤 획책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을 수 있는 양심으로는 영적인 삶을 결코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까,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지금 파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파선된 양심”과“정상적인 양심”에 대한 가르침에 익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선된 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양심은 사람을 경고하고 인도하도록 완전하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제 기능을 못할 뿐입니다. 거듭나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내주하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양심과 영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양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로 본문의 권면과 마찬가지로“선한 양심”이 있습니다(딤전 1:18-19). 이와 반대로 히브리서 10:22에 보시면“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순수한 양심”이 있는데(딤전 3:9), 히브리서 9:14에서는 이 양심을 “정결한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순수한 양심”과는 반대로 디도서 1:15에서는“더럽혀진 양심”이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파선된 양심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4:1-2에서는“화인 맞은 양심”으로, 그리고 또 고린도전서 8:7과 12에서는 “약한 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양심상 결백하다고 해서 꼭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틀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고 우리의 양심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우리의 양심을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본론]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Ⅰ. “순수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딛 1:15).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텔레비전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들을 보면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분명한 양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이 불결하게 되고 건강한 양심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수한 생각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텔레비전과 무익한 인터넷 사이트나 세속적인 잡지나 책들에 오염되어서 많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악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양심을 위해서 순수하게 하여서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할 때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대부분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데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책임질 수 없다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다면 결코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양심이 정결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일들을 말해 줄 “믿음의 선배”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실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 옳고 그름의 선택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셨습니다. 목회자들이 우리의 양심이 전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우리의 양심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양심은 거짓말을 할 것이며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Ⅱ. 사랑해야 합니다(딤전 1:5-7).

“이제, 계명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헛된 언쟁에 빠져 율법 선생이 되고자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순결한지 우리를 인도해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랑은 거룩하고 이기심이 없으며 육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랑은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사랑은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Ⅲ.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딤전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에게 부탁하노니, 전에 너에게 주어진 예언들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하였느니라.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배우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바른 양심을 가지려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양심은 죄에 동화된 채 올바르지 못하게 되어서 곧바로 더러워질 것입니다.

죄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대게 의지에 문제가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의 양심이 마귀의 제안으로 꺾여 있기 때문에 확신들이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와 아론이 최초로 파라오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파라오를 두려워했던지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담대하게 표명하지 못했습니다(출 5:1). 그랬더니 파라오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력하게 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파라오가 말하기를 “주가 누구기에 내가 그의 말을 복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스라엘로 가게 하지도 아니하리라.” 하더라.”(출 5:2). 잠언 29:25에서“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고 했는데, 당시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도록 죄로 유혹하고 기세를 꺾고 의지를 공략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믿음안에서 큰 담력을 얻고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딤전 3:13).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Ⅳ.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기를 힘써야 합니다(행 24:16).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장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오니 즉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내가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리라는 소망을 저 사람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듯이 나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나이다. 이 소망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나이다.(exercise)”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그렇게 섬겼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제대로 지키려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의 양심은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이 원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중심이 잡혀가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진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친절도 없으며 진정한 사랑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양심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성도들의 필요에 흠뻑 젖은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양심은 건전해 지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Ⅴ. 매사를 정직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매사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은 신뢰할 수 없는 양심입니다. 그런 사람의 양심은 파선당한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서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거짓 조언을 할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Ⅵ. 구령을 해야 합니다(벧전 3:15-16).

베드로전서 3:15-16에 의하면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들이 행악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희를 비방하다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건전하고 건강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구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구령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양심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야말로 성령님의 인도를 가장 잘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Ⅶ.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

사도행전 8:37은 베드로전서 3:21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성경을 제외한 다른 변개된 성경들에서는 이 사도행전 8:37 말씀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이 철저히 무시된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침례를 말하는 구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자마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우리가 기꺼이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건강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들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성별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TV 프로그램에 자신을 내어준다든지, 영화관에 가서 세속적인 영화를 본다든지, 락 뮤직을 즐겨 듣거나, 인터넷을 통해서 무익한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오락이나, 세상 유행을 지나치게 따르려는 것은 모두가 양심이 깨어져서 더럽혀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 더럽혀진 양심을 가지고도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좀더, 좀더 하다가 마귀가 쳐 놓은 죄악의 올무에 깊게 빠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행에 여과 없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순간 자신의 양심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언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 보루를 진리 아닌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의 양심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양심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양심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양심의 지주대란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양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 보았으나 양심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이 기도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하십시오! 지금 곧 지금. 아멘.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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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7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가?
출처: 말씀침례교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 외에 성경이 말한 바 제자가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거함으로써(요8: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 *continue in my word. 제자의 제일 조건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사상이나 가르침, 연구 결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승의 가르침, 사상, 교훈, 생애 등을 사람들과 후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매일 읽는 것,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주님 안에 거하며 열매를 맺음으로써(요15:7-8).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나니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7-8).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면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상호 교제 속에서 하는 기도는 100% 응답이 됩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도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 기도 생활에 근거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지로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 기도와 같은 입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는 누구나 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온유, 친절,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함께 있는 이들이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누군가 그 과실을 먹습니다. 정직하고 행하고 남을 돕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를 맛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뿐 아니라 세상은 성도들에게 그런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서 얻을 아무 열매도 보지 못할 때 욕하고 저주합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이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다. 요즘 종교가 타락했다... 등등의 저주를 퍼붓습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모두가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남이 잘되기를 구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배를 섬길 때 자신을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많지만 제자들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넷째,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함으로써(요13:34-35).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즉 형제를 위해 죽는 사랑을 말합니다.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로써(요일3:18)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형제 사랑은 우리가 주의 제자란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떤 광고, 홍보, 전도보다 강력합니다. % 그리스도의 제자란 ... - 예수님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로 부름을 받았다. 누구에게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십니다.‣ 순종에로 부름을 받았다. 모든 제자는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순종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기 어렵다는 것은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종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은 없으며 제자도도 없다. - 섬김에로 부름을 받았다. 주님은 제자들을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명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야망대신 가장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단순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맘몬(재물)을 섬기질 아니할 때까지,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영적인 삶의 능력과 풍요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행실에 탐욕이 없게 하고 가진 것으로 만족할 때(히13:5), 먹고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로 알 때(딤전6:8) 제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 고난에로 부름을 받았다. 육신적인 성도는 내게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고, 신실한 성도는 어떻게 하든지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자들은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주를 위해 받을 고난이 나에게 있음에 감사하고,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고난 뒤에 주어질 영광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뻐합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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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1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 방효일형제 출처: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성경 - 고린도전서 10:5~15 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그리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쓰러졌느니라. 6 이제 이런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탐한 것같이 우리가 악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7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는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는 뛰놀더라,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 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나의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를 피하라. 15 내가 지혜로운 자들에게 말하듯 말하노니 너희는 내가 말하는 바를 판단하라. 오늘 나누는 이 본문 말씀은 몇 년 전에 “내 안에 있는 이집트”라는 제목으로 나누었던 말씀인데 그때에 저의 믿음의 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오늘 나누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로 더욱 이끄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오랜 기간의 어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만 해놓으시고 모든 일을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게신 그리스도의 생명 성장하는 것을 관심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자라야 하는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라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데에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겉 사람 곧 옛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 성장 장해 요인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열매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이 싹이 돋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씨를 둘러 싸고 있는 껍질이 생명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꼭 해결해야 하는 우리 옛 사람, 곧 육체의 근본적은 문제인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신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믿음의 여정을 가시는데 큰 어려움이 없이 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읽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 출애굽 여정에 있었던 광야 40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배움을 갖게 해주는 훈계의 말씀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는 과정에는 각자 하나님의 마련하신 특별한 환경가운데서 다루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육체의 천연적인 성분을 깨뜨리시고 그리스도의 성분으로 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의 권세에서는 어느 한 순간에 구원을 받도록 하셨지만 내 안에 있는 육체를 제거하시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유월절 하루 밤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집트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는 넉넉잡아 40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40일이면 갈 수 있는 그 길이 왜 40년이 걸렸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 5절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그리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계속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랐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또한 조그만 어려움이 생기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수 백 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면 그들은 모두 40일도 안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안에 세상,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오랜 기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각자 안에 처리되지 않은 세상을 보는 것은 영적 성장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겪었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본보기를 통해 우리를 살피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탈출의 계기가 된 유월절 사건을 영적으로 가지고 와서 우리의 구원에 적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구원받으면 세상 곧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우리 마음에 있는 이집트가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육체에 속한 또 하나의 세상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5~17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내 안에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몸이 죽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부활하게 될 때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거나 붙잡지 않아야 하는 치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 세상에 대해서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이집트 곧 세상을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이 제거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따를 때 그분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주의 만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세우셨고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행하도록 주의 만찬을 제정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은 사람은 침례에 순종하며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질서에 따라야 하며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0장과 11장에서 주의 만찬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당시에 너무나 무질서함 가운데 육신적으로 행하는 고린도교회의 그릇된 주의 만찬을 바로잡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린도전서 10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과정 속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6절과 11절에서는 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 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에서도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과정 가운데에서 담겨 있는 가르침 몇 가지를 한번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방 나라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면서 살았고 그 괴로움이 극에 달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으며 이집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이었지만 파라오 왕의 아들로 지냈던 모세를 약 40~80세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모세를 쓰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왔던 모세는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집트(Egypt)'는 '검다(black)'는 뜻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어둡고 더러운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세상의 신인 마귀의 속박에서 살고 있는 비참한 죄의 노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거주한지 430년의 끝 날 밤에 어린양의 피에 의한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출 12장).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아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시어 그들의 험난한 광야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늘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십니다. 한 편 완악하게 된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았습니다. 파라오의 군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와 모세에 대해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네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원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나누어 마른 땅이 되도록 하셔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나게 하셨고 이집트의 병사들은 모두 바다에 수장시키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구름 기둥과 홍해의 물 속에서 모세에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술이라는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 일 동안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라에서는 물이 써서 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그 쓴 물에 던져 달게 하여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나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하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쓰디쓴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엘림과 시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는 굶주림에 지쳐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아침에는 하늘에서 빵을 비처럼 내려 "만나"라는 음식을 주셨고 밤에는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셨습니다(출 16장). 만나는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 6:35, 48-51). 그리고 르비딤이라는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요 7:37-38). 이렇게 보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례를 받았고 영적 음식을 먹고 또한 영적 음료도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맛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마실 물, 정말로 필요한 의, 식, 주 문제를 모두 해결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돌보시며 이끄셨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모두 광야에서 죽어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그 본보기를 알려주시며 우리 모두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의 순간을 기억해 보신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감격하지 않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하고 진리에 이르는 지식을 접하고 영적인 것들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정상적으로 가고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자라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잘 못되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불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나아간다면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40년의 여정 가운데 있었던 일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몇 가지 본보기를 통해서 훈계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있는 이 네 가지의 본보기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7절을 보면 "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는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는 뛰놀더라, 함과 같으니라."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금으로 주조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대신한 신으로 공표하고 번제 헌물, 화평 헌물을 드린 후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는 엄청난 악한 일이 벌어졌습니다(출 32).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경배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하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요즘 세상은 돈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좋은 집이나 자동차를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은혜를 누리기 보다는 잡지나 TV에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이처럼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주님보다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들을 추구하고 기쁨을 더 얻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섬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순간 그것이 결국 우상이 되어버려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잘 안되기 시작하면서 사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음행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약 4:4).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귀는 세상에 있는 가짜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속는 사람은 가짜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속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눈을 돌리면 넘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약 4:8).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만족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다른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얻은 만큼 마음에서 세상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얼마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컵에 물을 담으면 담을 수록 공기는 빠져나가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8절을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발라암의 계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고 우상에 절한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그 결과 바알브올에게 가담하였던 남자 모두 24,000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하루에만도 23,000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사랑하면 이미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부부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는 성적인 교제인 음란한 행위를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성적인 교제를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성(性)을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침상을 더럽히는 음란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성적으로 순결한 삶이 없이는 영적인 거룩한 삶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귀는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성적인 교제를 잘 못 이해하도록 가치관의 혼란을 갖게 만들어 음행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은 성(性)을 상품화할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불륜을 소재로 한 잡지나 TV드라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처럼 세뇌하고 현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흐름에 대해 깨어있지 않으면 음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하지 않는다면 죄의 유혹이 언제 넘어뜨릴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 내어주다가는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음란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내어주어야 합니다(고전 6:20). 우리가 만일 몸을 함부로 다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9절을 보면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1장 5,6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여 말하되,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거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혼이 이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 하매 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다가 질려버렸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실제로 먹었던 만나에 대해 “영적 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섭취해야 하는 생명의 말씀을 나타냅니다(출16:35; 수 5:11). 요한복음 6장 31~35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만나를 가볍고 하찮게 여기는 않은 태도는 결국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기고 시험하고 모독하는 합당하지 않은 행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있을 때는 어떠한 말씀이든지 달고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말씀을 좀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서 푸석푸석한 빵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1,500년 전에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시험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날마다 공급하여 주시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푸석푸석한 빵(light bread)”이라고 하며 하찮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육체를 위해 먹을 음식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살면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말씀에 대한 태도는 곧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며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10절을 보면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민수기 14장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1절부터 5절 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온 회중이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어찌하여 주가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가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서로 이르되, 우리가 대장 한 명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매 그 때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집회 앞에서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라."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모르고 감사가 없이 불평을 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거대한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왜 침몰했는지 아십니까? 보통 알려진 바로는 빙산에 부딪혀서 그렇다고 하는데 요즘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선체를 탐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작은 6개의 틈 때문이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불평은 선체의 갈라진 틈과 같습니다. 그 틈으로 마귀는 우리를 낙담시키고 실족하게 하여 결국 믿음에 있어서 파선하게 만들어 깊은 물 속에 잠기게 하려고 공격하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 대해 신실하셔서 부족함이 없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원함에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갚지 않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지 않으면 세상의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속에는 그들이 종으로 살았던 이집트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하는 것 보다 죄의 종으로 살았던 세상이 좋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여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나안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믿음의 눈을 멀게 만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불평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어려움과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을 붙드는 길로 이끄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믿음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에서 파선하고 다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칼렙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4장 9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말한 것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하다가 많은 시련이 닥쳐오면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처리되지 않은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황과 불로 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합니다(창 19:26; 눅 17:32). 예수님께서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딤후 4:10).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사랑하는 한 언제든지 우리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험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불평은 감사함이 없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곧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실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늘의 이상을 본 사람은 그 길을 향하여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네 가지 훈계는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돕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그릇되게 행하는 주의 만찬을 염려하면서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일을 본보기로 삼아 언급해주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무리들이 한 빵과 한 몸의 교제가운데 있음을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에서는 주의만찬을 합당치 않게 행하므로 해서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죽었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도 예수님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었던 분열과 다툼, 온갖 육신적인 더러운 행위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교만한 마음들은 그 당시 극도록 타락한 그리스의 문화로부터 온전히 성별하지 못한 육신적인 행위의 결과들이었습니다. 또한 마귀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 가운데거짓 사도들, 거짓 형제들과 거짓교사, 선지자들을 보내어 교회를 어지럽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육체로부터 나오는 죄에 대한 참된 인식과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주님의 일에만 관심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만약에 어떤 남편이나 아내가 지금의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어떻게 부부가 참된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여전히 마음에는 세상, 이집트를 품고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면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집트, 곧 세상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만 기쁨과 만족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그분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려고 수고하노라.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우리의 육체는 세상이 주는 단순한 기쁨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누릴 기쁨과 상속 유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섰을 때 주님의 기쁨과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약속하신 상속 유업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며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버리려고 해도 그리스도를 통한 만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것을 맛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이집트, 세상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성분과 하늘, 가나안의 복된 소망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40년의 여정을 통해 가르치시는 훈계를 잘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낳은 결과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아간다면 40일에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게 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주님은 계속 말씀해주실 때에 불순종하며 악한 일들을 열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면 이기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모두 눈을 가만히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 같이 풍성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에 더욱 소망을 두시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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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떠돌이 신앙진단 By 바리 카메론
떠돌이 신앙진단 By 바리 카메론 “그러나 사랑 받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이전에 전한 그 말씀들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아니한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그들은 분파를 만드는 자들이요. 육체적 감각으로 행하고 그 성 령靈)이 없는 자들이니라.”(유 1:17-19) “떠돌이 신앙”이란 어떤 신앙인가? 가인이 하나님의 면전을 떠났을 때부터 시작된 “유리하는 생활”(창 4:12-14)이며,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도피하여 숨는 생활이며,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나그네 신앙인 것이다. 사탄의 속성은 떠돌이 속성이다. 땅에 “이곳저곳, 여기저기, 두루 돌아”(욥 1:7, 2:2) 다니면서 안정치 못하고 늘 불만을 쏟아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은(사 57:20-21) 신앙인 것이다. 떠돌이 신앙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자주 옮기면서 “충성”이나 “헌신” 같은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감사”나 소속관념도 없이 늘 “또 옮기면 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엿보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여기저기 두루 돌아” 볼 것 다보고, 겪을 것 다 겪다보면 눈은 높아지고 귀는 커져서 어디를 가든지 안주를 못하고 평생 판단만 하고 다니기 때문에 그 심령에는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환대를 받기 원하며 받들어 주거나 항상 등을 두르려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와 믿음에 도움이 되는 자신들을 당겨주고 호감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습성들이 있다. 교회를 자주 옮기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특히 그들 자신들의 죄를 듣기 싫어함). 그들은 번영, 축복, 성공, 행복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좋아하고 늘 즐거운 체험을 되새기며 떠올리기를 좋아하고 “지옥”, “심판”, “충성”, “책임”, “복종”, “청지기”, “직분” 등의 메시지는 생각조차 꺼려 무엇이든지 자기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드는 것은 모두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교회를 자주 옮기는 사람들은 찬양은 길게 하고, 설교는 짧게 하고, 풍성한 생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나 풍성한 헌금에 대한 말씀은 싫어한다. 그들은 교제의 대상을 계속 바꾸기를 원하고 듣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어떤 신자가 그들에게 더 듣기를 꺼려하면 그때는 교제를 끊는다. 그리고 다른 성도가 그들에게 행하도록 당부하면 그때는 바람처럼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떠돌이 신앙가들은 흥분의 바람을 타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활발한 활동이 있는 곳에 있기를 원한다(그 활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경하기 위하여). 그들은 음악회 등 눈에 보이는 의식, 형식이 있는 곳으로 떼지어 간다. 그리고 무엇인가? 좀 더 보기 좋은 곳이 발견될 때까지만 그곳(교회)에 머물게 된다. “떠돌이” 신앙의 위험성 열 가지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주하시며,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내려지고 터가 다져져서”(엡 3:17) 1. 그들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 교인이 된다. 떠돌이 신앙은 실제적 교회 부흥이 아니라 가상적 숫자만 채우게 되는데 교회에 숫자는 증가시켜도 일시적 증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곳에도 오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교회에 오래 봉사한다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인 것이다. 2. 떠돌이 신자들은 요란스럽게 떠드나 알맹이가 없다. 그들은 겉으로는 수다스러우나 실제는 열매가 없고 “만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16:24)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라고 절대 믿지 말라. 그들이 참으로 헌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겠는가? 3. 그들은 그전 교회 성도들 흠을 떠벌리나 자신의 흠은 보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먼저 번 교회에서 즐겁지 못했던 원인들을 서슴없이 나열하다가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당하면 즉시 얼굴이 굳어진다. 보편적으로 자신들이 흠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들은 타인들의 흠을 들어도 잘 견디고 인내한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이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대로 타인을 대접하고 이해하는 성도인 것이다. 4. 그들은 늘 옮겨 다니다가 세월을 보내므로 열매가 없다. 떠돌이 신자들이 한번 빛을 낼 때는 번쩍 빛을 발하지만 얼마 후에는 소리만 요란하게 꽝 울리고 꺼져버리는 번갯불과 같은 존재이기에 아무 열매도 유익도 없는 전시적인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5. 그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감정에 좌우한다. 그들은 어떤 결단을 내릴 때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롬 4:3), 과연 그러한가(행 17:11)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감정이나 기분에 기초를 두고 결단하고 처리한다. 6. 떠날 때는 대부분 남은 자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떠난다. 교회를 자주 옮기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담할 때는 다른 신자들에게 감격케 하지만 그들이 그만 둘 때는 다른 신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반드시 상처받게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을 때 “우리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 그들이 떠났을까?”하고 의아해하던 성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은 곧 떠난 이들의 잘못이 크다는 것이다. 7. 그들은 흔히 쓰는 용어는 알아도 성경말씀을 잘 모른다. 떠돌이 신앙가들은 교회 용어는 잘 알아도 성경적 진리는 잘 알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성경을 알고 순종하였다면 교회를 쉽게 옮기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알맹이가 빠진 영적인 말을 늘어놓는 신비로운 재능이 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니”(딤후 3:5)들에 속하는 것이다. 8. 그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떠돌이 신앙가들은 항상 교회를 옮겨 다니기 때문에 교회의 영적 권위자에게 순종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권위자를 존경하고 받드는 일에 있어서 문제도 많다. 사실 그들은 마치 그들 자신이 신령한 자요 영적 권위자인양 착각한다. 9. 그들은 실제적으로 성경에 따른 책임 신앙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가끔 “나는 예수님께 책임을 다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말은 정당하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어떤 지체를 영적인 권위자로 세우시고 성도들이 그 영적인 권위에 순종하도록 하였다고 가르친다(엡 4:11).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며 스스로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들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들이 반드시 회계(會計)보고 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즐거움으로 하게하고, 슬픔으로 하지 아니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이라.”(히 13:17). 10.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를 옮길 때 그 이유를 변명하려 든다. 교회를 자주 옮기는 자들은 자기들이 옮기는 이유를 변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불만 상태에 있는 자들 중에서 동지를 구하게 된다. 그럴 때 누군가 그런 기회를 만들기를 기다렸던 “예비 떠돌이”들은 즉각 행동을 같이하고 새로 옮긴 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말씀에서 얻은 해답이 아니라 단지 그곳에 붙어 있기 위해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얼마 후에는 또 다른 교회를 찾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옮긴 교회를 확실히 알지 못한 만큼 깊이 알 때는 실망 또한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과 사역에 있어서 그들 지도자들에게 할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아뢰며 노력하는 참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말이다. 욕망이나 일시적 기분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옮기는 그런 사례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런 사례가 있다면 교회는 훈련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훈련을 수행할 성도가 다른 교회로 옮겨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서 낳아준 그 교회가 말씀에서 변질하지 않는 한(참 교회는 변질할 수 없음) 그 교회에서 계속 머무르며 섬기는 것이며 그 교회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 그 교회가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므로 때를 따라 우리를 훈계하고 권면한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자주 옮기는 떠돌이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는 교역자나 교회는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 폭풍이 닥치면 그런 교회는 곧 무너져 버린다. 어떤 어려움이 교회에 부딪쳐 오면 “교회를 자주 옮기는 사람들”은 철새와도 같이 모두 다른 교회로 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나를 낳아준 부모가 나를 사랑해 준 것 같이 나를 거듭나게 해준 교회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고전 4:15). “떠돌이” 신앙을 극복하는 길 다섯 가지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안정을 얻고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주님을 경외(敬畏)함과 성령님의 위로 가운데서 걸으면서 그 수가 늘어가니라.”(행 9:31) 1. 현재 소속한 참 교회에 계속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가능한 당신과 가족 모두가 한 교회에서 굳게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 그곳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뿌리를 내려 다른 도시로 이사하기 전까지 혹은 하늘에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아무 곳에도 등록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는 것은 당신에게나 교회에게나 하나님에게도 유익이 될 수 없음을 알라. 2. 하나님은 이곳 저곳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심을 믿으라. 하나님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교회에서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6개월 또는 1,2년 후에 다른 교회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그 교회를 버리신 결과가 되는데 하나님은 영혼을 건지는 교회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는 자가 하나님 허락 없이 교회를 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스스로 교회로부터 버림받게 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 생각해보라.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를 1~3년 만에 버린 자식이 어디 있는가? 자녀들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 밑에서 일관성 있게 양육 받고 보호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교회도 같은 원리임을 깨닫기 바란다. 3. 칭찬이든 책망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듣고 순종하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성취하는 가장 좋은 길은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참된 교회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마동안 당신을 알게 된 교역자나 성도들은 당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므로 당신이 꼭 들어야 할 말을 해줄 수 있다(꼭 들어야 할 말을 해주는데도 듣기 싫어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자주 옮기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그런 자들은 이곳 저곳 교회를 떠돌아다님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또 그 자신의 죄와의 싸움을 피해 다니고 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4. 누구에게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바른 교회가 되도록 일하라. 주님께서 주신 은사대로(고전 12장)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지체의 사명에 충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애를 쓰며 당신이 속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도록 비판이나 불평에 앞서 스스로 앞장서 보라. 그리고 참된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며 결코 이 교회 저교회 떠돌아다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교회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주를 섬겨야 할 것이며 교회가 나를 위해 희생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책망과 징계를 받기 싫어하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실 때도 떠돌아 떠나려는 습관이 발동할 것이다. 가장 성장한 그리스도인은 책망과 징계를 달게 받을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성도이다. 5. 교회의 문제가 있을 때 앞장서서 짐을 져보라. 교역자나 목회자에게 지나친 기대는 지나친 실망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하고 교회는 언제나 사탄의 방해와 핍박이 따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장 어려운 때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훈련해 보자.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라.”(롬 8:28)는 말씀대로 교회가 어려울 때 스스로 앞장서서 희생할 때 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참 교회가 될 것이고 교회가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딜 때 땅에서 열매가 있고 하늘에서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조각조각 찢어놓는 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도망쳐버리는 죄도 저지르지를 말아야 할 것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원리를 따라 화해와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항상 기울인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떠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혼을 하였고 서약을 하였기 때문이며, 오히려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므로 그 어떤 문제나 상황을 극복하고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사랑이 허다한 죄들을 덮어주기 때문이라.”(벧전 4:8). 성경은 우리가 교회를 자주 옮기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를 자주 옮기는 “떠돌이”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왔다가 금방 옮겨 버림을 볼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바라보지도 말고 본받지도 말고 그들 때문에 움츠려들 필요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항상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우리의 믿음의 창시(創始)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寶座)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리고 당신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을 경우가 있다면 그때는 “새”교회를 찾을 때가 아니라 당신의 교회를 보다 더 나은 교회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가 바로 그 때임을 명심해 주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誡命)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 13:34-35). 바이블뉴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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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말씀] 잘 가거라 사망이여! - 찰스 헤이든 스펄젼
바이블파워 찰스 헤이든 스펄젼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고 하셨으니』(고전 15:26,27). 지난 4주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시요, 사탄을 정복하신 분이시며, 모든 새로운 것들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망을 멸망시키신 주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망을 멸망시키신 것은 구속주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의미를 완전하게 계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기자인 다윗이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본문을 두고 여러분은 아마 다윗이 겸손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실까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이 몇 마디 안에 영광스러운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편 8:6에서 『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해석을 따라 바울이 시편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시편 8편은 단지 야만적인 피조 세계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본문에는 또 다른 훨씬 더 중요한 해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로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신 분, 바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높임을 받은 인자이시요, 모범이 되는 인간이시며, 둘째 아담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는...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언급한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에만 이상할 뿐이지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람이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인간과 같이 되신 분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부활의 필연성을 어떻게 추론해 냈는지 보도록 합시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것”이 놓여져야만 한다면, 모든 악한 것도 그분께 정복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사망이 정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셔야 하리니.』 그러므로 사망도 궁극적으로 정복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간단한 시편의 한 문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부활의 교리를 이끌어 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었다면 결코 시편 8편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일반 독자라면 결코 생각지 못했을 귀중한 진리를 도출해 내게 하십니다. 성경 본문은 요술 상자 같습니다. 상자를 열면 또 상자가 나오고 또 나오다가 제일 안에 있는 상자에 보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비밀들은 그 안에 비밀을 감추어 두신 분이 일깨워 주실 때에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책들은 대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아주 못미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책은 빛으로 차 있으며, 값으로 따 질수 없는 귀중한 계시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성경에 무엇이 더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 안에 거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저장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저장고를 밝히는 계시의 불빛이 현재 우리 눈에는 너무나 밝아서 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성령의 조명을 통해 다윗의 노래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도 바울 서신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망은 원수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1. 원수인 사망 사망은 원수로 태어났습니다. 아각인 하만이 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은 우리의 가장 끔찍한 원수 “죄”의 자녀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약 1:15).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롬 5:12). 죄의 열매가 인간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이 타락한 그 암울한 날에 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이며 반역자인 마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볼 때 사망은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사망은 사실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같습니다. 사망은 원래의 창조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타락된 피조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온 세상이 손상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망은 목자장께 속한 양무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라는 이리는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초대하신 손님이 아닙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연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와 사탄이 낙원의 축제에 들어오려 할 때 어리석은 인간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사망을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멀어버린 눈으로도 그것이 잔인한 적인 것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에게 사망은 평원의 소떼를 노리는 사자와 같고, 싱싱한 들꽃을 내리치는 잘 드는 낫과 같으며, 시들어 버린 나뭇잎에 잔인하게 불어대는 강풍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본능적으로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죄의 자녀라고 양심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원수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망은 원수가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오는 이유는 뿌리째 뽑아 버리고 넘어뜨리고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작품인 사람의 몸을 흉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없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토록 경이롭게 지으신 것을 말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의 솜씨를 자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을 무덤 속의 벌레들에게 던져 줍니다. 그러면 이 벌레 군단은 포획물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건장한 남성의 육신은 아름다운 집과 같지만, 파괴자의 사망은 그 창을 어둡게 하고 그 기둥을 흔들리게 하며, 결국 그 문은 닫히고, 맷돌질 소리를 그치게 만듭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딸들도, 강한 남자들도 사망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전 12:3,4). 이 파괴자는 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많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일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망은 생의 모든 영역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오는 침입자입니다. 사망이 들어오면 모든 훤칠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모든 샘들이 멈추며, 모든 훌륭한 땅이 돌밭으로 변합니다. 사망이 어떤 사람을 먹이삼을 때 그 사람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재로 변하고 썩어 버립니다. 죽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힘을 과시합니다. 무덤이 없는 나라가 있습니까? 묘지가 없는 도시가 있습니까? 비석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우리의 원수인 사망은 불칼을 들고 인류를 파괴시키며 전진해 왔습니다. 아무리 포악하고 야만적인 민족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습니다. 죽음은 모든 곳에 손을 뻗쳐 가정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과 한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해가 뜨는 모든 곳에서 죽음은 사람들의 시야를 눈물로 가렸습니다. 사별의 눈물, 과부의 울부짖음, 고아의 절망, 이런 것들은 죽음이 일으킨 전쟁의 음률이며, 거기서 죽음은 승리의 노래를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수하에 있는 사형 집행인에 불과하며, 죽음의 아수라장에서 일하는 고용된 도살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이 평상시보다 좀더 서둘러서 식인 축제를 열고 희생자를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어 본 사람이라면 사망이 어떤 원수인지 잘 알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친구를 빼앗아 가고, 우리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집안의 가장을 데려갑니다. 집안의 따뜻한 햇살 같은 어머니를 나꿔채 갑니다. 어린 아이를 그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갑니다.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를 그 아버지 곁에서 빼앗아 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걸었던 부모의 애정어린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입니다. 죽음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선하든, 아름답든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죽음의 낫은 아름다운 꽃이나 백해무익한 잡초를 가리지 않고 잘라 버립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정원에 들어와서 백합화를 짓밟고 장미 송이를 땅에 흩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퉁이에 심겨져서 수줍은 듯 나무 그늘 아래 그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수수한 꽃들조차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꽃들의 향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호흡으로 그것들을 시들게 합니다. 특히 죽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침입해서 하나님의 일꾼을 데려갈 때, 죽음은 성도들의 원수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역자들이 죽음의 강타로 쓰러지면 교회는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경계하던 예리한 눈초리를 어둠 속에서 감겨지게 하고, 훈계를 말하던 혀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망인 것입니다. 사망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대적합니다. 가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지치지 않고 일하던 일꾼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의 사람들, 마음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담고 있던 사람들, 생에서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창 일하다가 이들을 참으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를 뒤로하고 쓰러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사망으로 넘겨지도록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분의 백성들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망을 최악의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전쟁에서 면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징병자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지만 마침내 그의 백발은 겨울 아침에 내린 서리를 무색하게 하며, 제아무리 철인일지라도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쇠를 막을 수 없으며 젊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불로장생의 묘약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권력자라도 ‘멸망’을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값나가는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빛나는 면류관을 쓴 군주도 무덤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용감하고 강인한 용사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통치자는 벌레의 형제요, 벌레와 같은 집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교활한 적으로서 사방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무해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사망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 복병을 매복시켜 놓지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죽음은 어디서나 우리를 공격합니다. 식탁 음식 속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샘에서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에 독을 넣기도 합니다. 죽음은 침실에서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죽음은 바다의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도 합니다. 오 사망이여, 우리가 너를 피해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느냐? 교활한 원수 사망은 우리가 사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 등 뒤에서 소리없이 따라옵니다. 죽음은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원수이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다 되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새들처럼 우리 모두는 새 사냥꾼의 그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게 됩니다.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저 대양 속에 있는 모든 물고기는 그 때가 되면 죽음의 거대한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침에 떴던 해가 반드시 지는 것처럼, 한밤을 수놓던 별들이 마침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처럼, 땅을 돌며 여행하던 물이 결국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끝이 옵니다. 이른 나이에든 늦은 나이에든 반드시 끝은 오며, 그러면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산 자들 가운데 더 이상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원수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죽음을 인지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입술에 한 편의 시를 싣고 그들은 사라져 갑니다. 혹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에 분주하다가 대차 계정을 제출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간 신문에서 사업상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으면서 자기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경시되거나 사소하게 여겨질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속주께서 멸망시키신 잔인한 원수를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죽음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습니까? 죽음의 특징에 대해 살펴봅시다. 2. 멸망당할 원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평생 속박되어 있는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죽음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거의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죽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에 대단히 근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영적인 죽음에서 구해내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을 때 우리는 모든 영적인 것들과 신성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려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키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망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자신의 희생자들을 단념했던 세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셨습니다. 그 소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신 뒤 주님께서 소녀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파괴자가 강타를 당하고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인성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젊은이가 일어나 앉자 주님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또 한 번 죽음의 희생자가 막강한 원수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너무 오랫 동안 무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누이는 『주여,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에 복종하여 수의에 동여진 채 죽음에서 일으켜진 나사로가 걸어 나왔을 때, 죽음이 인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속박이 제거되고 포로가 석방된 것입니다. 그밖에도 구속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주님께서 사망과 무덤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한 위대한 승리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음의 형벌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죄에 대해 두 번이나 똑같은 형벌을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대한 벌로서 지불해야 할 고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이 죽는 것입니까?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몸이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은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변화시키셔서 불멸과 영광에 어울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죽음과 무덤은 말하자면 정제시키는 용광로 같은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몸은 미래의 축복에 합당하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살아 계신 구속주께서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서히 분해되고 떠날 뿐입니다. 죽음은 범선을 묶어 둔 밧줄을 끌러 아름다운 항구로 항해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해 주는 불병거입니다. 위대하신 왕께서 자신의 연회장에 들어오셔서 다정한 음성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독수리의 날개 위에 타고 안개 구름 자욱한 이 세상을 멀리 떠나 영원한 평안의 집, 저 높은 곳에 있는 찬란한 하나님의 집으로 날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폐기하셨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이며,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속주께서는 그 쏘는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 쏘는 것을 제거당한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는 하지만 이들에게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히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봅시다. 무덤의 한 켠에서 잠깐 동안의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조용히 수의를 벗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 있게 움직이셨을까요! 먼저 작은 수건을 개서 옆으로 놓으신 뒤에 수의를 벗어서 따로 개어 놓으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덤에 왔을 때 잘 개어져 있는 옷을 발견하도록 말입니다. 이제 무덤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지하 납골실이 아니었습니다. 잘 정돈되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기숙사 방처럼 된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습기차고 어둡고 으시시한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완전히 바꾸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우리 주님의 무덤에서 바위를 굴려 내어 신선한 공기와 빛이 안에 계신 주님께 닿도록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실 때, 주님은 정복자 그 이상의 모습이셨습니다. 죽음은 달아났습니다. 무덤은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성도들이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분은 모든 성도들의 몸이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증하셨습니다. 성도들의 혼의 생명은 단 한 순간이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날의 커다란 승리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일같이 죽음을 이기고 계십니다. 성도들에게 그분의 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안에 그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두려움 없이 마지막 원수를 대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때로 노래하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대개 온화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으며 평화롭게 잠이 듭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죽음은 용처럼 보이지만 그 쏘는 것은 사라졌습니다. 죽음은 이빨 부러진 늙은 사자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다만 우리로 황금문을 통과하게 해 주는 사자(messenger)로서 보냄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문을 통과했을 때 우리의 구세주를 영원히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많은 성도들이 죽음의 잠을 자기 위한 침상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침상 중에서 최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혼이여, 내게 말하라. 어떻게 이것이 죽음일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너무도 고상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근심을 다 벗고 안도했습니다. 이런 것이 평생 두려워했던 죽음일 수 있을까 하고 기이 여겼습니다. 죽음이 칼로 찌르는 것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는데 압정으로 찌르는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눈을 감았다가 하늘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때 이들은 죽음은 침대에서 기지개를 쭉 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섭고 섬뜩한 통로를 통과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높임을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이런 죽음의 쏘는 것을 없애 주셨습니다. 3. 그러나 사망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를 볼 때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의미에서 죽음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멸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전에 몸의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을 무수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해서 볼 때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잠들고 육체와 뼈가 썩어서 흙이 된 무수하게 많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이들은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망이 멸망받는 것입니다. 저는 무덤으로 들어간 몸의 입자가 그 전과 동일하게 재구성되어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리라고 가르친 적도 없으며, 그렇게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땅 속에 심겨진 씨가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몸은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씨 자체가 아니라 꽃입니다. 동일한 소재도, 모습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무덤이 아니라면 땅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바다 생물에게 잡혀 먹혔다면 바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지상에 거할 때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몸으로 나올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소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로 어떠한 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망은 우리 주님의 승리로 인해 완전히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입게 될 새로운 몸은 노쇠함도 없을 것이며, 병색도 없을 것이며, 순교의 상흔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어떤 표도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흔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상흔처럼 그들에게 존귀를 가져다 줄 영광스러운 표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상흔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며, 못에 찔리신 손과 발은 성도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썩어짐의 흔적은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나팔 소리 이후에는 마침내 더 이상의 죽음도,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울부짖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지 않으며, 죽음은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받고 잠들었던 성도들도 부활한 뒤에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또 다시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을 겪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입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또한 살게 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혼의 불멸이라는 이 당연한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어떤 혼들은 미래에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어떤 혼들은 영원한 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둘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며,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받을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의인이 받는 생명도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이 형벌에 쓰이든지 생명에 쓰이든지, 그 의미는 다 같습니다.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무덤도 없는 나라에서 죽음은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4.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지막에 나가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들 중에서 첫 번째로 오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이 죄이고, 그 다음이 사망입니다. 사망은 최악의 적은 아닙니다. 사망은 원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다른 대적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는 수천 번이라도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죽음의 시련을 받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과 연관된 단순한 육신의 고통은 죄로 야기되는 섬뜩한 슬픔과 죄에 대한 양심으로 혼에 지워지는 짐과 비교해 볼때는 사소한 것입니다. 죄로 오염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죽음은 부차적인 재앙일 뿐입니다. 먼저 제일 강한 원수를 패배시켜야 합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모든 악의 주인인 죄와 사탄을 먼저 패배시키십시오. 그러면 사망은 “마지막”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망은 “마지막”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망이 마지막이라고 했다면,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사망이 마지막 원수가 되게 하십시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죽기 오래 전부터 죽음을 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죽는 순간까지 죽음의 은혜를 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살아 있는데 죽는 은혜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강가에 이르렀을 때만이 배가 필요합니다. 사는 데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죽음의 은혜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멸망당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이 죽음이라는 원수를 내버려 두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원수는 멸망당할 것이지만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가 받은 지혜대로 살면서 매일 이행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시련이 닥치면 시련을 그대로 받으십시오! 원수들이 몰려 오면 그들을 무찌르십시오. 계속해서 무찌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방을 강타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 뒤에 공격해 오는 후열을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적이 전진해 올 때까지 최후의 일격을 보류해 두십시오. 그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투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때가 되면 여러분이 마지막 원수를 이기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동시에 죽음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의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로다.』 사망은 왜 마지막까지 남겨졌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크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기 전에 대단한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웁니다. 친구들의 죽음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리석고 눈 먼 열정을 꺽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잡았던 고삐를 놓고 다가올 세상을 `향해 날아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죽음만큼 강력한 설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하나님의 장엄한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남겨 두셔서 죽음으로 하여금 성도들에게 설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일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성도들은 사랑의 최고의 열정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화형대와 고문대에 묶여 죽어간 순교자들의 죽음에서였습니다. 박해의 숲에서 하늘 나라로 올라간 사람들은 손으로 엮은 화환을 주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것은 피의 시내를 건너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으로서 성도들은 그분을 가장 영예롭게 했던 것입니다. 평범한 죽음으로 죽은 성도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과 행위에 있어 인내했다는 승리의 간증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은혜 시대가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결코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승리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가져다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몇몇 회원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처럼 제가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저도 그런 장엄한 기회를 얻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들이 노래한 것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저는 죽음을 피해 다른 우회로를 찾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빛나던 그런 호산나와 할렐루야의 빛이 제 눈에서 빛나게 된다면 죽음은 축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가장 크게 시험하는 사망은 마지막까지 멸망받는 것이 잠시 보류됩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잠들 때 우리는 그분과 완전하게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성도들 사이에 약간의 질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게 될 여러분과 저를 만나서 느끼는 질투일 것입니다. “형제님, 제가 경험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무덤에 누워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결코 죽음의 차거운 손이 닿은 적이 없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나의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은 죽음에 있어서까지 주님과 교제를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잠든 사람들보다 호의를 덜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편애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잠들어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깨어나게 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성도들을 본향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죽음의 메시지를 속삭일 뿐입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성도들은 지고의 복을 받게 됩니다. 죄와 근심과 저주가 없는 곳에서 이제 구주와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유용한 목적들에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사망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마지막 원수입니다. 현재 교회에게는 대항해서 싸워야 할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사망은 마지막 원수이고, 이제 다른 원수는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끝없는 축복 속에서 영원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 속에서는 훨씬 더 놀라운 축복의 시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고의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분노하는 적들로 인한 갑작스런 경보도 없으며, 마지막 휴식이 깨질까봐 근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마지막 원수가 살해되면 더 이상의 적은 없습니다. 전투는 끝나고 영원한 승리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분께 존귀와 영광과 위엄과 권세와 권능을 영원 무궁토록 돌립시다. 오 주여, 우리의 엄숙한 경배를 받으소서. 아멘!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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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6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인가?
출처 : LA 말씀침례 교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형상-image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after our image, after our likeness)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 (image), 하나님의 모습(likeness)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담의 후손 중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날 뿐이며, 모태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법 중에' 잉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종교인들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성'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인간 속에는 죄성만 존재합니다. 철학자들은 나름대로 어떤 바보 천치 같은 인간 안에도 불성이 있고, 신성이 있고, 선한 본성이 있는데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는 선각자들, 선구자들이 깨닫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리스 철학에서는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각성"이라고 말합니다.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곧 신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거듭난 성도에게만 divine power, divine nature(벧후1:4)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 안에도 신성은 고사하고 '죄성'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고사하고 [짐승의 형상]만 있을 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창1:26-27).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잃어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 4). [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孀)이시요](골1 15)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아담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고 높여 주는 종교 사기꾼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9:6,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음이니라.](창9:6)고 하는데 이것은 대 홍수 이후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형상'이란 말은 repent(회개하다, 후회하다)와 마찬가지로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형상은 외적 형상과 내적 형상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간단한 영한 사전, 국어 사전, 영영 사전 그 무엇을 찾아 보아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상 언어에서도 image라고 하면 외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과 내적인 성품, 속성을 지칭한다는 점은 상식입니다. 성경적 예도 이와 같습니다. [이는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고전11: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면 여자는 아닙니까? 이것은 내적인 속성이 아니라 외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외모에 변화가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나서 온 몸이 뒤틀렸다거나 머리에 뿔이 났다거나 없던 꼬리가 생겼거나 사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며, 저주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약3:9).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similitude. 결론: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다' -맞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외모만 그러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형상을 '모양- similitude'라고 규정했습니다. 형상이란 단어의 뜻만 알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입니다.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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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30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 J.C. 라일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J.C. 라일 님의 글입니다. - 존 찰스 라일(J C Ryle) 이것은 인간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전 교회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거듭났을 거예요."하는 정도의 대답으론 충분치 못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제시한 거듭남의 표적이나 증거 없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표적이나 증거나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여기를 주목하십시요. 지금부터 요한 일서에서 그것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Ⅰ.『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죄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온 의지를 다 쏟아부어 거기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도 한때는, 자신의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 따져본다거나, 악한 일에 탄식하는 법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와 죄 사이에는 다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둘은 사이 좋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는 죄를 미워하고,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며, 대항해 싸우기도 하고, 죄가 불러올 재앙을 숙고해 보고, 자기와 관련해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한 중압감을 느끼며, 죄로 말미암아 실족할 때면 스스로에게 탄식을 마지않고,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는 그에게 더이상 기쁨이 아니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는 그에게 지긋지긋한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죄가 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가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요일 1:8).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죄를 싫어하며, 자신의 혼이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는 것을 큰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로 나쁜 생각이 일어나고, 많은 결점들이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때때로 말이나 행동 속에 연약하고 미흡한 면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는 야고보가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하나니』(약 3:2)라고 한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점 거짓이 없는 말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 매일 자신에게 슬픔과 탄식이 되며, 온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혐오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Ⅱ.『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요일 5:1).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분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선택받은 거룩한 분이심을 믿으며, 그분 외에는 구주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가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신뢰할 기반을 찾고, 또한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의 죄들이 모두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믿고 있으며, 앞으로 닥칠 죽음과 심판 앞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의심과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때때로 당신에게 "나에겐 믿음이 전혀 없는 거 같아요."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렇게 한번 물어보십시요. "당신 자신의 선함과, 나아지려는 노력들, 그리고 당신이 한 기도와 사역들, 혹은 당신의 교회에 당신의 영원에 대한 소망을 두고 안정을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그만두고 당신의 신뢰를 다른 것에 두어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도 물어보십시요. 그러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자신이 연약하고 악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전 그리스도를 저버릴 순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귀한 것들을 발견했고, 그분만이 내 혼의 안식처입니다.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저의 신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Ⅲ.『의를 행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것을 아느니라』(요일 2:29). 혹자가 거듭났다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분투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피해 가려고 애씁니다. 그의 삶의 목적과 열정은 온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구주이자 삶의 본이십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명한 대로 살아감으로 자신이 그분의 친구임을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보다 바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 속에 내제하는 사악함이 자신을 붙들고 늘어질 때마다 몹시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는 자신 속에 죄의 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여,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 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 법의 존재를 없애지는 못할 지라도 말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의 경향을 따져 보고 평가를 하자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의 행동은 거룩하고, 마음의 성향 또한 거룩하며, 습관들 역시 거룩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꾸만 삐끗하고, 가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바람을 거 슬러 나아가는 배처럼, 그의 삶이 향하여 나아가는 큰 푯대는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실족하기도 하고,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존 뉴턴이 했던 고백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되고자 소망하는 하는 그 사람이 아니며,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소망하고 있는 다른 세상에서 될 그 사람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Ⅳ.『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요일 3:14). 거듭난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그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구주처럼, 그도 역시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연민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과는 또 다른 특별한 애정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편안한 느낌을 느낍니다. 또한 그는, 성도들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 더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은 학식이나 지력, 혹은 부의 축적 정도나 사회적 지위로 친구를 고를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은혜입니다. 큰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이들을 한 가족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동일한 적을 대항해 싸우는 동료 군사로 생각하고 전우애를 느낍니다. 또한 그들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벗으로 생각하고 동료애를 느낍니다. 그는 그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 또한 그에 관하여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사이에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 혹은 부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거듭난 자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Ⅴ.『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요일 5:4).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의견을 들고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길과 생각들, 그리고 풍조들을 거스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전환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사랑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의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를 피곤하게 할뿐입니다. 그의 눈에는 그저 헛되고, 무익하며, 하찮기 짝이 없는 것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영원한 것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그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세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하며 만족을 느낍니다. 세상은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비난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를 비웃지만, 그는 가던 길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사모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혐오 거리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는 값을 계산하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그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그건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못됩니다. 그는 거듭난 이후로 더 이상 욕망이나 관습의 노예가 아닙니다.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Ⅵ.『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자신을 지키나니』(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그의 혼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그의 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죄로 이끌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는 아무 단체에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시답잖은 대화들은 마음을 타락시키고, 악은 항상 선보다 훨씬 더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건강은 지키기 어렵지만 병은 너무도 쉽게 전염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데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에게는 친절하다거나 붙임성이 있다거나 심성이 착하다는 것 등이 친구를 선별하는 기준의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들은 물론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혼에도 항상 좋기만 한 것일까요? 그는 매일의 습관이나 행동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속기 쉬우며, 마귀는 자신을 해할 기회를 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는 늘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적국 한 가운데 거주하는 군인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항상 완전 군장을 하고서 언 제 닥쳐올 지 모르는 유혹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소 겪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혼은 적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며, 그래서 언제나 주변 정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겸손한 자세와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위의 여섯 가지가 거듭난 사람의 징표들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주의를 집중해서 읽어온 이들은, 그 여섯 가지를 마음 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서 이 징표들의 깊이나 드러나는 정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희미하고 어렴풋하고, 매우 미약하게 드러나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세차고 뚜렷하며 명백하고 분명해서 눈을 감고 봐도 명확히 보일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여섯 가지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이고, 또 어떤 것들은 저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징표들이 한 사람에게 하나같이 균등하게 드러나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들을 아주 명확하게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사도들의 글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보내는 마지막 일반 서신 중의 하나인 요한일서를 살펴본 결과,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들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찾아내었습니다. 즉,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세상을 이기며, 자신을 지키는 등이 그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앞에 여섯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듭남이란 그저 교회 회원이 되겠다는 고백을 의미하는 말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위의 사실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저는 이제 여기서 한가지 결론을 도달합니다. 그 결론은, 거듭난 사람만이 저 여섯 가지 증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증표가 없는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결론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의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징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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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6
[말씀] The Sanctified Life By Pastor Ray Redmon
The Sanctified Life 성화된 삶 By Pastor Ray Redmon 1 Corinthians 1:1-3 고린도전서 1:1-3. (1 Cor 1:1 KJV) Paul, called to be an apostle of Jesus Christ through the will of God, and Sosthenes our brother, (고린도전서 1:1 흠정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전서 1:2 흠정역)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고린도전서 1:3 흠정역) 하나님 우리 틜痴熾?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This sanctification is called "initial sanctification". 이 성화는 “본질적인 성화”라고 불리워집니다. The word sanctified means set apart for God's service. “sanctified, 성화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 따로 구별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Let me first say what sanctification is not, so you can comprehend what it is. 우선 무엇이 성화가 아닌지를 말하여 주면, 여러분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Sanctification is not freedom from temptation. 1. 성화는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As you live the sanctified, or set apart life you will no doubt be tempted more and more. 여러분이 성화된 삶을 살기에, 또는 구별된 삶을 살기에 여러분은 의심할 바 없이 더욱 더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Until then you have caused no trouble or turmoil to the kingdom of Satan. 여러분이 사탄의 왕국에 문제나 소란거리가 되지 않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Once you are sanctified you immediately become a target of Satan's attacks. 한 번 여러분이 구별되어진다면 여러분은 그 즉시 사탄의 공격의 목표가 됩니다. So sanctification is not freedom from temptation. 따라서 성화는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2. Sanctification is not a guarantee of safety from the possibility of sin. 2. 성화는 죄의 가능성으로부터의 안전의 보증이 아닙니다. In other words you and I as a Christian will not live a sinless, perfect life.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과 저는 죄 없는 삶,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1 John 1:6-8; 요한일서 1:6-8. (요한일서 1:6 흠정역)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 말하고 어둠 가운데 걸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거니와 (요한일서 1:7 흠정역)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일서 1:8 흠정역) 만이 우리가 죄 없다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요, There is no condition in this life where a Christian is safe from the possibility of sin. 이생의 삶 안의 조건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Every Christian is vulnerable to Satan's attack and to sin.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탄의 공격과 죄에 대해 취약합니다. We must be on our guard, and when we do sin we must confess it and forsake it.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하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자백해야 하고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The warning is to those who rise the highest can fall the lowest in this life. 가장 높이 있었던 사람들이 삶의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할 수 있음이 경고입니다. 3. Sanctification is not a gradual deliverance from sin 3. 성화는 죄로부터의 단계적인 해방이 아닙니다. Many Christians think they grow into sanctification little by little.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조금씩 성화 속으로 성장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That is never God's way of victory.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승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Sin is dealt with, settled with, done once for all. 죄는 단번에 청산되어지고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Sanctification means that sin's power is broken and you yield yourself no more to sin. 성화는 죄의 권세가 깨어졌고 더 이상 여러분이 죄를 산출해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We who are saved are no longer the servants of sin. 구원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Now let's look at what sanctification is. 자 그럼 이제 성화가 무엇인지 보십시다. 1. Sanctification is an instantaneous crisis experience. 1. 성화는 순간적인 갈림길의 체험입니다. That simply means it has a beginning. 그것은 간단하게 시작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When the children of Israel crossed the river Jordan, they found the crossing a crises experience.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르단 강을 건넜을 때, 그들은 갈림길을 건너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The crossing happened at a certain hour, a certain day, a certain month, and a certain year in their history. 건너가는 것은 그들의 역사 안에서 확실한 시간, 확실한 날, 확실한 달, 확실한 년도에 일어났습니다. In the morning they were on the wilderness side of the Jordan. 아침에 그들은 요르단 강 곁의 광야에 있었습니다. In the evening they were on the opposite bank of the river. 저녁에 그들은 맞은편의 강기슭에 있었습니다. There was a personal decision in each of their lives to make the crossing. 그들 개개인의 삶 안에서 건너기로 하는 개인적인 선택이 있었습니다. They knew what they were leaving behind. 그들은 그들이 뒤편에 두고 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Because for forty many years they had experienced the hardships and disappointments of the wilderness. 왜냐하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그들은 고난과 실망을 경험했었기 때문입니다. Our old way of life is like the wilderness journey. 우리의 삶의 옛 방식은 광야의 여행과도 같습니다. The only thing the children of Israel knew about the other side of Jordan was what God had told them.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요르단 강 저편에 관해 알고 있던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 밖에 없었습니다. Ten of the twelve spies had brought back a huge branch of grapes and negative reports of giants.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져온 것은 커다란 포도송이 가지와 거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But God told them what was in the land, it was full of milk and honey.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땅에 무엇이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로 가득 찬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If Israel was to enjoy the benefits they must believe God's word and cross the river Jordan. 만일 이스라엘이 은혜를 누렸다면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요르단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The crossing must be done by faith. 건넘은 믿음이 의해 행해져야만 합니다. It was a crises experience, the water was high, and they were turning their backs on a familiar way of life. 그것은 갈림길의 체험입니다, 물은 높고, 그들은 그들의 등을 익숙한 삶의 길로 돌이키고 있었습니다. That is the most difficult thing for the new Christian to do. 그것은 새신자가 행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2. Sanctification is a life of victory over sin. 2. 성화는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입니다. If sanctification is not a life of victory over sin, then it is nothing at all. 만일 성화가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God has guaranteed deliverance from the power of sin. 하나님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If you profess to be saved, and sin continues to have dominion over you, your life is a mockery to God. 만일 여러분이 구원 받은 체 한다면, 죄는 여러분 위에서 지배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When I say sin continues to have dominion over you, I mean sin has total control of your life. 제가 죄는 여러분 위에서 계속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죄가 여러분의 삶의 전체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While it is true you and I are going to sin, that's why the promise of 1 John 1:9 was given to the believer. 여러분과 제가 죄를 지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또한 신자들에게 요한일서 1:9의 말씀이 주어졌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1:9 흠정역)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You and I are going to sin, but as a child of God we are not going to live in the pleasures of sin. 여러분과 저는 죄를 지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죄의 쾌락 속에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The person who names the name of Christ and thinks he can live like the devil has been deceived.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마귀처럼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속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Listen to what Jesus Himself said about some in the last days who thought they were saved.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경청해 보십시오. Some think their Christian activities qualifies them for heaven, when it does not. 몇 몇 사람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의 활동들이 그들에게 천국에 갈 자격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Christian activities are nothing but works and works don't save sinners from hell. 그리스도인의 활동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행위이며 행위는 죄인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합니다. Matthew 7:21-23; 마태복음 7:21-23. (Mat 7:21 KJV) Not every 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he that doeth the will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마태복음 7:21 흠정역)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Mat 7:22 KJV)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in thy name? and in thy name have cast out devils? and in thy name done many wonderful works? (마태복음 7:22 흠정역)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Mat 7:23 KJV) And then will I profess un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e that work iniquity. (마태복음 7:23 흠정역)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In V-21 the will of the Father is to repent and believe the gospel of Christ. 21절에서 아버지의 뜻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To repent means to be born again of the Spirit. 회개하는 것은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What does it mean to be born of the Spirit? 영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It means our dead spirit which died in Adam is given new life by the Holy Spirit, or a rebirth. 아담 안에서 우리의 죽어 있던 영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 또는 다시 태어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It means when you hear a clear presentation of the plan of salvation, you can make a conscious decision. 여러분이 구원의 계획에 대해 명확한 진술을 들었을 때, 여러분이 의식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The decision to accept Christ or reject Christ as your personal Savior. 여러분의 개인적인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는 결정입니다. When the lost person accepts Christ as their personal Savior, his spirit is immediately sanctified. 잃어버린 자가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영은 즉시 죄의 씻김을 받게 됩니다. He is born again of the Spirit of God.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납니다. Nothing or no one can sever that eternal tie between God and the child of God.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영원한 결속을 끊을 수 없습니다. Many people get confused between the spiritual man and the flesh. 많은 사람들이 영의 사람과 육체를 혼동합니다. When they sin they think they loose their salvation and must be born once again. 그들이 죄를 범할 때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다시 한 번 더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Little do they know that such actions puts the Son of God to an open shame. 그들의 각각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공개적인 수치에 둔다는 것을 그들은 거의 알지 못합니다. Shallow, and unscriptural teachings produces shallow and confused Christians. 피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이 피상적이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듭니다. In other cases it produces look-a-like Christians, such as those we read about in Matthew 7:21-23. 또 다른 경우 그것은 그리스도인 같아 보이는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마태복음 7:21-23에서 우리가 읽었던 것과 같습니다. If a child of God is going to grow in Christ he must drink the milk of the word and eat the meat of the word.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려면 그는 반드시 말씀의 젖을 먹어야 하고 말씀의 육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Spiritual, milk drinking Christians will never grow up spiritually until they becomes spiritual meat eaters. 영적인, 젖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영적인 육식을 먹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 결코 영적으로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Notice 1 Corinthians 3:2-3; 고린도전서 3:2-3을 보십시오. (1 Cor 3:2 KJV) I have fed you with milk, and not with meat: for hitherto ye were not able to bear it, neither yet now are ye able. (고린도전서 3:2 흠정역)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1 Cor 3:3 KJV) For ye are yet carnal: for whereas there is among you envying, and strife, and divisions, are ye not carnal, and walk as men? (고린도전서 3:3 흠정역)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리요? Milk drinking Christians will always remain in the baby stage of their spiritual life and never mature. 젖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린 아이 상태로 있을 것이며 그들의 영적인 삶의 단계는 결코 성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Notice Hebrews 5:12-14; 히브리서 5:12-14를 보십시오. (Heb 5:12 KJV) For when for the time ye ought to be teachers, ye have need that one teach you again which be the first principles of the oracles of God; and are become such as have need of milk, and not of strong meat. (히브리서 5:12 흠정역) 이는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These Christians forgot the very basic things of the Christian life and must be taught again and again. 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기초적인 것들도 잊어버렸으며 계속해서 배워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Heb 5:13 KJV) For every one that useth milk is unskilful in the word of righteousness: for he is a babe. (히브리서 5:13 흠정역)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 (Heb 5:14 KJV) But strong meat belongeth to them that are of full age, even those who by reason of use have their senses exercised to discern both good and evil. (히브리서 5:14 흠정역)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Look at those spiritual meat eaters. 영적인 육식을 섭취하는 이들을 보십시오. Their spiritual life has developed into that of a full age soldier for Christ. 그들의 영적인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군사가 되기에 충분한 연령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These mature Christians, these meat eaters know how to fight the spiritual warfare.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육식을 섭취하는 자들은 영적인 전투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Their spiritual senses have been exercised to discern both good and evil. 그들의 영적인 감각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데 훈련되어져 왔습니다. Paul describes them in Ephesians 6:12-18. 바울은 에베소서 6:12-18에서 그것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Eph 6:12 KJV) For we wrestle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principalities, against powers, against the rulers of the darkness of this world, against spiritual wickedness in high places. (에베소서 6:12 흠정역)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Eph 6:13 KJV) Wherefore take unto you the whole armour of God, that ye may be able to withstand in the evil day, and having done all, to stand. (에베소서 6:13 흠정역)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것은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함이라. (Eph 6:14 KJV) Stand therefore, having your loins girt about with truth, and having on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에베소서 6:14 흠정역)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을 입고 (Eph 6:15 KJV) And your feet sho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에베소서 6:15 흠정역)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Eph 6:16 KJV) Above all, taking the shield of faith, wherewith ye shall be able to quench all the fiery darts of the wicked. (에베소서 6:16 흠정역)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이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 (Eph 6:17 KJV) And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에베소서 6:17 흠정역)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Eph 6:18 KJV)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에베소서 6:18 흠정역)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This is not the ordinary, or average Christian. 이것은 평범한, 또는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They are taught in the things of God and recognize the pit falls of life. 그들은 하나님의 것들 안에서 가르침 받으며 삶의 타락을 인지합니다. When you trusted Christ as your personal Savior your spirit was spiritually sanctified.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신뢰할 때 여러분의 영은 영적으로 죄의 씻김을 받게 됩니다. If you have never been saved you are not sanctified spiritually. 만일 여러분이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씻김 받지 못한 것입니다. If Christ were to come today for His saints, you would be left behind.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늘 그들의 성도들을 위해 오셨다면 여러분은 뒤에 남겨졌을 것입니다. What a tragedy that day will bring to millions and millions of people. 그 날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닥치게 될 비극입니다. In closing, listen to what the word of God tells us in Ephesians 2:8-9. 맺음으로,, 에베소서 2:8-9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Eph 2:8 KJV)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에베소서 2:8 흠정역)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ph 2:9 KJV) Not of works, lest any man should boast. (에베소서 2:9 흠정역)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Saved by grace, God's grace.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There is nothing you and I can do to earn our salvation. 우리의 구원을 얻기 위해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Christ has paid the sin debt, and all you must do is accept the payment by faith. 그리스도께서 죄의 빚을 지불하셨으며,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전부는 믿음으로 그 지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Bow your heads for prayer please. 기도를 위해 머리를 숙여 주시기 바랍니다 Part Two - The Sanctified Life 구별된 삶 - 두 번째 You Have Not Passed this Way before 이전에는 가 본적 없는 길. Joshua 3:1-5. 여호수아기 3:1-5. (Josh 3:1 KJV) And Joshua 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they removed from Shittim, and came to Jordan, he and all the children of Israel, and lodged there before they passed over. (수 3:1 흠정역)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온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시팀에서 떠나 요르단 강에 이르러 건너기 전에 거기서 머무니라. (Josh 3:2 KJV) And it came to pass after three days, that the officers went through the host; (수 3:2 흠정역) 사흘 뒤에 관원들이 군대를 두루 다니며 (Josh 3:3 KJV) And they commanded the people, saying, When ye see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your God, and the priests the Levites bearing it, then ye shall remove from your place, and go after it. (수 3:3 흠정역)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을 보거든 너희 처소를 떠나 그 뒤를 따르라. (Josh 3:4 KJV) Yet there shall be a space between you and it, about two thousand cubits by measure: come not near unto it, that ye may know the way by which ye must go: for ye have not passed this way heretofore. (수 3:4 흠정역) 그러나 너희와 그 궤 사이의 거리를 이천 큐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가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게 되리니 이는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Josh 3:5 KJV) And Joshua said unto the people, Sanctify yourselves: for tomorrow the LORD will do wonders among you. (수 3:5 흠정역)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할지니 이는 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이적들을 행하실 것임이라. We’re not sure how many Jews and others left Egypt, but perhaps there was over a Million people in all. 얼마나 많은 수의 유대인과 타 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일 백만은 넘지 않았을까 합니다. But only three of the original mixed multitude which left Egypt followed God’s direction for forty years. 그러나 이집트를 떠나온 잡다한 최초의 무리들 중 오직 세 사람만이 40년 동안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Those three were Moses, Joshua, and Caleb. 그들은 모세, 여호수아, 갈렙이었습니다. Many Christians read about Joshua and Caleb, but they lost contact with Moses.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해 읽지만 모세와의 연관성은 없어집니다. What happened to Moses?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We can find the answer to that question in Numbers 20:7-12. 우리는 그 대답을 민수기 20:7-12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Num 20:7 KJV)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 (민 20:7 흠정역)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Num 20:8 KJV) Take the rod, and gather thou the assembly together, thou, and Aaron thy brother, and speak ye unto the rock before their eyes; and it shall give forth his water, and thou shalt bring forth to them water out of the rock: so thou shalt give the congregation and their beasts drink. (민 20:8 흠정역)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 (Num 20:9 KJV) And Moses took the rod from before the LORD, as he commanded him. (민 20:9 흠정역) 모세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 앞에서 막대기를 취하니라. (Num 20:10 KJV) And Moses and Aaron gathered the congregation together before the rock, and he said unto them, Hear now, ye rebels; must we fetch you water out of this rock? (민 20:10 흠정역) 모세와 아론이 그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Num 20:11 KJV) And Moses lifted up his hand, and with his rod he smote the rock twice: and the water came out abundantly, and the congregation drank, and their beasts also. (민 20:11 흠정역)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Num 20:12 KJV)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and Aaron, Because ye believed me not, to sanctify me in the eyes of the children of Israel, therefore ye shall not bring this congregation into the land which I have given them. (민 20:12 흠정역) 그때에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Moses disobeyed the Lord in what seemed to be a very small thing. 모세는 무척이나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 주님께 불순종했습니다. Everything that God says in His word is very important.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If everything was not important God would not have said it, or written it for our learning. 만일 모두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움을 위해 그것을 말씀하거나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God told Moses to do it God’s way.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ut Moses, in his anger said, "I will do it my way."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서, “내 방식대로 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There is a great prices to pay for God’s children who want to serve God their way and not God’s way.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르지 않고 그들의 방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가 있습니다. And in doing it his way it cost Moses greatly. 그리고 이를 그의 방식대로 행함에 있어 모세가 치룬 비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The judgement of God doesn't always come immediately.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나 즉각적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In many cases years pass before we feel God’s judgement in our lives.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가 느끼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지납니다. The purpose for this is God is long suffering and desires for us to repent.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So just because a child of God sins against God and God doesn't bring swift judgement, God hasn't forgotten. 따라서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을 하지는 않으시며,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실을 잊지도 않으십니다. God is simply waiting for His child to repent. 하나님께서는 그저 그 분의 자녀가 회개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Judgement did not come swiftly to Moses, but God was finished with him. 심판이 즉각적으로 모세에게 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와의 관계를 끝내셨습니다. Moses could have repented, but God had already pronounced Judgement. 모세는 회개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There was no changing of God’s mind. 하나님의 마음에 변화는 없었습니다. Moses died on the wilderness side of Jordan because of his anger and his disobedience to God’s message. 모세는 그의 화냄과 하나님의 말씀에의 불순종 때문에 요르단 강 저편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God told Moses to speak to the rock and water would come out and give the people and cattle drink.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면 물이 나올 것이니 그 물을 주어 사람들과 가축들이 마실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ut Moses, instead of speaking to the rock, in his anger with the people, Moses smote the rock and disobeyed God. 그러나 모세는, 반석에게 말하는 대신, 사람들을 향한 화냄과 함께, 반석을 힘껏 내려쳤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Water did come out of the rock, but God pronounced Moses ministry finished at that point. 물은 실제로 반석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 때를 기하여 모세의 사역이 끝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Finished because of his disobedience to the command of God.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불순종으로 인한 끝장이었습니다. God called Moses up into a mountain and there Moses died. 하나님은 모세를 산 속으로 부르셨고 거기서 모세는 죽었습니다. God buried Moses somewhere in the mountains. 하나님은 그 산의 어디엔가 모세를 묻었습니다. Not one person to this day knows where Moses was buried 오늘날 그 누구도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For the simple reason, the Jews would have worshiped Moses. 유대인들이 모세를 숭배해 왔을 지도 모르는 단순한 이유에서, In Joshua 1:1-2 God puts Joshua in the leadership position of Moses. 여호수아기 1:1-2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감당했던 지도자 자리에 여호수아를 임명하십니다. (Josh 1:1 KJV) Now after the death of Moses the servant of the LORD it came to pass, that the LORD spake unto Joshua the son of Nun, Moses' minister, saying, (수 1:1 흠정역) 이제 주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를 섬기던 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Josh 1:2 KJV) Moses my servant is dead; now therefore arise, go over this Jordan, thou, and all this people, unto the land which I do give to them, even to the children of Israel. (수 1:2 흠정역)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이 온 백성과 함께 일어나 이 요르단 강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Then in Joshua 3:5 Joshua was given a message from God to the nation of Israel to "sanctify themselves." 그 다음 여호수아기 3:5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를 구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Because tomorrow God will do wonders among you. 왜냐하면 내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이적들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Do you know what would have happened to Israel if they had not sanctified themselves? 만일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구별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The river would not have stopped when the priests feet touched the water. 제사장들이 그들의 발을 물에 담갔을 때 강물이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Israel would not have been able to cross over into the promise land.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건너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Jericho would not have been taken. 여리고를 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The future of Israel and all the promises to the nation of Israel would not have been realized. 이스라엘의 미래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든 약속들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So God told Joshua and the children of Israel to sanctify themselves. 따라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스스로를 구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n initial sanctification God sanctifies all believers who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초기 聖化는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신자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When we as sinners trusted Christ we were put in Christ, kept save in the hand of the Father. 죄인들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아버지의 손 안에서 구원은 지켜지게 됩니다. Notice what Jesus said in John 10:28-29. 요한복음 10:28-29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John 10:28 KJV) And I give unto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either shall any man pluck them out of my hand. (요 10:28 흠정역)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John 10:29 KJV) My Father, which gave them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man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요 10:29 흠정역)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There are many Christians who need to read that verse who don’t believe in eternal security. 영원히 지켜주시는 것을 믿지 않는, 그래서 이 구절을 읽어볼 필요가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I’m sure some who are saved have read it many times but they still can’t believe God’s holy, eternal, word. 구원 받은 몇 몇 사람 중 이 부분을 여러 차례 읽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Satan has their faith all twisted up in knots. 사탄이 그들의 믿음을 완전히 꼬아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There are many Christians who are living on the very edge of fear and spiritual collapse. 두려움의 가장자리 위에서, 영적인 붕괴의 끝자락에서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Fearful that they are going to loose their salvation. 그들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Fearful that God is not able to do what He said He will do. 그분께서 하시리라 말씀하셨던 것을 하실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입니다. Fearful that God cannot keep the child of God saved for eternity. 하나님께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지켜주지 못하실 거라는 두려움입니다. Today we want to look at progressive sanctification, the second step in sanctification, so listen carefully. 오늘 우리는 점진적인 구별됨[성화]을 보고자 합니다, 이는 성화의 두 번째 단계이며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Progressive sanctification involves something we as Christians are commanded to do. 전진적인 성화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되어진 어떤 것을 포함합니다. Joshua said to the children of Israel, "Sanctify Yourselves."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라.” Because tomorrow God will do wonders through you. 왜냐하면 내일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The Bible is very clear, God does not do wonders through unsanctified Christians. 성경은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구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If you want to experience the Christ’s full joy in your life;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If you want to see God do something special in your life;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어떤 것을 행하시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You are going to have to sanctify yourself, because it is a personal thing.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Sanctify yourself. 여러분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하십시오. I want us to first look at what does it mean to be an unsanctified person? 저는 우선 거룩히 구별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러분과 보고자 합니다. And then we will learn from the word of God how to sanctify ourselves. 그리고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자신을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하는지 배울 것입니다. But first let’s look at the unsanctified life and what kind of life it is. 그러나 우선 구별되지 못한 삶과 그러한 삶의 종류는 어떤 것인지 먼저 보십시다. Paul explains it very carefully and simple to understand in Colossians 3:5-7. 바울은 이것을 골로새서 3:5-7에서 무척이나 주의 깊게 그리고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Col 3:5 KJV) Mortify therefore your members which are upon the earth; fornication, uncleanness, inordinate affection, evil concupiscence, and covetousness, which is idolatry: (골 3:5 흠정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Col 3:6 KJV) For which things' sake the wrath of God cometh o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골 3:6 흠정역)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 (Col 3:7 KJV) In the which ye also walked some time, when ye lived in them. (골 3:7 흠정역)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걸었으나 Now those verses are pretty simple to understand. 지금 이 구절들은 꽤나 이해하기에 간단합니다. In V-5 we are told to "mortify"our members which are upon the earth. 5절에서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 지체들을 “죽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Mortify means to subdue the habits of our wicked mind. “Mortify"는 우리의 사악한 마음에 있는 습관들을 정복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It means to put them to death, to kill them by focusing on things above. 그것은 그것들을 죽이고, 위에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Then Paul names those things in V-8-9 that the child of God is to put to death. 그 다음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죽여야 할 것들을 거명합니다. (Col 3:8 KJV) But now ye also put off all these; anger, wrath, malice, blasphemy, filthy communication out of your mouth. (골 3:8 흠정역) 이제는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어 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 모독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 (Col 3:9 KJV) Lie not one to another, seeing that ye have put off the old man with his deeds; (골 3:9 흠정역)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You either kill them or Paul said in V-6-7 they will kill you. 여러분이 그것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그것들이 여러분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Col 3:6 KJV) For which things' sake the wrath of God cometh o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골 3:6 흠정역)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 (Col 3:7 KJV) In the which ye also walked some time, when ye lived in them. (골 3:7 흠정역)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걸었으나 If you will notice very closely in V-8 the very first sin that Paul mentions is anger. 만일 여러분들이 매우 주의 깊게 8절을 주목한다면, 바울이 맨 먼저 언급하고 있는 죄는 분노입니다. And all the following sins which are mentioned are the direct results of "anger." 그리고 뒤따라 언급되는 모든 죄들은 “분노”의 직접적인 결과들입니다. So anger in the life of the child of God is a very destructive sin.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 속에서 분노는 매우 파괴적인 죄입니다. Paul said to put anger out of our life and these other sins mentioned will also go out of our life. 바울은 우리 삶에서 분노를 내어 버리라고 말했으며, 언급되어진 이러한 다른 죄들도 또한 우리 삶으로부터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Notice Galatians 5:14-15; 갈라디아서 5:14-15를 보십시오. (Gal 5:14 KJV) For all the law is fulfilled in one word, even in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갈 5:14 흠정역) 이는 온 율법이,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음이라. (Gal 5:15 KJV) But if ye bite and devour one another, take heed that ye be not consumed one of another. (갈 5:15 흠정역) 만일 너희가 서로 물고 삼키면 서로에게 소멸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How many times have you seen Christians angry at other Christians?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 오셨습니까? Husbands and wives cannot get alone among themselves, they bite and devour one another. 남편들과 아내들은 스스로 혼자가 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서로 물고 삼킵니다. Families should be consumed with love, but instead they are consumed with anger. 가족들은 사랑을 사용하여야 하지만, 그 대신 그들은 분노로 소모됩니다. These are the works of an unsanctified life, and the results are devastating. 이것들이 성화되지 못한 삶의 결과들이며, 황폐한 결과들입니다. Now let’s look at the sanctified life of the child of God.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구별된 삶을 보십시다. What does it mean to sanctify yourself ?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Remember, in the first phase of sanctification, God sanctified us when we trusted Christ as our personal Savior. 기억하십시오, 구별됨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Now in the second step of sanctification we are to sanctify ourselves. 이제 구별됨의 두 번째 단계로 우리는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해야 합니다. It is God’s desire that we live, work, and serve in sanctify bodies. 그것은 우리가 구별된 몸들로 살고 일하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이 바라십니다. In Colossians 3:1-5 Paul gives the child of God clear cut answers to the sanctified life. 골로새서 3:1-5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별된 삶에 대한 딱 부러지는 답들을 줍니다. (Col 3:1 KJV) If ye then be risen with Christ, seek those things which are above, where Christ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골 3:1 흠정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Col 3:2 KJV) Set your affection on things above, not on things on the earth. (골 3:2 흠정역)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Col 3:3 KJV) For ye are dead, and your life is hid with Christ in God. (골 3:3 흠정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 (Col 3:4 KJV) When Christ, who is our life, shall appear, then shall ye also appear with him in glory. (골 3:4 흠정역)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Paul said if you’re saved and you know it, set your affections on things above. 바울은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그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라고 말했습니다. What does Paul mean on things above? 바울이 말한 위에 있는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Paul is referring to heaven and the things of eternity. 바울은 하늘에 속한 것들과 영원의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We’re dead to the things of the world.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향해서는 죽었습니다. Remember, we were crucified with Christ.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To sanctify yourself is to put those things out of your life that Paul mentioned in Colossians 3:5.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3:5에서 언급했던, 이러한 것들을 여러분의 삶으로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 (Col 3:5 KJV) Mortify therefore your members which are upon the earth; fornication, uncleanness, inordinate affection, evil concupiscence, and covetousness, which is idolatry: (골 3:5 흠정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Many Christians think if they do it once they are in good fellowship with God for the rest of their life.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그들이 그것을 한 번만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삶의 남은 날 동안 하나님과 좋은 교제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You may be in touch with God in salvation, but at the same time out of touch in fellowship and prayer. 여러분은 구원에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와 동시에 교제와 기도에서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This is not a one time thing, this is to be done daily. 이것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행해져야 합니다. It’s a re commitment to God, or a crucifixion of the old man every day. 하나님을 향한 재 헌신, 또는 날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That’s what it means to sanctify yourself to God. 그것이 하나님께 여러분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Set yourself apart for the service of God.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별도로 분리하십시오. It doesn’t mean for you to quit your job and go to Bible College. 그것은 여러분이 직장을 사직하고 신학교로 가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It doesn’t mean for you to surrender to the ministry. 그것은 여러분이 사역자로 헌신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It doesn’t mean for you to go to the mission field. 그것은 여러분이 선교 현장으로 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While God may be calling some to dedicate their lives to these ministries, but not all.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사역에 헌신하라고 어떤 이들을 부르시고 계실 수도 있지만, 모두 다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It means for you to live your normal daily lives but with a different focus and a different purpose. 그것은 여러분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지만 다른 초점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Setting our affections on things above and not on things on the earth."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Sanctified people are used of the Lord immediately. 구별된 사람들은 즉시 주님께 쓰임 받습니다. In the case of the children of Israel, tomorrow.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내일입니다. Do you know what would have happened to Israel if they had not sanctified themselves? 여러분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구별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지 아십니까? The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cross over into the promise land. 그들은 약속의 땅 안으로 건너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The river would not have stopped when the priests feet touched the water. 제사장들이 발을 강에 대었을 때, 강물은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Jericho would not have been taken. 여리고는 함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future of Israel and all the promises to the nation would not have been realized. 이스라엘의 미래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든 약속들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Christians who are walking in the flesh are missing God’s richest blessings in their life. 육체를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So Joshua said "sanctify yourself, " because God expects it. 따라서 여호수아는 “스스로를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Now lets look at 2 Timothy 2:19-21. 디모데후서 2:19-21을 보십시다. (2 Tim 2:19 KJV) Nevertheless the foundation of God standeth sure, having this seal, The Lord knoweth them that are his. And, Let every one that nameth the name of Christ depart from iniquity. (딤후 2:19 흠정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으며 거기에 이같이 새겨진 말씀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신다,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We are going to stop here for today.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There is still much material we must cover in the sanctified life. 우리가 다루어야 할 구별된 삶에 관한 내용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Let us bow our heads and pray. 기도를 위해 머리를 숙여 주십시오. Now would be a good time for you to give yourself to the Lord. 지금이 주님께 여러분 스스로를 드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For you to sanctify yourself to the Lord for God’s work.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님께 대하여 여러분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 말입니다. I believe God wants to use each of us in a wonderful way for God’s purpose. 저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 각자를 쓰시기 원한다고 믿습니다. Why not make that commitment to God today to sanctify yourself to God. 하나님을 향해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고 오늘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Father thank you for the word of God. 아버지의 말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Thank you Father for guiding us and teaching us how to sanctify ourselves. 어떻게 스스로를 구별하는지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Thank you for this church and the great potential that lies within each Christian life here today. 이 교회와 오늘 여기 모인 그리스도인 안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God bless them and use them for the cause of Christ, for the salvation of souls.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주시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그들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In Jesus name we pray, A-men.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art Three - The Sanctified Life 구별된 삶 - 세 번째 By Pastor Ray Redmon There is so much to be taught and so much to be learned about the sanctified life. 구별된 삶에 관해서는 수 없이 많은 가르침과 배움이 있습니다. There are many Christians who are afraid of the word sanctification. “성화, 구별됨”이라는 단어에 대해 두려워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Somehow they equate sanctification to speaking in tongues, and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아무래도 그들은 성화를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그 수준에 다다른 듯, 진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I believe these three messages will help you to understand more concerning sanctification. 저는 이 메시지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화에 관한 더 나은 이해를 얻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I want to expound on Last Sunday's message just a little before we get into the third step of sanctification. 저는 지난 주일 메시지의 전반부에서 성화의 세 번째 단계에 대해 설명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As we learned last week, it's the Christian's responsibility to sanctify themselves for the work of the Lord. 지난 주 우리가 배웠듯이, 주님의 말씀을 위해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책임입니다. To do God's work in the power and energy of the Spirit we as Christians must Set ourselves apart. 성령의 능력과 권능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를 분리해야만 합니다. That's what the word means, to set yourself apart for God's service. 그것은 하나님의 섬김을 위해 여러분 스스로를 따로 떼어 두라는 의미입니다. If God's people don't set them selves apart, the work of God will be done in the energy of the flesh. 만일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를 분리하여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은 육체의 힘으로 감당되어질 것입니다. Works done in the energy of the flesh will be burned at the judgement seat of christ. 육체의 힘으로 행하여진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불태워질 것입니다. Because we as Christians will all appear before Christ to answer for the deeds done in the body.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모습을 보이고 몸으로 행했던 것들에 대해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Bible says whether they be good or bad. 그리고 성경은 그것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말합니다. So the phrase good or bad simply tells me that all our works will be tried by fire. 좋다 나쁘다의 표현은 간단하게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이 불로 시험 받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Some Christians have the idea the only the good works done in life will be tried. 몇 몇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삶 중에서 선행만이 시험되어지리라 생각합니다. But every thing we do as a Christian will go into the fires of testing.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한 모든 일이 불에 던져져 시험받을 것입니다. Let's read some verses in Romans 14:10-12; 로마서 14:10-12의 구절들을 읽어 보겠습니다. (Rom 14:10 KJV) But why dost thou judge thy brother? or why dost thou set at nought thy brother? for we sha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롬 14:10 흠정역)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 (Rom 14:11 KJV) For it is written, As I live, saith the Lord, every knee shall bow to me, and every tongue shall confess to God. (롬 14:11 흠정역) 그 까닭은 기록된바,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니라. (Rom 14:12 KJV) So then every one of us shall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롬 14:12 흠정역)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Then notice also 2 Corinthians 5:10-11. 그 다음 고린도후서 5:10-11 역시 주목하세요. (2 Cor 5:10 KJV)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very one may receive the things done in his body, according to that he hath done, whether it be good or bad. (고후 5:10 흠정역)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임이라. 이로써 각 사람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서 행한 것들을 받으리라. (2 Cor 5:11 KJV) Knowing therefore the terror of the Lord, we persuade men; but we are made manifest unto God; and I trust also are made manifest in your consciences. (고후 5:11 흠정역) 그런즉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으니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난 줄로 확신하노라. There is going to be a lot of weeping here at this judgement of the believers. 이 심판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There are going to be many regrets at this judgement. 이 심판 자리에서 많은 후회가 터질 것입니다. When we see the scars in our Lord's hands which sin made by the nails which fastened our Lord to the cross; 그 때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붙들어 매어 둔 못에 의해 생긴 주님의 손에 생긴 흉터를 우리는 봅니다. When we look upon His precious head and see the prints left from the crown of thorns; 우리가 고개를 들어 그 분의 보배로운 머리를 보면 가시 면류관에 의해 남겨진 자국들을 봅니다. I believe we will weep and wail and say oh how I wish I had been more faithful to my blessed Lord! 우리는 눈물지으며, 나의 복되신 주를 위해 조금 더 신실하게 살아야 했건만, 하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Just being in Christ's presence will cause us to fall upon our faces in fear and trembling.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고개를 떨구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 있을 것입니다. When John, the beloved disciple who leaned upon Christ's breast, saw Christ in Revelation 1:12-18, notice John's reaction. 그리스도의 가슴께에서 배웠던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 요한계시록 1:12-18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요한의 반응에 주목해 보십시오. (Rev 1:12 KJV) And I turned to see the voice that spake with me. And being turned, I saw seven golden candlesticks; (계 1:12 흠정역) 이에 내가 돌아서서 나와 말씀하신 그 음성을 알아보려 하니라. 돌아설 때에 내가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더니 (Rev 1:13 KJV) And in the midst of the seven candlesticks one like unto the Son of man, clothed with a garment down to the foot, and girt about the paps with a golden girdle. (계 1:13 흠정역)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 (Rev 1:14 KJV) His head and his hairs were white like wool, as white as snow; and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계 1:14 흠정역)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 같고 (Rev 1:15 KJV) And his feet like unto fine brass, as if they burned in a furnace; and his voice as the sound of many waters. (계 1:15 흠정역) 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정제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Rev 1:16 KJV) And he had in his right hand seven stars: and out of his mouth went a sharp twoedged sword: and his countenance was as the sun shineth in his strength. (계 1:16 흠정역)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 (Rev 1:17 KJV) And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as dead. And he laid his right hand upon me, saying unto me, Fear not; I am the first and the last: (계 1:17 흠정역) 내가 그분을 볼 때에 그분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자같이 되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Rev 1:18 KJV) I am he that liveth, and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more, Amen; and have the keys of hell and of death. (계 1:18 흠정역)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볼지어다,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 John didn't go near the Glorified Lord, but the Glorified Lord drew near to John. 요한이 영화롭게 된 주님 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된 주께서 요한을 곁으로 이끄셨습니다. John didn't touch the Glorified Lord, but the Glorified Lord touched John. 요한이 영화롭게 된 주님을 만진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된 주께서 요한을 만지셨습니다. At the Judgement seat of Christ we are going to fear and tremble at the presence of the Lord.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에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Not only at the Lord's presence but fear will come upon us all as we anticipate what will come out of the fire. 주님의 임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시험을 지나 나타나게 될 것을 기다리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All our works of the flesh, all works done in the energy of the flesh will be burned up. 육체로 일한 우리의 모든 일들은, 육체의 힘으로 감당했던 모든 일들은 불살라질 것입니다. All works done for selfish reasons will be consumed in the fire of judgement. 이기적인 이유들로 했던 모든 일들은 심판의 불 안에서 소멸될 것입니다. In Revelation 1:17 our precious Lord told John to fear not. 계시록 1:17에서 우리의 보배로운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A few Wednesday services ago I brought a lesson on fear and how the devil uses fear against the child of God. 얼마 전 수요예배 때 저는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고 마귀가 어떻게 두려움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하는지 전했습니다. Fear and lack of faith, two very destructive weapons of the devil. 두려움과 믿음의 결핍, 두 가지는 무척이나 파괴적인 마귀의 무기입니다. We are to fear God, but we are not to fear man or what man can do to us.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나 사람이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God's people are to have faith in God's word.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Jesus said the words which I have spoken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말씀들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Jesus told two blind men in Matthew 9:29, Ye it unto you according to your faith. 예수님은 마태복음 9:29 두 시각장애인들에게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God has always blesses faith and will continue to blesses faith until Jesus comes.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을 복주시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을 계속해서 복 주실 것입니다. In fact faith is the only thing that God will bless. 사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복 주실 유일한 것입니다. Yes, God will bless our faithfulness, but faithfulness is attached to faith. 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을 복 주실 것이며, 신실함은 믿음에 매어져 있는 것입니다. If faithfulness is not attached to faith the Christian is working in the flesh. 만일 신실함이 믿음에 매어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은 육체로 행하는 것입니다. Please understand that our labor is a labor of love but also a labor of faith. 부디 우리의 수고가 사랑의 수고이며 믿음의 수고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Notice what the writer of the Book of Hebrews says in Hebrews 11:6.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11:6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주목하십시오. (Heb 11:6 KJV)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that cometh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em that diligently seek him. (히 11:6 흠정역)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All people want to please God, that's why people worship.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것은 곧 사람들이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그러나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Therefore, make sure that what you've doing is a labor of love and a work of faith. 그러므로, 여러분이 행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요 믿음의 수고라는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With all that in mind, I want us to look at four vessels which describes a person's life.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저는 사람의 삶을 묘사하는 네 그릇을 보기 원합니다. 2 Timothy 2:20-22; 디모데후서 2:20-22입니다. (2 Tim 2:20 KJV) But in a great house there are not only vessels of gold and of silver, but also of wood and of earth; and some to honour, and some to dishonour. (딤후 2:20 흠정역) 그런데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 Tim 2:21 KJV) If a man therefore purge himself from these, he shall be a vessel unto honour, sanctified, and meet for the master's use, and prepared unto every good work. (딤후 2:21 흠정역)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2 Tim 2:22 KJV) Flee also youthful lusts: but follow righteousness, faith, charity, peace, with them that call on the Lord out of a pure heart. (딤후 2:22 흠정역)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These four types of vessels tells us the whole story of the life of people in the church. 이 네 가지 종류의 그릇들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의 사람들의 삶을 전부 이야기 해 줍니다. This great house Paul is referring to is the house of God, the church.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큰 집은 하나님의 집, 곧 교회입니다. The house of God, the church is well a furnished house with beautiful plates and vessels. 하나님의 집, 교회는 좋은 가구에 아름다운 접시들과 그릇들이 있습니다. Some of these vessels are for different use. 이 중 몇 몇 그릇들은 용도가 다릅니다. There are many professors of salvation like these vessels of wood and earth.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신앙 고백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If you will remember that we read how the wood, hay, and stubble will be burned at the Judgement seat of Christ.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나무와 풀과 짚들이 어떻게 타 없어질 것인지 읽은 것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Only the gold, silver, and precious stone will survive the fires of God's judgement of the Christian's works. 오직 금, 은, 보배로운 돌만이 그리스도인의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시험에서 살아 남을 것입니다. In this great house there are vessels of honor and vessels of dishonor. 이 큰 집에는 귀한 그릇들도 있고 천한 그릇들도 있습니다. The vessels of honor are the children of God. 귀한 그릇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The vessels of dishonor are false professions of salvation. 천한 그릇들은 거짓 신앙 고백자들입니다. They are false Christians trying to go to heaven through the church.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로 교회를 통하여 천국으로 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This is totally impossible. 이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church is not the door to heaven, Christ is the door to heaven. 교회는 천국의 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문입니다. Think of these vessels as Christians in the church age, which includes you and me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는 교회 시대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이 그릇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These vessels are the living Christians, not the dead or departed Christians.. 이 그릇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며 죽었거나 과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They include people from every ethnic group and every walk of life. 그들은 모든 족속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They have different jobs and responsibilities. 그들은 각기 다른 직업과 책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But there is something different about each one of these vessels. 그러나 이 그릇들 중 각각은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The difference is their degree of dedication and sanctification to the Lord. 그 차이는 주님을 향한 그들의 헌신도와 구별됨의 정도입니다. The difference is also how they allow God to use their bodies. 그 차이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몸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Some of these vessels are described as gold. 이 그릇들 중 몇 몇은 금으로 묘사되어집니다. Now you don't put kimchee in a beautiful golden vessel and hide it away in a kimchi refrigerator. 여러분은 김치를 아름다운 금 그릇에 담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겠지요. You don't put water or milk in such a vessel made of gold. 여러분은 물이나 우유를 금으로 만든 그릇에 담지는 않을 것입니다. Precious things are placed in vessels of gold and silver for display so all the public can see. 보배로운 것들이 금과 은 그릇 안에 위치할 것이며 모든 대중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할 것입니다. The Christian testimony is being watched by the world.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세상에 의해 보여지는 존재가 되어집니다. What kind of vessel are you?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그릇입니까? Are you gold, silver, wood, or earth? 여러분은 금입니까, 은입니까, 나무입니까, 아니면 흙입니까? Wood and earth vessels are used for unsightly things.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천한 일에 사용됩니다. I hope and pray that none of our members are as such. 저는 우리 성도들 중에는 그와 같은 이들이 없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For just a few moments lets look at the third step in Sanctification. 자 이제 잠시 동안 구별됨의 세 번 째 단계를 보십시다. This third step is called ultimate sanctification. 이 세 번째 단계는 최후의 성화로 불려집니다. Ultimate sanctification is when Jesus comes back and changes our vile body into a glorious body. 최후의 성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천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어 질 때입니다. A body like our Lord's body.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은 몸입니다. Our bodies will be a glorified body which will be able to walk through walls. 우리의 몸은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A body that can move from point to point at thought. 이 몸은 생각만으로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A body that will know no death, no sickness, no pain. 이 몸은 죽음, 병, 고통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A body that is fit for eternity. 이 몸은 영원의 삶을 위해 적합한 것입니다. Notice 1 Corinthians 15:51 고린도전서 15:51을 보십시오. (1 Cor 15:51 KJV) Behold, I show you a mystery; We shall not all sleep, but we shall all be changed, that changing is ultimate sanctification. (고전 15:51 흠정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게 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판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The bride sat apart for her Husband the Lord Jesus Christ. 신부는 그녀의 남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따로 분리되어집니다. This body that we have at the present is not fashioned for eternity.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은 영원의 삶에는 적합한 형태가 아닙니다. It is fashioned for death. 그것은 죽을 것입니다. The reason is because of Adam's sin. 그 이유는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When Adam sinned every man in Adam was murdered by Satan.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사탄에 의해 죽임 당했습니다. We were all dead. 우리는 모두 죽었었습니다. In Christ we are all made alive.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All means those who have accepted Christ as their personal Savior.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If you've not saved today you will never enjoy heavens glory. 만일 여러분이 오늘 구원받지 못했다면 하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You will never have a new body to enjoy. 여러분은 누리는 새로운 몸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Three levels of sanctification. 세 가지 수준의 성화입니다. The first level we are sanctified in Christ. 첫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The second level, sanctify yourselves. 두 번째는 우리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The third level When Christ comes we shall be separated unto Him.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로 분리되어질 것입니다. Bow your heads please. 머리를 숙여주십시오.
lhyunsik
lhyu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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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6
[말씀] 사랑에 빠지다.By Pastor Ray Redmon
Falling in Love 사랑에 빠지다. By Pastor Ray Redmon In this life, there are two great emotions that are apposed to each other. 이 세상의 삶에는 나란히 놓아둘 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감정이 있습니다. These two emotions cause great conflict to ourselves and to others around us. 이러한 두 가지 감정들은 우리 스스로와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The emotions that I am referring to are love and hate. 제가 말하고 있는 그 감정들은 바로 사랑과 증오입니다. Both love and hate manifest themselves in opposite ways, simply because they are enemies of each other. 사랑과 미움은 명백하게 정 반대의 길입니다. 단순하게 말해 얘네들은 서로가 적이기 때문입니다. Both love and hate react to God and to God’s word in different ways as well. 사랑과 증오는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다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With that in mind, I have chosen for my text today 1 Corinthians 13. 이것을 마음에 품어 두시고, 저는 오늘의 본문을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골랐습니다. But before we can fully understand what Paul is talking about in 1 Corinthians 13, we must look closely at earlier scriptures in 1 Corinthians.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먼저 고린도전서의 전반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When the Holy Spirit moved upon Paul to write 1 Corinthians 13, Paul wrote them in reference to earlier problems of 1 Corinthians. 성령께서 바울을 움직여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실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앞부분에 있는 문제점들을 적고 있었습니다. We notice the Church of Corinth was a church that was full of Christians with special gifts and talents. 고린도교회는 특별한 은사와 재능을 겸비한 그리스도인들이 바글바글했던 교회라는 것을 보십시오. Because of this abundance of talent, jealously began to show itself among the Christians. 이렇게 재주가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질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Jealously, like a cancer eats away at the our joy and peace of God. 질투는 암세포처럼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안을 먹어 치웁니다. It is a terrible thing in the life of any believer. 신자의 삶에서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Jealously always causes anger, and ultimately divisions. 질투는 언제나 화를 불러 일으키고, 결국에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Until jealously is dealt with, the church will loose its soul winning power. 질투의 문제를 겪고 있는 동안, 교회는 영혼을 구령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No peace or joy will be found in the jealous believer’s life. 질투에 빠진 신자의 삶에서 기쁨과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Soul winning, the great commission to win the lost to Christ, and Holy Spirit power will be lost in the church. 그러한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지상 명령인 구령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This is described very clearly in the Book of Revelation, Chapters 2-3 of losing your first love. 이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으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매우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Soul winning is God’s first love and when you loose your zeal, and love for lost souls, you’ve lost all but your own salvation. 구령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이요, 여러분이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 밖에 없습니다. The emotion of hate over love wins out, now you are only concerned about your selfish self. 증오가 사랑의 감정을 눌러 이길 때, 여러분은 오직 자기 자신만 신경 쓸 것입니다. Which is a terrible, terrible condition to find ones self in. 그렇게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의 중심은 너무도 끔찍한 상태입니다. What caused these problems in this great church at Corinth? 고린도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Let’s see if we can find the answers in the word of God and learn from their mistakes.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실수로부터 배우도록 하십시다. After all, these things were written for our admonition and our learning.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내용입니다. We must first go all the way back to 1 Corinthians 1. 우선 고린도전서 1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겠습니다. I. The first problem in the church at Corinth was divisions over personalities, 1 Corinthians 1:11-13. I. 고린도교회의 첫 번째 문제점은 유명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분열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13입니다. (1 Cor 1:11 KJV) For it hath been declared unto me of you, my brethren, by them which are of the house of Chloe, that there are contentions among you. (고린도전서 1:11 흠정역) 이는,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 편으로 너희에 관한 일 곧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음을 내가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 (1 Cor 1:12 KJV) Now this I say, that every one of you saith, I am of Paul; and I of Apollos; and I of Cephas; and I of Christ. (고린도전서 1:12 흠정역)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한다고 하니 (1 Cor 1:13 KJV) Is Christ divided? was Paul crucified for you? or were ye baptized in the name of Paul? (고린도전서 1:13 흠정역)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Some concerned child of God told Paul of the problem in the church. 교회를 걱정하는 하나님의 자녀 몇 사람이 바울에게 그 교회 내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They did not make it a point to gossip to others about the problem, they simply told their missionary.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관한 험담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선교사에게 그 문제를 전했습니다. Paul wrote the letter to the church, named the house of Chole as the one who notified him of the problem. 바울은 그 교회에 편지를 쓰며 글로에의 집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그 문제를 알게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Some of the Christians were bragging about the one who baptized them. 그들에게 침례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뽐내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They were bragging as if this gave them a higher status in the church. 그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교회 내에서 마치 더 높은 지위를 주기라도 하는 양 뻐기고 있었습니다. Four personalities were named, Paul, Apollos, Cephes (Peter), and Christ.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Paul rebukes the foolish, child like thinking of those immature Christians, and future saints as well. 바울은 이렇게 어리석고 유치한 생각을 하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과 성도들을 책망합니다. Concerning higher status in the church, we are all children of God. 교회 내에서 더 높은 지위에 관해 생각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There are however some with greater responsibilities than others, but we are all servants of God.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있을 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If you forget that simple Biblical truth you will have problems with the old flesh until you go to the grave. 만일 여러분들이 이같이 단순한 성경적 진리를 망각한다면 여러분은 무덤에 갈 때까지 옛사람의 문제를 겪을 것입니다. II. The second problem in the church at Corinth was dissensions. II.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점은 분쟁이었습니다. This church tolerated heresies, or wrong doctrine. 이 교회는 이단이나 잘못된 교리에 관대했습니다. Notice 1 Corinthians 11:18-19.고린도전서 11:18-19를 보십시오. (1 Cor 11:18 KJV) For first of all, when ye come together in the church, I hear that there be divisions among you; and I partly believe it.! (고린도전서 11:18 흠정역) 우선은 너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 함을 내가 듣고 어느 정도 그 말을 믿노니 (1 Cor 11:19 KJV) For there must be also heresies among you, that they which are approved may be made manifest among you. (고린도전서 11:19 흠정역) 이는 너희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들이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Wrong doctrine causes division among the people. 잘못된 교리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We are not told what the heresies were. 우리는 문제가 된 그 이단 파당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But it is clear from the word of God that there were factions and cliques. 그러나 당쟁과 파벌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These factions and cliques were born out of social functions. 이러한 당쟁과 파벌은 사교모임에서 태동했습니다. Social functions always get out of hand when someone seeks to solve a problem, or teaches an unfamiliar doctrine. 사교모임은 언제나 누군가가 문제의 해결책을 찾거나 생소한 교리를 가르칠 때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갑니다. That’s what happened at the Corinthian church. 이것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It all started when someone boasted about their previous relationship in their last church.이것은 모두 기존 교회에서 그들의 예전 관계에 관해 누군가가 떠벌리기 시작할 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We didn’t do it like that in our church they said; why don’t we change some things, someone else says? 우리는 교회는 “우리 이것을 바꾸어보면 어때요, 다른 사람들은 뭐라든가요?" 라는 식으로 궁시렁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This kind of foolishness brings about factions and divisions. 이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필경 파당과 분열을 가져 옵니다. Satan uses such foolishness to weaken and destroy the church. 사탄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사용해서 교회를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파괴시킵니다. Be wiser than the Corinthian Christians, don’t get caught up in Satan’s trap.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지혜로워지십시오. 사탄의 함정에 걸려들지 마십시오. III. The third problem was disrespect, and discrimination.I II. 세 번째 문제점은 무례함과 차별이었습니다. They disrespected the word of God, the house of God, and the leadership of the Pastor.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대하지 않았고, 목사의 리더십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I’ll tell you one thing, I would not have wanted to be the Pastor of that church. 한 가지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이러한 교회의 목사는 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Problem after problem after problem! 문제, 또 문제, 산 넘어 산입니다. Church members make a mess of things and someone else has to deal with the problem. 교회 성도들이 사고를 일으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수습합니다. Then they shunned the poor in their own church. 그 다음 그들은 교회 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피하려 했습니다. Those who were of higher social status and had greater gifts looked down on the poor. 사회적 지위와 보다 큰 은사를 지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Did you know that same situation exists in churches today?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동일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How terrible, how un Christian, how ungodly!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입니까? 얼마나 불경한 태도입니까! Christ preached to all men, rich and poor. 그리스도는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But the common people received our Lord’s words with open arms and open hearts Mark 12:37.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두 손 들어 받아들였습니다. 마가복음 12:37입니다. (Mark 12:37 KJV) David therefore himself calleth him Lord; and whence is he then his son? And the common people heard him gladly. (마가복음 12:37 흠정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리스도를 친히 주라 불렀은즉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보통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즐겁게 듣더라. Notice the sin of the Corinthian Christians in 1 Corinthians 11:21-22. 고린도전서 11:21-22에 나와 있는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주목해 보십시오. (1 Cor 11:21 KJV) For in eating every one taketh before other his own supper: and one is hungry, and another is drunken. (고린도전서 11:21 흠정역) 이는 먹을 때에 저마다 자기 만찬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기 때문이라. (1 Cor 11:22 KJV)What? have ye not houses to eat and to drink in? or despise ye the church of God, and shame them that have not? What shall I say to you? shall I praise you in this? I praise you not. (고린도전서 11:22 흠정역)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내가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랴?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라. God have mercy on a Pastor who does not lead and teach the word of God.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을 이끌지 않는 목사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God have mercy on a people who refuse to receive the truth of God’s word.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Disrespect for the word of God, and disrespect for the man of God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Not only disrespect but they discriminated against the poor. 얕잡아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God loves all people of all nations and of all walks of life.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모든 생명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But God gives special attention to the poverty stricken, the widows, and orphans.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계층들, 과부와 고아들에게 특히 더 큰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IV. The fourth sin, and their problem was they departed from the proper observance of the Lord’s Supper. IV. 네 번째 죄이자 문제점은 주의 만찬을 정확하게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They brought and ate their own supper into the church. 그들은 교회로 자신들의 식사를 들고 와서 먹었습니다. They turned the church facilities and the Lord’s Supper into a drunken fiasco. (Fiasco=blundering failure). 그들은 교회의 시설들과 주의 만찬을 술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But Paul reminds them, and us of the serious and far reaching consequence of both blessings and cures of wrong motives, and wrong actions.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심각한 결론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동기와 행동의 복과 저주를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1 Corinthians 11:26-30고린도전서 11:26-30입니다. (1 Cor 11:26 KJV) For as often as y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e do show the Lord's death till he come. (고린도전서 11:26 흠정역)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 (1 Cor 11:27 KJV)Wherefore whosoever shall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of the Lord, unworthily, shall be guilty of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고린도전서 11:27 흠정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1 Cor 11:28 KJV) But let a man examine himself, and so let him eat of that bread, and drink of that cup. (고린도전서 11:28 흠정역)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1 Cor 11:29 KJV) For he that eateth and drinketh unworthily, eateth and drinketh damnation to himself, not discerning the Lord's body. (고린도전서 11:29 흠정역) 이는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라. (1 Cor 11:30 KJV) For this cause many are weak and sickly among you, and many sleep. (고린도전서 11:30 흠정역)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The Lord’s Supper is a memorial service which looks back to the Lord’s death on Calvary.주의 만찬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죽음을 돌아 보는 기념 예식입니다. The service is also a reminder of our Lord’s second coming as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이 예식은 또한 왕들의 왕, 주들의 주로 재림하실 우리 주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Revelation 19:16. 요한계시록 19:16. (Rev 19:16 KJV) And he hath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요한계시록 19:16 흠정역)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왕들의 왕, 주들의 주, 라 하였더라. There is something wrong in the life of a Christian when he fail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에 관한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신자의 삶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V. Then the church at Corinth ate the Lord’s Supper in denial in Partaking manner. V. 그 다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함께 주의 만찬 나누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They literally denied that anything was wrong in their own personal lives. 그들은 글자 그대로 그들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을 부정했습니다. They were simply in self denial. 그들은 단순하게 말해 자기를 부정했습니다. Have you ever seen anyone in self denial?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요? Some one whose loved one is sick, and the family members cannot see the problem.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픕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그 문제를 볼 수 없습니다. Or worse still, church members with sin in their own life judging others for the same sin. 더욱 안 좋은 사태는, 죄 가운데 있는 성도가 다른 사람의 동일한 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When they themselves are in a state of self denial. 그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There is nothing left for God to do but judge them for their wicked, self righteous sin.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사악함과 자기의를 심판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They could easily examine themselves, confess and repent, and have the blessings of God upon their lives. 그들은 쉽게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복을 그들의 삶 위에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But because of pride they refused and their sin grew even worse, and God judged them. 그러나 교만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죄가 더욱 커지도록 방치한 채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하나님는 그들은 심판하셨습니다. Notice 1 Corinthians 11:27-30. 고린도전서 11:27-30을 보십시오. (1 Cor 11:27 KJV) Wherefore whosoever shall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of the Lord, unworthily, shall be guilty of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고린도전서 11:27 흠정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1 Cor 11:28 KJV) But let a man examine himself, and so let him eat of that bread, and drink of that cup. (고린도전서 11:28 흠정역)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1 Cor 11:29 KJV) For he that eateth and drinketh unworthily, eateth and drinketh damnation to himself, not discerning the Lord's body. (고린도전서 11:29 흠정역) 이는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라. (1 Cor 11:30 KJV) For this cause many are weak and sickly among you, and many sleep.(고린도전서 11:30 흠정역)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There is a lot of unconfessed sin in the lives of God’s people. 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는 고백하지 않았던 죄가 많았습니다. Because of this unconfessed sin Paul states the only remedy that God has left for those who refuse to repent.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던 죄 때문에 바울은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유일한 치료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Weak, 2. Sickly, 3. Death. 1. 약하고, 2. 병들고, 3. 죽고. God will not over look our foolishness and our sin. 하나님의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The sin in the lives of the child of God is going to be judged by us, or God will judge it. 하나님의 자녀의 삶 안에 있는 죄는 우리가 먼저 판단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판단할 것입니다. I had much rather I judge my sin and forsake it and receive the joy of God, and God’s blessings in my life. 스스로 자기의 죄를 정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기쁨과 복을 받아 누리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All these things the Holy Spirit has brought to our attention through the word of God are to be taken seriously.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주의를 잡아 끄는 모든 것은 진지하게 다루어야만 합니다. Because they break down fellowship, and keep us from reaching the lost for Christ. 그들은 교제를 깨뜨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자에게 나아가는 우리의 걸음을 방 해하기 때문입니다. The closest thing to the heart of God is the winning of the lost to Christ.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잃어버린 자를 그리스도께로 데려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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