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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Schofield 의 일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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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W. Schofield는 3·1 운동의 제 34인으로
불리던 인물로 국립묘지에 최초에 묻힌 외국인이며, 대한민국 문화헌장을 3번째로 수상하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자로 재직하던
당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외국에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각 나라 신문에 투고하였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를 매우
사랑하고 독립을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여기서 그를 소개하는가. |
그는 바로 세계적인 '수의학자'였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지금도 수의대 구관 2층에는
문화훈장을 단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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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W. Schofield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Warwickshire주 Rugby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Frank를 낳고 산욕열로 돌아가셔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Francis W. Schofield로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신학자였고 Cliffe College에서 신약성서와 희랍어 강의를
하였다. 당시 Frank W. Schofield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 Francis W. Schofield Junior였고 나중에
이름을 Frank로 바꾸었다. 그에게는 누나 Mary와 맏형 John, 둘째 형 Stephen이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이 다른 유명한 위인들처럼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장난꾸러기로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대학을 진학할 당시에는 집안의 형편도 나쁘고 또 후원자가 생길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않아서 대학진학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의 형들과 누나는 각자 후원자를 얻어 런던대학교 의과,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그 후 Frank
W. Schofield는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할 뜻을 가지고 농장과 목장 등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던 당시여서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차가웠고 결국 아무리 일을 해도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자유와 일할
자리, 그리고 공부할 곳을 찾아 Canada의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얻게 되었고, 그는 Toronto 대학교
Ontario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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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목장 생활 중 수의사가 목장의 말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힘들게 시작한 대학 공부였지만 그는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게 된다.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왼팔과 오른 다리가 평생 마비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Frank W. Schofield는 더욱 공부에 매진해
1910년 공동수석으로 졸업했고 이후 Ontario주 보건국 세균학 연구소의 조수로 취직한다. 1년 정도의 조수 생활동안 그는 Toronto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사를 실시하여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이
논문으로 1911년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1913년에는 Alice Schofield와 결혼하였고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1914년
그는 Onterio 수의과대학 세균학 강사가 된다. 그리고 그 해 7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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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6년 한국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장 Avison 박사가 쓴 한 통의 편지에 의해서이다. Avison 박사의 편지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으며, 세브란스는 선교사업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헌신적이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찾는데 Frank W. Schofield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Frank W. Schofield는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불편한 몸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하던 터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떠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다음 해 8월
초 Frank W. Schofield 나이 28세 때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여 10월 한국에 도착한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목원홍씨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1년 후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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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한국 생활 적응은 순조로왔지만, 그의 아내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만삭의 몸으로 다시 Canada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Schofield는 혼자 남아 선교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선교
사업과 관련하여 각계 인사와 친분을 나누던 그는 당시 기독교 청년회장이던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 최초의 사설재단인 정화학교 설립자인 김성혜
여사와 특히 두터운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일찍 어머니를 여인 그는 김정혜 여사를 수양어머니로 삼는다. 1919년 2월 5일 이갑성씨 부탁으로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일을 맡게 되는데 그가 맡은 일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이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를 독립운동가에게 알려준
것도 바로 그다. 자신이 일본과 친교가 있던 영국인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내세워 3·1 운동을 위한 세세한 준비를 뒤에서 도운 그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제의 시위자에 대한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4월 제암리 사건 당시 Schofield는 수원으로 가 사진촬영을 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직접 방문한다. 이후 그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는 일제의 압력이 가해졌고 그
역시 학교 당국으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노력을 자제할 것을 당부 받는다. 그러나 그는 1919년 9월 일본에서 열린 <극동 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발표를 하게 된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유명인사와 만나면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일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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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자신이 쓴 [끌 수 없는 불꽃 - Unquenchable
fire]라는 3·1운동 목격기를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던 Schofield는 출국 전 강도로 가장한 암살미수를 당한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끌 수 없는 불꽃]은 해외로 가지고 나갔으나 결국 출판은 할 수 없었다. 이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나라나 출판사들이 출판을
꺼려했기 때문이며, Schofield는 [끌 수 없는 불꽃]의 일부분만을 강연회나 잡지 등에 투고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1921년부터 Toronto 병원에서 근무하게되고 곧 대학에 복직한다. Schofield는 이때부터 67세가 될 때까지 계속 이 대학과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 Alice는 실성하여 Schofield가 Canada에 돌아왔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의 아들 Frank Junior는 네 살이었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랴, 아이를 혼자 양육하라 매우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Schofield 박사는 매달 월급의 1/3을 떼어 10년 계획으로 다시 한 번 한국에 갈 비용을 마련한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귀국
6년만(당시 38세)에 다시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고 곧 1926년 5월 초 한국으로 출발, 23일 서울역에 도착했고, 7월 그는 다시 한국을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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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그가 재직 중인 대학을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자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맞겠다고 연락을 했다. 1957년 그의 아내(당시 72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Canada의 민간 항공 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한국으로 갈 뜻을 비추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그를 초빙했고
8월 초 Canada를 출발한 그는 14일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한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농촌생활은 허탈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한국에 온 그는 8월 20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방문하고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당시 학장이던
이영소 교수와 총장 윤일선 박사의 동의로 서울대학교 외인숙사에 방을 얻는다. 같은 해 9월초부터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하며 연세대 의과대학과 중앙대 약학대에서 강좌를 갖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 50여명의 학생을 자신의 사비로
장학금을 만들어서 도왔으며 유학희망자들에게는 외국 대학의 장학금을 구해주고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의 배려를 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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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경향신문에 를 통해 발전된 한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 있던 시절 지인들이 운영하는 전쟁고아를 위한 유린 보육원과 봉은
보육원을 Canada, 미국, 유럽의 수의사친구들을 통해 도와주었으며 그 해 일어났던 <2·4 정치파동> 즉 국가보안법을 강행으로
통과시킨 일에 대해 1959년 1월 3일 한국일보 1면에 [1919년을 회상케하다]라는 글을 써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Canada에서의 일들을 정리하고 한국에 영주하기 위해 5월 초 Canada로 돌아간 그는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동안 그의
친구들은 운영본부를 미국 Missouri주 Kansas시의 월간잡지 'Veterinary Medicine' 본사에 둔 'The Schofield
Fund,'를 설립했다. 또한 한국에서 그는 연구활동도 열심히 하여 돼지 위축성 비염에 대한 논문을 써 미국 수의학회지에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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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1959년 초부터 공공연한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을
해오던 박사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4월 신학기에는 대학에서의 강의를 반정부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목으로 중지시키고 그와 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의 거처인 4평짜리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이후 새 민주당정권은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12월 17일, 대한민국 수립 후 3번째로 박사에게 수여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행운의 열쇠>를 박사에게 증정하였다. 또, 그는 61년 1월 한국일보에 <내가 본 한국혁명>이라는 4·19
목격기를 실었고, 같은 해 5·16이 일어나자 6월 영자신문 'Korean Republic'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를 투고하였으며 그는 여기에서 5·16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한국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혁명이라 결론 짓고 이 혁명은 한국의 번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또 Canada의 Guelph시의 'Daily Mercury'지에 한국의 군사혁명을 소개했다.
그동안 한국의 제자들과 함께 [고양이 폐에의 Paragonimus의 침범], [창경원 동물원 꿩에 발생한 New-castle disease],
[전염성 고양이 간염], [한국소의 Globidiosis의 병리조직학적 연구], [돼지의 Pasteurella multocida에 기인하는
급성소염성 폐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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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의학자였다. Ontario 대학에서
수의 병리학 교실의 정교수로 일했으며 독일 Munchen의 Ludwig Maximilian Univ.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수의학회 연례회의 <국제수의학회상> 12번째 수혜자였으며 Canada의 프랑스계 수의학 협회로부터 를 받았다. 또 Toronto 대학의 개교 기념 100주년 기념식에서 명예 법학박사, 경북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고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서울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수의과대학 병리학협의회의 공로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업적으로는
[외관상으로 출혈성패혈증과 기종저처럼 보이는 새로운 소 질병의 원인체인 Sweet Clover]라는 논문에서 소의 사료로 쓰이는 부패한
Sweet Clover에 Cumarin이라는 혈액응고 방지성 물질을 밝혀내어 지금도 쓰이고 있는 살서제 Warfarin과 혈액응고 방지제
Dicumarol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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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field 박사는 1970년 4월 16일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셨다. 사실 그의 한국 체류기간은 그리 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가 보여준 한국을 위한 일이라든가,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도왔음에도 지금 그를 기념하는 행사 하나 열리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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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Schofield의 아버지 Francis William
Schofield, Sr.이 항상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던 말로 Schofield 박사의 인생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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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두 길이 있다.: 배려의 길과 기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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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력에서 힘을 얻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고, |
행로의 불측을 각오하며,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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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생활은 사랑을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진리를 행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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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평화를 무적의 수호로
삼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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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re two ways through life :
the way of care and the way of prayer. |
The way of care has pressure of
circumstances for its force, common sense for its guide, |
uncertainty for its path, fear for
its attendant and guard. |
The way of prayer has love for its
force, the Spirit of God for its guide, truth for its path, |
and the Peace of God for its inviable
gu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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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헌 : 한국 땅에 묻히리라 <이장락
지음(정음사)>, 글 : '96학번 이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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