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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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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동영상뉴스] 라오스서 비행기 추락...한국인 3명 포함 탑승객 전원 사망

현지시간 오후 2시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을 촐발해 파크센으로 가던 소형 여객기가 추락했습니다. 
당시 이 비행기에는 한국인 서 모 씨와 이 모 씨 등 3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숨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이들과 함께 탑승하고 있었던 나머지 승객 36명도 모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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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7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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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9
夫婦는? 여보 당신의 의미
부부는... 여보/ 당신 의 의미 여보(如寶)는 같을 如(여)자와 보배 보(寶)이며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의미래요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하는 말이며 여자가 남자를 보고 부를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답니다 남자를 보배 같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당신(當身)이라는 말은 당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바로 내 몸과 같다는 의미가 '당신'이란 의미이며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하는 쓰는 말이랍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여보 당신이 뒤죽박죽이 되었고 보배와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내 몸처럼 생각지도 않으면서 ‘여보와 ‘당신을 높이려고 하는 소린지 낮추려는 소린지도 모르는 채 쓴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소린데 함부로 한다. 그래서 신혼부부에게 그 소중한 의미를 새기면서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여보’와 ‘당신’이란 말을 쓰자는 어느 주례사의 요지랍니다 촌수를 따지라 하면 무촌이라지만 누구보다 함께 위하며 아끼고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역시 마누라를 대할때 항상 거기 있는 사람이려니 하며 소홀히 할때가 많아 정신이 들때면 미안하기도 하죠~ㅎㅎ 부부가 바로서야 아이들이 바로 설수 있으며~ 아이들이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설수 있으며~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설수 있지 않을까요 김 종 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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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5
늙지않은 방법 10가지

 

늙지않는 방법 10가지




  • 노화란 무엇인가?
    인간이 수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체변화다
    다시말해 노화란 성숙기 이후에 생기는 변화로 개체의 생존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이다.

  • 늙지 않는 방법
    01. 칼로리 섭취를 절반으로 줄인다. <鶴의 胃는 항시 절반만>
    02. 열을 가해조리한 음식을 가능한 삼가고
       - 단순한 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하여 적당량만 먹는다.
    03. 물을 매일 2,000 cc 정도 마신다.
       - 사람다운 체형 유지
       - 식사전 30분, 식후 2시간에 마신다.
       - 취침전. 취침후에 꼭마신다
    04. 매일 1시간정도 걷는다.
       - 다리는 제2의 심장이라고 한다. 노화는 다리로부터 온다.
       - 시선은 15 도 상단을 보고 걷는다.
       - 땅을보고 걸으면 다리가 벌어진다 <중년이후 보기 흉해>
    05. 호흡을 깊게 서서히 고요히 한다.
    06.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 과도한 운동은 수명단축,
       - 무리한 유산소 운동은 활성산소(세포毒)이 생겨 세포에 악영향
    07. 즐겁게 살며 보람을 갖는다.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다.
       -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 세상를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08. 항상 타인과 사귄다.
       -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다양한 자극이 되어 생명력을 높인다.
       - 적당한 SEX 도 효과적인 不老術이다.
    09. 적당한 취미 생활을 한다.
    10. 자신에게 맞는 약제를 구입 복용한다.
       - 延年 益壽 開心 益智, 건망증 및 불노환 등 관련 약초가 있다
       - 식초를 물에 타서 자주 먹으면 血栓症(혈액이 막히는증세) 예방과
         지방분해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되고,
         위 3 항의 물먹기를 몇개월 실천하면 아침에 누는 소변에
         냄새가 없어지기도 하여 좋다고 한다.

    ☞출처 : 신선한 아침바람을 쐬는 기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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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스코필드 (석호필)박사의 일대기

 

 
Dr. Schofield 의 일대기 
 
 
Frank W. Schofield는 3·1 운동의 제 34인으로 불리던 인물로 국립묘지에 최초에 묻힌 외국인이며, 대한민국 문화헌장을 3번째로 수상하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자로 재직하던 당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외국에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각 나라 신문에 투고하였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를 매우 사랑하고 독립을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여기서 그를 소개하는가. 
그는 바로 세계적인 '수의학자'였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지금도 수의대 구관 2층에는 문화훈장을 단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Frank W. Schofield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Warwickshire주 Rugby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Frank를 낳고 산욕열로 돌아가셔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Francis W. Schofield로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신학자였고 Cliffe College에서 신약성서와 희랍어 강의를 하였다. 당시 Frank W. Schofield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 Francis W. Schofield Junior였고 나중에 이름을 Frank로 바꾸었다. 그에게는 누나 Mary와 맏형 John, 둘째 형 Stephen이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이 다른 유명한 위인들처럼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장난꾸러기로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대학을 진학할 당시에는 집안의 형편도 나쁘고 또 후원자가 생길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않아서 대학진학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의 형들과 누나는 각자 후원자를 얻어 런던대학교 의과,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그 후 Frank W. Schofield는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할 뜻을 가지고 농장과 목장 등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던 당시여서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차가웠고 결국 아무리 일을 해도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자유와 일할 자리, 그리고 공부할 곳을 찾아 Canada의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얻게 되었고, 그는 Toronto 대학교 Ontario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가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목장 생활 중 수의사가 목장의 말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힘들게 시작한 대학 공부였지만 그는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게 된다.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왼팔과 오른 다리가 평생 마비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Frank W. Schofield는 더욱 공부에 매진해 1910년 공동수석으로 졸업했고 이후 Ontario주 보건국 세균학 연구소의 조수로 취직한다. 1년 정도의 조수 생활동안 그는 Toronto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사를 실시하여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이 논문으로 1911년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1913년에는 Alice Schofield와 결혼하였고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1914년 그는 Onterio 수의과대학 세균학 강사가 된다. 그리고 그 해 7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6년 한국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장 Avison 박사가 쓴 한 통의 편지에 의해서이다. Avison 박사의 편지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으며, 세브란스는 선교사업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헌신적이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찾는데 Frank W. Schofield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Frank W. Schofield는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불편한 몸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하던 터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떠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다음 해 8월 초 Frank W. Schofield 나이 28세 때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여 10월 한국에 도착한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목원홍씨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1년 후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한국 생활 적응은 순조로왔지만, 그의 아내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만삭의 몸으로 다시 Canada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Schofield는 혼자 남아 선교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선교 사업과 관련하여 각계 인사와 친분을 나누던 그는 당시 기독교 청년회장이던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 최초의 사설재단인 정화학교 설립자인 김성혜 여사와 특히 두터운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일찍 어머니를 여인 그는 김정혜 여사를 수양어머니로 삼는다. 1919년 2월 5일 이갑성씨 부탁으로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일을 맡게 되는데 그가 맡은 일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이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를 독립운동가에게 알려준 것도 바로 그다. 자신이 일본과 친교가 있던 영국인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내세워 3·1 운동을 위한 세세한 준비를 뒤에서 도운 그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제의 시위자에 대한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4월 제암리 사건 당시 Schofield는 수원으로 가 사진촬영을 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직접 방문한다. 이후 그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는 일제의 압력이 가해졌고 그 역시 학교 당국으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노력을 자제할 것을 당부 받는다. 그러나 그는 1919년 9월 일본에서 열린 <극동 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발표를 하게 된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유명인사와 만나면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일을 한다. 
 
1920년 자신이 쓴 [끌 수 없는 불꽃 - Unquenchable fire]라는 3·1운동 목격기를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던 Schofield는 출국 전 강도로 가장한 암살미수를 당한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끌 수 없는 불꽃]은 해외로 가지고 나갔으나 결국 출판은 할 수 없었다. 이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나라나 출판사들이 출판을 꺼려했기 때문이며, Schofield는 [끌 수 없는 불꽃]의 일부분만을 강연회나 잡지 등에 투고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1921년부터 Toronto 병원에서 근무하게되고 곧 대학에 복직한다. Schofield는 이때부터 67세가 될 때까지 계속 이 대학과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 Alice는 실성하여 Schofield가 Canada에 돌아왔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의 아들 Frank Junior는 네 살이었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랴, 아이를 혼자 양육하라 매우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Schofield 박사는 매달 월급의 1/3을 떼어 10년 계획으로 다시 한 번 한국에 갈 비용을 마련한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귀국 6년만(당시 38세)에 다시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고 곧 1926년 5월 초 한국으로 출발, 23일 서울역에 도착했고, 7월 그는 다시 한국을 떠난다. 
 
1955년 그가 재직 중인 대학을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자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맞겠다고 연락을 했다. 1957년 그의 아내(당시 72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Canada의 민간 항공 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한국으로 갈 뜻을 비추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그를 초빙했고 8월 초 Canada를 출발한 그는 14일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한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농촌생활은 허탈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한국에 온 그는 8월 20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방문하고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당시 학장이던 이영소 교수와 총장 윤일선 박사의 동의로 서울대학교 외인숙사에 방을 얻는다. 같은 해 9월초부터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하며 연세대 의과대학과 중앙대 약학대에서 강좌를 갖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 50여명의 학생을 자신의 사비로 장학금을 만들어서 도왔으며 유학희망자들에게는 외국 대학의 장학금을 구해주고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의 배려를 해 주었다. 
 
10월 2일 경향신문에 를 통해 발전된 한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 있던 시절 지인들이 운영하는 전쟁고아를 위한 유린 보육원과 봉은 보육원을 Canada, 미국, 유럽의 수의사친구들을 통해 도와주었으며 그 해 일어났던 <2·4 정치파동> 즉 국가보안법을 강행으로 통과시킨 일에 대해 1959년 1월 3일 한국일보 1면에 [1919년을 회상케하다]라는 글을 써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Canada에서의 일들을 정리하고 한국에 영주하기 위해 5월 초 Canada로 돌아간 그는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동안 그의 친구들은 운영본부를 미국 Missouri주 Kansas시의 월간잡지 'Veterinary Medicine' 본사에 둔 'The Schofield Fund,'를 설립했다. 또한 한국에서 그는 연구활동도 열심히 하여 돼지 위축성 비염에 대한 논문을 써 미국 수의학회지에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초부터 공공연한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을 해오던 박사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4월 신학기에는 대학에서의 강의를 반정부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목으로 중지시키고 그와 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의 거처인 4평짜리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이후 새 민주당정권은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12월 17일, 대한민국 수립 후 3번째로 박사에게 수여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행운의 열쇠>를 박사에게 증정하였다. 또, 그는 61년 1월 한국일보에 <내가 본 한국혁명>이라는 4·19 목격기를 실었고, 같은 해 5·16이 일어나자 6월 영자신문 'Korean Republic'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를 투고하였으며 그는 여기에서 5·16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한국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혁명이라 결론 짓고 이 혁명은 한국의 번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또 Canada의 Guelph시의 'Daily Mercury'지에 한국의 군사혁명을 소개했다. 그동안 한국의 제자들과 함께 [고양이 폐에의 Paragonimus의 침범], [창경원 동물원 꿩에 발생한 New-castle disease], [전염성 고양이 간염], [한국소의 Globidiosis의 병리조직학적 연구], [돼지의 Pasteurella multocida에 기인하는 급성소염성 폐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의학자였다. Ontario 대학에서 수의 병리학 교실의 정교수로 일했으며 독일 Munchen의 Ludwig Maximilian Univ.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수의학회 연례회의 <국제수의학회상> 12번째 수혜자였으며 Canada의 프랑스계 수의학 협회로부터 를 받았다. 또 Toronto 대학의 개교 기념 100주년 기념식에서 명예 법학박사, 경북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고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서울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수의과대학 병리학협의회의 공로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업적으로는 [외관상으로 출혈성패혈증과 기종저처럼 보이는 새로운 소 질병의 원인체인 Sweet Clover]라는 논문에서 소의 사료로 쓰이는 부패한 Sweet Clover에 Cumarin이라는 혈액응고 방지성 물질을 밝혀내어 지금도 쓰이고 있는 살서제 Warfarin과 혈액응고 방지제 Dicumarol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Schofield 박사는 1970년 4월 16일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셨다. 사실 그의 한국 체류기간은 그리 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가 보여준 한국을 위한 일이라든가,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도왔음에도 지금 그를 기념하는 행사 하나 열리지 않고 있다. 
 
다음 글은 Schofield의 아버지 Francis William Schofield, Sr.이 항상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던 말로 Schofield 박사의 인생관이었다.  
 
『인생에는 두 길이 있다.: 배려의 길과 기도의 길이다.  
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력에서 힘을 얻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고,  
행로의 불측을 각오하며,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한다.  
기도의 생활은 사랑을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진리를 행로로,  
신의 평화를 무적의 수호로 삼는다.』 
 
『There are two ways through life : the way of care and the way of prayer. 
The way of care has pressure of circumstances for its force, common sense for its guide,  
uncertainty for its path, fear for its attendant and guard. 
The way of prayer has love for its force, the Spirit of God for its guide, truth for its path,  
and the Peace of God for its inviable guard.』 
 
참조 문헌 : 한국 땅에 묻히리라 <이장락 지음(정음사)>, 글 : '96학번 이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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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1
이순신 장군에게 배우자

 

 



    이순신에게 배우자


1.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8.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 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 인간은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견딜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절망적 운명에 직면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고 그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서 어떤 가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로 의미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의 주체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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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4
낙양성 십리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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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 / 성주풀이



낙 양 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 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저 건너 잔 솔밭에 솔솔 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 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맸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한 송 정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지어

술렁술렁 배 띄워놓고 술이나 안주 가득싣고

강능 경포대 달구경 가세 두리 둥실 달구경 가세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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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1
아름다운 선인장 꽃들

   

 
아름다운 선인장 꽃들을 구경하세요.



사랑하며 존경하는 분에게.


사랑은 미소로 시작하고

키스로 커가며

눈물로 끝을 맺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 혼자만이 울고 있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당신 혼자만이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요



靈感. 김 종 철 드림.





































































































































































 


김 종 철 드림.


추신: 어떠세요? 참 아름답지요, 난생 처음보는 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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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1
만년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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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9
기쁨을 같이하고싶은 사람들

 




기쁨을 같이 하고픈 사람들

오늘하루
당신이 계신 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내면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먼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단 하나의 걸작품임을
스스로에게 일깨우세요.

그러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얼굴에 자신감으로 인한
미소가 피어날 것입니다.

이제
한사람 한사람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눌수 있도록
가슴을 열고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세요.

분명 마음이 닫혀있던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감어린 시선과
뭔가 기대에 찬 얼굴로 마주설 것입니다.

이제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 보세요
상대의 단점 보다는 장점을 발견해
부드러운 칭찬을 해 보세요.

가능하면
당신을 만난 것이 참 행운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말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상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리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다음
시간이 되신다면 따뜻한 차 한찬 나누면서
마음속 사랑담아 축복해 보세요.

어려울 것 같지만
우리가 인상 찌푸리고 푸념하는
시간이면 충분하답니다.

내가 밝고 주위가 밝아져야
근심이 없어집니다.

당장은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마음에 여유로움이 생긴답니다.

서로에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언어는
참으로 행복한 하루를 열어줄 거예요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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