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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중국 석도로 가는 화동 페리에 몸을 싣고
제목 없음
(여행편지 304) 석도가는 화동페리에 몸을 싣고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1 화동 페리에 몸을 싣고

글/사진: 이종원

(사진: 태산의 天門)

에필로그

장보고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천년전 중국 반군을 제압한 장군이며 청해진에서 해적을 소탕한 해상왕, 한,중,일 세나라의 역사책에 이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기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다. 완도 청해진으로 추정된 장도에 올랐을 때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장보고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의외로 기회가 빨리 다가온 것이다. 그것도 가장 멋진 모놀식구들과 함께 했다. 2천키로를 오고가는 힘든 여정이지만 군소리 하나 내밷은 사람 없다. 국내 답사때 빡빡한 일정에 단련이 되었거나 모두들 마음속에 제각각 목표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이건만 그는 부하 염장의 칼에 쓰러졌다. 역사책의 페이지를 한참 넘겼지만  그가 남긴 뱃길은 오늘날에도 이어졌고 그의 선조기술은 훗날 거북선으로 되살아났다. 한국이 경제 대국이 된 것도 우수한 손기술로 만든 제품이 바다를 통해 세계와 경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역사속에 묻혔지만 그 혜택은 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정신문명이 세계를 지배했지만 물질문명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분명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낙엽처럼 나뒹굴며 천대받았던 유교문화는 공산주의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영원히 잊혀질 줄 알았던 공맹사상은 한국의 유교문화를 통해 다시 봄을 맞은 것이다.

그런 중국이 80년대부터 꿈틀거리더니 이제는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정신문명과 기술력이 절묘하게 만난다면 세계를 제퍠할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산동의 대평원사이로 쭉 내뻗은 고속도로를 보면서 그들의 힘을 느껴본다. 차도 지나가지 않는 그곳에 시원스런 고속도로를 만들어낸 뚝심이 그저 무서울 뿐이다.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5백년을 이어온 우리 유교문화의 생장점은 어디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걸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이번 답사인 것이다. 그걸 찾아 팔 천리를 달리고 달렸다.

인천항 국제 여객터미널

인천국제공항과는 전혀 딴판이다. 협소한 공간에 사람과 짐이 함께 어우려져 북새통을 이룬다. 짐 싣는 카트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짐에 치이고 사람에 부딛치고....몸집보다 큰 짐을 나르는 사람, 빙 둘러 앉아 수박을 깨먹는 사람들, 후미진 곳에서 위엔화를 바꿔주는 환전상도 보인다. 여행객, 보따리상과 중국인들까지 한데 어우러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무질서처럼 보이지만 이곳을 통해 움직이는 물건들이 수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비행기처럼 짐을 부치는 일도 없다. 워낙 배가 크기 때문에 왠만한 짐은 그냥 들고 탄다. 긴 통관시간이 끝나면 면세점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담배나 양주도 인천공항보다 훨씬 싸다. 2천5백원짜리 엣세 담배가 8백원에 살 수 있으니 말이다.

터미널에서 나오면 바로 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버스를 타고 배 가까이 간다.

드디어 배에 오른다. 짜릿한 기분이다...각자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따라 배에 오르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물며 보따리상들은 얼마나 힘들까?

배에 올라가 갑판에서 기념촬영

화동페리를 즐기자.

예쁜 조선족 아가씨가 안내소를 지키고 있다. 이 배에 탄 승무원들은 48명인데 주 3회씩 중국을 오가니까..거의 배에서 내려오는 일이 없다. 면세점, 야식코너, 잡화점, 회의실, 목욕탕, 노래방까지 갖추고 있다.

1등석 객실 복도다. 양쪽에 방이 있는데...우리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창측에 배정되었다. 화장실은 객실 바깥에 있는데 여자화장실을 '부인세수간'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눈길을 끈다.

1등석 내부...4개의 침대가 놓여있고 세면대, TV, 탁자등이 놓여 있다. 담소도 나누고 일기도 쓰고...독서도 하고....페리 여행은 본인이 즐기기 나름이다.

따이공에게는 이곳은 호텔이다. 딱딱한 마루바닥에 새우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해역에 들어서도 위성을 통해 한국방송이 나온다.

맛있는 식사시간. 한국음식이 나온다.

돈을 아껴야 하는 보따리상들은  한사람이 두 사람분의 밥과 반찬을 담는다. 눈치만 줄뿐...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다. 그나마 밥을 사먹는 사람은 행복하다. 컵라면으로 때우거나 뜨거운 물에 찬밥을 말아 먹는 사람이 수두둑 하니까...

그런 분들을 생각하니 밥을 하나도 남길 수 없었다. 갈비탕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

배에는 널찍한 노래방도 있었다. 때마침 결혼 34주년 기념여행을 나선 형아, 향기야님께 34년만에 선상 결혼식을 올려 드렸다.  축하곡은 노래방 기계에 다 들어 있었다.

웃는돌님이 사회를 보고...대장이 주례를 섰다. ^^

축하드려요.

모놀의 끼있는 댄서들이 무대를 빛냈다.

비수님의 댄쓰....댄쓰..

이렇게 개성이 강한 모놀식구들의 끼를 억제시키는 것이 안전의 길이며 대장의 주로 하는 몫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휘엉청 달 밝은 밤에 .....타이타닉호를 연출!!

유종규, 김선희 부부

실컷 놀고 마시다가 그만 취해 버렸다. 해롱해롱 거리다가 침대에 뻗었는데 숙취와 멀미가 짬뽕이 되니까...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함께 객실을 쓴 유종규님께서 귀미테를 붙이고 온 것을 보고..  막 웃었다.  이렇게 큰 배를 타는데....뭘 그런 것 까지 붙이냐고...  그렇게 깐죽거리다가 내가 멀미할 줄은 몰랐다.^^

멀미를 하든 잠을 늘어지게 자든간에 중국땅이 눈앞에 다가왔다.

도선사가 배에 올라탄다. 배 두척이 달리는 속도에서 올라타야 한다.

중국땅을 보고  감회가 새로운 달새님..

동북, 동남, 서남아시아까지 달새님의 향토적인 얼굴은 모두 고향친구다. 남미의 페루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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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배안에서)

페리 여행의 장점은 원없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망망대해에서 석양과 일출까지 감상할 수 있다. 우리 국토가 아름답다는 것을 깨우치는 여정이다.

중국 석도에서 출발한 배는 하염없이 서쪽으로 향한다. 바로 영흥 화력발전소 옆을 스쳐간다.

기관실 구경을 했다. 100미터가 넘는 배는 이곳에서 통제되고 움직인다. 이 거대한 쇠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선장님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린다.

선장님은 지시만 할 뿐 이 배의 모든 조작은 바로 이 어여쁜 항해사의 손끝에 달려 있다.  인천에서 석도까지 바로 장보고 장군이 다녔던 해로란다. 1천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장보고의 후예들은 이렇게 서해를 지키고 있었다.

"애인 만날 시간은 있어요?"

"애인이 없어요."

수줍게 미소 짓는 여인의 잔영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다.

 

블리지에서 기념촬영^^

(사진설명:인천항에서 따이공들이 풀어 놓은 보따리)

따이공

페리호가 한번 움직이는데 8천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관광객이라고 해봐야  100여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 가지고는 이 배를 움직이기엔 어림도 없다. 주수입원은 콘테이너 화물이다. 화물이 적으면 배가 일찍 출발하고 물동량이 많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한다. 그 고충은 승객이 고스란히 떠 안아야한다. 그걸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바보다. 만만디는 배를 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주수입원이 바로 따이공(보따리상)의 여객운임이다. 따이공은 보통 산동성지역 (위해, 연대,청도) 그리고 천진, 대련등지에서 물건을 사서 한국에 넘기는 보따리상을 말한다. 10여개의 한중폐리 선사는 이들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 가전제품을 사서 중국에 가서 다시 판다. 그러나 중국세관의 기준이 항구마다 달라 이곳 저곳 옮겨다니면서 물건을 실어나른다. 따이공들이 가장 긴장할 때다.

배는 그들의 일터이자 숙소다. 일주일에 중국과 한국을 3번이나 왕복한다고 하니 짐을 내리자마자 다시 승선한다. 주로 하선하는 곳은 중국땅이란다.  숙박비와 식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다.

한국으로는 품목당 5KG, 1인당 50KG이 이들이 가져올 수 있는 양이다. 깨, 마늘, 생강, 참기름,고추등이 이들이 가져오는 물품이다. 40만원어치 물건을 사오면 대략 15만원은 남는다고 한다.  월 200만원의 수입이다. 큰 짐을 낑낑메고 배에 실고 내려야지...흔들리는 바다에서 살아야지...그리 많이 버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따이공 노인이 하얌없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중국세관의 심한 단속과 현지 폭력배들의 등쌀에  허리까지 휘어져 있다.

"한때 이배는 따이공이 500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150명도 채 되지 않아요. 저도 이젠 이 생활 청산해야겠어요."

노인의 좁은 등에는 회한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인천 도착하기 전 선창가에서 헤어지기 아쉬어 마지막 모놀포즈를 취해본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중국답사는 이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손가락은 과연 어디를 가리킬까요?

인천항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동방명주호다. 바로 북한 신의주시 바로 앞에 단동으로 가는 배다. 광개토대왕비, 집안, 백두산이 우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모놀답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시작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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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 장군의 흔적
제목 없음 여행편지 305)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이정기 장군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2 고구려 유민-이정기 장군의 흔적

글/사진: 이종원

한국에서 최단거리인 항구인 석도항에 도착했다. 인천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세나 기후는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산에 나무가 없고 흉물스럽게 돌산만 보일 뿐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만 한국보다는 훨씬 후덥지근하다.

4일동안 우리가 타고 타녔던 버스다. 겉모습은 날렵하게 생겼지만 자리가 비좁고 마이크까지 형편없어 무척 애를 먹었다. 메뚜기 더듬이 처럼 생긴 백밀러가 신기하게만 보인다.

'모놀과정수요.'

버스에 붙은 모놀 팻말이다.  이거이 뭐야..모놀과정 수요모임인가? 한국과 중국간 전화통화의 혼선 때문이다.

"단체이름이 뭐야요?"

'모놀과 정수입니다.

"뭐라구요...잘 안들려요."

"모놀과 정수요."

"잘 알았습니다. 모놀과정수요."

김철용 가이드

연변출신으로 10년전에 산동에 터를 잡고 가이드를 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역사를 꽤뚫는 혜안이 돋보인다. 짧은 시간이나마 중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모놀식구들의 열정에 아주 질려 버렸다고 한다. 귀를 쫑긋하면서 따라다니며 괴롭혔거든.....가이드 생활 10년동안 이렇게 힘든 일정을 소화한 것은 처음이란다.

아주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 시합하면 어디를 응원합니까?"
"그건 말 못하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시원스런 길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 사이로 곧은 길이 놓여 있다. 중국사람들이 김제 대평원을 보고 웃을 지 모른다. 산동에 가면 가장 흔한 것이 평원인디....

고속도로뿐 아니라 국도도 이렇게 통행료를 내야한다.  무임을 막기위해 해 차단기까지 놓았다. 그러다보니 톨게이트 통과하는데 무척 시간이 걸린다. 만만디..만만디..만만디...세 번 외치면 마음이 편해진다.

물류를 위한 트럭과 버스만 씽씽 달릴뿐 일반 승용차는 가뭄에 콩나듯 보일 뿐이다.  통행료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란다.

 

역시 중국은 자전거 천국이다. 전동자전거, 세발자전거....등등...원없이 자전거를 구경했다.

짧은 치마, 하이힐에 자전거. 자꾸만 예쁜 여자에게 시선이 간다.

신호등에 대기 시간이 걸려 있다. 한국에도 적용하면 좋으련만...

교통질서는 엉망이다. 버스가 중앙선 침범은 예사이고..불법유턴은 당연하고 ..고속도로 무단횡단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심지어 고속도로상에서 500미터를 역주행 한 적도 있었다. ^^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점심은 래양에서 먹었다. 식당을 매달려 있는 연등. 중국풍이 물씬 묻어난다.

중국에서 첫 점심식사.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먹는다. 좌로 돌려야 할지 우로 돌려야 할지...돌리는 속도는 어떨지....처음엔 무척이나 어색하다.  대략 2끼 정도 먹으면 적응이 된다. 그리고 아주 편하다. 닭, 돼지고기, 두부..마늘쫑 등등...다양한 음식이 나온다. 아마 한 달 동안은 중국집에 얼씬 거리고 싶지 않을 정도다. ^^

고속도로 휴게소다. 꼬치구이와 과일을 주로 판다. 오이와 무도 판다. 중국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길 게 깍은 오이와 무를 씹어 먹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4일동안 2천키로를 달렸다. 버스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모놀식구들이 아니다. 한국에서 사라졌던 관광버스춤이 산동에서 멋지게 되살아 났다.

이 모놀가족은 누굴까?

 

청주박물관

달리고 달려서 청주박물관에 도착했다. 붉은색 지붕과 철쭉이 잘도 어우러진다. 중국건물은 우리네 날렵한 고건물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은 것처럼  포동포동하다. 넉넉한 맛은 느껴질지 몰라도 우아한 곡선미는 찾을 수 없다.

이미 박물관 폐장시간은 훨씬 지났건만 그들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위한 서비스라기 보다도 한푼이라도 벌어보자는 중국인의 상술이 느껴진다.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이정기

우리가 산동의 변방인 청주까지 왜 왔을까?  바로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를 만나기 위함이다.  이정기가 쓰여진 이름을 보니 전율마져 느껴진다.

'당신을 위해 이 먼곳까지 왔소.' 하염없이 유리를 어루만져본다.

그곳에 분명 고구려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본명의 이희옥. 청주가 가장 번성했던 때가 바로 이정기가 지배하고 있었던 때였다.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까지 땅을 넓혀 통일신라보다도 넓었고 인구도 540만에 달할 정도로 초강대국이었다.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의 원수 당나라에 복수하는 길을 택했다.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당나라 수도 낙양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 중국대륙을 손 안에 쥐기 일보직전 갑자기 병사하고 만다. 우리 민족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오호통제라. 정말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아들 이잡은 국호를 '齊'라고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부국강병 정책을 취하며 다시금 아버지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외면했다.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든 배 3천여척이 때 아닌 가을장마로 떠 내려가 버려 또 한번 좌절한다. 그 역시 제국을 잘 다스리다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단명하고 만다. 그의 아들 이사고 역시 명이 짧아 14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중국인 후처 소생인 이복동생 이사도가 왕위에 오르지만 어머니의 수렴정치에 제나라는 국운을 잃고 만다. 힘을 잃은 것을 간파한 당 현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국의 여러 절도사에게 일제히 공격을 명했고,  하필 바다 건너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하여 제나라는 결국 사방에 포위되어 무릎을 꿇고 만다.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중국 땅에서 또다시 비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왜 이리 비운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가?

패망한 후 산동에서 자리잡은 고구려인들은 또 한번 유랑길에 나서야만 했다.  보복이 두려워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하염없이 걷고 걸었다. ..결국 터를 잡은 곳이 태국북부와 중국 남방지역이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피줄이 참으로 질겼다. 수만리 떨어진 그곳에 우리말이 남아있고 명절 때는 마을사람 모두가 색동옷을 입는다고 한다. 바로 우리 고구려의 옷을.......

청주성 박물관 둘레로 성이 둘러 쌓여 있는데 이는 명나라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안쪽 토성의 흔적은 바로 이정기 시대에 고구려인들이 쌓아 올린 것이다.

끊길 듯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우리 고구려의 맥박이다.

이정기 장군의 뜻을 받드는 의미에서...모놀포즈

우리가 박물관을 떠나자 청주박물관의 셔터가 내린다. 붉은 프랫카드 글씨처럼 모놀식구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귀한 손님'이었다.

고차박물관

옛날 중국녹차를 전시하는 곳인가? 이번 여정에 그렇게 알고 온 회원들이 의외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고대 마차 순마갱이다. 하필  화물차가 씽씽 달리는 고속도로 옆에 박물관이 자리잡을 게 뭐람..

도로를 빠져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속도로 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다. 고속도로 휴게소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매표소를 거쳐 지하계단을 거치고 나서야 왜 고속도로 상에 박물관에 놓였는지 알게 된다.

고속도로 바로 아래에 춘추전국시대의 순마갱이 놓여 있던 것이다.90년대 초  제남-천진간 고속도로 공사중에 우연히 이 유물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화물차가 내달릴 때마다 땅이 흔들릴텐데... 그럼 유물도 훼손 될 것이고...우리나라 같았으면 고속도로가 빗겨 갔을 것이다.

어쨌든 지하에는 3천년전 마차가 누워 있고 지상에는 최첨단 고속마차가 달리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컬하다.

전차 10량과 말 32필이 매장되어 있는데 그 규모도 대단할 뿐 아니라 시설도 견고하다. 화려한 장식품 역시 3천년전 역사의 흔적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중국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차마유적이어서 중국 10대 고고학의 대발견이라고 말한다.

마차는 화석으로 굳었고 동물뼈와 사람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엇다.

 

말의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3천년전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유골. 끔찍하다.

말과 사람 그리고 마차까지.. 왕은 아니고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지방의 권력자가 아닐까?

순마갱 이외에도 춘추차마 전시관과 중국고차 진열관도 둘러보면 재미 있다. 적을 섬멸하기 위한 첨단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 차량과 중국 역대 차량의 진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파란 밀밭이 지겹도록 펼쳐져 있다. 그 넓은 밭을 어떻게 다 갈아. 하긴 10억 인구를 먹여 살려야하니...국수와 만두 그리고 빵의 원료가 되겠지.

중국의 밤 문화체험

저녁은 치박의 제도 호텔이다. 이곳의 음식 맛이 입에 맞는다.

저녁 먹고 단체로 발맛지를 받았다. 발 뿐만 아니라 전신 맛사지..무려 1시간동안 이어진다. 이 곳에 일하는 아가씨들은 산동사람이 아니라 멀리 사천성이나 안휘성 출신이란다. 고향 한번 가는데 5일씩 걸리는 먼 동네...

 

이번 답사에서 밤 문화체험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모놀식구들은 참 대범하다. 좌판에서 중국인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함께 노래하고.....^^ 사람사는 곳이 다 그렇다.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발맛사지도 받았겠다.은근히 술 생각이 절로 난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석주변에 방탄유리로 둘러쳐 있다.

중국 민초들이 즐겨먹는 양꼬치 집으로 출발. 닭꼬치, 닭똥집도 맛있고.... ^^ 맥주 1박스(12병), 빽알 1병,  양꼬치 60개...8명이 실컷 먹었는데도...1만원도 나오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밤의 운치를 즐겼다. 이런 허름한 곳에도 우롱차는 빠지지 않는다. 1회용 컵에도 손잡이 달린 잔이 따라 나와 호사를 즐겨본다.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 사당 처마에 보름달이 걸렸다.

"아...조오타. 내가 세월을 낚아야 겠다."

이번 중국여행엔 모닝콜이 필요없다.  매번 붉은 여명이 나를 깨운다.  매연 때문일까 도시는 뿌연 안개로 뒤덮혀 있꼬 굴뚝만 솟아 올라 연기가 피워대고 있다. 산업화로 치닫는 오늘날 중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여행작가인 아빠를 잘 못 만나서..정수는 눈을 뜨자마자 일기를 써야 한다. 일기장을 보니 별로 본 것이 없네. ^^

 

아침은 뷔페식^^ 든든하게 먹어야지..오늘 하루도 아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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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동양문화의 뿌리-곡부의 공자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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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편지 306) 동양문화의 뿌리-곡부의 공자 유적지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3 동양문화의 뿌리-곡부의 공자유적지

글/사진: 이종원

공자의 발자취-3공

동방의 성지- 곡부의 공묘, 공림, 공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다. 수 천년동안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곡부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며 예를 숭상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벽돌 한장,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찬란했던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공림

공림의 들어가는 문에 '至聖林(지성림)' 이라고 쓰여 있다.  공자가 죽은 후  至聖先師 즉 지식과 인격이 거룩한 전무후무한 스승 으로 추앙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문에 들어서면 양편에 향나무가 가득하다. 좌측 나무 숫자는 공자의 나이(74세) 를 의미하며 우측 72수는 공자의 제자중 가장 뛰어난 제자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공자묘로 향하는 양편에 기념품점이 가득하다. 들어갈때 이름을 써주면 나올때 찾을 수 있다. (한국돈 1천원)

연애소설에 흠뻑 빠진 중국인 아가씨..설마 정석수학은 아니겠지.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가면 또하나의 문이 나온다. 지성림이라고 쓰여 있다.

공림은 공자의 묘이기도 하지만 공씨집안의 전용 묘지이기도 하다. 무덤만 10만여개에 묘비가 400기가 있어 세계 최대의 가족묘지이기도 하다.  중국전역이 벌채로 벌거숭이가 되었지만 2400년동안 보호 받아 수백년된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자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전국각지에 모여들어 측백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벗나무등 각종 나무를 심어 공자에 대한 애도의 정을 표했다고 한다.

현재 공림의 둘레는 5591미터이고 총 183.33 헥타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공자의 후손만이 누리고 있는 특혜다.

 주영교를 건너면 참도가 공자의 묘까지 이어진다.

참도가 공자사당까지 이어진다. 조선 왕릉에도 참도가 있는 것을 보면 2천 5백년 전 스타일이 시차와 거리를 두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 대단하다.

망주석도 보인다. 절에서 당간을 세워 멀리서도 절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는데 무덤에도 역시 망주석을 세워 멀리서 무덤을 쉽게 알수 있도록 했다. 경주의 괘릉이나 흥덕왕릉에도 망주석이 있고..조선의 왕릉 그리고 지금도 부자들의 무덤에는 망주석을 세운다. 우리나라는 주로 봉분 앞에 모셔져 있는데 중국은 초입에 세워 놓았다.

 

중국사람들은 이 망주석을 건너 뛰으면 복을 얻는 다고 해서 훌쩍 뛴다. 시범을 보여줬던 이철용 가이드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양영훈 여행작가는 오래오래 살거여요.

 

중국의 사자상은 중국집 아저씨처럼 푸짐하게 생겼다. 거기다 미소까지 짓고 있다. 사자춤에 나오는 사자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 왕릉에는 말과 양, 호랑이가 수호석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이다.

서로 얼굴을 맛대고 있는 표정이 정반대다.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칼을 들고 있는 무인석은 인자하게 웃고 있다. 얼굴 주름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을 정도로 섬세하다.

우리 왕릉은 무인,문인의 구분이 확실하다. 무인석은 갑옷을 입고 늠름하게 서 있지만 이곳의 석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문인, 무인을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비슷하다.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세발 향로가 보인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를 종종 만날 수 있다.

 

공자의 묘앞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묘다. 유교의 정통성은 손자인 자사가 이어 받는다.

공자묘의 우측편에는 공자 아들 묘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 중국에서는 벌초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돈을 들여 벌초를 하겠다고 했는데  중국정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 나름대로 전통이 있으니까....)

공자묘

동양문화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공자가 아닐까? 그는 BC 551년 노나라 곡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처님이 태어난지 10년 전,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이다.  4대 성인중 3분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공자는 3살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무사인 아버지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하여 9척 6촌의 장신으로 알려져있다. 한대까지 곡부의 공자묘에 보존되었던 그의 의복을 보아도 그 체격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신흥세도가들이 노나라의 황실을 전횡하자 그는 미련없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실패하고 다시 귀국하여 작은 벼슬을 얻어 큰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삼환씨의 부도덕한 행실을 참지 못하고 56세에 고국땅을 등지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방황 한다. 수 많은 고생과 수모 배고픔을 겪은 후 공자는 젊은이를 위한 교육이 세상을 바꿀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지식인을 양성한다. 무려 3천명의 제자가 그를 따를 정도였다. 시, 서, 예, 악, 역을 재평가하여 교과서로 채택하고 전통문화를 가르쳤던 것이다.

73세가 되던해 어느날 아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이 시들려는가?'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태산같은 업적을 후세인들에게 남기고 절명한다.

비석에는 전서로 '大成至聖文宣王墓' 라고 새겨져 있다. '왕'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 성균관 대성전이나 향교에는 아직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쓰여진 위패를 모시고 있다. '크게 이룩하고 지극히 성스럽게 문을 떨친 임금'이라는 뜻이다.

역대 중국의 황제는 공자묘에 참배를 하는데  황제가 왕에게 절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였나보다. 멀찍이서 王이라는 글자를 보면 干자처럼 보인다. ^^

 

이렇게 가운데 획을 길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자공의 시묘살이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제일의 변설가(辯舌家)다. 그의 변설은 외교면에서 지극히 유용하여 제(齊)나라와 오(吳)나라를 오고 가면서 변설을 구사하여 노(魯)나라의 위기를 구했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자공은 공자보다 현명하다고 했고 당시의 정치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공자의 장례를 혼자 도맡아 치렀고 공자가 죽은후 이곳에서 6년간 공자묘를 지켰다. 그는 재산을 늘리는 재주가 있어서 천금을 쌓았다고 하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곡부

곡부는 고대 주나라와 한나라 땅이었으며 800여년 동안 노나라의 수도였다. 유가학설의 창시자인 공자와 제자인 맹자도 곡부출신다. 북경의 자금성과 태안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고대건축물 중에 하나다.  그렇기에 도시 전체가 역사도시이며 중국내음이 가장 물씬 묻어나는 도시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섰고 10년간 (1966~1976)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곡부는 어린 홍위병에게 치욕적인 굴욕까지 겪기도 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2500년동안 중국인에게 끼쳤던 영향력을 한꺼번에 부정하였기에 로 불가능한 말이다. 지금 중국엔 다시 공자 열풍이 일고 있다.

 

미국에 피자가 있다면 한국에는 부침개가 있다. 중국 역시 맛나게 보이는 부침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공묘

공묘는 공자의 옛집을 사당으로 삼았다. 그 규모도 대단하여 황궁의 규격을 따랐을 정도다. 공자를 모셔 놓은 전 세계의 사당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기원전 480년 공자가 죽고 난 다음해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한 행단에 3칸짜리 대성전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이 공묘의 시초다. 그 후 역대 황제에 의해 수십차례 증축을 겨쳐 당나라때 기본 골격을 갖추었고 명,청대에 이르러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황제가 공자에 대한 인력,물력지원을 아끼지 않으니 일반인들도 공자를 추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묘의 첫번째 돌패방은 팔각석주로 이루워진 금성옥진이다. 명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인 호찬종이 쓴 것이다. '글을 읽는 소리는 금소리와 같고 글을 떨치는 것은 구슬과 같다'는  뜻이다.

영성문

후한서의 기록에 보면 황제가 영성에 먼저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공묘의 제례도 하늘에 드리는 예와 같다는 의미다. 편액은 건륭제의 친필이다.

태화원기는 공자의 유가학설이 우주천체와 같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至聖廟 ..지성은 공자에 대한 존칭이다.

매표소는 성시문에 자리잡고 있다. 맹자에 수록된 문구이며 성인들 중에서 공자가 현실 당면문제를 가장 잘 인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시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온다. 자금성이 자객이 숨어있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가 거의 없지만 이곳은 나무가 무성해서 가슴마져 시원하다.  소림사의 관문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성금성큼 걸었다.

 

 

홍도문

논어의 위령공에 나오는 말이다. '人能弘道, 非道弘人' 즉 사람이 도를 넓힐 수는 있지만 도가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 라른 말에서 따왔다.

대성전까지 참도가 이어진다. 가운데 길은 귀신이 다니는 신도다.

 

대중문

지붕이 비싼 청기와로 덮혀 있다. 전직 대통령이 좋아할 문이다.

13비정

십삼비정은 당대이후 역대황제들의 비문을 수장하고 있다.공묘내에 있는 비석중 오래된 것은 한 대의 것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것이 신해혁명무렵의 것으로 시대에 따른 다양한 서체의 비석이 200기가 넘게 경내에 세워져 있다. 공묘는 중국내 유수의 비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규문각

일종의 도서관건물이다. 높이 23.3미터, 가로 30미터로 2층건물이다. 못이나 접착제늘 전혀 사용하지 않고 1천만개의 나무를 모두 하나씩 이어 만든 건물이다.

13비정

 

대성문

공묘의 마지막 대문으로 송대때 지어진 대문이다. 옛날엔 공자에게 제사 지낼때만 문이 열렸다고 한다. 한국의 성균관 대성전 문은 지금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행단

대성전 바로 앞에 행단이 자리잡고 있다. 송대 이전까지 대성전이 있던 자리였다. 공자가 노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장소로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단이다. 송대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곳에 단을 쌓아 살구 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던 장소를 기념했으며 최근에 다시 에 정자를 짓고 행단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무조건 외웠을 것이다. ^^

 

대성전 앞에 새겨진 답도.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한다. 우리 궁궐에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기에 봉황이 새겨져 있다.

대성전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태안의 대묘의 천황전과 더불어 동방 3대 대전으로 손꼽이는 건물이다. 전세계의 2천여개의 공묘가 있는데 이 모두가 곡부의 공묘를 보방하여 건축한 것이다.

보기만 해도 화려하고 웅장하여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지붕은 황궁에나 쓴다는 황색유리 기와이며 높이 32미터, 폭 54미터 길이 34미터로 28개의 돌기둥에 의해 공자를 받치고 있다.

대성전을 보노라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성전 앞 마당에서 제공악무가 열린다. 공자의 생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음악,시가, 무용등 종합예술이다.

대성전 한가운데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9척 장신답게 우람하게 앉아 있다. 공자상 좌우에는 사배라고 불리우는 4명의 현자인 안자, 증자,자사, 맹자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대성전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대성전을 받들고 있는 대리석기둥이다.  황제의 상징이기도한 용의 조각은 자금성보다 더욱 화려하고 정교하다. 청나라때 황제가 이곳을 찾았을때  이 건물의 화려함을 보고 노할 것이 두려워 천으로 기둥을 모두 감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황궁에만 용을 새길  수 있으며 다른 건물에는 용을 새길 수 없도록 했다. 이 기둥에 새겨진 비룡만 보더라도 중국내 공자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웃는돌님이 용을 감상하고 있다.

총 28개 기둥이지만 정면 10개의 기둥에만 돋을 새김을 했다.

대성전 동재의 회랑

 

공택고정

공자가 직접 마셨던 우물이란다.

노벽

우물 뒤에는 벽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공자의 9대손 공푸가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하기 위해 경서를 고택의 벽에 숨기고 흙을 발라 놓았는데  선한때 궁을 확장하기위해 공자의 고택을 헐어내던 중에 경서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부터 '魯壁藏書'라는 말이 생겼다.

공자의 일대기를 벽화로 만들어 놓았다.

시례당 앞에는 당나라 회나무와 송나라 은행나무가 아직까지 자라고 있다.

공묘에서 나와 골목에서 모놀포즈...한방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가치와 생활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상이 공자사상이 아닐까? 그 정신의 뿌리를 찾아 이 먼땅 곡부까지 왔다. 이젠 눈에 보이는 흔적은 그만 찾고 그의 정신세계를 찾아 떠나야 겠다.  

'學 而 時 習 之  不 亦 悅 乎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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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공자의 고향 마을 곡부를 찿아서
제목 없음 (여행편지 307) 공자의 고향마을 곡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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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곡부의 풍경들

글/사진: 이종원

공부

중국 역대 황제중에 공자를 받들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에 공자의 종손에게는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었다.그래서 공자의 종손은 제사를 모시는 기능외에도 제후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이는 제사를 지내는 장자에 상속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풍습과 같다.  

공부엔 463개의 방이 있으며 지금도 공자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귀족의 장원이기도 하다.

곡부의 거리 곳곳에 유교 경전이 내걸려 있다. 걸으면서 경전을 읽는 맛이 솔솔하다.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함께 하되 부화뇌동한다'

 

곡부에서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 인력거

머리 위에 차양이 있고 정면을 보고 달릴 수 있다.

마차를 타고 곡부시내 한 바퀴를 둘러보는 것도 운치있다.

삼륜자전거. 곡부는 도시 전체가 3층을 넘는 건물이 없다.  공자의 대성전 높이 보다 낮게 건물을 지어야 한다. 공자에 대한 예의다. 그래서 더욱 중국적인 분위기를 느껴고 있는지 모른다.

과일행상 아저씨

闕里賓舍 (궐리빈사)

곡부의 최고의 호텔이다. 모택동을 비롯하여 중국의 실권자들이 모두 이 호텔을 찾았다. 대개 중국의 명승지를 가면 명사들이 방문했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모택동과 등소평, 주은래, 강택민 사진이 많다.  이곳 권리빈사도 입구에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는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있어 먼 곳으로 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는가' 라는 글이 적혀 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정말 먼 곳에서 왔으니까.

궐리빈사의 인공연못. 밤에는 이곳에서 고전가무가 펼쳐진다.

산동요리는 북경,상해,사천, 광동과 더불어 중국 4대요리 중에 하나다. 곡부는 산동요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재료가 다양하며 조리기법이 기묘하여 귀한 외국 손님접대시 공부요리를 준비한다고 한다.

공자문화원 초청행사에 참여한 모놀식구들. 공부요리를 즐겼다. 공자 문화원 부원장님 건배를 제의에

"간베이"

공자연구원

공자연구원은 공자의 생애, 사상, 곡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과 아기자기한 조경이 볼 만하다. 전시실엔 세계 각지의 공자사당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성균관의 대성전도 보인다.

공자연구원의 부원장님의 강의를 들었다.통역은 김철용 가이드님께서 수고하셨고..모두 수료증을 받았다

모놀대학 모여서 놀자과 졸업식 같다.

정수도..한방

 정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이 옷을 입었을 때란다.

곡부의 재래식 시장

곡부가는 길에서 만난 산골마을.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 붉은 색임을 알 수 있다. 성냥갑처럼 집이 똑같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술 취하면 남의 른집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부자 마을이 되면 함께 좋은 집을 짓는다고 한다.

김성철 가이드

25살 연변총각이다. 가이드 수습을 위해 모놀답사에 참여했다. 수시로 메모하면서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다. 보디가드처럼 숨어서 모놀식구들의 안전에 신경을 쓴다. 가끔 산동에 대해 설명하는데...초보티는 나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마 멋진 가이드가 될 것 같다. 이렇게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나면 그저 반갑다.  멋진 중국시를 부탁했더니..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한국에 돌아와 회원명부를 확인해보니 모놀회원으로 가입한 것 같다.

노래를 못해 분위기를 위해 술을 배웠다는 데이지킴..5분 스피치 중간중간에 술을 마신다.^^

표정이 80년대 가끔 시내버스에서 본 풍경 같지 않는가?

"부모님은 이래만에 돌아가시고...착하게 살려고 애를 썼는데...사고를 쳐서 방에 가고......출소후..."

이렇게 얘기하면서 볼펜을 강매하는 깍두기 아저씨가 생각난다.  전인권 같기도 하고.... 국전 화가인 해도님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경험들이 녹아 만든 그림을 보고 싶다.

 

오랜만에 보는 삼륜차. 한국에서 자주 넘어진다고 하여 없어진 차다.

태안의 대묘입구다. 중국 고대 3대 건축물 중에 하니다. 자금성과  공묘를 자세히 봤고 대묘를 스쳐 갔으니...나는 위대한 세 건축물을 모두 만났다.

긍덕기...캔터키와 발음이 비슷하다.

 

중국에서 만난 야쿠르트 아줌마. 수레가 아니라 자전거다. 중국진출에 성공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바퀴는 콩알만한데...

현재 중국인이 달리고자 하는 힘찬 구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다 함께 부유의 길로 걷자. "

앞으로 수많은 중국 부자들이 세계를 호령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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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하늘 아래 뫼이로다.중국 태산 등정
제목 없음 여행편지308) 하늘아래 뫼이로다. 태산등정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5 하늘아래 뫼이로다- 태산

글/사진: 이종원

곡부의 찬란한 문화유산에 흠뻑 빠져 시간을 많이 잡아 먹는 바람에 태산에 왔을 때는 정작 시간이 모자라 애를 먹었다. 마지막 케이블카가 내려오는 시간이 6시란다. 태산입구인 천외촌에 도착한 시간이 4시 30분이니 서둘러 뛰어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인들은 우리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천하태평이며 만만디다.표 사는데도 한 세월. 표를 받는데도 한 세월. ^^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맘 편하다.

과감하게 애정표현하는 중국연인들.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딱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즐거운 눈 요깃감을 즐겼다. 특히 여성이 더 과감하다.

중국인들은 짐을 어깨에 메는 것을 좋아한다. 산행할 때 막대기만 달랑 들고 올라가는 사람을 종종 본다. 무거운 물통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은 몇 번 보았지만 프로판 가스통도 들고 다니는 것은 처음 본다.

대형버스는 길이 좁아 올라가지 못한다. 작은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두 대에 나눠탔다. 30분을 굽이 돌아 태산의 깊은 속내로 빠져 들어갑시다.

 

케이블카 매표소다.  편도가 45원이니까 돈으로 6천원이 넘는다. 왕복 1만 3천원에다 태산입장료, 버스대절료등...태산 한번 오르는데 1인당 3만원이 훌쩍 넘어버린다. 그렇다보니 중국사람들에게 케이블카는 그림의 떡이었다. 대신 7천개가 넘는 계단을 죽어라 올라가야 한다.

케이블카 올라가는데 약수터가 있는데 물 한 컵에 1원씩 받는다.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물 맛도 별로인데 유명한 약수라고 호들갑을 떤다. 하긴 중국은 물이 귀하다.

평일이고  탑승료마져 비싸서 그런지 케이블카는 한산했다. 8분 동안 태산의 깊은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진시황, 한무제도 걸어 올라 갔을 태산을 8분만에 편히 올랐으니 황제도 부럽지 않다.

태산의 기암절벽을 감상할 뿐 아니라 태산을 감싸고 있는 태안 시내가   한 눈에 펼쳐진다. 마지막 급경사를 오르는 맛이 그만이다.

아래가 까마득하다. 저 멀리 버스가 올라왔던 산길이 보인다.

중국사람들이 정말 대단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바로 이 돌계단이다. 폭이 작은 계단길이 아니라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만큼 넓직한 계단이 무려 8천개에 이른다.

'18판'이라고 부르며, 일명 천국의 계단이다. 수덕사 108계단에 오르며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데 8천계단을  생각하니 끔찍할 따름이다. 말이 8천 계단이지 대략 63빌딩 10개를 올라가는 거리다.

중국인들은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

 

이 아가씨들은 3시간에 걸쳐 8천 계단을 올라온 것이다. 정말 예쁘고 대견하다. 하긴 인부들 8명이 정상까지 큰 나무를 메고 온 것을 보고 아연질색한 적도 있다.

계단을 오르면 하늘에 이르는 문인 南天門 이 나타난다.  중국사람들에게 태산은 하늘로 연결된 통로로 여긴다. 문마다 天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남천문에서 바라본 태산의 전경. 안테나가 있는 곳이 정상이다. 그 곳에 기상대가 자리잡고 있다.

남천문에 들어사면 天街가 나온다. 하늘의 거리인 셈이다.  이 곳에 여관과 식당, 잡화점이 몰려 있다.

이 높은 곳에 웅장한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일일히 돌을 손으로 이고 와서 이 건물을 세운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 '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정성이 오늘날 태산을 일구어 낸 것이다. 산이 아름다워 세계문화유산이 지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삶이 묻어 있는 있는 것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산줄기를 따라 신작로처럼 넓은 길과 계단이 이어지고 있다. 한 쪽은 천길 낭떠러지이며 다른 쪽은 문화유산이 즐비한 곳이다.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도 행복하다.

솔직히 말해서 태산의 경치는 설악산보다 못하며치 인왕산이나 북한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높이 1,545m 로 높지 않지만 산동의 대평원에 우뚝 솟아 있어 큰산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우 위압적인 산이 된 것이다. 김제 대평원이 산동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이듯이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사람들에게는 약간 실망을 줄 수 도 있다.

그러자 태산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필두로 역대 73명의 황제가 이곳에 올라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고대제왕들이 봉선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태산은 신산으로 거듭난 것이다. 불교, 도교의 고승들과 셀수 없는 문인과 명사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아  태산에 남긴 흔적과 문학작품 또한 대단하다. 절대적인 힘을 억누르고 신을 향한 인간의 간절함이 깃들여 있어 태산이 더욱 고귀한 반열에 오른 것이다.

중국의 오악은 동쪽의 태산 서쪽의 화산, 남쪽의 형산, 북쪽의 항산과 중앙에 숭산을 말한다.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아보인다고 하여 '五嶽獨尊'으로 칭송받고 있다.

태산에 대한 속담을 모았다.

'갈수록 태산, 티끌모아 태산, 태산처럼 버티고 앉아 있다. 태산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인다. 보리고개가 태산보다 높다.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니 숭산이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산을 보지 못하고 그 명성에 그만 압도당해 태산을 에베레스트산 보다 높게 만들었다. 다음부터 한국인들은 '티끌모아 백두산'이라고 해야겠다.

벽하사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역사를 빛낸 수많은 문인들이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겨 넣었다. 무려 2500개의 석각작품을 남겨 지붕없는 마애석각 박물관으로 불리우리도 한다.

태산은 중국 서예의 성지이기도 한다. 진나라부터 명청까지 중국 금석학의 총아라고 한다.

에쁘장한 태산의 휴지통

시간만 있으면 산세를 바라보며 태산을 즐길텐데...첨단 문명의 이기인 케이블카 마감시간에 쫒겨 어쩔 수 없이 태산에서 내몰림 당했다. 언젠가는 8천게단을 밟고 태산정상에 오르겠지.

봉우리 위에는 연인이 산줄기를 감상하고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天街 패방에서 본 북쪽 하늘

태산을 떠나기 아쉬어서...달새님

케이블카 막차를 탔다.  태산에 기를 잔뜩 받아서 그런지 표정에 뿌듯한 감동이  묻어 있다.

저 아래 케이블카 탑승대가 보인다. 까마득하다.

하도 서둘러 다녀서 그런지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목이 바짝 마른다.수박을 한 덩이 채 팔면 좋으련만 중국사람들은 꼭 저울로 잰다. 수박이 무거우니까 쪼개서 잰다. 태산에서 먹는 수박...시원하다.

중국인이 생각한 최고봉은 자로 잰 산이 아니었다. 마음 속 한 없이 깊은 산- 바로 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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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압록강을 따라 만난 북녁의 산하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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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마르코폴로도 극찬한 샘물의 도시-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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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편지 310) 마르코폴로도 극찬한 샘물의 도시- 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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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르코폴로도 극찬한 샘물의 도시- 제남

글/사진: 이종원

제남시

제남시 북쪽으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가 흘러가고 있으며 남으로는 천하 제일의 태산을 품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나라의 수도로 번성했고며 한나라때부터 濟水(황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濟南(제남)이라고 불리었다. 진,송,명,청등 2500년동안 역사문화도시로 이어오고 있으며 중국 20대 대도시 중에 하나이며 9천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산동성의 성도이기도 하다.

10차선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고 다른 중국도시에 비해 깨끗한 편이다. 남경, 무한, 중경과 더불어 중국의 4대 화로라고 불리울 정도로 후덥지근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대구시처럼 분지로 형성되어 있어 그런가보다. 5월말인데도 찜통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중국중국의 산업,물류,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2004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제남에서 개최했고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표돌천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도 제남을 보고 '샘물의 도시'로 명명할 정도로 제남은 샘물이 많은 도시다.  72개의 샘물중에서 표돌천 샘물은 '천하제일의 샘물'이라는 수식어가 따를 정도로 물이 맑고 청명하다. 고금을 통해 대륙의 수많은 명사들이 찾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도 높다. 당송팔대 문장가 중에 한사람인 증공, 중국 4대명필인 조맹부도 이곳 샘을 보고 칭송한 작품이 전해질 정도니까...

표돌천 공원내에도 34개의 샘이 있는데 숙옥천에는 동전이 가득하다.동전을 던져 뜨고 가라 앉음을 보고 점을 친다고 한다.

공원내에는 이청조 기념관도 둘러보면 좋다. 이청조는 중국 송대(宋代)의 시인이다. 제남 출신이며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있는 여성인데, 금석학자(金石學者)로 유명한 조명성(趙明誠)과 혼인하였다. 북송 말 금(金)의 침입을 받아 강남으로 피난했으며 그 뒤 남편과 사별했다. 말년에는 저장성[浙江省]에서 재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녀는 송대에 크게 유행했던 서정적인 운문(韻文)으로서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는 사(詞)를 주로 지었다. 그녀의 시는 여성 특유의 예리함과 강렬한 어법(語法) 구사로 유명하다.

성성만(聲聲慢)-李淸照

 

찾고 찾고 또 찾지만, 尋尋覓覓,

냉랭함과 스산함 뿐, 冷冷淸淸,

처량하고 비참하고 외로워라. 悽悽慘慘戚戚,

잠깐 따뜻하다 금새 추워지니, 乍暖還寒時候,

몸 편히 보전키 어려우리. 最難將息.

두 잔 석 잔 맑은 술 마시지만, 三杯兩盞淡酒,

슬픔 어찌 감당할꼬! ?敵他,

저물수록 바람만 매서워라. 晩來風急.

기러기 날아가네, 雁過也,

이 내 맘 너무도 아프게 하지만, 最傷心,

그래도 옛 시절 서로 알았었지. 却是舊時相識.

 

온 땅에 국화 꽃잎 쌓이더니, 滿地黃花堆積,

너무도 초췌히 변했구나! 憔悴損,

이제 어느 뉘가 너를 딸꼬? 如今有誰堪摘.

창가를 지켜 앉아, 守著窓兒,

홀로 어이 저문 날을 보낼까. 獨自?生得黑.

오동잎에 가랑비 내리더니, 梧桐更兼細雨,

황혼이 되어도, 到黃昏,

두둑두둑. 두둑두둑 點點滴滴.

이 때라, 者此際,

어찌‘愁’이 한 자를 견디리오! ?一個愁字了得.

 

제남시에서 가장 볼만한 곳이 바로 표돌천이다. 연못 가운데 세구멍에서 물이 보글 보글 솟아 나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매 초마다 1600리터 샘물을 뿜어 낸다고 하니 1초에 1.6 리터 생수 100병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관란정 우측 비석에  새겨진 '천하제일'이란 글씨가 결코 과장은 아닌듯 싶다.

제남의 지질구조가 카르스트 지형이라서 지하 종유동에서 솟아 오르는 용출수란다. 청대의 건륭황제가 강남에 왔을 때도 이 곳의 물을 즐겨 마셨을 정도란다.물이 유난히 달아 이곳의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그윽한 차맛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근처 찻집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차를 음미하고 싶다.

송나라때 세운 녹원당이 연못 가운데 세워져 있다.

 

녹원당 뒤에 사당이 있다. 한국에서 단색 조형물만 보다고 총천연색을 덧칠한 조형물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이 조형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누가 댓글 좀 달아주세요. 사진 찍다보니까..설명을 못들어서요.

표돌천공원에 와서야 중국 인구가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좁은 공간에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나중에 우리 일행을 잃어버렸을 정도다. 야외공연장에서는  중국민요와 기악 그리고 아이들의 재롱잔치가 눈을 즐겁게 만든다.

공연에 참가한 아이들...아이 귀여워.

사생대회도 열린다. 그림이야말로 세계 공통어다. 동심은  우리네 아이들과 다를바 없다. 도화지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길게 어어진도화지에 자기 분량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협동심도 기를 수 있고 아이들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

대명호

제남의 샘물이 모여서 이렇게 거대한 호수를 만들어 냈다.  티끌모아 태산을 만들어 냈듯이  물 한사발씩 솟아올라 호수를 일구어 낸 것이다. 청나라 유명한 시인이 대명호를 보고  '사면에 연꽃이 피고 삼면에 수양버들이 흐느적 거리며 푸른산, 넓은 호숫가 도시 풍경을 이루네.'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도 '원림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즐겁고 산과 호수의 경치에 눈 쉴여유가 없다.' 라고 극찬한 곳이다. 호수 둘레는 대략 5km이며 뱃놀이하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능수버들이 흐느적 거리고 있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이름이 나있다.

대명호 안에는 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역하정이 있는 섬이다. 이백, 두보가 술을 나누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제남은 2천6백년의 역사와 마천루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원대에 창건된 도교사원인 북극각이다.

동전을 던져 가운데 종을 맞추면 샘물이 솟아난다.

산동박물관

의외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 산동박물관이다.1956년에 개관했으니 중국 건국후 가장 먼저 문을 연 성급박물관이다. 표본만 21만건이며 산동성 수장품의 1/3이 이곳에 몰려 있다. 국보급 보물이 3건, 일급 수장품이 1388건, 서적이 12만권이 전시되어있다.양으로 볼때 중국 전체에서 7위이고,수장품의 양도 4위이다. 특히 5천년 역사를 지닌 갑골문자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 한자의 시초다.

실물 공룡으로 만들어낸 화석인 산동 공룡화석은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출근 시간..중국이 자전거 천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스쿠터나 엔진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기름을 아끼려면 페달을 밟고 오르막이 나오면 동력으로 달린다.

새내 한복판에 2층버스도 지나다닌다. 꼭 한번 타보고 싶다.

전차도 볼 수 있다.

까르프...家樂福(가락복..짜러푸) 비슷한 음을 따왔지만 뜻 또한 신경을 쓴다. '즐거움과 복이 있는 집'

삼성전자나 현대자 간판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천성광장

낮에는 사반세기 역사를 만나고 밤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중국의 젊음을 만끽해본다. 천성광장은  유네스코가 '국제 예술광장'으로 지정될 정도로 산동의 젊은이들이 문화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38m 높이, 샘물을 형상화한 조각탑(천표)은 제남의 상징물이다. 클래식 음악에 맞춰 물을 내품는 연꽃 음악분수도 볼만하다는데 시간이 늦어 볼 수 없었지만 화려하게 조간된 분수는 만 날 수 있었다. 광장북쪽으로는 표돌천에서 나온 개천이 광장을 따라 흐르고 있다. 가곡과 중국민요를 부르는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중국옷을 입은 정수. 중국인들도 정수를 보고 힐끔힐끔 쳐다본다. 아빠를 닮아서 너무 잘 생겼나?

 

매번 호텔 음식을 먹다가 이번에는 음식체험을 해보았다. 1인당 3천원씩 쥐고 천성광장 지하식당에서 먹고 싶은 것을 사먹었다. 닭다리 국수와 돈가스 국수를 시켰는데...그런대로 먹을만 하다. 시원한 생맥주 한 잔도.

식당옆에는 대형쇼핑몰이 있다. 중국에서 성공했다는 이랜드도 있었다. 한국식당가도 있고 한국제품 상가도 형성되어 있다.

 

제남 밤 문화 체험

역시 야시장을 둘러봐야 중국 서민들의 만날 수 있다. 우리네 남대문 시장처럼 불야성을 이룬다.

 

우리 돈으로 2백원 정도하는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모놀식구들은 못 말린다.  늦은 시간에도 야시장 한켠에 자리잡고 양꼬치 구이를 즐기며 맥주로 갈증을 푼다. 젖가락 장단에 흥겹게 노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이 깊은 관심을 가진다. 급기야 중국 여인(제일 가운데)이 동참하여 함께 제남의 밤을 즐긴다.  중국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기 때문에 양꼬치 몇 개 구워놓고 맥주 한 잔에 세월아 네월아 하는데... 성질급한 한국인들은 완샷!!

왕창 매상 올린 식당 아주머니 표정이 밝아진다.

데이지님이 한국서 배운 중국노래 야래향을 중국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2천6백년 고도 제남의 밤을 자꾸만 깊어만 간다.

 

모놀과 정수 .....여행작가 이종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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