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일방적인, 너무나 일방적인

김용호 칼럼

AD 1세기 지중해 연안도시,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이 주둔하던 유대의 정치·군사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시민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인 ‘이달리야 부대(Cohors II Italica)’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부장 고넬료는 로마제국의 군인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사도행전 10장2절)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할례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먼저 그를 찾아가셨다.

이것이 이방인의 구원을 다룬 사도행전 10장의 출발점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에피소드를 10장과 11장에서 반복해 다룰 만큼 중요하게 취급한다.

이 사건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도, 그 출발점은 언제나 인간의 자격과 갈망,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게 하셨고, 동시에 욥바에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두 사람을 각각 준비시키시며 한 사건을 향해 이끌어 가셨다.

베드로가 본 환상에는 구약 레위기 11장의 율법 상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각종 짐승과 새들이 담긴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베드로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10장14절)라며 거절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먹을 일이 없다는 결심이다. 유대인에게 정결 규례는 단순한 음식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언약의 경계였다.

그러자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어찌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주신 율법을 스스로 허무시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처음에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음식에 관한 명령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고넬료의 사자들이 찾아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환상의 참뜻을 깨닫는다.

그 환상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시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부정하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라는 표현으로 바뀐다. 부정한 음식에 대한 계시는 결국 사람에 대한 상징이었던 셈이다. 부정한 짐승은 부정한 이방인을 가리켰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음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신 이방인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율법 속에 묶여 있던 어느 유대인의 편견을 깨뜨리는 의식개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율법의 목적을 완성하셨음을 선언하는 구속사적 사건이었다. 율법의 참 의미와, 예수의 피를 담보로 그것을 스스로 완성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다. 

구약의 정결법과 제사제도는 본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르치는 그림자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룩을 유지하면서 율법을 완벽히 지켜낼 능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율법이 선언한 진노와 저주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진노와 저주를 모두 쏟으심으로, 또한 완벽한 율법 지킴을 완성하셨다. 십자가는 진노와 저주의 심판대였고, 동시에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었다. 

히브리서 10장은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궁극적으로 원하신 것이 아니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몸, 단번에 드리신 희생을 기뻐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십자가는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완성했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던 담까지 허무셨던 것이다.

따라서 고넬료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이유는,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그의 구제와 기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결과로 나타난 열매였을 뿐이다. 사도행전 11장14절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전언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가 했던 이야기를 전한다. “시몬 베드로를 욥바에서 불러오라. 그(베드로)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내(베드로)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다(15절)”고 기록했다. 

고넬료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의 사람이었던 것은 맞지만, 베드로를 만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구원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를 자신이 정한 때에 부르시고, 복음을 듣게 하시며, 성령을 통해 믿음을 주신다. 바울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한 그대로였다.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신의 오랜 종교적 확신을 내려놓아야 했다. 수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방인은 부정하다”는 유대인의 사고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그 편견을 단번에 무너뜨리지 않으셨다. 가장 민감한 음식 규례를 통해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꾸시는 환상의 계시를 주심으로, 베드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 구원의 주체는 베드로도, 고넬료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이셨다.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선포되자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것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를 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사도행전 10장의 결론이자 복음의 본질이다. 십자가는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을 위한 구원이었으며, 그 은혜는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진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찾아가 식사를 하면서 교제했다는 말을 듣고 분개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을 접하고는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십자가가 모든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일방적으로 완성하셨음을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집인)

부동산캐나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