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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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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가슴을 덜컹하게 만든다. 대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때 새벽 전화가 온다. 누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무슨 급한 상황으로 병원에 갔을 때 등... 수년 전 어느 새벽에는 아는 친지가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경찰서에 있는데 어떻게 손 좀 쓸 수 없겠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한국 같으면야 이리저리 수소문 하면 급한 불은 막았겠지만 이곳에서는 통할 리가 없으니 함께 안타까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민 오기 전, 어머니의 타계 소식도 새벽전화를 통해서 전갈을 받았다. 20여년 전, 그때도 예외 없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데 새벽에 어렴풋이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 너머로 큰형수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향년 82세… 어머니는 당시 잦은 병치레를 하고 계셨기에 늘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들고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던 기억이 아련하다. 


 새벽에 듣는 전화벨 소리는 항상 불안하다. 특히 우리 같은 이민자 입장에서는 한국에 노부모나 친지가 계실 때 더욱 그렇다. 반가운 일로 새벽부터 전화를 할 리는 없을 것이다.


 지난주 새벽에 걸려온 전화는 다시금 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새벽 2시경, 꿈결처럼 어렴풋이 건넌방에 있는 집전화의 벨이 여러번 반복해서 울리는데 잠에 취해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전화기가 안방에만 있어도 받았을텐데... 특히 우리 부부는 잘 때는 셀폰도 모두 꺼버리는 습성이 있어서 윈저에 사는 큰동서의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확인하니 집전화와 우리 부부의 셀폰에 수백 번의 메시지가 남겨 있었다.   


 연세에 비해 무척 정정하시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향년 87세. 집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결국 운명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나는 우선 아내부터 진정을 시킨 후 한국행 비행기표를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시각각 날아오는 상황은 우리가 지금 허둥지둥 달려가본들 장모님의 몸은 이미 한줌 재가 되어 있을 터이니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녀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일단 출근을 하기로 했고, 아내만 가서 어머니의 재라도 만져보도록 했다. 그러나 출근해서 다시 연락을 해보니 상황은 ‘추후 방문’이 낫겠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장모님이 그렇게도 말리시던 외국에 나와 살다보니 돌아가셔서도 불효만 더 쌓게 된 셈이다.        

    
 사람은 막상 자리를 떠나면 진정한 모습이 보이는 법이다. 전형적인 현모양처(賢母良妻) 형이셨던 장모님은 삶 자체는 보통의 한국여성상이셨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역시 인근 경상도 출신의 장인어른과 결혼해 1남4녀를 낳고 키우시는 동안 인생의 풍파와 곡절도 많이 겪으셨다. 장인의 사업이 부침(浮沈)을 거듭할 때마다 장모님의 인생도 파고(波高)를 넘나들었다. 


 집안의 막내인 지금의 내 아내를 결혼시킬 땐 참 고우셨다. 신랑신부 양가의 어머니들이 결혼식장의 촛불을 밝히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장모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었으니 바로 재일교포 시동생이었다. 나중에 나의 처삼촌이 되신 그 분은 모국을 방문했다가 뜻하지 않은 시국사건에 연루되면서 고초를 겪기 시작했고, 그 분의 온갖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장모님의 몫이 됐다. 그 뒷바라지는 26년여 전 장인어른이 세상을 뜨신 후까지 장장 20여년 간 계속됐다. 나중에 일본으로 귀국한 처삼촌도 수년 전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우리가 이민병이 들어 외국에 나가 살겠다고 하자 몹시 허전해하시며 “왜 정든 사람과 자기 조국을 버리고 외국에 나가 살려 하느냐”며 역정을 내시기도 했다. 장모님은 그 후 세번 정도 캐나다를 다녀가셨는데, 생각하면 왜 그때 좀더 살뜰하게 잘 해드리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만 남아있다.    

   
 2년 전 여름에 장모님은 셋째 처형과 함께 우리집을 방문해서 온타리오의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알공퀸 공원과 조지언베이 트레일을 돌며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으로 자연을 즐기시던 장모님, “캐나다가 공기 하나는 좋구나”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면서도 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늘 안쓰러워 하시던 장모님. 그것이 이승에서 뵌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은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가실 때까지 잔병치레도 없었고 정신도 초롱초롱하셨다. 홀로 지내시다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당신께서는 이승을 하직하기 직전까지도 절을 오가며 자식들의 안녕을 빌었다.      

    
 외국에 살다보니 이럴 때 참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슬퍼하는 것 외에 별로 없는 것이다. 영전에 꽃 한송이도 바치지 못하는 이 불효를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하얀 목련꽃처럼 청초하고 고우시던 장모님, 이제 세상 풍파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평생을 한결같이/단아한 목련의 자태를 간직하셨던/어머니/꽃샘추위 시샘에/살그머니 봄을 틔우는/목련의 계절에/총총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은/삶이 고달픈 날에도/마음 하나는 목련꽃처럼/맑고 순하게 지켜가라는… //그 마음 변치 않으려면/세상살이 모진 바람도/안으로 묵묵히 삭일 줄 아는/큰 사람 되라는 뜻이겠지요/베란다 창문 너머 목련꽃 더미 속/청아한 미소로/송이송이 피어나는/어머니 얼굴’(정연복 시인 ‘목련꽃’)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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