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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강물- 모진 비바람 지나간 자욱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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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원.간호사들께 바치는 헌사



서독에 파견됐던 간호사와 광부들. 오른쪽이 토론토의 구자선 평화식품 사장(파독광원단체 동우회 이사장)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이수인 작곡 ‘내맘의 강물’)

 

 ‘동양의 슈베르트’라 불린 한국의 동요·가곡 작곡가 이수인 선생이 남긴 주옥같은 가곡이다. 2년 전인 2021년 8월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향년 82세로 영면에 든 선생에 대해 소프라노 조수미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본선에 나가 6학년 언니에게 최우수상을 내주고 울먹거리는 저에게 이수인 선생님께서 오셔서 '아주 잘 했는데 왜 울고 있니? 원래 큰상은 언니들에게 양보하는거야' 하시며 어깨를 토닥거려주셨던 인자하신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과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0…이수인 선생은 꼬마 조수미의 어머니에게 춤과 피아노, 노래 세 가지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조수미를 성악가로 키우라고 조언한 결정적 멘토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내 맘의 강물, 별, 고향의 노래 등 150곡이 넘는 가곡과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방울꽃', '아빠의 얼굴', '목장의 노래' 등 500곡이 넘는 동요를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 선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가곡과 동요도 그만큼 메말랐을 것이다.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음악이 좋아 걸어온 길, 돌아보면 숱한 사연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로수 그늘 짙은 포장길보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더러는 발에 채이고 걸음 걸음 뽀얀 흙먼지 이는 비포장 황톳길. 부와 명예는 거리가 멀었고 그럴 듯한 직위 하나 없이 살아온 탓에 흔한 명함 한번 새겨 돌려 본 적 없지만, 호젓이 걷는 오솔길은 산새들 지키는 방울꽃이 곱게 피고 나래 푸른 기러기 고향 가는 길엔 길동무 되어 언제라도 만나면 반가운 벗들과 동행했다.”

 

0…지난 주말 저녁, 뜻깊은 음악회에 참석했다. 60년 전 머나먼 독일 땅에 파견됐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노고를 다시 생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조상두 지휘자의 아카데미 윈드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주도한 이날 음악회에서 동.서양과 클래식.가곡.재즈를 넘나드는 다양한 레퍼토리의 음악이 800여 관객들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    

 

 한곡 한곡의 가사가 모두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여러 음악 중에서도 나는 특히 위의 이수인 선생 가곡이 가슴에 와 닿았다. 가사가 꼭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사연과  같아서다.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0…꽃다운 나이의 청춘 남녀들이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돈을 벌러 떠난 것이 60년 전.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4년간 7만9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파송됐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낯선 곳.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고 커피를 된장국이라 부를만큼 세상에 어두워 설움도 많이 겪었다.

 

 이들은 죽어라고 일했다. 그렇게 피땀 흘려 번 돈 거의 전부를 고국에 보냈다. 그 돈으로 빚을 갚고 동생들을 가르쳤다. 고국이 보릿고개를 넘는 큰 힘이 됐다. 이들의 송금액은 한때 대한민국 GNP의 2%대에 달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은 적지 않았다. 파독 기간 중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근대화의 1급 공로자들이다.

 

0…“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서독의 수도 본에서 차로 한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을 방문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은 모처럼 양복으로, 간호사들은 색동저고리를 차려입고 기다렸다.

 

 박대통령은 광부, 간호사들과 일일이 손을 잡았다. 이때 육여사가 간호사들에게 “가족들과 연락은 잘 되나요” “일은 고달프지 않나요” “고향은…“ 이라고 말하는 순간 한 간호사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모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 후손들을 위해 잘사는 나라를 건설해 나가자"고 격려했고 장내는 더 큰 눈물바다가 됐다. 박대통령과 육여사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0…이는 아직도 한국의 언론에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다. 일부에선 사실이 과장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떠나 진한 여운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의 땅속 1천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는 광부들과, 병원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는 어린 간호사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광부들의 얼굴과 팔·다리는 상처투성이였다. 지하에서 채탄작업을 한 후 갱위로 올라오면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시원한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보냈다.

 

0…이 분들의 근면성실은 제2의 타국땅 캐나다에 정착해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이 분들의 노고 위에 토론토 한인사회는 건실한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 은공을 어찌 잊으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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