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lee

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www.budongsancanada.com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76 전체: 293,759 )
바이킹 유람선에서 만난 안익태 선생의 보좌역 지머만 교수
yslee

 

 6년이 흘러갔다. 세월의 무상함을 어찌하려나. 대장군 잘 있거라, 다시 오마 고향산천, 조국을 떠난 지가 47년이 되었다. 옛적 선비들은 엽전 열댓 냥 들고 과거 보러 갔었지만 미화 200불 들고 산 설고 물 설고 사람도 설고 문화와 생활관을 알지 못하는 이역만리를 찾아왔다.

 그 눈물겨웠던 인생살이의 이야기를 어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생존의 역사이기에! 내 항시 생각하지만 우리들의 삶이 문학이라는 결론에서 20여 년 시(詩)를 쓰면서 나대로의 생각은 나는 <무명의 유명시인으로 남아 있는 낭인 시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조국애 민족애를 위하여서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하리라는 사명감으로 온갖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15년째 750만을 대상으로 해외동포문학상을 제정 운영해오고 있음은 나의 자랑이고 생존의 보람을 찾아왔다는 생각에서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있다.

 악전고투의 역경을 겪으면서도 알량한 생존의 보람을 찾으려 노력한 나의 의지는 일년 내내 저축했던 돼지저금통도 헐고 부족하면 카드도 끊고 또 부족하면 은행에 이잣돈을 쓰면서 4번의 바이킹 강 유람선을 타본 즐거움의 순간들을 기록해 본다.

 강 유람선을 즐기는 것은 우선 바다의 뱃멀미를 멀리할 수 있어서 좋고 망망대해만 보는 대양의 유람선은 3, 4천명의 사람들이 도박에 담배에 온갖 마음에 들지 않는 오락, 거기에 술과 각종 그룹들이 계모임으로 유람선을 타기에 어떤 그룹들은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이 들어 찾아낸 것, 긴 강물 따라 유람선을 타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음이 좋았다.

 강물 유람선은 우선 승선인원이 많아야 2백 명이며 밖의 경치를 즐길 수 있고 승객의 연령이 거의 60대 이상임과 동시에 승객들 모두가 살아온 삶의 뒤안길이 흥미롭다는 것이 내가 이 강 유람선을 타게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다뉴브강 유람선에서는 혼자 서서 사(死)의 찬미 노래를 흥얼흥얼했고, 러시아의 볼가강 열흘의 유람선에서 바이킹이 러시아를 점령한 생생한 역사를 보았고, 스칸디나비아 9개국의 강 유람선에서는 샛강을 드나들다가 바다로 나갔다 다시 강을 찾는 18일간의 즐거운 여행이었다.

 또한 중국의 장강 즉 양자강 유람선에서는 강가의 피폐한 중국 농촌과 산야를 보았다. 특히 양자강의 상류 산샤댐에서는 이 댐의 피눈물나는 중국인들의 피해와 노력의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 댐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무뢰한인 나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즉 강의 상류가 홍수로 인한 산사태는 해마다 증가됨과 동시에 토사가 갈 곳은 강물의 밑바닥을 자꾸 메워 가는데 강물이 토사로 메워진다면 이 댐이 지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본론으로 조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보좌역을 역임했다는 지머만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90세인 이 노교수는 필라델피아 주립대학의 음대학장으로 재직 중이며 그의 부인 캐서린은 그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스페인에서 공부를 할 때 안익태 선생을 모시며 조국의 애국가를 작곡함에 일조했다는 말에 감사의 인사말을 올렸다.

 노교수의 말은 현재 자기의 부인은 50대 중반으로 학부와 마스터 코스에서 자기의 애제자였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안익태 선생은 스페인에 정착하기 전 미국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에서 첼로 연주자였고, 그 후 헝가리에서도 활동을 했었다. 

 지머만 교수와의 만남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안익태 선생이 스페인교향악단에서 일할 때였다. 지머만 교수는 한국을 무척 동경한다 하였다. 내가 이 노교수를 초청해 조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가졌던 생각을 했음이 떠오른다.

 이 글은 지머만 교수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기억하여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글로 써본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위하여 일조했음에 감사를 드렸다.

 하지만 나의 궁금증은 애국가를 작사하신 분이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작사자 미상임에 안타까움이 있다. 일설에는 윤치호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정부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작사자를 선정하여 후세에 남김이 옳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강 유람선에서 지머만 교수 부부와 우리 부부가 18일간 같은 식탁에서 여담을 즐겼던 추억을 어이 잊으랴.

 결론으로 내가 여행한 나라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이태리와 터키, 모스크바였음을 밝히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특히 이태리 한 달간의 여행은 나의 세 자녀가 거금을 갹출, 우리 부부의 40주년 결혼을 기념하기 위함이었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금쪽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나날로 회상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