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lee

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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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 조병화 시인의 죽음과 사랑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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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 조병화 시인 근영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자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믿어야 했습니다. <2005.03.10> 

 

 상기 편운 선생의 시는 내가 중부전선 전방지역에서 근무할 때 잠이 없는 밤 혼자 즐겨 암송하던 작품이다. 읽고 암송을 하고나면 내 마음에 편안과 희망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아마 이 한 작품 때문에 내가 시라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 시절 나의 사랑과 꿈과 희망과 낭만을 안겨주었던 이 시를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마 이 시 한편이 오늘의 나에게 시라는 것을 쓰게 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나대로의 영감의 사랑과 생존의 철학을 음미하며 나대로의 즐거움을 찾은 시간들이 많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때로는 주어진 여건에 실망감을 느낄 때, 사회가 어이 이 모양으로 흘러가는가, 정의와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위선과 질시와 가변의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하나,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내 생존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좁은 땅덩이일까, 어이하여 이렇게 못 살아가는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아버지를 못 본 유복자로 태어났을까, 대농의 부유한 가정인데도 나는 어이하여 조상님들로부터 유산 한 푼 못 받고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갈까, 형님은 돈으로서 군대를 가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나는 왜 왜를 외치며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 속에 내 젊음을 불태웠다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조병화 시인의 시는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을 심도있게 독자에게 전파시켜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하여 꿈과 사랑의 생존을 형상화해 주고 있었다. 이에 나의 여린 마음에는 그의 시는 내 삶의 이정표 형성에 일조를 한 것 같다.


 소월의 시가 전원 서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데 비하여 조병화의 시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경쟁과 혼돈의 시간들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민초들의 애환을 그려주고 있다. 나아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존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주는 낭만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상기 시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는 것은 하기 이 시를 패러디한 나의 시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이유식)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당신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나그네의 서러움도 아니었고/배고픔의 절규도 아니었습니다.//망각된 세월 속에/당신의 검은 눈동자가 있어야 했고/버림받은 착각 속에/ 허무한 인생을 더듬던//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수정같은 눈물 속에 /무작정 당신의 환영을 되새겨야 했으며


얄팍한 지식과 기회에 얽매이면서도/ 당신의 하이얀 살결은 있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위선 증오 시비에 휩싸이지 않으려고/팔딱이는 심장을//당신의 가슴 속에 응고시켜야 했고/ 기약없는 방랑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1979년 10월 초창기 이민자의 고통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편운 문학관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편운 문학관을 찾아서 교류를 튼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생존시의 조병화 시인이 쓴 작품 <죽음과 사랑의 철학>이 나의 문학관에 들어 왔기에 그 전문을 발표를 하니 독자 제위님들이 한번쯤 음미하시기를 바라며 나의 30번째 잡설을 마친다. 

 

죽음과 사랑의 철학(조병화)


 점점 가을이 가을답게 깊어 가면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옵니다. 어제는 그러니까 10월 21일 금요일, 안성 내 고향 난실리 편운회관에서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 코스에 있는 학생 여섯 명을 데리고 그들의 원대로 강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고향에서 이렇게 강의를 하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나의 인생, 걸어온 이야기들을 나의 철학과 나의 문학으로 이야길 했습니다. 실로 나의 인생은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이었고, 그 죽음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은 오로지 시간과 꿈과 허무와의 투쟁이었습니다. 그 시간과 꿈과 허무와의 투쟁 속에서 그 많은 시들을 얻어낸 생애였습니다.


 죽음은 어머님이 ‘살은 죽으면 썩는다’하는 말씀에서 터득하였고, 사랑은 어머님이 내가 동경고사(東京高師)에 합격을 해서 일본 동경으로 떠날 때 서울역에서 하신 말씀, “나는 네가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으면 했다”하시며 눈물 글썽글썽 하시던 그 말씀 속에서 터득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나에게, 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철학, ‘죽음의 철학과 사랑의 철학’을 가르쳐 주셨던 겁니다.


 나는 이 죽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도 있을 죽음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긴장을 한번도 풀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어떻게 보람 있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하는 마음으로 줄곧 시간을 일분 일초 아끼면서 살아왔던 겁니다.


 일을 하면서 인생을 보다 인생답게,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풍부하게, 생명을 보다 생명답게 아름답게, 생애를 보다 생애답게 보다 후회 없이, 이러한 생각과 노력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철학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시 작품 등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고향에 젖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실로 가을비는 철학이옵니다. 몸 건강하시길, 그럼 또. (199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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