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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배경 영화(I)-‘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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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956년 7월 20일 11시20분. 한 아랍여인이 검문차 몸수색을 하는 프랑스 경찰에게 만지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자 혼겁한 경찰은 그냥 통과시키는데, 그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나 키스하는 척 하면서 숨겨온 권총을 전달하고 그 남자는 페티오에 앉아 있는 경찰을 등 뒤에서 사살한다.

 

 11시50분. 붐비는 시장통. 호객을 하던 과일노점상 남자가 상자 속에 숨겨둔 총으로 순찰중인 경찰을 등 뒤에서 사살한다. [註: 핸드헬드 카메라의 사용도 영화의 사실감을 더해주지만, 때로는 카메라의 초점을 일부러 흐릿하게 찍는다든지, 제멋대로 줌인, 줌아웃을 사용하는 장면들 역시 극 중 사실감을 더하는 요소들이다.]

 

 13시30분. 아랍인 젊은이가 프랑스 경찰을 자꾸만 뒤따르자 경찰이 몸수색을 하곤 '꺼지라'고 말하는데, 그 젊은이는 쓰레기통에 숨겨둔 권총을 끄집어내 그 경찰을 쏘아 죽이고 총을 다시 쓰레기통에 버리고 도망친다. 이와 같이 알제리남자들은 교묘하게 총을 숨겨놓고 절대로 몸에 지니지는 않는다. 총의 운반은 대신 부르카(burkas)를 입은 여자들이 담당했다.

 

 무장경찰이 동원된다. 이때 마침 프랑스인(피에느와르) 거주지역에 있던 한 늙은 알제리인 노동자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연행된다. 곧 밤이 되고 통행금지 시간인데 프랑스 경찰이 아랍인 구역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범인으로 잡은 늙은 노동자가 사는 집 앞에 네이팜 폭탄을 장치하여 쑥대밭으로 만드는 프랑스 경찰들….

 

 다음날 이 폭발로 카스바의 게딱지 집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많은 무고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죽어 구조대원들과 시민들은 울분을 삼키지 못한다.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알제리인들은 알리의 선동에 의해 항의행진을 하는데 자파르가 보낸 소년 '작은 오마르'가 알리에게 이러다간 군대에게 다 죽는다며 나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윽고 자파르가 직접 나서서 'FLN이 꼭 복수하겠다'고 설득해서 데모는 진정된다.

 

 장면은 바뀌어 세 명의 알제리인 여자가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다. 머리를 자르고 용모와 의상을 프랑스 여자처럼 꾸민다. 이윽고 자파르가 들어와서 시한폭탄 부품이 든 손가방 세 개를 나눠준다. 그들은 카스바 외곽 지역에 폭탄테러의 임무를 부여받고, 폭탄 조립을 위해 수산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탈렙을 접촉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프랑스 여자로 변장한 할리마(푸시아 엘 카데르)가 무난히 검문소를 통과한다. 아이를 데리고 간 다른 여인도 무사히 통과한 후 한 노인에게 애를 맡긴다. 한편 파티아(사미아 케르바쉬)도 경찰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여유만만하게 검문소를 통과한다.

 

 세 여자는 수산시장에 집결하여, 기다리고 있던 탈렙이 시한폭탄을 조립한 후 먼저 할리마가 출발하는데 모두 행운을 빈다. 그녀는 미셀레 가의 카페로 간다. 시계가 4시36분을 가리키고 있다. 붐비는 실내에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어린애도 있다. 들고 온 핸드백을 카운터 밑으로 밀어넣는 할리마. 다시 시계를 본다. 5시36분.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註: 미셀레(Michelet) 가에 폭탄을 설치한 할리마는 실제 조라 드리프 비타트(Zohra Drif Bitat·88)로 알제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당시 22세의 변호사였다. 1956년 9월30일 이 폭발로 젊은 프랑스 여성 3명이 죽고 수십 명의 성인과 어린이가 다쳤다. 조라는 1957년 9월24일에 사디 야세프와 함께 체포되어 다음해 8월 군사재판에서 테러리즘으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62년 해방과 함께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는 5년 동안 법률공부를 계속하여 형사담당 변호사가 되었고, 알제리 국민의회의 최초 여성위원으로 선출되어 부의장으로 15년간 봉사했다. 1962년 알제리 유명정치인 라바 비타트(Rabah Bitat, 1925~2000; 1978년 12월27일~1979년 2월9일간 알제리 대통령 역임)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1954년 11월1일부터 FLN의 일원으로 초지일관 "우리는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군대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주장했다.]

 

 한편 디슬리의 밀크 바 카페로 간 파티아도 한참 춤을 추고 있는 피에느와르 젊은이들 틈에 끼어있다가 슬며시 쥬크 박스 옆에 핸드백을 밀어넣고 밖으로 나간다. [註: 실제 밀크 바 카페(Milk Bar Cafe)에 폭탄을 설치한 이는 사미아 라크다리(Samia Lakhdari)로 3명이 죽고 50여 명이 다쳤다. 1956년 9월 이 임무를 위해 사디 야세프에 포섭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그녀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 다른 여인은 모리태니아 건물의 프랑스 항공사 카운터로 간다. 파리행 에어프랑스 432편이 20분 지연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시계가 5시41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녀도 대합실 의자 밑에 가방을 밀어놓고는 공항 밖으로 나온다. [註: 이 임무를 맡은 실제 인물은 쟈밀라 부히레드(Djamila Bouhired·87)이며 사디 야세프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에어 프랑스 카운터에 설치한 폭탄은 불발되었지만, 이보다 앞선 7월에 알제리 여성 자유투사인 당시 19살의 쟈밀라 부아자(Djamila Bouazza, 1938~2015)와 함께 카페에 폭탄을 설치하여 11명이 사망했다. 부히레드는 체포돼 재판에서 길로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때 '악마의 변호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랑스 변호사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es, 1925~2013)가 자원하여 국내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결국 모로코 왕자 라일라 아예샤가 당시 르네 코티 프랑스 대통령을 접촉함으로써 비로소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녀는 1962년까지 복역하다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1963년에 두 사람은 그 인연으로 결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두었으나 1970년에 이혼했다. 그녀는 알제리 독립투쟁뿐만 아니라 알제리 여성협회장을 지내면서 여성인권 투쟁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이윽고 세 군데에서 동시에 폭발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경찰은 혼비백산 경악한다. 온 거리가 아비규환이고, 양국 간에 벌어진 테러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탈리오의 법칙으로 대응하는 양국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여유가 없다.

 

 선동적이며 급진적이고 무자비하게 테러에는 테러로 맞서는 장면들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이 영화가 한국에는 40여 년이 넘은 2009년에서야 개봉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아랍인 젊은이가 프랑스 경찰을 자꾸만 뒤따르자 경찰이 몸수색을 하곤 '꺼지라'고 말하는데, 그 젊은이는 쓰레기통에 숨겨둔 권총을 끄집어내 그 경찰을 쏴죽이고 도망친다.

 

▲ 프랑스 경찰들이 범인으로 잡은 늙은 노동자가 사는 집 앞에 네이팜 폭탄을 장치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죽어 알제리 시민들은 울분을 삼키지 못한다.

 

▲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알제리인들은 알리의 선동에 의해 항의행진을 하지만 자파르가 보낸 꼬마 오마르가 알리에게 이러다간 다 죽는다며 그만 두라고 당부한다.

 

▲ 수산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탈렙이 시한폭탄 타임세팅을 해주고 있다. 할리마(푸시아 엘 카데르)가 가장 먼저 출발한다.

 

▲ 머리를 자르고 용모와 의상을 프랑스 여자처럼 꾸민 세 여자는 폭탄테러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좌로부터 파티아, 쟈밀라, 할리마. (오른쪽 사진) 파티아가 경찰과 농담도 주고받으며 바리케이드가 쳐진 검문소를 여유만만하게 통과한다.

 

▲ 세 군데에서 동시에 폭발이 일어나자 프랑스 경찰은 혼비백산 경악한다. 온 거리가 아비규환이고, 양국 간에 벌어진 테러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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