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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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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WWI 배경 영화 (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1)

 

 무려 3시간 20분의 대서사극인 '닥터 지바고(1965)'를 날 잡아 보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CG) 기술도 없던 반 세기 전의 아날로그 시대로 떠나는 긴 시간여행이었다.

 

 아마 네다섯 번째 보는 것 같은데도 눈덮인 대평원 속에 화려했던 제정(帝政) 러시아 말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귀족과 민중이 대립각을 세우던 혁명의 시기까지 거대한 역사의 시간 속에 내던져진 한 순수한 영혼의 행적을 그린 대서사극은 지금의 감성으로 봐도 감동의 울림이 있다. 이것이 아날로그 고전 영화의 진수가 아닌가 싶다. [註: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 같이 70mm 수퍼 파나비전이 아니라 실제는 스탠더드 35mm 파나비전으로 촬영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출신 거장 데이비드 린(David Lean, 1908~1991) 감독과 바늘에 실 가듯 호흡을 같이 한 프랑스 출신 작곡가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 1924~2009)가 작곡, 러시아 전통민속악기 발랄라이카로 연주한 '라라의 주제곡(Lara's Theme)'은 여전히 아름답고 달콤하다. 그래서 명작을 더욱 명작답게 만든 것이리라. 이 악기는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중요한 장면에 몇 번 등장한다. [註: '라라의 테마'는 영화 개봉 후, 'Somewhere My Love'라는 제목으로 레이 코니프 악단(Ray Coniff & The Singers)을 비롯하여 앤디 윌리암스 등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인기 팝송이 되기도 하였다.]

 

 1965년 MGM사 배급. 제작 카를로 폰티. 러닝타임 197분. 원작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1960)의 동명의 유일한 장편소설. 그러나 원작 소설은 정작 소련에서는 출판되지 못했으며, 1957년 이탈리아에서 발간 되자마자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듬해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으나 소련 당국의 거부로 인해 원작자인 파스테르나크는 수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닥터 지바고'는 소비에트 연방의 리더이자 소련 공산당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에 힘입어 1988년에서야 출판이 허용되었고, 다음해인 1989년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자 문학연구가인 예프게니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을 대리 수상했다. [註: 예프게니는 "아버지는 이 상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 때문에 괜한 고통만 안겨주었다."며 의미심장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러시아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94년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제작 후 13년이나 지난 1978년에 개봉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제정 러시아 말기인 1912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 혁명(Russian Revolution)과 오랜 내전을 거쳐 1925년에 이르는 10여 년의 격동의 시기이다.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며 일으킨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어 제정 러시아는 종지부를 찍는다.

 

 같은 해 10월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셰비키(다수파)에 의해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10월 혁명의 진정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이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즉 레닌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주도하던 혁명파 '적군(赤軍, 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반혁명파 '백군(白軍, 우파)'이 싸우던, 이른바 '적백내전(赤白內戰)'이 일어나, 결국 1922년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蘇聯)이 탄생한다. [註: 필자는 여기서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연거푸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조선무장독립군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전략상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 약 3,500명 규모의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그때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들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여 결국 적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군은 승리 후 1921년 6월27일 독립군을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하도록 한 후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되는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동토의 제국 러시아는 역사상 아무도 제압하지 못한 땅이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막강한 군대조차도 러시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러시아도 거대한 민중의 힘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권은 배요, 국민과 민심은 물이라고 한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에 과거의 유산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이 격동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개인의 존재와 삶과 사랑의 이야기가 영화 전편을 통해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는 약 4분 여의 서곡으로 시작한다. 차이콥스키의 '1812'의 소절과 러시아풍의 행진곡 및 라라의 주제곡 등이 절묘하게 변조돼 흐른다. [註: 1950~60년대에 서곡을 삽입하는 것은 하나의 정형처럼 유행했다. 이 영화와 '벤허(1959)', '스파르타쿠스(1960)',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등 대서사극에는 중간휴게시간도 있다.]

 

 얘기의 서사 구조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소련첩보수사기관(KGB) 중장 예프그라프 지바고(알렉 기네스)가 그의 이복 동생인 유리 지바고와 라리싸(라라) 안티포바 사이에서 난 딸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프그라프는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타냐 코마로바(리타 터싱햄)가 조카딸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그녀에게 유리의 시집(詩集)을 보여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과거회상 형식으로 들려준다. (다음 호에 계속)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1965)' 영화포스터

 


▲ 예프그라프 장군(알렉 기네스)이 타냐 코마로바(리타 터싱햄)가 조카딸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이복 동생 유리의 시집을 보여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면서 영화는 회상형식으로 전개된다.

 

▲ 유리 어머니 장례식 장면 - 가운데 왼편이 8살의 유리 지바고(타렉 샤리프), 바로 우측은 알렉산데르(랄프 리차드슨), 그 옆에 토냐가 어머니 안나(시옵한 멕켄나)의 손을 붙잡고 있다. 유리는 이 그로메코 가(家)에 입양된다. 

 

▲ 라라(줄리 크리스티, 왼쪽)는 어머니(오른쪽)가 독감에 걸려 빅토르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와 함께 사교계 연회장에 대신 참석한다. 

 

▲ 1912년 겨울밤, 크렘린궁 앞에서 혁명가 파샤 안티포프가 이끄는 시위대가 코사크 기병대에게 쫓기는 모습. 이 살육 현장을 지켜보던 유리 지바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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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WWI 배경 영화(VI)-'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하)

 

(지난 호에 이어)

 찰스는 중재 타결을 축하하는 노동자들의 열광 속에 멜브리지 시내에 이르는데, 뭔가 주변이 익숙하게 느껴지자 자기도 모르게 택시를 잡아 타고 옛날 수용소로 가는 게 아닌가. 거기서 내려 옛날처럼 시내를 향해 걷고 있는데 마침 담배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골목끝 모퉁이에 있는 담배가게로 곧장 가자 그의 수행 비서 해리슨(브램웰 플레처)이 놀란다. 왜냐하면 찰스는 멜브리지에 그 전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바로 그 가게를 찾아갔는지 영문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다음날 마거릿이 남미 여행을 떠나기 전 부탁해 둘 일이 있어 디본의 옛 여관에 들렀다가,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전 주인을 묻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작고 예쁜 집과 한 여자에 관해 물어보고 갔다는 얘기를 듣는다. 즉각 그가 찰스임을 직감하고 냅다 옛집으로 달려가는 마거릿!

 

 작은 냇물 위로 돌다리가 있는 아담한 그 집 앞에서 찰스가 사립문을 밀치자 '삐걱' 소리가 나면서 여닫히고, 현관에 이르는 사잇길을 몇걸음 걸어가니 복사꽃이 만개한 나뭇가지가 머리에 걸린다…. 모두가 옛날 그대로이다.

 

 드디어 현관문에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열쇠를 꽂으니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그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는 홍수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때 마거릿이 도착해 "스미디!"하고 부르자 뒤돌아서며 "폴라!"라고 부르는 '찰스 레이니어' 아니 '존 스미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것이다. 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키스와 포옹을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자신의 먼 과거를 다시 되찾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대가로 한 여인과 사랑했던 가까운 과거는 모두 망각하게 되는 찰스 레이니어의 운명은 폴라에겐 너무나도 불행한 사건이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스미디를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줄곧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온 마거릿의 지고지순한 순애보! 그녀에겐 찰스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거의 30년 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이 연출한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Sunflower·1970)'도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마음의 행로'가 우리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요인은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이미지와 모성애를 짙게 풍기는 고전적인 미모의 그리어 가슨의 열연 때문이었지 싶다.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은 원래 아일랜드 출신으로 런던 킹스대학교를 나온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에서 유학한 지성미를 갖춘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MGM사와 계약하여 활동하다가 1939년 샘 우드 감독의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 출연하여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랐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로버트 Z. 레너드 감독의 '오만과 편견', 1941년 '먼지 속에 핀 꽃(Blossoms in the Dust)'으로 매년 계속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다 1942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미니버 부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같은 해에 '마음의 행로'가 제작되어 한 해 두 번 수상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 때문에 아쉽지만 제외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머빈 르로이 감독의 '퀴리 부인'으로 또 후보에 올라 연속 다섯 번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1938~1942년 베티 데이비스가 세운 기록과 타이 기록이다.

 

 그런데 그리어 가슨이 '미니버 부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강인한 영국 아내 및 어머니 역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 소감을 장장 5분 30초 동안 장황하게 연설한 것은 기네스 북에 오를 만큼 유명한 일화다. 이 이후로 아카데미상 수상소감에 시간 제한을 두게 되었다.

 

 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클라크 게이블이 전쟁 복무를 마치고 스크린에 복귀하여 '모험(Adventure·1945)'이라는 영화에서 그리어 가슨과 공연하게 되었을 때다. 포스터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에 "게이블이 돌아오자 가슨이 그를 낚아챘다!"라고 냈다. 이에 대해 게이블이 "내가 가슨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He put the Arson in Garson!)"고 치고 나오자 가슨은 "내가 게이블을 숙련시켰다!(She put the Able in Gable!)"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가슨은 세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남편이 1949년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함께 한 텍사스 오일 백만장자 '버디' 포겔슨(1900~1987)이었다. 독실한 기독장로교 신자였던 그녀는 댈러스의 남부감리대학교에 '그리어 가슨 극장'을 지어 1991년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녀는 1996년 91세로 댈러스 장로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죽자 남편 버디 옆에 묻혔다.

 

 로널드 콜맨(Ronald Colman, 1891~1958)은 1947년 조지 쿠커 감독의 '이중 생활(A Double Life)'로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국 배우이다. 특히 그는 감미롭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로 유명했다.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마음의 행로'에서 그는 최우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찰스 레이니어 배역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늙어 보인다는 비평을 받았다.

 

 이 영화 출연 당시 그는 51세, 그리어 가슨은 38세였고, 15~18세 키티 역의 수전 피터스(Susan Peters, 1921~1952)는 21세였다. 수전 피터스도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혼에 의한 조울증과 만성신장염의 합병증으로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 머빈 르로이 감독과 허버트 스토다트 음악감독에 대하여는 2021년 1월15일자 '애수' 하편 참조. (끝)

 

▲ 드디어 작은 개울 위로 돌다리가 있는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옛 신혼집을 찾아온 '스미디'.

 

▲ 활짝 핀 복사꽃 가지가 머리에 걸려 이를 젖히는 찰스. 드디어 옛 기억이 걷잡을 수 없는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한다

 

▲ 옛집을 찾은 찰스를 보고 기뻐서 "스미디!" 하고 부르는 폴라 릿지웨이(마거릿 핸슨).

 

▲ 잃어버린 기억을 온전히 되찾은 찰스가 뒤돌아보며 "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장면.

 

▲ 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키스와 포옹을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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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WWI 배경 영화 (VI)-'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중)

 

(지난 호에 이어)

찰스가 개인 비서 마거릿 핸슨과 일한지도 2년이 지났지만 그녀가 폴라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어느 날 찰스가 키티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멜브리지 수용소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했던 조나단 베네트 박사(필립 돈)였다. 그러나 찰스는 잠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늘 그렇듯이 그 기억은 붙잡기 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사무실로 돌아온 찰스가 키티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마거릿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키티가 성년이 될 때까지 3년간 찰스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낸 것이 주효하여 둘은 약혼을 했던 것이다.

 

 마거릿은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날 밤, 좋은 친구로 지내던 베네트 박사에게 찰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네트 박사는 찰스는 그 스스로 '스미디'를 찾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기억이 되돌아오기는커녕 이제 키티와 결혼까지 한다니!…

 

 한편 마거릿은 남편 '스미디'가 떠난 후 7년이나 되었기에 법원에 법적인 사망신고를 하여 결혼을 무효화시킨다.

 

 키티와 찰스가 교회에서 그들의 결혼식 때 사용할 음악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한 음악의 멜로디가 찰스가 어디서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아 ― 사실은 폴라와의 결혼식 때 사용했던 "오 완전한 그 사랑"이라는 곡이었다 ―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키티를 쳐다보는 눈이 마치 낯선 사람 대하듯 싸늘하자 키티가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찰스는 또 현재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키티는 찰스가 과거에 사랑한 사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며 파혼을 선언한다.

 

 어느 날 찰스가 과거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말없이 리버풀로 떠난 후, 마거릿은 자유당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그가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리버풀로 찾아간다. 리버풀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실마리를 유도하기 위해 찰스가 묵었던 그레이트 노던 호텔로 함께 간다. 하지만 거기서 찾은 '존 스미디의 가방'을 보고도 그의 기억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찰스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선거캠페인에 헌신적으로 도와준 마거릿에게 감사하고, 또한 새로운 역할에 맞는 내조자가 필요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리고 마거릿에게 그가 종종 옛날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사업상의 '합병(merger)' 같은 것으로 단지 '성실한 우정'을 유지하기 위한 청혼에 불과했다.

 

 마거릿은 찰스의 청혼에 대해 베네트 박사와 상의한다. 베네트는 사실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는 만일 찰스와 결혼을 하면 그녀가 상처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찰스의 청혼을 수락하는 마거릿.

 

 찰스와 마거릿이 극장 공연을 보러 간다. 장면은 무대는 보여주지 않고 음악만 들려주는데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인 것 같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찰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상적인 커플로 소문났고 마거릿은 완벽한 사교계 호스티스로 군림했지만 기실 결혼생활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찰스는 둘 다 느끼는 허전함과 고독을 서로 달랠 수 있기만을 바라고, 마거릿은 그 뜻에 따라 찰스의 둘도 없는 자산이요 가장 경애하는 친구였을 뿐이었다.

 

 둘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가끔씩 상의한다. 어느 날 그녀는 찰스에게 그녀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얘기해 준다. 물론 그가 찰스였지만 그렇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얘기를 듣고 있던 찰스가 말한다. "죽은 자에게 마음을 묻어버린다는 것은 좀 병적이지 않을까?" 마거릿이 말한다.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니 이상하네요. 당신이야말로 사랑의 오묘한 능력, 인생의 기쁨을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의 공간 속에 묻어두고 있으니까요." 찰스가 "뭔가 희미하지만 난 아직도…" 마거릿이 "희망을 갖고 있다는 말씀이죠?"하고 그의 뒷말을 거든다.

 

 "그래요 그거라고 생각해요." "진짜 그래요, 찰스? 정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이 드세요? 그리고 언젠가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느끼고 있어요? 아마도 당신은 그 여자와 가까이 하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거리에서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이미 만났을지도 몰라요. 그 여자를 만났지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일 거예요. 당신이 찾는 그 누군가가 찰스… 혹시 저인지도 모르고요!"

 

 얼마 후 찰스가 기사 작위를 받고 결혼한지 3년이 되는 1935년 5월24일, 그는 그녀에게 값비싼 에머럴드 목걸이를 선물한다.

 

 그러나 찰스의 호의와 우정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은 15년 전 '스미디'가 선물했던 구슬목걸이를 꺼내보며 그와의 옛사랑을 그리워하다가, 그의 돌아오지 않는 기억을 되살리러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했건만 다 허사로 돌아가자 회한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다. 소리 내어 엉엉 운 다음 결심한다. 그를 떠나 혼자 몇 주간 디본을 들렀다가 남미 여행이나 다녀오겠다고….

 

 찰스가 그녀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차역에 배웅해주고 돌아오니 자회사인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중재 목적으로 멜브리지로 출장 가서 노사분규를 원만히 해결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법원에 스미디의 법적 사망신고를 하여 사실혼을 무효화시키는 마거릿 핸슨(그리어 가슨).

 

▲ 키티(수전 피터스)는 찰스가 과거에 사랑한 사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있음을 알고 파혼을 선언한다.

 

▲ (왼쪽) 찰스가 묵었던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서 찾은 '존 스미디의 가방'을 보고도 그의 기억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오른쪽) 마거릿이 찰스에게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 대해 사진을 보여주며 브리핑하지만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 국회의원에 당선된 찰스는 마거릿에게 청혼을 하며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업상 '합병' 같은 것이었다.

 

▲ 결혼한지 3년째 날, 찰스는 부인 마거릿 핸슨에게 값비싼 에머럴드 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그녀는 15년 전 '스미디'가 선물했던 싸구려 구슬목걸이를 꺼내보며 오열한다.

 

▲ "당신이 찾는 그 누군가가 찰스…혹시 저인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더 이상 기억을 더듬지 못하는 찰스! 답답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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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WWI 배경 영화 (VI)-'마음의 행로(行路)'(Random Harvest)(상)

 

 머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哀愁·Waterloo Bridge·1940)'에 이어 그의 또 다른 멜로드라마의 걸작을 꼽으라면 단연 '마음의 행로'이다. 두 작품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남자주인공은 군인, 여자주인공은 무용수로 등장시켜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어나는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소재로, 제작 당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고, 마스코트와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애수'는 비극적 결말이지만 '마음의 행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점이 다르다.

 1942년 MGM사 배급 흑백 영화. 출연 로널드 콜맨, 그리어 가슨, 필립 돈, 수전 피터스. 음악감독은 '애수'의 허버트 스토다트. 러닝타임 125분.

 원작은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1933)' '굿바이 미스터 칩스(Goodbye, Mr. Chips·1934)' 등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1900~1954)의 동명소설 'Random Harvest'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뜻밖의 수확" 쯤 되겠지만 우리말 타이틀을 '마음의 행로(行路)'로 붙인 것은 칭찬할 만하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군 장교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는 참호 속에서 포격쇼크를 받아 기억상실증과 언어장애까지 겪게 되어 멜브리지 수용소에 몇 달째 수감되어 있다.

 1918년 11월11일, 1차 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파티가 가까운 멜브리지에서 열려 정문보초마저 축하연에 참석하고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자, 스미스는 발 닿는대로 수용소를 빠져 나와 시끌벅쩍한 안개 낀 멜브리지 시내를 걷는다.

 그는 골목 끝 모퉁이에 있는 담배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라는 아름답고 친절한 아가씨를 만난다. 그의 어눌한 말씨와 이상한 행동에 처음에는 의아해 하지만 바로 그에게 묘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수용소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그녀는 그녀의 친구 비퍼(레지널드 오웬)가 운영하는 조그만 바로 데려간다.

 폴라는 가수 겸 무용수였는데 그녀의 공연에 그를 초청하고 조심스럽게 위층에 데리고 가 혼자 관람토록 주선한다. 폴라가 그를 애칭으로 '스미디(Smithy)'라고 부르는데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니 독감에 걸린 스미디가 쓰러져 있다. 폴라는 비퍼와 함께 극진하게 간호하여 그가 회복되자 그녀가 소속돼 있는 유랑극단에 일자리를 알선하려 한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스미디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폴라는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스미디와 함께 도망치러 짐을 꾸린다. 한데 집을 나서다가 스미디가 그를 제지하는 쇼단장 샘을 밀쳐 기절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시간이 촉박해 쓰러진 샘을 그대로 두고 둘은 디본에 있는 작은 마을로 도피한다.

 그들이 작은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폴라는 비퍼에게 전화를 하여 샘의 안전 여부를 묻는다. 다행히 경미한 사고여서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한다.

 둘은 여관에 머물면서 폴라는 타이피스트 일을 구하고 스미디는 문학적 재능이 있어 생계유지를 위해 글을 쓴다. 드디어 스미디의 첫 작품이 리버풀의 머큐리 신문사에 팔리게 되자 그는 폴라에게 청혼한다.

 둘은 결혼하여 작지만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1920년 11월6일 폴라가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자 스미디는 싸구려 구슬목걸이를 선물한다. 하지만 둘은 더 바랄 것 없이 마냥 행복해 보이기만 한다.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미디에게 그녀는 유일한 행복의 원천이자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표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가져다 준다. 일주일 후인 11월13일 스미디는 머큐리 신문사로부터 내일 오전 10시에 정규직 채용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폴라가 난산 후 몸조리 때문에 그는 처음으로 폴라와 떨어져 혼자서 리버풀로 1박2일 출장을 간다.

 그런데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 투숙한 후 스미디가 신문사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들이받쳐 의식을 잃고 만다. 근처 약국에서 그가 깨어났을 때 다행히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그만 폴라와 함께 한 지난 3년의 기억은 사라지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스미디의 본명은 '찰스 레이니어'로 서레이 카운티의 랜덤홀 시에 있는 부유한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혼란스럽지만 찰스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 그 날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전사했다고 포기한지 오래된 가족·친척들의 놀라움은 컸다. 거기서 누이동생의 새 남편의 의붓딸인 15살 된 키티(수전 피터스)가 외삼촌뻘인 찰스에 반하는데….

 찰스는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하지만 기울어져 가는 가족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생각을 바꿔, 해고 대신 고용보장을 통해 많은 고용자들을 끌어안고 사업을 회생시킨다.

 그러나 찰스는 교통사고 후, 왜 리버풀에 갔는지 그리고 그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열쇠가 어떻게 1917년 프랑스 전선에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고 늘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고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 한구석은 항상 허전하기만 하다.

 몇 년이 지나자 신문들은 그를 "영국 산업의 왕자"로 대서특필한다. 한편 폴라는 어린 아들이 죽은 후 어느 직장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가 신문에 난 찰스의 사진을 보고 그의 회사에 마거릿 핸슨(폴라 릿지웨이는 무대 예명이었다)이라는 본명으로 찰스의 개인비서직으로 채용돼 일하면서 혹시나 그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기대를 걸고 있다.

 어느 날 마거릿이 찰스에게 새로 합병·인수 하는 '멜브리지 케이블 회사'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에게는 그냥 사진일 뿐 그의 기억을 되돌릴 아무런 단서가 되지 못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 한국 포스터

 

▲ 안개 낀 수용소를 빠져 나와 시끌벅적한 멜브리지 시내로 걸어가는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

 

▲ 가수 겸 무용수인 아름답고 친절한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는 쫓기는 '스미디'를 도와 함께 도피한다.

 

▲ 스미디의 첫 작품이 리버풀의 '머큐리' 신문사에 팔리게 되자 그는 폴라에게 청혼한다.

 

▲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와 폴라 릿지웨이(그리어 가슨)의 결혼식. 이 때 "오 완전한 그 사랑"이라는 곡이 연주된다.

 

▲ 스미디와 폴라가 이사한 그림 같이 아담하고 예쁜 신혼집. 활짝 핀 복사꽃 가지가 머리에 걸려 이를 젖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기억력 회복에 큰 몫을 한다.

 

▲ 폴라가 사내아이를 낳자 스미디는 구슬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곧 예기치 못한 비극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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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I 배경 영화(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5·끝)

 

(지난 호에 이어)

 이튿날 아침, 어린 딸 롯테가 큰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두 개의 의자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다. 엘자가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그녀의 남편은 베르됭 전투에서, 세 형제들은 각각 리에쥬 전투(Battle of Liege), 샤를루아 전투(Bataille de Charleroi) 및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에서 전사했다며 조용히 '우리의 위대한 승리'라고 되뇌는 엘자. [註: 마지막 세 전투는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8월5일에서 8월30일까지 치른 일련의 전쟁으로 독일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쓸모없는 연습(futile exercise)'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르누아르 감독은 이를 통해, 한 개인의 용감성과 명예, 의무 등이 큰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낭만적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마레샬과 로젠탈이 전선으로 되돌아가 싸움으로써 이 전쟁을 끝내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사고(思考)를 깔아 뭉개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전쟁 속, 일 개인은 장기판의 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같은 맥락이다. 참고로 르누아르 감독은 1차 대전 때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다. 이 장면에서 장 가뱅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르누아르 감독이 그때 실제 입었던 군복이다.]

 그러나 그녀는 둘을 독일군에게 넘기지 않고 오히려 관대하게 도와준다. 마레샬은 비록 독일어를 못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롯테를 위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선물하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로젠탈이 엘자의 보살핌으로 부상에서 회복되자 둘은 다시 떠나야 한다. 마레샬이 차마 자기 입으로 그 얘기를 못하는데 로젠탈이 대신 말하자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며 짧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엘자에게 "전쟁이 끝나면 내가 죽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롯테와 함께 프랑스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마레샬!

 사실 철석같은 약속을 하기엔 오히려 그녀에게 또다른 마음의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전쟁 상황이다. 롯테에게 키스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마레샬. 그는 로젠탈에게 "그러면 못 떠날 것 같아서…"라고 실토한다.

 지도와 계곡을 번갈아 보며 "분명히 만들었을 텐데 국경이 보이지 않아. 그래서 기준으로 삼을 게 없어"라고 투덜거리는 로젠탈. "어딘가에 표시가 있으면 좋은데. 그래야 엘자한테 돌아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마레샬.

 드디어 수색하던 독일군이 눈 덮인 계곡을 지나가는 두 탈영병을 발견하고 몇 발의 총을 쏜다. 그러나 곧 지휘관이 사격을 중지시킨다. 왜냐하면 둘은 이미 스위스 국경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크레인샷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디에도 국경의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국경은 인간이 만든 보이지 않는 개념일 뿐일진대 땅따먹기처럼 전쟁을 일삼는 인간들! 영화는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한 채 끝을 맺는다.

 장 르누아르 감독은, 전쟁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며,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환상(That's all an illusion)"이라고 역설한다.

 '거대한 환상'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는 달리 전투장면이 없다. 아예 전쟁 자체를 '무용지물의 연습'이라고 생각한 르누아르 감독은 많은 국적의 군인들이 공통의 경험을 하는 '포로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정치적, 역사적 주제, 사회 계급과 지위, 인종 차별 등의 세계를 갈라놓는 여러 경계선(편견) 그리고 전쟁에 대한 반전 메시지 등을 부정(否定)의 부정이라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마지막에 나오는 독일 여성 엘자의 집이 그 해답이 아닐까 싶다. 국적도 신분도 계급, 지위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꿈의 공간인 아이와 엄마, 그리고 아빠라는 가족! 전쟁이라는 거대한 환상은 끝이 났고 이젠 가족이라는 환상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일만 남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래도 전쟁은 돌고 도는 '거대한 환상'인가?

 장 가뱅(Jean Gabin, 1904~1976)은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망향(Pepe le Moko·1937)', 에밀 졸라 원작의 비극인 '인간 야수(The Human Beast·1938)'에서 그 진가를 인정 받아, 마침내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시적인 사실주의 영화 '안개낀 부두(The Port of Shadows)'를 통해 명배우로 발돋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체기를 맞이했으나 1954년 자크 베케르 감독의 '현금에 손대지 마라'로 재기에 성공하여 알랭 들롱과 공연한 '지하실의 멜로디(1962)' '시실리안(1969)' 그리고 '암흑가의 두 사람(1973)'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전설적인 프랑스 배우.

 로젠탈 중위 역의 마르셀 달리오(Marcel Dalio, 1899~1983)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또 다른 작품 '게임의 규칙(1939)'에 출연하였으며, '카사블랑카(1942)'에서 카지노 딜러 에밀 역 및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 1944)'에서 레지스탕스를 돕는 호텔소유자 제라르 역으로 험프리 보가트와 공연한 프랑스 배우.

 라우펜슈타인 역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1885~1957)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1909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영화감독, 배우 및 제작자. 그가 감독한 영화 중 세 편, 즉 '어리석은 아낙네들(1922)' '탐욕(1924)' '웨딩 마치(1928)'를 비롯하여 배우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선셋 블러버드(1950)' 등 5편이 미국의회도서관 소속 국립영화등기소에 등록되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완벽주의자였던 슈트로하임이 무성영화 '탐욕(Greed)'을 만들었을 때 원래 무려 8시간짜리 대서사시적 걸작이었는데 MGM에서 흥행실패를 우려해 140분으로 가위질 당하는 비운의 수모를 겪었다. 현재 249분짜리 복원판이 출시되었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작곡가 조셉 코스마(Joseph Kosma, 1905~1969). 그의 이름은 몰라도 '고엽(枯葉·Autumn Leaves)'은 기억하실 것이다.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1946)'에서 이브 몽탕이 불러 일약 유명해진 이 곡의 작곡가다. (끝)

 

▲ 두 사람은 엘자(디타 파를로)의 딸 롯테(리틀 피터스)를 위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선물하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 이별을 아쉬워하는 엘자에게 "전쟁이 끝나면 내가 죽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롯테와 함께 프랑스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마레샬(장 가뱅).

 

▲ 지도와 계곡을 번갈아 보며 "국경이 보이지 않아 기준으로 삼을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로젠탈. 국경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개념에 불과하다.

 

▲ (왼쪽 사진) 눈 덮힌 계곡을 지나가는 두 탈영병을 발견하고 총을 쏘는 독일군. 그러나 곧 지휘관이 사격을 중지시킨다. 둘은 이미 스위스 국경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카메라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크레인샷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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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WWI 배경 영화 (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4)

 

(지난 호에 이어)

마레샬은 화제를 바꿔 "어쨌든 자네도 대단해. 소포로 우리를 먹여 살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넌 진정한 친구라는 거야!"라고 말한다. [註: 여기서 르누아르 감독은 파리에서 온 열관리 정비공인 하층계급 마레샬과 귀족계급을 대비하고 있다. 하층계급의 캐릭터는 서로 공통점이 없고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으며 견해 및 교육도 귀족계급보다 제한적이지만, 그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과 실제의 경험을 통해 끈끈한 정(情)의 관계를 맺는다고 보았다.]

 

 러시아 장교가 자기들은 황후로부터 큰선물을 받았다며 나눠줄 테니 따라오라고 말한다. 캐비어, 보드카 등 당신들의 친절에 이제야 보답할 수 있게 됐다며. 황후는 언제나 자상하시다며 함성을 지르면서 큰 상자의 못을 빼내는데… 막상 속을 보니 낡아빠진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게 아닌가. 대수학의 원리, 기초 윤리학, 요리책, 문법책 등등. 보드카를 기대했던 러시아 병사들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불을 질러 몽땅 태워버린다. [註: 애국심에서 전쟁터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정작 국가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책'이라는 사회화의 도구를 위로품으로 보내온다. 국가 권력에 대한 르누아르 감독의 회의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때 보엘디외는 독일 병사들이 화재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을 관찰한 뒤 마레샬과 로젠탈이 담을 넘어 숲에 이르게 되는 5분의 탈출 시간을 벌기 위해 독일군을 따돌릴 수 있는 묘안을 궁리하는데….

 벽시계가 15분 전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다. 18개월 동안 같이 지냈던 보엘디외 대위와 마지막 악수를 하는 마레샬! 이때 포로들이 일제히 피리를 불거나 취사도구 등을 두들기며 소란을 피우자 독일 간수들이 모두 연병장에 집결시켜 점호를 취한다.

 그러나 보엘디외 대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요새의 높은 곳에 올라가 흰장갑을 끼고 피리를 불고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독일병들이 둘의 탈출을 눈치 채지 못하게 관심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라우펜슈타인은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늘 흰 장갑을 끼는 반면, 보엘디외는 최후의 순간에 흰 장갑을 낀다.

 한편 마레샬과 로젠탈은 그 사이에 창문을 통해 그동안 짬짬이 만들어 둔 긴 밧줄을 타고 절벽 밑으로 내려가 숲으로 탈출한다.

 저녁이라 서치라이트가 보엘디외를 따라가며 비춘다. 이윽고 그를 뒤쫓던 독일병들이 총을 쏘자 라우펜슈타인이 중지시키고는 그의 귀족 동료인 보엘디외에게 내려오라고 종용한다. 이 때는 둘 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지금 제 정신이오? 이해 못하겠소? 난 당신을 쏴야 한단 말이오. 정말 그렇게 할 거요.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부탁하오. 내려와 주시오!"라고 애걸하다시피 말하는 라우펜슈타인.

 그러나 "난 아주 멀쩡하오. 당신의 호의는 정말 고맙소. 하지만 어쩔 수 없소."하고 그가 거절하자 망설이던 라우펜슈타인이 권총으로 그를 저격한다. 먼저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쓰러지는 보엘디외. 그때 독일병들이 사령관에게 마레샬과 로젠탈의 탈출 사실을 보고하는데….

 군목 신부가 다녀간 후 간호원이 돌보는 보엘디외의 임종을 비탄에 젖어 지켜보는 라우펜슈타인은 "용서를 바라오."하고 말하자 "나라도 그랬을 거요. 프랑스든 독일이든 임무는 임무요."라고 말하는 보엘디외. "사실 다리를 쏘려고 했으나 그만 복부를 맞혔다"며 "내 사격이 서툴렀다"고 말하는 라우펜슈타인.

 "위로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오. 난 이제 끝났어요. 일반인들이 전쟁에서 죽는 것은 비극이지만 당신과 나에게는 명예로운 길이지요." 그러나 "난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는 라우펜슈타인. 드디어 보엘디외는 숨을 거둔다. 라우펜슈타인이 그의 두 눈을 감긴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 내리는 창가에 놓여있는 제라늄 꽃을 꺾어버린다….

 한편 탈출에 성공한 마레샬과 로젠탈은 독일 시골마을을 지날 무렵 로젠탈이 미끄러져 발목이 삐어 진행이 더뎌지자 둘은 격렬한 말싸움을 하고 헤어진다.

 홀로 남은 로젠탈이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크게 노래를 부른다. [註: 이 노래는 난파선의 선원이 살기 위해 다른 선원의 인육(人肉)을 먹고 살아남는다는 프랑스 전통민요인 "Il etait un petit navire (There Once was a Little Ship)"이다. 앞에서 드 보엘디외 대위가 로젠탈과 마레샬의 탈출을 돕기 위해 독일병사들을 따돌릴 때 페니 휘슬(penny whistle)이라는 피리로 불었던 곡이다. 여기서 둘이 부르는 노래는 식량이 떨어져 거의 죽게 된 처지를 묘사하고 있다.]

 혼자 떠나던 마레샬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이어받아 흥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그의 동료 로젠탈을 돕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상류계급과의 상충(相衝) 속에서 하층계급 간의 끈끈한 인간애,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둘은 헛간을 발견하고 위험하지만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피로감에 깜빡 졸다가 밤중에 인기척을 듣고 몽둥이를 들고 방어자세를 취하는 마레샬. 그런데 뜻밖에 독일 여인이 소를 몰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마레샬이 독일어를 못하기 때문에 로젠탈이 소통하여 둘은 어린 딸 롯테와 함께 사는 과부 엘자(디타 파를로)의 농가에 며칠을 머물게 된다. [註: 영화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등장한다. 그 전에는 포로수용소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여자 그림과 사진뿐이었다. 그런데 롯테 역으로 나온 리틀 피터스(Little Peters)는 1930년 1월1일 생으로 출연 당시 7살이었으나 5월15일 독감으로 이 영화를 못 보고 사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드 보엘디외(피에르 프레네이·왼쪽)는 귀족 정치의 몰락을 새로운 사회 질서 형성이라는 적극적인 발전으로 수용하는 반면 폰 라우펜슈타인(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은 아직도 귀족정치에 미련을 갖고 있다.

 

▲ (왼쪽 사진) 탈출 전 드 보엘디외 대위와 악수하는 마레샬. (오른쪽) 탈출을 돕기 위해 요새의 높은 곳에 올라가 흰장갑을 끼고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보엘디외.

 

▲ (왼쪽 사진) 라우펜슈타인이 권총으로 보엘디외를 저격한다. (오른쪽) 보엘디외가 죽자 눈 내리는 창가에 놓여있는 제라늄 꽃을 꺾는 라우펜슈타인.

 

▲ "…일반인들이 전쟁에서 죽는 것은 비극이지만 당신과 나에게는 명예로운 길이지요."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는 드 보엘디외.

 

▲ (왼쪽 사진) 로젠탈이 발목이 삐어 진행이 더뎌지자 둘은 격렬한 말싸움을 하고 헤어지는데… (오른쪽) 마레샬이 다시 돌아와 하층계급의 끈끈한 인간애,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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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WWI 배경 영화(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3)

 

(지난 호에 이어)

이 때문에 마레샬이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감금되어 인간적 접촉은커녕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통을 받다가 겨우 풀려 나온다. 그는 보엘디외 및 동료 포로들과 함께 탈출 터널 파는 일을 돕는다.

 그러나 완성되기 직전에 프랑스 장교들 캠프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명령이 내린다. 대신에 영국 장교들이 그 캠프에 들어간다. 마레샬은 영국 포로들에게 땅굴에 관한 얘기를 전해 주려고 하나 언어 장벽 때문에 헛수고다.

 프랑스 포로들은 여러 캠프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으로 제14포로수용소인 빈테르스보른(Wintersborn)에 수감된다. 그 포로수용소장이 라우펜슈타인이었다. [註: 이 산악요새 감옥소는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에 있는 중세기 때 세워진 호쾨니크스부르크 성(Chateau du Haut-Konigsbourg)에서 촬영되었다. 낭떠러지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성은 17세기 중반까지 존속하다가 폐허가 된 것을 1900~1908년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재건함으로써 오늘날 연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새로 온 포로 명단을 본 라우펜슈타인은 보엘디외, 마레샬 및 데몰데르 중위(실뱅 이트킨)를 그의 집무실로 초청(?)한다. 깎듯이 인사하고 보엘디외 대위에게 악수를 청하는 라우펜슈타인. 여러 번의 탈출 시도가 있었던 그들의 신상기록을 살펴본 라우펜슈타인은 '그러나 여기서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그들을 직접 산악요새 투어를 시켜주고 독일 규율 대신 프랑스 규율을 적용하는 호의를 베푸는 라우펜슈타인.

 한담(閑談)을 나누던 중 로젠탈이 불쑥 "엄마의 친구인 브루넷 여자가 존경스럽게도 자선(?)을 베풀어 매독에 걸린 적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이젠 다 지난 얘기지만 매독은 상류계급의 특권이었다"며 "암과 풍은 노동자 계급의 질병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보엘디외. 로젠탈이 "전쟁으로 모두 똑같이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 '계급 질병'으로 죽게 되겠다"고 말해 폭소가 터진다.

 드디어 탈출 지도를 완성한 로젠탈이 마레샬에게 콘스탄스 호수를 지나 300km를 가면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루에 설탕 여섯 조각과 비스켓 두 쪽으로 15일을 가야한다고…. [註: 길이 64km, 최대폭 12km, 최대수심 250m에 달하는 콘스탄스 호수(Lake Constance, 독일에서는 보덴 호 Bodensee로 부른다)는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3개국의 국경이 맞닿은 부분에 위치하며, 중부 유럽 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옆에 흑인 장교 한 명이 그림을 다 그렸다며 제목은 '정의가 범죄를 추방한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둘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탈출 계획 얘기만 계속한다. [註: 여기서 흑인 병사는 같은 프랑스 장교이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다른 포로들로부터 무시 당할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대우 받지 못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장면은 라우펜슈타인의 집무실. 아치형 창문에는 커다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조각상이 걸려있고 많은 예술품들이 진열돼 있다. 그의 귀족적 취향을 은연 중에 보여주는 장식들이다.

 보엘디외에게 사촌 에드몽의 안부를 묻고는 한때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이제 군인이 아니라 경찰 노릇을 하고, 이 요새에서 유일한 꽃인 제라늄을 키우는 신세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라우펜슈타인. 하지만 체념한 듯 이것이 자기 조국에 봉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단다.

 사실 라우펜슈타인은 전투 중 온 몸이 불에 타고 척추가 두 군데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결국 승진은 했지만 아쉽게도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좌천되어 전쟁 덕분에 이런 사치와 호강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대뜸 보엘디외가 라우펜슈타인에게 "아까 왜 다른 장교와는 악수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는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보엘디외는 "나는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길 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라우펜슈타인과 보엘디외의 시대는 끝날 겁니다. 당신이나 내가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소. 전쟁이 끝나면 우리들은 이 새로운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을 거요."라고 지적한다. [註: 르누아르 감독은 보엘디외를 통해 전쟁이 끝나면 귀족정치의 규범(rule of the aristocracy)이 쇠퇴하고 중하층계급에 의한 새로운 사회 질서가 대체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상류계급이 군사적 봉사를 의무로, 전쟁을 목적으로 보아 그것을 명예로 여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측면이 있지만, 이제 국가 정치에 더 이상 주요한 요소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계가 사라지는 비극적 모습과 그들의 전통, 경험, 출신배경 등 삶의 코드가 급속히 의미없는 함정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았다. 폰 라우펜슈타인과 드 보엘디외 둘다 그들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지만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 및 반응은 다르다. 드 보엘디외는 귀족 정치의 몰락을 새로운 사회 질서 형성이라는 적극적인 발전으로 수용하는 반면 폰 라우펜슈타인은 아직도 귀족정치에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없었더라면 감히 귀족과 상종(相從)할 수 없는 하층계급인 장교들과 악수를 하지 않고 자유·평등·박애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빈정댄 것이다.]

 한편 마레샬이 로젠탈에게 자기는 보엘디외를 좋아하지만 그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며 배경이 다르고 우리와는 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로젠탈이 대꾸한다. "대단한 사람이야. 뛰어난 사람이지. 만일 너와 내가 사회에서 실패했다면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는 다르지. 언제나 '신사 보엘디외'로 남을 거야." (다음 호에 계속)

 

▲ 여자로 분장한 프랑스군의 공연이 진행되는데 마레샬이 프랑스군이 두오몽 요새를 재탈환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 왼쪽부터 드 보엘디외 대위(피에르 프레네이), 마레샬 중위(장 가뱅), 데몰데르 중위(실뱅 이트킨). 포로수용소장 라우펜슈타인(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은 이들의 신상기록을 살펴본 후 여기서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못 박는데….

 

▲ 드 보엘디외를 비롯한 3명의 프랑스 포로들을 직접 산악요새 투어를 시켜주고 프랑스 규율을 적용하는 호의를 베푸는 라우펜슈타인(가운데).

 

▲ 지도를 완성한 로젠탈이 마레샬에게 탈출계획을 얘기하는데 그 옆에 흑인 장교 한 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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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WWI 배경 영화(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2)

 

(지난 호에 이어)

측량기술자 장교(가스통 모도)가 팔부상 중인 마레샬의 발을 씻겨준다. 사실 '측량 엔지니어'가 뭔지를 모르는 마레샬이 대뜸 그에게 로젠탈에 대해 묻는다. 그의 부모님은 로젠탈 은행을 소유하고 있으며 로젠탈은 큰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부유한 유대계 프랑스인이라고 대답하며 한 가지 비밀을 말해주는 장교. 두 달 걸려 밤에 땅굴을 파고 있는데 이제 몇 주만 지나면 자유세계로 갈 수 있다고….

 저녁에 독일군 간수장 아더 상사(베르너 플로리앙)의 점호가 끝나자 의자로 문을 봉쇄하고 창문에 담요를 씌운 후 마루바닥 밑의 땅굴 작업을 시작하는 프랑스군 장교들. 숨을 쉴 수 있는 공기통과 깡통으로 만든 경고장치까지 구비했다. 흙은 바닥에 버렸지만 이제 남은 공간이 없어 보자기에 담아서 바깥에서 작업할 때 슬쩍 비운다.

 보엘디외와 마레샬 등은 포로수용소에서 프랑스 포로들이 공연할 보드빌을 준비한다. 로젠탈이 주문한 여자의상과 소품들이 도착한다. [註: 보드빌(vaudeville)은 17세기 말엽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된 버라이어티 쇼 형태의 연극 장르로, 보통 정신적·심리적 목적을 배제한 코믹한 상황에 바탕을 둔 희극을 의미한다]

 한편 포로수용소 담장 바깥에 있던 늙은 여자들이 "불쌍한 애들"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장면이 나오면서 곧 앳된 소년병의 얼굴이 클로스업 된다. 창문으로 연병장을 내다보던 보엘디외가 "저기 소년들은 군인처럼 행동하고 여기 군인들은 애들처럼 지낸다"고 비꼰다.

 공연 의상 준비를 하고 있던 프랑스군들이 싸우지도 못하고, 집에 갈 날도 모르고 있으니 이곳이 지겨워 미칠 것만 같다고 투덜거린다. 마레샬이 "남들이 힘들어 할 때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싫다"고 말하자 보엘디외는 의외로 간단히 말한다. "골프장에서는 골프를, 테니스장에서는 테니스를, 포로수용소에서는 탈출을!"

 그리고 "자네, 로젠탈 스포츠맨?"하고 이름을 부르자, 로젠탈이 말한다. 그는 프랑스로 귀화한 덴마크 어머니와 폴란드 아버지 사이에서 비엔나에서 태어났다며 "프랑스 혈통 중에는 본국에 영토를 가진 사람이 없어. 35년간 로젠탈 집안은 마음씨 좋은 조상이 남긴 사냥터가 딸린 저택 세 채, 농장, 과수원, 토끼 서식지, 종마 사육장 그리고 화랑 세 곳을 갖고 있지. 그러니 탈출할 가치가 없겠어?"라고 되묻는 로젠탈. [註: 요컨대 로젠탈은 부유한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새로운 중산계급층이다. 르누아르 감독은, 그의 부모가 운영하는 로젠탈 은행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Rothschild) 은행 가문에 빗댄 것이며 당시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의 반유대인 캠페인의 부상에 대항하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나아가 부유한 로젠탈이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음식물 소포를 모든 동료들과 나눠 먹는 등 사회계급을 초월하여 발휘하는 인간애의 표상으로 등장시켜 유대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반대하고 있다.]

 바깥 연병장에서는 행진곡을 부르며 행군하는 군화발 소리가 요란하다. 창을 통해 프랑스 포로들이 이를 구경한다.

 장면은 바뀌어 벽보를 보여준다. '1916년 2월26일 기사 ― 독일군 두오몽 요새 탈환'. [註: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동북부 지역, 독일에서 보면 서부전선인 베르됭에서 1916년 2월21일부터 12월20일까지 9개월 3주 6일 동안 벌어진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를 말한다. 2월25일에 프랑스 최후의 전방 보루인 두오몽 요새(Fort Douaumont)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이 때 전술이 1,500여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 붓는 압도적인 포격으로 요새를 마비시키고, 대략 1km 단위로 포격과 진격을 반복한 결과 프랑스 육군 사상자가 10만 명 가까이 나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고 한다. 이후 두오몽 요새는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지만 결국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철조망과 기관총이 피를 빨아먹는 전형적인 참호전의 양상을 띤 이 전투는 1,200년간 깨지지 않던 전쟁 규모의 세계기록을 갱신한 소모성 전투로 사상 유례 없는 참혹하고 잔인한 지옥 전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와 전쟁과 애국심의 낭만성을 비판한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는 베르됭 전투의 지옥전쟁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한 전쟁영화의 걸작이다.]

 독일군 장교들과 간수장 아더까지 초청한 공연에서 카티에가 'Si tu veux Marguerite'이란 샹송을 부른다. [註: 이 곡은 1913년 알베르 발지앙(Albert Valsien, 1882~1955)이 작곡하고 뱅상 텔리(Vincent Telly, 1881~1957)가 작사한 곡으로 카티에 역의 줄리앙 카레트(Julien Carette, 1897~1966)가 직접 불렀다. 직역하면 "그래, 그러자, 마가릿"이지만 의역하면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너 편한대로 해'라는 뜻.]
 이어서 여자로 분장한 프랑스군의 공연이 진행되는데 마레샬이 프랑스군이 두오몽 요새를 재탈환했다는 신문기사를 알리자 프랑스 포로들은 일제히 일어서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셰예(La Marseillaise)'를 부른다. [註: 딥 포커스로 촬영한 이 장면은 상당한 감동을 주는데 '카사블랑카(1942)'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 두오몽 요새가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허망한 벽보를 보여준다. 수용소 내 공연을 다룬 이 시퀀스는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예이지만, 프랑스 국가가 나오고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두오몽 요새를 뺏고 뺏기는 과정을 거듭함으로써 다시 국가 간 경계가 세워지는 부정(否定)의 부정이 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음 호에 계속)

 

▲ 측량기술자 장교(가스통 모도)가 팔부상 중인 마레샬(장 가뱅)의 발을 씻겨준다.

▲ 저녁 점호 후 마루바닥 밑의 땅굴 작업을 시작하는 프랑스군 장교들. 깡통에 줄을 이어 만든 경고장치까지 구비했다.

▲ 땅굴 작업을 위해 숨을 쉴 수 있는 공기통을 조립하는 프랑스군 장교들.


▲ 땅굴 작업에서 나온 흙을 보자기에 담아와서 작업할 때 몰래 버리는 프랑스 포로들.


▲ 보드빌 공연을 위해 로젠탈(마르셀 달리오·맨 오른쪽)이 주문한 여자의상과 소품들이 도착한다.

▲ 창문으로 연병장을 내다보던 드 보엘디외 대위가 "저기 소년들은 군인처럼 행동하고 여기 군인들은 애들처럼 지낸다"고 비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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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WWI 배경 영화(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1)

 

 '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은 프랑스 유명 감독 장 르누아르의 1937년 작품이다. 이 타이틀은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하원의원(노동당)으로 193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 1872~1967)의 저서 '위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에서 따온 것이다. 에인절 경은 '전쟁은 유럽국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하찮은 것이며 쓸모없는 군국주의를 낳았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註: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감독은 프랑스의 대표적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의 세 아들 중 차남이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 감독의 대표작으로 프랑스 시네마 걸작 중 하나이며, 오손 웰스(Orson Welles, 1915~1985)는 "만약 내가 한 편의 영화를 무인도에 가져간다면 내 방주(方舟)에 싣고 갈 영화는 '거대한 환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월드 픽처스 배급. 출연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장 가뱅, 피에르 프레네이, 마르셀 달리오, 디타 파를로 등. 러닝타임 114분.

 

 배경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첫 장면에 프랑스군 매점식당의 축음기에서 나오는 샹송 'Frou-Frou'를 따라부르던 마레샬 중위(장 가뱅)가 공군 참모장교 드 보엘디외 대위(피에르 프레네이)의 호출을 받고 그의 사무실로 간다. [註: '프루-프루(Frou-Frou)'는 1897년 루실 파니(Lucile Panis)가 부른 노래로 여자가 걸을 때 실크옷에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의성어(擬聲語)이다.]

 

 드 보엘디외는 마레샬에게 항공 사진을 보여주며 회색 얼룩 부분이 뭔지를 묻지만 모두 해석이 제각각이라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정찰 비행을 하기로 하는데….

 장면은 바뀌어 독일군 제21비행단의 폰 라우펜슈타인 대위(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가 프랑스 코드론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며 부하에게 격납고로 차를 보내면서 그들이 장교라면 점심식사에 초대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자기의 열두 번째 격추비행을 축하하는 음악을 틀라고 명령하는데,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작곡의 '예술가의 생애'가 흘러나온다.

 

 아울러 점심 메뉴를 정해주는 라우펜슈타인. 모젤 와인, 라인 포도주. 마르텔 코냑, 샴페인, 셀처 탄산수, 파인애플 등을 개수까지 정해 주문하여 용의주도한 독일 귀족 냄새를 풍긴다.

 정찰기가 추락하여 그들의 포로가 된 프랑스군의 드 보엘디외 대위와 팔에 부상을 당한 마레샬 중위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깎듯이 예의를 갖추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아니 그 이상으로 포로를 대하는 라우펜슈타인. 이러한 상황 설정에 솔직히 좀 어리둥절해 지는데….

 

 식사 중 라우펜슈타인이 베를린에 있는 보엘디외 백작을 잘 안다고 말하자 보엘디외 대위가 자기 사촌인 에드몽 보엘디외이며 대사관의 무관이었고 지금은 파일럿이라고 말한다.

 마레샬에게 독일장교가 식사를 안 하느냐고 묻자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그가 왼팔 깁스 때문에 고기를 자를 수가 없다는 제스처를 하자, 프랑스 리옹에서 기술자로 일한 적이 있다는 독일 장교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그의 고기를 손수 잘라준다.

 

 그때 식사를 하던 일행이 모두 일어난다. '포화 속에 산화한 프랑스 비행단의 쿠루솔 대위 영전에 독일 21비행단 장교 일동이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쓴 조화(弔花)가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우펜슈타인 대위가 "이 일에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고 "용감한 적군이여 편히 잠들기를…"하고 묵념을 하는 게 아닌가!

 

 생포된 장교들은 제17포로수용소인 할바흐(Hallbach) 장교캠프로 이송된다. 연병장에 집결된 포로 장교들에게 캠프의 규정을 길게 발표하는 독일군. "장교는 계급에 준하여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법에 따라야 함을 명심하라. …"

 이때 카메라가 포로들을 훑고 지나간다. 프랑스군을 비롯하여 영국군, 러시아군 등 각국의 군인들이 다 모였다. 포로들의 소지품을 모조리 검사하는 독일군에 항의하는 포로들….

 

 개인 소포들이 도착한다. 로젠탈 중위(마르셀 달리오)가 자기 소포에서 프랑스산 초콜릿, 완두콩 통조림 등을 인심 좋게 그 자리에서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여기 독일병 간수들이 소포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들 수근거린다.

 식사가 진수성찬이다. 로젠탈이 소포로 받은 '푸케'산(産) 코냑이 입맛을 돋운다. 이에 드 보엘디외 대위가 '푸케'를 칭찬하며 자기는 '맥심'에도 들른다고 말하는데…. [註: 푸케(Fouquet's)는 샹젤리제 중심부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겸 카페의 이름. 1899년 루이 푸케(Louis Fouquet)에 의해 처음 문을 열었고 파리 상류층들의 사교장이었으며 지금도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찾기로 유명하다. 입구에 깔려있는 레드 카펫 옆에는 그동안 방문했던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황금색 판에 새겨져 있다. 특히 사르코지 대통령이 당선 기념 식사를 한 곳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

 맥심(Maxim's)은 1893년 웨이터였던 막심 가야르(Maxime Gaillard)에 의해 처음 오픈했고, 지금은 세계적 디자이너인 피에르 가르뎅(1922~2020)이 소유하고 있는 레스토랑 겸 카바레이다. 특히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 1870~1948)의 1905년 오페라 '즐거운 과부(The Merry Widow)' 제3막의 세트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열관리 기능공이었던 마레샬은 좋은 술이 있는 작은 술집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극장에서 풍자극을 하는 배우였던 카티에(줄리엥 카레트)는 그런 이름조차 모른다. [註: 우리는 여기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대조를 보게 되는데 이 영화 전반에 걸쳐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사회 계급 및 지위, 인종 차별 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여기서 드 보엘디외와 폰 라우펜슈타인은 국가적 경계를 넘는 코스모풀리탄 형이며 많은 사회·문화적 교육을 받았고 여러 언어에도 능통한 귀족 상류계급을 대표한다.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행사 및 의식에의 공헌을 통한 사교뿐만 아니라 유사한 사회적 경험, 예컨대 파리의 맥심에서 만찬을 하고 똑같은 여자 '피피'와 놀아났던 일 등이 둘의 개인적 관계를 가깝게 했다. 두 사람은 평소에는 공식적인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소통하고 하층계급이 들어서는 안 될 개인적 대화 때는 영어로 말하기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1937)' 영화포스터

 

▲ 포로가 된 프랑스군의 드 보엘디외 대위(피에르 프레네이·오른쪽)와 팔에 부상을 입은 마레샬 중위(장 가뱅·가운데)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고 영접하는 독일군 라우펜슈타인 대위(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좀 어리둥절해지는 상황이다.

 

▲ 프랑스 장교 포로인 마레샬을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대접하는 라우펜슈타인.

 

▲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독일장교가 왼팔 깁스 때문에 식사를 할 수 없는 마레샬(장 가뱅)의 고기를 손수 잘라준다.

 

▲ 로젠탈 중위(마르셀 달리오·왼쪽)가 개인 소포에 들어있는 음식물을 인심 좋게 그 자리에서 동료들에게 나누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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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I 배경 영화(IV)-애수(哀愁·Waterloo Bridge)(하)

 

(지난 호에 이어)

 마스코트가 클로스업 되면서 장면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마이러가 남긴 행운의 마스코트를 바라보며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영국 육군 대령 로이 크로닌!

 

 마이러의 음성이 들린다. "로이…당신을 사랑했어요…다른 사람은 사랑한 적도 없었고 사랑하지도 않을 거에요…" 그립고 애틋한 회상에서 깨어난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다. 

 

 25살의 젊은 대위에서 이제 48세의 대령이 된 로이는 아직도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그 만을 진실로 사랑했던 마이러를 회상하며 코트 안주머니에 마스코트를 집어넣고 지프차를 타고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올드 랭 사인'이 울려퍼지면서….

 

 '애수' 영화는 한마디로 사랑을 얻었다가 잃고 다시 찾고 그리고 영원히 잃어버리는 비극적 대단원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경박하거나 통속적인 그런 영화가 아니다. 사랑스럽고 감동적이며 너무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헐리우드산(産) 영화이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러 '만약 이랬더라면 어땠을까(what-if)?'란 질문이 생김을 어쩌랴!

 

 법이고 뭐고 다짜고짜 결혼식을 올렸더라면?… 재정적 궁핍에 처해있던 마이러가 자존심 꺾고 로이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과거를 묻어 두고 다시 결합했더라면 과연 행복했을까?… 마이러는 로이가 사랑에 빠졌던 그 소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봉건적인 도덕관념과 전쟁의 희생양이어야 했는가?… 두어라 다 부질 없는 짓이려니… 클리넥스나 준비하고 감상할 수밖에!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애수'에서 가장 인상 깊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키티'가 아닌가 싶다. 그녀는 친구 마이러에 대해 이해심 많고 현실적이며 변함없는 우정으로 '보호 천사'가 되어준다. 비록 거리의 여인이 되었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지 인간성까지 희생하지 않은 감수성 예민하고 상냥한 올곧은 아가씨였기에 하는 말이다.

 

 '애수'의 주인공 마이러 레스터 역의 비비안 리(Vivian Leigh, 1913~1967)는 바로 전년도에 제작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1939)'에서 전형적인 남부 '타라'의 여인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유명 영국배우이다.

 

 그 후 일리어 카잔 감독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1951)'에서 블랑슈 뒤부아 역으로 또 한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비비안 리는 세계적인 미인이었지만 진작 자신은 아름다움이 진정한 배우의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녀는 1940년 유명한 영국배우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1907~1989)와 재혼하여 1960년 이혼할 때까지 황금기를 누렸지만 극심한 조울증과 정서 불안 때문에 함께 일하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으면서 내리막길을 걷다가 만성결핵으로 향년 53세로 타계한 비운의 배우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비안 리는 '바람과 함께…'보다 '애수'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로버트 테일러도 마찬가지였다. 또 비비안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을 웃기는 것보다 울리는 일이 더 쉽다"고 말한 적도 있다. 공감이다!

 

 제작한지 80년이 지난 지금, 총천연색으로 보여준 도도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스칼렛 오하라보다는 흑백으로 보여준 발레리나 마이러 레스터가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적 스토리의 힘과 최고 절정기의 두 중량급 배우의 아름다운 모습과 멋진 연기로 보여준 원형의 힘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 1911~1969)는 '옥스포드의 양키(A Yank at Oxford·1938)'에 이어 '애수'에서 비비안 리와 두 번째 공연했다. 훤칠하고 잘 생기고 멋진 그는 당시 여성팬들의 우상으로 군림했으며 '애수' 이후 '마스코트 주고받기'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그 후 '쿼바디스(Quo Vadis·1951)', '아이반호(Ivanhoe·1952)', '원탁의 기사(Knights of the Round Table·1953)' 등으로 20세기 전중반을 풍미하던 미국배우이다. 폐암으로 57세에 타계.

 

 머빈 르로이(Mervyn LeRoy, 1900~1987)는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의 감독과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1939)'의 제작자로 각 해당연도 아카데미 감독상 및 제작상 후보에 올랐던 명감독이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샌프란시스코 백화점 소유자였는데 1906년 대지진으로 파산해 버리자 어렸을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이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십계(The Ten Commandments·1923, 이는 흑백무성영화이며 1956년에 컬러판으로 리메이크)'로 유명한 세실 B. 데밀 감독으로부터 감독수업을 받았고, 1938년부터 MGM사의 제작담당 총책으로 있으면서 주옥같은 명작을 탄생시키는 한편 클라크 게이블, 로레타 영, 로버트 미첨, 라나 터너 등을 발굴해 내는 업적을 쌓았다.

 

 르로이 감독은 1934년 도리스 워너(1912~1978)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워너 브라더즈사 창업자인 해리 워너의 딸이다. 둘 사이에 아들 워너와 딸 린다를 두고 1942년 이혼했다. 워너 르로이는 뉴욕시에서 '르로이 어드벤처스'라는 레스토랑 사업가로 유명했는데 그가 2001년에 66세로 죽자 불과 22세였던 딸이 물려받아 CEO가 되는 일화를 남겼다.

 

 '애수'의 음악감독 허버트 스토다트(Herbert Stothart, 1885~1949)는 1939년 '오즈의 마법사'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작곡가. 그는 이미 뮤지컬 '로즈 마리(Rose Marie·1936)'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작곡가로 특히 지네트 맥도널드와 넬슨 에디의 이중창 '인디언 러브 콜'은 지금도 애창되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 밖에 로버트 Z. 레너드 감독의 '오만과 편견(1940)', 윌리엄 와일러 감독, 그리어 가슨, 월터 피전 주연의 '미니버 부인(Mrs. Miniver·1942)', 머빈 르로이 감독의 '마음의 행로(行路)' 및 '퀴리 부인(Madame Curie·1943)' 그리고 당시 12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미키 루니 주연의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1944)' 등의 음악감독으로 기억되는 유명 작곡가이다. (끝)

 

▲ 마이러와의 결혼을 승락해 주었던 로이의 삼촌이자 상관인 듀크 대령(C.오브리 스미스)이 마이러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녀를 자연스럽게 귀빈들에게 알리기 위해 춤을 청하는 세심함을 보인다.

 

▲ 로이의 어머니 마거렛 여사(루실 왓슨, 캐나다 퀘벡 출신 배우)는 마이러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다독이는데…

 

▲ (왼쪽) 마이러(비비안 리)가 안개 낀 워털루 다리 위에서 달려오는 군용트럭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오른쪽) 그녀가 갖고 있던 행운의 마스코트가 길바닥에 나뒹군다.

 

▲ 워털루 다리 위에서의 회상이 끝난 육군 대령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의 눈에 눈물이 어려있다. 정말 비극적 사랑이다! '올드 랭 사인'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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