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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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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2
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4·끝)

 

(지난 호에 이어)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캐시 역의 데브라 파젯(Debra Paget·89)이다. 본명 데브라리 그리핀(Debralee Griffin). 그녀는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에서 여호수아의 연인 릴리아 역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콜로라도 덴버 출신 배우.

 

 특히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인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 감독의 오리엔탈 연작 '뱅갈의 호랑이' 후편인 '인도의 무덤(The Indian Tomb, 1959; 국내에서는 1960년 '왕성의 비밀'로 개봉)'에서 파격적인 의상으로 마법에 걸려 '뱀의 춤(snake dance)'를 추는 장면은 지금 봐도 뇌쇄적인 관능미를 풍긴다.

 

 영화 속에 엘비스의 노래가 4곡 나온다. 마을 학교 건축자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의 무대에서 아직은 서부 시대인 19세기의 배경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헤어스타일로 경쾌한 'Let Me'와 'Poor Boy' 두 곡을 '게다리 춤'과 함께 신나게 열창하는데, 고증이고 뭐고 '뜨는 별' 앞에서는 나무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저녁 시간에 'We're Gonna Move'와 'Love Me Tender' 등 두 곡을 부른다. 특히 '러브 미 텐더'를 부를 땐 캐시에 대한 옛사랑이 되살아나 괴로운 듯 리처드 이건은 중간에 자리를 뜬다. 이 곡은 영화 시작부터 전편에 걸쳐 변주되면서 흐른다.

 

 사실 이 영화는 워낙 플로트가 탄탄하여 굳이 엘비스의 노래가 없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헐리우드의 상업주의가 그 좋은 '황금알'을 놓칠 리가 있었겠는가.

 

 엘비스는 1954년에 데뷔하여 1956년 1월, RCA에서 발매한 첫 싱글 '하트브레이크 호텔'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히트를 친 이래 총 18곡의 빌보트 넘버원 히트 싱글 기록을 남겼다.

 

 21세 때인 1956년 11월에 로버트 D. 웹 감독의 '러브 미 텐더'에 데뷔한 이후, 1969년까지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엘비스가 음반과 방송 및 영화 등 연예계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그의 매니저로 별명이 '대령(Colonel)'인 톰 파커(Tom Parker, 1909~1997)였다. 당시 20세기 폭스사와 RCA 레코드사는 각본보다 엘비스의 노래가 더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하여 첫 출연한 그에게 10만 달러를 지급하고, 원래 '리노 형제들(The Reno Brothers)'이라는 제목을 졸지에 '러브 미 텐더'로 바꿨다.

 

 그후 로큰롤, 가스펠, 록, 펑크, 팝 발라드, 컨트리, 블루스 등의 장르에 관계없이 이례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얻었고, TV 출연과 차트를 휩쓸었다. 특히 로큰롤을 새로운 인기있는 장르로 유행시켰다.

 

 1969년 8월에 발매한 싱글 'Suspicious Minds'는 엘비스의 마지막 18번째 빌보드 넘버원 싱글곡이었다. 그러나 1977년 향년 42세의 나이에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1950년대의 스탠더드 팝에서 탈피하여 로큰롤(Rock and Roll)을 '청춘의 음악적 장르'로 대중화하여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세대와 베이비붐 신세대 간의 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공로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가 태어난 미국 미시시피 주의 투펄로에는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13살 때 이사 간 테네시 주 멤피스에는 '그레이스랜드 박물관'이 건립되어 매년 65만 명의 방문객이 백악관 다음으로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엘비스는 노르웨이 출신 프리실라 보리외(Priscilla Beaulieu·77)와 32살 때인 1967년에 결혼하여 5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둘 사이에 난 외동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54)는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배우자(1994-1996)가 마이클 잭슨(1958~2009), 세 번째(2002-2004)가 니콜라스 케이지(58)였다. 그녀와 모친 프리실라는 현재 그레이스랜드 및 그 부속자산의 소유주이다.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사망 이후 재혼은 안 했지만 훌리오 이글레샤스, 리처드 기어, 톰 존스 등 숱한 연예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CBS TV드라마 '댈러스'에서 제나 웨이드 역으로 장기간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마릴린 먼로, 로버트 미첨 주연의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 1954)'으로 잘 알려진 라이오넬 뉴먼(Lionel Newman, 1916~1989). 그의 친형이 200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작곡,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43번이나 올라 '베르나데트의 노래(1943)' '모정(1955)' '왕과 나(1956)' '카멜롯(1967)' 등으로 아홉 번 수상했던 앨프리드 뉴먼(Alfred Newman, 1900~1970)이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앨프리드 뉴먼의 형제들과 자녀들은 대부분 음악계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뉴먼 왕조(Newman Dynasty)'로 불린다.

 

 아무튼 엘비스의 데뷔작인 영화 '러브 미 텐더'에서 나른한 듯 부드럽고 달콤한 창법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1956년 11월 개봉 전에 주문이 쇄도하여 궁극에는 2백만 장이 팔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두 달 개봉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56년도 말까지의 최고 흥행 순위에서 23위를 차지했다.

 

 엘비스의 21살 때의 앳된 모습과 막 인기가 치솟던 무렵의 그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러브 미 텐더'는 우리에게 퍽 소중한 작품이다. 통기타 반주에 따라부르기 쉬운 단순한 곡이지만 이 곡은 1950년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언제 어디서 듣더라도 감미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러브송' 중 하나로 우리 곁에 살아있다.

 

 덧붙이기: 영화 '러브 미 텐더'의 첫 장면에서 스티븐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 작곡의 가곡 '금발의 지니(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1854)'가 하모니카 연주로 나오는데, 이는 '러브 미 텐더'의 원곡으로 일명 '금발의 소녀(Maid with Golden Hair)'로 불리는 '오라 리(Aura Lea)'라는 노래와 연관 지은 의도적인 삽입이 아닌가 싶다.

 

 이 곡은 조지 R. 풀턴(George R. Poulton, 1828~1867) 작곡, 윌리엄 W. 포스딕(William W. Fosdick, 1825~1862) 작사로 남북전쟁 때 남군에 의해 불려지던 노래다. 내용은 연인을 전쟁터에 보낸 여인 '오라 리'가 4계절이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애절한 노래이다. (끝)

 


▲ 클린트는 마지막으로 맏형 밴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캐시의 품에서 죽는다. 엘비스가 영화 속에서 죽는 장면은 '러브 미 텐더'가 유일하다.
 


▲ 마을 바자회 무대에서 경쾌한 'Let Me'와 'Poor Boy' 두 곡을 '게다리 춤'과 함께 신나게 열창하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아직 서부시대인 19세기의 배경에서 그의 헤어스타일이나 춤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 영화 전반부에 저녁식사 후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시간에 통기타를 치며 'We're Gonna Move'를 부르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 이어서 이 영화의 주제곡이자 타이틀인 'Love Me Tender'를 감미롭게 부르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이때 맏형 밴스는 캐시에 대한 옛사랑이 되살아나 괴로운 듯 중간에 자리를 뜬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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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5
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3)

 

 개빈 일행이 그냥 떠나려 하자 밴스가 총으로 위협하고 그 사이에 브레트와 레이가 그들의 총을 빼앗고 돈을 회수한다. 그리고 3형제의 몫을 갖고 오기 위해 농장에 갔다가 날이 밝으면 방앗간에서 만나자고 제의하는 밴스.

 

 한편 밴스는 클린트로 하여금 내일 오후 돈을 반납하기 위해 방앗간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시링고에게 전하도록 조치하고, 클린트에겐 내일 아침 방앗간으로 오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농장에 북군이 들이닥쳐 이 잡듯이 수색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 후 킨케이드 대위와 켈소 보안관은 허탕을 치자 경계병 3명만 남겨두고 마르타와 캐시에게 일단 가겠다고 말하고 떠나는데….

 할 수 없어 밴스는 제트로 영감을 찾아가 대신 돈을 가져오도록 부탁하는데….

 

 한편 마르타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캐시는 집에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며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러 읍내로 가기 위해 마구간으로 간다. 이때 헛간에서 땅을 파고있는 제트로를 발견하는 캐시!

 

 제트로가 밴스가 숨어있는 곳을 알리자 그녀는 돈을 갖고 말을 몰아 밴스를 만나러 가려는 찰나, 경계병이 다가와 몸수색을 해야 나갈 수 있다며 제지한다. 하지만 그녀의 풍만한 몸매에 압도 당해 차마 수색할 엄두를 못 내고 군침만 삼키다, 혹시 누가 물으면 수색을 했다고 대답하라는 부탁과 함께 그냥 보낸다.

 

 이윽고 캐시는 밴스를 만나지만 매복해 있던 연방군의 추적에 숨돌릴 사이도 없이 둘은 도망친다. 늪지대에 이르러 가까스로 갈대숲에 몸을 숨겨 위기를 넘기는 두 사람.

 

 그러나 말을 탄 채로 물을 건너다 물 속에 빠진 캐시를 극적으로 구한 밴스는 그녀의 옷을 빨아 말리면서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는다. 이를 내심 야속하게 생각하는 캐시!

 

 그 무렵 시링고에게 형 밴스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개빈 일당 및 형들에게 돌아온 클린트는 시링고가 오늘 저녁까지 돈을 모두 반납하면 혐의는 풀린다며 킨케이드 대위를 피해 멀리 도망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형 밴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의아해 하는 클린트에게 개빈은 밴스가 돈을 가로채 캐시와 함께 도망갔을 거라며 보복적으로 그를 자극한다. 성미가 급한 클린트는 질투심과 배반감에 치를 떨며 말을 달려 밴스를 쫓고, 개빈 일당들과 레노 형제들이 그 뒤를 따라가는데….

 

 이때 뒤따르던 레이와 브레트가 갑자기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던 비밀장소인 동굴을 떠올리고 말을 돌려 그 곳으로 간다.

 

 한편 밴스는 캐시를 동굴에 숨겨놓고 시링고와의 약속을 위해 방앗간으로 간다. 예상대로 동굴에서 캐시를 발견한 형제들이 클린트가 캐시에 대한 배신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스스로 클린트를 만나 설명한다. 하지만 개빈의 말만 듣고 심한 질투심으로 흥분한 그는 그녀의 말을 믿기는커녕 폭력을 행사하여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브레트가 겨우 싸움을 말리고 캐시를 동굴로 돌려보내자 이젠 개빈 일당이 레노 형제를 무장 해제시키고 클린트만 데리고 동굴로 간다.

 

 한편 시링고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 총도 없는 브레트, 레이와 맞닥뜨리는 밴스. 급박한 상황을 전해 들은 밴스는 레이로 하여금 시링고를 만나 탈취한 돈을 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을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한다.

 

 브레트와 함께 동굴로 가서 클린트에게 접근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밴스! 캐시는 나에게 돈을 전달하려는 목적이었지 맹세코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으며, 시링고와의 협상 때문에 늦어졌을 뿐, 어차피 난 고향을 떠날 작정이었고 곧 우리 모두가 사면되면 영원히 떠날 거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동굴로 다가가는 밴스!

 

 그러나 돈을 전달하러 읍내에 갔다가 여기로 돌아올 수 있는 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밴스가 아직 돈을 갖고 있고 여기 온 이유는 캐시를 데리러 온 것이라며 얼른 총을 쏘라고 사주(使嗾) 하는 개빈. 이때 분노의 얼굴로 캐시를 힐끔 쳐다보는 클린트.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저으며 사실이 아니라는 제스처를 하는데….

 

 형 밴스의 말보다는 이미 개빈의 말에 뚜껑이 열린 클린트는 형 밴스를 쏘려고 한다. 드디어 개빈과 클린트가 거의 동시에 총을 쐈는데 밴스는 왼쪽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영화 속에서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노련한 개빈의 총에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개빈 일당이 돈을 탈취하려고 총상을 입은 밴스를 덮치자 클린트는 순간 자책감을 느끼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데 헛맞고, 개빈의 총이 클린트를 향해 불을 뿜는다.

 

 이때 레이의 연락을 받은 시링고와 군인들이 동굴에 도착하여 개빈 일당 3명을 체포한다. 개빈의 총을 맞은 클린트는 마지막으로 맏형 밴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캐시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註: 엘비스 프레슬리가 영화 속에서 죽는 장면은 '러브 미 텐더'가 유일하다.]

 

 장면은 농장의 가족묘지. 묘비에는 '클린턴 레노 1843년 1월 14일 ~ 1865년 4월 25일'로 새겨져 있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사랑의 질투심으로 어처구니 없이 죽은 것이다.

 

 밴스와 캐시가 막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마르타를 모시고 브레트, 레이 레노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과 '러브 미 텐더'를 노래하는 엘비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전체적인 줄거리의 중심인물은 맏형 밴스 역의 리처드 이건(Richard Egan, 1921~1987)이다. 한 때의 연인이었지만 제수(弟嫂)가 된 캐시를 단념하려는 고뇌에 찬 연기와 맏형으로서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철부지 같은 막내 동생을 끌어안으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형제애 그리고 강탈한 군자금을 정부에 돌려주려는 정의의 시민정신 등을 잘 연기했다고 본다.

 

 그러나 엘비스의 그늘에 가려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극사로 석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중견배우였으나 '야성녀(Untamed·1955)'에서 타이론 파워에 밀리고, 한국전쟁 배경의 '추격기(The Hunters·1958)'에서 로버트 미첨의 상관 역으로, '피서지에서 생긴 일(A Summer Place·1959)'에서도 10대 청춘스타 샌드라 디의 아버지로 출연하는 등 만년 주연급 조연 배우에 그쳤다. (다음 호에 계속)

 

▲ 개빈 일당의 말만 믿고 심한 질투심과 배반감으로 뚜껑이 열린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 흥분한 클린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캐시(데브라 파젯)의 말을 믿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여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 밴스가 돈을 갖고 캐시를 데리러 동굴까지 왔다는 개빈의 말에 힐끔 쳐다보는 클린트에게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저으며 사실이 아니라는 제스처를 하는데…

 

▲ 마이크 개빈(네빌 브랜드·왼쪽)의 사주(使嗾)에 의해 심한 질투심으로 뚜껑이 열린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는 형 밴스를 죽이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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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2)

 

(지난 호에 이어)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면서 남부 연맹과 노예제는 끝을 맞이했고, 미국 연방정부의 역할은 더 강력해졌다. 전후 혼란한 시기부터 1877년까지 북군에 의한 군정시기인 '재건 시대' 동안, 미국 사회는 전쟁에서 발생한 사회·정치·경제·인종적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옥수수 왕(King Corn)의 힘이 (남부의) 면화 왕(King Cotton)의 힘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을 유발한 원인과 그 타당성 여부는 물론이고, 남북 전쟁이라는 그 명칭 자체도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이쯤에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오픈 크레디트에 이 영화의 주제곡인 '러브 미 텐더'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흐른다.

 

 첫 장면에 1865년 4월 10일. 증기열차가 지나가고 그 기찻길 옆길을 따라 말을 탄 남군 병사들이 달려간다. 이때 북군의 한 대대가 루이지애나 그린우드(Greenwood) 기차역에서 봉급수송 열차를 기다리던 중 (남북전쟁) 승전의 전보를 받고 기뻐하는 순간 남군들이 들이닥쳐 역무원 등이 사살되는 일이 벌어진다.

 

 남군들이 북군 군복으로 위장하고 열차를 강탈하여 1만2천여 달러의 북군 봉급을 챙겨 도망치는데, 역장의 신고를 받은 북군의 공격으로 7명만 살아남는다. 일곱 명 중에는 레노 3형제가 포함되어 있다.

 

 다음날 밴스 레노(리처드 이건)는 이 돈을 남군 기병여단장인 랜덜 장군에게 전달하기 위해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4, 5일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난 사실을 알게 된다. 일행들은 남군의 항복으로 돈의 귀속처가 애매모호하게 되자 그 돈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생각하곤 7등분 한 후 각자 귀향하는데…. [註: 로버트 리 장군이 1865년 4월 9일 항복선서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인 전쟁은 종료됐지만 남부의 인프라, 특히 운송체계의 파괴로 인해 2~4개월 뒤에서야 모두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동생 브레트(윌리엄 캠벨), 레이(제임스 드루리)와 함께 고향 텍사스로 달려가는 맏형 밴스의 마음은 참전 전에 이미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캐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도중에 철도 건널목 잡화점에 들른 밴스는 말끔히 면도하고 신부를 위한 선물과 신랑 결혼예복을 20달러나 주고 산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이웃 노인 제트로(폴 E. 번즈)가 밴스를 보고 놀라며 모두가 그가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다며, 전쟁 중 밴스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캐시도 그의 가족을 잃고 밴스의 어머니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막내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와 어머니 마르타(밀드레드 더노크)가 기다리는 고향집에 드디어 도착한 리노 삼형제. 그러나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연인 캐시(데브라 파젯)가 동생인 클린트의 부인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남북전쟁 중에 밴스의 (잘못된) 전사 소식을 듣고 불과 3개월 전에 클린트와 결혼을 한 캐시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고, 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비록 밴스가 "우린 항상 캐시가 가족의 일원이 되길 바랬다"며 태연한 척 하지만 가족은 이로 인해 불안정하기만 하다. 캐시는 막내 클린트와 결혼한 것은 사실이지만 밴스가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아직도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데….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 바자회가 열리기 전날 밤, 밴스는 어머니에게 내일 캘리포니아로 떠나겠다고 말하고, 3형제는 강탈한 돈을 헛간에 묻어두는데, 밴스는 기껏 200달러만 노잣돈으로 챙기고 때가 되면 나머지는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동생들에게 부탁한다.

 

 다음날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의 바자회에서 밴스는 캐시와 클린트에게도 떠날 결심을 얘기하는데, 마침 그때 두 달 전에 강탈 당한 북군 군자금의 행방을 추적하던 킨케이드 대위(브루스 베네트), 에드 켈소 보안관(켄 클라크) 및 핑커톤 수사관 시링고(로버트 미들턴)가 레노 3형제를 찾아와 추궁한다. [註: 핑커톤 전미탐정사무소(Pinkerton National Detective Agency)는 특히 강도단 일망타진으로 유명하며 1850년 앨런 핑커톤(Allan J. Pinkerton, 1819~1884)이 창립한 사설 경비 및 탐정 업체로 그 전성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설 법집행기관이었다. 1969년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도 등장한다.]

 

 시링고가, 레노 3형제가 8주 전인 4월 10일 아침에 그린우드 기차역에서 연방정부군의 봉급을 강탈했다며 수사기록을 읽어나가자, 밴스는 "돈을 훔친 적이 없다"며 강력 부인한다. 어렸을 적부터 밴스와 잘 아는 사이였던 켈소 보안관이 북군 봉급수송장교와 대질심문을 하고 법정에 세우기 위해 레노 형제를 체포하여 타일러(텍사스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이송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복잡하게 얽힌다.

 

 그날 밤, 밴스와 같이 돈을 나눠가졌던 마이크 개빈(네빌 브랜드)과 에드 갤트(러스 콘웨이), 파르디 플레밍(L.G. 존스) 등 세 전우들이 레노 농장에 나타나 클린트에게 자기들을 소개한다. 이에 형들이 잘못도 없이 북군의 복수심 때문에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었다고 믿은 클린트는 형들을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개빈 일당에 합류하는데….

 

 한편 타일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링고는 밴스에게 돈을 돌려주면 무혐의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밴스가 잡화점의 점원에게 지불했던 20달러짜리 (연방)지폐를 증거로 제시하자 밴스는 체념하고 우리 형제의 몫만 갖고 있다고 털어놓는데, 시링고는 탈취한 돈 전액이 반환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그때 개빈 일당들이 기차에 올라타고 총으로 위협하며 레노 형제들을 구해 도망친다. 화가 난 킨케이드 대위가 '보는 즉시 놈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하지만, 시링고와 켈소 보안관은 레노 형제는 이 탈출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확신하며 싸고돌자 서로 격돌하는데….

 

 한편 구출된 밴스가 옛전우들이었던 마이크 개빈 일행에게 시링고의 제안대로 돈을 반납하지 않으면 연방정부가 끝까지 추적하여 사살할 것이라고 설득하지만, 탈취한 돈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돌려주기를 거부한다.

 

 이를 듣던 클린트가 왜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냐며 대들자 형 밴스는 그때는 '임자 없는 돈'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이에 브레트와 레이가 기껏 수천여 달러에 평생 목숨을 걸 가치가 있겠냐며 선뜻 반납하겠다고 나서는데….(다음 호에 계속)

 


▲ 북군 군자금의 행방을 추적하는 북군 대위, 보안관 및 핑커톤 수사관 팀이 마을 바자회에 찾아와 레노 형제를 추궁하는데…

 


▲ 북군 킨케이드 대위(브루스 베네트)와 함께 온 핑커톤 수사관 시링고(로버트 미들턴·오른쪽)가 레노 3형제의 두 달 전 행적을 조사한 내용을 요목조목 발표하는데…
 


▲ 캐시(데브라 파젯)가 몸수색을 하라고 하자 경계병은 그녀의 풍만한 몸매에 압도 당해 군침만 삼키다, 혹시 누가 물으면 수색을 했다고 대답하라는 부탁과 함께 그냥 보낸다.



▲ 연방군의 추적을 피해 늪지대의 갈대숲에 몸을 숨겨 위기를 넘기는 밴스(리처드 이건)와 캐시(데브라 파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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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1
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1)

 

<필자 註: 시기적으로 보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먼저 일어난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시리즈로 연재 합니다. 191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및 TV극, 다큐멘터리 등은 200여 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5편을 엄선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많은 사랑과 성원 바랍니다.>

 

 미국 남북전쟁 배경영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1956년 20세기 폭스사 배급, 시네마스코프 흑백 영화인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꼽아보았다. 감독 로버트 D. 웹, 출연 리처드 이건, 데브라 파젯, 엘비스 프레슬리 등. 러닝타임 89분.

 

 사실 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 남북전쟁일 뿐 줄거리는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굳이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뒤에 소개할 여러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리즈 첫머리에 남북전쟁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의 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고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연합군, 즉 남군(Confederate Army)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 포격을 시작으로 개전(開戰)되어 북부군(Union Army)과 1865년 4월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연방 분리의 가장 큰 원인은 '노예제도'였다. 특히 면화플랜테이션 농장이 밀집돼 있어 '면화 주(Cotton States)'로 불리는 '딥 사우스(Deep South)'는 노동력을 잃음으로써 겪게 되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흑백 인종 평등의 두려움까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한편 북부 입장에서는 농업을 중시하는 남부에 있는 노예들을 분산시켜 그 세력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그 노동력을 북부 공업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7개 딥사우스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하면서 1861~1863년까지 별 7개가 있는 남부국기와 함께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일곱 개 주의 아메리카 연합국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정부 구조를 형성하였다.

 

 한편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부 연방 탈퇴의 시발점이 되었고, 링컨은 1862년 9월 22일에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고 1863년 1월 1일에 최종적인 노예 해방령을 선언했다.

 

 섬터 요새 공격 이후, 링컨 대통령은 각 주에 의용군을 요청하였는데, 그 후 2개월이 되지 않아 네 개 노예 주인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1863년 6월 20일, 버지니아 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웨스트버지니아 주로 북부군에 합류했다.

 

 아무튼 남북전쟁은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1807~1870) 장군이 버지니아 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1822~1885) 장군이 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완전히 종료됐으며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註: 로버트 E. 리 장군의 항복선서식 때, 남군의 국가로 불렸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던 유명한 노래 '딕시(Dixie)'가 연주되었다.]

 

 1861~1865년 사이에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 거의 18만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북부군과 함께 군인 또는 선원으로 복무를 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탈출을 했던 노예들이었다. 이러한 탈출 노예 병사 중 가장 뛰어난 부대는 '제54 매사추세츠 자원 보병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였다.

 

 한편 남부군은 포로로 잡은 흑인 병사를 노예로 만들었으며, 필로우 요새 학살과 같이 흑인이 항복을 하려하면 총살을 시켰다. 이것은 포로 교환 프로그램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남북 전쟁으로 인해 103만 명의 사상자(당시 인구의 3%)가 발생했고, 그 중 군인 62만 명이 죽었고 무수한 민간인 사상자들이 생겼다. 그 가운데 3분의 2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고 그 중 약 56,000명의 군인이 감옥에서 죽었다.

 

 특히 1864년에 남군이 만든 조지아 주의 앤더슨빌 포로수용소(Andersonville Prison)에는 수용능력의 4배가 넘는 약 45,000명의 북부군 포로들이 부적절한 음식과 식수 부족, 비위생적 환경 때문에 괴혈병, 이질 등 질병으로 약 13,000명이 죽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지금껏 미국이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먹는 참혹한 전사로 남아있다. [註: 1966년 영화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도 앤더슨빌 포로수용소에 대한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앤더슨빌 포로수용소장 헨리 비르츠(Henry Wirz, 1823~1865)는 전후 재판을 받고 1865년 11월 10일 워싱턴DC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1861년, 북부 연합의 인구 수는 2,200만, 남부 연합은 900만이었다. 남부의 인구는 350만 명 이상의 노예와 약 550만 명의 백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의 백인 인구는 남부의 백인 인구보다 4배 이상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 중 또 하나는 종전의 돌격 등과 같은 나폴레옹식 전술을 탈피한 인류 역사상 가장 이른, 진정한 의미의 산업 전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철도, 증기선, 대량 생산된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군사 장비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더욱 정밀한 강선의 개발로 탄알 장전 속도와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미니에 탄환, 그리고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북군에 의해 사용된 스펜서 연발총이나 시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개활지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한 전략으로 쓰인 전쟁 참호가 탄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러브 미 텐더(1956)' 영화포스터
 


▲ 전쟁이 종료된 사실을 안 7명의 남부군은 강탈한 돈을 7등분하고 각자 귀향길에 오르는데…. 가운데 앉은이가 밴스 레노(리처드 이건).
 


▲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밴스가 귀향하여 꿈에도 그리던 연인 캐시(데브라 파젯)를 안아보지만 그사이 그녀는 막내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가 되어 있다.
 


▲ 밴스가 "우린 항상 캐시가 가족의 일원이 되길 바랬다"며 태연한 척 하지만 가족은 이로 인해 불안정하기만 하다.
 


▲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 바자회는 시끌벅적한 축제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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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5
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5·끝)

 

■ 넬슨의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와 전사(계속)

 넬슨의 장례식은 다음해인 1806년 1월 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했다.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 명의 수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넬슨이 평소 원하던 대로 나일 해전에서 격침한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L'Orient)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넣어 안장되었다.

 

 •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기에 전과에 비해서 항상 부족한 보상을 받았다. 또한 당시로서는 엠마와의 염문이 넬슨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부는 넬슨을 그녀와 떨어뜨려놓기 위하여 바다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1843년에 영국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에 넬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의 동상은 그의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호의 돛대 높이와 같은 55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서서 영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그가 승선하였던 빅토리 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해군 선박으로 영국 포츠머스 해군 기지의 왕립해군박물관(Royal Naval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매년 10월 21일은 '트라팔가르의 날'로써 영국 해군 기념일이 되었다.

 

 • 그를 죽게 한 탄환은 윈저 성(Windsor Castle)에, 그가 당시 입었던 옷은 피탄자국이 선명한 상태로 그리니치의 국립해양박물관(National Maritim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 2002년 영국의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 투표에서 무려 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장군, 제독으로 한정하면 1위.

 

■ 엠마 해밀턴 부인의 말년

 1803년 4월 남편 해밀턴 경이 사망하고, 1805년 10월에 연인 넬슨 제독을 잃고,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참가조차 허락받지 못한 엠마는 그나마 영원한 후원자였던 어머니 카도건 부인, 즉 메리 키드마저 1810년 67세로 사망하여 슬픔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그 후 넬슨의 본부인 프란시스 넬슨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특히 넬슨의 형 윌리엄 넬슨(William Nelson, 1757~1835)은 동생의 전사로 인한 모든 영예와 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을 따르기는커녕 해밀턴 부인과 딸 호레이샤를 문전박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재산마저 가로챈 못돼 먹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성기 때의 낭비벽이 심한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지 못한 엠마는 도박과 사치 생활에 빠져 빚더미에 앉아 채무자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고,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음주로 방황하다 1815년 1월 15일 영국을 떠난지 6개월만에 프랑스의 칼레(Calais)에서 4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호레이샤 넬슨은 엠마 사망 후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넬슨의 누나들이 아주 예뻐하며 잘 키워주었다고 한다. [註: 호레이샤 넬슨은 어머니 엠마로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및 독일어를 배우고 스스로 스페인어도 공부하여 우아하고 훌륭한 숙녀로 성장했다. 엠마는 호레이샤를 상류사회에 등극시켰으나 14살 때 빚만 남기고 사망함으로써 무산되었다.]

 

 호레이샤는 북(北) 노포크 교구의 목사 필립 워드(Philip Ward, 1795~1859)와 21살 때인 1822년 2월 19일 결혼하여 7남3녀의 자녀를 낳고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호레이샤는 1845년 전기작가 니콜라스 해리스 경에 의해 부친이 넬슨임을 알았으나,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만 넬슨 제독이 입양한 고아 양녀인 자신의 '보호자(guardian)'이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14살까지 엄마와 같이 살았다는 걸 고려하면,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부인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녀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넬슨 제독의 사랑하는 딸이며 필립 워드 목사의 미망인 호레이샤 넬슨, 1881년 3월 6일 80세로 여기 잠들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엠마의 과거 회상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녀 메리 스미스가 엠마에게 넬슨 사망 후의 얘기가 궁금해 묻는다. '다음은요?'

 엠마가 반문한다. 다음이 뭐라고?

 메리: 그 후 어떻게 됐냐고요?

 엠마: 다음도 없고, 그 후도 없다네. (There is no then. There is no after.")

 

■ 맺음말

 하층민 출신의 쇼걸에서 귀족 대사 부인이 되고, 전쟁 영웅 넬슨 제독의 정부가 된 여인! 그녀가 정치적 중재로 위기의 나폴리 왕국을 구한 공적과 첩보활동 등은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이 자기의 공과만 부풀리고 한 줄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연금 대상이 되지도 못했던 불행한 여인! 넬슨과의 관계가 불륜이었기 때문에 본인과 자식이 제대로 된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여인!

 

 다만 시대가 귀족과 남성지배체계의 시대였기에 주어진 운명과 절망적으로 대치하다가 부실(不實)의 꽃으로 아름답고 슬프게 지고 말았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것이다.

 

 엠마 해밀턴을 연구한 역사학자 제이슨 M. 켈리는 그의 저서 '유혹과 저명인사 - 엠마 해밀턴 부인의 화려한 삶(Seduction and Celebrity: The Spectacular Life of Emma Hamilton)'에서 "귀족과 남자들의 권위로 가득한 세상이 신분이 천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옭아매었다."고 귀결지었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보다 앞선 1937년에 '영광의 결전(Fire over England)'에서 비비안 리와 공연한 바 있는데, '해밀턴 부인'에서는 다소 주눅든 듯한 연기라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또한 '해밀턴 부인'은 어쩌면 비비안 리의 비극적인 말년과 닿아있는 것 같아 좀 서글픈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끝)

 


▲ 다시 전장으로 떠나가는 넬슨. 이때가 1799년 말이고 새 세기의 1800년 새벽이 밝을 때라 송구영신의 벨이 각각 8번 울리고 배경음악 'Danny Boy'가 흐른다. 그들의 키스는 두 세기에 걸친 꿈같은 이별의 키스였다.
 


▲ 넬슨이 트라팔가르 전투 직전에 깃발신호로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말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Heart of Oak'가 흐른다.
 


▲ 왼쪽이 넬슨 제독의 기함 HMS 빅토리호. 오른쪽은 횡대가 아닌 종대 2열로 연합함대를 공격하는 영국함대. 빅토리호는 영국 포츠머스 왕립해군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 넬슨은 교전 중 프랑스측 총탄에 저격됐으며, 결국 다음의 말을 남기고 절명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를 죽게 한 탄환은 윈저 성에, 그가 당시 입었던 옷은 피탄자국이 선명한 상태로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하디 함장(헨리 윌콜슨)이 '16대를 나포했다'고 하자 '충분치 않다'며 '20대!'를 명령하는 넬슨 제독. 잠시 후 '18대'라고 보고하자 웃음지으며 운명하는 넬슨 제독.



▲ 뜨게질을 하며 넬슨의 안전을 기원하던 엠마에게 하디 함장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자 그의 죽음을 안 그녀는 쓰러진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회상 얘기가 끝나자 메리 스미스가 더 궁금해 물어보자 엠마는 "다음도 없고, 그 후도 없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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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8
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4)

 

■ 넬슨과 엠마 해밀턴 부인과의 염문(계속)

 1800년 윌리엄 경이 나폴리 대사직을 그만 두고 엠마와 넬슨 등과 함께 런던으로 귀향한다. 사실 넬슨은 그의 품행 문제에 실망한 상부로부터 소환 당했다. 그후 엠마는 아예 넬슨과 동거하며 1801년 딸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1801~1881)을 출산한다. 또 1803년에 둘째 딸을 낳았으나 몇 주 뒤 사망했다.

 

 1802년 4월 26일 엠마의 37세 생일을 축하하던 넬슨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노포크 번햄쏠프(Burnham Thorpe, Norfolk)의 교구목사였던 아버지 에드문드 넬슨(Edmund Nelson, 1722~1802)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그런데 해밀턴 경은 누가 봐도 조카의 추문을 덮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나이도 든 만큼 새파랗게 젊은 아내인 엠마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일 30대의 엠마가 40대의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지 싶다.

 

 영화 속에 엠마와 해밀턴 경의 대화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해밀턴 경이 말한다. "아내가 속이는 세 가지 유형의 남편이 있다. 첫째는 천성적으로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 둘째는 몰라서 속임을 당하는 사람, 셋째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내가 셋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엠마가 "네 번째가 있다."며 "까다롭고 속이 비어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사람! 당신이 결혼한 이유는 내가 당신 집의 그림이나 조각처럼 죽은 장식물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자 해밀턴 경이 말한다. "조각이나 그림은 결코 나이 먹지 않고 해군처럼 바다로 나가지도 않으며, 내가 피로하고 외로울 때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다."

 

 넬슨은 1805년 잠시 런던으로 돌아와 엠마와 재회한 후 다시 원정에 나서는데, 엠마는 넬슨이 떠난지 얼마 안 된 10월 19일에 쓴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 속에는 딸 호레이샤 앞으로 쓴 답장편지와 엠마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엠마에게 쓴 편지에서 넬슨은 "엠마 해밀턴이 자기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산을 물려줄 것"과 "입양한 딸 호레이샤 넬슨 톰슨에게 넬슨 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함"을 분명히 했다. 넬슨과 엠마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불륜 관계였으므로 호레이샤를 낳자 나폴리에서 입양한 고아 톰슨으로 등재했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쓰고 이틀 후인 10월 21일,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했으니 이 편지가 유언장이었던 셈이다.

 

■ 넬슨의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와 전사

 한편 1799년 8월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하여 쿠데타에 의해 프랑스 통령정부(統領政府)의 첫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1공화국을 다스리는 동안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고 강력한 관료체제를 구축했으며 잘 훈련된 군대를 육성했다.

 

 그러나 1년 여 뒤에 프랑스에 의한 유럽시장에서의 영국제품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을 선포한 후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때문에 전쟁의 목적이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 회복에서 나폴레옹 타도로 변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영웅교향곡'을 작곡했던 베토벤이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으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註: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eon)'은 자크 루이 다비드(Jeaques-Louis David, 1748~1825)가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유화로 제작한 유명한 그림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이후 '나폴레옹 전쟁'은 격화되었고, 나폴레옹이 완전히 실각하여 남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1815년까지 1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註: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49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만 51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에 안치되어 있다.]

 

 1805년 12월 오스트리아-러시아 제국 연합군은 나폴레옹과의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대패한 반면, 영국의 넬슨 제독은 같은 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해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원천적으로 무산시켰다.

 그러나 넬슨은 교전 중 프랑스측 총탄에 저격됐으며, 피격 후에도 4시간 동안이나 지휘를 계속했지만 결국 다음의 말을 남기고 47세에 절명(絶命)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로는 전사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장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넬슨의 경우 유언에 따라 수장하지 않고 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브랜디에 몰약과 장뇌를 넣어 그의 기함 빅토리(Victory) 호에 실려 일단 가까운 지브롤터(Gibraltar)로 옮겨졌고, 거기서 속을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5주만에 영국에 도착하여, 12월 23일 '그리니치 수병을 위한 왕립병원(Royal Hospital for Seamen at Greenwich)' 즉, 지금의 '구 왕립해군대학(Old Royal Naval College)'으로 운구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 넬슨이 인사도 없이 함선으로 돌아간 걸로 알았던 엠마에게 그가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는 어머니 카도건 부인(새라 올굿).

 

▲ 발코니에서 만나 키스하는 넬슨과 엠마. 그리고 함선으로 돌아가는 넬슨과 이별을 나눈다. 상부에서는 넬슨을 그녀와 떨어뜨려놓기 위하여 바다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하기 위해 발코니로 나가기 전에 엠마를 쳐다보는 넬슨. 왼쪽에 그의 부친 에드문드 넬슨(할리웰 홉스)과 본부인 프란시스 넬슨 부인(글래디스 쿠퍼)이 있다.

 

▲ 영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넬슨을 바라보는 두 여인. 왼쪽 하디 대위(헨리 윌콕슨)와 함께 감격과 존경심으로 경청하는 엠마 해밀턴 부인(비비안 리)과 대조적으로 질투와 경멸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넬슨 부인(글래디스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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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
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3)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계속)

 엠마는 곧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그레빌의 말만 믿고 1785년 떠밀리다시피 어머니와 함께 여행자로써 나폴리로 왔지만 결국 그녀의 '구세주'였던 그레빌의 배신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점차 윌리엄 경의 사치스런 환경과 매력적인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간다.

 

 한편 윌리엄 경은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그녀에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역사, 그림, 무용, 노래 등을 가르치며 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 이유 등을 설명해주면서 엠마에게 자상하게 대했고 엠마는 윌리엄 경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반면 윌리엄 경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귀족 명사들이 참석하는 만찬이나 이벤트에 엠마가 등장하여 노래부르고 춤추며 손님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접대하는 모습에 만족한다. 더욱이 조각이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엠마가 활인화(活人畵, tableaux vivants)하는, 이른바 '엠마의 자태(Emma's Attitudes)'에 매료된다.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 윌리엄 경은 영국 국왕의 허락을 받고 1791년 9월 6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당시 26세인 엠마는 60살의 해밀턴 경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합법적인 '엠마 해밀턴 부인(Emma, Lady Hamilton)'이 된 것이다.

 

■ 넬슨의 '나일 해전' 승리와 엠마와의 운명적 만남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정치 권력이 절대 왕정에서 시민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대혁명이었다.

 

 이후 혁명을 지키려는 프랑스가 절대왕정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의 회복을 갈구하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하게 됐고,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에 대해서도 1793년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1798년 7월 25일 이집트 카이로를 정복한 지 불과 1주일 후인 8월1일에 영국 호레이쇼 넬슨 제독(Admiral Horatio Nelson, 1758~1805)이 이끄는 지중해 함대가 아부키르 만(Aboukir Bay)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섬멸하여 프랑스군의 보급과 퇴로를 끊고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1798년 9월 22일, '나일 해전(Battle of the Nile)'에서 승리한 살아있는 전설 넬슨 제독이 18살의 의붓아들 조사이아 니스베트(Josiah Nisbet, 1780~1830)와 함께 나폴리를 방문한다. 조사이아는 1787년 3월 11일 넬슨이 결혼한 프란시스 '패니' 니스베트(Frances 'Fanny' Nisbet, 1758~1831)의 전 남편 소생으로 넬슨 함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는 넬슨을 존경하여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엠마와 해밀턴 경은 넬슨을 그들의 저택이 있는 팔라조 세싸(Palazzo Sessa)로 영접한다.

 

 마침 9월 29일이 넬슨의 40세 생일이라 무려 1,800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던 중 넬슨이 쓰러진다. 당시 넬슨은 오른팔이 없고 치아도 거의 빠진 데다 기침으로 고생하고 극도의 피로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넬슨을 그녀의 침실로 데려가 9일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 넬슨과 엠마 해밀턴 부인의 염문

 이후 엠마는 공공연한 넬슨의 비서이자 통역관 및 정치적 중개자가 된다. 신사(Gentry)들의 정부로 그들이 열던 파티의 쇼걸이었던 하층민 출신 엠마가 귀족에다 유럽의 명사·예술가로 변신하여 영국 전사(戰史)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의 정부가 된 유부녀와 유부남의 스캔들은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당시 세기의 가십의 정점에 섰다.

 

 그런데 이즈음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나폴리에도 불어닥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를 비롯한 왕당파 귀족들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로 피신한다. 해밀턴 경과 엠마 그리고 넬슨도 함께 갔다. [註: 카롤리나 왕비는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13번째 딸이자,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시집갔다가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친언니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1765~179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계몽주의 절대왕정의 3대 계몽군주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요제프 2세(Joseph II, 1741~1790)이다.]

 

 1799년 7월, 이때 왕비와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엠마가 아일랜드 반란으로 정신 없던 영국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넬슨과 카롤리나 왕비 사이의 중개역할을 했다. 그 결과 넬슨이 러시아 해군제독 우샤코프(Fyodor Ushakov, 1745~1817)와 함께 나폴리 탈환에 참여, 반왕당파 반란을 진압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함으로써 나폴리 왕으로부터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e)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6월 30일에 혁명을 주장하는 공화파인 나폴리 제독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Francesco Caracciolo, 1752~1799)를 군사재판에서 반대파의 일방적인 모함에 의해 변론의 기회도 주지않고 처형하는 정치적인 오점을 남겼다.

 

 카롤리나는 원래 내약돼 있던 언니 요제파가 갑자기 천연두로 죽는 바람에 대신 1768년 16살에 나폴리로 시집가서 총 17명의 자녀를 낳았고(이 중 8명만 생존), 무능한 남편 페르디난도 1세를 대신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여 친(親)영국-오스트리아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낙후된 나폴리의 내정을 튼튼히 했던 여장부다. 어머니 테레지아를 빼닮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고 1806년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1814년 9월 8일 62세의 나이로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해밀턴 경과 넬슨 제독과의 대화에 끼어들어 남성들의 전유물인 전쟁얘기를 듣고 있는 엠마 해밀턴. 그러나 나폴리 왕비 카롤리나를 접촉한 엠마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다.

 

▲ 나폴리·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1세(루이스 알베르니)와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노르마 드루리). 그들 사이에 17명의 자녀를 낳았다.

 

쓰러진 넬슨 제독(로렌스 올리비에)을 자기 침실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엠마 해밀턴 부인(비비안 리). 이들의 스캔들은 세기의 화제가 되었다.

 

▲ 산 카를로 왕립 극장의 로열박스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좌로부터) 해밀턴 경, 카롤리나 왕비, 페르디난도 1세, 엠마 해밀턴, 넬슨 제독.

 


▲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허술한 선술집에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엠마 해밀턴과 호레이쇼 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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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2)

 

■ 엠마 해밀턴은 누구인가(계속)

 '건강의 신전'에서의 행위는 곧 세련된 상류계층 문화로 자리매김되었다. 엠마는 15살이 되던 1780년 준남작 해리 판쇼 경으로부터 자기의 정부가 돼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이것도 사실은 자기 저택 '업파크(Uppark)'에서 파티를 열 때 식탁 위에 올라가 벌거벗고 춤추는 일이었다.

 

 판쇼 경은 에이미를 그의 정부라고 칭했지만 시쳇말로 '쇼걸(showgirl)'에 다름 아니었고 파티, 술, 사냥 등의 쾌락에 빠져 정작 그녀에게는 무관심했다. [註: 준남작 해리 판쇼 경(Sir Harry Fetherstonhaugh, 1754~1846)은 '얼빠진 플레이보이'로 알려졌으며, 훗날 조지4세 국왕이 된 웨일스 왕자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1825년 9월 12일, 70세가 넘은 나이에 그의 낙농장 하인이었던 21살의 메리 앤 벌록(Mary Ann Bullock, 1804~1874)과 결혼하여 그의 전 재산을 그녀 앞으로 상속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바로 이 Uppark 저택에서 '타임머신(1895)'으로 유명한 H.G.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다.]

 

 그런데 다음해 6월에 16살의 에이미는 판쇼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당시 27세인 판쇼는 '얼빠진 놈팽이'일 뿐 에이미나 그녀의 아이를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에이미는 파티에서 자주 봤던 판쇼의 친구인 찰스 그레빌에게 도움을 청한다.

 

 찰스 그레빌(Charles Francis Greville, 1749~1809)은 명문 프란시스 워윅 백작가의 둘째 아들로 상류사회 사교 때문에 판쇼 경의 파티에 참석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1774~1790년 영국의 하원의원을 역임한 골동품수집가, 원예애호가였고 '멍청하지만 성실하다'는 평을 받았다. [註: 호주산 상록관목 식물이름인 그레빌리아(Grevillea)는 그레빌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또 왕립학회 회원으로서 그가 만든 광석과 귀금속에 관한 목록은 대영박물관에서 구입할 정도였다. 평생을 미혼으로 산 그는 워윅 저택(Warwick Castle)에서 1809년 4월 23일 59세로 사망했다.]

 

 그레빌은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 집에서 키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782년 에이미를 런던 교외에 있는 패딩턴 그린에 조그만 집을 장만하여 자기의 정부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에이미 라이언이란 첫 이름을 버리고 '엠마 하트(Emma Hart)'로 개명시켰다. 아울러 엠마의 어머니 메리 키드도 가정부 겸 보호자로 함께 기거토록 배려하고 그녀의 이름도 '카도건 부인(Mrs. Cadogan)'으로 바꿨다. [註: 패딩턴 그린(Paddington Green)에서 태어난 엠마의 사생아인 엠마 커루(Emma Carew, 1782~1856)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읜 엠마를 키워줬던 그녀의 외할머니가 키웠다. 당시 77세였다. 그후 어머니 엠마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서 가정부로 일하다 1856년 3월 26일 플로렌스에서 73세(또는 74세)로 사망하여 거기에 묻혔다.]

 

 그레빌은 사회생활을 멀리하도록 하고는 엠마 하트와 카도건 부인에게 편지 쓰는 법, 셈하는 법, 상류사회에서의 예의범절과 의상법 등을 가르친다. 얼핏 고마운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유는 접대용 기생을 만들어 고상한 상류사회에서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판쇼와 다를 게 없었다.

 

 그레빌이 초대한 친구들 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조지 롬니가 있었다. 당시 젊고 아름다운 새로운 모델을 찾고 있던 롬니에게 엠마는 완벽한 모델이었고, 롬니는 엠마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이 인기를 끌면서 엠마는 당대 최고의 미녀로 떠오른다. 그러나 모델료는 그레빌이 떼먹었다. [註: 영국 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는 엠마를 모델로 45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엠마가 26살에 윌리엄 해밀턴 경과 결혼하자 이에 실망했는지 이 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를 그리지 않았다. 찰스 그레빌은 그 그림들을 죽을 때까지 그의 저택의 벽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후 1783년 그레빌은 재정적 궁핍을 만회하고자 부유한 상속녀인 18세의 헨리에타 미들턴과의 혼인을 위해, 이미 유명인이 된 엠마와 동거하고 있는 사실이 탄로나기 전에 그녀를 떨쳐버리기로 결심하고, 영국의 나폴리 주재 대사로 일하고 있는 외숙부 윌리엄 해밀턴 경을 설득하였다. 말하자면 사촌이 삼촌과 엠마를 '성적 유희물'로 거래한 것이다.

 

■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

 윌리엄 해밀턴 경(Sir William Hamilton, 1730~1803)은 1758년 1월에 캐서린 바로우(Catherine Barlow, 1738~1782)와 결혼하여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났으나 슬하에 자녀 없이 1782년 8월 캐서린이 44세로 사망하자 당시 52살의 해밀턴 경은 실의와 슬픔에 차 있던 때였다. [註: 해밀턴 경 부부는 음악회를 많이 열었는데 윌리엄은 바이올린, 캐서린은 하프시코드 또는 피아노포르테를 연주했다. 1770년 14살의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이탈리아 여행 중 해밀턴 경에게 소개되었을 때 캐서린이 모차르트를 위해 하프시코드를 연주하자 모차르트는 "드물게 감동적(uncommonly moving)"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해밀턴 경은 영국 외교관으로 골동품수집가, 고고학자이며 화산학자였다. 1764~1800년 나폴리 주재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베수비우스 산과 에트나 산의 화산을 연구한 업적으로 1770년 영국왕립학회가 매년 수여하는 최고과학업적상인 코플리 상(Copley Medal)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구한 골동품들을 영국으로 가져가 팔기도 했으며 그 중 '그리스 꽃병'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그레빌의 배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엠마 하트(비비안 리)를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삶을 설명하며 달래는 윌리엄 해밀턴 경(앨런 모우브레이).
 

▲ 영국 나폴리 대사 윌리엄 해밀턴 경(앨런 모우브레이)의 정실 부인이 된 엠마 해밀턴(비비안 리)



▲ 카도건 부인이 포격 소리에 잠을 깬 엠마와 함께 발코니로 나간다. 멀리 연기를 뿜어내는 베수비우스 산이 보인다.
 


▲ 엠마 해밀턴(비비안 리)과 그의 어머니(새라 올굿)가 지켜보는 가운데 해밀턴 경(앨런 모우브레이)이 망원경으로 포격을 하는 넬슨의 함선을 관찰하고 있다.



▲ 나폴리 해협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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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1
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1)

 

 세기의 미녀 비비안 리(Vivien Leigh, 1913~1967)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 출연한 다음 해에 결혼한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1907~1989)와 함께 공연한 작품이 이번에 소개할 ‘해밀턴 부인’(That Hamilton Woman 또는 Lady Hamilton)이다.

 

 1941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사 배급. 흑백 사극 드라마. 제작·감독은 헝가리 출신 영국인 알렉산더 코르다. 음악감독은 '벤허(1959)'로 잘 알려진 로자 미클로시. 출연 비비안 리, 로렌스 올리비에, 앨런 모우브레이, 글래디스 쿠퍼, 사라 올굿, 헨리 윌콕슨 등. 러닝타임 128분.

 

 내용은 한마디로 역사적 실존인물인 하층민 출신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 1765~1815)의 인생 역정을 그린 것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저명한 영국 대사였던 윌리엄 해밀턴 경과 결혼하여 '해밀턴 부인'이 되었고, 나중에 영국 전사(戰史)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정부(情婦)가 되었기에 작품의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 작품은 모든 점에서 엠마 해밀턴이 환생한 듯한 연기를 보여준 비비안 리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말년의 초라한 엠마의 회상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칼레(Calais)의 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걸어나온 술에 찌든 초라한 여자(비비안 리)가 와인가게에 들러 프랑스어로 와인을 찾는 척하다가 선반에 있는 술 한 병을 슬쩍 챙겨 나온다. 이를 추적하던 경찰이 그녀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려 하자 행인들과 몸싸움이 벌어진다.

 

 결국 경찰을 패주다 감옥에 수감된 여자행인들 중 자신을 영국인 창녀라고 소개하는 메리 스미스(헤더 에인절)가 허스키하고 절망적이며 술에 젖은 듯한 목소리의 그 여자에게 술을 건넨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비로소 자기를 '엠마 해밀턴 부인'이라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듯, 호기심이 발동한 메리 스미스는 "나 한테만 얘기해 주면 절대 그 비밀을 남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부추기며 자기 엄마가 '엠마 해밀턴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메리 스미스에게 거울이 있느냐고 묻는 엠마.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항상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지. 일생에 단 한 번! … 내가 그 전에 알던 그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은 이제 죽었다."며 의심 많고 호기심 많은 메리에게 그녀의 일생에 대해 얘기해준다.

 

 회상 장면은 나폴리 영국 공관에서 시작된다. 런던에 다녀온 집사 가빈(올라프 히튼)이 짐을 내리는데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인 윌리엄 해밀턴 경(앨런 모우브레이)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태도로 잘 포장된 그림 한 점을 직접 해체하여 마침 방문한 프랑스 대사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이 그림이 뒤에서 설명할 영국 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가 그린 '밀짚모자를 쓴 엠마 하트(Emma Hart in a Straw Hat·1782)'이다.

 

 영화는 엠마의 나폴리 생활부터 회상이 시작되므로 단편적인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대신 전체적인 엠마의 생애를 살펴보고 끝마무리 하고자 한다.

 

■ 엠마 해밀턴은 누구인가

 엠마 해밀턴은 영국 체셔 주의 네스 읍 스완 코티지(Swan Cottage)에서 대장장이 아버지 헨리 라이언과 어머니 메리 키드 사이에서 에이미 라이언(Amy Lyon)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생후 2개월만에 사망하자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돈 벌러 나가고 당시 60살의 외할머니 사라 키드에 의해 키워졌다.

 

 에이미는 12살이 되던 1777년부터 외과의사인 호노라투스 리 토머스 박사의 하워든 집에서 하녀로 일하기 시작하여 몇 달 후 코벤트 가든의 드루리 레인 왕립 극장(Theatre Royal Drury Lane)에서 여러 배우들의 하녀로 일한다.

 

 그 중에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1757~1800)도 있었다. 로빈슨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더 유명하여 '영국의 사포(Sappho)'로 불린 배우였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The Winter's Tale)'를 각색한 'Florizel and Perdita(1779)' 연극공연에서 여주인공 페르디타 역을 맡았기 때문에 그후 페르디타는 그녀의 별명이 되었다.

 

 영국 초상화 전문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 '페르디타(1782)'가 잘 알려져 있다. [註: 우리가 어렸을 때 차마다 '오늘도 무사히'라고 쓰고 부적처럼 붙이고 다니던 무릎꿇고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이 바로 레이놀즈가 그린 '어린 사무엘(The Infant Samuel·1776)'이다. 메리 로빈슨은 유부녀로서 웨일스 왕자(Prince of Wales, 나중에 조지 4세 왕이 됨)가 공개적으로 내건 2만 파운드 제의를 받아들여 그의 첫 정부(mistress)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에이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의 자칭 성(性)과학자이며 돌팔이 의사인 제임스 그레이엄(James Graham, 1745~1794)이 런던 한복판에 차려놓은 '건강의 신전'에서 모델로 일한다. 말이 모델이지 실은 고객이 이른바 '천상(天上)의 침대'에 누워, '건강의 여신 헤베(Hebe Vestina)'라는 이름의 늘씬한 모델이 등장해 발가벗고 춤추는 걸 보는 동안 침대로 약한 전기충격을 주어서 누워있던 고객이 쾌락을 얻게 하는 비즈니스였다. (다음 호에 계속)

 

▲ '해밀턴 부인(That Hamilton Woman·1941)' 영화포스터

 

▲ 와인 한 병을 훔쳐나오던 엠마 해밀턴 부인(비비안 리)을 추적하던 경찰이 현행범으로 체포하려하자 행인들과 몸싸움이 벌어진다.

 

▲ 같이 수감된 창녀 메리 스미스(헤더 에인절)가 엠마(비비안 리)를 부추겨 그녀의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

 

▲ 자신의 구세주였던 찰스 그레빌의 배신에 실망한 엠마(비비안 리)를 다독거리는 해밀턴 경(앨런 모우브레이). 가운데 뒷면에 엠마를 그린 그림이 놓여있다.

 

▲ 조지 롬니가 그린 '밀짚모자를 쓴 엠마 하트(Emma Hart in a Straw Hat)' 1782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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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알제리 배경 영화(V)-'망향(望鄕)'(Pepe le Moko)(하)

 

(지난 호에 이어)

 타니아는 카를로스가 자기에게 폭력을 휘둘러 우울할 땐 '시대를 바꾸기 위해' 젊은 날 자신이 무대에서 불렀던 샹송을 듣는다며 페페에게 축음기를 틀어 한 곡을 들려준다.

 

 "어떤 이는 영화에서 본 미국은 멋진 나라라고 말하네. 그 얘기를 듣고 용기가 나서 울적한 어느 날 떠났다네. 많은 사람이 배를 곯은 채 뉴욕에서 달러를 찾아 헤매네. 거지와 추방 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슬픔에 젖은 이민자들. 이들은 파리를 생각하며 말하네. 어디 갔나? 블랑슈 광장의 풍차여, 담배 가게와 길모퉁이 술집이여. 매일이 일요일 같았는데, 친구들은 모두 어디 있나? 무도회는 다 어디 갔나? 아코디온에 맞춰 추던 자바춤. 먹어도 살찌지 않던 맛있던 음식들, 모두 다 어디 갔나?…"

 

 타니아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그때 라르비(마르셀 달리오)가 페페를 찾아와, 피에로가 받은 편지는 어떤 아줌마가 주길래 전혀 의심 안 하고 아이샤에게 전해주었는데, 경찰이 시켜 레지스가 쓴 걸 알았다면 그렇게 안 했을 거라며 자기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경찰의 끄나풀인 건 맞지만 용서해 달라며 인정을 받고 싶단다.

 

 그러면서 카를로스는 므니에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그래서 알레티 호텔로 전해주려던 형님의 편지를 자기가 전해줬는데, 감시가 심해 여자는 오고 싶었지만 빠져 나올 수 없었고 답장을 쓸 수도 없었다며, 대신 내일 아침에 호텔 뒷편 항구쪽 창문을 열어둘 테니 거기로 오라고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에 페페가 카를로스가 지녔던 5천 프랑은 안 챙겼냐고 묻는다. 라르비는 자기는 아니고 루뱅 경찰서장(폴 에스코피에)이 책상서랍 속에 넣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돈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유도심문에 걸린 라르비를 추궁하자 결국 슬리만의 술책임을 자백하고, 그리고 가비는 10시에 파리행 배를 타고 떠날 거란 사실을 실토한다.

 

 이녜스에게 막스(로지 레그리)와 지미를 찾아오라고 명하는 페페. 하지만 이녜스는 격정적인 성격답게 질투에 휩싸여 알레티 호텔로 가서 슬리만 형사에게 페폐가 카스바 밖으로 나갔다고 알려준다.

 

 카스바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갈증을 느끼던 페페는 카스바를 떠나는 순간 경찰에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죽음과도 맞바꿀 만큼 강렬한 가비의 매력에 끌려 제발로 죽음 앞으로 한 발 다가간다.

 

 이미 페페의 마음은 비좁은 카스바의 골목을 벗어나 대양(大洋)으로 향하고 있다. 카스바를 벗어나기만 해도 공기가 다를 듯하다.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페페의 발, 골목, 골목, 골목들, 그리고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인다. 카스바의 계단 끝에 선 페페는 시내를 내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한편 실의에 빠진 가비는 파리행 빌 오랑(Ville d'Oran)호 여객선을 탄다. 이때 뒤쫓아온 이녜스가 고자질한 일을 자책하며 사랑하는 연인 페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도망치라고 종용하지만, 완전히 가비 생각으로 가득찬 페페는 듣지 않는다.

 

 가비의 뒤를 밟은 페페는 출항 직전의 어수선한 배 안을 살피지만 다른 일행들은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가비는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 보던 페페에게 슬리만이 천천히 다가온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다.

 

 페페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갑이 채워진 손목을 바라본다. 이미 카스바에서 절망적이었던 그의 마음은 체포되었다고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가비를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녜스는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페페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부두의 쇠창살 문이 닫힌다. 페페는 슬리만에게 출항하는 배를 보게 해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철문 앞에 선 페페. 저만치 뱃머리 갑판에 나온 가비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페페를 보지 못한다. 카메라는 이런 페페의 마음과도 같이 가비에게 다가간다. 이때 가비 역의 미레유 발랭의 마치 대리석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장면으로 어필된다. [註: 미레유 발랭(Mireille Balin, 1909~1968)은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대스타였으나 남성편력이 많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파리 점령기(1940-1944) 동안 독일 국방군(Wehrmacht) 장교 비를 다이스뵈크(Birl Deissboeck)와 '적과의 동침'을 통해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파리 해방기에 체포돼 감옥생활을 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등 인생의 말로가 비참했다. 한편 나치 SS정보국 수장인 발터 쉘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 1910~1952) 장군과 협력한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Gabriel Coco Chanel, 1883~1971)은 프랑스 및 영국 상류사회 인맥과 깊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윈스턴 처칠 수상의 외교적 중재로 풀려났다. 이왕 할 바엔 거물을 물어야 개고생 안 한다?!]

 

 페페는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가비는 잠시 무슨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끼지만 페페의 목소리는 뱃고동소리에 묻히고 만다. 철창 사이로 점점 멀어져 가는 배… 허무한 이별이다!

 

 이제 페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 품고 있던 칼로 복부를 찔러 자살함으로써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끝내 사랑하는 여인과 주고받던 파리의 아름다운 거리를 거닐지 못하고….

 

 이녜스가 "페페… 잘못했어. 날 용서해줘!"라고 울부짖는 가운데, 가비를 실은 배가 점점 멀어져 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분위기 넘치는 풍부한 비쥬얼과 섬세한 연출, 장 가뱅의 인상적인 연기로 인해 쥘리앙 뒤비비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망향'은 1930년대에 해외에서 가장 성공한 프랑스 영화였으며, 1940년대의 필름 느와르와 네오 리얼리즘의 전조인 '시적(詩的) 리얼리즘'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은 "스릴러물을 시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감동적인 영화"라고 평했으며, 이 작품은 그의 소설 및 캐럴 리드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든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1949)'에 큰 영향을 미쳤다. (끝)

 


▲ 친구 카를로스의 부인이며 전직 가수였던 타니아(프레엘)가 축음기를 틀어 젊은 날 자신이 무대에서 불렀던 샹송 한 곡을 들려주며,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 경찰의 끄나풀인 라르비(마르셀 달리오)는 결국 가비가 10시에 파리행 배로 떠난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 부두 철창문 앞에서 떠나가는 가비의 이름을 외쳐보는 페페.
 


▲ 파리행 배 위에서 부두 쪽을 바라보는 가비(미레유 발랭)는 잠시 무슨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끼지만 뱃고동소리에 묻히고 만다. 마치 대리석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다.
 


▲ 철창 사이로 점점 멀어져 가는 배… 허무한 이별이다! 페페는 품고 있던 칼로 복부를 찔러 자살함으로써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녜스가 "페페… 잘못했어. 날 용서해줘!"라고 울부짖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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