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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화단 전쟁 배경 영화-'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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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이 영화는 무려 1,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반면 흥행은 기대 이하였다. 니콜라스 레이(Nicholas Ray, 1911~1979)는 '자니 기타(1954)' '이유 없는 반항(1955)' '야생의 순수(1960)' '왕중왕(1961)' 등의 대작을 만든 미국 헐리우드의 위대한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유럽평단의 환대를 받았으면서도 정작 미국에서는 별로 대접받지 못했는데 최근에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내친 김에 서태후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마무리를 할까 한다. 1861년부터 1908년까지 아편 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일 전쟁, 양무운동과 무술정변, 의화단 사건 등 격변하는 내우외환을 겪으며, 함풍제 혁저(咸豊帝 奕?, 1831~1861)의 세 번째 황후로 동치제(同治帝, 1856~1874)의 생모이자 광서제(光緖帝, 1871~1908)의 이모로서 47년에 걸쳐 중국의 진정한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던 서태후(西太后)!

 

 청나라는 태조 누르하치부터 제8대 도광제(道光帝, 1782~1850)에 이르기까지 줄곧 가문이 번창했다. 하지만 제9대 함풍 황제가 황위에 오른 후부터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으면서 황실의 혈맥이 갑자기 약해졌다.

 

 서태후는 1835년 만주 귀족 가문인 예흐나라(葉赫耶拉)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서태후는 수려한 외모로 17세에 각종 테스트를 거쳐 최하위 9등급 수녀(秀女)로 뽑혀 원명원(圓明園)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당시 함풍제의 친모(親母) 효전성 황후 뉴호록씨가 서태후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거세겠다면서 6등급 난귀인(蘭貴人)으로 책봉하여 자금성으로 입궁했다.

 

 다음해인 1853년 서태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함풍제를 사로잡아 '승은을 입어' 4등급 의비(懿妃)로 승격했고 드디어 함풍 6년(1856) 3월 대망의 아들 재순(載淳)을 낳으니 이가 곧 뒷날의 제10대 황제 동치제(재위 1861~1874)이다.

 

 처음으로 얻은 아들의 탄생에 함풍제는 크게 기뻐하며 서태후를 의귀비(懿貴妃)로 한 단계 승급하였다. 그러니까 정실인 황후(皇后)와 황귀비(皇貴妃) 다음으로 측실로서의 최고계급까지 올라간 것이다.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이 터지고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오자 함풍제는 황족과 6천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베이징 북동쪽 250km 떨어진 러허(熱河) 여름 별궁으로 몽진하는데 그때 30세의 젊은 황제는 병세가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청 조정은 그의 사후를 대비해 여덟 명의 중신들로 구성된 '섭정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권력을 여덟으로 쪼갠다는 의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서태후는 진노하여 다섯 살 된 아들을 이끌고 죽어가는 황제의 병상을 찾아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리하여 황후인 자안 황태후와 생모인 자희 귀비가 함께 섭정을 하는 조건으로 어린 황제 재순이 대통을 잇게 됐다고 한다. 일설에는 함풍제는 자희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정을 어지럽히면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황후인 자안 황태후(慈安皇太后, 1837~1881)는 함풍제의 정실로 아들을 낳지 못했고 동궁에 거처했기에 동태후(東太后)로 불렸으며 서궁에 거처하던 자희 태후(慈禧太后, 1835.11.29~1908.11.15)가 곧 서태후다.

 

 서태후의 공식 명칭은 청나라 전통에 의해 25자로 대단히 길지만 줄여서 서태후, 또는 자희 태후. 백성들은 '과부 황제', '과부 천자'란 애칭으로 불렀고 서양인들은 '과부 황제 시시(Empress Dowager Cixi)'라 불렀다.

 

 서양인들에 의해 쓰인 서태후란 인물은 환관들과 놀아난 음란하고 성에 탐닉한 권력욕의 화신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중국이란 나라는 희망 없는 하등 국가이자 중국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무식하며 짐승과 다름없는 가엾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에드먼드 백하우스의 '과부 황제하의 중국(1910)', 백하우스와 존 O. P. 블랜드 공저인 '북경 궁정의 연대기와 실록(1914)'과 같은 영국의 제국주의적 역사학자와 런던타임스 기자 조지 모리슨 같은 언론인 그리고 펄 벅의 '대지(大地·1931)'와 같은 문필인들의 저작에 의해 왜곡, 폄하된 결과로 전형적인 백인들의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이러한 100년 가까운 서태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역사에 대한 왜곡과 폄하는 위조, 날조된 것이며 청교도적 위선에 가득 찬 영국인들의 음탕한 호기심에 영합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음이 휴 트레버 로퍼(Hugh Trevor Roper, 1914~2003)란 중국학 학자에 의해 증명되었다.

 

백하우스가 증거로 제시한 서태후에 대한 기록도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백하우스는 영국의 비밀정보원이었으며 서태후를 비하해 영국의 침략을 합리화했던 인물이다. [註: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견해를 인용한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평가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 당시 중국 북양함대를 비롯한 해군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은전 3천만 냥을 쏟아부어 이화원(?和園)을 만들어내 지금 후손들을 먹여살리고 있는 통큰 서태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의 영어교사를 맡았던 레지널드 존스턴 경(Sir Reginald Johnston, 1874~1938)은 그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1934)'에서 "서태후가 청 황실을 망친 여자"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여태후(呂太后) 및 측천무후(則天武后)와 함께 중국의 3대 여걸(또는 악녀)로 불리는 서태후는 하지만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피부 관리와 화장에 무지 신경 썼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자신을 단장할 생각조차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고 늘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서태후가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政事)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긴 것은 아이러니다.

 

 그런데 1900년 8월14일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다음날인 8월15일 서태후는 광서제를 인질로 잡아 허름한 한족 농사꾼 모습으로 변장하고 시안(西安)으로 도피했다. 자금성 탈출 전에 서태후는 광서제가 총애하는 후궁인 진비(珍妃)를 영수궁(寧壽宮)의 바깥에 있는 우물로 끌고 가서 우물에 빠뜨려 죽였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진비정(珍妃井)'이다. 그녀의 나이 21세 때였다.

 

 다음해인 1901년 9월7일 청국 대표 이홍장(李鴻章, 1823.2.15~1901.11.7)과 연합국 대표 사이에 의화단 최종 의정서, 이른바 신축 조약(辛丑條約, 베이징 의정서) 12개조가 조인되었다.

 

배상금 총액 9억8천만 냥을 1940년까지 분납할 것 등 결과적으로 의화단 사건은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던 청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국가의 쇠망을 촉진시키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국토의 반식민지화를 가져온 셈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사건을 빌미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그들의 영향권인 만주 내 철도 보호를 이유로 주둔하게 되어 만주 진출을 노리는 일본과 충돌, 결국에는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게 된다.

 

 광서제는 1908년 11월14일에 독살됐고, 서태후는 제12대 황제 선통제 푸이(宣統帝溥儀)를 서둘러 지명한 뒤 다음날인 11월15일에 사망했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청 제국의 20세기는 참담하고 암울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끝)


▲ 값비싼 목걸이를 팔아 의약품과 음식물 재료 등을 구입하여 마차로 돌아오던 중 의화단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나타샤(에바 가드너)를 해리 상사(존 아일랜드)가 구출하지만 그녀는 끝내 절명한다.


▲ 최후의 결전의 순간! 이때 갑자기 의화단이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1900년 8월14일 새벽, 베이징에서 버틴 지 55일째 되는 날이다.


▲ 8개국 2,200여 명의 연합군이 각국의 행진곡을 울리며 베이징으로 입성하고 있다.


▲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열병식을 거행하는데 아서 로버트슨 경이 "들어보게. 각기 틀린 곡이군" 이에 매트 루이스 소령은 "55일 간은 같은 곡이었소"라고 말한다.


▲ 루이스 소령(찰턴 헤스턴)이 약속대로 고아 테레사(린 슈 문)를 자기 말에 태우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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