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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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28)-인천상륙작전?1.4후퇴?휴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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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4) 1950년 10월 20일(중공군의 참전): 한국군에 의하여 북진통일이 거의 성공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중공군이 개입하였다. UN군과 국군이 북진을 하여 올라 옴에 김일성은 황급히 모택동을 만났다. 


만일에 미군이 북한군을 섬멸하고 나면 여세를 몰아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그리 되면 대만의 장개석 군도 중국본토로 진격을 해 올 가능성이 짙다는 판단 하에, 모택동은 한국땅에서 미군과 싸워 북한을 구제하고 공산당의 보루를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당시 중국의 공산군은 장개석 군과의 오랜 내전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국민들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어서 한국전 참전에 희망하는 의용군이 많았다(기록에 의하면 약 53만 명이라고 하였다).


또 소련은 중공군에게 많은 무기를 제공하였다. 중공군은 UN군의 화력과 공습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밤이면 이동을 하였고, 일면 한 밤중이면 산속으로 넘어와 꽹과리와 징을 울리며 우리 아군을 현혹하였다. 앞에서 쓰러진 자기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어 오고 또 넘어 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우리 아군의 숫자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5) 12월 4일(평양에서 철수): 우리 아군은 평양을 내주었고, 12월 9일에는 원산을 떠났다. 


(6) 12월14~24(흥남부두 철수):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아군 10만 명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피란민 10만 명과 더불어 20만 명을 흥남부두에서 해상철수작전을 해야 했다. 이 해상 피란작전을 위하여 중공군의 남하작전을 지연시키고 있던 부전고원 지대의 7,000여명 UN군은 중공군의 공격과 극한의 추위로 인해 거의 전멸을 당하였다. 


흥남 철수 작전은 약 70만의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이 철수작전에는 약 200여 척의 민-군 선박이 동원되었다. 흥남에 쌓아 놓았던 폭약을 모두 폭파하였고, 군함에 실었던 트럭과 장갑차 등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약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제한 일은 길이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당시 흥남부두에 남아 아비규환을 하던 피란민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이 때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들도 이 군함을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 피란작전을 총지휘한 메러디스 빜토리아호 선장 ‘레너드 라우’ 대령과 통역사로 일하던 현봉학 박사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이 피란작전 중에 선박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의 이름을 Kimchi #1, Kimchi #2 …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7) 1951년 1월 4일(1.4후퇴) : 중공군에게 밀린 아군은 1월 4일에 다시금 서울을 내주어야 했고,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전세를 재정비한 아군은 반격을 가하여 1월 14일에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러한 극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중공군은 10만 여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38선 부근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머뭇거림으로 쌍방간의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치열하던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정전을 해야 한다는 설이 퍼졌다. 


 (8)1951년 2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은 북한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기에 북진만이 남아있다고 강력히 선언하며 미국에도 자기의 뜻을 재차 강조하였다. 


(9)1951년 3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는 정전불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38선을 넘어 일진일퇴를 하던 전선에 소련군이 참여하였다. 그렇게 큰 변동이 없이 그 곳에 쌍방이 방어선을 쳤다. 그것이 오늘까지 남아있는 DMZ인 것이다.


(10)1951년 6월 9일(휴전협정회담): 1951년 6월 9일, 이승만은 정전을 결사반대 하였고, 6월 27일에는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하나 7월에 들어 서면서 정전회담이 개시되었다.


(11) 9월 20일(휴전조건) : 이승만은 정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가)중공군 철수, 나)북한무장해제, 다)UN감시하의 총선거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후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당년 5월에 이르러서는 포로교환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합의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2년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 되자, 중공군을 부담스러워 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부분적 참전으로 말미암아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한국전쟁이 머지 않아 세계3차 대전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UN군과 중공군은 서둘러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또 다시 갈라진 대로 정전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함에 UN여러 나라들로부터 인기를 잃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대하여 강력한 폭격과 대응조치를 하지 아니 하는데 대하여 불쾌감을 자아내곤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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