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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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13)-외세의 쇄도와 국정의 혼란(2)
samkang39

  

 (지난 호에 이어)
 1894년 7월 청일 전쟁, 서울에 주둔한 청군을 몰아낸 일본군은 사기 충전하여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벌인 전쟁이다. 


전쟁의 범위는 한반도와 만주, 대만이지만 치열한 전쟁은 주로 양국의 해군 전쟁이었으며, 황해도 일대에서 육군의 전투가 있었다. 일본이 승리를 하자 ‘시모노세끼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또 히로부미 사이에 이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은 중국에게서 생살을 뜯어 먹듯이 엄청남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조선이라는 고기 덩어리를 가운데 놓고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고기 덩어리 값은 엄청났다. 


1. 청나라는 조선으로부터 종주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조선의 완전한 해방을 승인한다.
2. 청은 요동반도, 타이완 섬, 평후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3. 청은 일본에게 배상금 2억량을 지불한다. 조약 발효시점부터 7년 이내에 총 8회에 걸쳐 배상금을 분납하고,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5% 연체이자를 지급한다. (이 돈은 당시 일본 돈으로 환산하여 3억6천만 엔이고, 이는 청나라의 3년치 예산, 일본제국의 4년반치 예산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4. 청의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장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 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등의 자유를 승인한다. 


 하지만 조약체결 6일 후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단합을 하여 일본에게 압력을 가함으로 요동 땅의 점령만큼은 다시 중국에게 반환해 주게 되었다. 이 조약 제1조에서 일본은 “조선의 완전한 해방을 승인한다”라고 하였지만 이는 완전한 거짓 사기였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조선 조정은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이번에는 배일친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대러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민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조정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을미사변이다. 민비 황후의 시체는 궁중의 마당으로 끌고 나와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졌다.


 황후의 시해소식이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대세는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민으로 전락시키는 법적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사회에 알려져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민으로 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부대를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의 세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은밀히 러시아 영사관에 내통하고 스스로의 몸을 의탁하였다.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고종은 여기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였던 순종이 머물면서 친러정권을 수립하고,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를 선언하였다. 


이 때에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환, 혀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체포케 하였다. 갑오경장 때에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국권을 잃어버리는 침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백성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꼭 1년 만에 환궁을 하였다. 


 1897년 2월 대한제국,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하였으나 힘이 없는 사상누각의 국가인지라 모두가 형식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이후 8년간 유지되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드디어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게 된 것이다. 


 1898년 7월 고종의 생명 위협, 안경수가 현역 및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고종의 차(茶)에 독을 타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또한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인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겨우 진압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일본과 러시아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이 인천항을 공격함으로 시작되어 1905년 가을까지 1년 반 동안 계속된 싸움이었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의 남부, 특히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동해 근해였다.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결국 조선조의 멸망으로 귀착되었고,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은 완전히 끝이 났다. 


 항시 부동항을 찾는 것이 러시아의 정책이었기에 전쟁의 거점도 그렇게 움직여 갔다. 만주의 요동반도 남단 여순항은 러시아가 임시 조차하여 사용하는 연중 부동항이었다. 청일전쟁 이후인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러시아의 ‘챠르’ 정부와 일본정부 간의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의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통치안을 역 제안 하였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결렬 후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얻은 엄청남 전쟁배상금으로 많은 병선을 제조하여 러시아와 대결한 것이다. 일본의 승리는 고종황제에게 군사압력을 가하여 1905년에 제1차로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완전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하였고, 드디어 1910년에 한일합병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독도 문제를 한 번 고찰해 보자. 울릉도는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약 130km의 거리에 있고, 독도는 울릉도에서 87km 동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러일전쟁이 동해에서 치열하게 진행될 때에, 러시아의 Vladivostok 함대를 감시하는 동해의 초소가 울릉도와 독도에 해저 통신망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게 독도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에 의해 독도(일본명 죽도)는 1905년 2월 22일에 일본 내각 결정으로 일본 시네마현에 편입된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나날이 기울어져 가니 조선왕조는 한 치 앞을 생각할 기운도 없이 마지막 숨을 거둘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백성은 백성대로, 임금은 임금대로, 모두가 나라의 갈피를 잡을 힘이 빠져 있었다. 이리떼 같이 덤벼들어 살점을 물어 뜯는 일본 세력! 하지만, 설마, 이조 500년의 사직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듬해, 1905년 드디어 조선조는 일본의 손아귀에 목이 잡히는 을사보호조약을 맺어야 했고, 1910년에는 500년 사직을 통째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오호 통재라! 조선 민족의 반만년 역사여! 조선조의 비통함이여!


 설마, 설마의 역사는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고 넘어갔다. 이후 36년의 고초를 겪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신조로 다시 나라를 되찾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설마, 설마’의 고질병은 우리 민족의 체질 속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있다. 이 고질적 사고방식을 고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에 또 다른 전철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을미사변. 1895년 10월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를 명성황후 암살 또는 시해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에는 을미의 변 또는 을미 팔월의 변 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의 작전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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