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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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해설(21)-승리(勝利)와 패전(敗戰)의 지형(地形)
samkang39

 
  

싸움에는 주어진 상황이라는 외부의 변수가 있다. 싸움터의 지형은 어떠한지, 전쟁터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싸우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지, 싸울 때의 온도와 바람은 어떠한지 등의 여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싸움은 외부의 변수가 아군에게 유리할 때에 벌어야 한다. 변수가 불리하면 유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북서풍이 불 때는 동남풍을 기다리고, 적군이 산 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든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내 실력을 자신하고, 적군의 능력을 파악하고, 외부 변수까지 장악을 하면 승리는 거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거침없이 밀어붙여야 한다. 시간을 끌거나 고민을 해서는 안 된다. 싸움이 시작됐는데 생각이 너무 많으면 일을 그르친다. 


손자는 병법에서 지형을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6가지 지형을 장수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승리냐 패전이냐 그 전세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1)통형(通形) - 우군도 갈수 있고, 적군도 갈수 있는 그저 평범한 지형을 말한다. 이런 지형이라면 그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식량을 충분히 조달 받아 싸움 준비를 하고 기다리면 된다. 서로가 장단점이 없는 곳에서의 전투이지만, 백병전이 벌어질 경우를 예상하면, 해를 등지고 있는 쪽이 다소 유리하다.


(2)괘형(?形) - 가기는 쉬운데 되돌아 오기는 어려운 곳이다. 이런 지형에서는 적군의 대비가 없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적군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공격한다면, 패하는 것은 물론 살아서 돌아오기조차 어려운 곳이다. 


이러한 지형은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과 비슷하다. 삼태기에 맛있는 미끼를 담아 좁은 틈새로 미꾸라지가 쑤시고 들어오게 한다. 하지만 나오는 구멍은 아주 좁고 찾아내기도 쉽지 않아서 다시 되돌아 나오기 어렵다. 이런 곳에서는 적군에게 사살을 당하던지 포로가 되기 쉽다. 


(3)지형(支形) - 이러한 곳은 마치 나무 가지에 걸려 있듯이 아군도 적군도 도움이 안 되는 곳이다. 애써서 균형을 잡으려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적군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이런 곳에서는 적군의 허점이 보이더라도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군의 허점도 적군이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철수를 했다가 적군의 모습이 반쯤 드러났을 때에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4)애형(隘形) - 좁고 막힌 골목길이다. 한 마디로 병목이다. 목적지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지만 길이 아주 좁고 험난하여 혼자서 가든 100명이 지나든 그 곳을 통과하려면 한 사람씩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길 양쪽에 적군이 숨어서 한 명씩 지나는 사람을 사살한다면 그 숫자가 얼마이던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아군이 먼저 이러한 곳을 점령했다면 적군이 오기를 기다리면 되지만, 적군이 먼저 이곳을 점령했다면 아예 멀찍이 물러서야 한다. 


(5)험형(險形) - 산세와 강물이 아주 험한 곳이다. 사람이 손을 댈 수가 없는 사방이 요새로 되어있는 땅이다. 사방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자연 성벽을 이루고, 발 밑으로는 험상궂은 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이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오녀산성’이나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마사다(Masada)’같은 천혜의 요새를 말한다. 이러한 지형을 아군이 먼저 점령을 했다면 양지 바른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적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적군이 먼저 점령을 했다면 깨끗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 임진왜란 때의 한 이야기가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에 왜군 함선 700여 척이 나타났다는 봉화가 올랐다. 다급해진 선조는 신립 장군을 내세워 충청도에 방어선을 칠 것을 명하였다. 신립 장군은 험형(險形)이자 隘形(애형)인 천혜의 요새 조령(鳥嶺)을 버리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 적군은 보병이고 아군은 기마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신립은 과거 함경도 온성부사 시절 10여명의 기병만으로 여진족을 물리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십년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서 기병대와 조총(鳥銃)의 대결은 기병대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탄금대는 강물을 끼고 있어 물이 맑고 수초로 뒤덮여 사람과 말 모두 내리기에 불편했다. 


신립은 자신 있게 기병전을 벌여 왜군을 쳐부술 것으로 기대를 했었지만 탄금대는 아예 기병전을 할 수가 없는 땅이었다. 조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벌떼 같이 몰려 오는 왜병에게 신립 장군의 부대는 전멸하였다. 


훗날, 정약용의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에서 신립의 무모함을 지적한 글귀가 생각난다. 신립을 일으켜 얘기나 좀 해봤으면(欲起申砬與論事 욕기신립여론사),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 들였는가(啓門納寇奚爲哉 계문납구해위재), 대장기 휘둘러 물을 가리키며 물로 뛰어 들었으니(麾旗指水入水去 휘기지수입수거), 목숨 바쳐 싸운 군사들만 가련하구나(萬夫用命兩可哀 만부용명량가애).
상황이 다르면 행동도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신립은, 자신은 물론 많은 병사들을 무모하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다. 


(6)원형(遠形) - 이는 아군과 적군이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상황을 말한다. 양방간에 전력이 비슷하다면 싸우기가 쉽지 않다. 싸워봤자 소득이 별로 없다. 싸우려면 힘들게 멀리 가야 한다. 가다가 힘에 지치면 아니 간만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싸움은 미리 자리잡고 기다리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화가 나더라도 참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다. 


1.4 후퇴 당시 장진호 전투가 생각난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겨울, 미 해병 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 하려다가, 오히려 장진호 근처 산속에 숨어있던 중공군 9병단(7개 사단급 12만 명)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를 맞이하였는데 구사일생으로 후퇴작전에 성공한 아주 비극적인 전투였다. 


미국의 News Week 지는,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미 해병 1사단 외에 미 육군 7사단 병력도 일부 함께하였다. 중공군 12만 명 : 미군 1만 2천명, 즉 10:1의 전투였다.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함으로 흥남부두의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한 것이 장진호 전투였다.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피란민 10만 명을 철수시킨 작전이었지만, 장진호 전투에서는 피차간에 희생이 너무 컸다. 미군 전사 및 실종자는 2719명, 부상자는 5000명 이었다. 중공군 전사자는 2만5천명, 부상자는 1만2500명이다. 전투기간은 1950년 11웕 26일부터 12월 3일까지 8일간이었다.


실로 이 때에 해병 1사단이 주로 희생되었지만, 후에 투입된 육군 7사단 병력의 희생은 실전에 의한 희생보다는 마이너스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동상을 입은 탓이었다. 


지금 미국 워싱턴주 씨애틀 주의회 의사당 동편에 가보면 이 장진호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있다. 한국인 신호범 상원의원의 제안에 의해 세워졌다. 이 공원에 가보니 동상(凍傷)으로 죽어가던 병사들의 비참한 모습이 동상(銅像)으로 세워져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희생당한 그 동상 앞에 쓰인 글을 읽자니 가슴이 미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개마고원 장진호 얼음판 위에서 청춘을 불살라야 했던가? 우리 민족은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복을 빌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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