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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leed2017

 

 암행어사가 없는 시대에 암행어사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암행어사를 영화로 처음 본 것은 중학교때 였습니다.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단체로 보는 영화 ‘춘향전’이었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연배우 조미령에 반해서 그녀 때문에 고민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암행어사는 이 11살의 소년에게 참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자 잔치판은 순간에 난장판이 되고 그 당당하게 보이던 변사또가 겁먹은 얼굴로 벌벌 떨던 장면이 어슴프레 생각납니다.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던 이몽룡은 “나도 커서 저런 사람이 되어 봤으면”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커서 성인이 되고 보니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던 이몽룡도 30대의 애송이였으니 인간이 좀 덜된 용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향이는 지금 옥에서 칼을 쓰고 갖혀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제가 출세했다는 것 한 번 보여주려고 장모를 찾아가서 거지 행세를 하고 옥중에 있는 춘향이에게 온갖 너스레를 떨었지 않았습니까.

 춘향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옥에서 칼을 쓰고 있는 춘향이의 고통을 단 1초라도 빨리 줄여줘야지요. 이튿날까지 기다려서 한바탕 연극을 꾸미려는 녀석이 어찌 춘향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대단히 용렬한 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부터 지방에 파견되기 시작한 암행어사 제도는 ‘내가 암행어사요’ 하고 신분을 알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임금의 명을 받아 몰래 지방에 가서 부패한 관리들을 다스리는 특정 관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는 임명장과 임무를 적은 책, 그리고 역마를 증발하는 증명용 표지, 그리고 마패를 줍니다. 지름 10cm  정도 크기의 마패에는 말을 그려놓고 년 월 일을 새겨 넣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세종 때부터는 위조를 방지하고 부서짐을 막기 위해서 재료를 철재로 바꾸었습니다.

 마패는 1~5마리의 말이 그려진 다섯 종류가 있었는데 2마리의 말이 그려진 것이 보통 암행어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암행어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진짜 신분을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와서는 암행어사들 자신이 부패한 관리들이 많아서 은근히 자기가 암행어사라는 것을 알리고 다니면서 뇌물을 받고 성(性)대접까지 받는 암행어사들이 많았습니다. 도둑이 도둑을 잡는다는 것과 아무 것도 다른게 없지요.

 나는 암행어사 하면 의례 박문수를 떠올립니다. 박문수는 소론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지적하고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박문수는 특히 군세()와 세금정책에 밝았습니다.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로 통한 이유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 있는 듯합니다.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으며 암행어사로 활약할 때는 엄정하고 공평한 일 처리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탐관오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그의 처사에 감격했음은 물론이지요.

 나는 얼마 전에 박래겸이라는 선비가 125일간 평안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기록한 ‘서수일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서수일기’에 적혀있는 기록은 다른 어느 기록보다도 생생한 암행어사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일기와 날씨, 경유한 장소, 명승지에 관한 감상, 해당 고을 수령의 성명 등 뿐만 아니라 다니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던 기녀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에는 암행어사의 신분이 노출될까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 지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1822년 순조때 4월 평안도 지방을 돌던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울지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는게 아닙니까? 박래겸은 넌지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아기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줄 안단 말이요?” “말도 마시요.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동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이 벌벌 떨고 있다고… 암행어사가 평생 돌아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오. 우리는 그 덕택으로 살게되지 아니겠소.”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은 ‘국민여론수렴’의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박래겸이 만나본 18세기 조선 백성들의 삶은 무척 고달팠고 가난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고 구걸하는 나그네들이 많았다. 빈민구제책을 집행하는 정사가 너무 지나치게 추려내는 통에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호소할 길도 없다.”

 박래겸이 강서군에서의 일화가 가슴을 때리지요.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은 백성들의 서러운 사정이 담겨 있습니다.

“곡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받은 쌀의 빛깔이 나쁘다’며 ‘수령에게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근자에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당신들이 이렇게 장난을 치는가. 질이 나쁜 곡식을 주고 하소연 할 길마저 막히니 백성들은 어떻게 살라고 하는가?’ 그러나 아전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도리어 호통만 쳤다. ‘어찌 시끄럽게 구는가’ 그러자 백성들은 아무말도 못한 채 흩어졌다.”

 어사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다닌 것이 19대 임금 숙종 때였고 박래겸이 다니던 때의 임금은 23대 순조 때였으니 두 임금 사이에 100년 세월이 넘어 흘러갔겠지만 백성들의 삶에는 눈꼽만치의 변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암행어사들이 묘사한 조선의 풍경은 삶에 허덕이는 신음소리로 가득합니다. 이들은 천천히 망해가는 조선의 꼴을 솔직하게 묘사해냈습니다. (20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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