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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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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유배(流配)

 

 유배(流配)란 귀양살이의 다른 말이다. 김민선이 쓴 귀양에 관한 책 '유배'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모두 408곳. 이 중 경상도가 81곳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는 74곳, 충청도는 70곳이다. 한편 유배 횟수는 전라도가 915회로 가장 많고 경상도는 670회, 충청도는 320회라고 적혀 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로 유배를 간 사람들을 모두 합하면 1,900명이나 된다니 엄청나게 많은 숫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왕조 519년 동안 이루어진 귀양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백사(白沙) 이항복처럼 남쪽이 아니라 함경도나 평안도 북쪽 지방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숫자는 더 불어날 것이다. 유배 형벌이 가장 많던 때는 사화(士禍)가 시작된 연산군의 조선 중기와 당파싸움이 그 절정에 이르던 숙종, 영조 때의 조선 후기임을 생각하면 꽤 많은 숫자로 봐야 할 것이다. 김민선은 조선의 고등 관리 넷 중 하나는 유배를 간 적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유배에 관한 책 두 권, 김민선의 '유배'와 이중묵의 '절해고도…'를 보면 유배길에 오른 사람들은 사족(士族) 신분의 선비, 아니면 당대의 석학, 고등 관리, 왕족들이 대부분이다. 사화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안부편지 한 번 보냈다가 역모죄에 걸려든 사람도 있다. 철저한 연좌법(連坐法)으로 아무런 혐의가 없는데도 유배형에 처해졌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고 천추의 원(怨)과 한(恨)을 품은 채 유배지로 끌려간 사람이 많다.


 “내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恨)은 정녕 줄지 않으리…/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굳어지리라(我死骨爲灰…彌久而彌强)”


 자기 남편이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먼저 목을 매달아 자결한 부인을 애도하는 이광사의 절규다. 당시 사람을 얽어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모 혐의를 덮어씌우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빨갱이', '좌파' 혹은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유배객들 중에는 땅이 꺼질 듯한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으로 삶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사람들도 있고 사흘 동안 낮과 밤을 울어도 사그라지지 않을 원한, 쌓인 울분을 토하는 슬픈 시(詩)를 남기고 죽은 유배객들도 많다.


 한편 유배 환경을 슬픔과 탄식으로만 끝내지 않고 하나의 기회로 삼아 학문이나 예술에 열중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며 수십 권의 저서를 낸 다산(茶山) 정약용과 흑산도에서 15년 귀양살이를 하며 물고기의 생태를 조사하여 '현산어보(玆山魚譜)'('자산어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라는 책을 쓴 그의 형 정약전, 서예가요 금석학의 대가 추사(秋史)김정희, 신지도에서 15년 귀양살이를 하며 동국진체라는 서법(書法)을 완성했으나 뭍에는 발을 내려놓아 보지 못하고 죽은 조선의 명필 원교(員矯) 이광사를 꼽을 수 있다.


 유배에는 얼마나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는지 정해진 기간이 없다. 어제 귀양을 왔는데 오늘 해금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10년, 20년 한곳에 유배를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임금님 마음 하나에 달린 것. 언제 풀려나는지가 전적으로 임금한테 달린 상황이니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나 글을 써서 임금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의 대표적인 유배객으로는 송강(松江) 정철을 꼽는다. 어떤 현대 문인 중에는 그를 아첨문학의 대가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재정적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유배동안 비교적 편안한 유배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예로 정다산은 주머니 든든한 외가(고산 윤선도의 해남 윤씨 종가) 덕분에 비교적 여유있고 자유스런 유배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시로 억울함을 토하고, 시로 한을 풀고, 시로 육지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했다. 유배자들의 꿈은 대부분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누리는 자유에 대한 공상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유배길에 보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을 꿈꾸기보다는 어릴 때 뛰놀던 동산과 들판을 그리워하고 유배에서 풀려나면 강 언덕에 정자를 짓고 시 읊고 글 쓰는 한적한 자유생활을 꿈꿨을 것이다.


 인조반정이 성공으로 끝나고 15대 임금 광해군은 강화도에 구금되었다가 나중에 제주도로 보내져서 거기서 죽었다. 세자 이지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가 살았을 때 교동에서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 녹수청산 마음대로 오갈까 (緣何脫此樊寵去 / 綠水靑山任去來)"라고 부르짖는 세자에게 고향은 하나의 피난처요 살겠다는 몸부림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012. 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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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는 고려의 명망있는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왕건이 474년 전에 개국한 고려는 임금이 34번 바뀌면서 썩을대로 썩어서 바야흐로 온 나라에 망국의 먹구름이 짙게 깔려있을 때였다. 무장으로서 싸움터에서 떨친 개인적 인기와 정도전, 조준 같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분을 맺은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울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것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어떤 길이 가장 빠른 길일까? 이성계의 참모 정도전과 조준들이 내놓은 답은 ‘토지개혁’ 네 글자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백성들 대부분은 농사를 지을 땅이 없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극소수의 권문세가들이 거대한 농토를 차지하고, 살아갈 방책이 없는 백성들은 소작인 아니면 노예가 되어 일년 내내 허리가 휘도록 일해 봤자 처자식 먹여살리기조차 힘들었다.


오늘처럼 농사 이외에 금융제도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농사가 경제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 나라 경제는 엘리트 권문세가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 불만을 기회로 이용한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의 참모들이 건의한 토지개혁을 부르짖고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색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의 토지 해결책은 주인이 둘, 셋이나 되는 중복된 땅을 지주들이 합리적으로 재분배하자는 것이고 정도전을 중심한 개혁안은 일단 모든 토지를 국가가 몰수해서 공전(公田)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자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1391년 이성계는 공양왕으로 하여금 과전법(科田法)을 공포케 하였다. 과전이란 국가에서 관리들에게 주는 토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收租權), 즉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받을 권리를 준 것이다.


 이 토지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함으로써 이성계는 백성들의 찬사와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이성계만큼 백성을 생각해주는 사람을 없다는 게 백성들의 생각이었다. 곧 토지개혁에 반대했던 위화도 회군의 동지 조민수와 문신 이색 등은 쉽사리 제거되고 세상은 바야흐로 이성계 일당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니 애당초 이성계의 조선 개국은 땅, 즉 토지를 두고 신흥세력과 기득권 세력이 서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로 시작된 것이다.


 이성계를 위시한 정도전, 조준 등이 토지개혁을 부르짖던 그 땅은 60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땅 위에서 일어난 것은 이성계는 꿈에도 상상 못할 놀라운 것들이다. 우선 고층 아파트와 콘도미니엄, 상가가 들어서고, 콩, 보리, 감자를 심던 그 땅에는 고속도로와 기찻길이 나고 그 위로 자동차와 기차가 달린다.

각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상점과 돈을 관리하는 은행들이 들어섰다. 이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부자(富者)의 척도가 아니고 돈 되는 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부자의 척도란 말이다. 요컨대 돈이다.


 땅을 갈아 농사를 지어 온식구들이 먹고 살던 생활방식은 오늘날까지 우리 문화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늘 우리의 집단주의(collectivism)문화도 이 농사를 짓던 생활양식 때문에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땅에 대한 애착과 집착은 남다르다. 땅도 그냥 땅이 아니요 '정든 땅'이다. 정든 땅, 정든 산천, 정든 사람들을 작별하고 살 길 찾아 딴데로 가는 것은 가엾고 슬픈 일이다.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 하는 대중가요를 부를 때 얼굴표정들을 보라. 농사를 지으며 거의 평생을 두고 아침저녁 얼굴을 맞대고 살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눈물이 앞서는 설움. 이런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정(情)을 그리워하고 정에 매달린다.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할 당시 거대한, 실로 거대한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농장(農莊)주라 했다. 오늘 이 농장주에 가장 가까운 시쳇말은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재벌이란 말이지 싶다. 재벌은 현금과 기타 부동산을 억수로 갖고있는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1%도 안 되는 극소수가 절반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거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농장주와 재벌은 같다. 그러나 재산 형성 과정이 서로 다르다. 옛날 농장주는 백성을 착취해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모은 토지이지만 오늘날의 재벌은 대부분 경영의 미를 살려 합법적으로 모은 재산이다. 비합법적으로 모은 돈도 억수로 많은 돈을 모았을 때는 합법적으로 모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그 재벌 밑에 우글거린다. 참으로 희한한 사바세계. 게다가 현대의 재벌은 시민들을 착취하기 보다는 먹여 살린다. 경제를 일으킨 사람이 저지른 5.16 쿠데타를 구국혁명이라고 하는 사회니 먹고 살게만 해주고 나라경제만 일으켜 준다면 독재고 살인이고 뭣이 문제랴.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마다 농장주에서 오늘날의 재벌로 이어오는 부(富)의 전통을 고쳐놓겠다고 야단들이다. 자신도 재벌이면서.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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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3
징비록(懲毖錄)

 

 <징비록>이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사 좌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와서 일선에서 전투도 지휘하고 온갖 전쟁이 주는 화(禍)를 몸소 겪은 서애(西厓) 류성룡이 한문으로 쓴 회고기다. <징비록>의 징(懲)은 징계할 징, 비(毖)는 삼갈 비이니 징비(懲毖)는 "나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간다(子其懲而毖後患)"는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내가 <징비록>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책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교 국사시간을 통해서다.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징비록-류성룡, 동사강목-안정복, 어우야담-유몽인, 흠흠신서-정약용, 반계수록-유형원 등 책 이름과 저자의 이름을 연상하는 것이 그 당시 입학을 위한 필수적 지식이었다.(얼마나 외웠으면 아직도 입에 익어서 자연스레 나올까!) 무슨 책인지, 왜 썼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는 수박 같핥기의 지식.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田長政) 등의 이끄는 왜군 15만 명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우리가 말하는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쉰 한 살의 서애는 좌의정으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왜구는 부산성, 동래성을 차례로 집어 삼키고 18일 만인 5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나는 듯이 빨리 서울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이 무방비 상태였다는 말이다.

선조는 황급히 서울을 버리고 칠흙 같은 밤에 사정없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임진강을 건너 피난을 갔다. 이때 왕을 따르는 무리들은 서애를 포함하여 백 명도 채 안되었다고 한다.


 왕이 대궐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고된 노동과 신분적 멸시에 시달렸던 노비들이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창고는 물론, 다른 건물에도 불을 질러 솟아오르는 불길은 하늘이 불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도 왜군이 한강을 건너기도 전에 왕궁이 불타는 것으로 하늘이 붉더라고 적혀 있다.


 서울을 떠나 북으로 도망가는 임금을 보고 밭에서 일하던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하고 화가 난듯 소리치더라는 것이다. <징비록>을 풀어 쓴 박준호 교수에 의하면 이 말은 정말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임금의 행렬을 보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서애 생각이라는 것. 즉 백성들과 합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바쁜 겁보 임금에 대한 서애의 못마땅함을 이 농부를 등장시켜 간접으로 표현했다는 것.


 선조는 피난 중에 좌의정으로 있던 서애를 영의정으로 임명했다가 그날로 다시 해임했다. 하루 만에 승진-파직이 된 서애는 한동안 아무 직책 없이 임금을 호송하였다. 비록 아무 직책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그는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묵묵히 전쟁을 이끌어 갔다. 이같은 서애의 백의종군은 시기와 모함으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하다가 백의종군하여 애국을 행동으로 보여준 충무공 이순신과 같다.


 서애는 <징비록>에서 하느님이 조선을 두 번 도와주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평양을 점령한 왜군이 무슨 일인지 당분간 북상을 하지 않음으로써 명(明)나라의 원군이 올 시간을 번 것이고, 두 번째는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의 수군을 크게 격파시킴으로써 조선 해안지역과 전라도 곡창지대가 온전하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선조 37년 임진왜란에 대한 논공행상을 내릴 때 문신 공신은 86명인데 비해 왜군과 직접 싸운 무신 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86명의 문신 공신 중에는 내시가 24명, 선조의 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6명이나 되었다. 선조는 이순신처럼 목숨을 바쳐 왜구와 싸운 사람보다는 자기 옆에서 시중들어 주고 보살펴 주는 내시가 임진왜란에 더 큰 공을 세운 사람들로 본 것이다.


 이때 서애는 1등 공신에는 못 오르고 겨우 2등 공신에 올랐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다 한다. 공신으로 지명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화공(?工)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영정을 그리지 않고 조용히 그를 돌려보냈다.


 난리가 끝나고 임금 선조는 피난 중에 자기 옆에서 묵묵히 자기를 보좌해 주고 윤두수, 이항복 대신들과 함께 전쟁에 관한 일을 신속, 유능하게 처리해주던 서애가 그리웠다. 왕은 몇 번이나 선물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어 서울에 와서 자기를 보필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서애는 응하지 않고 고향에 있는 옥연정사(玉?精舍)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서애는 청백리(淸白吏)였다. 그가 죽었을 때 장사지낼 돈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이 십시일반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사는 방 2개가 있는 콘도미니엄 서재에는 내가 10여 년 전 서울 강남 어느 화랑에 들렸다가 사들고 온 하외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를 그린 큰 판화가 하나 걸려 있다. 만대루 좌우로는  서애의 시(詩) 두 수가 걸려있는 홍선옹 님의 작품이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하늘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털만 희었네
서러운 눈물 끝없이 두 눈에 흘리며
아스라한 난간 기대어 북극만 바라보네

 

 

 오늘 나는 <징비록>을 읽었다기보다는 서애 류성룡이란 사람을 만나 술 마시며 웃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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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문화의 상대주의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으나 '문화의 모자이크(mosaic)'니 '문화의 용광로(melting pot)'니 하는 말들이 나돌던 생각이 난다. 아마 내가 유학을 오고 나서 곧 이민이 시작될 무렵이었지 싶다. 이런 말들의 요점은 지금까지 다른 문화권에 살던 사람이 캐나다나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그들이 살고 있던 사회의 문화를 그대로 지키면서 캐나다 문화에 모자이크 조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용광로처럼 미국이나 캐나다 주류문화에 흡입 용해될 것인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의 상대주의'란 말이 있다. 즉 어떤 문화든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구성원들은 자기 문화가 자기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문화를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둘로 나누었을 때 동양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동양문화가 제일 합당한 것으로, 서양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서양문화를 가장 합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제 눈에 안경이란 말'. 그러니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에서는 야만, 미개발, 원시적이니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현대문명을 모르고 수천 년 전에 살던 방식 그대로 아마존 밀림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들로서는 가장 합당한 문화로 생각하는 사조(思潮). 그러니 문화의 보편주의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니스벳(R. Nisbett) 교수가 쓴 <생각의 지도(The Geography of Thought)>라는 책에 의하면 의학이 발달해 온 것을 보면 문화의 상대적 의미가 잘 나타난다. 서양의학은 수 천 년을 내려온 서양문화의 분석적 사고라는 전통을 기반으로 병(病)든 신체부위를 찾아내서 그 부분을 떼어내서 치료를 하며 발달한 의술이다. 그래서 몸을 각 부위별로 떼어내어 들여다보는 해부학은 고대 희랍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오랜 전통.

 이에 비해 종합적 사고를 중시하는 동양문화에서는 병(病)이란 사람 몸 안에 있는 여러 기관들의 상호 균형 유지를 못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각 기관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곧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문화에서는 신체의 전반적 기능을 활발하게 해주는 보약(補藥) 개념은 있어도 사람의 신체 부위를 떼어내서 들여다보는 해부학(解剖學) 개념은 거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는 작은 일도 알고 보면 그 사회의 핵심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때가 있다. 예로, 니스벳의 연구를 따르면 미국은 일본보다 몇 십 배 더 변호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미국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 간에 갈등이 있으면 법정에서 재판으로 해결되지만 한국 같이 구성원 간에 조화를 중요시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법적 대응보다는 타협과 양보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갈등 해소 방식이다.

 서양에서는 정의의 실현이 구성원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이상임과 동시에 선과 악은 구별되어야 하며, 어떤 갈등에서나 이긴 자와 진 자가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겨도 진 것이요 져도 이긴 것이라는 논리적으로 혼란스런 결과도 받아들이는 사회.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는 이긴 자와 진 자를 가리기 보다는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동서문화를 비교할 때 궁금한 생각이 드는 점 하나가 있다. 왜 한국 같은 동양문화에서는 대중과는 다른,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들에게 신경과민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사회의 시각도 결국 개인의 권리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시각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양에서 개인은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존재이고, 이 독립적인 개인이 다른 개인과 사회와 사회적 계약을 맺고 그 계약 속에 개인의 권리, 자유, 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문화에서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의 고유한 권리는 별 의미가 없고 다만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의 개인만 확대 존재한다. 집단의 구성원으로 조화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지 개인의 고유한 권리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은 사회 전체의 조화를 방해하는 사람들, 고로 제재(制裁)가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회에 불협화음을 낸 사람,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가던 것을 본 것이 생각이 난다. 나도 모처럼 한국에 나갔다가 종로 2가 길거리에서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다. 내 머리가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색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양과 서양의 두 대조적인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견이 분분하다. 서양문화의 지속적인 우세를 점치는 주장, 문화의 차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 하나의 융합된 문화가 나올 것이라는 주장, 각양각색이다. 물론 각 진영에서는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 내 생각을 말하라면 나는 두 번째 주장, 즉 차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지한다.

 융합된 새 문화가 자리를 잡자면 정치, 사회, 경제 구조 등 모든 사회 체제의 변화가 선행(先行) 되어야 한다. 체제가 바뀌지 않는 문화의 융합이란 지속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지지 이유이다.

내가 죽고 천 년 세월이 흘러 백골이 진토되고 난 그때 쯤이면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나지 않을까? (20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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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중산층(中産層)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간절히 바라는 희망사항 다섯 가지를 가리켜 오복(五福)이라 한다. 적어 보자. 첫째 수(?), 오래 사는 것, 둘째 부(富), 물질적, 금전적 풍요, 셋째 강령(康寧), 신체적, 정신적 건강, 넷째 유호덕(攸好德), 어진 덕을 쌓는 것, 다섯째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 다섯 가지다.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가지만 꼽으라면 수(?)와 부(富)가 되지 싶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부(富) 혹은 금전에 대한 관심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더 크고 치열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어딜 가나 돈 얘기다. 돈, 돈, . 생활 전체가 돈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돈은 사람됨을 말해주는 척도.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유대인의 돈에 대한 금언,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돈 걱정을 하는 것이다. 돈 걱정을 하는 동물은 없다."라는 말이 가장 환영받는 곳이 한국이지 싶다.

 한국에서는 돈을 모으는 방법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태여 정당한 방법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기(詐欺)를 쳐도 좋고, 뇌물을 긁어모아도 좋고, 액수가 클 경우 훔쳐도 좋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뇌물과 사기에 의존하는 것 같다. 예로 수천 억의 돈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긁어모은 죄로 감옥살이까지 한 어느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그 애비의 도움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애쓰던 젊은이가 있었다. 이것을 보면 그 큰 돈을 갈취한 사람 자신은 물론, 그 광경을 방송, 언론을 통하여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것이 나쁜 행동이라고 보질 않는 모양이다.

 하루는 아내가 자기 앞으로 온 전자통신인데 한번 보라고 내미는데 보니 재미있는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세계 각국의 중산층 기준'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 프랑스, 영국, 미국의 중산층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료였다. 인용해 보자.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로 뽑았다는 한국의 중산층은 첫째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보유, 둘째 월급 500만 원 이상, 셋째 자동차 2,000cc 급 중형차 소유, 넷째,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보유, 다섯째, 1년에 한번 정도 해외여행을 가는 것 등이다.

 한편 대통령 퐁피두가 규정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중산층은 첫째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고, 둘째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셋째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고, 넷째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다섯째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제시했다는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좀 색다르다. 첫째 페어플레이(fair play: 공명정대한 행동)를 할 것, 둘째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셋째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 넷째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다섯째 불의, 불법에 저항할 것 등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첫째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둘째, 사회적인 약자를 도우며, 셋째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며, 넷째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잡지나 비평지가 있을 것이다.

 '중산층'이라는 말이 본래 그 나라의 문화나 국민성을 말해주는 것이니 나라마다 기준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느 나라건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가치가 그 나라 중산층의 가치가 아니겠는가. 아내가 보여준 자료에 의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중산층은 미(美)적, 예술적, 문화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물질적, 금전적인 관심뿐이다. 인생이란 물질적, 금전적 풍요를 누리다가 가는 것, 그저 넉넉한 공간에 살며 좋은 자동차를 굴리고 가끔 바닥 밖 바람이나 쐬고 오면 더 바랄게 없는 것. 이렇게 보면 한국의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소련의 스탈린(J. Stalin), 독일의 히틀러(A. Hitler)도 모두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니 좋은 지도자들이다.

 조선 500년 동안 강조되어 오던 유교의 인(仁)과 절제, 검약사상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어느 나라건 공립학교에서는 그 나라 중산층의 가치를 가르치는 곳.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부지런히 일해라' '약자를 도우라' '질서를 지키는 시민이 되라' 따위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다 어딜 갔는가?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 같은 가치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 배우지도 않은 항목 하나를 두고 이렇게들 극성이다.(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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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민족과 재능

 

 4년마다 개최국으로 선정된 나라의 도시 주최로 올림픽이 열린다. 그 올림픽에서 한국은 활쏘기 종목에서 메달을 휩쓴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제는 한국이 활 잘 쏘는 나라로 이름이 나서 한국의 코치와 선수들이 다른 나라의 코치로 초빙되어 간다고 한다.


 그런데 활쏘기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골프도 국제적으로 이름이 난 지 오래다. 특히 우수한 여성 선수들이 쏟아져 나와 국제골프대회의 상을 휩쓸다시피 한다는 소식이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여성 골퍼가 무슨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기사가 쉴새 없이 신문이나 방송 스포츠난을 메우고 있다. 오는 2016년 남미 브라질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는 메달 몇 개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을까.


 활쏘기에서 금메달을 받은 것은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한국은 옛날부터 창과 방패로 찌르고 막는 근접전(近接戰)보다는 성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서 벌이는 원거리 싸움에 더 능해서 그 결과 활 쏘는 기술이 발달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해석은 우리 민족은 젓가락을 써왔기 때문에 손놀림에 대한 남다른 기교가 발달되어 활쏘기에 능하다고 한다.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 그러나 중국과 일본도 젓가락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인데 왜 우리만 그럴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활쏘기에 능했던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동이족(東夷族)이라 멸시해서 불렀는데 동이족의 이(夷)자를 파자(破字: 한문 글자의 자획을 분해하는 것)하면 대궁(大弓: 큰 활)이 된다.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고려나 조선 때 활쏘기는 무과(武科)는 물론이고 문과(文科)에서도 빠져서는 안 될,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종목으로 여겼다. 아무리 책과 더불어 사는 선비라 할지라도 활쏘기만큼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각 민족마다 잘하는 장기랄까 특기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유대인들은 지적(知的) 분야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는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증거라 할까. 지금까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300명 정도인데 그 중 약 1/3에 해당되는 93명이 유대인이다. 그 중에서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 제일 많고 의학, 물리학이 그 다음, 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극히 적다. 경제학자 마르크스(K. Marx),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드(S. Freud), 화가 샤갈(M. Chagal),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지적 성취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미국의 변호사 70만 명 중 20%에 해당하는 약 14만 명이 유대인이고, 뉴욕시의 중고등학교 교사의 50%가 유대인이라는 보고가 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 같은 미국 명문 사립대학의 교수 중 25~35%가 유대인이고 그 대학의 총장 등 주요 행정직의 90%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라운 지적 두각을 나타내게 된것인가? 이에 대한 설(說)은 구구하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가는 주장은 유대인들의 앎(지식)에 대한 애착이랄까 존경이다. 유대인은 무엇이든, 쓸모가 있든 없든, 알려고 애쓰는 행동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앎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뜻있는 삶이며 신(神) 앞에 의무를 다했다고 보는 생각이다. 아무런 지적 자극이 없는 환경이 오랫동안 계속되다 보면 생리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정신지체아가 나올 확률이 높다. 반대로 지적 과제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기심이 수천 년 계속되다 보면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갖는 정도의 지적 과업에 대한 열정은 없는것 같다.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앎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마는 좋은 직장을 얻고 출세하기 위해서가 주목적인 것 같다. 그러니 앎을 추구하는 생활을 열심히 했을 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 무엇을 더 요구한다. 그 무엇의 예는 배짱이나 수단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유대인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우리도 하루빨리 유대인처럼 교육개혁을 해서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한국 어느 대학에서는 그 대학교 출신이 노벨상을 받게 되면 수상자의 동상(銅像)을 만들어 갖다 얹을 받침대가 마련돼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노벨상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학문적, 지적 노력의 결산이지 학문의 목적은 아닌 것으로 안다. 이렇게 성급한 마음으로 상을 노리고 학문을 하다가는 동상 받침대가 주인공을 만날 날이 몇 십 년 더 늦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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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믿음의 고착화


 

 신문에서 본 내용이다. "우리나라 시조(始祖)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熊女)와 결혼해서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한국일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984년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22.8%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인구 절반에 가까운 48.5%가 '허위'라고 대답했으며, 28.7%가 '무어라 말할 수 없다'로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2012년 6월에 실시한 갤럽(Gallup) 여론조사에서는 46%의 미국사람들은 "1만 년 전에 신(神)이 현재 상태의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응답했다.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로 보면 1만 년은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다. 수백만 년 전부터 꾸준한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렀다는 인류학자들이 내놓은 방대한 자료를 생각하면 병아리 시절은 없고 갑자기 성숙한 암탉, 수탉으로 되었다는 주장. 이 허망한 주장에 절반 가까운 미국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을 한 것이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오바마(B. Obama)는 캔자스대학교 인류학도였던 백인 여성과 케냐에서 유학 온 흑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하와이에서 만나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곳이 하와이가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케냐(Kenya)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는 많은 증거 자료를 내보이고 자서전에서까지 출생에 관한 사실을 밝혔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신문기사를 보니 2012년 10월 현재 오바마가 태어난 곳은 아프리카 대륙 케냐라고 믿는 사람들이 미국 백인들의 25% 가량 되는데 최근 그 숫자가 30%로 불어났다는 보고다. 위의 세 경우,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가 엿보인다. 즉 이들 모두 현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 자료나 과학적 연구 결과, 혹은 이성(理性)에 입각한 논리적 추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 같은 이야기를 열심히 믿는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가 아직도 성북동 어딘가에 숨어 살다가 죽었고,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은 남미 어디에 가서 살다가 죽었다고 믿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일단 형성된 믿음은 고착화(固着化)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고착화란 자기가 믿는 것이 틀림없이 사실이라고 믿는 나머지 자기의 믿음과 반대되는 증거가 나와도 오불관(吾不關)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아무 수정 없이 그대로 보유하고 옹호하는 성향을 줄이는데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 "객관적으로 생각해라, 편견에 빠지지 말아라" 따위의 충고는 이 믿음의 고착화를 줄이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고,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판단해 봐라" 따위의 충고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면 믿음의 고착화나 편견 같은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망치는 해로운 존재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생활에서 정확한 논리, 편견 없는 논리를 써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우리 생활은 인지, 믿음의 편견이 만연하고 논리적 추리를 거치지 않는 결정이 대부분이라도 아무 탈도, 문제도 없는 경우가 십중팔구다. 


 예로 어떤 의사가 증세 A와 B, 그리고 C가 질병 X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때마침 자기 환자가 증세 A, B, C를 가지고 있으면 이 의사는 "이전에 이런 증세를 가진 환자를 하나 봤는데 오늘 이 환자도 증세가 같으니 바로 그 X질병 환자일 것이다."는 직감(直感)에 호소해서 X질병이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런 식의 진단은 정식으로 논리적 추리과정을 통해서 내린 진단은 아니다. (질병 X외에도 증세 A, B, C를 가진 질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왜 이 믿음고착화 현상은 어떤 사람에게는 많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적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할 뿐 아직 확인된 주장은 없다.


 아무튼 사람의 믿음을 인위적으로 고착화시킬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상상해 보자. 이는 사람의 믿음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 이런 세상이 온다면 수많은 반공(反共) 신념을 가진 젊은이들을 양성할 수 있을 테고 정부는 국방에 그다지 큰 신경을 안 써도 좋을 것이다. 


 그 반대로 요즈음 한창 떠드는 종북(從北)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키워두면 이 사람들은 앞으로 남북 평화통일에 막대한 공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무섭다. 이런 세상이 오기 전에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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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편지

 

 편지를 받아본 적이 옛날이다. 마지막으로 받아본 것이 작년 이른 봄, 한국에 있는 저명한 수필가 K선생이 보내온 것이다. 선생은 자기보다 10살 아래인 나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써가며 200자 원고지에 정(情)이 듬뿍 담긴 사연을 또박또박 적었다.


 “. 어느 제자가 연하장을 보내왔는데 한자로 花香千里行 情香萬里薰(화향천리행 정향만리훈 :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에 풍긴다)라고 써왔습니다. 형의 글을 읽으면서 정이 너무 깊게 든 친구 같아서 며칠 동안 기뻤습니다. 5월에 한국에 오신다고 했는데 또 편지를 썼으니 받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情香萬里입니다. ”


 내가 편지를 처음 써 본 것은 초등학교 때, 6.25 전쟁으로 일선에 나가 있는 국군장병들에게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위문편지였지 싶다. ". 살을 에이는 북풍(北風)은 몰아치는데 백만 조류(鳥類)만이 추위에 제집을 찾는 듯이 짹짹이며 희롱하는 자세…" 누구에게서 훔쳐온 구절인지 생각은 나지 않으나 훔쳐온 것만은 분명하다. '북풍' '희롱하는 자세' '백만 조류' 따위의, 아이 말이 아닌 이 유치한 표현은 전쟁의 포화가 멎을 때까지 2, 3년간 잘 써 먹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집을 떠나 타향으로 떠돌며 주머니가 빌 때는 용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부주전(父主前) 상서를 부지런히 썼다. 지금 시세로 한 10~20만원 벌어보자는 게 내 편지의 궁극 목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는 사뭇 장중한 전주곡으로 시작되었다. 


 "아버님 내외분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며 근력(筋力)도 좋으신지요. 자식들 때문에 주야로 노심초사(勞心焦思) 걱정하시고 고생하시는 아버님, 어머님을 볼 때 자식된 도리로 효도 못하는 것이 한(恨)스럽고 두중(頭重) 하옵니다. " 는 등의 되바라진 말. '노심초사'와 머리가 무겁다는 뜻의 '두중(頭重)'이란 말은 큰형님이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훔쳐보고 실례해온 말이다. 별다른 할 말이 없을 때는 집에서 보신탕용으로 기르는 똥개 안부도 하다가 끝에 가서 슬쩍 돈 얼마만 보내주시면 학업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을 흘렸다.


 편지를 쓸 때 하고 싶은 말을 맨 뒤로 미루는 것은 나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점이지 싶다. 편지뿐만 아니라 사회교제 전반에 걸쳐 다 그런 것 같다. 청주 어느 대학에서 교단에 서고 있는 내 대학교 후배 P교수는 이 현상을 가리켜 한국사람들의 이러한 특성을 지적한 외교관 이름을 따서 ‘프랑시 법칙’이라 불렀다. 자기 신상에 대해 선생님과 상의하고 싶은 학생이 막상 선생님을 마주대하고 앉아서는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헤어질 때쯤에야 속 이야기를 우연 슬쩍 지나가는 말로 흘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 상담에서 아무리 학생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상담을 청한 학생이라 해도 “무슨 일로 왔나?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어?(What brought you here. How can I help you?)” 따위의 미국 상담 교과서에 실린 화법(話法)은 한국문화에서는 안 먹혀 들어간다는 것. 대신 날씨나 시국 이야기, 스포츠 소식 등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면 나중에 진짜 이야기는 저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편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 전화 등 교통수단의 발달 때문이다. 컴퓨터로 오는 편지를 받을 때면 나는 무슨 영수증이나 공지사항을 통보받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생화(生化)와 조화(造花)의 차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편지란 쓴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고 그 사람 마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 편지다. 내 고정관념 때문인가. 컴퓨터로 온 편지에서는 이런 감정은 느껴보기 힘들다.


 해방이 되기 꼭 7년 전, 백년설이라는 뽕짝가수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윤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의 <일자일루(一字一淚)>라는 가요가 있다. 70년 묵은 곰팡내가 풍겨오지만 그 노랫말에 담긴 애절한 순정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순애보(純愛譜)다.

 

 


못 보낼 글을 적던 붓대 멈추고
하늘가 저 먼 곳에 꿈을 보내니
눈물에 젖은 글월 얼룩이 져서
가슴속 타는 불에 재가 되려네

 

일천자 글월이니 한방울 눈물
눈물은 내 마음의 글월이런가
글월은 내 마음의 눈물이런가
한 글자 한 눈물에 재가 되려네

 

 

 오늘 같은 깊은 겨울날에는 봄바람처럼 훈훈한 인정과 쓴 이의 손때가 묻은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지하실 창고에 가면 그 옛날 45년 전 내가 검은 머리칼, 청운의 뜻을 품고 캐나다에 왔을 때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아 둔 상자가 하나 있다. 이 상자라도 꺼내서 헤쳐 보면 허기진 내 그리움이 약간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 편지상자 속에는 내가 1966년 유학을 떠나 캐나다 밴쿠버에 왔을 때 어머님이 내게 보내신 글월도 있다. 어머님 가신 지가 올해로 35년이 되었고 편지는 그 음습한 창고 안에 그대로 있다.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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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오복(五福)

 

 사람은 일반적으로 축복 속에서 태어난다. 아빠 엄마를 비롯해서 주위에 가까운 가족들은 아이가 이 세상에 어서 나오기를 흥분과 설렘으로 기다린다. 요즈음에 태어난 아기는 제 명(命)대로 산다면 80은 무사히 넘길 테고 90, 100, 110살 근처 어디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을 것이다.


 태어난 아기가 커서 어른이 되고 늙어서 죽기 전까지의 인생행로가 세상에서 꼭 같은 사람은 없다. 한 배 속에서 나와서 한집에서 자란 쌍둥이도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속으로는 서로 생판 다른 삶을 살다가 간다. 삶이 이처럼 예측 불허임에도 인생행로를 점치려는 인간의 노력은 끊이질 않는다. 사주팔자라는 게 그 예가 아닌가.


 그러니 바라는 삶의 방법도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풍성한 삶을, 어떤 이는 육체적, 관능적 만족 위주의 삶을, 또 어떤 이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좇는 삶을 살다가 눈을 감는다.


 물론 자기가 어떤 삶을 원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려고 애쓰고, 몸을 튼튼히 하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명예를 찾는 것... 이 모두가 결국에는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을 얻는 것에 있다"고.


 그런데 옛날부터 이 행복한 삶을 이루는 몇 가지 요소랄까 종목이 있다. 이를 두고 오복(五福)이라 한다. 순서대로 적어보자.


 수(壽), 부(富),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수(壽)는 오래 사는 것, 부(富)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것, 강령(康寧)의 강(康)은 신체적 건강을, 령(寧)은 정신적인 건강을 말한다. 유호덕(攸好德)은 덕을 좋아하는 태도로써 남을 도우려 애쓰는 착한 행동으로 덕을 쌓는 것,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언어력, 수리력, 공간 지각력 같은 분야의 점수를 모아 지능지수(IQ)를 산출하는 것처럼 이 다섯 종목에서 얻은 점수를 종합하여 오복의 많고 적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오복 개념이 언제 어디서 태어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교가 조선에 흘러들어오기 훨씬 전, 그러니까 고려나 삼국시대, 아니면 저 옛날 동굴 속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유행하던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수천 년을 내려오던 오복의 개념이 최근에 와서 흔들리고 있다.


 8.15, 6.25, 4.19, 5.16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가치와 규범이 급격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오복(五福)도 영향을 받았다. 하루는 내 컴퓨터에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오복'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 다섯 가지가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1. 건강
2. 처(남편 혹은 자기를 돌봐 줄 수 있는 배우자)
3. 재산(자식에게 손 안 벌리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재산)
4. 취미(생활의 리듬과 보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소일거리)
5. 친구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는 고종명과 함께 남에게 선행과 덕을 베풀라는 유호덕이 없어진 것이 흥미롭다. 이제는 일찍 죽는 병의 대부분이 치료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 산소마스크를 달고 있으니 고종명의 의미가 약화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유호덕이 빠진 것은 서구에서 몰려온 개인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남에게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나'부터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보자는 '나'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남'이 많이 줄어든 반면 완전한 '남'보다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내세우다 보니 친구 항목이 들어선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덕을 쌓는다는 말 같은 것은 점점 들어보기가 힘들다.


 전통적인 오복이나 현대 오복에 자식 복이 없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예로부터 많은 자식들이 효도를 하기는커녕 부모 속만 썩이는 애물단지가 되어 자식이라면 아예 효경(梟?)의 기질이 있는 존재로 봐서 그런가?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으로 불효 혹은 불충을 말한다. 


 또 최근의 배금사상은 도도하게 밀려 내려오는 용암처럼 인간생활의 모든 면을 뒤덮고 있다. 그 결과 멀지 않아서 제1의 복인 수(壽)의 자리가 부(富)에 밀려날지도 모른다. 배금사상이 초대형 복(福)으로 부상(浮上)하는 날에는 돈만 있으면 5복 중 4가지 복은 식은 죽 먹기로 쉽게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예로 앞에서 한 1만 년이 지나면 뱃속에 있는 아이도 잠시 꺼내어 필요한 성형수술을 하고 다시 자궁에 집어넣는 기술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그 비용이 천문학적 숫자일텐데 우리나라에서 이 돈을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L씨와 C씨 두 가계 외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1복 부(富)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1복이 될 것이다.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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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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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사전을 보면 멋이란 '옷차림새, 행동, 됨됨이 등이 세련된 상태와 아름다움' 혹은 '운치와 흥취'로 정의되어 있다. 영어로는 'elegance'란 단어가 우리가 말하는 멋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말이지 싶다. 우리말이건 영어건 멋이 무엇인가를 몇 마디로 설명하기는 퍽 어렵다. 우리는 멋이란 말을 하루에 수십 번 넘게 하지마는 그 말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질 않는다. 그러나 멋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대충 의견을 같이 한다.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젊은 여성들에게서 "와! 참 멋있어요." 하는 칭찬을 들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성이 어디 있을까. 철학 교수 김태길의 말마따나 '멋있다'는 말은 우리 인생 최고의 찬사,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나보고 이 세상에서 멋있게 살다간 사람을 꼽아 보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선 중기의 풍류객 백호(白湖) 임제다. 전라도 나주에서 오도(五道) 절도사를 지낸 청백리(淸白吏) 진의 아들로 태어난 백호는 벼슬에 초연하여 당파 싸움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평생을 고고하게 살았다. 그의 멋 절정은 그가 평양감사에 임명되어 부임지 평양으로 가는 길에 개성 근처 장단에 있는 여류시인이요 기녀인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홍안은 어디가고 백골만 묻혔는다/잔(盞)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는 절창을 남겼다는 사실에 있다.


 평양 감사로 부임한다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도 잊고 미천한 기녀의 무덤 앞에 엎드려 잔에 술 부어 올리는 이 돌출적인 행동, 당시 시대 사조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행동이 멋의 절정이 아니겠는가. 미스 황의 무덤에 술잔 올리는 순간은 그는 평양 감사 임백호가 아니요 사나이 임백호였다.


 광해군 때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또 하나 백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실려 있다. 당시 평양에 콧대 높기로 유명해서 평양 감사도 범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기생을 백호가 하룻만에 그녀의 몸과 마음을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평양 감사와 금 만냥 내기를 하여 백호가 이겼다는 기녀와의 연담(緣談)이다.


 내기에 이겨 만냥을 거머쥐고 된 행운은 고사하고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 콧대 높은 여자를 하룻밤 사이에 무장해제를 시켜버렸을까? 그 비법을 나도 한 수 배우고 싶은 생각도 들지마는 내 나이 72, 때가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사건 이후 죽을 때까지 다른 여인과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는 지조(志操)의 사나이 임백호. 


 동인서인(東人西人)으로 갈라서서 서로 헐뜯고 싸우며 공명이나 얻으려는 벼슬아치들의 비열한 꼴을 비웃으며 강호에 방랑, 세상을 놀라게 하는 명문장에 거문고, 술과 친구를 사귀다가 3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마감한 사나이. 죽음에 이르러 "제왕도 일컫지 못한 나라에서 죽는 판에 슬퍼할 이유가 없으니 죽거든 절대로 곡은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는 자주사상가 임백호.


 이렇게 보면 멋이란 잘 생긴 외모에다 유행따라 입는 옷이나 머리스타일 같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外)적 요소 때문일 때도 있다. 그러나 백호처럼 세상명리를 뜬구름 보듯한 그의 고고하고 꼿꼿한 인생에 대한 자세와 격조 높은 시문, 거문고에서 퍼지는 향기 등의 내(內)적 요소 때문에 연유한 멋일 때가 더 많지 않을까.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갈고 닦던 일에 최선을 다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것도 멋있다. 그런데 살펴보면 멋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보통이 아닌 비범(非凡)에서 나오는 것 같다. 수필가 피천득 교수의 말처럼 모자를 똑바로 쓰는 것보다 약간 삐딱하게 써야 멋이 있지 않은가. 개성 있는 화장을 하거나 개성 있는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멋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 뛰어난 성취수준과 그에 따른 독특한 개성은 곧 멋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얼핏 보면 멋있어 보이나 자세히 보면 멋이 없는 경우도 있다.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그렇다. 감옥에서 칼머리를 쓰고 있는 자기 애인을 한시라도 빨리 구하는 것이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그러나 그 생각은 않고 제 출세한 것 한 번 뽐내보고 싶은 허영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수다를 떨다가 그 이튿날에 가서야 '암행어사 출두'를 외친 이 사나이는 얼핏 보면 멋있게 보이나 실상 지지리 못나고 용렬한 사내인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중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이 멋의 출발점이라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멋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 생긴 그대로 내보이면 그게 곧 멋일텐데 우리는 남에게 눈길을 보내다 보니 자기도 잃고 멋도 잃어 버린다. 멋은 곧 개성의 표현, 자기 생긴대로 사는 것은 자기를 되찾는 길임과 동시에 곧 멋을 만들어 내는 길이다.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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