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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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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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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여름밤

 

 대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어 나는 같은 반 친구 L과 함께 내 고향집 역동에 갔습니다. 여름밤이 되어 방안보다는 방밖이 더 시원할 것 같아서 사랑마루로 잠자리를 옮겨서 아버지, L, 나 이렇게 셋이서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당시 나는 미스정이라는 같은 과 2년 후배 여학생에 홀려 어떻게 하든지 이 소녀를 놓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L에게 일이 무사하게 잘 되도록 아버님께 말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습니다. 말하자면 뇌물을 쓴 것이지요. 행여나 아버님이 연애결혼에 반대하시면 어떡하나 그야말로 물샐 틈 없는 준비를 해두자는 것이었습니다.

 말 잘하고 붙임성 있는 L은 아버님과 금방 가까워졌는데 L과 아버님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잠이 든 척하고 두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L의 주도로 요새는 남녀도 남남처럼 평생 우정을 이어갈 수 있는다는 것을 열렬히 주장하였지요. 아버님께서는 L의 화려한 말솜씨에 자기가 밀린다 싶었는지 L의 연설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계시다가 L의 열변이 끝나자 “니(너) 다했나?” 하고 확인 질문을 하시더니 “이 사람아, 남녀관계란 니(너의) 말처럼 평생 계속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노 그런데 남자 마음이란 본래 더러운 것이지, 그렇게 깨끗한 것이 못된단 말이여. 처음에 깨끗한 마음으로 만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더러운 심보와 욕심이 발동해서 기어코 여자를 건드리고 싶은 엉큼한 마음이 생기는거여… 내 하나 물어보자. 동렬이 애인이라카는 가(그 아이) 니도 잘 알제? 그 아는 괜찮은 안(아이)가?” 하고 갑자기 내 연인이요 천사, 당시의 미스 정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나이도 어린 아들친구와 남녀애정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사귄 지가 1년도 채 안 되는, 앞으로 자기 며느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더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꼭 57년 전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부포동 역동 어느 여름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누워서 이야기 하다가 잠들면 사랑마루는 헐렸다가 다시 들어섰습니다. 아버님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던 L과 나는 아직도 바다 밖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아버님과 L의 이야기에 나오는 미스정은 나의 본처과 되어 아이 둘을 낳고 우리 부부는 4살박이 소꿉장난 하듯이 서로 킬킬거리며 웃고 지나다가도 별일 아닌 것 가지고 금새 토라지는 생활을 되풀이 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13살에 16살이 된 어머니에게 장가를 가셨습니다. 첫날밤에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고 물었더니 어머님의 대답이 “나는 이 세상에서 글 읽은 것(공부하는 것)이 제일 싫다”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님의 고함으로 역동집 기왓장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두 분이 맹렬하게 다투시던 것을 보고 겁이 났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보기 드문 애처가이셨습니다. 아버님은 L에게 자기는 13살에 신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결혼식 당일 만나서 오늘까지 살아왔다면서 신부도 신랑 얼굴 한번 못보고 배필을 이루고 살아도 살면 또 정(情)이라는게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 말씀을 따르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살다보면 정이 새싹 나듯 나고 사랑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말도 서양에서 들어온 말이지요. 서양 사람들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지만 동양에서는 사랑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놓는 것은 어딘지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니 같이 13살에 배필을 만나 제2차 성(性) 발달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언제 사랑한다는 말을 할 겨를이나 있었겠습니까.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가소 잘있소 눈물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씻으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를 마세요

 

 위는 1937년 2월 박영호가 노랫말을 쓰고 김송규(김해송)가 멜로디를 달고 장세정이 취입한 ‘연락선은 떠난다”의 노랫말입니다. ‘아이 울지를 마세요’라는 구절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음반판매가 금지되었답니다. 사랑이란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부두의 이별같이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랑한다는 말에 최후의 진술처럼 술술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하직하는 임종석에 누운 환자를 방문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척이나 장엄하고 절박한 순간, 이때 방문자가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인간이 쓰는 말 중에서 사랑이란 말처럼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나 들어보고 싶어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역동 고가(古家) 사랑마루에 누워서 세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잠들던 그 청순 무구한 여름밤은 내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019. 5)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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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신참 신고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6.25 전쟁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왔을 때는 머리도 기르지 않는 순도 100% 자연산 더벅머리 소년이었지요. 입학만 하면 선배들이 와서 “나하고 형제가 되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신입생 신고식이란 말도 없었으며 나한테 인사를 거는 선배 하나 없었습니다.

 숨통이 막히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조물주는 무한의 자유를 이 더벅머리 앞에 쏟아놓고 갔습니다. 학교 가는 것, 책을 읽는 것, 어떻게 행동하는 것, 모두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사람 하나 없는 완전한 자유였습니다. 하기야 “동렬이 너도 이 책 한 번 읽어볼래?” 하는 충고의 말도 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설령 있었다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놈”으로 기고만장하던 그 시절에 이 따위 충고가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가끔 신문에 나는 (보통 정도가 지나쳐서 신문에 나는) 신참신고식 이야기를 보면 “참 황당한 녀석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신고식에서는 선배들이 신입생을 한 줄로 세워놓고 아무런 이유 없이 두들겨 패고(이것도 한 두 번 쥐어박는게 아니라 정신을 잃을 때까지 두들겨 팬답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술을 강제로 먹이고, 캄캄한 밤중에 자동차에 싣고 낯선 곳에 가서 내려놓고 온다든지, 하여튼 내가 보기에는 바보같은 짓만 골라러 하고 남들에게 큰 괴로움을 안겨주는 짓거리를 신참 신고식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신고식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겠다” 싶은 호기심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 이기환이 쓴 ‘흔적의 역사’에 따르면 신참신고식은 고려 우왕 때부터  시작하여 조선 관리들에게로 전해왔다고 합니다. 시작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부모의 권세나 입김으로 관리가 되어 천방지축 까불어대는 신참이나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의 기(氣)를 꺾어놓는 수법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시작된 신참식은 600년을 이어 와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모든 조직원들이 한결같이 같은 행동과 생각을 하고 대동단결을 해야하는 군대조직  같은 데서는 신참식이 어느정도 있어도 좋겠다는 수긍이 갑니다. 선배 혹은 고참말 잘 들어야지 너 혼자 잘났다고 까불지 말라는 말은 군대조직에서는 절실하지요.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오늘날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소신대로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신참이라 해서 무조건 선배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그러니 앞으로 세월이 가면 신입생 신고식 따위는 그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입니다.

 ‘흔적의 역사’를 보면 율곡(栗谷)이나 다산(茶山) 정약용 같은 이름난 선비들도 혹독한 신입생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이런 신고식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봉건사회에 어울리는 풍습이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맞지 않는 풍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배니 후배니 가리고 따지는 것은 선배에게 기대되는 행동이 있고 후배에게 기대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제 1등으로 꼽히는 후보자는 단연 군대조직입니다. 그러나 신고식이라고  이유없이 신참들을 두들겨 패고 술을 강제로 먹이는 것은 후배들의 마음속 저항심리를 건드리지 진심으로 존경과 복종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위에서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아래 신참들은 저절로 본보기를 따를 것입니다.

 이 신참 신고식이 고려말에 시작되어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남을 괴롭히고 제압하고 싶은 병적인 잔혹성 내지 가학성(Sadism)의 유전자가 우리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모양이지요.

 흔히 집에서 어른이 잘하면 자식에겐 문제가 없고 어른이 망나니 짓만 하면 그 자식은 볼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런 공식을 잘 따르지 않는 습성이 있지요. 어른의 행동이 아무리 개차반일지라도 그 자식들은 낱낱이 똑똑해서 제 갈 길을 가는 모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어른이 행동을 아무리 잘해도 그 자식들은 개차반이 되는 수도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살이가 흥미롭고 살맛이 나는게 아닙니까?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걸핏하면 무고한 시민을 잡아서 빨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고문으로 병신을 만들어 돌려 보내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올바른 후대들이 나오겠습니까. 그런 사회에서 자라서 성인이 된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이 별로 없으니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런 암울한 짓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독재의 사슬 밑에서 성인이 된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민주주의를 한다고 설쳐댑니다.

 그것은 마치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청중 앞에 나와서 “나의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이 즐거운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은 말로 민주주의를 외쳐대지만 자기들의 행동 혹은 생각 레파토리(Repertoire)에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100대 매질하던 것을 20대 이상은 못때리는 법을 만들었다고 “오늘은 민주주의를 실행했다”고 할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50년, 100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 민주주의 한다고 떠들어대는 세대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서 새싹 돋아나듯이 자란 새 세대가 와야 그때 민주주의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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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느티나무

 

 내가 어렸을 적에 고향집 역동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 늘매마을 북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들판에 어마어마하게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다른 나무들은 없었고 그 느티나무만 덩그렇게 서 있었는데 나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느티나무가 그렇게 큰 것은 보질 못했습니다. 부채꼴을 하고 서 있는 그 나무 밑에는 작은 돌들이 깔려있고 사방이 그늘져 있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하기도 하지만 으스스한 기분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말로 그 느티나무는 수 백 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느티나무에는 큰 구렁이가 한마리 살고 있다는데 나는 있다는 말만 들었지 구렁이는커녕 도마뱀도 한 마리 보질 못했습니다. 늘매 마을과는 뚝 떨어져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 정자처럼 자주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 가지를 꺾거나 잎에 매달리거나 나무에 성가시게 굴면 구렁이가 밤에 나와서 “동렬이 너를 잡아간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앉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를 보면 엄숙해지고 두려운 마음까지 드는가 봅니다. 오래된  나무에 무슨 신령(神靈) 같은게 있다고 믿는지 그 앞에 서서 온갖 소원, 이를테면 딸을 입학시험에 합격시켜 달라, 우리 며느리 아들 낳게 해달라, 영감 바람 좀 덜 피우게 해달라, 영감 술 좀 덜 마시게 해달라는 등 각가지 소원을 비는 모양입니다. 도시에 가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겠어요.

 나도 어른들이 하는대로 한 두 번 빌어볼 때도 있었지만 무엇을 빌었는지는 지금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나무 그늘은 소변을 보기가 썩 좋은 명당이었으나 나는 거기에는 한 번도 소변을 보질 않았습니다. 혹시 신령이 보고 있다가 밤에 자는데 와서 나의 그 소중한 연장(지금은 맹장처럼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무뿐 아니라 크고 오래된 자연에는 그것을 지키는 신령들이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낼 때면 제사를 지내기 전에 산신령을 위한 행사로 ‘고수레’ 지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요새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잘 봐달라고 산신령한테 ‘뇌물’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내 어린시절과 비교해서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산소를 파헤치고 시신을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시고는 그 뫼터 자리에 아담한 별장을 짓질 않나, 수백년 묵은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질 않나, 좌우간 자연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 같습니다.

 요사이 언론에 자주 오르는 김해공항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김해공항을 없애고 가덕도에 새 공항을 짓는 것보다는 기왕에 있는 김해공항을 더 크게 만들어 쓰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런데 김해공항 근처에 300m가 넘는 산들이 서너개나 있어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데 무척 위험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김해공항을 크게 만들어 쓰자는 이들은 산봉우리를 깎아 내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어릴 때 같았으면 이런 의견은 분명 미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세 산의 산신령들이 합동회의를 갖고 “이 녀석들이 우리 머리를 깎아 내린다고?” “비행기를 김해 앞바다 속으로 집어 넣어버릴까봐” 하는 결정을 내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폭망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가덕도에 새로 공항을 짓는다는 것이 정치적 결정이라고 나무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집권당이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국민의 의견을 잘 들어서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게 정치 아닙니까? 그러니 집권자는 모든 결정을 반드시 정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이름이(분명치는 않으나) 클럭혼(K. Kluckhohn)이라고 기억합니다. 이 클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같이 인간이 자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고, 인도처럼 자연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처럼 자연과 조화를 강조하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생각은 그 문화의 경제적 발달과 긴밀한 관계가 된답니다. 대체로 자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산업이 발달되었고, 자연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산업화가 느리고 경제발달도 늦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강조하는 문화라는데 이것도 벌써 한물 지난 생각인가, 산을 깎아 물길을 새로 내고 수백년 묵은 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대형 갈비집을 내는 것을 보니 우리 인간들이 벌써 자연위에 누르고 앉아 떵떵거릴 뿐아니라 자연을 마구 짖밟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매 동네 앞, 강쪽으로 있던 느티나무는 수몰지구가 되는 바람에 전기톱에 잘려 어느 가구공장으로 실려 갔는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살고 있다던 그 구렁이도 나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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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육사(陸史), 그리고 ‘청록파’

 

 1999년 가을, 한국 E여자대학에서 나를 정교수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 “나같은 사람을 E대학에서 데려가는 것은 E대학의 영광이다”며 겉으로는 거드름에 가까운 태연함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깡충깡충 뛰고 훨훨 날아다니는 심정이었습니다.

 E대학에 연구실을 배정받은지 열흘이 못되어 옛날 학창시절 같은 서예의 도장, 같은 스승 밑에서 붓을 잡던 서예가요 한문교수로 있는 H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경북 안동 도산 원천리에 여명기의 저항시인 육사(陸史) 이원록의 문학관을 짓고 있는데 거기에 육사의 대표작 ‘광야’를 내가 붓글씨로 써주면 문학관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각(刻)을 준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랍고 이렇게 덩치 큰 부탁이 어떻게 나한테 떨어졌는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머뭇거리다가는 그 특권이 다른 서예가에게로 갈까봐 “그러겠노라”고 상대방이 부탁하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해 연말까지 온 정신을 다해 ‘광야’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육사는 나의 숙항(叔行: 아저씨 뻘이 되는 항렬)이 됩니다. 내가 쓴 ‘광야’ 글씨는 처음에는 문학관 안에 있는 육사의 흉상 바로 옆에 있었는데 요새는 다른 자리에 옮겨져 있더군요. ‘광야’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본문은 용비어천가체를 따르고 낙관은 얌전한 궁체로 썼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쓰고 싶은 서예가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고려해서 낙관에 이동렬이 썼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그냥 내 이름과 호가 적힌 도서(圖署: 도장)만 크게 각(刻)을 해두었습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애당초 나를 소개한 서예가 H의 체면도 생각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다 무명의 설움이라는게 아니겠습니까.

 육사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 원천은 한적하고 쓸쓸한 동네입니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은 원천같이 “아무것도 볼 것 없는 동네에서 육사 같은 장한 시인이 어떻게 여기서 태어났느냐”고 놀라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경북 영양의 주실 동네나 박목월이 태어난 경남 고성을 보십시오. 둘다 볼 것이라고는 별 것이 없는 동네가 아닙니까? 마치 중국의 문장가 구양수가 시인은 모든 것이 궁핍해야 시를 잘 쓸 수 있다(詩窮而後工).는 말을 한  것처럼  내게  시인은  살림만  가난한  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동네도  하나같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동네여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나는 과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큰 도시 보다는  형편없는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고,  볼 것  없는  동네라고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다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우선 문재인이나 이명박,  박정희,  노무현,  전두환이나  김대중,  김영삼,  이승만 같은 ‘ 큰’ 인 물이  태어난  곳을  보십시오.  번화한  도시에서  태어난  인물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흉악한  촌놈들입니다.

 대통령은  그렇고  나는  ‘청록파’  시인  세  사람  중에서  조지훈을  특히  좋아 합니다.  그의  시에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삼은  민족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청록집’에  기고를  한  김기준에  의하면  민족적  정서  말고도  지훈은  절제된  율격미  속에  자연미와  불교적인  선취미를  담아 냈다고 주장합니다.  

 박목월은  어떤 가요.  그는  향토성이  짙은  토속어를  구사하면서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서정적 이고  애틋한  내면을  노래한  점에서  그의  시  특징을  보인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에  비해  박두진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산문적인  문체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노래하였습니다.

 ‘청록집’의 세 시인 모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문장’지가 폐간되는 불운을 겪다가 해방이 되면서 햇빛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청록집’ 입니다. 이 시집 출간 후 이 세 시인들은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지요.

 물론 청록파의 ‘청록’이라는 말은 박목월의 ‘청노루’에서 따온 것입니다.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1학년 국어책 맨 첫 페이지에 나오는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으로 시작되는 목월의 시를 배우던 생각이 납니다.

 김기중의 말처럼 ‘청록집’은 해방 직후의 이념적 혼란 속에서도 생명감각과 순수서정을 탐구한 서정시의 중요한 질적 성취로 손꼽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순수시와 전후 서정시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문화사적 가치도 크다고 볼 수 있지요.

 육사는몰려오는 우수와 고독을 뼈저리게 느꼈겠지마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저항에는 이기지 못하고 분노에 찬 펜을 들고 말았습니다. 육사의 시 밑바닥은 어디까지나 저항입니다. 청록파의 지훈이나 목월, 두진은 순수하고 애틋한 시정(詩情)으로 가엾은 이 산하를 누비며 서정의 정한(情恨)을 뿌려야 했습니다. 그 어느 것이나 읽는 우리로서는 감명과 산뜻한 서정을 다시 맛보게 합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무슨 생각이 일었는지 서실에 들어가 서가를 훑어보던 중 우연히 한국에서 출판사를 하던 친구 C가 보내준 ‘청록집’을 빼서 읽다가 감상에 젖어 이 글을 쓰기까지 이르렀습니다. (20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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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6
낙방

 

 꼭 5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내가 캐나다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국여권을 갱신해서 근무하던 대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권 연장 관계로 밴쿠버총영사관에 들렀습니다. 담당 영사의 말이 여권연장은 문제 없는데 한국에 가서 군대에서 오라고 하면 즉시 가겠다는 사인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군대를 마치지 않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군대에 가려고 벼라별 수단을 다 썼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이었습니다. 할 수없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내 고등학교, 대학동기가 자기가 해결해 주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길래 그의 힘으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그 친구는 월급도 많고 안정적인 직장이었으나 양심있는 사람은 ‘이런데 근무할 곳이 못된다’면서 자진사퇴를 하고 떠났습니다).

 나는 영사의 요청에 사인하기를 거부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우는 아이는 물론, 웃던 어른도 뚝 그친다는 그 무서운 박정희 시절이 아닙니까? 나는 속으로 덜컥 겁이 나서  돌아오자마자 아무데나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면 취직을 해야겠다 싶어 사방에 원서를 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걸려든 것이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내륙 깊숙이 인구 2만명의 도시에 있는 노트르담(Notre Dame) 대학교였습니다. 그 대학은 너무 벽지라 근무하기 시작한 날부터 그곳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국에 잡혀가지 않으려면 캐나다 시민권을 받아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시민권을 신청했습니다.

 내가 오늘 캐나다 시민이 될 것이니 와서 축하해 달라며 그 대학 수학과 교수 F를 꼬드겨 함께 시험장에 갔습니다. 운전면허를 받을 때처럼 ‘문제집’이 있는데 그것만 읽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집’에는 ‘캐나다의 수도는?” “캐나다는 몇 주로 구성되어 있나?” 등 ‘문제집’을 읽지 않아도 다 아는 것들이었습니다.

 나의 시험관 판사는 은퇴가 가까워오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갔지요. 판사는 한참 서류를 뒤적이더니 “직업이 뭐냐?”하고 퉁명스럽게 묻기에 ‘대학 선생’이라고 대답했더니 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느 대학이냐?”고 묻기에 “노트르담 대학교 사범대학”이라고 했더니 뭐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얼굴까지 찡그리더니 “너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렇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괜찮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더니 질문 하나 하겠다면서 굉장히 어려운 질문, 즉 캐나다 건국에 대해서 묻는 것 같은데 뭘 물었는지 재생도 못할만큼 어려워서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이 가관이었습니다. “뉴펀들랜드주(New Foundland)는 무엇으로 유명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지리시간에 세계 3대어장(뉴펀들랜드 근해, 라브라도 근해)에 대해서 배운 생각이 나서 “물고기”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리를 지른 것을 보면 그때 내가 무척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판사는 한가지 더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능”이라고 대답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데서 농담하다 쫓겨나면 큰일난다 싶어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판사의 말이 “산림”이라더군요. 다음에는 “퀸살럿 아이랜드에는 무엇이 유명하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은퇴하면 이 판사는 관광회사 안내원으로 일할 계획인지 이런 질문만 해댔습니다. 나는 “감자”라고 외쳤더니 판사는 유명한 것을 하나더 요구했습니다. 몰라서 주저주저하고 있으려니 “여자”가 정답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이런 녀석이 시험관이라고…”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이렇게 몇몇 “유명 시리즈”를 거쳐 나는 “다음에 다시 오라”는 낙방통지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차 시험은 비극으로 끝나고 2차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말이 그 판사는 캐나다 역사에는 자기가 제일의 권위로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 역사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때는 내 정신력이나 기억력은 펄펄 날던 시절, 그까짓 시골 판사 녀석한테 이런 모욕을 당하랴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재시험 첫 질문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 왕당파가 패배하여 캐나다로 대거 망명할 때의 문제였습니다. “17__년(잊어버렸습니다) 7월13일 36,526명의 왕당파들이 미국에서 온타리오주로 와서…” 내가 36,526명인지 아닌지 알게 뭡니까? 내 추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판사가 아무리 역사의 권위라 해도 국경을 넘어온 사람 숫자까지야 알겠는가? 나는 그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숫자를 마구 지껄여댔습니다. 그랬더니 이 판사는 입을 딱 벌린채 나를 더없이 거룩한 존재로 보더니 “합격” 하는 소리를 내지르지 않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네 머리가 판사 해먹기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1700년대의 교통수단으로 3만6천이나 되는 망명자들이 절차를 밟아 하루에 캐나다에 입국할 수 있는지 여부만 생각해도 내 대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텐데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나는 속으로 “야, 네가 아무리 역사에는 권위라 까불어도 한국에서 오신 이동렬 박사님을 따르기는 멀었다” 하는 비웃음이 나와  속으로 킬킬대고 웃었습니다.

 요새 세상 풍조에 비추어 말한다면 이 판사는 분명 인종차별로 고발당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이 판사야말로 다른 종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행동을 보였습니다. 편견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차별은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직업이 뭐냐길래” 내가 “사범대학 선생”이라고 했을 때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네까짓게 감히 우리나라 선생님들을 양성한다고?”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너같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법규에도 없는 제멋대로 심사기준을 세웠습니다. “뉴펀들랜드와 퀸살럿 아일랜드에 뭐가 유명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산림”과 “여자”라는 말에는 실소와 분노를 금치못할 엉터리 질문이었습니다.

 이 판사는 외딴 도시 넬슨 구석에서 “내가 이래뵈도 역사에는 권위야” 하는 자만심만 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5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시골판사를 골려먹던 그 청춘도, 그 자랑스럽던 내 기억력도 이제는 다 허물어지고 꾀죄죄한 첨지가 되었습니다. 캐나다 생활을 돌이켜 볼 때면 그 시민권 시험을 주관하던 판사도 가끔 생각납니다.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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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감동(感動)

 

 서신혜가 쓴 ‘열정’이라는 책에는 조선 전기의 재상 상진(尙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진은 세번이나 재상을 하였으나 항상 자기는 시골출신이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상진의 유명한 일화로는 벼슬을 살기 전에 농부가 소 두마리로 밭을 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어느 소가 더 나은가?”를 물었다가 “미물이라도 자신이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쁠게 아니오”하는 말을 귀에 대고 속삭이는 농부에게 큰 깨우침을 얻었다 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평생 잊지 않은 채 말조심을 하고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대하였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황희 정승의 일화로 배웠는데 서신혜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서신혜에 따르면, 상진은 늘 거문고를 옆에 두고 살았다 합니다. 퉁소나 거문고 같은 악기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감동은 공감을 전제합니다. 공감없는 감동은 없습니다. 내가 음악은 사람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음악만이 감동을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감동을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도 아름다운 자연 경치, 한 폭의 미술품에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동은 인간이 생활하는 모든 국면 언제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랜드캐니언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캐나다의 록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반 고흐의 ‘별이 총총한 밤에(Starry Night)’를 처음 마주 대했을 때도 잊지 못할 감격이었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서 난생 처음 타보는 집채만한 비행기가 ‘우르릉’하며 활주로를 미끄러져 이륙하는 순간 그때의 감격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내 생애의 가장 뚜렷하게 생각나는 감동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이들의 순간에 내가 시인이 못된다는 사실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2번, 3번 가보니 감동의 강도는 점점 줄어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한국의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이 와서 청중자격으로 갔습니다. 발디딜 틈도 없는 만장(滿場)의 공연장에서 그가 울부짖는 ‘봄날은 간다’에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내가 울어야겠다던가 울고 싶어서 운 것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는 것을 어찌합니까.

 비뚤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곱고 부드러운 마음씨를 경험하게 하는데는 음악이 다른 어느것 보다도 쉬운 것 같습니다. 벽초(碧初) 홍명희가 쓴 ‘임꺽정’ 전에 나오는 종실 단천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피리의 명인 단천수가 개성 청석령을 지나가다가 임꺽정 무리에 잡혔습니다. 도둑들은 별로 뺏을 물건도 없는 단천수에게 노래나 한곡 불러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단천수가 피리 몇 곡을 불자 도적들은 고향생각, 두고온 처자식 생각에 눈물을 찔끔거리는 자도 있어서 수령 임꺽정은 급히 피리를 중단시키고 “저 피리부는 단천수는 보내주는게 좋겠다”고 하여 안전한 곳까지 호위 안내도 해주었답니다.

 꼭 마음씨가 고약한 사람만 음악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신혜는 온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킨 한아(韓娥)의 얘기도 했습니다. 한아는 추레한 행색으로 길거리에서 노래하며 밥을 빌어 먹으며 살았습니다. 한번은 한아가 어느 여관에 갔더니 여관 주인이 “그 더러운 행색으로 어디를 들어왔느냐”고 모욕을 주길래 한아는 화를 내는  대신 목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 한 곡을 불렀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왠지 온몸에 기운이 빠져 밥맛을 잃었답니다.

 사흘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기에 안되겠다 싶어 그를 데려다가 사과하고 이번에는 신나는 곡으로 노래를 부탁했습니다. 노래를 했더니 온 마을 사람들이 기뻐서 어깨가 들썩이고 킬킬거리며 웃게 되었답니다. 한아의 노래는 이성이 아닌 감성의 깊은 부분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남자는 보이는 것에 약하고 여자는 들리는 것에 약하다고 합니다. 서신혜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말해줍니다. 개성 황진이의 어미 현금도 진이 못지 않는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18살 때 병부교 근처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내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빨래하는 현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답니다. 그 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이어준 것은 사내가 다리 기둥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 이로 인해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어 황진이를 갖게 되었답니다.

 노래가 주는 감동의 사연은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국어시간에 읽은 정비석의 ‘애국가의 힘’이라는 수필에도 나옵니다. 희미한 내 기억으로는 6.25 전쟁 때  어느 마을 주민 전부가 피란을 가고 마을은 텅 비어 있었는데 국군부대가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이 겁이 나서 모여들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애국가를 크게 틀어 놓았더니 하나 둘 운동장으로 모여 들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중학교를 떠나서는 그 정비석의 글을 다시 본 적이 없으니 어느정도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이처럼 사람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감동을 받은 순간입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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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2
화인 나빙과 선비 박제가

 

 나빙은 1733년에 나서 1799년에 죽은 화가의 이름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 출신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자랑했던 양주팔괴(揚洲八怪)의 한 사람이지요. 초정(楚亭) 박제가는 정조 때 살았던 천재 선비로 젊어서는 문학에, 30세 이후에는 경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불후의 명저 ‘북학의’를 펴냈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장래가 암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고독하고 괴로웠다지요. 초정은 소위 백탑파라고 불리는 문학파, 지금의 파고다 공원 주위에 사는 몇몇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살았습니다. 그 외에는 북경에서 만난 화가 나빙이 있었습니다.

 초정의 조선사회에 대한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합니다. 그를 살린 것은 임금 정조였지요. 초정이 30세 되던 해에 정조 임금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1790년 8월 초정은 북경에 가서 나빙을 만났습니다. 당시 나빙은 56세였고 초정은 40세였다고 합니다.

 1801년 네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는 나빙은 이미 죽고 없었지요. 초정은 나빙이 있던 곳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며 곡을 하였답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멀리 조선에서 와서 돈을 없애가며 친구의 제사를 지내주나요?” 선비 초정은 대답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니 돈을 쓰고 안쓰고는 따질 바가 아니오.”

 위의 사실로 보아 초정과 나빙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우정이 아니라면 자기보다 16살이 많은 선배에 대한 초정의 존경이라 해도 좋겠지요.

 우리는 우정이라 하면 관중, 포숙아 처럼 어릴적 호두불알시절부터 친해야 평생지기가 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로 오성대감(백사 이항복)과 한음(漢陰) 이덕형의 우정은 기실 둘 다 성인이 된 후에 결혼하고 나서 시작된 우정입니다. 6살 먹은 백사가 한음과 말타는 놀이를 하는 이야기는 모두 만들어낸 말입니다.

 요새 세상에서는 어릴 때 동무가 평생 친구로 이어지기는 무척 힘이 듭니다. 초등-중등-고등-대학의 긴 여정을 모두 같이 지낸 친구는 천 명 중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하지요. 어느 단계에서나 갈라질 확률은 무척 높습니다. 대학부터는 본격적인 경쟁사회가 되지 않습니까? 입학시험, 회사 취업, 장학금 선발, 어느 것 하나 경쟁 없는 데는 거의 없습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세상은 초정이나 중국의 나빙이 살던 때와는 무척 달라졌습니다. 나는 어릴 때 아버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우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온 손에 돼지피를 묻히고 친구집을 찾아가 노크하고 “내가 살인을 했으니 어디 좀 숨겨달라”고 했답니다. 첫번 째 찾은 친구는 모른척 하고 문을 닫아버렸으나 다음 친구는 “어서 들어오게” 하며 친구를 숨겨 주더라는 것입니다.

 아버님의 ‘친구’는 잘못도 숨겨주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요새에 친구라고 숨겨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새는 진정한 친구라면 살인했다는 친구의 마음을 우선 가라앉히고 그를 잘 타일러서 빨리 경찰에 자수를 권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초정과 나빙이 살던 시대는 지금에 비하면 극히 단순한 농경사회였습니다. 그렇다고 나빙이 살던 집을 찾아가서 문상을 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초정과 나빙이 애당초 어떻게 우정을 맺었을까요? 내 생각에 나빙은 당시 이름난 화인으로서 조선에서 신사상으로 이름은 날리고 있는 초정의 문장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초정은 나빙의 양주팔괴의 기운과 정신 속에서 숙성된 고독을 발견하고는 마치 자석처럼 달라붙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양주팔괴의 예술적 정신은 자신과 주위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반항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면 이러한 생활태도와 탈속(脫俗)정신에 어릴 때부터 젖어온 박제가는 자신에 대한 불만, 반항적 기질과 맞아 떨어져서 급격하고도 뜨거운 우정으로 돌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조선에서 이렇다 할 사상적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초정은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북경에 가서 나빙 같은 강렬한 고독성과 예술을 제시하는 사람을 만나자 첫 눈에 반해버려 둘은 막역한 우정의 세계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생 5, 6번 만나서 우정이라고 떠들기는 마치 김정은과 미국 대통령 도널트 트럼프의 우정 같은 무리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초정과 나빙의 인간관계는 통상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한 점의 정치적 계산도 없는 순정 그대로의 우정인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시(詩), 아니면 글씨(書), 아니면 그림(?)에 대해서 서로가 느끼는 관심도 무시못할 매체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옮겨 놓으면 아가페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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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6
영어가 나오질 않네

 

 한국 E여대에서 은퇴를 앞둔 1년 전쯤이었지 싶습니다. 중학교 동기 동창 H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유인즉 H가 박사학위 공부를 한 캐나다 A대학교의 부총장이 한국학생들을 A대학교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국에 나왔다 합니다. 왔던김에 A대학교에서 학위과정 공부를 한 사람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녁 대접을 하겠으니 S호텔 양식부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A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코스웍을 모두 마치고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동부로 대학을 옮기는 바람에 먼거리로 주임교수를 만나기도 어렵고 흐지부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한국 A대학교 동문회에 회원이었고 그날 저녁 모임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지요.

 그래서 나도 아내 덕분에 저녁 모임에 갔습니다. 한 50명 정도가 모였을까 저녁을 먹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이동렬 교수 앞에 나와서 좋은 말씀 몇마디 해주십시오” 하고 나를  끌어내는게 아닙니까. 사전 예고도 없는 완전 기습 작전이었습니다. 나는 영어로 뭘 쓰는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말은 내 발음도 그렇고 어물어물 하고 유창하지를 못합니다.

 내 한국말도 어눌하거늘 미국말로 하라구? 그렇다고 캐나다 교단에만 30년을 섰다는 사람이 인사말 한마디 못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물려 받았습니다. 이것을 한국말로 정면돌파라고 한다면서요.

 그런데 말이 나오질 않지 않습니다. 무정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흐르는데도 나는 마른 기침에 웰…웰만 하다가 겨우 몇마디 하고서는 마지막에 “땡큐”라는 말은 또렷하고 자신있게 끝내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나온 사람들은 “저 사람이 강단은 고사하고 캐나다에 50년을 살았다는게 맞나?” 할 정도로 영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근거없는 주장은 아닌데 어떤 교수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제2외국어는 슬며시 사라지고 자기 모국어만 남는다는 주장입니다. 이승만도 하와이 요양원에 가 있을때 영어를 “예스” “노” 밖에 못했고 연세대 총장 백낙준도 그의 죽음이 가까와 와서는 영어는 다 잊어버리고 한국말만 했다 합니다. 내 운명도 그들과 같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요사이  TV에서 나오는 뉴스도 알아듣기 어려워서 듣질 않고 지냅니다. 한국에 가면 E대학교 학생들은 내가 영어권 나라에 50년을 살았다니까 꿈도 영어로 꾸고 영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속만 타들어가니 어디 호소할 곳도 없습니다.

 물론 내가 사는 현재 언어환경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겠지요. 낮에 걸려오는 영어전화란 모두가 “집 팔겠으면 도와 주겠다”는 장사꾼들의 말뿐이니 영어로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이 영어를 마스터해 가는 과정을 연구한 것을 보면 미국에 와서 영어를 시작한 나이를 꼽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고 그것도 15살이 되면 정점이 되어 그 이후에는 별로 덕을 보지는 못한답니다. 그러니 서른살에 미국에 오던 마흔살에 오던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요.

 또 중요한 요소가 이 북미대륙 문화에 젖어드는 정도입니다. 북미대륙 문화에 젖어드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영어에 대한 성장도 빠르고 깊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도 언어라는 것은 특정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므로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문화의 언어에 대한 이해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로 “등 따시고 배 부르다”는 속담은 온돌이라는 문화적 개념을 모르고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 되지요.

 나는 내 나이 26살에 캐나다에 왔으니 혓바닥이 굳을대로 굳어진 놈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북미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내 이름도 “조지”니 “마이크” “폴”이니 하는 서양이름도 없습니다.

 나는 서양문화, 특히 북미대륙의 문화는 너무나 침략적이고 음험하며 이해타산적인 문화라고 원천적으로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북미대륙의 문화에 흡입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실로 멀게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볼 때 내 영어가 늘어갈 확률은 낮아지고 아마 이대로 있다가 저 세상으로 가지 싶습니다.

 한국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영어로 인사하고 영어로 회의하는 데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고 합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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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9
권위의식

 

 벌써 반 년이 휘까닥 지나갔습니다. 어릴 때 안동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니던 동창생으로 서울에 사는 동학 H가 전화를 했습니다. H는 2개 대학교에 총장을 지낸 녀석. 그래서 나는 재미로 그를 H총장님 하고 “님”자에 힘주어 부릅니다. 내용인즉 나의 대학교 은사 C가 올해 아흔 다섯이 되는데 오는 11월 그의 생일에 그가 설립한 ‘행동과학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그의 장수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계획한다는 것.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붓글씨를 한 폭 써 드리는게 어떠냐는 것입니다. 나는 C교수를 대학 은사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교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헌시(獻詩) 한 수를 붓글씨로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지은 헌시 3연(聯) 중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인생을 일러 꿈이라 하였던가

오늘 같은 날이라면 꿈인들 어떠하리

인생은 낙화유수 봄날처럼 사옵소서”

XX선생 사은 잔치에 도천 이동렬 삼가 짓고 쓰다.

 

 문제는 낙관. “XX선생 사은잔치…”에 XX선생님하고 “님”자를 넣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새는 운전기사도 “어이 김기사…” 했다가는 돌아오는 대답도 없다는데 “선생 사은 잔치에” 님자를 넣는 것이 건방지다는 후환을 방지하는 계책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님”을 남용하는 것을 비판해 왔는데 여기서는 님자를 붙이자니 왠지 느끼하고 아양이나 떠는것 같아서 그냥 “XX선생 사은잔치에”로 쓰고 말았습니다.

 요새는 서양에서 불어오는 민주주의인가 인권평등사상 때문인지 나라 안의 모든 직업이 일계급 특진을 하여 온 사회가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대학 선생은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선생님 뿐이었는데 어느새 교수님이 되어 있고, 간호부 혹은 간호원은 간호사님으로 바뀐지 옛날. 청소부는 환경미화원님으로, 운전수는 운전사, 운전기사를 거쳐 기사님으로 승급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죄를 지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수도 그냥 죄수가 아니라 죄수님이라고 “님”자를 붙여야할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진급이 안된 데가 대통령이지요. 옛날에는 대통령 각하였는데 그 사이 각하는 간다온다 말도 없이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엄청난 권위의식 속에서도 겨울의 인동초()처럼 평등의식을 확보하려는 당찬 의지로 대통령을 한단계 끄집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직업들은 모두 일계급 특진이 되었습니다. 본래 그랬어야지요. 대통령이면 됐지 각하는 또 뭡니까. 다 아참배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나이를 따지고 권위의식이 높은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가족관계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위계질서와 나이를 중요시하는  가족관계가 유교의 가르침에 힘입어 더욱 더 강화가 된 것 같습니다. 가족주의에서는 효(孝) 사상이 가정의 핵심을 이룹니다. 호란자식, 특히 아들이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서 봉양한다는 말입니다. 맨 꼭대기에 앉은 아들은 동생들을 잘 보살피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가정의 효 개념을 정치에 이용했습니다. 즉 가정에서는 효(孝)이고 국가에서는 충(忠)입니다. 국가는 가정의 연장으로 보기 때문에 이승만은 국부(國父), 그의 처는 국모(國母)로 부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가정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 그대로 사회생활에 적용되어 회사에서 평직원은 집에서 아우가 형의 말을 따르듯이 평직원은 과장말을 잘 따라야 하고, 과장은 부장의 말에 복종할 것을 기대합니다. 조직사회에서는 직위=사람이 되어 계장님, 과장님, 국장님, 사장님 하며 호칭이 곧 사람을 대신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권위의식이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감투에 대한 동경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 한국 사람 만큼 감투를 밝히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조직의 어른이 되면 인간적인 대접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느 대학의 대학원장과 꺼벙한 술집에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 아주머니가 “얘들아 원장님 오셨다”고 암행어사 출도 외치듯 큰 소리로 알리니 이 원장님은 고객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구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감투에 대한 동경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는 인간들이 여럿이 한데 모여 살 때 그러니까 동굴생활을 할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며 우두머리는 더 넓은 주거공간과 본 마누라 이외에 여러명의 처첩과 많은 특권, 그리고 많은 재물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517년 조선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드높이고 가문의 영예를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급제를 해야 벼슬에 나갈 수 있고 벼슬을 해야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에게도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물적, 심적 풍요로움이 따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과거에 급제를 동경하는 마음이 감투를 얻으려는 열성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자면 인간의 평등의식이 만개되어야 합니다. 평등의식의 꽃이 활짝 피자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언어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국회 법사위에서 회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개들 몇마리가 으르렁대며 싸우려는 꼴이라고 할 정도로 험악한 장면이었습니다. “왜 나는 XX씨로 불러?” 자기를 “…의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지요.

 호칭을 두고 한바탕 싸우는 의원도 있고 “나이도 어린 사람이…”하며 밥그릇을 무기로 공격하는 의원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나이도 어린 사람이…”로 공격받은 사람 나이가 몇살 더 위였다고 합니다.

 우리 말은 상대방에 따라 표현방식이 달라지고 매우 복잡합니다. 문장 자체가 아래와 위, 높은 이와 낮은 이, 주인과 도우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이 피자면 쓸데없는 권위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비교문화 학자 홉스테드(G. Hofstede)가 쓴 ‘세계의 문화와 조직’을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다른 여러나라와 비교해서 놀랍게도 권위주의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권위주의가 낮은 사회에서는 콘도미니엄의 청소부가 그 콘도미니엄 소유자와 굽실거리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사회지요. 우리에게는 퍽 가까와 보이는 곳 같이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멀지요. 멀다기 보다는 까마득하지요.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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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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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2
추억의 사인(sign)지

 

 내가 한국 E여대에 가 있을 때였습니다.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반에 있던 권수명이를 E여대 후문 근처 어느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수명이가 노인이 된 것을 보니 퍽 놀라왔습니다. 물론 나 자신은 노인이 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나는 E여대에 있는 동안 수명이와 가끔 만나 고향 안동 이야기도 하고 함께 학교에 다니던 동무들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사인지 돌리던 얘기가 나왔습니다. 사인지 돌린다는 것은 동창생들이 이제 졸업하면 사방으로 흩어질텐데 헤어짐을 섭섭해 하며 노트북만한 크기의 흰 종이를 듬뿍 사서 학우들에게 돌립니다.

그 종이를 받은 아이들은 사인지를 준 아이에게 기념될 말 몇마디를 적어서 되돌려 주면 사인지 행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녀석은 자기와 가까운 동무 몇몇한테만 사인지를 돌리는가 하면 또 어떤 녀석은 친하던 친하지 않던 한해동안 말 한 번 안해본 학우들한테도 돌리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나도 남들이 다 하니까 사인지를 돌렸는데 몇 장을 돌렸는지 기억도 나질 않고 지금은 돌아온 사인지는 한 장도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수명이 말로는 자기는 아직도 되돌려 받은 사인지는 전부 다 보관하고 있다네요.

 그 후 몇 주가 지났습니다. 수명이가 그가 받은 사인지를 아담한 책으로 엮어서 갖고 나왔습니다. 그 사인지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듯 반가왔습니다.

나는 나의 50년 전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수명이의 사인지에 써놓은 글들은 너무나 청순하고 한가로우며 심각한 내용이나 전혀 심각하지 않고, 장난기 가득한 그때 우리가 벌써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나 싶은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수명이 한테 써준 사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썼는지 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한참 웃었습니다. 내용도 별로 없는 것을 내깐에는 어렵게 쓰다보니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겠지요.

 “너는 무엇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라고 적고 한 구석에는 “To know is might, Bacon”이라고 적어놨습니다. 뭘 두고 아는지 모르는지란 말입니까? “이것이야 말로”로 시작되는 이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요?

 아무리 중학교 3학년 때에 썼다는 사인지라 하더라도 말도 안되는 말을 적어놨으니 50년이 지난 오늘에 읽는다 해서 더 낫게 보일리가 있겠습니까? 60~70년 전의 그리움도 오늘의 부끄러움이 된 것 뿐입니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의미없는 말 적기는 나와 별차이는 없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말은 “큰 성공을 거두라”는 훈계였습니다. 몇 녀석이 적은 것을 볼까요? “벗이여 풍파 많은 세상을 길 조심하며 성공의 금자탑을 쌓을 때까지 일로 매진하기를(Y)” “군은 원대한 포부와 희망을 안고 부디 성공하여라(B)” “학우 권장군이시여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아 성공해서 국회 석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K)”

 바야흐로 사춘기 시절, 싹트기 시작한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으스름 달 속에 졸업을 슬퍼하는 귀여운 여학생, 그는 수명이의 사랑하는 애인 xx였던 것이다(K)” “수명아 이놈아 장가가거든 X를 너무 하지 말어라. 이 소리 하고 보니 내 P가 또 서는구려(K)” “오 벗이여 부디 좋은 마누라 만나서 수박같은 아들 낳고 탱자같은 딸 낳아서 내 아들과 교환하자(K)”

 또 어떤 녀석은 ‘채근담’이나 ‘명심보감’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도덕적이고 점잖게 들리는 말을 적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유수같은 세월은 늘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는 너를 기다린다. 짧은 인생 값지게 살자(K)” “죄 많은 세상에 물들지 말고 오직 너의 깨끗한 마음 그대로 지키어 나가라(K)” “아름다운 장미는 가시가 있고 사랑에는 눈물이 많다(P)”

 사인지를 돌리던 아이들은 이제 모두 80을 넘은 노인들입니다. “청춘 소년들아 백발 노옹 웃지마라 / 공평한 하늘 아래 넨들 얼마 젊었으랴 / 우리도 소년행락이 어제런듯 하여라” 지은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시조 한 수가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맹호처럼 부르짖던 성공, 성공은 이제 사방으로 떠다니던 민들레 꽃씨 마냥 모두 어딘가에 가라앉았습니다. 한가지 후회가 있다면 그처럼 성공, 성공만 애절하게 부르짖지 말고 행복 행복을 부르짖었다면 좀더 여유있는 노인들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80 고지를 넘어섰습니다. 이럴 땐 지금부터 88년 전 노산 이은상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가고파’의 다음 구절이 옛 친구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이제는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애비 된 사이”의 “애미와 애비”도 “할매와 할배”로 고쳐 넣어야겠습니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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