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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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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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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성선설(性善說)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보는 견해로 중국의 철인(哲人) 맹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환경이나 물욕(物慾)은 착한 본성을 가리기 때문에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는 견해로서 뒷날 유가(儒家)의 정설(定說)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중국의 철인 순자의 학설입니다. 그러니 예(禮)를 배워 악한 마음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되는 주장의 시비를 가릴 때 예외없이 '증거'로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즉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태로운 순간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 해도 거의 반사적으로 얼른 손을 내밀어 그 아기를 붙들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성선설 측에서 내놓은 '증거'지요.


 이 두 가지 설을 두고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수천 년을 두고 시비를 했건만 눈곱만큼의 결론도 나지 않고 있습니다. 본래 성선설이 맞느냐, 성악설이 맞느냐 따위의 시비는 과학이 들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21세기 과학, 특히 북미대륙의 과학은 경험주의(Empiricism)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즉 과학적 연구대상이 되려면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경험으로 '있다' '없다'가 판단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명제가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겠지만 어떻든지 경험주의야말로 지금까지(특히 북미 대륙에서는) 자연과학과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하나의 큰 과학 사조(思潮)입니다. 성선/성악설 같은 것은 객관적 측정부터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 종교학자들의 논쟁거리는 되어도 과학적 연구의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성선/성악설로 돌아가겠습니다. 아기를 붙잡아 주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아이의 엄마 아빠가 직장을 하나 구해주겠지."하는 기대심리? "착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서 신문 방송에 소개되고 표창장까지..." 아니면 "나도 착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찬(自讚)에 그치고 말까요?


 맹자는 아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순간은 기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스프링처럼 튕겨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은 사람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입니다. 이런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해서 자라면 이것이 곧 석가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말이지요.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마음이 급하다든지 초조할 때는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이 줄어들지 않습니까. 그러니 남에게 신경을 써주고 남을 도와주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냐 아니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선설을 조금 확대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키워서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다면 우리 세상은 예수, 부처, 공자 같은 성현들로 꽉 차서 이상적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매일 낯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만날 뿐 아니라 그 주에서 경쟁관계, 이해관계가 얽힌 만남이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도 윤리학자 김태길 교수가 한 말대로 인(仁)이니 의(義)니 예(禮), 지(智), 신(信) 따위도 좋긴 하지만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말도 그 '남'이 전통사회 시절의 부모, 형제, 마을 사람들이 아니요 듣도 보도 못하던 사람일 때는 도와준다는 의미가 희미해질 때가 많지요.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남을 도와주려는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나[我]'라는 테두리를 넓혀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극히 좁게 정의된 '나'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그 테두리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내 앞길만 내다보며 내 자신만 돌보기에 바쁘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드물지 싶습니다. 그러나 석가나 예수 같은 성인은 '나'의 테두리가 극히 넓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내' 안에 끌어들일 수 있지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선한 마음, 착한 마음 둘 다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람이 몹시 악한 일을 저질렀을 때는 감옥으로 갑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에 더 많이 가고, 착한 사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에 덜 갑니다. 이걸 보면 성선, 성악의 본성이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많이 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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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2013년 1월 20일에 있었던 미국 제45대 대통령 오바마(Obama)의 취임식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았다. 나는 오바마의 정치 색깔을 좋아한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혼혈아가 심리적으로 외롭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커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개세(蓋世)의 영웅이란 바로 이런 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취임식 분위기는 축하 일색, 모두가 싱글벙글이다. 영부인 미셸은 마치 옛날 영국의 흑기사(黑騎士) 같은 인상을 주는 옷에 영화에서 본 '시바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분장을 하고 나와서 내 보기에는 곱고, 우아한 맛은 다소 떨어지지만 함박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귀엽다고나 할까. 취임식장으로 걸어가면서 주위에 아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인사 보내는 것을 잊지 않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취임식장에서는 인기 대중가수 비욘세(Beyonce)가 나와서 미국국가(Star-Spangled Banner)를 불렀다. 세상에!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그 엄숙하고도 엄숙한 자리에 대중가수가 나와서 국가를 부르다니. 한국 같으면 패티 김이나 조용필 같은 인기 가수가 나와서 애국가를 불렀다는 말인데,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날 취임식장 위 단상에서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나와서 미국의 전승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또 어떤 남자가수 하나는 기타를 들고 나와서 '미국 찬미가(America the Beautiful)'를 불렀다.


 미국에 태어나서 유치원만 다녔어도 다 알고 있을 노래들을 국민 모두가 다 아는 가수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나라. 이것이 바로 미국의 멋이요 매력, 힘이요, 생기다. 취임식 같은 자리에서 대중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사소한 일 뒤에 도사린 정신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미국 사람들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엄청난 시대정신(Zeitgeist)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정신이란 인류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 그리고 그 생각의 초석이 된 주권재민(主權在民: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사상이다. 이 사상들은 1620년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로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사람들의 피 속에 도도히 흘러내려온 정신유산의 DNA인 것이다.


 우리는 어떨까? 이런 행사에는 으레 이름난 성악가가 질(質) 높은 노래를 해야 한다. 또 이같이 엄숙한 날에 남자가 이[齒]를 허옇게 드러내며 기쁘다는 표정을 보여서는 안된다. 장례식 분위기 같은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 엄숙함이 지나쳐 비통에 가까운 표정이 전부일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거만하고, 굳고, 엄숙한 표정을 지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예의'로 되어있다.


 몇 년 전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한인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에 가본 적이 있다. 간담회란 정겹게 서로 얘기를 주고 받는 것. 그러나 그날의 간담회는 완전히 한쪽에서만 말이 나오는 일방통행이었다. 그날 내가 본 이 대통령 내외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교민 누구화도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고(만일 건넸다면 사과한다) 문자 그대로 돌부처요 망부석이었다. 희한한 간담회. 


 우리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은 지체 높은 어른이 지방 순시를 하다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하면 지체 높은 분이 먼저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닐까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공식적인 행사 중이라면 인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도 있었다. 우정에 대해서 이승수 님이 쓴 <거문고 줄 꽂아놓고>를 보면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이 그의 글 '논교(論交)'에서 옛날 월(越) 나라 민요를 인용한 것이 실려 있다.


‘자네는 수레 타고 나는 삿갓 썼거든/수레에서 내려와 인사를 해주시게/그대가 우산 메고 내가 말을 탔거든/기꺼이 자네 위해 말에서 내리겠네 (君乘車我戴笠 .... 他日相逢爲君下)’


 위의 노래를 보면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으스대던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좋은 점을 보고 우리도 저렇게 했으면 할때 우리의 '고유문화'를 내세워 외면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자기들의 계획을 관철해야 할 경우에는 "선진국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하며 선진국을 끌어댄다. 고유문화와 선진국의 편의에 따라 창(槍)도 되고 방패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요즈음 큰 행사 때는 '서민화'랄까? 거드름을 덜 피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숭을 떠는 거창한 연극이 아니라 국민들을 가슴속에 잠시나마 따뜻하게 해주는 취임식이라면 나도 기꺼이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20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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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동요(動搖) 예찬

 

 나는 동요(動搖)를 좋아합니다. 동요란 아동 가요의 준말. 동요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어린이들의 생활 감정이나 심리를 나타낸 노랫말' 혹은 더 간단히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적혀 있지요.


 동요를 부르며 위의 노랫말을 듣고 아름답고 천진스러우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맑고 명랑한 기분이 가슴 속에 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동요를 부르면 나는 매미채를 들고 잠자리를 쫓아다니거나 잔디에 뒹굴며 하늘의 뭉게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소년, 소녀가 됩니다. 


 이처럼 동요는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와 늙은이에게는 아름답고 고운 정서를 많이 느끼면서 정겹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나 같은 노인에게 동요는 유년시절의 온갖 회억(回憶)을 쏟아놓고 갑니다.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을 다시 가보면 웬일인지 마음 한구석이 슬프고 그 집에 살 때 있었던 즐거운 일, 괴로운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지 않습니까? 


 몇 년 전 나의 중매(仲媒)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지금은 캐나다 서부에 살고 있는 J형 부부와 함께 자동차로 6시간 남짓 걸리는 N도시에 있는 옛날 우리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38년 만에 찾아가는 옛집이었습니다. 자동차가 N시 입구에 들어서자 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와 참느라 무척 혼이 났습니다.


 사람은 커가면서 감정을 억제하거나 좀처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배웁니다. 자기의 진짜 감정은 숨기고 다른 엉뚱한 감정을 내보일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예로, 어릴 때는 무서운 생각이 들면 울고, 화가 나면 물건같은 것을 집어 던집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차차 감정을 억제하거나 숨기는 위장술(僞裝術)이 생겨납니다. 속으로는 겁이 나거나 화가 나도 이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은 누구나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 '위장술'은 점점 교묘해져서 때로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의 진짜 속마음이나 감정이 어떤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이란 연극 같다는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사교적이고 대인관계가 부드럽다고 하는 말은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위장술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말과 통하지요.


 나는 한국 E여대에 6년 반을 가 있는 동안 세상풍파에 젖지 않는 순수한 마음씨를 가진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리 요새 젊은이들이 되바라졌네, 영악스럽네 떠들지만 이 학생들을 보면 그런 말에 의심이 갑니다. 그래서 가끔 혼자 생각으로 이 순진한 학생들이 앞으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들을 키우며 세상살이에 시달리다가 어느덧 중년을 넘어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모든 것이 풀어져서 아무데서나 걸터앉아 짜장면을 먹고, 상점 점원과 말다툼에 가까운 흥정을 하는 용감무쌍한 드센 아줌마가 되겠구나 생각하면 씁쓸한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천진난만한 마음상태를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회에서 좋게만 봐주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위장술도 사회적인 압력에서 오는 것이니 사회적, 문화적 압력과 어긋난 행동에는 사회적 배척과 업신여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동요를 부르면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 강 저쪽에서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N씨, M씨, 나 이렇게 셋이서 가지는 색소폰(Saxophone) 3인 음악회 때 나는 동요 메들리를 프로그램에 넣고 메들리의 맨 마지막 곡은 홍난파의 <고향의 봄>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고향의 봄> 노랫말대로 춤추는 냇가의 수양버들과 지즐대며 흘러가는 실개천 물소리는 잠시 내 귀에 희미하게 들려 올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동요 같은 줄로만 알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70이 넘은 이날 이때까지도 이처럼 동요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아직 내 꿈과 사람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동요를 좋아합니다. (20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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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강상(綱常)의 죄(罪)

 

 우리는 무섭고 끔찍한 방법으로 저지른 죄(罪), 이를테면 사람을 죽여도 몹시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든지 아들이 부모를 죽인 것 같은 패륜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간혹 있다. 이럴 때는 '천벌을 받을 놈'이라거나 '하늘도 무섭지 않으냐?' '하늘이 내려다 본다'는 등 하늘을 끌어대며 혀를 찬다. 내 생각으로는 모두 허무맹랑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하늘은 바람을 일으켜 구름을 옮기고, 눈, 비, 폭풍, 번개를 품고 밝은 햇빛을 통과시키는 것이 하는 일의 거의 전부일 거다. 하늘은 넓디넓은 공간, 그러니 자율적 의지나 생명은 없다. 하늘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 절대 권력을 가진 전지전능의 그 무엇의 존재를 갈망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하늘을 끌어대는 죄는 주로 윤리, 그 중에서도 강상(綱常)윤리에 저촉되는 죄를 가리키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강상(綱常)이란 무엇인가? 강상이란 조선시대 때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이다.


 삼강(三綱))이란 유교의 근본이 되는 세 가지 강(綱), 영어로는 three fundamental principles in human relations이다. 즉 임금과 신하(군위신강), 어버이와 자식(부위자강), 남편과 아내(부위부강)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오상(五常) 역시 유교에서 나온 말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를 말한다. 영어로는 five moral rules라고 할까.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다섯 가지다. 상(常)이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질서 있게 하는 이법(理法). 오상은 인륜의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오륜(五倫)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람을 얽어매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던 현대의 보안법보다 더 지독한 그 법이 기승을 부리던 조선시대 때는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죄인에게는 가장 혹독한 형벌이 내렸다. 가장 흔한 얘로 노비(奴婢)가 주인을 살해하는 경우, 삼강의 군신유의를 확대한 죄니 무조건 종에게 사형이 내렸다. 노비는 어떤 경우에라도, 설사 주인이 종의 아내를 빼앗아 갔다 하더라도 주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 손경희 님의 책을 보면 자기 홀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는 것을 알고 이 사실을 관가에 고발했더니 처벌받은 것은 간통한 어머니가 아니라 도리어 그 딸이었다고 한다. 딸이 어머니를 고발한다는 것은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중죄(重罪)이기 때문이란 것.


 왜 이렇게 엄격한 강상윤리가 태어났을까? 조선은 고려를 부정하고 세워진 왕조. 마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권의 모든 것을 배척 혹은 무시한 것처럼 조선은 고려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들었다. 우선 건국에 공(功)을 세운 공신들에게 보답을 해야 하는 시급한 요구. 그래서 공신들에게는 나라에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가 내려졌다. 


 그 결과 이성계의 건국, 왕자의 난(亂), 세조의 왕위찬탈 등을 지나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공신 수가 부쩍 늘어났다. 그 공신들은 평생 호의호식하며 그 자손들까지 세를 불리다 보니 한정된 토지와 노비는 바닥이 나고 분배상 갈등을 초래했다. 조선은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수입 노비는 없는 나라. 이런 환경에서는 노비공급을 위해서 노비신분을 오래 오래 지속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반 상놈으로 짜여있는 사회구조에서 기득권층의 특권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절실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온 강상(綱常)윤리는 하늘의 뜻이니 두말 말고 운명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새 왕조의 엘리트들이 통치이념으로 만든 삼강오상은 500년이 넘도록 백성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었다. 그러나 그 법은 조선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삼강오상 대신 오늘날 무엇이 들어섰는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새로운 법도는 무엇인가? 내가 알기로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돈을 벌어서 치부(致富)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돈만 있으면 강상윤리고 뭐고 필요 없다. 그러나 부(富)는 약(藥)도 되고 독(毒)도 되는 법. 부(富)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을 받을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내가 한국을 떠난 1960년대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100년, 200년 뒤에도 있을 것이다.


 하늘이 벌을 내린다던 그 엄숙한 하늘로 사람 실은 비행기가 날고 로켓(rocket)도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이제 하늘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하늘이 내린 죄건 아니건 속세(俗世)의 인간들이 저지른 범죄의 수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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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재미

 

 지난 5월 4일, N형, M형, 나 이렇게 셋이서 색소폰으로 가곡, 가요, 동요를 연주하는 삼인 음악회가 열렸다. N형은 일흔 하나, M형은 일흔 둘, 나는 일흔 세 살로 채운 밥그릇 수로 말하면 이 셋중 내가 나이가 제일 고령인 '어르신'이었다. 그러나 N형과 M형은 고등학교 시절에 밴드부에 있었던 관계로 소위 빳다(bat:: 배트)를 맞아가며 배운 노장들이라 시곗바늘처럼 정확한 악사들, 나 혼자만 악보도 볼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V 교회를 빌려 열린 이 행사에는 넓은 주차장이 그득하다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왔고 나를 빼고는 모두가 실수 없는 연주를 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친교실에서 열린 리셉션 자리에서는 "오늘 음악회가 참 재미 있었다"는 예의성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재미'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말이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다른 표현을 열심히 생각해 보았으나 얼른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왜 다른 표현을 생각했을까? 이 재미라는 쉽고 자주 쓰는 단어 속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동양 문화권에서는 듣는 이에 따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쉽기 때문이다. 서생(書生)들에게 그들이 쓴 책이나 논문을 '퍽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깊이가 없고' '가볍고' '학문적이지 못하고' '중후한 맛이 없는' 책을 읽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서양 문화권에서는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는 사람들이 대중의 갈채를 받지마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어렵고, 무겁고, 중후하게 써야 학문적으로 깊이가 있는 것으로 칭찬 받는다. 시(詩)나 수필 같은 문학작품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면 어딘지 모르게 읽은 작품이 너무 가볍게 흥미 위주로 쓰여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


 한번은 내가 주례를 선 자리에서 신랑 신부에게 재미있게 살아라는 내용의 주례사를 했더니 나중에 어느 하객 한 분이 와서 새 인연을 맺고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 재미있게 살라고 해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 어떻게 살라고 했어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둘이서 화목하게 살아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다. 재미가 있으면 화목할 게고 화목하면 재미가 있게 되지 않는냐고 대답하고 말았다.


 참으로 재미란 말은 여러 의미가 섞여 있어서 자칫하면 엉뚱한 말로 들리기가 쉽다.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맛’이나 ‘좋은 성과나 보람’도 재미, ‘요즈음 재미가 어떻소?’ 하고 요즈음 생활 형편을 묻는 말도 재미요, 어느 두 기혼 영화배우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는 가십(Gossip)거리도 재미로 들어간다. 사업하는 사람이 ‘이번에 재미를 좀 봤다’ 하면 이익을 많이 남겼다는 말이요 ‘정말 이렇게 재미없게 나올 작정이요?’ 했을 때는 협박하는 말이 된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이란 말 속에는 감각적이고, 가볍고, 깊이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의미도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정신건강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강연 참 재미있게 들었습니다"는 칭찬을 던지고 가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너무 약장사 스타일로 떠들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재미가 부른 남이 저지른 ‘실수’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생각난다. 어느 결혼식에 갔더니 주례가 신랑 신부 앞에서 한다는 말이 “오늘 밤에 신랑이 신부를 다룰 기운이 있는지를 검사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여기서 키스를 해 보십시오.” 하는 지시를 내리는게 아닌가 이건 분명 실수, 시쳇말로 ‘오버’다. 주례가 제깐에는 주례사를 재미있고 톡톡 튀는 스타일로 해보이려는 욕심이 지나치다 보니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를 다루는 기운을 테스트하기 위해 키스를 하라는 것은 애당초 시험 문제가 잘못된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재미란 말은 오해할 여지가 너무 커서 함부로 쓸말은 아닌 것 같다. 이 말 하면 이렇게 걸려들고, 저 말 하면 저렇게 걸려드는 사바 세상.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게 최상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같은 떠벌이가 10분만 말 않고 있으면 욕언증(欲言症: 말을 하고 싶어 미치는 증세; 글쓴이가 만든 말)에 걸려 자리에 드러눕고 말 것 같으니 그 일도 낭패라면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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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점심 내기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한가한 날이었다. 10층에 사는 H형, 우리 동네에 살다가 M시로 이사를 한 C형 그리고 이웃 동네에서 놀러 온 S형. 이렇게 네 집이 점심을 한 적이 있다. 물주(物主)는 H형. 그 자리에서 세 밤만 자면 있을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벌어질 시합은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H형과 나는 일본을, C형과 S형은 한국의 승리를 점쳐서 예측은 2:2로 갈라졌다. 이런 일에는 하루종일 시비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법. 점심내기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의견이 엇갈릴 때는 냉면 한 그릇 내기로 처리하는 저속한 버릇이 있다. 지금까지의 나의 승률은 7전 6승 1패. 비교적 높은 승률을 은근히 뽐내고 있던 차였다. 나는 일본의 승리를 꺼내는 바람에 억지 춘향격으로 매국노가, C형과 S형은 한국의 승리를 예언함으로써 애국지사가 되고 말았다. 냉면 한 그릇 때문에 적과 동침을 해야 하는 비극. 언젠가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 "부모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부모가 우는" 꼴이 됐다. 애국심으로 국산 자동차를 살까, 아니면 이기심(利己心)으로 외국 차를 살까 고민하는 갈등 상황과 비슷하다.


 애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애국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천태만상, 도저히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한국에 나가 있을 때였다. 하루는 퇴근길에 학생들이 반미 데모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데모에 참여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나이키(Nike) 운동화를 신고 하나같이 이스트 팩(East Pak)인가 하는 당시 미국 상품으로 한국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가방을 메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보는 순간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은 "얘들이 재미로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은 10여 년 동안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제 운동화와 미제 가방을 메고 반미운동을 한다고 그들의 운동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지 현실은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고서야 내가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생각과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은 실로 복잡하다.


 애국을 소리높여 외치는 애국지사들의 행동을 보면 실망할 때가 많다. 이들 우국지사 중에는 세금 포탈로 구속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뇌물을 주고 받다가 걸려든 사람,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한 사람, 사기행각을 하다가 철창신세를 진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요컨대 행동면에서는 우리네와 눈꼽만큼의 차이도 없다는 말이다.


 애국을 한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위험하다. 애국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자기 직업에 충실한 말없는 풀뿌리 시민들도 애국지사들인 것이다.


 한국에 가면 피 뜨거운 애국지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들이 외치는 구호가 때로는 지나치게 뜨겁고 좁디좁은 견해를 내세운 독선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의심이 가는 사람은 친일의 찌꺼기" 같은 구호는 지나치게 단세포적이고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구호이다. 우리가 진정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이 정도의 다른 견해는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신문을 보니 일본 어느 대학교수 두 사람이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고 대한민국 땅"이라는 요지의 책을 따로 따로 출간했다는 기사가 났다. 틀림없이 이 두 교수의 주장을 못마땅해 하는 일본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교수의 주장에 일본 어느 구석에서도 눈에 띄는 반대 의견의 소동(騷動)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어느 교수가 "독도는 한국 영토가 아닌 것 같다"는 책을 썼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무사할까? 우리에게는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지마는 나와 다른 의견도 풍요할 수 있는 아량이랄까 정신적인 여유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의 첫머리부터 "일본이 축구시합에서 이길 것이다.", "일본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는데 우리보다 관대하다"느니 따위의 일본에 유리한 말만 하다 보니 정말 친일파로 몰려 따귀라도 한 대 올라올지 모르겠다.


 내기를 한 후 한 3주쯤 지났을까. 네 집이 어느 일식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물에 먹이가 걸렸다고 기고만장하던 7전 6승 1패 기록의 보유자 불초소생(不肖小生)도 풀이 죽을만큼 죽었다. 구렁이 알 같은 내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이런 내기는 열 번을 져도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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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수박 도둑

 

 하루는 토론토에서 발간되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호텔스닷컴이라는데서 세계 28개국 여행객 8,600명을 대상으로 호텔의 목욕수건이나 재떨이, 다리미, 책 같은 물건을 몰래 가져온 적이 있는지 여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결과를 나라별로 보면 덴마크와 네덜란드 사람들의 88.7%가 "아무것도 집어 온 것이 없다"로 답해서 가장 양심적인 고객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북유럽 사람들은 84%로 상위권에 머물렀다. 캐나다는 어떨까? 불란서계 캐나다 사람들은 81%로 영국계의 70%보다 11%가 더 높았다. 불란서계 캐나다 사람들은 81%로 영국계의 70%보다 11%가 더 높았다. 불란서계 캐나다 사람들이 더 양심적이란 말이다. 최하위를 장식한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로 각각 60%와 43%였다.


 설문조사란 어디까지나 설문에 응답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렇단 말이지 실제 행동이 그렇단 말은 아니다. 어쨌든 호텔 물건을 주인 허락도 없이 슬쩍하는 것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구태여 다른 것이 있다면 가게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있으나 호텔은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차이라고나 할까.


 캐나다에 유학 와서 처음 맞이한 1967년 여름방학 때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67 박람회장에 있는 어느 자그마한 한국기념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파는 상품은 젓가락, 전통 담뱃대, 재떨이, 한국 인형, 태극기가 그려진 볼펜 등이었다. 그때 박람회장 주위에 손버릇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여러 가게에서 손실이 크다는 말이 떠돌았다. 


 하루는 몬트리올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가젵(Gazette)> 기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내게 물어온 말은 "한국에도 가게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느냐? 있으면 캐나다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가 일 년이 안 되던 때라 애국심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던 이 젊은 우국지사의 대답: "한국에도 가게에서 물건을 집어가는 사람은 있다. 한국에서는 도둑과 도둑 아닌 사람들 간에 차이가 있어서 도둑이 아닌 사람은 들킬 염려가 없어도 남의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교육을 많이 받고, 보기에 점잖은 사람도 일단 기회가 생기면 도둑으로 변한다. "


 캐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잠깐 사이에 도둑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튿날 몬트리올 신문에는 나의 인터뷰 내용이 꽤 큼지막하게 지면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날 내가 한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캐나다 생활이라고는 10개월밖에 안되는, 그것도 대학교 안에서만 왔다 갔다 한 우물 안 개구리, 내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을 본 것이라고는 당시 밴쿠버에 살던 몇몇 사람뿐이지 않은가. 


 교육받고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온 세상 인종들이 북적대는 박람회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캐나다 사람들이라는 증거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도 없으면서 마구 너스레를 떨었으니 나의 무식과 용맹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있을까?


 법에 어긋나는 일을 수없이 저지르고도 장관 후보로 지명되어 청문회 자리에 불려나온 어느 더러운 지명자처럼 좀도둑질에 관한 한 나 자신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밤이면 낙동강 모래밭에 누워 놀다가 강 건너 들판에 있는 땅콩, 참외, 수박밭에 몰래 기어들어 가 도둑질하던 전과(前科)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리 참외 몇 개 훔쳐 먹는데 그치는 장난이라 해도 도둑질은 도둑질. 


 남의 외.수박을 몰래 실례하는 것과 호텔 목욕수건을 집어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무리 젊은 시절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남의 농작물을 해치고 다니던 수박 도둑이 "캐나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둑이 된다"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호텔 물건을 집어가지 않는다고 진술한 덴마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정말 그럴까?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 그 둘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정도는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키나 체중, 허리둘레 같은 물리적 특성에서는 자기 진술과 실제의 일치 정도가 크다. 그러나 물건을 훔쳤느냐 아니야 같은 정직성이나 책임감 같은 추상적이고 도덕적 비중이 무거운 특성에서는 말과 행동 간의 일치도는 낮아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좋고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덴마크나 네덜란드 사람들도 자기들이 말하는 정도 보다는 더 자주 호텔 물건을 집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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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나는 컴맹이다

 

 중국 사람이 한시(漢詩)를 모르면 중국 사람이 아니요, 일본사람이 하이구(俳句)를 모르면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뭘까? 우리 옛시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수 천수(首)가 넘는 시조(時調)가 쌓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좀처럼 애송하지 않는다. 크나큰 문화유산에 대한 홀대다. 몇 년 전 내가 <세월에 시정을 싣고>라는 시조 감상 책을 펴냈을 때 대학 동창 하나가 "너는 요새 유행하는 것은 하지 않고 왜 그리 고리타분한 것에만 열심이냐?"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 친구가 말하는 요새 유행하는 것이란 컴퓨터와 영상미디어, 그래픽 디자인 같은 것을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오늘까지 컴퓨터를 쓰지 않는다. 요새 점점 들어보기 어려운 말, 즉 컴맹이다. 컴퓨터를 쓴데야 내게 오는 전자우편이나 받아보는 정도. 그 외 다른 것, 이를테면 편지를 보낸다거나 문헌 조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오늘날 컴퓨터를 모른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태곳적 동굴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컴퓨터는 고사하고 나는 스마트폰이니 디지털카메라 같은 첨단 문명의 이기(利器)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예로, 컴퓨터를 통해서 온 편지를 받으면(내게 편지를 보낸 여러분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무슨 공지 사항을 알리는 홍보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편지에는 보낸 이의 땀과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전자우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것에만 열심이라는 것은 내가 옛시조를 감상하는 책을 썼다는 이유다. 우리는 호머(Homer)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 각본을 읽을 때는 고리타분한 짓을 한다기보다는 '고전 탐구'니 '명작 섭렵' 따위의 고상한 말로 포장하지 않는가.


 텔레비전도 흑백을 보다가 남들보다 이삼십 년은 뒤늦게 들여놓았다. 뉴욕에 살던 친구가 한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면 주고간 스테레오(stereo)다. 음반을 조용히 두 손으로 잡아서 제자리에 앉히고 바늘을 갖다 대면 음반이 돌아가며 소리가 나오는 것이 요새 유행하는 CD 음악의 2배, 3배는 노래 듣는 기분이 난다. 내게 있어서 음악은 분위기다. 이런 사례를 살펴보면 분명 나는 정신적으로 중세기 사람이다.


 나의 이런 성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도 모른다. 현대 심리학도 이에 대한 시원한 답을 내놓을 만한 수준은 못된다. 고려 때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망와서 숨었던 심심산골, 보이는 것이라곤 산과 계곡, 강줄기 밖에 없는데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같은 사람이 고리타분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릴적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회피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이론은 허점이 너무 많다. 하나의 예로, 두메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한 둘인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자랐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시골티를 말끔히 벗어버리고 모든 면에서 최신을 좋아하는데 나만 왜 이렇게 제자리 걸음인가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


 위의 의심은 곧 "왜 이 사람은 이것을 좋아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좋아할까?"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른다. 몇 십 년 전에 하버드대학교 교수 로(A. Roe)라는 사람이 "왜 어떤 이는 철학이나 역사학 같은 문과(文科)에 흥미를 갖고, 어떤 이는 물리학이나 지질학 같은 이과(理科)에 흥미를 갖는가?"라는 직업 흥미의 기윈에 대해 발표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흥미의 기원에 관한 두드러진 학설은 없는 것으로 안다. 인간의 집단행동에 대한 설명도 잘 못하는 수준인데 이동렬이라는 한 개인이 왜 복고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는 더욱더 어렵다.


 무속인(巫俗人)들에게 어쩌다가 무속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대답이 "신(神)의 내림을 받아서 무속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늘의 부르심, 즉 소명(召命)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앞으로는 나도 왜 그리 고리타분한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오면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기 보다는 무속인을 닮아 신이 들려서 그렇게 되었다면 더 간단명료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었다. 아들 정조가 천신만고 끝에 왕좌에 올라 등극 첫 마디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하는 외침이었다 한다. 자기 아버지를 뒤주 속에 넣고 굶겨 죽인 무리들에 대한 보복을 선언한 것이다. 나는 정조 같은 원(怨)도 한(恨)도 없다. 그러나 나도 다짐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정조를 본따 크게 외쳐본다.


"나는 컴맹이다!"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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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대중음악

 

 올 2012년 슈퍼볼(Super Bowl)이라 불리는 1967년에 시작된 프로 미식축구의 왕자 결정전은 보스턴과 뉴욕 두 도시에 있는 팀들 간의 대결이었다. 슈퍼볼은 문자 그대로 미국 사람들의 눈과 귀를 두세 시간 동안 하나로 묶어두는 초대형 경기. 나는 40년 이상 미식축구를 봐왔기 때문에 6만, 8만, 어떤 때는 10만이 넘는 관중이 그 큰 경기장을 가득 메운 모양만 봐도 마음이 즐겁고 설렌다.


물론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약간의 행사가 있고 가수가 나와서 미국 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른다. 6만, 8만, 10만 관중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가수에게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일 거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미국에서 첫째 둘째가는 테너나 바리톤이 아니요 엘튼 존(Elton John) 같은 대중가요 가수들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김원영이나 송창식 같은 가수랄까. 노래를 부르는 스타일도 제멋대로, 어떤 가수들은 애국가를 부르는 꼴이 정말 가관이다.


 미국 국가가 어떤 노래인가 뒤져봤더니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1814년 미국군 요새가 영국군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 애국심이 발동, 시(詩)를 쓴 35살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시인 키(F. Key)라는 사람. 그가 쓴 시에다가 전부터 미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내려오던 곡조, 즉 영국 런던에 있는 어느 술 마시는 사교클럽을 위해서 스미스(J. Smith)라는 사람이 작곡한 노래(To anacreon in Heaven)의 멜로디를 갖다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 1931년 3월 미국 국회의 승인을 얻어 미국 국가(國歌)로 승인되었다.


 한 나라의 국가(國歌)를 다른 나라 사교클럽을 위해 작곡한 노래의 멜로디를 지정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형식과 겉모양새를 중시하는 유교 전통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당대 어느 최고의 작곡가에게 위탁했을 것이다.


 우리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철저히 구별한다. 클래식은 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은 사람들이, 대중음악은 교육 정도가 낮고 못배운 살람들이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소리를 재료로 하여 박자(리듬), 화성, 선율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교묘하게 조합해서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인데(물론 서양음악 기준으로 그렇단 말이다.) 대중음악은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소양과 이해가 별로 없어도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음악 어디에 있나>라는 좋은 책을 쓴 이동식 님의 말을 빌리면 한마디로 클래식은 양반음악, 대중음악은 상놈음악이라는 것.


 그런데 누구나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가라오케 노래 연습장 같은 델 가면 클래식 성악은 거의 힘을 못쓰고 대중가요가 판을 친다는 것을. 합창단 단원이라고 은근히 뽐내던 사람, 성가대 단원, 슈베르트(F. Schubert)나 어느 오페라의 아리아 구절을 흥얼거리고 다니던 사람, 이미자나 조용필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도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신나게 뽕짝을 불러댄다. <만남>은 물론 <소양강 처녀> <사랑의 미로> <굳세어라 금순아> <마포종점> 도 나온다. 상놈음악이 양반음악을 짓뭉개고 있는 것이다.


 이동식 님의 지적대로 미술은 서양화-동양화라고 하더니 요새는 서양화-한국화라고 까지 하며 우리 소리를 어느 정도 내고 있다. 그러나 음악은 그렇지를 않다. 서양음악-한국음악도 아니고, 음악-전통음악(혹은 국악)이란 말을 쓴다. 음악=서양음악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중고등학교까지 통틀어 6년 간이나 음악시간이 있었지만 음악시간에 전통음악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배워 본 적도 없다. <아리랑> <노들강변> <도라지> 같은 것은 전통음악에 포함될 것 같은 노래들인데 음악시간에 배운 것은 한번도 없다. 참으로 헛되고 위선적인 음악교육의 환경 속에서 6년을 묵묵히 견뎌냈다.


 박찬호 님이 펴낸 두툼한 책 두 권 <대중가요사>를 보니 우리가 곡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도 <마도로스의 노래> <여인의 호소>라는 대중가요 두 곡을 작곡했다고 적혀있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하기야 그 당시 여명기는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의 벽이 오늘처럼 높지 않을 때. 이 두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를 들어서면서부터였다고 대중가요사 전문가들은 말한다.


 어느 책을 보니 한국음반 판매 상점에 가면 75%가 국내가요, 20%기 팝뮤직, 5%가 클래식이라고 적혀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음반회사의 시중 판매처럼 음악인구의 5%가 되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요즈음 들어 젊은 세대들이 클래식 공연에 잘 가지 않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한국의 어느 유명 관현악단 단장을 지낸 H씨가 꺼낸 "아무리 유명한 클래식 음악 단체라도 그들의 전통적 보수적 음악을 약간 누그러뜨리지 않고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는 말이 생각난다.


 감동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자극 자체의 차이에서 오는 감동이라기 보다는 청각 자극의 인지적 등록 여하에서 오는 것일 때가 더 많지 않을까. 대중음악은 클래식에 비해 접할 수 있는 때와 장소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대중음악을 상놈으로 내몬 여러 이유 중의 하나도 되지 싶다. 음악이 예술이라면 대중음악도 예술. 대중음악이 고상하지 못하다면 예술도 고상한 예술이 있고 고상하지 못한 예술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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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0
나의 미술 작품 감상

 

 지난 10월에는 토론토에서 2개의 전시회가 열렸다. 하나는 온타리오주 한인미술협회 연례 전시회였고 또 하나는 서예가 L 씨가 주선한 한.중.일 세 나라의 국제 서예전이었다. 미술 전시장에 나갔더니 한국일보 K 사장이 지나가는 말로 앞에 나가서 한마디 하겠느냐고 하기에 사양했다. 그 사양은 내 겸양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의 부족 때문이란 게 더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에 열린 서예 전시회에서는 L 씨의 요청으로 간단한 축사를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 살던 대학시절에는 해마다 10월이 오면 경복궁에서 열리는 국전(국립미술전시회)에 갔다. 서예실은 물론, 그 옆방의 서양화, 동양화 전시실도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술 작품은 이론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어떤 작품이 좋은 것인지는 서양화, 특히 추상화와 조각 부분에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현상은 지금도 그렇다.


 미술은 무엇인가? 미술(美術)은 말하자면 먼저 미(美)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미(美)가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미학(美學)을 먼저 설명해야 된다는데, 미학은 철학에 속하는 학문 분야, 나 같은 사람이 그것을 설명할 실력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미술이니 미(美), 미학 따위에 반드시 깊은 소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예건 동양화, 서양화건 감사의 제1단계는 직관(直觀) 혹은 직각(直覺)이다.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들어오는 첫 인상, 즉 직감(直感)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감사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 직관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쉽게 오는 것은 아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봐서 예술작품을 만든 작가의 정신이 내 마음과 서로 통할 때 비로소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진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보고 '와!' 하는 감탄사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다시 말하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 곧 미술 감상이란 말이다.


 직감으로 작품 감상하는 힘을 기른다고 <세계 명화 전집>을 갖다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페이지를 훑었다 해도 미술작품 감상에 필요한 직관력이 단박에 불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는 생활환경 속에서 세월이 가며 이끼처럼 달라붙는 것.


 그런데 미술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옛날 동굴 벽화에서 고래, 사슴, 호랑이, 물고기 등의 벽화가 있었으니 그 원시인 시대에도 벌써 미술 행위는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미술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 여가(餘暇)에 자연스럽게 창작 욕구의 발현으로 일어난 활동이라는 주장에 수긍이 가질 않는다. 미술교수요 수필가인 김용준은 미술은 인간의 제2차 본능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美)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은 미술가의 순수한 감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나타날 때는 무엇이든 미(美)가 된다. 길가에 흘린 개[犬]똥을 그림 소재로 그렸다 해서 그 그림이 더러운 것은 아니다. 화가의 순수한 예술적 감정을 거쳐 나온 것은 모두 예술품이 된다.


 화가 중에는 이론적인 점을 들어 작품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제2단계의 분석적 감상이라 할까. 그림의 구도(構圖), 선(線), 색감, 소재, 공간 처리, 묘사 실력 등에 대한 것을 해부하듯 하나하나 뜯어보는 방법이다. 나는 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분석적 방법에는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이론이 화가 자신의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지 싶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있으면,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의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일단 작품으로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예술 작품은 아무리 그것이 이론적으로 완벽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 하더라도, 실패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마음을 지고지순한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것은 예술밖에는 없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거다. 나는 전시회에 가면 작품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나만의 기이(奇異)한 감상법을 실험해 볼 때가 있다. 즉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예술가, 이를테면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시인들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본다. 그러면 세상은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어둠 속, 지옥이 바로 이런 데가 아닐까? 


 이런 공상을 하면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미술작품을 만든 작가의 예술적 정신과 내 정신이 서로 만난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 결과 그림에 대한 나의 감동은 더 커지고. 내가 갖다 붙인 이름은 '초(招) 공상(空想) 미술 감상법'이다. 내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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