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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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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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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1
하늘

 

 사도세자는 28살 때 아버지 영조가 그를 뒤주 안에 넣어 물 한 모금 안 주며 굶겨 죽였습니다. 세상에! 임금 애비가 다 장성한 세자 아들을 죽이다니. 이 끔찍한 비극이 지나간 뒤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을 모두 4번이나 썼습니다. 아들 정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고 나서 쓰고, 정조가 죽고 나서 또 썼습니다. 왜 이렇게 여러 번 썼을까요?

 

 정조는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거대한 노론세력에 보복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홍씨의 친정은 노론세력의 노른자. 그러니까 혜경궁 홍씨의 삼촌 되는 홍인한도 정조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로 간 원흉으로 처형되고 바야흐로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몰락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니 사가(史家)들은 첫 번째 회고록은 지나간 비극을 되돌아보기 보다는 망해가는 친정을 구하려는 정치적 성명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첫번재 회고록에서는 정조의 눈길이 무서워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정신병이란 말은 정조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회고록에 나온 말이지요. 좌우간 혜경궁 홍씨는 “하늘아, 하늘아” 하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늘 말고는 이 처참하고 어이없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으랴’ 하는 자포자기의 탄식입니다.

 

 하늘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요 쉼터입니다. 착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하늘이 자기를 지켜주리라 믿고, 악한 사람은 하늘이 자기를 너그럽게 감싸줄 것이라 믿지요.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걸어가다가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 우러러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가던 길을 간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을 생각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하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늘마저 나를 버리는구나. 그렇다면 가야지” 하며 스스로 체념하며  운명을 내던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늘을 무서워하거나 겁내지는 않습니다. 하늘은 그냥 하늘입니다. 옛날 내가 어렸던 시절, 남의 수박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나님이 내려다 보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은 인간의 운명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에 일어나는 모든 일, 태어나고 죽는 일, 사업이 잘 되고 안 되는 일, 죽음이 모두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면 우리에게는 큰 저주의 대상도 되지만 큰 위안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는 것도 운명이라면 구태여 자동차를 빨리 몰지 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지요. 모든 것이 운명인데-. 운명이란 아무리 비켜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는 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인간적 위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일을 내가 발버둥친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간의 길흉화복과 명운을 설명하려 듭니다. 그 설명이란게 꽉막힌 순환논리로 짜여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되다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매우 거북한 설명이지요. 이웃을 도우며 가난하고 착하게 살던 사람이 50도 되기 전에 죽은 사람도 운명, 나쁜 짓만 골라가며 저지르고 다니던 개망나니인데도 천수를 누리며 잘살다 죽는 악인도 운명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런 운명을 왜 믿고 살아야 하는지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인도사람들은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도와주지 않는답니다. 전생에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도와준다는 것은 그들의 운명을 거역하는 행위와도 같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운명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떠들어도 우리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김방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 노자와 공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자(老子)는 “하늘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가 아끼는 제자의 한 사람인 안연이란 사람은 착하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남을 도우며 가난하게 살았는데도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 도척(盜?)이란 사람은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가며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천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마지막 숨을 거뒀답니다. 하늘은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고 했는데 젊어서 죽은 착한 안연, 천수를 누리다 죽은 악인 도척을 생각하면 하늘의 보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이라는 중국 한무제 때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임금의 미움을 사서 궁형(거세)을 당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의 죽음이나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 도척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대답은 흐리멍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선을 생각하는 사람과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은 눈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잣대로 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인간 세상은 불평등이 가득하다. 이렇게 불평등하단 것이 바로 천명”이라는 것. 사람의 길흉화복이 모두 서로 다르니 이 천명에 순종하라고 권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하늘은 OK, 저렇게 살아도 OK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다본다고 겁낼 것 없지 않습니까.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뒤주 속에서 죽게된 비극 뒤에는 자기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있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혀서 “하늘아, 하늘아”로 끝내며 두 손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서럽고 끔찍한 변괴를 이해하겠느냐는 절망의 표시였겠지요. 하늘을 원망했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물음만 던졌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둘 다였지 싶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가 자기 남편을 죽이는데 맨 앞장을 섰던 사람이 무슨 제정신이었겠습니까?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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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저항과 복종

 

 우리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 혹은 억제하려는 힘을 느낄 때는 반사적으로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 혹은 반항을 한다. 어린 정식이가 혼자서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정식이 여기 와서 노래 한번 해라”는 지시가 내리면 정식이는 노래를 되려 부르지 않을 확률이 크다. “노래 한번 해봐”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지시에 손종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저항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오는 힘에 저항하는 것을 영어로는 reactance(저항)라고 한다.

 

 이 저항 행동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유기체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어릴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살다가 무덤에 가는 날까지 우리 속에 살아있는 특성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혁명이나 조선 말기에 있었던 홍경래 난, 동학농민항쟁, 4.19, 5.18 등의 민주항쟁은 시민저항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신체적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살이를 하는 죄수라도 마음은 자유천지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상상하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으로 구속을 당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구속되지 아니하고 버티며 자유천지에서 살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저항의 반대는 복종이다. 복종은 권위에서 나오는 힘에 저항 않고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한다. 권위의 지위가 높고 정당할수록 쉽게 복종이 뒤따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그를 에워싸고 그 밑에서 충성하던 몇몇 정치인들은 대통령이라는 높은 권위에 옳고 그른 일을 구별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그의 지시에 복종의 길을 걸었다. 너무 무분별한 복종은 간신의 행동과도 통한다.

 

 나의 대학원 시절에 미국 예일대학교 실험실에서 조작된 복종을 연구한 심리학교수 밀그람(Milgra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의 실험에 자의로 참가하였던, 어느 모로 보아도 정상적인 미국 성인들의 절반 이상이 실험자가 지시했다고 무력한 피험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강력한 벌(전기쇼크)을 기꺼이 주더라는 지나친 복종현상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피험자가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움으로 소리치는 것을 듣고도 실험자가 지시했다는 것. 그의 명령을 따랐다는 말이다.

 

 조선은 27대 517년을 지탱했던 왕조였다. 이 정도면 오래 가기로는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왕조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 왕조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당시 조선사람들이 권위에 쉽사리 복종하는 버릇이 한몫 했지 싶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삼강오륜 중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니 신유의(君臣有義)니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권위에 복종을 암시하는 것들이 아닌가. 임금의 말이나 지시라면 무조건 복종했기 때문에 517년이나 지탱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때는 남을 치명적으로 황폐화시키는 수단으로 상대를 역모(逆謀)로 얽어매는 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광해군 때 6살밖에 안된 영창대군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는 것을 보면 이 역모죄라는 것이 얼마나 쉽고도 가혹한 형벌인지 짐작이 된다. 세월이 흘러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는 빨갱이 내지 좌파가 역모가 섰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말이 민주정부이지 국민들을 공포분위기의 공안(公安)정국으로 몰아넣는데 눈이 빨개진 위정자들은 대를 물려가며 걸핏하면 무고한 시민을 좌파빨갱이로 몰아세우는데 열을 올렸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시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재산과 목숨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주위를 살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걸핏하면 역모요,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아넣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반대의사, 즉 건강한 저항정신이 살아남기는 힘들다.

 

 저항 혹은 반대가 이처럼 무시되는 풍토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우리에겐 건전한 토론문화가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문화심리학자 니스벳(R. Nisbett)을 따르면 서양문화에서는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토론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으나, 집단원 간의 화목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동양문화에서는 진정한 토론문화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꼼꼼히 따지는 것은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토론은 진정한 의견을 말할 자유를 전제하는 것. 군대에서나 관료사회에서는 복종이 하나의 미덕이요 사회생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복종을 한다는 것은 의견의 자유선택이 들어설 자리가 줄게 마련이다.

 

 옛날 봉건사회에서 노비가 주인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민주사회에서는 권위가 누구든 그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던 미덕은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자기주장, 자기생각을 남들 앞에서 씩씩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과 불의에 항거하는 습관을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학문도 자기 스승의 학설을 비판 검토하고 스승의 학설에 반대되는 이론을 내놓지 못한다. 퇴계의 제자는 퇴계의 학설을 비판하거나 반대되는 학설을 내놓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퇴계의 권위에 절대 복종만이 학문적으로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러나 서양문화권에서는 스승의 학설 잘못을 뒤집고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후학들에게 인정의 박수와 학계의 찬사가 따른다.

 

 옛날에 임금이 말 한마디 하면 억조창생이 말없이 복종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새는 대통령이 한 말씀이라도 이 말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찾아내고 반대의사를 내놓은 사람도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세상이다. 정치는 물론 예술도 학문도 배우고 가르치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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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9
우정(友情)

 

 우정관계가 이루어지자면 둘 사이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신뢰없는 친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뢰란 서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키지요.

 

 나는 어린시절, 경상북도 안동 예안면 소재지에 있는 예안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4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갔다가 6.25사변이 일어나 500리 길을 걸어 예안으로 돌아와서 5, 6학년을 마쳤으니 2년은 내 학년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한 셈이지요. 6년을 같은 반 아이들하고 같이 책 읽고, 노래 부르고, 공차고, 싸움박질하고, 소풍가고, 학예회, 운동회를 하다보면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까지 서로 알게 됩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말없는 미물들도 6년을 같이 있으면 정이 들텐데 하물며 사람이야-. 그래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말할 수 없이 반갑습니다. 우리에겐 서로 신뢰가 있지요. 청순 무구하던 그 옛날로 돌아가서 그 시절 그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니 어찌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50, 60, 70으로 옮겨오면서 우정을 나누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체면도 차리고, 이해타산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해 봐야 하는 등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마음에 때(垢)가 너무 많이 끼여서 그렇지 싶습니다.

 

저명한 수필가 금아(琴兒) 피천득은 ‘우정’이라는 수필에서 친구가 없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정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관중과 포숙아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관중 포숙아는 둘이서 장사를 같이한 적도 있고 커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임금을 모시는 재상이 되어 두 나라 간에 서로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를 떠나서 둘은 서로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서로 믿고 도와주었습니다. 고등학교 고문시간에 당나라의 시성 두보가 지은 시(빈교행: 가난한 때 사귀는 우정에 대한 글)에는 당시 세상 사람들의 경박하고 친구사이에 신의가 없음을 한탄하여 “그대들은 관중과 포숙이 가난할 때 우정을 보지 않았느냐?”라고 하며 이들의 우정을 칭찬하던 글을 읽던 생각이 납니다. 관중과 포숙아가 다정한 형제처럼 살았을 때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지금보다는 몇갑절 더 단조롭고 생활이 복잡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정을 지키며 다정하게 살다간 이름난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도 한음(漢陰) 이덕형과 백사(白沙) 이항복을 꼽을 수 있지 싶습니다. 이 둘은 당시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탈없이 자라서 평생 막역한 우정을 지켰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백사와 한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불알친구가 아니요 백사가 23살, 한음이 18살, 둘 다 결혼을 하고 나서 교우가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둘 다 격랑의 세상에서 난세의 재상으로 나랏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큰 인물들입니다.

 

 한음이 죽었을 때는 백사(이항복은 오성부원군에 봉해져서 오성대감이라고도 불립니다)는 벼슬을 떠나서 노원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한음의 부음을 들은 백사는 용진에 직접 가서 벗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합니다. 그는 한음의 죽음에 대해 절절한 애도의 시 한편을 남겼습니다.

 

외진 산 숨어 들어 말없이 지내다가/흐느끼며 남몰래 한음을 곡하노라 … /사람들 살피면서 말 바꾸기 좋아하네(流落竅山舌欲?薄俗?人喜造言)

 

 당시는 편지 한 조각이나 취중에 한 말 한마디 때문에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과 같지요. 상가라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오고 간 인정보다는 서로의 신뢰가 두텁게 쌓인 사이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는 포은(圃隱) 정몽주와 삼봉(三峯) 정도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의 정이 두텁다기 보다는 서로 엇갈리는 방향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두터운 신뢰감을 이룩했습니다. 포은은 고려왕조가 별 탈없이 이어나가기를 꾀하는 보수개혁파인 반면 삼봉은 모두 뒤집어 엎어 버리고 새 왕조의 창업을 꿈꾸는 혁명아. 바로 이 점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발점이지요.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습니다. 열정이 끓어오르던 포은은 시원시원하게 판단을 내리는 톡톡 튀는 성격의 소유자. 삼봉은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상가로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으며 섣불리 나서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하나가 아프면 문병을 가고 꽃피고 새 우는 봄이 오면 벚꽃 아래서 함께 술을 마셨으며 눈 오는 밤 산사에 모여 같이 설을 쇠기도 했다는 내용이 이승수가 쓴 책에 적혀 있습니다. 삼봉은 포은을 자기 스승처럼 존중하면서도 그의 30년 지기임을 자랑합니다.

 

포은은 당시의 귀족층 가문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났고 삼봉은 그 반대로 천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포은은 당대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데다가 정치적 수완 역시 탁월하여 쓰러져가는 고려왕조의 대들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떠받치고 있던 인물. 그의 동갑내기 봉화에서 온 삼봉을 만났을 때 삼봉의 재능과 배포, 도량이 보통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지요. 그 후 이 둘은 신분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꿈꾸던 개혁과 포부에 부풀어 포은은 선죽교 다리 위에서, 삼봉은 친구 남은의 집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우정은 계속되었습니다.

 

 좋은 친구란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서로를 생각해서 상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배려를 해주는 따스한 취향이 있어야 하지요. 금아의 말을 빌리면 우정의 가장 큰 비극은 불신(不信)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실한 우정을 나눌 기회가 자꾸 줄어듭니다.

 

 요새는 자주 주거지를 옮겨가며 살지 한군데 눌러앉아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입학시험이나 취업, 면접에서는 “네가 되는 날이면 내가 떨어진다”는 식의 경쟁의식이 늘어가는 사회지요. 옛날 죽마고우도 심사가 뒤틀리면 형틀에 매달아 고통을 주는 세상. 이 모두가 불신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입니다.

 

 1249년 전에 이 세상을 다녀간 시성 두보는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앞으로 1000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어떨까요. 그때 사람들은 우정에 있어서 신의가 더 늘어났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우정을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情)이 오가는 우정같은 것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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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2
정조와 소설

 나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조선왕 27명 중에서 제4대 세종대왕과 함께 성군(聖君)의 칭호가 마땅할만큼 치세(治世)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여드레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세자 시절에는 물론 임금이 되고 나서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그를 죽이려는 무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도세자의 처삼촌 홍인한과 정후겸 등을 유배를 보내서 사사(賜死) 시켰습니다. 장인 홍봉한도 처벌대상이었으나 정조의 어머니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니 차마 리스트에 올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씨도 남편을 죽이자는 노론 압력에 굴복했으니 이 여자 역시 사도세자를 죽이자는 음모에서 아주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가(史家)들도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본 11살의 어린 정조, 할아버지 팔에 매달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던 한(恨)과 원(怨)을 품고 자란 정조는 아무에게도 그 울분을 털어놓지 못하고 묵묵히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어질고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에 밀려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울분 속에 지내던 서얼 출신의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비들, 이를테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희대의 천재들을 기용해주는 한편, 이가환, 정약용 등 실학파 사상에 물이 든 개혁파 선비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이들 선비들은 정조가 세운 규장각이라는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수립기관을 드나들며 책읽고 공부하며 정조 치세에 도움이 될 정책을 활발하게 토론, 건의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불어오는 듯했습니다. 짧으나마 조선에 문예부흥이 온 것이지요.

 

 정조는 경서와 역사에 무척 밝은 면학(勉學) 군주였지만 소설은 한번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소설은 문장이 천박하고 촌스러워서 선비들은 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정조는 ‘삼국지연의’ ‘수허전’ ‘홍루몽’ 따위의 중국에서 들어온 소설은 읽기도 쉬운데다 재미가 있어서 많은 선비들이 경서처럼 드러내놓고 읽지는 않았지만 돌려가며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조는 소설에 담긴 남녀사랑 이야기(얼마나 재미있고 달콤합니까!), 사회비판 정신은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소설 읽는 것을 금지하는 소설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시는 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써내라고 요구하고, 신하들은 그 말에 복종하고 제각기 반성문을 써냈습니다.

 

 정조가 간지 1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그 땅에서 박정희라는 무인이 총칼로 정권을 빼앗아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의 철권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곧 그는 좌익사상에 관한 책들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방면의 책을 읽거나 가방에 넣고만 다녀도 불온서적을 소지했다고 잡아갔습니다.

 

 이런 류의 책을 읽다가 잡혀가는 날에는 병신이 되도록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기가 일쑤이지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도 잡혀가서 실컷 두드려 맞고 병신이 되어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걸려든 선비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동김씨의 김조순이었습니다. 김조순은 김창집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정조의 관심을 듬뿍 받아온 선비입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이 사돈관계로 발전해 가지요. 김조순의 딸이 정조의 며느리(순조의 본처)가 됩니다.

 

 안동김씨는 정조와 인연으로 온 나라를 휘어잡는 세도정치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정조가 죽은 후 시작되어 60년을 이어갑니다. 김조순은 분별력이 있고 은인자중하는 선비라 그가 살았을 때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 김좌근, 손자 김병기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대를 물리며 이어집니다.

 

 나는 가끔 정조의 소설금지령을 들으면 박정희의 불온문서 금지령이 생각납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많이 읽고 공맹(孔孟) 사상의 사고력도 매우 높은 지식층 임금이었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은 무인(武人)입니다. 정조는 서학(西學)의 접근을 속으로 걱정했을 것이고 박정희는 공산주의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정조에게 소설을 읽다가 들키면 반성문을 쓰고 다시는 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불온문서를 가지고 있다가 박정희에게 걸리면 감옥살이 몇 주에 물고문, 전기고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훗날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엄하게 굴지 않아도 될 것을 내가 왜 그랬나” 후회가 될 것입니다. 읽지 말라면 더 읽고 싶고, 부르지 말라면 더 부르고 싶은 저항의 심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지하수처럼 도도하게 흐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나라는 집권자가 의도하는대로 지휘봉을 들고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고 아니 해도 저절로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한 나라의 수장은 민중이 가는 방향을 너무 간섭, 억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일체 간섭을 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간 어디에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치정(治政)의 미학이 아니겠습니까? (20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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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노벨 경제학상

 

 중앙일보 남윤호 기자의 말에 따르면 노벨 경제학상으로 불리는 상은 알고보면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노벨의 유언장(1895)에는 경제학이 없답니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1968년 창립 300주년 기념상으로 만든 상이라는 것. 노벨재단이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웨덴 은행이 상금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벨상이 아니라 스웨덴 은행의 경제과학상이라는 것이지요.

 

 노벨상에서 경제학상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노벨 가문의 후손인 페데르 노벨로부터도 나왔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형 루드비히 노벨의 증손인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경제학상의 3분의 2는 미국 경제학자들에게 돌아갔다. 특히 증권이나 옵션에 투기를 하는 시카고 학파에 주어졌다. 이는 인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뜻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노벨 문학상을 심사하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도 경제학이 인류복지에 기여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1997년 스웨덴은행에 이 상(賞)의 폐지를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주려면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제학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닙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아담 스미스(Adam Smith)라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밖에는 없다고 할까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와 덕이 아니라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고 부러워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와 권세를 얻으려는 허영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경제학을 개창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방법을 알려줄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이명박도 국민에게 새해 인사 드리는 말로 “국민 여러분 부자되세요” 했다지 않습니까.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보낸다는 메세지가 기껏 “부자되세요” 했으니 그의 정신연령이랄까 수준도 알아볼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자기 사랑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데 자기 사랑이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기심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무분별한 탐욕이랍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잘 잠 덜 자고 노력한다고 부가 나비처럼 우리 곁에 와서 살짝이 내려앉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남보다 노력을 더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일이 척척 풀려서 어느덧 경제적으로 부유한 위치에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이 있는 데로 가는게 아니라 돈이 마치 자석처럼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예로 제주도 어느 양갓집에 태어나서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기생집에 맡겨진 김만덕이라는 사람은 장사를 시작해서 큰 돈을 버는 대상(大商)이 되어 있었는데 정조 때 어느해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자 천냥의 돈을 내어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답니다. 정조는 이 말을 듣고 김만덕을 의녀로 임명하고 그녀의 소원인 대궐 구경과 금강산 유람을 허락해 주었답니다.

 

 당시에는 섬에 사는 여자가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파격적 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영의정 채제공은 ‘김만덕전’을 썼다고 합니다.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경제학이 돈을 벌기 위한 학문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경제학에서는 왜 사람들은 부(富)를 그렇게 노리는지, 왜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지, 가질 것 다 가지고도 행복감을 못 느끼고 더 가지려고 하는지 같은 주변적 요소도 고려해야 합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富)를 싫어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요.

 

 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돈을 제일 바랐던 시절은 장학금으로 공부하던 가난한 유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1967, 68, 69년) 1,500불이 내 수입의 전부였습니다. 그 돈을 여덟 달로 쪼개어 살자니 실로 빡빡하고 여유라곤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때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유학생들의 표준생활이었으니 숙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학에 기반을 둔 이론이건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둔 이론이건 부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이 살아있는 한 인간사회는 언제나 부자와 가난뱅이가 나란히 삶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여전히 부와 빈곤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보태주는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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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마음을 보듬는 시조

 

 나는 기분이 좋거나 울적해지면 노래는 부르는 습성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그 기분 좋은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토록 유지하기 위하여, 울적하면 울적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지금도 자동차를 몰고 길에 나서면 자동차 안에서 흘러간 가요를 부를 때가 많다. 우리 집에서는 집 안에서 노래는 못 부르게 하니 어릴 때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는 날에, 커서는 자동차 안에서 내 마음대로 운전대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춘다.

 

 어릴 적 밤늦게 예안읍에서 혼자 생가 역동집으로 돌아올 때는 인가가 없는 청고개를 넘어야 했다. 양쪽 산에 있는 무덤 속에서 귀신이 나와 뒤에서 내 목을 꽉 잡으며 ‘동렬이 이놈!” 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할 때는 온몸이 얼어 붙는다. 이런 비상상황에는 목이 터져라 크게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넘곤 했다. 이때 부르는 노래는 주로 용감무쌍한 군가가 대부분.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 만이냐/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나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나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이런 씩씩한 노래를 힘차게 부르는데 아무리 귀신이라 한들 이 용감한 소년에게 어찌 함부로 덤벼들 생각을 하겠는가.

 

 나는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 직장을 얻은 후부터 내 기분을 새롭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옛시조를 흥얼거렸다. 한창 때 나는 우리의 옛시조 300수 정도를 외웠으니 화장실에서나 길을 걸을 때 시조를 외운다는 것은 내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다. 아마도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는 강단에 서야 하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꾀로 시작한 것이었지 싶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마라

구만리 장천에 너도 날고 나도 난다

두어라 일반비조(飛鳥)니 너와 내가 다르랴’

 

 위에 적은 숙종 때의 무신 이태의 시조를 읊으면 내가 다른 백인교수에 비해 못한 것이 뭣이냐는 항의성 자기주장이니 20배 30배 넘는 용기가 용솟음친다.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이긴 것 같은 용기-.

 

 우리의 감정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노래나 시조뿐이 아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 모두가 우리의 감정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맑은 하늘에 몇 점 구름이 떠가는 날 숲길을 따라 산책을 나서는 것도 기분전환, 술을 한잔 마시며 좋은 친구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기분전환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는 모든 행동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분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유쾌한 행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결과가 괴롭거나 슬픈 행동을 하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 하나는 결과가 슬프거나 유쾌하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을 자꾸 되풀이하면서 우울증이 없어지기만 바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행동도 그것이 유쾌한 결과를 가져올 행동이라면 억지로라도 그 행동을 하고 나면 유쾌한 감정이 뒤따르는 것이다.

 

 나는 몇 주 전에 마음을 보듬는 시조 한수를 얻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 얘기는 이렇다. 나는 노래 대신 자주 흥얼거리는 시조 구절이 하나 있다.  

 

 “…오뉴월 하루 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것이 없느니”

 

 이 시구는 노산(鷺山) 이은상의 ‘적벽놀이’라는 기행수필에 나오는 시조다. 지금부터 꼭 67년 전 내가 내 고향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시조다. 그런데 나는 이 시조의 맨 처음 시작을 잊어버려 중장과 종장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당해서건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뉴월 하루 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로 끝나는 시조 구절만 외면 먼지 날리는 황토길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조를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문제는 이 시조의 시작, 즉 초장을 잊어버려 생각이 안난다는 것이다. 내깐에는 무진 애를 썼으나 헛수고였다. 방법이 없어서 몇 주 전 어느날 나장환 형에게 전화를 하고 “나형도 틀림없이 국어시간에 배웠을테니 좀 찾아 달라”고 실로 애절한 부탁을 했다.

 

 나형은 나와 동갑. 지금부터 한 30여년 전 내가 런던 온타리오에 살 때 조지훈의 시 “빛을 찾아 가는 길”의 시작을 잊어버려 찾고 있었다. 그때 나형의 도움으로 그 시의 시작을 찾아냈다. 이것이 나와 그의 교제의 시작이었다. 나형은 뛰어난 기억력에 책을 많이 읽는 선비 타입의 노인. 조선 시가(詩歌)에 대한 실력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시가를 좀 아는 체 혼자 떠들다가도 나형이 있을 때는 입조심을 한다.

 

 그런데 생각 외로 나형에게서 빠른 답이 왔다. 노산의 ‘적벽놀이’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시조는 다음과 같다.

 

적벽유()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거든

여름날 하루 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여름날 하루 해가 그리도 길더구나”를 나는 “오뉴월 하루 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잘못 기억한 파편이 노산의 오리지널보다 못하지는 않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자 가슴이 뿌듯해졌다.

 

 인간의 기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기 기억으로 머릿속에 일단 저장된 정보는 처음 저장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 들어온 정보에 따라 먼저 저장된 기억 내용이 흘러나온 용암이 천천히 모양을 바꾸듯 기억된 내용도 바뀐다고 한다.

 

 “여름날 하루 해”가 “오뉴월 하루 해”로, “그리도 길더구나”가 “이다지도 길다더냐”로 바뀌어 있었다. 배운 지 67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정도로 원본 못지않게 근사한 형태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대견한 것. 칭찬이 마땅하다는 어린아리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우선 보배 같은 시조를 한 수 얻게 되었다는 흥분 속에 나형에게 고맙다는 전화인사도 깜빡 잊고 며칠을 보냈다.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거나 가라앉히는 힘을 주는 것은 비단 노래뿐이 아니다. 그림이나 시(詩)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 모두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예술의 장르(genre)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마는 어릴 때 익혀둔 시가(詩歌)는 어린 시절을 되살려 오는데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마치 홍난파의 ‘고향의 봄’을 나직이 부르면 고향마을이 눈앞에 살며시 내려앉은 것처럼-.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S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짧은 말 짓기에서 잘 못하면 그 커다란 손으로 내려치는 출석부 형벌이 모하마드 알리한테 머리를 한방 맞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는 한 번도 맞아보진 않았다. 아마 내가 무척 아첨을 잘하고 귀엽게 굴었던 모양이다.

 

 이제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내 나이 어느덧 여든. 잃어버린 시 구절은 기적적으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던 그 세월은 경상도 안동에서 흐르던 세월이나 찬바람 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흐르는 세월 간에 아무런 차이없이 흐른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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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좋은 거짓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말을 맨 처음으로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옛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로 알고 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중에 ‘사회적’이란 말이 ‘정치적’이란 말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으로 안다. 누가 왜 바꿨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꿔진 말도 천하의 명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가끔 나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봐도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고 할 경우가 드물 정도로 정치적인 행동을 할 때가 많다. 부끄럽지만 이 세상에서 나와 제일 가까운 사람, 즉 아내나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들 때가 있으니-.

 

 도대체 ‘정치적’이란 무슨 뜻일까? 나는 그 말의 사전적 정의를 떠나서 그 말속에 배어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어의학자(語意學者: Semantician)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대로 정치적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로 쓴다.

 

 첫째, 정치적이라는 말속에는 어느 정도의 거짓이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러니 정치적=거짓, 혹은 위선이라는 등식(等式)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좀 더 연장하면 사기나 날조, 음모에 가까워진다.

 

 국회의원 같이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물론, 한 조직체의 수장으로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기업체의 사장이나 종교단체의 성직자, 사회의 기관장 같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이들은 조직원 개개인의 의견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조직원들에게는 항상 귀에 즐거운 음악만 들려줄 수는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속생각을 그대로 내놨다가는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수가 있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성직자들의 행동에서다. 이 신도(信徒)에게 한 말 다르고, 저 신도에게 한 말이 다를 경우, 신도들은 꼬투리를 잡고 불만을 쏟아놓을 것이다. 이렇게 성직자에 대해서 유난히 말이 많은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을 털어놓아도 보복이 따를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계산 때문일 경우도 있다. 사랑과 용서를 전파하려는 성직자들이 보복이나 불이익을 줄 가망은 매우 적지 않은가. 그러니 불평불만을 밖으로 내놔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하며 산다. ‘반갑습니다’ ‘죄송합니다’ 따위의 가벼운 인사성 말까지도 거짓말로 규정한다면 사람은 하루에 평균 150번 이상 거짓말을 한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보고가 있다. 많은 경우 거짓말은 가십(gossip)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거짓말이나 가십이 전혀없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모든 재판소와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마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 한기가 느껴진다.

 

 거짓말이 정치적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무척 좋은, 건강한 거짓말일 떄가 있다. 예로, 우리가 어느 저녁식가 자리에 초대되어 갔는데 그 집주인의 음식솜씨가 허무하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는 ‘잘 먹었습니다’ 정도로 음식 솜씨를 칭찬해 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이 경우 거짓말은 ‘좋은’ 거짓말이다. ‘이걸 음식이라고 했나요?’ 하고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놓는 것은 잔인한 행동, 사회적으로 적절한 발언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거짓말은 남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다. 불법주차를 하는 것은 어떤 때는 잡혀서 벌금을 내나, 어떤 때는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불법주차 버릇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전문용어로는 부분강화로 형성된 행동이라 소멸이 극히 느리다. 거짓말도 이와 똑간다.

 

 둘째, 정치적 행동에는 의견차이가 났을 때 협상 내지 타협, 절충이 있다. 옛날 같으면 조직의 우두머리나 영향력 있는 조직원 몇몇에 충성하는 일편단심 하나로 별 문제가 없이 지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새는 충성심이란 덕목마저 어리석고 고지식한 행동으로 보일 때가 많은 세상. 현대사회에서는 남과 의견이나 이해관계로 충돌이 있을 때는 협상을 하고 절충을 해서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설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하다.

 

 배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을 팔고 사던 옛 그리스 문화에서 싹이 튼 서양문화는 일찍부터 논쟁이니 설득, 타협이니 절충 같은 말에 익숙하였다. 그러나 농경사회에 뿌리를 둔 한국 같은 동양문화권에서는 정직, 신의, 절개 같은 말이 더 익숙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단어라도 두 문화에서 쓰는 어감이 서로 다를 때가 많다. 예로, aggressiveness(공격성) 같은 단어는 미국 같은 서양문화권에서는 박력있고 꿋꿋한 사람이라는 좋은 의미로 쓰이나, 한국 같은 동양문화권에서는 남에게 대들고,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고집쟁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내게 있어서 정치적이란 말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어감 쪽으로 쏠릴 때가 많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쓰는 단어의 의미가 다른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말이란 남들이 쓰는대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내게도 정치적이란 말이 좋은 의미로 쓸 날이 올까? 요새 한국에서 정치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런 날은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도 올 것 같지는 않다.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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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6
2020-10-01
책(冊)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라는 사람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자입니다. 염세주의란 세상 및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을 반(反)가치, 무의미한 것, 또는 추악한 것으로 보는 인생관으로 낙천주의에 반대되는 말이지요. 인간생활에서 삶은 괴로운 것이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지의 소멸 외에는 없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그리스에서 유행했던 스토아(Stoa) 학파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하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의 책을 읽은 당시의 청소년들은 실제로 자살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의 높은 청소년 자살률은 쇼펜하우어가 쓴 책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살기도도 않고 그의 책을 판 수입으로 72살이 될 때까지 천수를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나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에는 이해가 가지만 책을 읽고 자살을 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남의 글에 현혹되어 내 진로를 다르게 선택할 뻔한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성천(星天) 유달영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터키의 게말파샤가 새로운 터키를 일군 이야기에 홀려 나는 농과대학으로 가서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채영신)처럼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쳐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벌써 옛날입니다.

 

 유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에 감명을 받은 사람은 경대사대부고에 다니던 소년 이동렬만은 아니지요. 들은 얘기로는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도 그 책을 읽고 감동하여 유달영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장구치는 놈 따로 있고, 고개 까딱이는 놈 따로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선동하는) 책을 쓰는 사람 따로 있고 그 책에 감동을 받아 어떤 종류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이니 책은 일종의 선동을 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성경처럼 많은 사람들을 착한 행동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선동한 책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세상은 성경에서 선동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남을 도우며 사는 착한 사람들로 꽉 차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쇼펜하우어의 자살을 권유하는 책을 읽고 자살을 실행에 옮긴이들이 전체 청소년들 숫자에 비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그 영향으로 착하고 진실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생각에 어떤 변화가 왔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말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아직도 실제 행동이란 것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 가지, 즉 생각, 말, 행동의 연결고리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말과 행동의 고리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면 어느 조직에서건 다른 사람들의 신용을 얻지 못합니다. 남의 신용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지요.

 

 말과 생각이 다르기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그중에도 국회의원으로 불리는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들 국회의원은 청중들 앞에서는 되는 말, 안 되는 말 마구 지껄여놓고는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이 말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짓만 하는 것 같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가끔 민선으로 뽑히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대중들과 함께 어울리는 척하며 “나는 이 계층 유권자들과도 이렇게 허물없이 지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유의 깜짝쇼를 보면 얄미운 생각과 분노를 함께 느낍니다. 이런 쇼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들이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깜짝쇼는 이 세상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는 인생 풍속도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를 찬양하는 책을 쓰고 그 책에서 나온 인지세로 평생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이 세상에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지요. 요새도 ‘어떻게 하면 억만장자가 될 수 있나?’ ‘부자가 되는 법’ 같은 제목의 책을 써서 생활을 해가는 저자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돈을 많이 벌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창의적인 문학작품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며, 명망있는 권투코치(coach)가 실제로 권투를 잘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자기 자신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찬양했던 염세주의는 한때 기승을 부렸으나 낙천주의에 밀려 색깔이 많이 바래진 느낌입니다. 삶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아직 삶을 다 살 때까지는 결론을 낼 수 없겠습니다. 삶은 밝은 면도 있고 추악한 면도 있는 것. 맹자의 말에 따라 사람의 길흉화복 수명이 모두 천명(天命)에 속하니 우리는 그 천명을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한 의욕과 욕심이 줄고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나이 올해 한국나이로 여든이 되는데요-.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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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양말 두 켤레

 

 P교수는 나와 동갑내기로 그가 태어난 곳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 깊고 물 맑은 S고을입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수필집 한권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교수 휴게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내 수필집 ‘꽃피고 세월가면’을 우연히 집어들게 되어 내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시내 서점에 가서 나의 다른 책 한권을 사서 읽고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영광입니다. 내가 인편으로 보낸 ‘꽃다발 한아름’을 읽고 난 후 그가 쓴 책 2권을 보내왔더군요. 그는 나에게 자기 아버지 어머니 묘비를 써달라고 하여 용비어천가체로 써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P교수가 보내온 책을 이리 뒤적이고 저리 뒤적이다가 우연히 정(丁)일권 장군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정(丁)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적임과 동시에 충격적이라 그 얘기를 자세히 적지는 못하나 여기에 간추려 옮겨 보겠습니다.

 

 정 장군은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발꿈치에 큰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다녔답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 이것을 보고 늘 놀리곤 했는데 어느 날 그 반 여학생 하나가 소년 정일권에게 양말 두 켤레를 선사했답니다.

 

 학생들은 졸업을 해서 교정을 떠났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학생들은 중학,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을 갈 때가 되었습니다. 양말을 선사한 여학생은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청년 정일권은 군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몇 년 후 6.25사변이 터져 정일권은 혁혁한 무공을 세울 기회가 오고 드디어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루는 그가 사무실에서 어딜 가려고 지프(jeep)를 타고 정문을 막 나가려는데 당시 보초를 섰던 병사가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어느 아주머니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답니다. 아주머니는 보초병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무슨 부탁을 하는 것 같은데 보초병은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보초병 말이 “이 아주머니가 벌써 이틀째 계속 와서 총장님을 뵙게 해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 장군은 차를 돌려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 아주머니를 불러들였답니다. 정 장군 앞에 선 여인은 옛날, 옛날, 그 까마득한 옛날, 자기에게 양말 두 켤레를 준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지 않습니까.

 

 이 아주머니의 말이 자기 남편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데 6.25 사변으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부상당한 인민군들을 그야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치료해 주었답니다. 이 일로 김일성으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지요. 얼마 후 서울을 수복한 국군들이 의사의 사무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감사장을 발견, 빨갱이로 몰아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틀 후면 사형을 집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정 총장은 당시 군에서 제1의 권력자로 꼽히는 김창룡 헌병대장에게 전화를 하고 양말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김창룡 대장의 부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하는 말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의사는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된다”며 남 말하듯 가볍게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아내의 품 안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죽여도 좋고 안죽여도 좋다”는 것은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지요. 내 생각에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목숨은 구하고 누구의 목숨은 구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인민군이라고 해서 병 치료하기를 거부하는 의사라면 반공투사 애국자이기 전에 휴머니티를 잃어버린 사람이니 그는 의사로 불리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의사는 치료를 받을 사람이 임금이건, 신하건, 주인이건, 노예건, 동지건, 적이건 간에 생명이 얼마나 존엄하다는 것을 알고 그 생명보전에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L. Tolsstoi)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보면 침략군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를 포위하여 침략자와 방어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긴장 속에서도 배고픈 적군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티(Humanity)의 본질입니다.

 

 모스크바를 에워싸고 있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한지 10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배고픈 인민군에게 밥 한그릇이라도 줬다가는 적을 도왔다는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흑과 백이 갈라진 사회, 한번 실수를 했다가는 정황 참작이고 뭐고 없이 무조건 망치로 내려치는 형벌이 내리는 가혹한 사회에서는 위대한 예술작품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이토록 사상의 담장이 높고 엄격해서 잘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사회에서 어찌 위대한 소설, 위대한 시(詩)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양말 두 켤레가 아니었으면 이 세브란스 의사는 사형을 당했을 것이고 그 억울한 혼(魂)은 오늘도 구천(九天) 어디를 떠돌고 있을 것입니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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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0
개(犬)

 

 개(犬) 보다 주인 말을 잘 듣는 동물이 있을까요? 개는 태어나서 강아지 때부터 주인은 물론 주인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말을 충성스레 잘 듣습니다. 어떤 때는 주인의 호통과 매를 맞아가면서도 멀리 달아나지 않고 주인의 쓰다듬을 받으려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낑낑거리며 주인 주위를 맴도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개, 고양이, 소, 말, 다람쥐 등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 중에는 충성심이랄까 복종심에서 개를 따를 짐승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말을 하지 못하나 그들 나름대로 의사표시를 하는 데는 개가 단연 제일 높은 수준의 통신을 한다고 봅니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 ‘플랜더스의 개’ 이야기는 아직도 어른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우리는 복(伏: 초복, 중복, 말복의 총칭)날이 되면 개를 잡아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개는 영양분이 많은 음식이라서 기운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개보다 나은 보양식(補養食)이 없다고 하여 복날이면 개고기를 많이 먹었나 봅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때 동네 어른들이 개 한 마리를 소나무에 매달아 놓고 개가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나는 앞으로 개고기는 절대 안 먹겠다”고 비장한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3일을 못 넘기고 그 구수한 개장국 향기에 항복하고 말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자기를 그처럼 돌봐주던 주인에게 맞아죽어(개는 두들겨 패 죽여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합니다) 주인의 밥상에 올라 주인이 사랑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거룩한 개도 있습니다. 살신성충(殺身成忠)이라 할까요. 하지만 요새는 서양문화의 압력으로 이 개고기를 먹는 풍속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개에는 먹는 구(狗)와 먹지 않는 견(犬) 둘로 구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狗)란 누렁이 황구(黃狗) 혹은 똥개를 말하고, 견(犬)은 독일종 세퍼드(German Shepherd) 같은 애완용 개로 보면 됩니다. 독일종 세퍼드 같은 개를 잡아 먹는 사람은 드물지요. 개 하면 나는 조선 헌종, 철종 때의 황오(黃五)라는 사람의 시에 나오는 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집에 흰 개 한 마리가 있는데/낯선 사람이 와도 짖을 줄 모르네/붉은 복사꽃 아래서 잠이 들었는데/꽃잎이 떨어져 개 콧수염 위에 내려 앉더라/ (吾家有白犬/見客不知吠/紅桃花不睡/花落犬鬚在)

 

 한가롭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우리 사람도 이 개처럼 한가롭게 살 수 없을까요? 내 생가 역동집을 돌보는 사람들은 개를 시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 개 대여섯 마리를 키웁니다. 그런데 나는 이 개들이 한번도 짖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기를 워낙 한적한 외딴집에 태어나서 일생을 거기서 자라니 오고가는 사람이 드문데 짖을 일이 있겠습니까? 개의 일생으로 보면 행복인지 불행인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개 중에는 낯선 이만 보면 짖어대고 물려고 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사람만 보면 좋아라 싱글벙글 달려들고 장난을 거는 놈도 있습니다. 이런 개들의 주인을 보면 많은 경우 그가 데리고 다니는 개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지금부터 꼭 46년 전 앨버타 레드 디어(Red Deer)라는 도시에 살 때였습니다. 그때 아내는 100마일 쯤 떨어진 앨버타대학교 기숙사에 있고 나는 장모와 아이들을 데리고 레드 디어에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아내는 아이들 보러 레드 디어에 기차를 타고 오곤 했지요. 아이들이 개를 키우고 싶다고 해서 어디서 한 마리 구해왔습니다. 개는 인물도 좋고 퍽 귀엽게 생겼는데 훈련이 되지 않아 아무데서나 실례를 하는 것이 탈이었습니다.

 

 실례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 실례를 치우는 것은 장모 몫이었지요. 개를 싫어하시는 장모는 계속 아이들에게 개를 누구에게 줘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참고 참았던 장모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개를 내 눈에 안 보이게 하든지 아니면 내가 한국 가서 살겠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극한 대결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한나절을 두고 저 둘이서 비밀회의를 거듭하더니 할머니를 따르겠다고 알려왔습니다. 개를 동물보호협회로 보내기로 결정했지요.

 

 개가 보호소를 가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 두 아들녀석들의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통곡소리는 얼마나 크고 애절한지, 그야말로 구천(九天)에 가 닿고도 남을 것 같았습니다. 애비인 내가 죽었다 해도 그토록 서럽게 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情)이란 사람과 사람간의 접촉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산이든, 들이든, 강이든, 봉우리든, 바위든, 자주 모여 놀던 곳이든, 오랫동안 마음을 주었으면 돌아오는 것은 정(情)이라는 미련뿐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집 벽에는 둘째아이가 잠시 정을 두었던 그 개를 그리워하며 그린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개 그림 밑에는 하얀 크레용으로 Winky라고 개 이름이 적혀있었지요.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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