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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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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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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좋은 나라

 

 나는 캐나다가 퍽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좋다 나쁘다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갖다 대볼 수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내가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퍽 주관적인 정의(正義)이지요.

 나는 캐나다에 와서 산 지가 올해로 꼭 47년이 됩니다. 살면 살수록 “이 나라에 사는 것이 큰 축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1966년 9월에 브리티시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전액장학금을 약속받고 밴쿠버 공항에 내렸습니다. 호주머니의 가장 비밀스런 곳에 숨겨둔 미화 60불이 나의 전재산이었습니다. 여비는 한미재단(Asian-American Foundation)이라는 데서 “공부를 마치면 현직에 돌아온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공부를 끝내고 여권을 연장하러 영사관에 갔더니 내가 군대를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에 돌아가면 “군 복무를 하라는 요청이 있으면 즉시 응해야 한다”는 서약에 도장을 찍으라 하더군요. 나는 도장을 찍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얻은 직장이 넬슨이라는 도시에 있던 작은 대학이었습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군대를 안간 것은 군대 가기 싫어서 안간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군대에 가려고 갖은 애를 다 써도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병역미필이라고 유학도 허락 않고 뛰도 걷도 못하게 하는 정부를 내가 어떻게 합니까? 또 한국을 떠날 때 신원조회에 걸려서 S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당시 박정희의 처 육영수 여사의 독일어 가정교사로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던 아내 친구의 힘을 빌려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정부에서 “이 녀석 손 좀 봐야겠다” 하면 끌려가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무서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이 캐나다에 사는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 한 나라에서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책은 읽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간섭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말할 수 있고, 읽고 싶은 책은 읽을 수가 있으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한 잡혀갈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대법원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나라의 대법원은 좀처럼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지시에 따르지 아니하고 독립적인 판결을 내립니다. 한국에서도 물론 대법원까지 올라갈 수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법원은 독립된 판결을 내리는 기관이 못됩니다.

 내가 한국에 학생으로 있을 당시의 군사정권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정부를 비판하는 말 한 마디만 해도 잡혀가는 경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북한을 칭찬하는 말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병신이 되어 돌아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북한에서는 우리 한글을 지키는 데 남다른 관심을 쏟고, 다른 나라 말이 북한에 들어올 때는 많은 경우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손질을 한 후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우리말이 외국어와 마구 뒤섞여 붙어 우리말이 극히 오염되고 있는 남한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북한은 말 정책을 이렇게 하는데 우리도 북한의 본을 받아야 한다는 말만 해도 북한을 찬양했다는 죄로 잡아갑니다. 자기의 의사표시를 누르는 나라, 자기의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런 의사를 밖으로 내는 사람이 자기와 잘 아는 사이라고 잡아가는 나라, 이 모든 것이 심하면 이것도 20세기의 학정(虐政)이 아니겠습니까?

 중국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손종섭의 ‘옛 시정을 더듬어’에 실린 것을 여기 다시 인용합니다. 공자가 하루는 산길을 가다가 어떤 여인이 무덤 앞에서 하도 서럽게 울고 있기에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아 같이 가던 제자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몇 년 전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죽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이 호랑이에게 죽고, 이번에는 자식이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호랑이가 없는 곳에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여기는 학정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탄식하여 가로되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 보다 더 무섭구나(荷政猛於虎)” 하였답니다.

 옛날에는 학정이 백성들의 기본 생존을 위협, 다시 말하면 굶어죽을 정도로 양식을 빼앗아 가고 세금으로 백성을 말려 죽이는 것이었지만, 먹고 사는 기본 욕구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 오늘날의 학정은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정부의 간섭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살려는 국민의 힘은 지층 밑에서 끓고 있는 용암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위태로워 보여도 가만히 놔두면 바른 길을 찾아가는 천성(天性)이 있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나친 억제와 간섭을 하지 않는 캐나다 같은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됩니다. (2019. 8)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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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표어

 

 나는 직업이 백묵을 쥐는 선생이다 보니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자연 관심이 많습니다. 다 마찬가지로 경험했지만은 나는 6년이라는 세월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일요일 빼고는 하루 여섯 시간을 보낸 셈입니다. 시간 계산을 해보니 어림잡아 6,480시간이 되더군요.

 얼마 전 한국뉴스를 보는데 어느 문제가 된 고등학교가 화면에 뜨면서 그 학교 교무실에 교훈(校訓)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되자’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 되자’. 이 세가지를 큰 사진틀에 넣어서 교무실 앞에 걸어놓은 풍경이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교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훈, 즉 자율, 협동, 강건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것 하나 어른들의 말이지 청소년들의 말은 아니었습니다.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선택이라고는 이름밖에 없는 환경에서 교훈은 버젓하게 자율이라 포장해 놨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뺨을 이러저리 때리면서 웃어보라던 벌(罰)이 생각납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훈이나 사훈(社訓) 같은 표어가 너무 많은게 탈입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로  시작해서 ‘전기를 아껴 쓰자’ ‘채식을 많이 하자’ ‘빨갱이 고발하여 상금 타서 잘 살아보세’. 갖은 악질적인 충고가 쏟아져 나오니 참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길거리에 나붙은 표어를 보고 ‘아 참 나도 저 표어가 던지는 말 같이 살아야겠구나’ 하고 그대로 행동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교훈이란 아예 없는 것이 제일 좋지만 있을 바에는 ‘개인화’ 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훈계 몇 마디가 내려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물건 훔치지 말라는 표어가 있다고 도둑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몇몇 윗사람들이 의논해서 내려보낸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라 해도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들이 참여할 기회가 없으면 그 일에 대한 의욕이나 일의 성과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법입니다.

 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으나 학급명을 학생들이 정해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반 아이들은 좋아라 흥분해서 ‘아리랑’ ‘백양’이니 하는 담뱃갑 이름부터 ‘양지’ ‘바닷가’ ‘만나리’ 같은 다방 이름이 나오더니 나중에는 ‘초원의 빛’ ‘황야의 무법자’ 같은 얼토당토 않는 영화 제목까지 등장했습니다.

 담임선생은 “결과가 매우 실망스럽다. 기껏해야 담배갑, 다방 이름이냐”며 웃으며 교실 밖으로 나가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똑 떨어진 결과는 없었지만 우리는 급훈을 정하는 동안 웃고 킬킬거리며 재미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웃고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급훈 하나 정하는데 이렇게 의견이 많은데 하물며 교훈이야. 나는 캐나다 온지가 50년이 넘었고 그동안 캐나다 초등학교 교실에 수십 번을 들어가 보았지만 교실에 이렇게 생각하자든가 어떻게 놀자 같은 표어를 본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표어니 교훈이니 사훈(社訓) 따위가 유난히 더 많이 유행하나 봅니다.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단원 간의 화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되므로 교훈이나 사훈 같은 것을 통하여 단원들을 그 집단 속으로 들어오게 하자는 것이지요.

 이때 표어나 교훈은 그 통제력을 마련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지요. 광고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집단주의 사회는 광고를 “상류사회의 회원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하는, 우리와 같이 살자고 잡아끄는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표어나 교훈 따위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표어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표어에 맞는 행동을 한다는 자료는 없습니다. 예로, 종교기관에서 정직, 정직 타령을 해도 정직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 간의 정직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보고해 왔습니다.

 표어나 교훈 따위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날에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한 지표를 잃고 이리저리 헤맬 것 같아 걱정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가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올바른 길로 찾아가는 자정(自淨)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를 보십시오. 일어서려다가는 넘어지고 발을 떼려다가는 엉덩방아를 찧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가 결국에는 일어서서 혼자 힘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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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1
도천서주(陶泉書廚)

 

 ‘도천(陶泉)’은 나의 아호이고 ‘서주(書廚)란 서실이란 말과 같습니다. ‘서실’이라 해도 되지만 ‘음식점’을 ‘식당’이라 하지 않고 ‘방비원’이니 ‘삼천궁’이니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실’이란 말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서주’라고 하면 더 멋있게 보이지 싶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입니다. ‘도천’이란 아호는 나의 서예스승 일중(一中) 김충현. 내가 그에게 서예를 배울 때 지어주신 것이고 ‘서주’란 말은 내가 갖다 붙인 서실이란 말입니다. 글씨는 40년쯤 되는 어느 무더운 여름 한국을 나갔던 길에 일중께 받아서 현판으로 표구를 해서 캐나다까지 가져온 것입니다.

 은퇴하는 어느 교수가 자기 집과 연구실에 있던 책을 모두 도서관에 기증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면 나는 몹시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집이나 학교 내 연구실 책꽃이에 꽂힌 책은 몇 권이 되질 않고 그나마 꽂혀있는 책들도 내가 현재 읽고 있는 것 말고는 4, 5년이 지난 것들이라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학생들에게도 출판된 지가  10년 혹은 15년이 넘는 책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는 읽지 말고 논문에 인용도 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학문이 발달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5년이 넘으면 벌써 낡은 지식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이 낡은 지식만 수북이 담긴,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을 누구에게 준다는 말입니까.

 얘기가 난 김에 학국에서 몇 번 가본 교수은퇴식 얘기를 먼저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은퇴를 하는 교수들이 교수에 임명되고나서부터 발표한 연구논문이나 산문 등 지금까지 쓴 것을 모두 모아서 두툼한 책으로 내서 이 책을 은퇴식에 온 손님들에게 한권씩 돌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툼한 책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 산문, 신문에 낸 글, 교회 지하실에서 일반 학부모들을 위한 연설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학술논문이 아닌 글을 왜 여기에 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설령 권위있는 학회지에 실렸던 연구논문이라 하더라도 평생 모은 저술이니 10년, 20년, 30년 전에 썼던 것들이라 지금은 케케묵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책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논문 봉정식이 있겠다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퇴교수와 사모님은 앞에 나가 서있고 그 붉은 보자기로 싼 논문집은 마치 국군장병의 유골(遺骨)을 받들 듯 장례식 분위기의 엄숙한 표정으로 주고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툼한 논문집을 내는 비용은 은퇴교수가 아니고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아무개 교수 은퇴준비위원회에서 부담한답니다.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제자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는 일, 적폐청산의 대상이지요.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코미디입니다.

 내 서재에는 책이 별로 없습니다. 전공서적은 은퇴가 가까워오는 녀석이 새 책을 살 이유가 어디 그리 많겠습니까. 그래도 읽을 만한 책은 내 연구를 도와준 몇몇 대학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페이지 읽는데 1시간 넘는 시간을 보내도 이해를 할까 말까 하는 영어실력으로 새 책을 사서 서가에 꽂아놓는다고 내 전공실력이 부쩍 늘어나겠습니까?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는 빈약한 도천서주. 그래도 30년 전인가 40년 전, 이 서재를  꾸밀 떄는 내가 직접 소나무 판목(板木)을 사서 톱으로 잘라 천정에 닫는 크기의 책꽂이를 만들었습니다.

 ‘陶泉書廚’(도천서주)라는 일중의 예서로 쓴 현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사서 들고 온 서애(西厓) 유성룡의 ‘재거유회’(齋居有懷)와 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을 판각한 홍성웅 화백의 작품이 걸려있는 나의 서재. 겉으로는 갖출 것은 다 갖춘 멋진 서실. 그러나 알고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외화내빈에 지나지 않는 엉터리.

 그러나 이 허약한 서실에 아내가 결혼 때 가져온 ‘청구영언(靑丘永言)’ 옛날판 한 권이 책꽂이 귀빈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소화(昭和) 몇 년에 출간된 책이니 초본이니 무슨 본이니 떠들 것까지는 못되고 소화 몇 년이면 일제치하에 있을 때 발간된 책이니 나에게는 보물이었습니다. 이제 ‘청구영언’과 함께 살 날도 그리 많지 않을테니 책주인을 우리 말고 다른 사람으로 바꿔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며칠을 두고 의논한 끝에 지금까지 나의 산문집을 7권이나 출간해준 ‘선우미디어’ 이선우 사장에게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아 강아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강아지를 가져가는 사람이 강아지 양육에 정성을 다 할 후덕한 주인이 될 것인가를 추측해 볼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내책을 기증받은 사람이라면 그 책에 대한 애착을 책을 현금 가치로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서 이선우는 최고점수를 받았기에 ‘청구영언’의 운명은 그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명운(命運)이라는 것이 있듯이 서재같은 무생물에도 명운이 있나 봅니다. ‘도천서주’도 우리가 온타리오 런던에 살 때 내 나이는 30대, 조교수, 부교수, 교수가 되려고 발버둥을 치던 시절, 새책을 사오는 경우도 많고, 책을 뺏다 꽂았다 하는 횟수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멀리서 손님이 오면 잠자리는 꼭 서재에 마련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 향기에 묻혀 잠을 잘 잤다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지요. 이제 서재를 들어가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책을 읽기보다는 자료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아졌기 때문에 뽑혀서 밖에 나가있는 시간도 줄어들었습니다. 서재에 들어가는 발을 옮겨 놓으면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

 물유성쇠(物有盛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다는 말입니다. 고려 때 최충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조에도 이 말이 나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온 지는 오래고 이제는 내 서재에도 가을이 왔나 봅니다.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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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장모님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지금의 아내 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고향 역동에 가서 아버님 어머님께 “애인이 생겼다”는 보고와 함께 애인 미스 정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미스 정의 아버지는 미스 정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월북을 했고 그 뒤로는 미스 정의 어머니 혼자서 시부모 내외분을 모시고 집안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년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바람이 들었으니 저 일을 어찌하나(말이 되는 것 같아서 가만 있었습니다)”  하는 탄식만 하셨습니다. 묵묵히 듣고 계시던 아버님은 “처자식 두고 이북으로 내걸은 것은 필경 그 집에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잘 살펴봐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애인이 생겼다는 말에 기분이 나빠하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해 초겨울이었던가. 하루는 아무 예고없이 미스 정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처자식 두고 이북으로 넘어간 사람의 집이 이상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집에 비해서는 약간의 고요가 감도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내 장모가 될 어른을 뵈니 나이가 무척 어려 보였습니다. 하기야 당시 장모님 나이가 서른일곱 청춘이었으니 내 누나라면 몰라도 장모라는 생각은 100리 200리 밖이었습니다.

 1966년 9월12일 내가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던 날, 김포공항으로 가려고 12명은 너끈히 탈 수 있는 합승을 한 대 빌렸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이 오늘날처럼 자유롭지 못한 시절, 적어도 3년 내지 6년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할, 그야말로 기약없는 이별이었으니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무척 큰 별리(別離)의 슬픔에 젖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꿈속에서나 바라던 유학길을 떠나는 흥분 때문에 이별의 슬픔이고 뭐고 느낄 경황도 없었습니다.

 장모님은 합승의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고 나는 바로 뒤에 앉았습니다. 김포공항으로 떠나오는데 내 옆자리에 앉았던 둘째누나가 내 귀에다 대고 “동렬아, 네 장모한테 ‘장모님요’ 하고 한번 불러드려라” 하고 여러 번 속삭였습니다. 내 둘째 누님은 한동대학 김영길 총장의 외숙모 되십니다. 남편이 월북하는 바람에 혼자 살고 계시니 입장이 비슷한 장모님에게 초록은 동색이라 일종의 연민의 정을 많이 느끼시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구실을 잡아 장모님을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에라 모르겠다 “장모님요” 하는 네마디를 경상도 사나이답게 크게 입 밖으로 내뱉었습니다. 그 순간 장모님은 귓불이 빨개지면서 뛸듯이 좋아하시는 모습이 뒤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월북하고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사회적 배척과 시달림을 받으며 오로지 외동딸 하나만 들여다 보면서 살아가는데 이 딸년이 대학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바람이 났으니 얼마나 실망, 걱정을 했겠습니까. 다행히 딸의 애인이 전액 장학금으로 유학을 간다니 걱정은 조금 줄었겠지요. 먼 길 떠나는 날 경상도 촌놈 사위가 “장모님요” 하고 기운차게 불렀으니 그 감격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지 않겠습니까?

 캐나다에서 우리 부부는  장모님을 모시고 25년 한솥밥을 먹었습니다. 우리가 런던 온타리오에 살 때, 장모님은 영어학교에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영어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우리 부부도 놀랐습니다. 장모님은 은근히 자기 머리가 좋다는 사실을  자랑하실 기회로 생각하셨던지 “내가 대학졸업생 보다 못할게 뭐 있노?” 하시며 공부를 밤 1~2시까지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날은 내가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며 “장모님 아직도 안 주무시네요. 공부 너무 하지 마시고 밤이 늦었으니 그만 주무세요” 하면 장모님은 이 사위의 말에 무척 흐뭇해 하시는 표정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장모님, 이제 그만 주무세요” 하는 말은 장모님을 위한 말이라기 보다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심보가 숨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너무 늦게 주무시면 이 사위 아침이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말 뒤의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는 장모님께서는 ‘내 사위가 내 걱정을 가장 많이 해주는 효자 사위’로 생각하고 속으로 흐뭇해 하셨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장모님은 돌아가시고 우리가 살던 도시 런던 온타리오의 어느 공동묘지에 유택(幽宅)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이 사위도 올해로 여든 살이 됩니다. 장모님이 지금까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무가 가만히 서고자 해도 바람이 가만히 두지를 않고,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려 해도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는 옛말은 만고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는 9월21일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21년째 기일입니다. 아내와 함께 런던 온타리오 우드랜드(Woodland) 공동묘지에 쓸쓸히 누워계신 장모님 산소에 다녀올 계획입니다.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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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8
P교수

 

 P교수는 나와 동갑네기입니다. 그의 고향은 태산준령의 경상도, 산 높고 물 맑은 지리산자락, 예로부터 지조 높은 선비가 많이 태어난다는 S고을이지요.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수필집 ‘꽃피고 세월가면’ 한 권이 연결고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가 은퇴한 K대학교 명예교수 휴게실에서 우연히 집어든 내 수필집 ‘꽃피고 세월 가면’을 읽고 내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시내 서점에 가서 나의 다른 수필집 ‘청산아 왜 말이 없느냐’를 사서 읽고 난 후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 후 내가 그에게 인편으로 보낸 수필집 ‘꽃다발 한 아름을’을 읽고 난 후 그가 쓴 책 ‘세계지리산책’ 두 권을 보내왔더군요. 그는 내가 서예를 하는 줄 알고 그의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묘비를 써 달라고 부탁하여 내가 용비어천가체로 써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는 지리학자입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 어디고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은 선비이지요.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길에 대구에 가서 P교수를 만났습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소탈하고 허름한 청바지 차림이 꼭 과수원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는 분. P씨는 자기 모교에 교수로 있었는데 몇 년 전에는 그 대학 총장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총장 임기가 끝났는데도 학생들이 총장직 앙코르를 끈질기게 요구해서 K대학 역사에 전례가 없는 총장직을 두 번 연임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을 할 때 화려한 장식이나 격식을 차리는 법도 없고 꾸밈도 과장도 없는 직선적 화법을 쓰는 사람이니 학생들이 안 좋아할 이유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내게 다음과 같은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가보지 못한 무학 농사꾼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S군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을 대도시 대구로 보냈답니다. 대도시로 전학을 온 P는 도시환경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는군요. 학년 말 성적표에서 소년 P는 반에서 맨 꼴찌를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한테 꼴찌를 했다는 얘기는 차마 못하겠고 고민고민 하던 P는 통신부(오늘의 성적표)를 손질해서 꼴찌를 1등으로 고쳐버렸다고 합니다(간은 무척 큰 놈이지요). 이들이 1등을 했다는 것을 알리는 성적표를 거머쥔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 자랑을 하며 한 마리 밖에 없던 돼지를 잡아서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어른이 될 때까지 성적표 조작을 고민하던 P씨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하여 나중에는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 되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미국 유학의 코스를 거쳐 모교의 교수가 된 것입니다. K대학의 총장이 되고 나서 아버지에게 72명 중 꼴찌한 것을 1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나는 벌써 옛날에 알고 있었다”고 짧게 대답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년 P는 왜 꼴찌를 1등으로 고쳤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소년 P의 어린 마음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아들이 1등을 했다고 기뻐하는 아버지를 본 어린 P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요? 겁도 나고, 발각되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걱정, 죄책감, 미안함, 후회, 죄스런 마음 등이 뒤죽박죽 제멋대로 마구 쏟아져 나왔겠지요.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평생을 두고 가숨에 못 박혀 있게 할 말이 될 수 있는 것.

 딱 한 번 겪은 일에 가슴 저려오는 감동을 받아 이 감동이 남은 인생행로에 등댓불 구실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인생은 풍요롭고 흥미진진한 것도 아닐까요.

 프랑스의 소설가 위고(V. Hugo)가 쓴 ‘Les Miserables’의 주인공 (Jean Valjean)도 그가 젊은 시절 천주교 사제관에 들어가 은촛대를 훔쳤다가 잡혀서 경찰이 그 범인을 신부 앞에 데리고 갔을 때 신부가 경찰관에게 “촛대는 내가 준 것이다”는 말 한마디가 그 범인을 감동시켜 일생을 다른 방향의 길로 가게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감격스런 일 때문에 우리는 절이나 교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적표를 고친 아들의 행위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수십 년을 말 않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이 침묵은 경찰관에게 “이 촛대는 내가 준 것이다”라고 변호해준 신부의 말씀과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어린 P에게는 무언의 은혜인 셈이지요.

 우리 인생에는 사랑이나 은혜란 사건에 대한 논리적 전개를 벗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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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풍금소리

 

 나는 초등학교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면소재지에 있는 ‘예안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나무로 지은 전형적인 학교 건물, 교실 뒤로는 절벽같이 가파른 선성산이 버티고 있고 가을이면 선성산 단풍잎이 교실 벽에 쌓이는 학교. 교문에서 2, 3분만 걸어가면 둑을 따라 바로 발밑을 지나 저멀리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가 훤히 보이는 그런 풍광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책 읽고, 노래 부르고, 공차고, 싸움박질 하고, 학예회 하고 청군 백군 나뉘어 운동회를 벌이곤 했지요. 명색이 면소재지라서 근처에 있던 여러 마을에 비하면 예안면 소재지는 그야말로 ‘대도시’ 였습니다. 한 학년에 학급이 2개나 되니 엄청나게 큰 학교가 아닙니까? 그때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복잡한 것이라고는 눈에 띄지도 않던 시절, 한 번 같은 반 아이가 되면 6년을 같이 다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졸업생 거의 전부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졸업식도 ‘이제 헤어지는구나’ 하는 석별의 감회는 지금과 비교해 몇 배가 더 컸던 거 같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광경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합니다. 그때 졸업식은 지극히 엄숙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장례식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졸업식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 졸업장 수여, 재학생 대표의 송별사,  졸업생을 대표한 학생의 고별사(valedictory)가 있고 이어서 졸업식 노래가 있었습니다.

 졸업식 노래는 그날 행사의 클라이맥스였지요. 당시 우리가 불렀던 졸업식 노래는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노랫말을 쓰고 정순철이 멜로디를 단 ‘졸업식 노래’였습니다. 모두 3절로 짜인 이 노래의 노랫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럽기에 그 전부를 여기 적어 보겠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보시다시피 어려운 낱말 하나, 애교(愛校)니 애국(愛國)이니 하는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 없는, 그야말로 수정같이 맑은, 순도 100%의 우리말이지요. 그 시절은 선생님이 나와 손수 풍금을 치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1절은 재학생들이, 2절은 졸업생들이, 3절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불러서 석별(惜別)의 애틋한 분위기를 돋웠습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얼마나 애달픈지 2절을 부를 때면 교실 저쪽에서 가시나(우리 사내아들은 여학생들을 이렇게 불렀지요)들이 훌쩍훌쩍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국 E여대에 가 있을 때 은퇴가 가까워져오는 어느 이른 봄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12살, 초등학교 졸업식 때 노래를 부르던 그 정서에 또 한 번 젖어 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와 비슷한 산골학교의 졸업식에 가보리라는 생각을 했지요(내가 졸업한 예안국민학교는 수몰지구라 폐교되었습니다). 이래서 낙착된 곳이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온혜초등학교 졸업식이었습니다.

 온혜초등학교는 노송정(老松亭) 종갓집에 퇴계(退溪) 이황이 태어난 태실(胎室)이 있는 마을로 내가 졸업한 예안국민학교와 잘 비교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졸업식 전날 안동에 가서 시내 여관에 묵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온혜초등학교에 가서 식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엄숙하고 애잔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졸업식 노래’도 사람이 나와서 피아노와 풍금을 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단추 하나만 누르면 애국가든 졸업식 노래든 ‘독도는 우리 땅’이든 무슨 노래든 척척 나오는 그런 최신식 CD 졸업식이었습니다. 행사의 흥취랄까 멋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요. 12명의 졸업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킬킬대며, 저들끼리 귀엣말을 해가며 작별의 정서는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후 한 번 젖어보리라 꿈꾸었던 정서는 어딜가고 우리 부부는 큰 허탈감에 빠졌습니다(이걸 보려고 그 먼 길을 왔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내가 68년 전의 감회 어쩌고 한 것은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이 되고 말았지요.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옛날, 그 옛날, 어느 봄 예안국민학교  교정에 울려 퍼지던 그 풍금소리와 그날의 애잔한 작별의 정서뿐입니다.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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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구두

 

 나는 옷이나 장갑, 신발 따위는 내 것이라고 아끼고 챙기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는 새 운동화 한켤레라도 사오는 날이면 너무 좋아서 잠 잘 때 그 새 운동화를 가슴에 품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건을 새로 사도 그저 그렇고 시큰둥한 게 새것이라고 특별 대접을 해주는 법은 없다.

 집사람은 내가 물건을 퍽 정갈스럽게 쓴다고 칭찬을 한다. 이것이 나에 대한 집사람의 몇 가지 안되는 칭찬 중의 하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도 과히 어긋난 말은 아니다. 예로 내 자켓은 1970년 내가 학위를 마치고 첫 직장으로 노트르담 대학교에 갔을 때 산 물건이 아닌가. 이 자켓을 20년 넘게 입었다. 너무 오래 입었더니 소매가 너덜너덜 해어져서 수선집에 가서 안감을 새로 대고 소매를 줄였더니 새 물건이 되었다.

 이 재건축한 자켓을 입고 또 한 20년을 잘 지냈다. 처음 샀을 때는 자켓의 옷깃(lapel)이 넓은 것이 유행이었는데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지는 반복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유행의 변화에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다. 언젠가 우리가 살던 런던에 갔을 때 옷가게에 가서 내가 입던 트위드(tweed) 자켓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옷감으로 자켓을 만든지는 옛날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물건을 정갈스럽게 쓰는 또 하나의 예로는 구두인 것 같다. 지금 내가 신고 다니는 구두는 2003년인가 2004년, 내가 E여대에 있으며 캐나다를 잠시 방문했을 때 두 켤레를 동시에 산 물건이다. 아무리 두 켤레를 가지고 번갈아 신었다지만 생각해보니 구두 한 켤레에 15년 넘게 신고 다닌 셈이다. 집사람 성화에 못 이겨 구두를 바꿔볼 생각도 해보나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쇼핑센터까지 가기는 정말 귀찮아 오늘 내일 미루고 있다.

 이 구두 게이트의 배후인물은 미석(美石) 정옥자라는 올해 78세의 노파다. 나는 꿈 많은 19살, 그 노파는 꽃피는 청춘의 17살 서로 눈이 맞아 결혼, 같이 산 지가 벌써 50년이 넘었다.

 정 노파는 고려가 망하고 600년 동안 한양에서만 살았다는 그야말로 한양의 원주민-. 그러나 나는 태산준령의 경상도, 청량산 기슭에서 여름이면 물고기나 잡고 남의 집 수박밭이나 넘겨다 보던 야생마(野生馬). 설사 음식 한 젓가락을 바지에 흘렸다 해도 종이 수건으로 쓱 한 번 문질러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사내아이 옷에 음식 얼룩이 몇 점 있는게 무슨 큰 흠이냐,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는 법, 그대로 둘 것을 권한다.

 월남국수집이 약간 지저분해도 괜찮은 것처럼 남자도 옷차림새가 좀 꺼벙해 보여도 여자들의 나들이옷에 묻은 얼룩처럼 치명적은 아니란 말이다. 쌀밥이 귀하던 조선 때, 어쩌다가 쌀밥을 먹는 날이면 ‘나도 쌀밥 먹었다’는 표시로 입가에 밥알 한 톨쯤은 일부러 붙어 있게 했다지 않는가.

 나는 구두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이 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내가 학위를 마치고 노트르담 대학교에 교수자리를 얻은 때였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가족초청 비자로 캐나다에 오셔서 밴쿠버공항에서 넬슨 집으로 오는 길에 모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잠을 깼을 때, 아버님, 어머님이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내가 재구성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버지: 동렬이 자가 직장도 없는 모양일세. 머리 해가지고 댕기는 꼬라지나 신고 다니는 구두나 자동차 꼴 좀 보소. 저게 어찌 대학교수란 말이요…

*어머니: 동렬이 해 가지고 댕기는 꼴을 보이까네 직장도 변변한 게 없는 모양이지요…

 외모에서 나는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머리는 이발을 못해 어깨까지 내려오고(그때 나는 장발족이었다) 옷은 마대 같은 옷감으로 만든 양복저고리에(나는 당시 tweed로 만든 최신 유행 자켓을 입고 다녔다) 내가 신고 다니는 신은 왈라비 캐주얼(Wallaby casual), 반짝이는 구두가 아닌 극히 투박스럽게 보이는 구두였으니 아버지 어머니의 기준으로 보면 “내 아들이 교수요” 하는 말은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출판기념회다, 색소폰 연주회다, 무슨 강연이다 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가 내게로 쏠리는 날이면 내 구두에 대한 아내의 불만은 그 정점을 이룬다. 이런 날이면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설교 말씀을 혼자 중얼중얼한다.

 몸치장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기능 말고도 남에게 혐오감만 주지 않으면 OK다. 내가 이 나이에 말쑥한 노신사가 되던 지저분한 늙은이가 되던 무슨 상관이랴? 말끔한 노신사가 되었다고 ‘저 영감 여편네는 영감치송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귀찮고 바쁠까’ 하고 동정하는 아낙네도 없을 것이요, 지저분한 늙은이가 되었다고 ‘저 영감 여편네는 남편을 저 꼴로 해두고 자기는 뭘할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 조선나이 80세.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어도 되는 나이다. 공자도 나이 80세면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 했지 않는가. 공연히 새 구두 산다, 안 산다 하지 말고 내년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집사람 손에 끌려 쇼핑센터 구경이나 한 번 나가볼까?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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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무심정(無心亭)

 

 무심정(無心亭)이란 내 고향 경상북도 안동면 예안군 청고개 산마루에 세워질 정자 이름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보자.

 지난해 연말 한국에 있는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안동시에서 하는 말이 예안읍에서 내 생가 역동까지 도중에 출렁다리도 있는 올레길을 하나 만들 계획인데 그 올레길 중간쯤, 그러니까 청고개가 시작되는 산마루 언저리에 정자를 하나 세우고 싶다는 것. 그러니 내가 정자 이름을 하나 지어서 붓글씨로 써 보내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압구정’이라는 세 글자다. 그러나 조카 말이 한문을 거쳐야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자 이름은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싶으니 우리말이나 그에 가까운 쉬운 말로 지어달라는 것이다.

 압구정하면 생각나는 것이 서울 강남에 있는 동네 이름 압구정동일 게다. 그 이름이 지어진 것은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있던 제7대 임금 세조의 참모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狎鷗亭)’ 때문이다. 압구란 말은 친하다는 의미의 ‘친할 압(狎)’과 ‘갈매기 구(鷗)’를 합한 단어. 온 천지에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저녁노을이 붉게 타는 한적한 곳에서 세상사의 번거로움과 욕심을 잊고 산다는 말이다.

 본래 한명회의 압구정은 오늘날의 여의도에 있었다. 여의도에 있던 것을 강 건너 남쪽으로 옮기고 압구정이라는 현판을 단 것은 성종 7년, 한명회가 크게 출세를 하고 난 뒤에 있던 일이다.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지지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세조를 도와 일등공신이 된 그는 탄탄대로의 출세길을 걸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또한 자기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서 임금의 장인이 되기도 했다.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등 당대를 호령하던 명사/선비들이 다투어 압구정에 와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술 마시며 시(詩)를 짓던 이 정자는 그야말로 부귀영화와 세도가 더 할 수 없는 극에 이르다가 한명회가 일흔세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압구정 운명의 마감도 예상보다 빨리왔다.

 한명회가 갑자사화로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면 다시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어 시체를 내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건 극형)의 형벌을 당하는 판국에 정자의 운명인들 온전할 리가 있었겠는가.

 한명회는 살아있을 때 자기는 갈매기와 친하며, 한적하고 고고한 인생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세욕에 찌들은 갈매기 사랑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비웃었다.

 예로, 야사에 따르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압구정에 들러 한명회가 지었다는 시구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다가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구절에서 붙들 부(扶) 대신 망할 망(亡) 자를 누울 와(臥) 대신에 더러울 오(汚) 자를 바꿔 넣어서 “젊어서는 사직을 망하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렵혔네”로 고쳤다고 전한다.

 이종묵이 쓴 ‘조선의 문화공간’을 보면 조선의 풍류객이요 도도한 선비 백호(白湖) 임제가 압구정에 들렀다가 “…갈매기와 친하다고 붙인 이름 정말 욕심을 잊었던가?/ 지난일 모두 아득할 뿐/ 한산한 뜰에는 풀만 수북/ 청은옹(淸隱翁)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 슬픔이 밀려들어 쏟아지는 눈물”이라는 시구로 한명회와 압구정을 싸잡아서 조롱한 것이 적혀 있다.

 세상에 전하는 것은 청은옹 김시습의 절개이지 한명회의 부귀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김시습 같은 지사가 뜻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 한명회 같은 속물(俗物)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는 것. 과연 임백호 다운 조롱이요 거침없는 탄식이다.

 이 세상을 다녀간 지가 500년이 넘는 한명회의 압구정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해서 조카가 부탁한 정자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압구정 이야기를 떠나서 아내와 아침 커피잔을 앞에 놓고 모든 가능한 정자 이름을 적어 보았다. 천년정도 나왔고, 안심정, 세심정, 관수정, 청산정, 백운정, 청현정, 무심정 등이 쏟아져 나왔다.

 정자가 들어설 곳은 근처에 인가가 없고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도 아니다. 인적없는 산길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청고개를 바로 눈앞에 두고 갑자기 앞이 확 트이고 저 멀리 산 밑으로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 저쪽 편으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그런 풍광이 펼쳐진다.

 이렇게 적적한 곳에 외로이 서 있을 정자. 봄이면 꽃을 찾아 산에 오르는 상춘객이나, 올래길 산책에 나섰다가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고 싶은 사람들, 낚싯대를 메고 그늘을 찾는 고기잡이꾼 말고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쓸쓸한 정자에도 봄이면 새들이 와서 지저귀고, 하늘에 뭉게구름은 피어나겠지. 여름 소나기와 겨울의 매서운 눈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오가는 세월만 지켜보고 있을 이 무심한 정자.

 옳다. 정자 이름은 인연을 맺을 필요도, 풀 필요도 없을 무심정으로 하자. 한명회의 압구정은 수레에 실려온 고관대작들이 술잔을 들고 내려다보는 경치였겠으나 무심정을 찾는 이들은 제 발로 걸어와서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려는 나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일 것이다.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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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나의 음악적 재능

 

 사서삼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시경(詩經)은 공자가 지은 책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공자는 그가 살았던 당시 대륙 곳곳에 떠돌던 민요의 가사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내놨다.

 이 책에는 풍(風)이라 하여 남녀 애정표현 같은 음악의 노랫말과 아(雅)라는 공식연회에서 쓰이는 음악의 노랫말도 있고 송(頌)이라는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노랫말도 있다. 이 책이 곧 시경(詩經)이다. 그러니 공자가 묶은 전국 ‘민요 대전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때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천하는 열 개 스무 개로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제후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자기나라의 영토를 넓히기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런 경우 제일 피를 많이 보는 것은 풀뿌리 백성. 어디를 가도 전쟁이요, 가뭄,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려 살기는 점점 어려워질 때였다.

 이때 공자는 각 지방에서 떠다니던 민요의 가사를 모아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음악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감화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크다는 것을 알고, 민요야말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가장 절실하게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어쩌다가 취미로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음악적 재능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란 것은 색소폰에 입을 댈 때마다 확인하고 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몇 달 연습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나는 몇 년이 걸려야 하니 재능 탓을 아니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음악적 재능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 가정의 내력으로 돌리기를 좋아한다. 즉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우리집 뿐만 아니고 유가(儒家) 어느 집에서나 마찬가지. 유가에서는 춤추고 노래하지 않는다.

 이런 노래없는 전통이 대대로 내려오다 보니 내 음악적 재능이 말라 붙어버렸지 싶다. 마치 지적(知的)으로 자극이 전혀 없는 환경, 이를테면 책이라곤 전혀 읽지 않는 가정이나 집안에 책이라곤 전화번호부 밖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지적으로 불모지 환경이 대대로 이어오다 보면 생리적,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 문화적-가정적 타입의 저능아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아무튼 내 변명의 요지는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의 꼴불견이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림파 선비들이 정신적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중국 위나라 말기의 혜강과 완적 같은 죽림칠현들일 게다. 이들은 술 마시고, 거문고 타며, 산책하고, 담소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대체 어떤 정치적 문화적 화학반응을 통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 사림파 선비들에게는 노래하고 춤추던 전통은 찾아보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우리 음악 어디 있나’라는 좋은 책을 펴낸 이동식을 따르면 조선 군왕 중에 춤과 노래를 즐긴 사람은 이성계였다고 한다. 쉰 여덟에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정인지 같은 측근들과 회의를 끝내고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신하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고 흥이 오르면 자기도 나가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풍류를 이어받은 다음 임금들 즉 정종, 태종, 세종, 세조까지는 임금이 신하들과 어울려 노래와 춤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성종 때 이르러 나이 어린 임금 성종은 개국공신파들의 세력을 눌러볼 의도로 과거를 통해 등장한 사림파 선비들을 대리 등용하였다. 그런데 멋이나 풍류보다는 자기 능력 과시에 바빴던 이 신진사류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군왕이나 지체 높은 조정 신하들의 점잖은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생각하였지 싶다. 그러니 성종 이후는 춤과 음악이 시들해졌다.

 나는 대대로 유교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도 좋은 변명이 못된다. 내 주위에서 나와 비슷한 유교가정에서 자란 친구들 중에는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는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지 않는가.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인지 오래이니 지금 와서 새삼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깝고 분한 것은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신하들과 춤추고 노래 부르던 전통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동식을 따르면 영국의 에드워드 히드 총리나 독일의 헬무드 콜 총리,  폴란드의 파데레프스키는 그들이 공직에 있을 때도 가끔 연주나 지휘봉을 잡았다 한다.

 해방이 되고 난 후 우리나라의 수장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던 애창곡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그들이 한번도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보질 못했다. 우리나라의 수장도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단의 지휘봉을 잡는 날이 올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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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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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새벽

 

 “나는 촌놈이다. 흉악한 촌놈이다…” 이 말은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지금은 고인이 된 같은 반 친구 K형과 같이 ‘새벽’이라는, 전문지도 아니고 문예지라고도 할 수 없는 종합지를 낸 적이 있는데 그 종합지에 내가 쓴 수필의 첫 머리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의 첫 수필을 내가 같은 반 친구와 같이 발행한 ‘꿀꿀이 죽’에 실은 꼴이 된 셈이지요. 수필 제목도 기억못하지만 용케도 첫 머리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종합지 발행인쯤 되면 이 종합지의 사명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유(類)의 글이 주로 실릴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전에 이런 종합지를 발행하는 일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내 문예지에서 경주 불국사에 다녀와서 한시(漢詩) 한 편, ‘석굴암에 올라(登石窟庵)’를 냈다가 퇴짜 맞은 것밖에는 없지요. 한마디로 뭐가 뭔지 모르는 순(純)무식이 자기가 발행인이라고 자처하며 설치고 다녔으니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자금부족인지 독자부족인지, 아니면 둘 다 부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새벽’은 창간호 딱 한 번 나오고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새벽’이라고 한 제목 하나만은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전, 1920, 1930년대에 ‘조광(朝光)’, ‘개벽(開闢)’이니 하는 계몽사상을 표방하는 문예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내 ‘새벽’도 이념적으로는 이들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왜 ‘새벽’이라고 지었을까요? 계몽성이 있고 힘찬 것을 좋아하던 나의 허영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그 흔하던 반독재 투쟁에도 한번 참가해보질 못한 겁쟁이. 정치적 사상이 보수라서 그런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개혁을 꿈꾸는 사상가나 되는 것처럼 계몽적인 의미가 담긴 이름은 짝없이 좋아했었습니다.

 그 버릇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가 여행을 가도 그냥 편히 쉬는 여행이 아니라 흥밋거리가 되는 여행, 역사가 있는 여행을 더 좋아했습니다. 작년에 친구 넷이서 멕시코 남동쪽 유카탄 반도에 일주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휴양지에 틀어박혀 먹고 쉬고, 또 먹고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여행이 아니라 “행복한 돼지”의 여행이었습니다.

 옛날 젊은 시절 같았으면 내용없는 여행이라고 거절했을 여행이었지요. 그러나 웬걸, 먹고 쉬고 하는 것만 되풀이 하는 몇 날을 보내고 나니 ‘행복한 돼지’ 여행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지는 몰랐습니다. 여행이 끝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쿠바(Cuba)에 가는 또 하나의 비슷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세상이란 살아가는 과정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나는 ‘새벽’에 “나는 촌놈이다…”로 시작되는 수필 외에 ‘심리학에서의 조작주의’란 제목으로 글 한편을 실었습니다. 건방이 뚝뚝 떠는 제목이지요. K교수가 하루는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새벽’에 실린 조작주의에 관한 내 글을 칭찬하면서 자기 밑에 조교로 일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무급조교란 말 그대로 월급도 없는, 그렇다고 할일도 없는, 외화내빈의 자리였습니다. 그래도 무급조교가 유급조교로 이어진다는 희망 때문에 그 자리 하나도 얻기가 퍽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K교수가 나를 알아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실렸던 글이란 것도 내가 영어로 된 어느 방법론 책에서 거의 그대로 번역을 해서 짜깁기한 것이었기 때문에 K교수가 나를 칭찬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요. 나는 표절행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참, 끝으로 내가 ‘새벽’이란 잡지를 애당초 K형과 같이 발행했다 하면서 K형 얘기를 쏙 빼고 내 얘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K형 얘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K는 퍽 명랑하고, 예의 바르고 순한 양같은 친구였습니다. 우리 둘은 4년 대학생활을 끝내고도 무척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나는 해마다 며칠씩 K의 집에 가서 있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지요.

 내 서가(書架)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드로브작(Dvorak) 교향곡 4번 LP판 하나가 외롭게 꽂혀 있습니다.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의 아내와 첫 번 데이트로 간 곳은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리는 KBS정기연주회 자리였습니다. 그날 연주곡목의 하나가 드보르작 교향곡 4번. K가 이 사실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가 캐나다로 유학 왔을 떄 우리 집에 들러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어느 여의사와 결혼해서 꿈같이 살던 K가 몹쓸 병에 걸려 그 예쁘고 착한 아내를 두고 저세상으로 먼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드보르작 4번 교향곡은 젊은 시절 내 첫사랑의 추억도 되고, K에 대한 나의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 서가(書架)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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