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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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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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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2
세상살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지나친 정직이나 지나친 솔직함은 마음 편한 삶을 살아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남과 더불어 지내자면 때로는 남이 저지르던 내가 저지르던 정직 아닌 행동을 보고 눈감아 줄줄도 알아야 하고, 가끔 거짓말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삶의 현실에 경건할 줄도 모르면 내 행동은 물론 남의 잘잘못도 바로 보질 못하고 무조건 깎아 내리거나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가 무척  쉽습니다.

 정조 때 선비로 다산(茶山) 정약용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선비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그의 아버지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죽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임금 정조가 다산의 재주를 아껴 아들처럼 잘 보호해줬으나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의 미움을 받아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을 씌워 강진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다산이 쓴 시에 호박탄(歎)이란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詩)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다산이 회현동에 살 때 하루는 대문을 들어서자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달랐다고 합니다. 다산집 계집종이 눈물을 찔끔거리고 서있고 아내 홍씨가 상기된 얼굴로 있었습니다.

 사연인 즉 끼니가 끊긴지 오래여서 호박죽으로 연명했는데 그나마 호박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 옆집 텃밭에 열린 탐스런 호박 하나를 발견한 계집종은 주인 몰래 그 호박을 따왔습니다. 죽을 끓여 주인께 올렸더니 성품이 대쪽같은 홍씨는 화를 내며 매를 들었습니다. “누가 너 보고 도둑질 하라더냐” 하며 야단을 치고 때렸습니다.

 이를 본 다산은 “아서라, 그 아이는 죄가 없다. 꾸짖지 말라. 이 호박죽은 내가 먹을테니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라”고 말한 뒤 그는 속으로 탄식하였습니다. “만권의 책을 읽은들 아내가 배부르냐. 두랑 밭만 있어도 계집종이 도둑질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나도 출세하는 날이 오겠지”

 다산은 배가 고파 호박 하나를 도둑질한 어린 계집종을 윤리를 들먹이며 꾸짖고 매질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인가를 실토한 것입니다. 다산은 다른 ‘가난’이라는 시에서 “안빈낙도를 말하지만 막상 가난하니 안빈이 안되네. 아내의 한숨소리에 체통이 꺾이고 굶주린 자식들에겐 엄한 교육도 못시키겠네.” “그야말로 삼일만 굶으면 정승도 도둑이 된다”는 현실을 구태여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삶의 엄숙함 앞에 경건해지지 않는다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산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삶”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삶의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삶은 예술이건, 윤리 도덕이건 아무 의미가 없는 헛말이 되기가 쉽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윤리 도덕적인 삶인가 하는 데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철학자나 성직자, 윤리 도덕적인 삶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우리가 듣기에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인정과 실정을 무시하는 고상함도 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로 제 자식을 굶기면서 남의 자식 굶는지를 걱정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행동 하한계는 “너무하다” “지나치다”는 등의 말이 나올 때는 우리 행동이 위선의 영역을 밟지 않았나?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나는 살아가는데 구김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구김살 없는 인생을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지식, 문화예술, 윤리도덕이 들어 ‘사람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나도 자주 이런 덫에 걸려 듭니다.

 며칠 전에는 어느 시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 시인이 이번 코로나 위기 때 집에서 뭘했는가를 물었습니다. 나는 책으로 치면 한 250쪽은 될 분량의 시조풀이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버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안해도 좋은 말을 한 것이 화를 불러왔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옛 시조를 300수 가량 외웠지요. 외우는데 두번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다”고 했더니 “그 말은 귀가 헐도록 들었어요”하며 제발 자랑 좀 그만하라더군요. 나는 내 자신이 무척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요. 좌우간 “귀가 헐도록 자랑한 것은 좀 ‘지나친’ 것은 아닌가”

 최근 나에게는 비장(?藏)한 무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나의 주책없는 나이가 올해 여든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귀가 헐도록 자기 자랑을 한 것도 이제 와서 나이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2020. 6. 25)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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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5
고향산천

 

 이 땅에 태어난 시인(詩人), 묵객치고 전원생활, 시냇물 흐르고 아침 안개가 들판 가득 피어 오르고 종일토록 새 지저귀는 뒷동산을 그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옛 사람들 중에도 그들이 살던 도시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시골에 지나지 않았을텐데도 “차마(車馬)소리 들리지 않는 한적한 전원으로 돌아가서” 살고픈 염원을 가진 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나는 전원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전원이라는 말보다는 산골이라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집 주위로는 100m 안에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로 겹겹이 둘러싸인 외딴집이니 시골의 시골이었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정정한 소나무와 푸른 강줄기, 하늘에 떠가는 구름 조각 뿐이었습니다.

 그 정든 산천을 떠나 작은 도시에서 더 큰 도시로 옮겨 다니다가 도시의 도시 서울로 와 있다가 캐나다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키웠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의 삶을 그리워하고 시골 사람들은 도시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조선 영-정조 때의 선비로 시문학, 정치, 경제, 공학, 의학, 약학, 윤리, 도덕 등 통달하지 않는 학문분야가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박학한 천재가 하나 있었습니다.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기고 간 다산(茶山) 정약용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는 18년 귀양살이를 하며 그의 맏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발 서울의 번화가에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넓히라”고 타일렀습니다.

 “…귀하고 권세있는 집안은 재난을 당해서도 눈썰미만 찡그리지 이내 평안하며 걱정없이 지내지만 먼 시골 깊은 산속으로 낙향하여 버림받은 집안이야 겉으로는 태평이 넘쳐 흐르듯 하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근심을 못 떨치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다산이 말하는 서울생활이란 자기같은 폐족에게도 언제고 벼슬에 오르는 날이 오고야 말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시골과 전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얼추 섞어 쓸 수 있는 말이지요. 도시 사람들은 시골생활의 좋은 면만 보고 시골생활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시골생활이라고 매일 단순, 유쾌한 것만은 아니지요. 여름이면 비가 와서 음습하고, 밤이면 모기가 들끓고, 밥상 위로 날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비위생적이고 지저분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격양가’에 나오는 말처럼 “밭갈고 씨뿌려 밥 해먹고 우물파서 물 마시는 것” 만으로도 그리쉬운 일은 아니지요. 허리가 휘도록 힘든 일을 해야할 경우가 많습니다.

 내 눈을 적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그 산하(山河)가 몹시 그립습니다. 늙으면 꼭 그곳에 가서 이 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으리라는 꿈을 간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 거기 가서 살아라” 해도 주저할 판. 나도 모르게 도시 사람이 된 것이지요.

 나는 올해로 그 정든 산천에 그리움만 남겨두고 다른 모든 것에는 작별을 고합니다. 거기 가면 여기가 그립고, 여기 오면 또 거기가 그리워지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경자년이 곧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2020년 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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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8
조선의 임금 이야기

 

 조선조의 임금은 장자 승계, 즉 맏아들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조선 임금 27명 중에 맏아들이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경우는 27명 중에 단 7명 뿐입니다. 도대체 누가 맏아들로 정규승계를 했는지 적어 볼까요.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3대 명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 이렇게 7명입니다.

 임금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거기에 앉겠다고 형제간에 다툼은 건국 직후부터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 2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첫 번째  난에서는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 참모 정도전과 남은을, 두번 째 난에서는 동복형제 방간을 잡아서 귀양 보냈습니다. 형제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임금자리에 대한 권력욕구 때문이었지요.

 조선에서 임금 자리를 놓고 형제 간에 무력투쟁을 벌인 것은 이방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무력투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대로 있다가는 무슨일이라도 터질 것 같아 결국 형제 중 하나가 귀양을 가게 되어 사약을 받은 사람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이었습니다. 성질이 난폭하고 거칠었던 형 임해군은 “임금 자리는 본래 내 것이었다”는 말을 마구 하고 다녀서 임금 자리에 올랐던 동생 광해군이 그를 유배 보내서 사약을 내렸습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난리 중에도 일본군과 장사를 하여 돈을 벌 정도로 기강과 윤리도덕 기준이 형편없는 개차반이었습니다.

 형제 간에 임금 자리를 두고 다퉜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형제 간에 관계가 소원해질  뻔한 왕자들이 있습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입니다. 양녕은 세자 시절에 태종이  물러나는 날에는 그 뒤를 이를 후보 제1호였습니다. 그러나 행실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태종의 마음에 덜 들어 세종으로 갈아치운, 어떻게 보면 비운(悲運)의 세자였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살았을 때는 양녕은 광주에 쫓겨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사람들이 양녕대군과 내통하는 것을 일체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양녕에 대한 동정론이 살아있고 양녕대군 역시 재기의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태종의 부인 민비도 장남에 대한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지요.

 그러나 세간에는 양녕이 임금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망나니 짓을 했다느니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랬느니 등등의 미담(美談)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을 보면 재미있고 우습게 생각됩니다.

 27명의 임금 중에 치세를 잘한 임금은 누구일까요? 치세를 잘했다, 못했다 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서로 다를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보는 눈은 우리네와는 다르겠지요. 그러나 사학자들 간에도 차이는 클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이 가장 반듯한 사학자 천고(遷固) 이덕일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천고는 조선의 최고 임금으로 세종과 정조를 꼽습니다. 세종은 한글 창제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많이 실현했습니다. 백성에 의한 치국은 거의 없던 시국에 오늘날의 여론조사 같은 것을 실시해서 민의(民意)를 살폈고, 백성을 위한 정치에서는 세종을 따를 임금은 없었지요. 그렇다고 세종이라고 실책없는 법은 없지요.

 수령 고소 금지법을 만들어 역모 이외에는 어떠한 불법행위가 있더라도 백성은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것, 이것은 세종의 명백한 실책(失策)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분제도에 있어서 종부법을 따르지 않고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한 것이 큰 실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종모법으로 노비의 수가 불어났으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회발전을 막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기득권층은 종모법을 따르면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 언제나 천인 종모법을 주장했는데 세종도 이 기득권 세력의 외침에 굴복당한 것이지요.

 22대 정조는 세종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주장에 큰 반대의견은 없을 것입니다. 정조는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한(恨)이 너무 많은 인물이 집권하면 성공적인 정치를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품고 왕위에 올랐으나 처삼촌 홍인한, 정후겸 등 몇몇 소수 세력만 제지하고는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를 죽이려는 노론 벽파의 끈질긴 노력은 정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도 그치질 않았습니다.

 예로 정조가 임금이 되고 1년 안에 정조를 죽일 계획이 2번이나 있었습니다. 두 번 다 정조가 잠을 자던 존현각 지붕 위로 자객들이 잠든 정조를 살해할 계획을 옮기려다 실패한 것입니다. 정조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는 습관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지요. “옷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몇달이 되는지 모른다”고 실토할 정도로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배후 인물들을 조사해 보니 사도세자를 죽일 때 선도 역할을 한 홍계희의 아들과 손자들이었습니다. 이 암살계획을 위해서 국왕의 호위무사, 내시, 상궁, 궁녀, 청소부까지 매수했답니다. 정조는 세손시절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잡거나 놓고, 주거나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무리들(노론 벽파)에 달렸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고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흉도들이 내 거처를 엿보다 말과 동정을 탐지하고 살피지 않는게 없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안히 잠도 자지 못했다.”

 정조는 능력 위주로 인물을 뽑아 썼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 이가환, 초정(楚亭) 박제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서이수 등 출세길이 막혀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던  서얼 출신 선비들에게 홍문관 검서관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국가정책을 토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불어오고 개혁의 의지가 꽃필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 놓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영조가 66세 때 새 장가를 들어 15살 나이에 시집을 와서 평생을 처녀로 지냈던 정순왕후(결혼할 신랑의 나이가 66세이니 다 갔지 않겠습니까?)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맨 앞장을 섰고 정조가 임금으로 있을 때는 복지부동()으로 있다 정조가 죽은 다음에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여서 조선을 다시 과거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 책 이름만 나오는 것인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썼다는 것으로 알려진 ‘한중록’이 생각날 것입니다. 내가 이 책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는 것은 그 책이 혜경궁 홍씨의 회한을 담은 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에 참고의 말씀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그의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다 했을 때(뒤주를 구해 바친 사람이 바로 홍봉한이었습니다) 울며불며 아버지한테 달려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가들 중에 혜경궁 홍씨도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아버지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노론 벽파의 당론을 따를 정도로 사태를 묵인 방조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한중록’은 남편을 잃은 설움과 한을 적은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친정을 구하기 위한 정치적 백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중록’은 4편(번)이나 썼는데 1편은 정조가 살았을 때, 2, 3편은 정조가 죽고 나서, 4편은 증손자이자 순조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썼다 합니다.

 좌우간 조선의 임금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처럼 어느 한 세력에 팔려서도 안되고 어느 한 세력을 무시해서도 안되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만큼이나 복잡한 심리적 계산이 깔려있는 치세법칙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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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

 
 2021년 초, 코비드 19 때문에 문밖에도 나가지 말라는 정부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도 답답해 미칠것 같아 독방 감옥살이가 이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때마침 반갑게 한국에 있는 은퇴한 중국문학교수 L로부터 ‘한국 한시 감상’이란 500쪽이 넘는 책이 한 권 왔습니다.
 L은 나와 동갑내기. 그의 부인은 내가 6.25사변 전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와 절친하게 지내던 옛 친구의 여동생입니다. L교수의 형은 이북간 나의 형님 동갑친구로 S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사람으로 우리 종가로 장가를 왔으니 도저히 그를 괄시해서는 안될 사람이지요.
 L이 보내준 책을 뒤적이다 보니 내가 존경하는 선비요, 조선의 천재로 알려진 읍취헌(?翠軒) 박은의 시 ‘복령사’도 눈에 띄었습니다. 맨 마지막 구절 ‘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 영겁(永劫)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뿐-(萬事不堪供一笑 / 靑山閱世自浮埃)하는 시구는 내가 무척 좋아하고 아끼던 시구(詩句)지요.

 이 시를 지은 읍취헌(?翠軒) 박은은 성종-연산군 때의 학자로 경북 고령 사람입니다. 어릴 때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문장에 능(能)하여 대제학 신용개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지요. 홍문관 수찬, 경연관을 역임하였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파직, 갑자사화에 걸려들어 사형된 아까운 선비입니다.
 23살에 파직, 25살에 그의 아내가 죽고, 26살에 사형당했습니다. 그의 시에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칠언절구 싯구를 두고 한문학자들의 번역은 제각기 다 달랐습니다. L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9년 한국고전번역원 김달진의 번역은 “모든 일은 한 번의 웃음에 이바지할 뿐이요 /푸른산의 세상을 겪는 것은 다만 뜬 먼지이네”로, 2006년 한국고전 번역원 이상하의 번역은 “만사는 한 번 웃음거리도 못 되는 것 / 청산도 오랜 세월에 먼지만 자욱하구나”로, 1992년 손종섭은 그의 ‘옛 시정을 더듬어’에서 “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으로, 마지막으로 2021년 반농(伴農) 이장우는 “세상만사가 한바탕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 푸른 산에서 지난 세월을 둘러보니 다만 뜬 티끌일 뿐”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싯구 하나를 두고도 여러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문(漢文)의 강점도 되고 동시에 약점도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한문 해석의 모호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정민 교수의 ‘한시 미학 산책’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추려 볼까요.
 한(漢)나라 원제 때의 궁녀 왕소군은 절세미녀였다. 원제는 궁녀가 많아 일일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궁중화공 모연수에게 궁녀들의 얼굴을 그려 바치게 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골랐다.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며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그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도도했던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한번도 임금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한 번은 흉노의 왕이 한(漢)나라의 미녀로 왕비를 삼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원제는 궁녀 중에서 못생긴 왕소군을 흉노왕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제가 오랑캐의 땅 흉노로 떠나려는 왕소군을 보니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빼어난 미녀가 아닌가. 왕소군이 화가인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을 안 원제는 격노하여 모연수를 죽여버렸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많은 역대 시인들은 胡地無花草 / 春來不似春(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하며 많은 시상을 낳았다.
 조선 때 어느 향시에서 시제(試題)가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다섯 글자였습니다.  응시자들은 한결같이 왕소군의 슬픈 신세를 시상(詩想)으로 풀어 제출을 했답니다. 그 중 장원에 뽑힌 어느 선비의 작품은 왕소군의 슬픈 신세는 말도 않고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 하나),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을까?),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만), 胡地無花草(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도다)라고만 되풀이 해서 4번을 적은 것이었다 합니다. 화초가 ‘없다 하나’, ‘없을까?’, ‘없으랴만’, ‘없도다’ 글자 3개를 놓고 이렇게 풀이를 달리하며 제출한 작품이 장원을 장지한 것이지요.

 ‘세월에 시정을 더듬어’를 쓴 손종섭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다투어 기억하려는 경인구(驚人句: 사람을 감탄하고 놀라게 할 만큼 빼어나게 잘 된 시구) 한 두 줄만 있으면 전편은 저절로 명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萬事不堪供一笑 / 靑山閱世自浮埃(만사야 한바탕 웃음거리지 / 영겁에야 청산도 뜬 먼지일 뿐)하는 구절 또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경인구(驚人句)가 되지 싶습니다. (20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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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어린이, 청년, 그리고 노인

 

 최용범과 이우현이 공동집필한 ‘한국 역사’를 보면 ‘청년’이란 말은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청년은 젊은이로 불리다가 1893년 일본에서 조선청년 애국회가 결성되고 나서는 사회적으로 인기 유행어가 되었다 합니다. 기독교 청년회, 여자 청년회, 청년구락부 등 청년이란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조직은 1920년만 해도 250여 개에 이르렀다지요.

 한편 청년운동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어린이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을 쓴 육당(六堂) 최남선이 ‘어린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 격식있는 단어로 ‘어린이’를 쓴 사람은 소파(小波) 방정환입니다. 소파는 천도교의 제3교주요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의암(義菴) 손병희의 사위로서 이런 전통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소파는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서 어린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도 한울님으로 모셨으니 어린이를 절대로 학대하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같이 그는 천주교 2대 교주 최시형의 말을 충심으로 따르는 어린이 운동가였지요. 방정환은 1922년 첫 번째 어린이 날을 제정하여 5월1일에 행사를 마무리 하고 이듬해에는 어린이 잡지 ‘어린이’와 색동회도 조직하였습니다.

 나는 ‘어린이 날’을 생각하는 중에 놀라운 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린이 날’은 1922년 5월 천도교 제 2교주 최시형이 “어린이는 한울님이니 절대로 때리지 말라”를 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시형은 학교 교육은 전혀 받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 인간 심성에 와닿는 이같이 절실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기야 예수그리스도, 부다, 마호메트 같은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가 학교에 다니면서 책을 읽고 인간 심성에 대한 통찰을 연마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인간행동에 대한 이해와 통찰은 책을 읽거나 남의 얘기를 들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용암처럼 속에 차 있던 것이 줄줄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날이나 청년 운동과는 달리 노인운동은 누가 언제 시작하였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내 짐작으로는 노인들 자신이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근래에 들어 노인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지요. 불어난 수가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어 노인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쉽게 확보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청소년 운동’이나 ‘어린이 운동’에 비해서 ‘노인 운동’은 노인들 자신이 “우리도 안정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야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구태여 ‘노인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노인운동은 젊은이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경제적 독립과 노후를 풍요롭게 해 줄 여러가지 활동을 마련하자는 조용한 사회적인 삶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학교 가기 전 어린 시절을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이, 청년, 노년기로 옮겨온 과정에서 내 어린시절이 축복받은 삶이라 해야할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산과 강, 그리고 나무 그늘 속에서 보낸 자연의 삶이었으니 도시 아이들 처럼 꽉 짜인 하루일과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고 내 마음 내키는대로 산 셈이라 축복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은퇴할 나이를 한국 E여자대학에 있을 때 맞았습니다. 한국에서 눌러살 생각도 해봤지만 안정을 보장해 주는 캐나다로 돌아와서 촛불이 목숨이 다하기 직전 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것처럼 아직까지는 별 탈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 땅에서 31년을, 캐나다 땅에서 34년을 살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은 정(情)이고 캐나다는 안정(安定)입니다.

 요사이 세대 차이가 너무 크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대차라면 청년세대와 장년, 노인세대 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대간 차이를 메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는 잘모르지요.

 나는 이런 데는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취합니다. 세월이 가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그래서 때가 오면 적절한 개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젊은이와 늙은이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는 언제나 차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20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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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원뎅이

 

 2020년 초가을 어느날 내게 이메일이 한 통 들어왔습니다. 보낸 사람은 한문학자 L교수. 내 수필집 몇 권을 영남대학 L교수에게 보냈는데 자기는 그 대학교에서 벌써 몇 년 전에 은퇴를 해서 이제야 책을 받게 되어 고맙다는 인삿말이었습니다. 
 나는 L교수와 인연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있다는 것은 L교수의 친형 L박사가 13살 나이에 우리 종가의 사위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월북한 형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L박사는 S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온 물리학 박사.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컴퓨터를 들여온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의 부인은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이나 두 사람은 평생 그럴 수 없이 사이가 좋아서 많은 모임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생 L교수는 S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대만, 일본, 미국 등 여러 대학의 방문교수를 지낸 분입니다.
 L교수의 부인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49년 예안국민학교 4학년이던 나는 서울 형님댁에 가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는 안암동에 있는 종암국민학교였지요. 신설동에서 살던 나는 돈암동에 사는 J라는 나와 동갑내기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와 J가 친구가 된 것은 우리집과 J의 집이 경북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산다는 외로움이 두 집을 가깝게 만들어준 모양입니다. 그 집 맏아들인 J와 나는 동갑내기. 성격이 예의 바르고 명랑한 J는 나의 좋은 동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한국 전쟁이 터졌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내 고향 안동까지 500리 길을 걸어서 갔습니다. 그때 일행은 어머니와 작은형, 둘째 누나, 그리고 아버지 외가쪽으로 친척되는 신혼부부 한쌍, 이렇게 모두 6명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큰 형님의 전송을 받으며 장호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새면 걷고 날이 저물면 잠을 자는 생활을 되풀이 하며 10일 만에 안동 땅에 도착했습니다. 안동시에서 하회마을을 국도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얼마 안가면 J의 고향집 원뎅이가 나옵니다. 열흘 동안의 풍찬노숙에서 벗어나게 될 어머님은 어느 큰 기와 집으로 들어가시면서 “이제 다 왔구나” 좋아하시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원뎅이 집은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지금 어슴프레 내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집 앞에 큰 나무가 하나 서 있고 그 집 안채도 역동 우리집 안채 처럼 크고 넓직한데 마루 북쪽으로 문이 두개나 있어서 여름에 두 문을 열어 놓으니 무척 시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말이 고향가는 즐거운 길이지, 열흘동안 걷다가 자고 걷다가 자고 하는 일과만 되풀이 하다가 원뎅이 천당에 들어오니 긴장이 탁 풀어지는 것 같고 모두들 “이제 집에 다 왔구나” 싶은지 그 집 어른들과도 무척 재미있게 대화를 했습니다.
 안동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동연회(同硯會)라는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회원이 모두 200명을 넘었습니다. 내가 E대학에 가 있을 때였습니다. 한번은 동연회에서 의성 고문사 관광을 갔습니다. L교수의 부인, 즉 J의 친동생이 내 아내에게 이동렬 교수를 아느냐고 물었답니다. J의 동생도 오빠 친구인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겠지요.
 그 일이 있은 후 L교수는 영남대학에서 은퇴하면서 은퇴 기념으로 자기가 일고 있는 전국 중국문학 교수들이 각자가 애송하는 중국시 한 편씩을 부탁하여 ‘중국 명시 감상’이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퍽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요. 이 ‘중국 명시 감상’은 내 서재에서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통화를 하다가 L교수의 부인(J의 여동생) 안부를 물었더니 상배(喪配)를 했다는 청천벼락이었습니다. 70년 전, 내가 신설동에 살때 돈암동 J에게 가면 가끔 어린 아이로 보이던 그 명자가 벌써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번에 한국을 나가면 원뎅이 집, 70년 전에 어머니께서 지친 몸을 끌고 “이제 다 왔구나” 하고 좋아 하시던 원뎅이 집을 가보리라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L교수에게 했더니 “그 원뎅이 집은 벌써 헐리고 그 집터가 경상북도 도청의 딱 중심이 되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70년 동안 간직한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랄까. 내 가슴 속에 아련한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앉는 순간이었습니다.
 L교수가 상배했다는 말을 들으니 내 몸속에 있는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듯 싶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내가 L교수와 통화한 시간이 한시간 반을 넘고 있었습니다. L교수는 중국문학을 전공한 박사답게 왕발(王勃)의 시 한 구절(이 세상에 지기가 있다면야 하늘 끝도 이웃 같으리: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을 끌어대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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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대통령의 자질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 때가 오면 어김없이 나오는 화제의 하나는 전(前)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를 따르고 좋아했던 패와 그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패로 갈라져서 자기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기 의견을 내놓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박정희를 지지합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의 공로로, 박정희는 “우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으로 칭하며, 그 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독재 경력을 들먹입니다. 나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싫어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먼저 박정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는 먹는 문제를 해결했으니 경제 대통령으로 그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도 어느정도 그 말에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경제 대통령으로 말하자면 독일의 히틀러(A. Hitler)와 소련의 스탈린(J. Stalin)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요?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무너진 독일 경제를 짧은 시간에 회복하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튼튼한 경제 부국을 일궈냈으니 그를 제일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겠습니까.

 소련의 스탈린도 빼놓을 수 없는 경제 대통령입니다. 황폐해진 소련 경제를 다시 일으켜 미국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사기반을 구축한 그도 경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내 주장의 요지는 경제, 교육, 국방 등 어느것 하나에 쏠려 대통령의 자질이나 치적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대통령일까요? 하는 대통령의 자질에 관한 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를 것입니다. 마치 신랑감을 고를 때 돈 많은 사람을 유일한 기준으로 고른다는 것도 문제이고, 학벌 좋다는 것을 유일한 기준으로 고른다면 그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건강, 인격, 사랑, 인간미 등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더 원만한 결정일  것입니다. 대통령을 고르는 기준도 마찬가지 경제, 국방, 교육, 문화, 의료, 스포츠 등 여러가지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2가지 기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식견, 즉 영어로 비전(Vision)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앞을 내다 보는 힘을 가지고 미래가 현실이 되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로 꼽고 싶은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랄까 인권에 대한 외경(畏敬)이라고 봅니다. 사람 목숨에 대한 외경은 어느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편파적 외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경입니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정적을 파리 잡듯 쉽게 한 것은 사람 목숨에 대한 존경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봉건시대 때 성군(聖君)으로 이름난 임금들, 이를테면 세종 같은 사람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이 남달리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는 반드시 자기가 그 사건을 재심사해서 신중을 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옵니다. 수백 명의  무고한 양민을 재판없이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이승만은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승만이 비굴한 방법으로 자기의 정적을 제거해 버리지 않았느냐고 하면 “뭘 사람 하나 죽였는걸 갖고 그럽니까?” 하는 변명을 해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둘은 괜찮고 열 명 스무 명은 안된다는 것입니까. 내 생각에는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이나 열명 스무 명을 죽이는 것이나 그 악한 마음씨에 있어서는 다른 게 없습니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당시 남들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 총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나쁜 선례를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 권총을 들고 김구를 쏜 것은 아니다”는 것을 힘들여 강조하지만 지도자의 암묵적인 승인 없이는 이런 암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김구, 장덕수, 여운형 등 모두 6명의 정적들을 암살하고 자기의 정치목적을 달성한 이승만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것은 사나이의 대결이 아닙니다. 요 몇 주 전에 이승만 시절의 경찰과 테러단들에 의해 무고한 양민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학살당해  버려진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는 방송뉴스를 들을 때마다 이승만의 잔영(殘影)이 어른거립니다.

 이승만이 정적을 제거하며 정치 목적을 달성한 것을 본 박정희는 이승만에 질세라 무고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봉건사회나 전제국가에서는 왕이나 독재자에 대한 제어 장치는 없었습니다. 왕이나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해도 국민은 불만 속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 사회를 컨트롤(Control)하는 사람들을 시한제로 정해놓고 투표를 해서 뽑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표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컨트롤을 당하는 시민들이 자기들을 컨트롤 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그러니 민주사회에서는 시민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다음 투표에서 다른 컨트롤러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은 미국 대통령 선거날. 한 표를 던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TV 화면을 통해 보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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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나는 왜 다산(茶山) 정약용을 좋아하는가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한몸에 받는 유명한 학자랄까 선비, 저자들이 많습니다. 과거에 세 번이나 떨어졌으나 단군 이래 가장 큰 학자로 불리는 퇴계 이황, 13살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이이, 저서 500여권을 지은 다산(茶山) 정약용이 그의 천재성을 시험, 확인하고 여러번 놀라고 이 사람이 혹시 ‘귀신’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이가환, 이익, 박지원, 박제가, 근세에 와서 일본 유학을 가려고 불과 일주일 공부하여 일본어를 마스터 했다는 이광수, 정인보, 홍명희 등은 세상 어디에 내놔도 기라성 같이 보일 천재들입니다. 나는 그 많은 천재들 중에 다산(茶山) 정약용을 가장 좋아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흠모합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큰 학자들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이황, 조식, 이이, 유형원, 이익, 정제두 등 많은 학자들은 스승이 없었다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들  큰 학자들이 스승은 없었다 하더라도 큰 영향을 준 선부들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茶山) 말로는 자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선비로는 이황, 김육, 이가환이었다고 합니다.

 다산을 숭모하고 따르는 이유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다산은 학자로서 본분을 철저히 지킨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산은 권력이 가까이 있었어도 한번도 그 권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권력에 휩쓸려 다닌 적이 없습니다. 내 보기에는 많은 학자들, 특히 권력 주위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명예욕, 권력욕이랄까 출세욕이 남다른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말로는 자기는 권력이나 명예가 천하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권력을 끝없이 동경하며 권력 주위를 얼씬거립니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은 위선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집에 갇혀 있는 동안 사학자 이덕일이 펴낸 2권의 책 ‘정약용의 형제들 1, 2’를 다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들은 벌써 6년 전에 한 번 읽은 것으로 적혀 있는데 다 잊어버리고 이번에 또 읽으니 ‘새로 읽는 2번째’가 되는 셈이지요.

 책을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 오는 한시 한 수가 눈에 띄었기에 여기 옮겨봅니다.

일어나 새벽별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구나

묵묵히 바라보니 둘이서 말이 없고

목청 바꾸려 애쓰니 목이 메여 울음 터지네

흑산도 아득하여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이니

그래 어쩌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가

 다산은 강진에,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나주에 있는 율정점(栗亭店)이라는 주막에서 지금 어느때고 헤어질 예정입니다. 이날의 슬픔과 통한을 동생 다산이 읊었습니다. 이 형제의 이별은 생전에 마지막 이별이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1816년에 유배지에서 죽고 동생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유배형을 마치고 18년 만에 해방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위의 시를 대하는 순간 내 가슴이 울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작별을  몇시간 앞에 두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감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는 말도 글도 필요없다지 않습니까. 마음 속으로는 백마디 천마디의 말이 오갔겠지요.

 다산은 강진에 18년을 있으면서 50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1권의 정의가 지금과는 다릅니다). 사학자 L을 따르면 인류의 명저 대부분이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썼다 합니다.  예로 손자는 두 다리를 끊긴 후 감옥에서 ‘병법’을 썼고, 한비(韓非)는 포로의 신세로 ‘세난(說難)’을, 사마천은 남근을 잘리는 치욕을 겪으며 ‘사기’를, 공자는 액을 만나 전국을 떠돌면서 ‘춘추(春秋)’를 썼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옥중에서 ‘앙리아드’를,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라만차우 세르반테스’를, 마르코폴로는 포로의 신세로 ‘동방견문록’을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박정희는 조선 때의 위정자들 보다 더 악질이었던지 아니면 멋대가리가 없는 사람들인지, 그들은 감옥에서 책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광사, 김정희, 조희룡 같은 서예가, 화가들을 유배지에 가둬둔 것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나 놀랄만한 예술적 걸작들을 생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국가적으로는 큰 경사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내 생각으로 다산은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해서 가장 민생에 영향을 준 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철저히 풀뿌리 백성들의 편에 선 목민관(牧民官)이었습니다.

 예로, 그가 곡산부사로 있을 때 중앙정부가 너무 무리한 정책을 실현하려고 하자 다산은 이 정책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중앙정부에 알려서 바로잡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행태로 보면 영락없이 시민단체나 좌빨로 몰릴만한 짓이었겠지요.

 선조들이 8대 내리 옥당(홍문관)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다산의 어린시절은 학문으로 대를 잇는 축복받은 가정이었습니다. 다산의 5대조 정시윤이 8대 옥당의 마지막 인물이라 합니다. 당쟁 때문이었지요. 당시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형되는 통에 남인으로서 목숨을 겨우 건진 정시윤은 다시 등용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 넌더리가 난 그는 이를 거절하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마재(馬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산의 외가는 남인의 거두 고산(孤山) 윤선도. 고산의 증손자이자 문인화의 거두 공재(恭齋) 윤두수가 그의 외증조가 됩니다.

 마재를 찾아가면 내가 존중하는 선지의 회포를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로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다산이 살던 집 ‘여유당’ 뒷동산에 모셔진 그의 묘소에도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바쁩니다.

 다산을 따라 다니며 괴롭히던 그 세력은 지금 없어졌지요. 그러나 오늘날 중앙정치 무대에서 날뛰는 정치인들은 좌파와 우파로 갈려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꼴을 보면 옛날 다산이 살아 있을 때 그를 괴롭히던 무리의 후손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서로 수작하는 꼴이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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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공재(恭齋) 윤두서

 

옥에 흙이 뭍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으니 흙일듯이 있거라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졌으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가 흙덩이로 알고 있네. 옥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인즉 흙인듯이 가만히 있거라

 위의 시조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증손 공재(恭齋) 윤두서 작입니다. 윤두서는 학자임과  동시에 이름난 화가로 현재(玄齋) 심사정, 겸재(謙齋) 정선 등과 더불어 조선화단의 삼재라 불립니다. 실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다산(茶山) 정약용은 그의 외증손자가 되지요. 다산이 어렸을 때 서울에 있던 외갓집을 자주 드나든 것은 공재 서실에 있는 책을 빌려가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공재는 당시 정권 실세에서 밀려난 남인의 우두머리인 고산 윤선도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 세상에서 벼슬길에 올라봤자 그의 앞에 놓인 길은 험한 가시밭길 뿐인 것이 너무나 뻔한 것이었습니다. 능력은 탁월하나 그 능력을 발휘해 볼 기회가 없는 공재는 이 글의 맨 처음에 소개한 시로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가슴 뿌듯이 올라오는 자신감을 누르면서 이 시조를 읊었을 것입니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는 어찌해서 호남의 거부가 되었을까요?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산의 고조부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이 당시 호남의 대부호 초계 정씨네 사위가 되는 바람에 처가에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갓집 덕분에 벼락부자가 된 어초은은 장자상속을 시행하고 이것을 윤씨 집안 대대의 전통으로 남겨 해남윤씨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재력을 바탕으로 인물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어초은의 4대손에 이르러 고산 윤선도가, 6대에 이르러 공재 윤두서가 나온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나는 2017년 한국에 나갔던 길에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고택 녹우당을 가보았습니다. 녹우당이라는 행서 간판은 공재의 친구인 성호 이익의 형님이요 동국진체의 원초로 불리는 서예가 옥동(玉洞) 이서의 글씨지요. ‘우리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에 따르면 이 집은 고산이 30년 넘는 세월을 유배로 이리저리 다니다가 환갑이 넘어 다시 관직에 들어갔을 때 당시의 임금 효종이 왕세자 시절 사부였던 고산에게 지어준 것을 해남으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해남 윤씨의 유물관에서 공재 윤두서의 그 유명한 자화상을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하나 나같이 그림에 식견이 없는 사람 눈에는 다른 초상화 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화상은 나에게 무척 고독하고 쓸쓸한 감회를 듬뿍 던져 주었습니다. 자기 능력을 떨쳐볼 기회가 막혀 버리고 앞날은 어둡기만 하던 공재의 심정을 화폭에 담아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의 얼굴 전체, 특히 눈(目)에서 풍기는 고독함과 쓸쓸함은 이 초상화가 풍기는 향기라면 향기고 독백이라면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재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인의 골수이며 실학이라 부르는 학문에서 시(詩), 서(書), 화(?)가 공재는 가정적 불행으로 그의 삶은 몹시 피로했습니다. 공재의 나이 22살 때 부인이 저 세상으로 가고 둘째 부인을 맞아 그녀 사이에 7남2녀를 두었습니다. 공재는 자식복만은 타고 났지요.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유한 지봉(芝峯) 이수광이 처증조부였으니 그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겠지요.

 가정적인 불행의 연속(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죽음)으로 서울 생활을 접고 해남 연동으로 낙향했습니다. 그가 녹우당에 살았을 때는 노비 500명에 논밭이 2,400 마지기를 두었다는 부호 공재는 48세로 녹우당에서 피곤한 눈을 감았습니다.

 유홍준의 ‘화인열전’을 보면 공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평생 친구 옥동(玉洞) 이서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그들의 우정을 절절히 표현하였습니다.

 

 …한마을에서 같이 늙어가기를 바랐더니… 오호라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 어찌 나의 분신을 빼앗아 가는가… 다시는 마음을 합할 친구가 없으며 다시는 마음의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외롭고 쓸쓸하구나…

 요새는 자기가 스스로 흙묻은 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로 들끓는 세상. 자기 자신을 옥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재능이 있고 없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옥이라고 부르면 그만이지요. 이들에겐 예의 염치도 없고 그저 자기가 순 옥(玉)이라고 외쳐대면 그만입니다.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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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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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0
암행어사

 

 암행어사가 없는 시대에 암행어사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암행어사를 영화로 처음 본 것은 중학교때 였습니다.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단체로 보는 영화 ‘춘향전’이었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연배우 조미령에 반해서 그녀 때문에 고민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암행어사는 이 11살의 소년에게 참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자 잔치판은 순간에 난장판이 되고 그 당당하게 보이던 변사또가 겁먹은 얼굴로 벌벌 떨던 장면이 어슴프레 생각납니다.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던 이몽룡은 “나도 커서 저런 사람이 되어 봤으면”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커서 성인이 되고 보니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던 이몽룡도 30대의 애송이였으니 인간이 좀 덜된 용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향이는 지금 옥에서 칼을 쓰고 갖혀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제가 출세했다는 것 한 번 보여주려고 장모를 찾아가서 거지 행세를 하고 옥중에 있는 춘향이에게 온갖 너스레를 떨었지 않았습니까.

 춘향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옥에서 칼을 쓰고 있는 춘향이의 고통을 단 1초라도 빨리 줄여줘야지요. 이튿날까지 기다려서 한바탕 연극을 꾸미려는 녀석이 어찌 춘향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대단히 용렬한 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부터 지방에 파견되기 시작한 암행어사 제도는 ‘내가 암행어사요’ 하고 신분을 알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임금의 명을 받아 몰래 지방에 가서 부패한 관리들을 다스리는 특정 관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는 임명장과 임무를 적은 책, 그리고 역마를 증발하는 증명용 표지, 그리고 마패를 줍니다. 지름 10cm  정도 크기의 마패에는 말을 그려놓고 년 월 일을 새겨 넣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세종 때부터는 위조를 방지하고 부서짐을 막기 위해서 재료를 철재로 바꾸었습니다.

 마패는 1~5마리의 말이 그려진 다섯 종류가 있었는데 2마리의 말이 그려진 것이 보통 암행어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암행어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진짜 신분을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와서는 암행어사들 자신이 부패한 관리들이 많아서 은근히 자기가 암행어사라는 것을 알리고 다니면서 뇌물을 받고 성(性)대접까지 받는 암행어사들이 많았습니다. 도둑이 도둑을 잡는다는 것과 아무 것도 다른게 없지요.

 나는 암행어사 하면 의례 박문수를 떠올립니다. 박문수는 소론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지적하고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박문수는 특히 군세()와 세금정책에 밝았습니다.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로 통한 이유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 있는 듯합니다.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으며 암행어사로 활약할 때는 엄정하고 공평한 일 처리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탐관오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그의 처사에 감격했음은 물론이지요.

 나는 얼마 전에 박래겸이라는 선비가 125일간 평안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기록한 ‘서수일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서수일기’에 적혀있는 기록은 다른 어느 기록보다도 생생한 암행어사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일기와 날씨, 경유한 장소, 명승지에 관한 감상, 해당 고을 수령의 성명 등 뿐만 아니라 다니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던 기녀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에는 암행어사의 신분이 노출될까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 지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1822년 순조때 4월 평안도 지방을 돌던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울지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는게 아닙니까? 박래겸은 넌지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아기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줄 안단 말이요?” “말도 마시요.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동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이 벌벌 떨고 있다고… 암행어사가 평생 돌아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오. 우리는 그 덕택으로 살게되지 아니겠소.”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은 ‘국민여론수렴’의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박래겸이 만나본 18세기 조선 백성들의 삶은 무척 고달팠고 가난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고 구걸하는 나그네들이 많았다. 빈민구제책을 집행하는 정사가 너무 지나치게 추려내는 통에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호소할 길도 없다.”

 박래겸이 강서군에서의 일화가 가슴을 때리지요.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은 백성들의 서러운 사정이 담겨 있습니다.

“곡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받은 쌀의 빛깔이 나쁘다’며 ‘수령에게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근자에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당신들이 이렇게 장난을 치는가. 질이 나쁜 곡식을 주고 하소연 할 길마저 막히니 백성들은 어떻게 살라고 하는가?’ 그러나 아전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도리어 호통만 쳤다. ‘어찌 시끄럽게 구는가’ 그러자 백성들은 아무말도 못한 채 흩어졌다.”

 어사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다닌 것이 19대 임금 숙종 때였고 박래겸이 다니던 때의 임금은 23대 순조 때였으니 두 임금 사이에 100년 세월이 넘어 흘러갔겠지만 백성들의 삶에는 눈꼽만치의 변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암행어사들이 묘사한 조선의 풍경은 삶에 허덕이는 신음소리로 가득합니다. 이들은 천천히 망해가는 조선의 꼴을 솔직하게 묘사해냈습니다. (20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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