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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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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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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0
나의 미술 작품 감상

 

 지난 10월에는 토론토에서 2개의 전시회가 열렸다. 하나는 온타리오주 한인미술협회 연례 전시회였고 또 하나는 서예가 L 씨가 주선한 한.중.일 세 나라의 국제 서예전이었다. 미술 전시장에 나갔더니 한국일보 K 사장이 지나가는 말로 앞에 나가서 한마디 하겠느냐고 하기에 사양했다. 그 사양은 내 겸양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의 부족 때문이란 게 더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에 열린 서예 전시회에서는 L 씨의 요청으로 간단한 축사를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 살던 대학시절에는 해마다 10월이 오면 경복궁에서 열리는 국전(국립미술전시회)에 갔다. 서예실은 물론, 그 옆방의 서양화, 동양화 전시실도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술 작품은 이론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어떤 작품이 좋은 것인지는 서양화, 특히 추상화와 조각 부분에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현상은 지금도 그렇다.


 미술은 무엇인가? 미술(美術)은 말하자면 먼저 미(美)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미(美)가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미학(美學)을 먼저 설명해야 된다는데, 미학은 철학에 속하는 학문 분야, 나 같은 사람이 그것을 설명할 실력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미술이니 미(美), 미학 따위에 반드시 깊은 소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예건 동양화, 서양화건 감사의 제1단계는 직관(直觀) 혹은 직각(直覺)이다.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들어오는 첫 인상, 즉 직감(直感)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감사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 직관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쉽게 오는 것은 아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봐서 예술작품을 만든 작가의 정신이 내 마음과 서로 통할 때 비로소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진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보고 '와!' 하는 감탄사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다시 말하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 곧 미술 감상이란 말이다.


 직감으로 작품 감상하는 힘을 기른다고 <세계 명화 전집>을 갖다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페이지를 훑었다 해도 미술작품 감상에 필요한 직관력이 단박에 불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는 생활환경 속에서 세월이 가며 이끼처럼 달라붙는 것.


 그런데 미술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옛날 동굴 벽화에서 고래, 사슴, 호랑이, 물고기 등의 벽화가 있었으니 그 원시인 시대에도 벌써 미술 행위는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미술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 여가(餘暇)에 자연스럽게 창작 욕구의 발현으로 일어난 활동이라는 주장에 수긍이 가질 않는다. 미술교수요 수필가인 김용준은 미술은 인간의 제2차 본능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美)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은 미술가의 순수한 감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나타날 때는 무엇이든 미(美)가 된다. 길가에 흘린 개[犬]똥을 그림 소재로 그렸다 해서 그 그림이 더러운 것은 아니다. 화가의 순수한 예술적 감정을 거쳐 나온 것은 모두 예술품이 된다.


 화가 중에는 이론적인 점을 들어 작품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제2단계의 분석적 감상이라 할까. 그림의 구도(構圖), 선(線), 색감, 소재, 공간 처리, 묘사 실력 등에 대한 것을 해부하듯 하나하나 뜯어보는 방법이다. 나는 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분석적 방법에는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이론이 화가 자신의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지 싶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있으면,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의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일단 작품으로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예술 작품은 아무리 그것이 이론적으로 완벽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 하더라도, 실패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마음을 지고지순한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것은 예술밖에는 없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거다. 나는 전시회에 가면 작품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나만의 기이(奇異)한 감상법을 실험해 볼 때가 있다. 즉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예술가, 이를테면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시인들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본다. 그러면 세상은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어둠 속, 지옥이 바로 이런 데가 아닐까? 


 이런 공상을 하면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미술작품을 만든 작가의 예술적 정신과 내 정신이 서로 만난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 결과 그림에 대한 나의 감동은 더 커지고. 내가 갖다 붙인 이름은 '초(招) 공상(空想) 미술 감상법'이다. 내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2012. 1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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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속기(俗氣)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우연히 붓글씨 쓰는 분을 알게 되어 그때부터 집에서 붓글씨를 배우게 되었다. 내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 그때까지도 내 고향에서 붓글씨를 쓴다는 것은 남자가 가졌으면 좋을 덕목의 하나. 대학에 다닐 때는 서울로 자리를 옮겨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의 문하생으로 파고다공원 앞 관철동에 있던 동방연서회 회원이 되어 열심히 글씨를 배웠다.


 나는 속으로 "내가 이래봬도 글씨는 좀 써 본 놈인데. " 하는 자만심은 하늘에 닿고도 남을 철없던 시절, 선생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일중 선생이 "글씨에 속기(俗氣)가 있으면 못쓰니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였다. 멋이라는 게 뭔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속기(俗氣)가 뭔가를 설명하기는 퍽 어렵다.


 속기(俗氣)란 세속적인 시정(市井) 한복판에나 나돌 약삭빠르고 점잖지 못한, 상스럽고 천한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속기가 많은 글씨나 그림을 사람에 비유하면 치졸, 조속, 지저분하고 말과 행동거지에 점잖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과 같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다가 월북한 저명한 미술평론가요 수필가인 근원(近園) 김용준은 속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사람에게 폼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그림에도 화격이 높고 낮은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곳을 곧잘 묘사하였다고 격 높은 그림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실물과 똑같이 그려졌다거나 수법이 훌륭하거나 색채가 비상히 조화된다거나 구상이 웅대하거나 필력이 장하거나 해서 화격이 높이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


 속기(俗氣)는 나이, 글씨를 햇수, 학벌과도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자못 신기하다. 아무리 글씨가 달필(達筆)이요 능(能)해 보여도 속기는 그대로 있다는 말. 어느 화가가 더러운 똥을 그렸다 해서 그 화가의 그림이 더러운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림의 대상도 속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속기는 마음의 풍요로움과 관계가 있다. 한국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한 분이 젊은 시절에 수학(修學) 목적으로 음악의 명문 줄리어드(Juilliard)에 갔을 때 그를 지도하던 교수는 늘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치려 들지 말아라. 요가, 명상, 무용, 시(詩) 감상 같은 것을 해서 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라."고 권하시더란 회고담을 들은 적이 있다. 피아노 같은 기악이든, 그림이든, 서예든 모든 예술은 손끝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 이 모두가 마음을 풍요롭게 하면 예술의 격이 높아진다는 말일 게다.


 "글씨를 잘 쓰자면 사람부터 바로 되어야 한다."는 사람됨과 작품을 연결짓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이다. 마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시(詩)를 쓸 수 있다는 말과 같이. 그러나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격=작품을 강조하는 주장은 언뜻 들으면 수긍이 가는 말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이 주장에 회의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날리는 예술가  중에서 윤리 도덕면에서는 남의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저질스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한 둘인가. 물론 이들 이름을 날리는 예술가 중에서 그들이 대가(大家)로 불리고 난 뒤부터 저질스런 생활을 시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격이란 어디까지나 작품이 풍기고 있는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말하는 것이니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일필휘지(一筆揮之) 능한 달필로 휘갈겨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기운차고 뛰어난 글씨로 보이지만 기실 온통 속기 투성이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걸작, 이를테면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이나 대원군이 친 난초에서 뿜어 나오는 그 맑고 강렬한 기운이 예술에서는 문외한들에게도 전류처럼 감전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옛날 이발소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고 이런 느낌을 갖기는 어렵다. 그림의 격(格)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지도해주는 사람 없이 혼자 연습만 한다는 것은 속기를 향한 지름길로 달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10년 동안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썼다는 사람의 글씨를 상상해보라. 이런 서예를 정도(正道)를 걸어온 서예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지도는 물론이고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도 받아보고, 남의 작품도 감상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예술은 교제요 소통이다.


 한국에 가서 서예 전시회를 대여섯 군데 가보았다. 전시회장이나 작품의 화려함에는 옛날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내 초라한 서예 경력에 외람된 생각인지는 몰라도 글씨의 정도(正道)를 밟아온 사람의 작품은 무척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이 자기의 특유한, 그야말로 자기만의 특유 서법(書法) 창시자가 되었구나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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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벌집

 

 한국 E 여자대학교에 있을 때 은퇴를 하면 어디에서 살까를 저울질해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사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캐나다에 돌아와서 살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나같이 돈 없고, 권력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은퇴 후에 캐나다로 돌아가서 살 집 하나를 마련해둬야 한다는 생각은 늘 있었으나 거기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도 없고 재정적 뒷받침도 약해서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다가 2, 3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은퇴 3년을 앞둔 해였던가 캐나다를 다니러 올 기회가 갑자기 생겼다.


 아내의 대학교 동기동창 K씨의 저녁 초대에 갔다가 우연히, 실로 우연히 K씨로부터 콘도미니엄을 뭉칫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캐나다에 머문 나머지 이틀동안 부랴부랴 콘도미니엄을 하나 계약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 둘 달린 장난감 같은 집이다. 청소하는데 30분이면 뒤집어쓰고도 남는, 부잣집 화장실만한 크기의 벌집.


 지금 살고 있는 벌집을 계약하는 데는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벌집 가격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영어로 affordable이라고 하던가?) 소위 '개발이 덜 된 후진 데'라 그런지 다른 데보다는 훨씬 교통이 덜 번거롭다. 콘도미니엄이 일반 주택가 가장자리에 고성(古城)처럼 혼자 우뚝 서 있으니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고 사방이 확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콘도미니엄 뒤로는 큰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장자리로는 숲, 또 그 옆으로는 험버(Humber) 강이 흐른다. 그 강물 줄기를 따라 사오십리 잘 만들어진, 북한말로 하면 '거닐 길'이 있어서 아침저녁 산책을 할 수 있다. 일곱 여덟 시간을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아내와 끝까지 한번 걸어가 보자고 약속했으나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이제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포기하고 말았다.


 셋째, 문학적으로 고상하기 짝이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에서 자동차로 15분만 가면 클라인버그(Kleinburg)라는 작은 마을에 캐나다에서 풍경화로 가장 명성이 높은 '7인의 동아리'(Group of Seven) 회원들의(꼭 일곱 사람만은 아니다) 그림을 전시하는 맥마이클(McMichael) 미술관이 있다.


 우리가 런던에 살 때는 일 년에 한 번은 꼭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맥마이클 미술관으로 나들이를 왔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미술관이 바로 옆에 있으니 이 콘도미니엄에 살게 되면 주말마다 와서 한 바퀴 돌며 그림 구경하고 한적한 클라인버그 시내로 나와 커피도 마시고. 실로 수채화 같은 정갈스러운 계획을 세워놨다. 그러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 막상 이사를 와서 이 콘도미니엄에 살게 되고 나서부터는 한 달에 한 번은 커녕, 일 년에 한 번 조차 갈까 말까, 미술관을 무제한 드나들 수 있는 회원권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이 해를 넘긴 적도 있다.


 오늘도 어느 부동산 회사에서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값이 많이 올랐으니 입주자들이 집을 팔기를 원하면 알려달라는 전단(傳單)을 보내왔다. 아내와 나는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의견을 주고 받았다. 우리가 이제 늙어서 앞으로 살 날이 살아온 날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될 터인데 지금 이 나이에 집을 팔아 무얼하노?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면 저쪽으로 흐르는 험버강 물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베란다(veranda) 문을 열면 바람이 잉잉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지금 집을 팔아 이익을 남기든 못 남기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랴. 


 겨울이면 휘몰아치는 눈보라, 새잎이 구름처럼 피어나는 연초록의 봄, 창을 때리는 한여름의 소나기, 낙엽 구르는 늦가을 산책길. 이 모든 사계절의 변화를 어항에 금붕어 보듯 창밖으로 내다볼 수 있다. 안개가 짙은 날은 밖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꼼지락대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험버우드가(街) 710번지.
 죽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기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천만에, 이렇게 큰 도시의 한 모퉁이 벌집에 살며 대자연의 유유한 변화를 조용히 내다볼 수 있는 이 즐거움을 버리고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인가.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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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50년 전 22살

 

 어느 모임에 갔더니 웬 낯선 사람 하나가 불쑥 내 나이를 묻기에 나는 "50년 전에 스물 둘이었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 오늘 유머 감각이 넘치는 대답을 했구나."하며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50년 전 스물 둘'은 내가 한 말이 아니요 노산(鷺山) 이은상의 수필 <청춘 20년기>에서 훔친 말이다. 이 구절을 처음 봤을 때 퍽 재미있는 말이라 생각되어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한 번 써먹은 것 뿐. 


 노산의 고백에 의하면 이 말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노산 자신이 아니라 조선 말엽의 대 시인(詩人) 자하(紫霞) 신위라 한다. 그러니 노산은 자하에서 훔치고 나는 노산에서 훔친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자하가 일흔세 살 때 서울에 사는 어떤 젊고, 영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의 서재에 와서 평생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는 청을 해왔다. 이를 부드러운 말로 거절한 자하는 그 여성이 돌아갈 때 시(詩) 한 편을 지어 주었다.

 


흰모시 적삼에 얼굴도 해맑으니/제 진정 하소하며 제비마냥 종알대며/내 나이 몇 살이냐 묻지 말아라/오십 년 전에 스물 세 살이더이다(澹掃蛾眉白苧衫 . 五十年前二十三)

 


 3, 4년 전 어느 봄, 동창회 모임이었지 싶다. 공학도 S형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내가 벌써 일흔 둘이요, 일흔 둘. "하고 일흔 둘을 누가 강제로 그에게 덮어 씌었는가, 자기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던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게 생각난다. 그게 바로 S형의 통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 3년이 지나서 내 나이 70에 들어서고 난 후였다. 70대와 60대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나이가 일흔 둘이란 말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군자(四君子)나 서예 작품 같은데 노필(老筆)로 70수(?)니 80도인(道人), 90노옹(老翁) 같은 낙관을 보면 스페인의 첼리스트 카잘스(P. Casals, 1876~1973) 같은 연로한 예술가의 연주를 듣는 것 같이 작품 전체에 노련미랄까 원숙미가 넘치고 중후한 향기를 내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나도 작품에 늙었다는 티를 내서 낙관(落款)에 도인이니 노옹이니 하는 말을 써 볼까 했으나 너무 젊다 싶어 그런 말 대신 처사(處士)니 산인(散人)이니 하는 말만 쓰고 있다. 


 가끔 사람들이 모인데서 "80 가까운 나이에. " 하고 내가 무슨 80고령이나 된 것처럼 허세를 부릴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나도 70을 넘어섰다고 그다지 원통해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내가 일흔 살이 되던 해에 '70!'이라는 수필을 한 편 쓴 적이 있다. 며칠 전 그 글을 다시 읽어보니 "아, 슬프다. 내가 벌써 70이 되었구나." 하는 탄식보다는 바다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한동안 이리저리 버둥대다가 기운이 다하면 조용히 끌려오는 것처럼 아직은 의기양양하고 젊음의 오기가 제법 남아 있어 보였다. 아무튼 이제 일흔 둘이 되었으니 저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의 <곡강(曲江)> 제4구에 나오는 '인생에 칠십은 옛날에도 드물었네'(人生七十古來稀)의 고희도 넘었으니 살만큼 살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70살을 살건 80, 90, 100을 살건 무슨 상관이랴, 인생이 허무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영조 때 태어나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거치면서 83세의 장수를 누렸던 산운(山雲)  이양연은 자기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한평생 시름 속을 살아오느라/밝은 달은 봐도 봐도 미나쁘더니/이젠 길이 길이 대할 것이매/무덤 가는 이 길도 해롭지 않으니. (人生愁中過 . 此行未爲惡)


 산운(山雲)은 그의 자호 '산구름'처럼 평생을 정처없이 떠돌며 가난과 외로움, 슬픔과 눈물로 방황했다. 이런 인생에서 달은 언제나 그의 외로운 벗이었던 것이다.


 '50년 전 22살' 때의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무전여행을 한답시고 강원도 정선 어느 산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지 싶다. 조선 명종 때 천문학과 의학에 밝았던 선비 북창(北窓) 정렴(鄭?)은 44세를 채 못 채우고 죽으며 스스로 원망하며 남긴 시구에 "선생의 목숨이 왜 이리 오래뇨(先生之壽 何其長也)"라 탄식했다는데 나도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은데 무슨 말을 남겨야 하나?


 자하(紫霞)에서 시작한 '50년 전 23'이 노산(鷺山)을 거쳐 도천(陶泉)에 이르러 '50년 전 22'이 되었으니 분명 시대를 거스른 행동이다. 앞으로 100년, 200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시인들은 자하, 노산, 혹은 나를 본받아 '50년 전 30'으로, 또 한참 가다보면 '50년 전 50, 60, . 100, 200'이 나오고 마침내 기저선[baseline]이 오르게 되면 '100년 전에 몇 살'이 될 것이다. 아, 어지럽다. (201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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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삼락(三樂)

 

 나는 2006년 은퇴를 하기 전까지도 친구들로부터 "너는 아직 철이 덜 난 녀석"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이 말뜻이 무엇일까? 세상 물정 모르고 사리판단에 어두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고, 나잇값을 못하고 어리고 속(俗)된 짓을 하고 다니는 이를 농(弄)으로 일컫는 말도 된다. 아무튼 '정상(正常)'에서 이탈, 어딘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란 말이니 안 들었으면 더 좋을 말이다.


 그런데 나의 무의식적 생존 책략 때문인가. 나는 이 말 의미를 약간 비틀어서 젊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그러니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은 청춘이란 말에 가깝다는 뜻으로 본다. 해야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 해야 할 행동, 해서는 안 될 짓을 분별없이 마구 하고 다니던 20대 청춘에서 좌충우돌 산 넘고 물 건너 70 고개까지 온 백전노장에게 '아직 철이 덜 난 녀석'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놓는 사람은 머리가 좀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을 자주 듣던 시절을 돌아보기 위해 젊은 시절로 아니 돌아갈 수가 없다. 그때 이동렬은 오늘의 이동렬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지 싶다. 그때는 우선 남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몇 배 많았던 시절, 여기는 안녕하신가, 저기도 안녕하신가 공연히 얼굴을 내미는 데가 많았다. 대학교 때 농촌을 되살리겠다고 농촌사회연구회 회원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달마다 열리는 모임에는 열번도 안 나간 이 속 빈 강정,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나이.


 내가 한 가지 정성을 들인 것이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중학교에도 못 가고 구두닦이, 사환(使喚)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夜學)이다. 대학교 근처 어느 허름한 건물을 빌려 12명쯤 되는 청소년들을 모아 국사를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여명기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꿈꾸던 민족계몽이겠지 속으로 으스대면서. '계몽'이니 '민족'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가 튀어나와야 할 이유도 없는데 '보기 좋은 떡 먹기도 좋다'고 우선 포장을 잘해서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는 허영심이 너무 커서 그랬지 싶다.


 내 젊은 시절의 객기(客氣)는 지금보다 훨씬 더 요란했던 것 같다. '철이 덜났다'는 말 대부분이 이때 나온 것일 거다. 무애(無涯) 양주동 선생의 <문주 반생기>에 나오는 젊은 시절의 호방한 기상을 흠모하여 '나는 언제 저런 호기를 부려보나.' 하고 생리적으로 잘 받지도 않는 술을 퍼마시고 부랑아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녔다. 강남에서 자라는 귤(橘)나무를 강북에다 옮겨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무애 선생의 호기(豪氣)를 흉내를 내면 그것은 호기가 아닌 객기 아니면 치기(稚氣)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이 철없는 사내.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은 다 해보고 싶은 것이 젊은 시절의 특권이다. 고등학교 때는 무용을 배우고 싶어서 무더운 여름밤 어느 가정집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는 무용 강습을 한 시간 넘게 훔쳐본 적이 있다. 그때 만약 내가 무용을 배웠더라면 후일 대성(大成)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남성 발레리나(ballerina)가 되었을지 누가 알랴!


 대학교 때는 대금(大?)을 배우고 싶어서 당시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을 찾아갔으나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대금이나 장구를 배우고 싶은 꿈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E 여자대학교에 있을 때도 장구를 배워볼까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경제적 이유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내 나이 70. 먹고 마시고 노는 것 말고 다른 일에는 별 흥미가 없다. 얼마 전에는 독서클럽을 만들어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하여 토의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흥미 없음'을 공표해버렸다. 이렇게 첫째 먹고, 둘째 마시고, 셋째 노는 삼락(三樂)) 위주의 '퇴폐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일에는 관심이 자꾸 줄어든다. 아침신문 세 가지를 읽는 데 2시간 걸리던 것이 이제는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정력적인 사람들은 '인생은 70부터'란 말을 외치며 새로 배우는 것도 많고 시작하는 일도 많다. 이들 정력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삼락(三樂)) 위주의 생활을 즐긴다. 물 빠지면 가재 나온다. 나이 들면 철도 따라 들겠지.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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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4
탄로가(嘆老歌)

 

 탄로가(嘆老歌).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다. 이 세상에 집단을 이루고 사는 인간 종족 중에 노래 없는 종족이 어디 있으며 그 종족 문화에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가 없는 종족이 어디 있을까. 죽음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운게 늙음이다. 죽고나면 이 세상보다 몇 배 더 좋은 세상에 가서 살 수 있다지만 그런 세상이 정말 있는지는 거기를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세상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꾸며낸 것 같다.


 늙으면 서럽고 슬프다. 일찍이 송강(松江) 정철도 나무가 고목이 되면 오던 새도 오지 않는다 하지 않았던가. '탄로가'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고려말의 대학자 역동(易東) 우탁이 남긴 "한 손에 가시 쥐고. "와 "춘산에 눈 녹인 바람. "으로 시작되는 두 수이다. 역동 선생이 세상을 뜬지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이 탄로가 두 수는 700년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날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역동 이후로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가 왜 없었겠는가마는 송강의 다음 두 걸작이 나오기까지는 그가 가신 후 27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술과 여인의 분 냄새를 좋아하기로 이름난 당대의 문호 송강은 벼슬과 권세 주위를 맴돌기를 좋아했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었던지 다음 시조를 남겼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내 나이 풀쳐내어 열다섯만 하얏고져/센 털 검게 하여 아이 모양 만들고져/이 벼슬 다 드릴망정 도련님이 되고져

 


 속절없이 20세기의 가객(歌客)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가 아닌가.


 세월은 흐른다. 숙종조에 들어서면서 임진왜란의 악몽도 잊혀져 가고, 병자호란의 상처도 아물어가던 태평성대. 이제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숙종, 영조 때의 가객 노가제(老歌齊) 김수장은 여인으로부터 냉대받은 설움을 탄로가에 쏟아놨다.


 터럭은 희었어도 마음은 푸르렀다/꽃은 나를 보고 티 없이 반기거늘/각시네 무슨 탓으로 눈 흘김은 어쩌오


 마음은 성춘향인데 몸은 정주영, 누구나 늙음은 찾아오는 것인데 왜 나를 늙었다고 괄시하느냐는 노인인권위원회의 절규다. 또 어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시인의 탄식.
 늙기도 서러운 것이 백발만 여겼더니/귀 먹고 이 빠지니 백발은 예사로다/그 밖의 반야가인(半夜佳人)도 쓴 외 본 듯 하여라


 반야가인은 밤에 만난 아름다운 여인을 말한다. 백발에 귀 먹고 이 빠지니 이제는 백약이 무효,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도 아무런 흥취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니 그야말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세상, 아무리 몹쓸 병이 들고 고생 고생 살아도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현대의학의 힘만 믿는 사람들은 '구구팔팔'이니 '구구팔팔 이삼사'니 하는 요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만들어 병으로 고생고생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다는 말을 퍼트리고 다닌다. 그러나 천만에, 우리의 삶은 아무리 병 때문에, 쪼들리는 살림살이 때문에, 고통스럽다 해도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눈꼽만큼도 줄어들지 않는 법.


 진시황이 그토록 구하려고 애쓰던 불로초 대신 21세기 첨단제약 기술로 만든 불로환(不老丸)이 나왔다고 하자. 그 약 한 알에 수천억 원을 웃돌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바야흐로 부자들의 천국. 앞으로 1,000년 쯤 지나면 대한민국에는 이(李)씨 성 가진 사람들과 정(鄭)씨 성 가진 사람들만 우글거릴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수백 번은 들었을 노래. 밭 갈고 씨뿌리는 풀뿌리 농민들의 삶 속에서 연연히 맥을 이어온 <아리랑>의 마지막 구절,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마라. 장안의 호걸들이 다 늙는다"의 두 줄 사연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그 호소력이 크다. 옛날에는 내 옆을 지나가는 그냥 노래였는데 지금은 내 가슴을 올올히 파고드는 노래 이상의 노래가 되었다.(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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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봄날의 랩소디(Rhapsody)

 

生色一年芳草雨, 薄情三月落花風(방초에 비를 뿌려 한 해 생색내더니만, 박정(薄情)하고나 삼월광풍 꽃은 왜 지우는가?)

 


 한말의 풍운아(風雲兒), 개세(蓋世)의 영웅 우남(雩南) 이승만의 시(詩)다. 나는 우남의 한시를 자유자재로 읽고 감상할 실력도 여유도 없는 둔재(鈍才). 우연히 어느 시인의 산문집을 뒤적이다가 눈에 띄기에 베껴둔 것이다.


 1875년 황해도 시골에서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이흔(李?)의 서계(庶系)로 내려온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난 우남 이승만은 두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와서 우수현(雩守峴: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 남쪽에 살았다. 그의 아호 우남(雩南)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우남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영화 끝에 욕(辱)이라는 말처럼 그의 정권 말기에 실정(失政)을 하여 나라 밖으로 쫓겨 갔다가 그 외로운 타국에서 쓸쓸히 이 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중국의 모택동 못지 않는, 한국현대사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운아요 건국 초기의 영도자였다. 그에 대해서는 아직도 찬반(贊反) 말들이 많다.


 위에 인용한 우남의 시(詩)는 비바람에 시달려 낙화 신세가 되는 슬픔을 노래한 절구. 비바람은 꽃을 피게 하는 예쁜이 역할도 하지만 핀 꽃을 뚝 떨어지게 하는 심술도 있다. 그러나 시인들은 꽃을 떨어뜨리면 원흉으로 묘사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일찍이 조선 중기의 문신 면앙정(?仰亭) 송순은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중국 당(唐)대의 시인 우무릉(千武陵)도 그의 오언절구에서 "꽃 피면 비바람, 인생엔 이별 (花發多風雨/人生足別離)"이라고 읊은 것은 비바람은 꽃잎을 흩날리는 원흉도 되지마는 인생살이에서 가장 큰 슬픔인 영원한 이별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 선조 때 문신 운곡(雲谷) 송익필도 그의 <우음(偶吟)>에서 비바람을 나무랐다.


‘밤비에 피던 꽃이/ 아침 바람에 지네/ 가엾다. 한 해의 봄이/ 비바람 속에 오가다니’ (花開昨夜雨. ?來風雨中)


 정민 교수는 위의 시 정조(情調)로 보아 작가는 꽃 아닌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고 술회하였다. 즉 나라와 자신을 빛낼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당시 권력의 된서리에 희생되어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슬픔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꽃을 사람으로 보고 비바람을 기득권 세력의 횡포로 본다면 앞서 인용한 우남의 시도 죄 없이 구석으로 내몰린 아까운 인재들을 보고 슬퍼 탄식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성계의 18대 손이지만 한파(寒派)로 알려진 양녕대군파에 속한 가계인데다 그 파내에서도 격이 낮은 서계(庶系)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몰락, 빈한한 가정에서 자란 우남 이승민. 이러한 가족 배경은 말이 왕족이지 기득권 횡포에 평생 기(氣) 한번 못 펴며 움츠리고 살아온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쌓이고 쌓인 울분이 어찌 없었으랴.


 봄이면 피어났던 꽃들은 비바람 아니더라도 봄이 저물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 이 세상에 도대체 영원 무한한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은 죽어서 황천을 가고 무덤도 세월이 가면 봉분이 무너져 내려앉고, 비석은 마멸되고, 찾아오는 사람 발자국 소리도 끊어진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김태길 교수의 수필집에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라는 제목을 단 책이 있다. 꽃이 떨어져도 이 세상 모든 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러니 한 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마음 속에 둔 일을 계속해 나가자는 말이다.


 김 교수는 또한 일본 어느 고등학교 기숙사 노래에 “봄이 감을 슬퍼하는 노래(行春哀歌)라는 것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랫말을 밝히지 않아 내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김태길 교수는 노래내용이 너무 슬퍼서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노래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같인 70 고희를 넘긴 촌로(邨老), 비바람 없이도 갑자기 어느날 잘 익은 과일[熟果]처럼 ‘뚝’하고 저절로 떨어질 사람에게는 봄이 가져오는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 그 노래의 내용이 무척 궁금하다.


 조금 전 창밖을 내다봤더니 안개가 자욱하여 불과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건물도 보이질 않았다. 세상에!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산다더니 이게 바로 그 꿈속의 일이런가? 그러나 몇 분 사이에 안개는 어느덧 걷히고 밤새 흐르던 그 강물이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같이 잔잔한 강물. 나를 기쁘게 그러나 때로는 슬프게 해주는 봄이 왔다.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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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별리(別離)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漢詩)에 자주 등장하는 초목의 빈도를 조사했는데 제1위를 차지한 것은 소나무도, 국화도, 대나무도 아닌 버드나무였다고 한다. 이 조경학자는 버드나무가 부드럽고, 우리의 생활공간 가까이 있어서 자주 눈에 띄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의 시재(詩材)로 쓰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C교수의 해석은 다르다. 버드나무가 인용된 것을 우리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버드나무는 봄날의 서정을 일깨우는 나무임과 동시에 '이별과 다시 만남의 염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시에서 버드나무가 빈도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봄날의 서정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는 말과 마찬가지라는 것.


 한시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까운 우리 옛 시조에도 버드나무는 가끔 나온다. 조선 선조 때의 함경도 종성 기생 홍랑(洪娘)이 고죽(孤竹) 최경창이 종성 부사를 그만두고 한양으로 돌아 갈 때 지었다는 시조를 보면 버드나무 ->이별의 연관성을 바로 볼 수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현대의 시조 감상가들은 홍랑이 버들가지를 꺾어 보낸 것을 두고 멋과 낭만의 극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별과 가장 자주 연관되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낸 것을 보면(진부한 생각!) 미쓰 홍(洪)의 창의성이나 낭만은 극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홍랑의 선물을 요새 세상에 빗대어 말하면 그 흔해빠진 넥타이 한 개와 신사양말 한 세트를 선사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제 버드나무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한시(漢詩) 한 수를 보자.
 조선 중기의 풍류객이요 불세출의 문장가 백호(白湖) 임제의 <대동강의 노래>이다.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시 다 꺾어도 가시는 님 못 잡았네
어여쁜 아가씨는 눈물탓이련가.
(離人日日折場柳 …)

 

 

 그런데 어찌해서 버드나무가 이별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유명 시인이나 문장가, 이를테면 두보나 이백, 소동파 같은 문호들이 정운(情韻)의 표적으로 수목이나 물건, 장소를 그의 작품에 한 번 올리면 후세 시인들은 무조건 그 유명 선배의 일컬음을 따른다. 물론 조선의 시인들은 예외 없이 중국 시인들의 인습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많은 조선의 한시는 그 표현이 중국의 그것과 흡사하다.

 

 고려왕조 475년을 통틀어 이별 노래로는 단연 으뜸이요, 너무나도 유명한 노래, 정지상이 홍분(紅粉)이란 기생과 헤어지며 지었다는 <송인(送人)>이란 시(詩)가 있다. 이 시 첫 구가 "비 개인 긴 둑에 풀밭 고운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 " 하는 이별의 슬픔을 떠올리는 남포가 나온다. 이것은 옛날 중국의 굴원이 "사랑하는 님을 남포에서 보내며. " 라고 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후로 남포란 말은 중국시인들에게는 물론 조선의 시인들에게도 '이별'을 떠올리는 애틋한 장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버드나무 ->이별도 무슨 논리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늘날 연인들의 애틋한 이별장소나 이별을 암시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약간 부풀려 대답하면 내 눈에는 없을 것 같다. 구태여 있다면 페이스북(facebook)이나, 청계천 옆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 아니면 사방에 널린 커피 전문점이라 할까? 요새는 '애틋한 작별'이니 '보내는 마음' '그리움' 같은 정감어린 말은 어딘지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에 있더라도 시내전화 하듯 웃고 떠들 수 있음은 물론, 지구의 이쪽 저쪽으로 떨어져 있어도 하룻밤만 지내면 서로 만나볼 수 있으니 애달픈 그리움, 버들가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즈음은 이별의 슬픔도 없어진지 오래고 만남의 기쁨도 곰탕집 드나들며 마주치면 손들어 인사하고 지나가듯 가볍고 얄팍한 감정의 나눔뿐이다. 세상은 이를 데 없이 편리한 세상이 되어 가지만 사는 재미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나같은 태곳적 인사만 그렇단 말이지 천만의 말씀, 요새 젊은이들은 그 반대다. 이들에게 세상은 갈수록 재미가 있는 세상이 되어간다. 귀가 헐도록 노래도 듣고, 밤새도록 말춤도 추고. 보고 싶은데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 이 좋은 세상, 여기가 바로 천당인걸!


 그러나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면 오늘의 천당은 수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낡고 허물어지게 되고 말 것. 그러나 한 가지, 만나고 헤어지는 인생살이의 희비(喜悲)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런데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하다.(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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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이완용과 글씨

 

 나라를 팔아먹은 집단의 원흉으로 알려진 일당(一堂) 이완용이 국전(國展)의 전신 조선미술전람회(鮮展)가 태어난 1922년 첫 전시회에서 서예부문 심사위원이었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이 된다. 매국노가 서예가라니! 그러나 사실이다. 열 살때 대 부호요 세력가 집으로 양자를 간 이완용은 16살 되던 해부터 한말의 서예가 이용희(李容熙)에게 서예를 배웠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듣던 이완용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니 글씨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서예 실력이 알려져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임금 고종으로부터 사액(賜額 : 임금이 서원, 누각 등에 이름을 지어 줌) 현판을 쓰라는 명을 받은 적도 있다. 그의 글씨는 바다 밖으로도 알려져 다이쇼 일본 천황은 이완용의 글씨를 보고 싶다며 그에게 휘호를 부탁했다. 이완용은 천황이 보낸 비단에 14자로 "未離海底千山暗/乃到天中萬里國"(바다 속을 벗어나지 못해 온 세상이 캄캄했는데 하늘 가운데 이르러 온 세상이 밝아졌네)이라는 내용의 천황 통치로 온 세상이 밝아졌다 찬양하는 자작시를 써서 보냈다.


 나는 이완용의 친필 글씨를 밴쿠버에서 유학 시절에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의사 K씨 댁에서 화선지 반폭에 행서로 쓴 이완용의 자작 한시(漢詩)였다. 글씨에 대한 사람들의 말이 많을까봐 1층 응접실이 아니고 2층방 한 구석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듯이 걸려 있는 족자. 그의 글씨는 필력(筆力)이 무척 기운차고 고고하며 마치 대원군 난초를 보는 것 같았다.


 옛날에 붓글씨는 점잖은 사람들이 여가에 즐기는 풍류,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고위직에 있던 관리들 중에는 붓글씨를 남긴 사람들이 여럿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어려서 서당을 다녔기 때문에 운필에 능하고 필세(筆勢)는 견고하다 하겠으나 글씨에 시골티가 난다. 내가 안동, 대구 등 시골에서 배운 글씨의 시골티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박정희 대통령은 사범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서예를 배웠을 것이다. 운필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견고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예술성에 있어서는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정치가들 중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서슴지않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종필을 꼽는다. 그의 글씨는 놀라운 운필법에 필체는 단아 방정하다. 뒤이은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은 권력으로는 큰소리 칠 수 있을지 몰라도 붓글씨는 이 정도라면 차라리 내놓지 않는 게 더 낫지 싶다.


 그림, 특히 구상은 미술에 문외한들에게도 ‘잘 그렸다’와 ‘잘 그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비교적 빨리 온다. 그러나 서예는 다르다. 서예는 작품을 대하는 순간 구성, 자형(字形), 점획(點?), 필세(筆勢) 등에 의한 조형미를 시각적으로 느끼는 예술. 그러니 작품에서 풍기는 서권기(書卷氣)나 격(格)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서법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이 좋다.


 조각이나 무용, 음악이나 시(詩), 서예 같은 예술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르자면 사람부터 바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예술적 재능과 사람은 별개로 생각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예술 분야에서 발군의 업적을 나타낸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인간적으로도 망나니요 개차반들이 수없이 널려있지 않은가. 매국노로 불리던 이완용도 당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예가였다. 연산군 때 희대의 간신이라 불리던 임사홍도 그의 아들 숭재와 더불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서예가. 이 두 사람 말고도 뛰어난 예술인의 일생을 적은 책을 보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난 기인, 부도덕한 사람들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김윤희가 쓴 <이완용 평전>을 보면 이완용은 매사에 신중하고 철두철미 현실주의자였으며 그의 많은 재산에 걸맞지 않게 비교적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른 귀족들처럼 여자를 탐하지도 않았고 여가에는 서예에 열중, 뛰어난 서예 작품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찾아가서 작품을 구경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한다.


 김윤희를 따르면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재물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 나름대로 ‘합리적인 실리’를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덮어놓고 분개하거나 실속없는 의리만을 내세우는 옹고집을 버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방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이완용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책에는 한일합방을 앞장서서 적극 지지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벼슬(후, 잭, 자, 남작)과 막대한 재물을 받은 조선의 지도자급 인사들의 76명 명단이 있다. 진짜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이완용을 포함한 바로 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 조선왕 순종의 장인 윤택영도 끼어있는 것을 보니 “세상에 믿을 것도 없고, 안 믿을 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6명 중 작위와 상금을 거절한 사람은 8명뿐이다.) 임금의 장인이 나라 팔아먹은 76명 인사 명단에 올랐다고 해서 이완용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신라말의 대문호 고운(孤雲) 최치원이 하늘도 놀랄 패륜행위를 저질렀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의 유려한 문장을 외면한다면 손해는 누가 보는 것일까? 예술과 사람을 떼어놓고 보질 못한다면 별로 뛰어나지도 못한 예술가가 그이 인격이 고매하다는 이유 하나로 필요 이상의 대접을 받을 것이고, 천추만대에 예술의 향기를 뿜을 걸작도 그 작가가 인간이 고약하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예술의 큰 부분이 유실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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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올림픽을 보면서

 

 내가 올림픽에 관해서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가서 형님이 사준 어느 만화책에서였지 싶다.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으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서윤복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 나갔는데 큰 개[犬] 한 마리가 서(徐) 선수에게 달려들기에 서 선수는 뜀박질하랴, 개 피하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다는 이야기. 올림픽에 나간 적도 없는 서윤복 선수에게 올림픽 마라톤이 웬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스턴 마라톤이 올림픽 마라톤으로 둔갑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내 장기 기억에는 올림픽 마라톤으로 저장되어 있다. 기억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른 기존의 기억에 흡수, 용해되어 왜곡, 변혁,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알면 보스턴 마라톤이 올림픽 마라톤으로 둔갑했다는 것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요즈음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보느라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다. 올림픽 구경은 흥미, 재미 모두 만점이다. 무슨 경기든 간에 선수들이 지금까지 뼈를 깎는 고생을 하며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메달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집념으로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처연한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또 어떤 운동경기, 이를테면 모자를 쓰고 신사복 윗도리를 입고 말[馬]을 타고 장애물을 넘는 equestrian(마상마술이라던가?) 같은 운동경기는 "사람이 말[馬]을 등에 업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면 혹 모를까 선수가 말 위에 떡 버티고 앉아서 말을 호령하며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기가 말의 경지지 어찌 사람의 경기가 되랴!" 퍽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내 혼(魂)이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데 올림픽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 한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거나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올라갈 때면 콧등이 시큰해 오는 것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아무리 북한이 우리에게 두통거리라 해도 북한도 우리 가족이라는 것은 올림픽을 보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나를 두고 종북세력이라 해도 좋고 이북을 따르는 빨갱이라 해도 좋다. 이때는 남한 국민 대부분이 종북 세력이요 빨갱이가 되지 싶다. 북한 선수를 응원하는 것은 남한 북한이라는 개념 이전의 원초적인 반응이요 정서다. 그 감정이란 논리적,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무릎을 작은 고무망치로 가볍게 치면 다리가 즉각 올라가는 반사작용, 영어로 말하면 knee-jerk reflex(슬개반사)처럼 나오는 감정의 원액(原液)이다.


 요 며칠 전에는 북한과 쿠바 선수의 유도 경기가 있었다. 정규시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아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북한 선수가 천신만고 끝에 이겼다. 선수가 우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혼이 났다. 같이 보던 아내는 "기운은 해마다 줄어가는 저 울보가 앞으로 어떻게 세상 풍파를 헤치며 살아갈까?" 은근히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속으로는 울었겠지.


 올림픽은 젊음의 향연. 분출된 젊음의 패기는 용암처럼 도도하게 올림픽 경기장을 덮는다. 배구 같은 경기에서는 말[馬]만 한 처녀들이(처녀겠지) 물찬 제비같이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주는가 하면 체조 경기에서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엄마를 연상 불러댈 어리디어린 소녀들이 온갖 귀엽고 신기한 몸놀림을 보여준다. 올림픽은 분명 젊은 사람들에게는 젊음의 기쁨을, 늙은이에게는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은 듯한 착각 속으로 몰아넣는다. 승리의 기쁨에서 오는 눈물이든 패배의 아픔에서 오는 통한의 눈물이든 눈물은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 생각 없이는 눈물이 없고, 눈물 없이는 기쁜 감정은 물론 슬픈 감정도 없다.


 내가 보는 올림픽 관전(觀戰) 응원 기준은 일반적으로 약자(弱者) 편이다. 가령 흑인과 백인이 맞붙었을 대는 흑인을, 티베트(Tibet) 같은 약소국이 미국 같은 강대국과 승부를 가릴 때는 약소국 선수를 응원한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양국가가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서양국가와 겨룰 때는 동양국가들이 이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국, 북한, 캐나다가 승부를 겨룰 때는 무조건 한국, 북한, 캐나다를 응원한다. 그러고 보면 나의 ‘약자 편을 응원하는 이 고매한 평등주의 정신’도 알고 보면 ‘우선 내 주위 사람부터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을 돌봐주자’는 수작. 가족주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실로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평등주의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20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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