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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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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성군(聖君) 정조

 

 나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조선왕 27명 중에서 제4대 세종대왕과 함께 성군(聖君)의 칭호가 마땅할 만큼 치세(治世)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같혀 여드레 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세자 시절에는 물론, 임금이 되고 나서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그를 죽이려는 무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정조의 처삼촌 홍일한과 정후겸 등을 유배보내서 사사(賜死) 시켰습니다. 장인 홍봉한도 처벌 대상이었으나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생각해서 차마 리스트에 올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본 11살의 어린 정조, 할아버지 팔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빌었던 한(恨)과 원(怨)을 품고 자란 정조는 아무에게도 그 울분을 털어놓지 못하고 묵묵히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어질고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에 밀려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울분 속에 지내던 서얼 출신의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비들, 이를테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희대의 천재들을 기용해 주는 한편, 이가환, 정약용 등 실학사상에 물이 든 개혁파 선비들에게 날개를 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선비들은 정조가 세운 규장각이라는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수립 기관을 드나들며 책 읽고 공부하며 정조 치세에 도움이 될 정책을 활발하게 토론, 건의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불어오는듯 했습니다. 짧으나마 조선에 문예부흥이 온 것이지요.

 정조는 경서와 역사에 무척 밝은 면학(勉學) 군주였지만 소설은 한 번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소설은 문장이 천박하고 촌스러워서 선비들은 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삼국지연의’ ‘수허전’ ‘홍루몽’ 따위의 중국에서 들어온 소설은 읽기도 쉬운데다가 재미가 있어서 많은 선비들이 경서처럼 드러내놓고 읽지는 않았지만 돌려가며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조는 소설에 담간 남녀 사랑 이야기(얼마나 재미있고 달콤합니까!), 사회 비판 정신은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소설 읽는 것을 금지하는 소설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시는 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써내라고 요구하고 신하들은 그 말에 복종하고 제각기 반성문을 써냈습니다.

 정조가 간지 1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그 땅에서 박정희라는 무인이 총칼로 정권을 빼앗아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의 철권/고문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곧 그는 좌익사상에 관한 책들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방면의 책을 읽거나 가방에 넣고만 다녀도 불온서적을 소지했다고 잡아갔습니다. 이런 류의 책을 읽다가 잡혀가는 날에는 병신이 되도록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기가 일쑤이지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도 잡혀가서 실컷 두드려 맞고 병신이 되어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걸려든 선비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동김씨의 김조순이었습니다. 김조순은 김창집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정조의 관심을 듬뿍 받아온 선비입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이 사돈관계로 발전해 가지요. 김조순의 딸이 정조의 며느리(순조의 본처)가 됩니다.

 안동김씨는 정조와 인연으로 온 나라를 휘어잡은 세도정치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정조가 죽은 후 시작되어 60년을 이어갑니다.

 김조순은 분별력이 있고 은인자중하는 선비라 그가 살았을 때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 김좌근, 손자 김병기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대를 물리며 이어집니다.

 나는 가끔 정조의 소설 금지령을 들으면 박정희의 불온문서 금지령이 생각납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을 많이 읽고 공맹(孔孟) 사상의 사고력도 매우 높은 지식층 임금이었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은 무인(武人)입니다. 정조는 서학(西學)의 접근을 속으로 걱정했을 것이고 박정희는 공산주의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정조에게 소설을 읽다가 들키면 반성문을 쓰고 다시는 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불온문서를 가지고 있다가 박정희에게 걸리면 감옥살이 몇 주에 물고문, 전기고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훗날에 생각해 보고 “그렇게 엄하게 못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내가 왜 그랬나?” 후회가 될 것입니다. 읽지 말라면 더 읽고 싶고 부르지 말라면 더 부르고 싶은 저항의 심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지하수 처럼 도도하게 흐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나라는 집권자가 의도하는 대로 지휘봉을 들고 이리저리 가라고 안해도 저절로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2020. 8)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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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판서와 쌀장수, 그리고 대원군

 

 한말(韓末) 경북 영천 어느 암자에서 역학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온 정환덕 이라는 사람은 어찌어찌 하다가 1902년 마흔살 나이에 황제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황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15년동안 황제(고종)를 모시고 일하는 동안 듣고 본 일들을 비밀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나의 대학 선배되는 역사학 교수 박성수가 이 비밀기록에 주석을 달아 ‘남가몽(南柯夢)’을 읽다가 관심을 끄는 사람 둘을 만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판서 홍종응과 쌀장수 이천일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스럽고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그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이 이야기는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권좌에 오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제일 먼저 손을 보려했던 사람은 이조판서 홍종응이었습니다.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1863년 진주민란 이후 나라경제는 어려웠는데 흥선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흥선군이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이조판서 홍종응을 찾아가 구걸하게 되었는데 홍판서는 그야말로 문전박대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댁의 하인이 흥선군이 나올 때 뒤따라 나오면서 발길로 걷어차는 바람에 나무조각이 튀어 흥선군의 손을 내리치니 다섯 손가락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습니다. 권세 높은 집 하인들은 주인이 하는대로 돈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싸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저히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문득 서강에서 쌀장수를 하고 있는 이천일이 떠올라서 그를 찾아 갔습니다. 흥선군을 맞은 쌀장수 천일은 크게 놀랐습니다. “어찌해서 이런 누추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고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절기에 살아갈 일이 막연하여 염치불구 하고 찾아왔네” “물건 보내라는 쪽지 한 장이면 족할텐데 대감께서 여기까지 친히 오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조치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천일이 말한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 물자를 보내왔습니다. 보낸 물건을 보니 쌀 20섬, 돈 1,000꾸러미, 정육 100근, 장작나무 50바리, 담배 30근이었습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지 않아 거지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 임금이 되어 흥선군은 대원군이 된 것입니다.

 ‘남가몽’에서 바로 몇 줄을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서가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인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나는듯이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갔으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두터운 은혜는 이루 다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이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천일의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 뒤 큰 은반에 홍로주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체면은 많이 떨어트렸으나 그 정분은 잊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이천일이 선혜청 고직에 임명되니 그 수입이 경상감사의 봉급보다 못하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 이 일이 2020년7월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어났다면 야당은 대원군이 막대한 뇌물을 받은 것으로 몰아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느니, 쌀장수 이천일을 뇌물죄로 국회에 소환해야 한다느니 별아별 소동을 다 떨었을 것입니다.

 한편 흥선군을 문전박대 한 홍종응 판서는 외부압력에 굴하지 않는 지조있는 관리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맹꽁이 짓입니다. ”노루를 쫒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너무 밝히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逐鹿者 不見山, 攫金者 不見人)”라는 옛말을 모르고 하는 무식한 짓들입니다. 이런 일을 법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짓이지요. 법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법을 쓰는 것도 사람입니다. 인간이 베푼 사랑을 법에 연관시키려 할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커피잔을 앞에 놓고 나는 ‘남가몽’ 구절을 아내에게 읽어주다가 다 마치기도 전에 목이 메여 끝까지 읽어주지를 못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흥선군에게 이렇게 천사같이 착한 구원의 손을 내민 이천일이 내 감정의 쓰나미(tsunami)가 되어 머릿속을 휩쓸고 가버렸기 때문이겠지요.

 먹을 것을 동냥하러 온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즉위 잔치에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초대했을 때 땅에 발도 부치지 않고 나는듯이 운현궁으로 달려왔을 이천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장면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권총을 취두르며 마구 사람들을 죽이던 악질 총잡이가 1:1의 권총대결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통쾌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맛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와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한 처지에 당면하는 경우는 가끔 있지 싶습니다. 남을 도와야 한다는 말은 쉬워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는 왜그리 어려운지요. 잘 아는 사람, 인연이 닿는 사람에게 선행의 손길은 쉬워도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천일과 홍종응 둘 다 가슴에 품고 삽니다. 홍종응이 나올 때가 많겠지만 이천일이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되었고 GNP가 몇만불이 되었고 국민의 행복지수가 올라갔다 해도 홍종응 같은 사람들이 늘어간다면 우리 사회는 모래알이나 바둑돌 같은 사회, 훈기가 따스한 정(情)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메마른 사회가 될 위험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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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신전마을 사람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투입된 진압군이 민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을 들고 경계에 임하고 있다.

 


▲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앞에 있는 여순사건 안내판

 

 뉴욕에 사는 고등학교 후배 K가 좋은 신간이라며 책을 한 권 보내왔습니다. 책을 지은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고 제목은 ‘우린 너무 몰랐다’. 2019년 1월에 나온 책입니다.

 책 표지 뒷장에는 도올이 “나의 생애에서 진정한 국학의 출발을 알리는 횃불”이라 평했듯이 대한민국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그러나 알아서는 아니 될 것으로 저주당한 우리 역사의 실상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이전에 도올의 책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고 나서도 뭣을 읽었는지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가령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 저자가 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남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주제와 별 관계가 없는 엉뚱한 얘기를 여기저기 너무 많이 흘리고 다니기 때문에 주제에 대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여간 큰 실망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K가 이번에 보내온 책에는 도올 특유의 ‘딴전’은 많이 줄어들었고 책 주제가 오늘날의 현실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설명과 문제의 근원부터 살펴보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주안점은 제주 4.3사건과 내가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알고 있었던 여수순천 민주항쟁 사건을 다룬 것이지요. 나는 제주 4.3사건은 제주도 빨갱이들이 죄없는 민간인들을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자 당시 당국에서 토벌대를 구성해서 보낸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도 군인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도올의 주장은 제주 4·3사건만 그런 게 아니라 수십 년을 두고 제주, 여수, 순천 사람들이 받은 학대와 차별대우, 학정과 민생고에 시달린 불만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고 만 민중항쟁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승만이 빨갱이의 난동으로 몰아서 그렇게 꾸미고 선전한 것이지 좌익세력이 주동이 된 것도, 혹은 군인들만이 난동을 부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 도올의 주장입니다.

 저항세력에 빨갱이들이나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끼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일부 민간인과 군인들이 토벌대의 공세가 더 심해지자 가까운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빨갱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주 세력이 군인, 빨갱이들이었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도올의 주장에 공감을 많이 합니다.

 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화적(逸話的) 기술(記述)이 많았습니다. 그 중 내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은 여수순천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다음 해, 즉 1949년 음력  8월17일 밤 순천 신전마을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비극입니다. 책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순천 낙안면)신전마을은 본시 평화로운 넓은 논을 가진 32 가구의 순결한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산 사람들이 14살짜리 연락병 노릇을 하던 소년을 데리고 왔다.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총상을 입은 소년을 치료해 달라고 산 사람들이 부탁하는 것이다. 인심이 순후한 시골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성심껏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새 옷을 입혀주고, 따스한 솜이불에 재웠다. 이 아이는 곧 건강을 회복하고 명랑하게 동네아이들과 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산통이었다.

 고립된 농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당연히 갑작스레 나타난 아웃사이더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화가 나서 “너희들 우리 무리들을 데려와서 가만두지 않겠다”. 이때 이곳을 지나가던 면 서기가 이 말을 들은 것이 모든 비극의 발단이었다.

 “우리 무리들이라구?” 앞뒤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 맹꽁이 같은 면 서기는 이 사실을 토벌대에게 신고했다. 토벌대는 즉각 이 소년을 체포하여 취조를 했다. 그리고 이 동네 사람 전원을 추석달이 밝은 한밤중에 한가운데 있는 큰 집 마당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말했다. “이중에서 너에게 치료를 해주었거나 먹을 것을 준 사람을 모두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리겠다.”

 이 소년은 자기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보살펴준 사람들, 상처를 치료해주고, 밥도 주고, 누룽지도 주고, 옷도 빨아주고, 잠도 재워주던 마을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토벌대의 총구는 이들을 향해 탕탕 불을 뿜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22명의 생명, 3살 난 어린 아기부터 60세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일순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가 된 것이지요.

 도올 말마따나 이들은 빨갱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빨갱이라는 영원한 딱지가 붙게된 것이지요.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연좌법이라는 천하의 악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렇게 어린 아이건 노인이건 마구 쏴 죽이는 토벌대라면 그 토벌대는 인간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스러운 최악질의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이 토벌대 중에서도 불교 신자도 있고, 천주교 신자도 있고, 개신교 신자들도 있었을 것인데 이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불경, 성경을 읽고,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방아쇠를 당기던 그 잔인한 손으로 헌금을 내는지 나는 너무나 놀랍고 믿기지를 않아서 한동안 할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신전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토벌대가 왜 이렇게 잔인한 짓을 했을까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우리 가슴 속에는 연락병 소년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곱고 따스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그의 상처를 치료해준 사람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악하고 모진 마음도 있습니다.

 악하고 모진 마음이 곱고 부드러운 마음을 치고 올라온 것은 무슨 계기일까요? 우선 상부의 명령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는 사람 마음이 따스한 쪽으로 내려야 합니다.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까.

 도올은 그의 책 맨 끝 두 쪽을 남겨두고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의 명령을 적어놨습니다.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들까지도 일일히 조사해서 불순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여…”

 소위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말, “남녀 아동들까지도” 조사해서 불순자를 다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해댈 수 있겠습니까? 신전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토벌대는 한가닥의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 반대이지 싶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오늘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빨갱이들이여 올테면 와라. 우리가 그대들을 박살내 주리다”의 용기충천, 의기양양한 꼴이었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통령을 우리는 왜 좀 더 일찍이 하와이로 보내 버리지 못했던가 나는 역사를 한탄할 뿐입니다.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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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되찾은 시구(詩句)

 

 캐나다 런던 온타리오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대학교에 직장을 얻은 후 내 기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우리의 옛시조를 흥얼거리는 새 버릇이 생겼다. 한창 때 나는 300수가 넘는 우리 옛시조를 거뜬히 외우고 있었으니 시조를 흥얼거린다는 것은 내게는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하는 교단에서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지 싶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에 너도 날고 나도 난다

두어라 일반 비조(飛鳥)니 네오제오 다르랴.

 

 위에 적은 숙종 때의 무신 이택의 시조를 읊으면 내가 백인교수들에 비해 못한 것이 뭣이냐는 항변성 자기주장이니 2배 30배 넘는 용기가 속에서 꿈틀거린다.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이긴 것 같은 기분-.

 나는 몇 주 전에 시조 한 수를 얻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 얘기는 이렇다. “…오뉴월 하루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이 시조는 노산(鷺山) 이은상의 ‘적벽놀이’라는 기행수필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부터 67년 전 6.25전쟁의 포화가 날로 뜨겁던 시국,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시조다. 그때 선생님은 키가 무척 크고 기골이 장대한 평양에서 온 소설가 S선생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이 시조의 맨 처음 시작을 잊어버렸다. 무슨 일을 당해서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뉴월 하루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로 끝나는 이 시조 구절만 한번 외우면 먼지 날리는 황토길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곤 했다. 그러나 이 시조의 초장을 잊어버렸으니 낭패다.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으나 헛수고.

 할 수 없어 나장환 형에게 전화를 하고 “나형도 틀림없이 국어시간에 이 시조를 배웠을 테니 찾아달라”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절한 부탁을 했다. 나형은 나와 동갑. 30년 전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읽었던 조지훈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의 시작을 잊어버려 나형의 도움으로 그 시의 시작을 찾은 적이 있다. 이것이 그와 나의 교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른 시일 내에 나형에게서 답이 왔다. 노산의 ‘적벽놀이’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더니

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을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여름날 하루해가”를 나는 오뉴월 하루해가”로, “그리도 길더구나”를 나는 “이다지도 길더구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조를 배우고 난 뒤 흐른 세월이 67년. 그러나 이 정도로 원본 못지 않은 형태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대견한 것.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우선 보배 같은 시조를 한 수 더 얻게 되었다는 흥분에 나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깜빡 잊고 며칠을 지냈다.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거나 가라앉히는 힘을 주는 것은 비단 노래뿐이 아니다. 그림이나 시(詩)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 모두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예술의 장르(genre)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릴 때 익혀둔 시가(詩歌)는 어린시절을 되살려 오는데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마치 홍난파의 ‘고향의 봄’을 나직이 부르면 고향마을이 눈앞에 조용히 펼쳐지듯이-.

 안동에서 중학교 다닐 때의 국어선생 S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짧은말 짓기에서 잘못하면 그 큰 선생님 손으로 내려치는 출석부 형벌이 모하메드 알리한테 머리를 한 방 맞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는 한번도 맞아보질 않았다. 아마 내가 무척 아첨을 잘하고 귀엽게 굴었던 모양이다.

 이제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내 나이 어느덧 80. 잃어버린 시구는 기적적으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던 그 세월은 경상도 안동에서 흐르던 것이나 온타리오 평원(平原)을 휩쓸고 가는 캐나다의 찬바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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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옛집

 

 나는 올해 한국나이로 여든이 됩니다. 80을 사는 동안에 이렇다 할 공은 하나도 세우지는 못한 그저 먹고사는 데만 바빴던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책 몇 권과 옷가지 몇 벌을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는 것을 이사로 친다면 내가 캐나다에 온 후로 모두 대여섯 번 이사를 했습니다. 서러워서 도망치듯 이사를 한 것은 한 번도 없고, 집세를 못내서 집주인이나 은행에서 쫓겨난 것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집을 새로 짓거나 더 큰집으로 옮기는 것이었으니 그다지 억울하고 서럽다는 생각이 드는 이사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 종착역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 2개에 거실 하나의 오두막집입니다. 옛시조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라더니, 심청이가 중국 상인들에게 팔려가기 전에 심봉사를 봉양하며 살았던 오두막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도 집이 무척 밝고 아침 해가 뜨면 저녁때 해가 질 때까지 햇빛이 집을 떠나는 일은 없는 기막히게 밝은 집입니다. 크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나 같은 선생들이 살 집은 아니라고 아주 일찌감치 못을 박았기 때문에 지금 사는 집에 더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우리 식구가 내 눈에는 대단히 크고 마당도 우리집 몇 배가 되는 큰집에 놀러가서 하룻밤 자고 올 생각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난방비가 엄청나서 그런지 주인부부까지도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집에서 잤다가는 감기 들겠다 싶어 그 집에서 나와서 시내에 나가 호텔에서 묵고 온 적이 있습니다. 집은 편안한 안식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바에야 우리집같이 집안 온데를 돌아다녀도 몇 발자국밖에 안되는 집, 겨울에도 파자마 차림으로 있어도 추운 기운이라고는 없는 집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살다가 불현듯 옛집 생각이 날 때가 있지요. 그때 고생고생하며 바쁘게 살던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옛집은 런던 온타리오에 있습니다. 나는 장모님 산소를 다니러 갈 때면 우리가 살던 옛집을 꼭 한번 찾아가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옛 집에 가보면 그 집에서 사는 동안 겪은 온갖 일들이 생각의 실타래가 되어 살아납니다. 마당에 심어둔 단풍나무는 컵 안에서 자라던 놈이 벌써 고목이 되었고, 그 단풍나무 씨를 컵에 넣어서 정성스레 키우던 아들 녀석은 벌써 쉰 살이 넘었습니다. 정원을 꾸미느라, 학과의 비서가 준 헌 철로침목을 구해서 애써 꾸며 놓은 채소밭에는 탱크로 밀어도 끄떡 않을 새 구조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부엌 옆 베란다 앞에 심은 라일락은 너무 커서 베란다 공간을 야금야금 침공하다가 주인의 미움을 받았는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옛집을 다시 찾는 나그네에게는 애절한 회억의 소재가 될 뿐입니다. 그 옛집에 살던 시절과 오늘 내 모습을 돌이켜 보고 거기다가 세월의 깍지를 어루만져보면 공연히 마음 한 구석에 애잔하고 쓸쓸한 정감이 일어나지요.

 이 애잔하고도 쓸쓸한 기분을 시조나 시로 표현한 시인이 있을까. 시집을 여러 권 꺼내놓고 찾아보았습니다. 백수(白水) 정완영의 시집 ‘실일(失日)의 명(銘)’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옛집’이라는 제목을 단 시조가 눈에 띄었습니다.

 

찾아온 고향집은 울도 담도 허술하다

핏발 선 아가 눈에 엄마젖을 짜서 넣듯

해종일 햇살이 내려 살구꽃만 피어놨다

 

담궈논 장독대에 장맛이나 들으라고

집 비운 듯 집 비운 듯 장뚜껑이 열렸는데

대추랑 고추랑 떠서 맛들이나 내고 있다

 

 백수는 고향집에 가서 옛날을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은행 모기지(mortgage)가 있으니 이놈의 모기지를 청산하기 전에는 ‘내 집’이라는 생각이 영 덜 납니다. 옛집에 가면 나는 통곡이 나올 정도로 서글퍼집니다. 그 통곡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집에서 지나가버린 23년 세월에 대한 회한(悔恨)과 그리움, 늙고 내려앉아버린 내 육신(肉身)에 대한 탄식, 이 모든 것이 슬픔으로 전환되어 내게 파도처럼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옛집을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곧 세월을 통곡하는 것입니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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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한운야학(閑雲野鶴)

 

桐千年老 恒藏曲 / 梅一生寒 不賣香

오동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추위 속에서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젊었을 때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던 생각이 난다. 유비의 군사(君師) 제갈공명이 수적으로는 유비 쪽의 몇 배가 넘는 조조의 정예부대와 맞부딪혀 일전을 벌일 판이었다. 워낙 숫적으로는 우세하고 훈련이 잘된 조조의 대군이 제갈공명의 성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참이었다.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상황에 처한 공명은 한가지 꾀를 냈다. 병사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둔 그는 성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자기는 성루에 올라 앉아 한가로이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이 예상 밖의 돌출행동을 ‘준비된 자의 여유’로 본 조조군은 반드시 무슨 계략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격을 미루고 머뭇거리다가 퇴각해 버렸다. 이래서 공명의 성도 무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공명의 허실법(虛實法)인가, 왜 그는 그 급박한 상황에 하필이면 거문고를 탔을까? 내 생각으로는 음악이란 여유나 한가로움과 통하기 때문에 거문고를 탄다는 것은 조조의 대군에게는 ‘준비된 여유’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우리에게 너그러움과 한가로움을 일깨워주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인간심성에 대한 통찰 없이는, 그리고 이 예상 밖의 돌출행동이 적군을 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은 꿈도 못꿀 실로 기발한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소리를 내는 오래된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하나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 가인(歌人)이나 선비가 있을까? 조선 선비의 방에 거문고가 놓여있는 풍경은 요사이 집집마다 벽에 그림이나 사진이 걸려있는 것과 별다름 없는 풍경이었다.

 서신혜가 노래하는 사람들이 비범한 삶에 대해서 쓴 ‘열정’이란 책을 보면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김일손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손은 좋은 거문고가 갖고 싶어 오랜 시간동안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어느날 동화문 밖에 사는 한 노파의 부서진 문짝을 보니 오래된 오동나무였기에 그것을 사서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후한 때 처음이라는 사람은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피는데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오동나무인 줄 알고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얻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신혜를 따르면 이것이 초미금(焦尾琴)의 고사다.

매화이야기로 말 머리를 돌려보자.

 

망호당 뜰 안에 한 그루 매화꽃

몇 번이나 봄을 찾아 말을 달려 왔던가

천리길 가는 길에 그대 저버리기 어려워

문 열고 벗 불러 옥산이 무너지듯 취하리

(望湖堂裏一株梅 … 敲門更作玉山頹)

 

 위는 퇴계(退溪) 이황의 ‘망호당에서 매화를 보며(望湖堂尋梅)’이다. 단군 이래 가장 큰 학자로 불리는 퇴계는 성리학자이자 평생 동안 2,000수가 넘는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는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여 매화에 관해서만도 1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는데 모두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매화가 어찌 퇴계만의 사랑이었겠는가. 남명(南冥) 조식에서 시작하여 위당(威堂)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조선 땅에서 자기 자신을 선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군자 상으로서의 매화를 예찬하는 시를 한 수도 써보지 않은 선비가 있을까?

 매화의 덕은 은은하고 깊은 꽃향기에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매화꽃에 아무리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려 봐도 장미나 찔레꽃, 라일락 같은 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코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매화가 특석을 차지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중국 어느 대문호가 처음으로 매화향기를 극찬하는 시를 쓴 뒤로 후대 시인, 묵객들이 너도 나도 다투어 매화의 향기를 예찬하였기에 매화, 매화를 입에 올리게 되었지 싶다. 조선의 선비들은 도연명이나 두보, 소동파 같은 중국의 대문호들이 쓴 시구나 산문에 나오는 표현은 무조건 그대로 따라서 쓰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화에 대한 예찬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지 싶다. 봄날, 들에 외로이 서있는 찔레꽃 넝쿨에서 나오는 향기를 마셔보라. 가냘프고 은은한 향기가 결코 매화에 뒤지지 않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건데-.

 오래된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에서 나오는 맑은 소리도 좋고 매화꽃의 은은하고 깊은 향기도 좋다. 그러나 나는 이 둘을 관통하는 메시지(message)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 절실한 덕목으로 다가온다. 즉 그것은 오래된 오동에서 나오는 청아한 소리, 추위를 이겨낸 매화가 풍기는 꿋꿋한 정조(貞操)와 고고한 절의(節義)를 본받으란 말이다.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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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공통윤리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이것은 반드시 해야된다”느니 “이것은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등의 규칙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 집단에서 영향력이 있는 소위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 몇몇이 이런 규칙을 만드는 것이 상례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협의에 의해 서로 지키도록 되어 있는 규칙이 곧 규약이라 할 수 있지요. 이 규약을 어기는 이는 사회의 따돌림과 배척을 받고 이 규약을 잘지키고 따르는 이는 사회의 칭찬과 수용을 받지요.

 인간사회에서는 전쟁, 대량학살, 배반, 음모 등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사회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망하지 않고 아직까지 유지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규약 때문이라고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인지진화연구소에서는 “인간사회에 공통되는 도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구상에 있는 60여개의 조직에 대한 조사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직이란 말은 문화, 사회, 국가라는 말과 얼추 같은 말로 썼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문화 혹은 사회조직을 관통하는 일곱가지 공통적인 도덕규범을 뽑아냈는데 그 일곱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족을 도와라. 둘째, 소속집단에 충성하라. 셋째, 위 사람을 따르라. 넷째, 호의를 갚아라. 다섯째, 용감하라. 여섯째, 자원을 공정히 나누라. 일곱째, 다른 사람의 것을 존중하라.

 연구에 참여했던 커러(O. Curry)를 따르면 인간사회는 모두 비슷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사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비슷한 도덕규범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도덕이란 것도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협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나서 진화해온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협력도덕의 뿌리는 수천만 년을 이어온 집단생활, 그리고 수십만 년에 걸친 수렵생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커리의 주장입니다.

 이 일곱가지 덕목이랄까 공통윤리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알게 모르게 변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윤리라는 것도 어느 특정사회만 변한 것이 아니고 공통적으로 모든 사회가 변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날씨를 얘기할 때 체감온도라는 말을 쓰지요. 우리가 피부를 통해 느끼는 온도는 실제 온도계가 알려주는 온도보다 더 낮게, 혹은 더 높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윤리도덕에서도 실제 그런 변화가 있었으냐에 대해서는 사회과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연구로 결정되겠지만 내가 피부로 “옛날과는 다르구나”를 느끼는 것이 체감변화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요?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보고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발표한 일곱가지 윤리도덕 중 처음 세 항목의 변화는 눈에 제일 쉽게 뜨이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인 가족에 충실하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집안형제끼리 다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드물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고 따로 떨어져 사는 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새는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한집에서 사는 것이 옛날에 부모가 따로 독립해서 사는 것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남긴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에 서는 모습도 신문에서나 앞뒷집 현실에서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소속 집단에 충성하라는 말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국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들어먹힐 여지가 있겠으나 미국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희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되어가고 있지요. 아무리 내가 속한 집단이라 해도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개인적인 윤리도덕 기준과 어긋나는 것을 때는 가차없이 자기주장을 씩씩하게 주장하라는 가르침이 서구식 생활태도에 대한 지침입니다.

 한번 직장에 들어가서 백발이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던 개념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큰 직장에서 충성심과 단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장을 가족의 확장으로 생각하기를 권하며 무슨무슨 가족모임이니 단합대회니 하는 이름을 붙여 전체 조직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큰 기업에서 자랐다시피 하고 그 조직을 대변하다시피 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돌변해 자기가 수십 년 몸담았던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상부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직원이 나중에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윤리적인 판단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 윤리라는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인 윗사람을 따르라는 말은 조선시대 금과옥조이던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다) 같이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을 따르라는 말(The younger should give precedence to the older)이라기 보다는 조직에서 경륜이나 경험, 판단력이 건전한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도 나이 많은 사람=구식, 보수, 한물간 사람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어가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흘러간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흐르는 속도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빠르다는 것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옛날에 살던 방식이 그리워 옛날식을 고집하고 살아가려는 극소수 사람들도 있지만 디지털 문화가 계속되는 한 그 세력이 그다지 왕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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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불신의 장(場)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집권당이던 장면정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기억은 희미해져가지만 그때 ‘사상계’에서 장준하의 “이제 무엇을 말하랴”의 여덟 글자가 전부인 사설을 인상깊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이 사설을 읽은 후 58년의 세월이 흐른 2019년 이른 봄,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 말이 나도 모르게 내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경우를 당했다. 그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지금도 캐나다에 이런 ‘놀이’를 하고 있는 학교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30년 전 어느 봄날, 온타리오 런던 시내 어느 초등학교에 들렀다가 그 학교 운동장에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본 일이 있다. 즉 학생들이 짝을 지어 한 학생을 두 눈을 가려 앞을 못보는 ‘맹인’이 되고 남은 학생은 그 맹인의 길잡이가 되어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놀이장면이었다. 그 다음에는 역할을 서로 바꾸어 길잡이가 맹인이 되고 맹인은 길잡이가 되는 그런 놀이.

 지도교사의 말로는 서로의 신뢰를 기르기 위한 게임이라는 것. 눈을 가린 맹인이 한발짝이라도 옮겨놓기 위해서는 길잡이에게 자기 자신을 통째로 맡겨야 하는 것. 이렇게 하자면 상대방을 완전히 믿고 신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리라 한다. 맹인-길잡이 역할을 서로 바꿔봄으로써 서로가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체험본다는 것이다.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고 꼭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믿음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은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해를 입었을 때를 말한다. A가 B를 신뢰할 수 있을 때는 B가 A를 항상 지지해주고 우호적이며, 정적(正的) 강화를 제공한다고 예언할 수 있을 때에 생기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사랑의 전조(前兆)가 된다.

 믿음이란 개인 간의 일, 즉 너와 나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너와 나를 에워싼 사회조직이나 단체 등 어떤 명사에도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계산기를 두드리는 점원을 믿기 때문에 물건 값을 옳게 찍었는지 꼼꼼히 살펴보질 않고 가게 문을 나온다. 회계사를 믿기 때문에 해마다 내는 세금보고를 그에게 위임한다. 그러니 내 주위의 조직이나 단체, 기관과 접촉한 것이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 곧 사회생활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사회조직을 전혀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남 얘기는 그만두고 나 자신도 그럴 때가 생각 외로 많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렇게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확실히는 모른다는 말이 제일 정직한 대답인 것 같다. 에릭슨(Erikson)이라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어받은 사람의 말로는 사람이 태어나서 신생아일 때 그를 일차적으로 보살피던 사람이 얼마나 규칙적으로, 감정이나 분위기가 친근하고 포근하게 돌봐주느냐에 따라 이 신생아가 평생 동안 지니게 될 세상에 대한 믿음의 기초가 결정된다고 한다.

 예로, 신생아를 돌보는 사람이 규칙적으로, 따스한 분위기 속에서 돌본다면 이 아이는 “이 세상은 예측할 수 있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그 반대로 돌보는 이가 불규칙하게 이랬다 저랬다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신생아를  돌본다면 “이 놈의 세상, 믿을 게 못되는구나”는 불신의 버릇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유아기 때 겪은 경험이 평생동안 지닐 성격을 결정한다는 주장에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성격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유아기-아동기-청년기를 거치면서 겪는 대인관계의 질(質) 여부로 차차 형성되는 것이지 에릭슨의 주장처럼 영아기 짧은 시절의 경험이 평생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지난 이른 봄, 토론토 한인회장 선거 때 나는 우리 교민들이 서로를 얼마나 믿지 못하느냐를 보여주는 불신의 현장(現場)을 내 눈으로 보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인회장 선거날, 투표를 하러 갔더니 투표를 하자면 투표하는 사람의 주소와 사진이  붙은 증명서 2개를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에 붙은 증명서 하나도 아닌 2개를 내놓으란 말이다. 이걸 보면 교민들이 같은 동포라 해도 못믿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517년 조선왕조는 양반계급과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지 백성들을 살게끔 도와준 왕조는 아니라고 본다. 고을의 수령 3년만 살면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세상.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양반계급과 벼슬아치들에게는 풀뿌리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었지 그들을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런 풍토에서 몇 백년을 살아온 백성들이 어찌 남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보호자에게서 따뜻한 대접 한번 받아보질 못하고 의심증 많은 어른으로 자란 에릭슨의 신생아와 같다.

 오늘도 교회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소리가 이른 봄 하늘로 울려 퍼지고 대자대비를 설법하는 스님의 목소리는 법당을 울린다. 그러나 투표장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절반이 넘는 토론토 한인교민들이 종교를 가졌다는 한인사회, 위에서 내리누르는 그 어떤 압력이나 학정이라고는 없는 사회,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아보자는 이 조그마한 사회가 이 꼴이다.

 지금부터 58년 전, ‘사상계’에서 장준하 선생이 피곤한 펜을 들어 쓴 사설이 생각난다. ‘이제 무엇을 말하랴.”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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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저항

 

 풀이나 나무에 상처가 나면 즙(汁)이나 진(津)이 나온다. 민들레나 봄, 여름이면 쌈을 싸먹는 쑥갓이나 상추를 따면 하얀색의 이눌린이, 소나무나 복숭아를 자르면 터펜스라는 물질이 들어있는 진을 낸다. 사람도 상처를 입으면 피가 나와 굳어져서 딱지가 앉아 병원균의 침입을 막는 것처럼 식물의 즙이나 진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마늘이나 양파, 부추, 달래와 같은 식물은 껍질을 벗기면 강한 자극성 냄새를 풍긴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는 순간 세포 안에 있던 알리신이라는 휘발성 물질을 밖으로 뿜어낸다. 들깨나 더덕도 자극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느낄 만큼 강한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내 얘기가 아니고 강원대학교 교수 권오길의 말이다. 그를 따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식물이나 외부 침입에 대비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마늘 냄새가 강한 냄새를 수반하고 고추가 매운 물질을 뿜는 것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물질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오길을 따르면 삼라만상 중에 싸우지 않는 것이 없다. 흙 속의 미생물이나 곰팡이는 스트레프토 마이신 페니실린이라는 항생물질을 만들어 다른 생물체의 침공을 막는다고 한다. 고소한 흙냄새는 방선균과 같은 세균들이 토양 중의 유기물을 분해할 때 생긴다. 모래와 같은 매마른 사람에게서 사람 향기가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에게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자기 방어 기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자기의 자유를 구속당할 위험이 있을 때 나타나는 저항 내지 반항이다. 인간뿐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기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외부의 힘이 느껴질 때는 반사적으로 이에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에 상처가 나면 즙과 진이 나오는 원리와 비슷하다.

 금주(禁酒)를 선전하는 광고문이 “술은 사람에게 해롭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될 수 있는대로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같은 부드럽고 약한 권고가 “술은 절대로 입에 대면 안됩니다. 술은 마시면 엄청 해롭다는 증거가 수많은 연구에서 나왔습니다” 하는 강한 광고문 보다 더 금주(禁酒)에 효과적이라는 보고도 있다. 강한 명령형 권고는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자기의 자유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을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유를 확보하려는 저항행도의 원리는 심리치료에 써먹기도 한다. 예로, 불안을 호소해오는 환자를 가정해 보자. 이 환자에 따르면 아무리 불안을 쫒아버리려고 해도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생기는 현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안을 느끼고, 느끼지 않는 자기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control)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불안을 없앨 수 없다는 것.

 이 자기의사로 자기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치료자는 환자에게 앞으로는 더 불안을 느껴보라는 지시를 준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 찾아온 환자에게 그 반대되는 행동, 즉 불안을 올리라는 지시를 하니 환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즉석에서 저항을 나타내는 행동을 하는 환자가 많다.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바보는 아닙니다” 등의 자기도 긍정적인 힘이 있음을 내보이며 치료자의 지시를 거역할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고 믿고 있던 불안이란 감정도 자기 의사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자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린 정식이가 노래를 불러 어른들에게 방해가 된다 해보자. 보통 “정식이 이제 노래 그만해라”는 지시 대신에 “정식이 여기 와서 크게 노래 한 번 해봐” 하면 정식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노래 한 번 불러보라”는 외부 지시에 저항해서 자기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행동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른이 하라면 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어린이들의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 이런 치료적인 방법을 ‘역설적 기법’이라고 한다.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 즉 자기 힘으로는 자기를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도록 바꾸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정당한 합법적인 권위에서 나온 힘은 자유가 위협당하는 경우라도 저항이 아닌 복종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세금을 내라는 지시,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기 방을 청소하라는 지시, 학교에서 선생님이, 병원에서는 의사가 내리는 지시 같은 것은 별 저항없이 따른다. 이렇게 복종하는 경우는 그 지시가 내려온 권위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혜택을 받는 경우면 더 자주 복종의 길을 택한다.

 말을 잘 듣는 아이는 복종을 잘 한다는 의미이고 걸핏하면 저항을 하는 아이는 반항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어릴 때 어느 정도의 저항이나 반항은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둘 다 정도가 지나치면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저항을 잘하던 아이는 커서 반항하는 성인이 될 위험이 있고, 부모 말 잘듣던 순종적인 아이는 커서 수동-공격(passive-aggressive) 어른으로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반항하는 자녀들의 행동을 걱정하지, 복종하는 자녀들의 행동을 걱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지나치게 반항만 하는 자녀건, 복종만 하는 자녀건 이들이 안고 있는 심리적 갈등의 무게는 같을 것이다.

 인생살이에는 정해진 길, 소위 모범답안이라는 게 있는 경우가 드물다.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옳은 길을 찾는 데 옳은 길, 가야할 길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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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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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벼슬 유감(有感)

 

 우리집은 대대로 남인 계열의 집안이다 보니 과거(科擧)는 언제나 강 건너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음보(蔭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었겠으나 음보 자리를 부탁할 배경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전통이 오래 내려오다 보니 옛날 중국 동진 때 중앙정부의 고등관리가 지방에 왔을 때 옷을 차려 입고 나가서 인사드리기를 거부하며 “내가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그에게 허리를 굽힐소냐”며 사표를 집어던진 도연명의 기개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새는 남인도 없고 북인도 없는 세상. 실력과 관심만 있다면 벼슬자리에 대한 야망도 키워볼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벼슬은 권력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쓸 정도로 가까운 말로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권력이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싫어한다고 말한다. 천만에.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벼슬을 탐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을-.

 간혹 높은 벼슬아치가 하나 있는 집안 사람들이 벼슬아치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라.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벼슬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젓던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은근히 탐내고 부러워하는 마음이 역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때가 너무나 많다.

 요새는 벼슬 중에 가장 얻기가 쉽고도 어려운 것이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국회의원은 전통적인 벼슬아치들과는 차이가 있으나 권력을 거머쥔 사람으로 행세한다는 점에서는 벼슬아치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 중에는 백묵을 쥐던 서생, 교수, 판.검사, 신문기자, 영화배우, 깡패, 지방건달, 돈을 억수로 번 재벌 등 모두가 권력과 명예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뛰쳐나온 사람들이다.

 조선시대 벼슬아치 대부분은 성리학 경전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니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요새 관리나 벼슬아치들과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요새 정치를 하는 사람, 특히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투표로 뽑힌 사람들. 선량(選良)들이라는 자부심 만큼은 대단하다. 그들의 권력을 행사할 국민들에 의해서 선거로 뽑혔으니 오죽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겠는가.

 요새 정치인들이 조선시대의 고등관리들 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다른 민족,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나라 안의 일만 잘 처리한다면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던 옛날에 비해서 요사이 정치가는 나라 밖의 일, 그러니까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깊어야 한다.

 조선시대의 정치인들은 누가 누구의 손자가 되고 누가 누구의 사돈이 되는가 하는 혈연관계나 인맥에 대한 지식, 소위 보학(譜學)에 밝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 정치인은 보학보다는 정보 수집과 그 수립된 정보의 판독과 전파에 뛰어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만 돈독하면 그만이던 시대는 끝난지 오래다.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올바른 결정이라고 믿는 것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추진력과 그 결정이 미칠 파장을 생각해 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요새 정치인들은 당에 대한 피끓는 사랑과 충성심 하나로만 되는 게아니다. 그렇다고 아는 게 많은 석학이라고 되는 것도 아니다. 국민들과 소통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기 자신을 내보일 때 카멜레온(Chameleon) 처럼 이렇게도 보일 수 있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환경에 따라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를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예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 Carter)가 대통령 후보 시절에 어느 방송기자와 인터뷰에서 “나 같은 땅콩 장수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말이 땅콩 장수이지 그는 땅콩 몇 푸대 싣고 소매상을 돌아다니는 장수꾼이 아니다. 카터를 땅콩 장수라고 한다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포드(H. Ford)는 자동차 정비공, 한국 서울의 이병철은 ‘설탕 장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정치가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제시를 융통성있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한 권력을 손에 쥐려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그것에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잡아보려고 평생을 뛰어다니던 사람도, 권력을 뜬구름 보듯 하던 사람도 이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워 오면서 권력이니 벼슬이니 뭐니 하는 것이 모두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허무한 것이 어찌 권력과 명예뿐이랴. 사람이 산다는 삶 그 자체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스며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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