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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leed2017

 

 나는 올해 한국나이로 여든이 됩니다. 80을 사는 동안에 이렇다 할 공은 하나도 세우지는 못한 그저 먹고사는 데만 바빴던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책 몇 권과 옷가지 몇 벌을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는 것을 이사로 친다면 내가 캐나다에 온 후로 모두 대여섯 번 이사를 했습니다. 서러워서 도망치듯 이사를 한 것은 한 번도 없고, 집세를 못내서 집주인이나 은행에서 쫓겨난 것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집을 새로 짓거나 더 큰집으로 옮기는 것이었으니 그다지 억울하고 서럽다는 생각이 드는 이사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 종착역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 2개에 거실 하나의 오두막집입니다. 옛시조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라더니, 심청이가 중국 상인들에게 팔려가기 전에 심봉사를 봉양하며 살았던 오두막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도 집이 무척 밝고 아침 해가 뜨면 저녁때 해가 질 때까지 햇빛이 집을 떠나는 일은 없는 기막히게 밝은 집입니다. 크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나 같은 선생들이 살 집은 아니라고 아주 일찌감치 못을 박았기 때문에 지금 사는 집에 더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우리 식구가 내 눈에는 대단히 크고 마당도 우리집 몇 배가 되는 큰집에 놀러가서 하룻밤 자고 올 생각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난방비가 엄청나서 그런지 주인부부까지도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집에서 잤다가는 감기 들겠다 싶어 그 집에서 나와서 시내에 나가 호텔에서 묵고 온 적이 있습니다. 집은 편안한 안식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바에야 우리집같이 집안 온데를 돌아다녀도 몇 발자국밖에 안되는 집, 겨울에도 파자마 차림으로 있어도 추운 기운이라고는 없는 집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살다가 불현듯 옛집 생각이 날 때가 있지요. 그때 고생고생하며 바쁘게 살던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옛집은 런던 온타리오에 있습니다. 나는 장모님 산소를 다니러 갈 때면 우리가 살던 옛집을 꼭 한번 찾아가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옛 집에 가보면 그 집에서 사는 동안 겪은 온갖 일들이 생각의 실타래가 되어 살아납니다. 마당에 심어둔 단풍나무는 컵 안에서 자라던 놈이 벌써 고목이 되었고, 그 단풍나무 씨를 컵에 넣어서 정성스레 키우던 아들 녀석은 벌써 쉰 살이 넘었습니다. 정원을 꾸미느라, 학과의 비서가 준 헌 철로침목을 구해서 애써 꾸며 놓은 채소밭에는 탱크로 밀어도 끄떡 않을 새 구조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부엌 옆 베란다 앞에 심은 라일락은 너무 커서 베란다 공간을 야금야금 침공하다가 주인의 미움을 받았는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옛집을 다시 찾는 나그네에게는 애절한 회억의 소재가 될 뿐입니다. 그 옛집에 살던 시절과 오늘 내 모습을 돌이켜 보고 거기다가 세월의 깍지를 어루만져보면 공연히 마음 한 구석에 애잔하고 쓸쓸한 정감이 일어나지요.

 이 애잔하고도 쓸쓸한 기분을 시조나 시로 표현한 시인이 있을까. 시집을 여러 권 꺼내놓고 찾아보았습니다. 백수(白水) 정완영의 시집 ‘실일(失日)의 명(銘)’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옛집’이라는 제목을 단 시조가 눈에 띄었습니다.

 

찾아온 고향집은 울도 담도 허술하다

핏발 선 아가 눈에 엄마젖을 짜서 넣듯

해종일 햇살이 내려 살구꽃만 피어놨다

 

담궈논 장독대에 장맛이나 들으라고

집 비운 듯 집 비운 듯 장뚜껑이 열렸는데

대추랑 고추랑 떠서 맛들이나 내고 있다

 

 백수는 고향집에 가서 옛날을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은행 모기지(mortgage)가 있으니 이놈의 모기지를 청산하기 전에는 ‘내 집’이라는 생각이 영 덜 납니다. 옛집에 가면 나는 통곡이 나올 정도로 서글퍼집니다. 그 통곡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집에서 지나가버린 23년 세월에 대한 회한(悔恨)과 그리움, 늙고 내려앉아버린 내 육신(肉身)에 대한 탄식, 이 모든 것이 슬픔으로 전환되어 내게 파도처럼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옛집을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곧 세월을 통곡하는 것입니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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