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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leed2017

 

 “나는 촌놈이다. 흉악한 촌놈이다…” 이 말은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지금은 고인이 된 같은 반 친구 K형과 같이 ‘새벽’이라는, 전문지도 아니고 문예지라고도 할 수 없는 종합지를 낸 적이 있는데 그 종합지에 내가 쓴 수필의 첫 머리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의 첫 수필을 내가 같은 반 친구와 같이 발행한 ‘꿀꿀이 죽’에 실은 꼴이 된 셈이지요. 수필 제목도 기억못하지만 용케도 첫 머리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종합지 발행인쯤 되면 이 종합지의 사명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유(類)의 글이 주로 실릴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전에 이런 종합지를 발행하는 일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내 문예지에서 경주 불국사에 다녀와서 한시(漢詩) 한 편, ‘석굴암에 올라(登石窟庵)’를 냈다가 퇴짜 맞은 것밖에는 없지요. 한마디로 뭐가 뭔지 모르는 순(純)무식이 자기가 발행인이라고 자처하며 설치고 다녔으니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자금부족인지 독자부족인지, 아니면 둘 다 부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새벽’은 창간호 딱 한 번 나오고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새벽’이라고 한 제목 하나만은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전, 1920, 1930년대에 ‘조광(朝光)’, ‘개벽(開闢)’이니 하는 계몽사상을 표방하는 문예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내 ‘새벽’도 이념적으로는 이들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왜 ‘새벽’이라고 지었을까요? 계몽성이 있고 힘찬 것을 좋아하던 나의 허영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그 흔하던 반독재 투쟁에도 한번 참가해보질 못한 겁쟁이. 정치적 사상이 보수라서 그런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개혁을 꿈꾸는 사상가나 되는 것처럼 계몽적인 의미가 담긴 이름은 짝없이 좋아했었습니다.

 그 버릇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가 여행을 가도 그냥 편히 쉬는 여행이 아니라 흥밋거리가 되는 여행, 역사가 있는 여행을 더 좋아했습니다. 작년에 친구 넷이서 멕시코 남동쪽 유카탄 반도에 일주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휴양지에 틀어박혀 먹고 쉬고, 또 먹고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여행이 아니라 “행복한 돼지”의 여행이었습니다.

 옛날 젊은 시절 같았으면 내용없는 여행이라고 거절했을 여행이었지요. 그러나 웬걸, 먹고 쉬고 하는 것만 되풀이 하는 몇 날을 보내고 나니 ‘행복한 돼지’ 여행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지는 몰랐습니다. 여행이 끝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쿠바(Cuba)에 가는 또 하나의 비슷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세상이란 살아가는 과정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나는 ‘새벽’에 “나는 촌놈이다…”로 시작되는 수필 외에 ‘심리학에서의 조작주의’란 제목으로 글 한편을 실었습니다. 건방이 뚝뚝 떠는 제목이지요. K교수가 하루는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새벽’에 실린 조작주의에 관한 내 글을 칭찬하면서 자기 밑에 조교로 일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무급조교란 말 그대로 월급도 없는, 그렇다고 할일도 없는, 외화내빈의 자리였습니다. 그래도 무급조교가 유급조교로 이어진다는 희망 때문에 그 자리 하나도 얻기가 퍽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K교수가 나를 알아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실렸던 글이란 것도 내가 영어로 된 어느 방법론 책에서 거의 그대로 번역을 해서 짜깁기한 것이었기 때문에 K교수가 나를 칭찬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요. 나는 표절행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참, 끝으로 내가 ‘새벽’이란 잡지를 애당초 K형과 같이 발행했다 하면서 K형 얘기를 쏙 빼고 내 얘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K형 얘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K는 퍽 명랑하고, 예의 바르고 순한 양같은 친구였습니다. 우리 둘은 4년 대학생활을 끝내고도 무척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나는 해마다 며칠씩 K의 집에 가서 있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지요.

 내 서가(書架)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드로브작(Dvorak) 교향곡 4번 LP판 하나가 외롭게 꽂혀 있습니다.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의 아내와 첫 번 데이트로 간 곳은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리는 KBS정기연주회 자리였습니다. 그날 연주곡목의 하나가 드보르작 교향곡 4번. K가 이 사실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가 캐나다로 유학 왔을 떄 우리 집에 들러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어느 여의사와 결혼해서 꿈같이 살던 K가 몹쓸 병에 걸려 그 예쁘고 착한 아내를 두고 저세상으로 먼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드보르작 4번 교향곡은 젊은 시절 내 첫사랑의 추억도 되고, K에 대한 나의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 서가(書架)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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