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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
leed2017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라는 사람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자입니다. 염세주의란 세상 및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을 반(反)가치, 무의미한 것, 또는 추악한 것으로 보는 인생관으로 낙천주의에 반대되는 말이지요. 인간생활에서 삶은 괴로운 것이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지의 소멸 외에는 없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그리스에서 유행했던 스토아(Stoa) 학파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하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의 책을 읽은 당시의 청소년들은 실제로 자살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의 높은 청소년 자살률은 쇼펜하우어가 쓴 책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살기도도 않고 그의 책을 판 수입으로 72살이 될 때까지 천수를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나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에는 이해가 가지만 책을 읽고 자살을 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남의 글에 현혹되어 내 진로를 다르게 선택할 뻔한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성천(星天) 유달영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터키의 게말파샤가 새로운 터키를 일군 이야기에 홀려 나는 농과대학으로 가서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채영신)처럼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쳐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벌써 옛날입니다.

 

 유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에 감명을 받은 사람은 경대사대부고에 다니던 소년 이동렬만은 아니지요. 들은 얘기로는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도 그 책을 읽고 감동하여 유달영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장구치는 놈 따로 있고, 고개 까딱이는 놈 따로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선동하는) 책을 쓰는 사람 따로 있고 그 책에 감동을 받아 어떤 종류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이니 책은 일종의 선동을 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성경처럼 많은 사람들을 착한 행동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선동한 책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세상은 성경에서 선동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남을 도우며 사는 착한 사람들로 꽉 차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쇼펜하우어의 자살을 권유하는 책을 읽고 자살을 실행에 옮긴이들이 전체 청소년들 숫자에 비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그 영향으로 착하고 진실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생각에 어떤 변화가 왔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말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아직도 실제 행동이란 것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 가지, 즉 생각, 말, 행동의 연결고리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말과 행동의 고리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면 어느 조직에서건 다른 사람들의 신용을 얻지 못합니다. 남의 신용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지요.

 

 말과 생각이 다르기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그중에도 국회의원으로 불리는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들 국회의원은 청중들 앞에서는 되는 말, 안 되는 말 마구 지껄여놓고는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이 말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짓만 하는 것 같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가끔 민선으로 뽑히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대중들과 함께 어울리는 척하며 “나는 이 계층 유권자들과도 이렇게 허물없이 지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유의 깜짝쇼를 보면 얄미운 생각과 분노를 함께 느낍니다. 이런 쇼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들이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깜짝쇼는 이 세상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는 인생 풍속도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를 찬양하는 책을 쓰고 그 책에서 나온 인지세로 평생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이 세상에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지요. 요새도 ‘어떻게 하면 억만장자가 될 수 있나?’ ‘부자가 되는 법’ 같은 제목의 책을 써서 생활을 해가는 저자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돈을 많이 벌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창의적인 문학작품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며, 명망있는 권투코치(coach)가 실제로 권투를 잘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자기 자신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찬양했던 염세주의는 한때 기승을 부렸으나 낙천주의에 밀려 색깔이 많이 바래진 느낌입니다. 삶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아직 삶을 다 살 때까지는 결론을 낼 수 없겠습니다. 삶은 밝은 면도 있고 추악한 면도 있는 것. 맹자의 말에 따라 사람의 길흉화복 수명이 모두 천명(天命)에 속하니 우리는 그 천명을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한 의욕과 욕심이 줄고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나이 올해 한국나이로 여든이 되는데요-.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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