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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유수
leed2017

 

 나는 안동과 대구에서 잔뼈가 굵은 놈. 이 두 곳이 길러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프라이드와 용기’ 이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아참, 또 하나가 더 있네요. 주책도 여기 넣어야겠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반 아(아이)들 (나는 이들을 귀족이라 불렀습니다)에 대해서는 공연한 경쟁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들에 뒤지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은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 그만큼 컸다는 말이겠지요.

 

 오랜만에 서울에서 대학 클래스메이트 C를 만났습니다. 젊었을 때는 얼굴이 그야말로 백옥(白玉) 같이 흰 선풍도골(仙風道骨) 이었는데 만나보니 그 녀석도 세월의 풍화작용을 너무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쪼그라 들었습니다. C는 다음과 같은 나에 대한 추억담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동렬이, 니(네)가 하루는 반 아(아이)들을 전부 청량대(학교 뒷동산)에 오라카더니 미래의 선생은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며 유행가 ‘낙화유수’를 가르쳐 주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청량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하니 나는 생각도 안 나는 일. 그러나 내가 그때 ‘낙화유수’ 같은 유행가를 좋아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나의 대중가요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C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요.

 

 C의 회상이 맞다면 그때 노래를 가르쳐준다고 청량대까지 오라고 오죽이나 부산을 떨었겠습니까? 서울 출신 귀족들은 “웬 더벅머리 촌놈이 우리에게 그 천한 유행가를 가르쳐준다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냐?”고 입을 삐죽댔을 것입니다. 그때 나로부터 ‘낙화유수’를 배우던 서울 귀족들이고 평민이고 80 고개를 넘어서 날로 허리가 굽어가는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C의 말이 맞다면 그때 배워둔 ‘낙화유수’ 때문에 그들의 인생 행복지수는 10점은 더 올라갔을 거라고 속으로 으쓱해합니다.

 

 내가 유행가를 좋아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지요. 그 시골구석에 어떻게 해서 우리 집에 길고 가느다란 나팔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귀여운 자세로 앉아 있는 유성기(留聲機) 한 대가 굴러 들어왔습니다. 유성기에서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길’, ‘울며 헤어진 부산항’ 같은 대중가요를 늘 듣곤 했지요. 할 것도 볼 것도 별로 없는 벽촌에서 유성기는 나의 음악선생이요 음악에 대한 취미를 길러주는 반려견이었습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김다인이 가사를 쓰고 이봉룡이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봉룡은 ‘목포의 눈물’을 불러 세기의 가수가 된 이난영의 친오빠지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반 아이들과 ‘낙화유수’를 불렀다면 61년 전의 일이 아니겠어요. 내가 이 노래를 지도했다면 지금같이 복사기로 깨끗이 인쇄된 가요가 아니라 그때말로 ‘가리방’으로 긇어서 한 장씩 뽑아낸 것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내 음악적 재능만 탁월했더라면 노력을 해서 조그만 관현악단 단원 자리라도 꿈꿔 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음악이라면 음정, 박자, 리듬에 모두 ‘치(癡)’자를 붙여야 될 사람이니, 다리를 저는 사람이 축구선수를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어쩌다가 미관말직 단원으로 들어갔다 해도 실력 부족으로 일찌감치 퇴출당했을 것입니다.

 

 이 ‘낙화유수’는 작사자와 작곡가 둘 중에 한명이 월북을 했다는 죄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상과는 아무 관련이 한동안 없었고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이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도 금지곡으로 정해져서 부를 수가 없게 되었었지요.

 

 그러나 이들 노래가 대중의 감정 속에 파고든지 이미 오래지요. 일시적으로 반짝하다가 없어진 유행가가 아닙니다. 이들 노래는 민요처럼 우리 속에 이미 흡입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는 감성의 핏줄이 되었습니다. 노래를 만든 사람들이 월북을 했다고 이 노래가 영원히 사라지고 말 줄 아십니까? 천만에-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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