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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과 동포
leed2017

 

 지난 12월에는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 선거가 있었다. 집사 책임을 3년 이상 맡았던 신도 중에서 교회의 지도자 격 일꾼이 될 장로 네 사람과 권사 세 사람을 뽑은 것이다. 선거가 있던 그 다음 주였던가, 새로 장로로 뽑힌 L 씨를 보고 "OO 장로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농담조로 인사를 던졌더니 그 장로는 머뭇머뭇 하더니 계면쩍은 표정으로 "아직은 장로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피택장로'라고 불러야 한답니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게 아닌가.


 그럼 '피택'이란 무슨 말인가? '피선(被選)'과 의미가 같은 말로 한문에 기반을 둔 말일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갔지마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꽤 권위 있는 두 개의 국어사전을 열심히 뒤져도 '피택'이란 말은 눈에 뜨이질 않았다.


 몇 년 전에도 신문 부고(訃告)란에 자주 나오는 '소천'이란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아보려고 사전을 뒤졌으나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의 '소천'은 사전에 나와 있질 않아서 나 혼자서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내는" 의미겠지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피택'이나 '소천'의 경우에는 이젠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되어 이런 말을 만들어낸 사람보다는 사전에 넣지 못한 출판사를 나무라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어떤 단어가 사전에 들어가는지의 기준을 모르며 사전을 펴낸 출판사부터 나무라는 것은 그다지 공평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였다. 하루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교포' 내지 '교민'이라는 말이 "임시로 붙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서글픈 뜻이 담겨있는 말이니 '동포'라는 말로 바꾸어 써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글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는 '교포'와 '교민'을 버리고 '동포'를 따르리라 마음을 먹고 내 수필집 [청산아 왜 말이 없느냐]의 출판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이 사실을 '엄숙히' 선포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옥편(玉篇)과 우리말 사전을 뒤져 보니 옥편에는 '교포'의 '교(僑)"는 '우거할 교' '나그네 교'라고 적혀있고, 우리말 사전에는 '교포'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동포," '교민'은 "외국에 살고 있는 겨레"로, '동포'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자매라는 뜻의 '한겨레' 내지 '같은 민족'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동포'는 '교민'에 비해서 한핏줄, 한민족임을 강조하는, 그 기개에 있어서 좀 더 장엄하고 끈끈한 정이 어려 있다고 볼 수 있고, '교민'은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겨레"이니 '나그네'나 '방랑자'의 냄새를 풍기는 그런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30년을 넘게 써 온 이 '교민'이라는 정든 말을 하루아침에 말의 근원을 따져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구태여 따진다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별 관계가 없이 쓰여 지고 있는 말이 어디 한두 개인가. '화장실(化粧室)'이 그렇고 요즘에 와서 부쩍 흔해진 '사모님'이란 말이 그렇고 뒷골목에 있는 '철학 연구소'도 본래의 의미와는 별 상관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교민'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포라고 하는데 구태여 나 혼자 '교민'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또한 '동포'와 맺은 새 인연을 1년도 채 못 넘기고 다시 '교민'으로 돌아가는 것도 의리를 져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자코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어딘지 개운치 않은 그 무엇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포면 어떻고 교민이면 어떠랴. 그 말이 그 말이니 제 마음에 드는 말을 쓰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을 꼬치꼬치 따지려면 이것 말고도 우리말이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많다. 예로 4천만 겨레가 다 아는 동요 [고향의 봄]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 이 아니라 "내가 살던 고향은. "으로 해야 한다고 이 노래의 노랫말을 쓴 이원수 선생은 말했다. 


 이러다 보면 '동포' 때문에 '화장실', '철학 연구소', '환경미화원', '벼룩시장' 같은 말도 다시 그 뜻을 검토해봐야 할 것 같다. (199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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