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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환국
kwangchul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지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 - 1945년 11월23일, 김구.

 

1945년 11월23일, 중국 상해를 떠나 황해 바다를 건너 광복 강토로 돌아가는 하나의 정부가 있었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원 15명은 그날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귀국준비위원회 조차도 모르는, 아무런 환영도 없는 쓸쓸한 환국이며, 현실과 상상의 차이만큼 초라한 귀국이었다. 그리고 슬픈 조국의 운명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당시 중국 전구 연합군 사령관은 장개석 총통이었고 "웨드 마이어" 중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본의 항복이 빨라서 점령지인 한국에 진주할 육군병력과 수송 능력이 없는 중국 전구는 태평양 전구로 이전되어 "맥아더”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 관할권 이완으로 종래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다리던 귀국길은 3달이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보내준 비행기편으로 제1진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임정의 영광스런 귀국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서의 환국이어야만 하였다. 그 1진에는 평민의 자격으로 입국하는 김구 주석이 있었다. 그때 이미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제국과 대치할 계획이었으나 1944년 말 작전상 소련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치 독일과 대적하던 서부전선인 유럽에 전념하던 스탈린의 소련은 늦게 일본과의 전쟁인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 참전 한 달도 되기 전에 1945년 8월15일 일본은 항복하게 된다. 어부지리로 승전국이 된 소련은 그때 이미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물론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까지 진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화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참전국으로서 그리고 승전국인 연합군의 입장에서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거듭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25일 북위 38선 한반도 분할 점령을 발표하고, 미국 또한 서둘러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1945년 9월8일, 하지 중장이 사령관인 24군단은 인천을 경유하여 해방군으로서 상륙하게 된다. 또한 하지 중장은 주한 미군 사령부와 군정장을 겸직하게 된다.

 군인 하지 중장은 패튼 장군과 버금가는 용감한 군인으로서 1차 대전,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병이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전쟁의 수행능력에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민감하게 얽혀있는 남한의 정세를 파악하기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였다 한다.

당연히, 한국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음이 없이 독립국가를 형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합병 당시도 오직 소수의 특수층만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혜택을 받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오랫동안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해 하지도 못하였고 이해 하려 하지도 않았다.

페이스 북에 “미국 사는 한국인 그룹"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에 코스코에서 피자 먹고 있는 92살인 한국전 참전 용사를 소개한 글이 있다. 이름이 그렌(Glenn)인 그 노병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해군병원 배에서 1952년과 1953년 근무하였다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방문한적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가본적이 없다고 하여서 현재의 서울 사진을 보여주니까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인천은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고아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더욱 비참한 것은 미군 배에서 쓰레기를 버릴 때는 많은 사람들과 고아들이 쓰레기 안에 있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한다.

육이오 전쟁 전 1949년 11월 정대위 박사는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귀국을 하고 있었다. 고베와 요코하마를 들려서 오게 됐는데 당시 그곳들은 황폐한 주검의 음산한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부산항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건실하였으며 사람들의 표정도 일본사람들과는 다르게 밝고 명랑하였다 한다.

그러나 3년간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완전 폐허로 만든다. 반면 한국에서의 교훈을 거울삼아 일본의 적화 방지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며, "육이오"라는 전쟁의 특수 덕에 패전국이었던 일본으로 하여금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하여주게 된다. (본국과 지리상 먼 거리에 있던 미군의 식량 조달은 일본으로부터 공급받게 된다.)

역사는 한번 저지른 잘못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태평양 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힘이었지 소련의 도움은 거의 없었으나, 미국은 소련이 최대의 전쟁 피해국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결정적인 양보를 하게 된다. 국제사회에서의 명분 없는 양보는 자신도 모르게 적을 돕는 부도덕한 전례를 남기게 되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격전장이 된다.

 총 한번 쏘지 않고 대한민국을 일본에 넘겨준 못난 조상들의 과오를 되새기며, 이국 땅에서 순국하신 모든 애국 지사들의 숭고한 뜻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3년 3월19일)

 

에필로그: 하지 중장은 임정과 한국의 지식인들의 "신탁통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재임기간 동안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이승만 박사로부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비아냥의 소리까지 듣게 된다.

 

참고서적: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

정대위 박사: 한국 유네스코 대표, 건국 대학교 총장, 한국 신학대학 학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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