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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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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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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1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고" 약속한 부부가 있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 덕인지 고령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결혼 당시의 약속대로 한 부부가 평생을 해로하며 같이 보낼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조안(Joan)과 짐 맥레오드(Jim Mcleod)는 64년을 함께 산 후 6년간 떨어져 살고 있는 80대 후반 부부이다.(다음은 짐 맥레오드의 스토리를 9월13일자 ‘토론토스타’에서 발췌한 것이다.)

 

"저와 제 처는 64년을 함께 산 후 다음달 10월이 되면 6년간 떨어져 살고 있게 된다. 우리 부부의 심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나 현재의 롱텀케어시스템(Long Term Care System)은 시니어들의 가치와 우리들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 처 '조안'은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왔는데 막상 마지막 가는 황혼 길에 부부가 같이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시니어를 존중하지 않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연방정부, 주정부, 지방자치단체 등 여러 부처에 청원을 해 보았으나 타당한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시니어가 마지막 떠나는 황혼 길에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빼앗는 처사는 시니어들의 존엄성과 우리들의 고통을 외면하여 시니어들을 무시하는 일이다. 함께 시간을 가지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시점에 떨어져 산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지장을 주지만 더욱 힘든 것은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으로 도래하는 고독감이다."

 

야경국가란 의미의 국가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 국내 치안의 유지, 개인의 사유재산 및 자유에 대한 침해의 배제 등 필요한 최소한의 임무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국가관을 의미한다. 국가의 존립 목적을 강탈과 도덕 방지를 주요 임무로 하는 야경에 중점을 둔 사상으로서, 복지국가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작은 정부, 자유방임국가 개념 등 보수적인 우파(Right)를 지칭하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빈부격차, 환경오염 등 평등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면서 인간답게 사는 사회의 지향에 더 많은 중점을 두면 좌파(Left)적인 성향의 정부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현대의 복지국가개념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시스템의 국가가 캐나다이다. 하지만 복지정책이 항상 국가의 발전을 불러온다는 보장이 없다.(무리한 복지정책을 지향하다 망한 나라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아르헨티나, 그리스, 베네수엘라 등이다.)

 

잊을 만하면 가끔씩 떠오르는 말 중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목표를 표현한 구호로서 완벽한 사회복지를 의미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처음 나왔는데 구호는 이상적이지만 영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구호를 사용한 노동당 측은 물론 보수당 등 현실적으로 지키기 힘든 정책이다. 그러나, 그나마 캐나다가 가장 복지국가 이미지를 지키고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복지국가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캐나다도 코비드-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시련을 겪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타격을 받은 기관이 롱텀케어, 장기요양원 시스템이었다.

 

옴부즈맨, 폴 듀베의 보고에 따르면 코비드-19 전염병이 창궐하던 2020년 봄부터 두 달 이상 장기요양원에 실시됐어야 할 적절한 검사의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다. 그런 관리의 부실은 그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시니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2020년 3월부터 2022년 4월까지 4천 3백 35명의 시니어와 13명의 직원 또한 희생되었다. 폴 듀베 옴부즈맨은 76 항목의 제안을 정부에 제출하였으며 새로운 장관에 임명된 조성훈 장관은 그 제안을 신중히 받아들여 검사와 조사를 철저히 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지난 주 내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에서 롱텀케어 세미나가 있었다. 평균 80대에 들어서는 시니어들이어서 그런지 시종일관 숙연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떤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우리들에게 도래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감이 든다.

 

Bill 21, 혹은 ”Til Death Do Us Part Act”라는 현재 온주의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있다. 골자는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롱텀케어에 같이 있게 하자는 법안이다. 온주 신민당 의원의 제안으로 제출된 법령으로서 어느 특정한 부부의 경우라기 보다는 모든 시니어들의 공통된 과제로 여겨진다.

노바스코시아에서는 이미 통과된 법령으로 알고 있다. 초당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린벨트 추문에 휩싸여 있는 현 보수당 정부에도, 조성훈 의원에게도 신선한 이미지를 선사할 수 있는 법령으로 여겨진다. (2023년 9월 17일.)

 

참고: 옴부즈맨 (Ombudsman), 스웨덴어로 대리 혹은 후견인이라는 뜻이다. 행정기관의 위법, 부당한 행위로 제기된 민원을 조사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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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2)(The Buck stops with me)

 

“나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싸우겠소."-볼테르(1694-1778)-

 

온타리오주 보수당 정부가 정권을 획득하기 전인, 2017년께 한국계 캐나다 정치초년생이 있었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볼테르를 꼽았다. 그는 2018년 6월 초선의원으로 퀸스파크(Queens Park)에 입성하며 6년 만에

장기요양부장관에 임명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조성훈(Stan Cho, 46세) 주의원이다.

그는, 온타리오 주의회 보수당(Progress Conservative party)의원 대표이자 ‘Long Term Care’ 장관이었던 Paul Calandra(폴 카란드라)가 그린벨트 스캔들로 물러난 클락 주택장관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요직을 맡게 되었다. ‘롱텀케어’(Long Term Care) 장관직은 코비드-19 팬데믹 기간 중 비인간적 요양원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그 경영의 부실이 드러나 세간에 이목을 집중시키었던 자리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치추문 사건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다. 캐나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인 온타리오주의 가장 큰 정치스캔들은 ‘그린벨트’ 추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린벨트, 또는 개발제한구역은 법적으로 개발을 제한하고 자연을 보존하도록 묶어둔 지역을 의미한다. 도시의 무절제한 팽창을 막고 시민의 건강에 필요한 주변 녹지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그린벨트는 1930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온타리오주는 2005년 2월18일, 달튼 맥퀸티 자유당 정부시절 2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습지와 농지를 개발제한구역인 그린벨트로 제정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도시의 팽창을 막아 환경보호(Eco-Friendly)에 필수적인 생태계(Ecosystem)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쇼핑몰이나 주택건설 등 재개발을 제한한 입법안이었다. 그러나 그린벨트 보호법령은 온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시련을 맞게 된다.

 

포드 총리는 2018년 보수당 당대표 경선에서 최초로 그린벨트 개발계획을 표명하지만 그 동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되자 신속히 그 계획을 취소했다. 세월이 흘러 코비드-19 팬데믹이 있었고 4년 후 재선거에서 승리한 후 보수당은 주택공급난 해소를 위해 7,400에이커의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10년 안에 150만 채의 주택을 건축하겠다는 계획을 다시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계획은 토론토스타 등 언론매체에서 일부 건설업자에게 발표 전 특혜가 이루어져 구입되었다는 폭로기사가 나온 이후 급전환을 하게 된다.

지난 9월3일 주택부장관이었던 스티브 클락 장관의 사임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그린벨트 스캔들은 해결점을 찾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 최근 여론조사(Angus Reid)에 의하면 포드 총리의 지지율은 2018년 집권 이후 최저인 28%이다. 또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그린벨트 논란에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1960년대, 흑백 TV도 귀했던 당시 프로레슬링이 벌어지는 날, 만화가게와 다방은 레슬링 중계를 보려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프로레슬링이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해외파 영웅 역도산 선수의 제자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등장과 백드롭의 명수 국내파 영웅 장영철 선수의 양대산맥이 산파 역할을 한 데서 기인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라는 폭로한 후 프로레슬링의 인기도 하락하게 된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비밀은 비밀이기에 폭로되어야만 한다.

 

1945년, 영국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은 전쟁영웅 처칠이 이끌던 보수당이 아니라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 국민에 절실하였던 것은 전후 복구에 따르는 민생안정이었다. 집권 후 노동당은 복지국가건설을 추진했고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 후 보수당은 당 조직 강화와 함께 당노선의 변화를 추진했다. 당에서 기초한 산업헌장의 초안을 받아 보고 처칠은 ‘우리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 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한 정책이었다.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역사는 그 자체로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 만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할 때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게 된다. 결정은, 선택은 국민, 우리의 몫이다.

장기요양부 장관직은 황혼 길의 문턱에서 마지막 가는 길의 시니어들을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의 장관 업무이다. 그만큼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요직이다.

볼테르를 존경하였던 정치인 Stan Cho, 조성훈 의원의 건투를 빈다.(2023년 9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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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7
비극의 탄생 (7) -악의 꽃들

 

 강간과 독약과 단도가 화재가/우리의 한심한 운명의 이 시시한 캔버스를/그 익살맞은 그림으로 아직 꾸미지 않았다면/아! 그것은 우리가 아직은 덜 대담하기 때문 -보들레르-

 

 그들이 악의 온상인줄조차 모르고 독버섯처럼 뻗어나가는 무수한 악의 꽃들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러시아의 푸틴과 프리고진, 그들을 전율의 창시자 악들의 꽃이라 부른다.

 지난 6월 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용병단체 와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이 8월23일 러시아 상공에서 비행기 폭발사고로 사망하였다. 비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사건 관여설에 대해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지만 그것은 예견된 죽음이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 미하일로포 돌랴크는 8월24일 새벽 자신의 X(엑스, 옛 트위터) 계정에 이번 비행기 사고는 사실상 준비된 사건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프리고진의 제거는 러시아의 2024년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보내는 경고로서 푸틴을 겨냥한 반역은 죽음과 같다는 신호라고 설명하였다.

 2000년대 초반, 푸틴의 요리사라 불리며 러시아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음식을 공급하는 업체를 소유하고 있던 금년 61세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푸틴의 최측근이었다.

 

 프리고진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임을 근거로 하여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력합병 당시 용병단체인 와그너그룹을 투입하여 러시아의 비밀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영어로는 와그너(Wagner)로 발음되지만 히틀러가 작곡가 바그너(독일발음)를 좋아했다 하여 이를 본 따 와그너그룹이란 명칭을 갖게 된 이 용병단체는 2013년 프리고진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와그너그룹은 금전적 빚이 있는 전직 군인, 특수부대 출신 등을 고용하여 우크라이나 전쟁 외에도 중동, 아프리카 내란 등에 고용되어 작전을 수행하여 왔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잔인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화재, 강간, 고문 등 인간의 상상력을 비웃는 잔인성이다.

 전력의 상실이 발생하면 거침없이 수감자인 죄수들을 고용하여 병력을 충원했다. 모국인 러시아인들에게도 ‘레드 마피아’라 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다 한다.

 

(물론 제네바 협약이 나온 이후 창설된 용병들이라 최소한 인간적인 선을 지켜야 하는 용병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조약들을 비웃고 온갖 학살을 자행해 왔다.)

 

 6월23일, 프리고진은 러시아 국방부의 미사일 공격으로 와그너그룹의 용병기지가 소멸되었고 2천여 명의 용병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며 수만 명의 러시아의 군인의 생명을 앗아간 자들을 처분한다는 명분으로 푸틴에 대한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대한 수습책으로 푸틴은 와그너그룹 반란 군인들은 전원 처벌받지 않을 것이고, 프리고진과 그의 부하들은 전원 벨라루스로 망명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전원 사면 조치하여 반란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푸틴을 비판하였던 정적들이 어떻게 정치적 보복과 암살을 당하였는지 목격한 서방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푸틴이 그를 배반한 프리고진을 살려들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결국 프리고진과 그의 최측근 6명의 부하들은 이번 비행기 폭발사고로 보복을 당하였다. (그 외에도 조종사를 포함한 3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을 당했다.)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는 옛소련의 영역은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다. 이와 때를 맞춰 경제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푸틴 정권의 민족주의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영향권에 종속시키려는 재시도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인의 의지의 충돌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푸틴의 오판으로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전쟁은 미국과 반미세력간의 신냉전시대를 열게 하였다.

 

 우크라이나의 법은 18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은 국가의 동원령에 응하여야 한다. 금년 학기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많은 학생들 중에 아직 18세가 안 된 학생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유학을 가면 방학이 되어도 돌아올 수 없게 된다. 귀국하면 금족령이 내려 다시는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80%의 학생들이 유학을 가기 원한다고 한다. 자라나는 미래의 주춧돌인 이들을 발목잡고 있는 비극의 탄생 이면에는 푸틴과 프리고진과 같은 악의 꽃들이 있다.

 푸틴의 야망과 오산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18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비극의 탄생을 그 누가 있어 희극의 탄생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인류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가고 있다. (2023년 9월3일.)

 

*참고: 수적으로는 러시아 장병의 10%인 프리고진의 와그너그룹 장병들은 전쟁 초 최전방에 배치되어 전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선두에 서서 전투를 하다 보니 병력의 30%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더불어 러시아 국방부의 부실한 지원을 공개적으로 항의하게 되며 결국 병력의 방향을 바꾸어 2023년 6월24일 러시아 본토로 진격하게 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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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대통령의 머그 샷(Mug Shot)

비극의 탄생(6)

 

 

8월24일(목) 7시경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조지아주 폴턴 카운티 구치소에 자진 출두했다.

 

 2020년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와 관련한 혐의로 네 번째 기소된 미국 45대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는 이날 구치소에 임시 수감되는 형식을 밟으면서 다른 범죄 용의자들처럼 범인 식별 사진을 뜻하는 ‘머그 샷(Mug Shot)’을 촬영하게 된다.

 

그는 이전 세 번째 기소까지는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아 수감 및 머그 샷 사진 등의 절차를 피해 갔다. 하지만 구치소 운영을 책임지는 풀턴카운티 보안관사무실 측은 트럼프 전 대통령도 다른 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머그 샷을 촬영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미국은 정보자유법에 따라 범죄의 종류나 피의자 국적에 관계 없이 머그 샷을 촬영 및 공개하는데 반해 한국은 피의자가 머그 샷 촬영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 캐나다에서는 범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머그 샷이 공개되는 경우가 드물다.

 

 머그 샷은 체포된 피의자를 촬영한 사진을 뜻하는 은어이다. 컵의 일종인 머그(Mug)란 말이 18세기에 얼굴의 은어로 쓰여진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미국은 인권, 자유, 권리 등 개인의 신상보호에 앞서가는 나라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머그 샷 자체만 보면 한국이나 캐나다에 비해 덜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죄수번호 “P 01135809”, 생년월일 1946년 6월16일, 올해 78세인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부동산사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TV쇼 진행자, 영화 출연 등으로 미국인들에게 인지도 높은 유명인사였다. 2016년 미 대선 당시의 인기몰이는 도덕성을 무시해도 경제력만 챙기면 상관없다는 신보수주의 추세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대선 구호는 2016년 대선을 기점으로 세력이 더욱 커진 백인우월주의단체KKK(Ku Klux Klan), 네오나치(Neo Nazi), 대안우파(Alternative Right) 등에 트럼프를 우상과 같은 존재로 만들게 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머그 샷을 바이든 정부의 선거개입 및 정치 탄압의 결과로 포장 하면서 2024년 대선 승리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 정치자금 기부를 독려하고 티셔츠 등 상품판매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의 대선캠프는 조지아주 폴턴 카운티를 떠나 뉴저지로 돌아가던 중 웹사이트 X(전에 트위터)를 통해 “선거개입,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글과 함께 홈페이지 주소를 올려 선거 홍보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에 의하면 트럼프의 며느리인 리라 트럼프는 “머그 샷이 트럼프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언급하며 트럼프 지지자들은 머그 샷으로 포스터를 만들고 방에 붙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첫 번째로 형사 기소를 당한 것은 지난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직 포르노 배우 스토미 다니엘에게 그녀의 폭로를 무마할 목적으로 13만 달러를 주었다는 혐의다. 재판은 뉴욕주에서 열릴 예정이다.

두 번째 형사 기소는 마이애미 연방법원이다. 그가 플로리다주에 있는 사저에 기밀 문건을 불법으로 보관한 혐의이다.

세 번째 기소는 워싱턴 DC 연방법원 출석이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을 뒤집기 위해 자신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주장을 되풀이 함으로써 그것이 불씨가 되어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미 국회의사당을 습격, 점거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혐의다.

 

금년 8월 초, 트럼프는 조지아주에서 네 번째 형사기소를 당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 당시 조지아주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현 미 대통령 바이든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하게 된다. 그 당시의 선거 결과를 뒤집고자 개입한 혐의다.

그는 지난 8월24일 조지아주 폴턴 카운티의 구치소에 도착해 머그샷을 포함한 체포절차를 밟은 뒤 2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곧 풀려나게 된다.(소요시간 20분 가량)

 

 보통 서민들에게는 머그 샷을 찍힌다는 것 자체가 공포이다. 비롯 죄가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얼굴이 뉴스미디어에 공개되었다고 상상해보라. 하지만 트럼프 미 전 대통령의 머그 샷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일의 정치쇼를 보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그와 그의 선거 전략팀은 이 에피소드를 정치적인 선전도구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잔뜩 화가 난 악동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노려보는 미국 전 대통령의 머그 샷은 어떤 정치적인 이유를 붙인다 해도 정녕 비극의 탄생이다. 그런데, 그 리얼리티 쇼가 트럼프에게 가면 희극이 된다. 그 코미디 쇼의 1인3역 주인공, 감독, 제작은 수인번호 "P01135809"의 제 45대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이다. (2023년 8월27일)

 

*참고: 미국은 기소를 하는 경우 Grand Jury(대배심원) 제도가 있어 최소 16명, 최대 23명으로 구성된다. 대배심원은 평결을 하는 것이 아닌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며,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결 결정을 원칙으로 한다. 대배심의 심의 과정은 비밀로 진행되며 판사의 참여 없이 검사에 의해 진행된다.(세계에서 미국과 아프리카의 리베리아에서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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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4
비극의 탄생(5)-아편전쟁

                 
 "클레오 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파스칼-

 

 만약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100년 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면 전혀 관계가 없는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우연한 사건의 점철이라 할 수 있다. 

 

클레오 파트라의 코의 비유는 역사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는  ‘우연사관’의 대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3일 스페인을 떠나 그 해 10월12일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상륙했다. 그는 기존의 개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다른 대륙, 인도나 중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항해 목적은 향로와 금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자극 받아 대항해시대를 열게 해 준 또 다른 탐험가가 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이다. 그는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에 의해 일본에 총이 전달되었는데, 그 총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해서 일명 ‘조총’이라 불리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총을 입수하게 된 일본은 이를 대량생산하면서 대규모 조총부대를 갖추게 된다. 그렇게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했다.

 

 아편전쟁은 청나라와 대영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전쟁에서 청나라가 완패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서세동점’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청나라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국력이 막강할 때였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된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었고 인도마저 점령하게 되었다. 이어서 영국은 중국에도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통상을 요구하게 된다.
 처음에는 중국이 거절하였으나 줄기찬 요구에 굴복하여 마지 못해 한 곳만을 개항하게 되는데 이곳이 ‘광동’이다. 

 

당시 무역현황을 보면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였으나 중국인들은 미개한 나라 상품은 구입할 게 없다 하면서 영국으로부터 오는 수입제품을 사려 하지 않았다. 당시의 영국은 차를 마시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는데 중국은 차를 수출하는 대가로 은만을 징수했다.
따라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지불하여야만 하였고 이는 심각한 무역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무역적자를 보완하기 위하여 등장하게 되는 품목이 아편이었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목적인 중국의 체력과 국력을 약화시켜 침략의 빌미를 잡게 된다.
 서세동점,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밀려드는 서구세력의 위세와 열강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독 극동에서 일본만은 오히려 서구의 세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일본인 그들 자신도 스스로 동양의 영국이라 자처하며 이웃인 한국과 중국을 폄하하며 종국에는 침략까지 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열강세력도 아세아의 국가들을 평가할 때 조선은 해 뜨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둔의 나라, 중국을 잠자는 호랑이라 표현하는 반면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 차별적인 표현을 쓰게 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후, 이에 자극을 받은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데 성공하며 일본에 조총을 비롯하여 서양의 문물을 전파하게 된다. 그후,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된 일본은 콜럼버스의 망령이 되어 세계역사를 바꾸게 되었다. 
 아편은 양귀비로 만들어지는 마약의 일종이다. 의약적인 치료와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나 모르핀이나 코카인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아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마약류가 그렇듯 중독 때문이다.

 

 결국, 마약인 아편은 습관성이 되고 만성 중독증을 앓게 하기 때문에 내구성이 생겨 점차 다량을 투입하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다량의 아편을 원하게 되고 종국에는 목숨을 잃게 된다.

 

 19세기 서방세력에 의해 낙후된 대륙을 강탈하기 위하여 거행되었던 일명 ‘아편전쟁’은 제3개발지역인 후진국가들에서 생산 재배, 제조되어 이제는 서방국가의 비공식적 수입원이 되어 가고 있다. 그곳에서 생산된 마약성분의 환각제들은 그들을 침략했던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력의 열강으로 밀수출되어서 구문명을 타락시키고 있다.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서글픈 아편전쟁의 현대판 비극의 탄생이다. (2023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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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국정을 맡는 지도자의 명예는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것에서 나온다" –막스 베버-

 

 한국동란, 6.25전쟁이 터졌을 때 존 무초는 주한미국대사였다. 그는 1950년 6월25일 아침 8시경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 북한군이 삼팔선을 넘어 침략해 왔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그날 오전 9시경 미국 국무부에 보고를 하고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게 된다.

 

 무초 대사의 증언!

 이승만 대통령: 방금 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 모두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했어요.

 무초 대사: 한국군은 열세에서도 잘 싸우고 있습니다. 비록 밀리고는 있으나 부대 단위로 항복한 곳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이곳 서울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선의 부대가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져 무너지게 됩니다. 각하께서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

 이 대통령: 내가 잡혀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한 시간쯤 설득하다 지친 무초 대사는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후 일어났다 한다.

 1971년 1월 은퇴 중이던 무초 대사는 위의 비화를 소개하며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이승만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국과 유엔의 개입 근거를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관료들은 몰래 대전으로 피난을 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한다는 거짓 방송을 하여 국민을 또 기만하게 된다. 게다가 800여 명이 건너고 있던 한강대교를 폭파하여 무고한 국민들이 억울한 떼죽음을 당하게 만들었다.

 

 서울 탈환 후 정부는 대령 한 명을 희생물로 삼아 사형시켰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6.25전쟁 발발 348년 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선조는 울며불며 가로막는 백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을 간다. 평양마저 위험에 빠지게 되자 평양을 사수하겠다고 백성을 안심시켜 놓고 다시 의주로 도망갔다. 그때도 왕이나 조정 대신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를 담은 팻말을 뒀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의미이다. 원래 영어 ‘buck’은 수사슴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미국 개척 당시 사용하던 칼의 손잡이를 수사슴 뿔로 만들었는데 카드게임 때 사슴뿔칼을 넘겨주는 전통에서 책임이란 뜻이 생겼다 한다.(영어로 ‘Pass the buck’이라 하면 책임을 전가한다는 뜻이 된다.)

 

평상시에 잘 쓰이는 문구가 아닌데 근래 들어 온타리오주 덕 포드 수상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다.

 포드 수상은 지난 8월9일 보니 라이식 감사원장으로부터 그린벨트 해제를 둘러싼 의혹과 관련하여 이를 재검토하라는 권고를 받은 직후, 이 시점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다 하며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Buck stops with me)하였다. 그린벨트 개발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온타리오 주정부 포드 수상은 지난 11월 주택공급난 해소를 위해 7,400에이커의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10년 안에 150만 채의 주택을 건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토론토스타’ 등 언론매체에서 일부 건설업자에게 발표 전 특혜가 주어져 구입되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금년 1월 감사원 감사에 들어가게 된다.

 

 지난 8월9일 발표된 라이식 감사원장의 감사보고의 하이라이트 요약.

 “온주 정부 그린벨트 발표 이전인 2022년 9월14일, 현 주택장관이며 지방자치제장관인 클락 장관의 비서실장인 라이언 아마토(현재 이탈리아에서 여행 중)는 건설업체(BILD)가 주관하는 갈라 디너에 참석하게 된다. 그 곳에서 주택장관의 비서실장은 두 건설업자인 실비오 가스페리와 마이클 라이스로부터 그린벨트 토지를 불하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봉투를 전달받는다.

 아마토 실장은 일부 건설업자가 주정부 그린벨트 해제 발표 전 7,400에이커의 92%인 6,900에이커가량의 토지를 구입하여 83억 달러(8.28 Billion) 규모의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특혜를 준 혐의다. 그 처리과정에서 정상적인 절차와 조사를 무시한 채 그의 선에서 해결한 혐의 또한 받고 있다.

 

 그린벨트 해제와 관련하여 친환경 및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득이 안 된다는 라이식 감사원장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온주 정부는 주택난의 시급한 해결을 내세워 현시점에선 감사원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이 난관도 무난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으며 그런 시도를 이미 시작하였다.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일을 맞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 외에도 그 맡은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 때 비난이나 파면 같은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기본적 자세를 의미하게 된다. 특히 공직자의 과오는 본인의 신상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심각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최소한 주택장관 클락은 해임되어야 한다.

2023년 8월 13일.

 

 참고:

1)최근 여론조사 결과, 그린벨트 해제에 부정이 있다(54%) 부정이 없다(27%) 모르겠다(19%)

2) 아마토 비서실장 증언: 건설업자 갈라 디너에서 두 명의 건축업자(실비오 가스페리, 마이클 라이스)가 그에게 접근해 그린벨트에서 토지를 분양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봉투를 주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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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비극의 탄생(4)- 거제도 포로수용소-

 

 1952년,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포로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 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종해 폭동을 유발시킨 데 있었다.

 

 1952년 5월6일 제 76 친공포로 막사의 포로들은 경비병에 의한 폭행과 금품수색을 구실로 포로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수용소장 돗드 준장은 면담에 응하게 된다.

 5월 7일 오후에 돗드 장군이 제 76 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 중에 일단의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수용소장이 포로에게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돗드 준장은 인질로 잡힌 지 사흘 만인 5월10일 밤 10시에 풀려나게 된다. 석방 후 돗드 준장의 진술은 이러했다.

 "나는 5월7일 아침, 제 75 포로수용소 대변인으로부터 한 서신을 받았고, 그 서신 내용은 나와의 회견 요청이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 회견 장소인 76 포로수용소 입구로 갔다. 그리고 수용소의 문을 열고 그들의 대표자와 대변인을 문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들은 이 회담에서도 종전과 같이 식량과 피복, 약품 등 기타 물자의 중량을 요구했고(~~~중략), 3시 15분쯤 나는 회담을 끝내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20여 명의 포로 지도자들은 나를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나의 몸을 수색하고 소지품을 빼앗았다."

 

 돗드 장군과 동행했던 레이먼 중령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출입문 기둥에 매달려 버티는 바람에 납치는 모면했다.

 그런데 돗드 장군 및 레이먼 중령에게 달려들었던 이른바 납치범들은 포로 지도자들이 아니라 오물을 버리고 돌아오던 오물처리반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납치를 위해 치밀히 계획하였으며 오물처리반원들도 사전에 은밀히 배치시켜 놓았었다.

 

 포로들이 돗드 장군을 인질로 잡은 이유는 그동안 포로수용소 내에서 있었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이 유엔에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로 돗드 준장은 거제포로수용소 소장에서 해임되었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준장에서 대령으로 계급강등과 함께 강제전역 되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어 1951년 12월 말까지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라 할 수 있다면 1951년 12월부터 1953년 7월까지는 포로를 둘러싼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한국동란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이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휴전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다.

 

 허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중공군 100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태에서 휴전을 수락한다는 것은 한국인에 대한 사형집행이라 하며 휴전을 결사 반대하게 된다. 실질적으로 가장 민감하여야 할 영토문제인 군사분계선 협상은 "휴전협정" 조인 시 접촉선으로 일찍 합의에 도달한 상태라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난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발적 송환 원칙’을 주장한 반면 공산 측은 무조건 ‘강제적 송환 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었던 포로송환 문제는 결국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아 결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 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한 이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하게 된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명령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부평 등 7곳 장소의 반공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여 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여태까지 진행하여 왔던 휴전회담이 물거품 될 수 있는 이러한 휴전무마 사건은 휴전을 고대하던 미국정부를 당황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를 달래기 위한 방책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전후 복구사업에 많은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천백이십구일,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27일에 잔인한 한반도의 전쟁은 정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전쟁의 목적은 무조건 승리에 있다. 적의 취약점을 공격하여 침략자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함으로서 전쟁이라는 도박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승리 없는 휴전과 반공포로가 존재하였던 진실은 불편한 비극의 탄생이다. 하지만 잊지 마라!  반공포로가 없이는 반공포로 석방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비극과 희극은 현재라는 문의 안과 밖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2023년 8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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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3
비극의 탄생(3) -1.4후퇴와 전송가(Battle Hymn)

 

나 자신이 이 인류의 한 부분이니/친구의 죽음은 곧 나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마라/그것은 곧 너 자신을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존 던’(John Donn)

 

 영화 ‘전송가’는 1956년 미국에서 제작됐다. 6.25전쟁에 참전했고,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딘 헤스’ 대령의 자서전 ‘전송가’를 원작으로 했다. 
’더글라스 실크’가 감독인 이 영화는 주인공 헤스 대령 역에 ‘록 허드슨’이 출연하여 무게를 더하였다. 그러나 전쟁 직후 한국배우들을 찾기 어려워 인도 배우 ’안나 카스피에’(후에 마론 브란도와 결혼)가 한국여인 역을 맡았다. 한국 할아버지 역에는 안창호씨의 아들 안 필립이 출연하였다. 
그 다음해 2월,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때 일제히 개봉되었던 영화의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전까지 미국 오하이오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였다.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듣고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된다. 2차 대전 중 유럽전선에 투입된 헤스는 작전 도중 실수로 한 고아원을 폭격하는 바람에 37명의 고아들과 민간인을 죽이는 사고를 저지르게 된다.

 

전쟁 후, 속죄의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오하이오주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 공군으로 자원 입대한다. 이번에는 한국공군 조종사들에게 무스탕기의 조종을 가르치는 요원과 고문으로 임명을 받고 제6146 기지의 부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군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추수감사절을 맞았다. 감사절 파티가 한창일 때 막사에 몰래 들어온 고아들이 버린 음식을 훔쳐 먹는 것을 보고는 고아들을 돌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부대 주변에 있는 고아들을 한국여인 안순양(안나 카스피에 역)과 공예가 노인(필립 안 역)의 도움을 받아 보호하게 된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들을 궤멸시키며 질풍같이 돌진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1월 수십 만의 복병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한반도의 찬바람 속에 도처에서 격파당하며 무참히 피를 흘리던 연합군은 직전상 1.4후퇴를 결정했다.

 

 폭풍우가 내리던 밤,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벌어지고 헤스 대령은 400여 명의 아이들을 신속히 피신시키기 위해 운송용 비행기나 배를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비행기나 배가 없는 상황으로 위험한 피난을 이어가던 중, 극적으로 미 공군 수송기가 도착한다. 아이들이 수송기에 나뉘어 오르고, 무사히 제주도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궤멸 직전의 북한은 스탈린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6.25전쟁이 제3차 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고, 사실상 중공 혼자 북한을 지원한 결과가 되었다.
1951년 1월 초, 중공군은 주 공격방향을 서울에 두고 압박해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 공산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한 당시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서울이 중공군의 폭격권에 들기 전에 연합군 주력부대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서울에서 60Km 남쪽의 오산까지, 동부전선은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하였다.

 

 따라서, 한국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951년 1월4일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된다. 
그러나 이번 후퇴는 개전 초기와는 달리 유엔군의 작전 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로부터 2개월 후인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된다.

 

 목사이며 시인인 17세기 작가 ‘존 던’이 살던 시대에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다. 그 마을에서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교회의 종을 울리게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마저 전염병에 걸렸다. 이때 병석에서 쓴 시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고, 헤밍웨이가 그의 소설 명제로 인용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 남자 주인공 ‘로버트 조던’(게리 쿠퍼 역)과 여 주인공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먼 역)의 마지막 이별 장면은 슬픔과 동시에 뭉클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가끔 슬픈 영화를 볼 때 눈물을 흘리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가슴에 느끼게 된다.

 

 니체는 그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과 희극을 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관객으로 머무르는 법을 배우라고 명령한다. 관객으로 머무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통하는 작은 문과 피난처를 갖게 된다 하였다.(알듯 모를듯 어려운 말이지만, 가끔 우리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승화된 감회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전송가의 주인공 ‘헤스' 대령은 2차대전 중 오폭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로 독일의 죄 없는 어린 아들을 죽게 하였다. 비극의 탄생이다. 그러나 그 계기는 1.4후퇴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때, 고아들을 그냥 놓아두면 모두가 희생 당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노력한 끝에 수송기를 공급받아 4백여 명의 어린아이들을 구하게 된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후에 쓴 자서전과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전부를 자신이 세운 고아원에 기부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희생은 비극의 탄생을 희극의 탄생이 되게 하였다.

 

  지난 7월27일은 휴전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1년 6월25일 북한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73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끝난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공식적으로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비극의 탄생이다. 니체는 명령한다. 비극을 희극으로 구하라고!  (2023년 7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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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
2023-07-20
비극의 탄생(2) -던다스 스트리트(Dundas St.)

 

 고대인들은 지구가 평평한 원반과 같으며, 하늘은 구리로 만든 큰 종과 같은 모양으로 육지를 덮고 있고, 해는 동쪽바다에서 올라와 서쪽바다로 가라앉으며, 그 너머에 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하여튼, ‘바다 너머 저 끝이 세상의 끝이다. 저 너머로 가면 못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고대 유럽문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성장해왔다. 초기의 배는 선원들이 노를 저어서 가는 크기가 작은 형태였다. 노를 저어서 가는 배로는 육지로부터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지중해를 벗어나서 대서양의 넓은 바다로 나가볼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저 너머에 죽음의 벼랑 땅끝이 있기 때문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기존의 개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콜롬버스, 그는 이태리 제노바공화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해양탐험가이다. 
 지도제작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지구는 둥굴고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다른 대륙, 인도나 중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1492년 8월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 "가디스"를 떠나 대서양을 서쪽방향으로 항해하여 10월12일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는 오랜 기간 유럽인들에게는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되어 왔다. 따라서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대륙에 터전을 일군 신생국가들은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콜롬버스의 항해에 관한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이게 된다. 
 하지만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학살자요, 침략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광대한 아메리카대륙을 개간, 개척, 개발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동원에는 인륜을 무시한 잔인한 노예제도가 도입됐다. 콜롬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은 서글픈 "조종"의 서곡이었다.  
 

 토론토시를 동서남북으로 가르는 블루어 스트리트와 영 스트리트 외에도 던다스 스트리트는 토론토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거리이름이다. 토론토시 동쪽 끝에 있는 킹스턴 로드에서 시작해 427하이웨이를 지나 미시사가시까지 장장 23KM를 잇는다. 

 

 2년 전, 그 거리이름이 문제가 되어 시의회에서 호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던다스 스트리트는 174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대영제국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한 ‘헨리 던다스’경의 이름을 경칭하기 위하여 1793년 당시 ‘심코’ 총독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는 미합중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영제국의 영향권 밖에 있던 시대로 노예판매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던 시기다. 허나 영국본토에서는 노예판매제도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일던 때였다.

 

 당시 영국 내각의 중책을 맡고 있던 헨리 던다스는 표면상으로는 노예트레이드를 반대하는 것에 찬성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가능한 한 노예판매폐지를 지연시키려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그와 연분이 있는 많은 지인들이 영국령 캐리비안에서 거대한 규모의 사탕수수밭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의 노동자들은 흑인노예들이었는데 가능한 한 노예트레이드 폐지를 지연시킴으로써 설사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기존 노예들이 자손을 낳게 함으로서 대물린 노예를 유지하는데 시간을 벌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미 토론토시의회에서 던다스 스트리트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이지만 그에 대한 반대의견이 지난 시장보궐선거에서 뜨거운 감자로서 떠올랐었다. 
 토론토시는 이미 극심한 교통난과 주택부족, 치안불안 등 당장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첩첩산중이다. 
 

 

 그 외에도 가장 큰 문제는 거리이름 변경에 드는 비용이다. 던다스 거리 주위로는 대략 9만 7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4,500개의 상업용 비즈니스가 있다. 그 중 600여 개는 던다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단지 거리이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비용이 860만 달러라고 한다. 그 정도의 비용을 들일 바에는 차라리 흑인커뮤니티나 비즈니스에 그만큼 투자하자는 의견도 있다.
 

2019년 6월21일 몬트리올시는 대영제국장군 ‘제프리 암허스트’(Jeffery Amherst)의 이름을 경칭하기 위하여 지어진 거리이름 ‘암허스트’를 ‘아타테컨’(Atateken)으로 변경하였다. 모우학(Mohawk) 인디언어로 형제, 자매라는 뜻이다. 
 

 

 제프리 암허스트 장군은 1760년 영불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프랑스인에게 호의적이였던 인디언의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해 천연두에 전염된 담요를 인디안들에게 공급한 장군으로서 현대 세균전쟁을 18세기에 이미 이용했다. 
 860만 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던다스가 인종적인 편견으로 그의 생애동안 노예시장에서 한 짓을 염두에 둔다면, 그에 의해서 상처받은 흑인노예들과 그 후손들을 생각한다면 그 돈의 액수는 절대 크다 할 수 없다.

 

  잊지말라! 식민지주의자들은 지신들의 행동이 항상 옳다고 여겨서 노예를 부리고 사고 파는 것을 그들의 특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현재에도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로 남아 있다.
 던다스 거리이름은 변경되어야 한다. 비극의 탄생은 희극으로 막이 내려져야 한다. (2023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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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chul
kwang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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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3
비극의 탄생, 제 2의 육이오-1950년 11월-

 

 

 “은둔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 korea)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목사 윌리엄 크리프스가 영어로 쓴 한국에 관한 역사책 이름이다.

 그는 1870년경 일본에 건너가 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연구에 몰두 하던 중 일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고대로부터 일본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한국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책을 썼다.

 

 마음에 안 들지만 또 다른 구절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 방식 모두 일본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는 관념에서 나온 대조적 발상이다. 따라서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 당시 19세기말 외국인에 비친 이 구절들은 긍정적인 명분 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의 관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평화만이 진리라고 믿어온 한민족, 그래서 5천년 동안 다른 나라를 거의 침략해 본 적이 없는 나라에게는 전쟁은 듣기 싫은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쟁은 우리를 끌어들인다.

2 0세기 중반 1950년 6월25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새벽 기습공격으로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버린다. 그날은 바로 일요일이었다. 종교인들은 교회로, 젊은 남녀들은 야외로, 일부 군인들은 휴가 차 고향으로 내려갔던 그날 한국 민족은 되돌아갈 수 없는 비극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유엔은 1945년 10월24일,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만든 국제기구이다. 자유, 평화, 번영을 상징하는 이러한 청백색의 유엔기가 전쟁터의 포화 속에 휘말려 들기는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그전 1947년 9월17일, 미국은 한국의 자주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한국문제’라는 안건을 제 2차 유엔총회에 제기했다. 당시 미국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발칸반도에서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야심을 보고도 소련을 우방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미국의 안일한 도의적 책임은 소련의 계획대로 김일성을 앞세운 6.25 기습 남침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유엔 사무총딜 ‘트리그브 리’는 한국전이 터진 6월25일, 바로 그날 유엔 한국 대표였던 장면 박사와 미국대표 오스틴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촌각을 다투면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하게 된다. 그 결과는 찬성 9, 반대 1(유고), 결석1(소련)로 유엔의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그후에도 3차에 걸쳐 그해 7월3일 까지 이어진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의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열렸다.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만 행사해 버린다면 어떠한 결의안도 통과될 수 없었다. 한국이나 미국을 위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권모술수의 천재인 스탈린의 지배하에 있던 소련이 그런 좋은 기회를 어떤 계획도 없이 놓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소련의 유엔 대표였던 발라크는 그해 1950년 1월12일, 중국의 본토가 모택동의 중공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상 자유중국(대만)이 보유하고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 이사회의 대표권을 중공으로 넘겨야 한다는 결의안을 이사회에 제출하였다. 그러한 소련의 주장은 찬성 3, 반대 6, 기권 2로 부결됐다. 이에 격분한 소련의 발라크 대표는 이사회의 출석을 거부한다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한 후 회의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4개월 12일 만인 같은해 1950년 6월25일, 북한은 대한민국을 향해 전면 남침을 하게 된다. 6.25가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 이사회를 빈번히 여는 등 숨기쁜 움직임을 벌였으나 소련 대표는 참석치 않았다. 발라크 소련대표가 안전보장 이사회에 다시 돌아온 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1950년 8월1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불가사의 한 일이다. 당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스탈린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이요, 둘째는 일본이며 셋째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세력 재편에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만이 아니라 중공의 모택동의 문제가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요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스탈린은 한국전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공으로 하여금 결전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힘이 약화된 후에 세계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도박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볼 때 스탈린이 소련대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시키지 않은 것은 미-중공간의 전쟁을 유발시키려는 의도가 저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25 전쟁 3개월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공산군들은 괴멸하여 북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선발대는 동북쪽으로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초산까지, 서로는 압록강 하구까지 진격하였다.  따라서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은 압록강 건너까지는 진격하지 않을 것과 중국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수십만의 중국인들은 중공의 정규군이 아니라 지원병이라는 구차한 구실을 붙여 한국전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해, 1950년 11월 이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략으로 야기된 한국 동란은 비록 휴전이라 하나 73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있다.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은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한 그해 11월 한반도의 찬바람 속에 도처에서 격파당하며 무참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새로운 비극의 탄생이었다. 그때 유엔군은 일단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상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중공의 본토를 공격했어야 했다. 당시 세계의 길은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은 스스로 그 길을 포기하였다. -2023년 6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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