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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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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125. 엘 에스코레알궁의 돈 까를로(Don Carlo de El Escorial)(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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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북쪽 샤마르틴역에서 기차로 41킬로미터 서북을 향해 달려가다 엘 에스코리알 역에 내리면, 과다마라의 웅대한 산자락에 휩싸인 듯한 큰 궁전이 나타난다. ㄷ자로 앉은 큰 건물 앞뜰에 활짝 핀 라일락꽃이 보랏빛 향기로 우리를 반긴다. 수도원, 교회, 미술관, 도서관, 왕궁과 왕릉 판테온이 들어선 합스부르크왕조의 상징인 이 복합건물은, 스페인 왕 필리페 2세가 1557년에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봉헌한 엘 에스코레알의 산 로렌조 수도원이다. 산 로렌조의 축일인 8월10일에 전투를 시작하면서 수호성인인 산 로렌조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고, 승리한 후에 약속대로 21년에 걸쳐 이 수도원을 지었다. 필리페 2세는 마드리드 왕궁보다 이곳을 더 사랑했고 화려한 삶을 이곳에서 마감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1984년)인 판테온이 있는 이 건물엔 교회와 수도원과 왕궁을 잇는 회랑에 전투 및 성화를 그린 벽화가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만들어주고 있다. 루카 조르다노가 그린 교회당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로마 시스티나 교회당 천장에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생각나게 한다.

 

미술관에 어거스틴 성인의 초상화가 그의 어머니 산 모니카와 나란히 걸려 있다. 헨리 코레이가 쓴 소설,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깊은 감동과 눈물에 젖은 나머지 ‘옮긴이의 글’도 넣지 못한 기억이 난다. 다시 정리해서 출간할 때 그 소설에 나오는 가톨릭교회의 서열에 따른 인명과 지명을 자상하게 알려 주신 정의채 신부님께도 큰 인사의 말씀을 드리리라.

 

 

 

전에 책에서만 보았던 16세기 화가 한스 부록마이어의 ‘사도요한이 환상 속에 묵시를 받는 모습’을 이곳에서 볼 줄이야. 디미티아누스 로마황제의 박해로 바트모스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동굴 속에서 묵시록을 쓸 때 본 환상의 빛을 돌아다보는 모습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만레사 동굴에서 본 하늘의 빛,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둠과 탈혼의 경지에서 본 하늘의 빛처럼, 어둠 속이기에 더 환하고 강렬한 은총의 빛이었으리라.

 

그런데 톨레도에서부터 기대한 엘 그레꼬의 그림이 단 한 점뿐인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 에스코리알궁을 지을 때, 엘 그레꼬는 프레스코 벽화를 몇 점 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리페2세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점만 계약하게 된 것이 ‘성스러운 동맹의 승리’라는 중세기의 정치성을 띈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후에 그린 톨레도 대성당의 ‘예수그리스도의 붉은 옷을 벗기심’처럼 그리스도에의 뜨거운 신심과 자유로운 예술의 혼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미술관을 지나 반원형 천장에 그림이 가득한 도서관에 들어섰다. 필리페 2세 자신이 수집하고 저장한 책이 4만 권을 넘는다고 한다.

 

50미터나 되는 긴 복도에 10미터 높이의 밤색 나무장식장이 양편에 서 있다. 천장의 그림들은 이탈리안 티발디가 중세 인문과학의 일곱 분야-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그린 프레스코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도서관이 아니라, 부드러운 이성의 향기가 물씬한데, 마름모꼴의 대리석 바닥마저 모자이크그림 같아 밟기가 송구스러웠다.

 

이곳에 예수의 성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 원본이 있다는 생각이 나서 책장 앞에 가까이 가려니까, 들여다볼 수 없게 제한로프를 매놓았다. 이곳에 있는 ‘완덕의 길’ 원본은, 1562년에 개혁의 보금자리로 세운 성 요셉 수도원의 수녀들을 위해 쓴 것이고, 톨레도에 있는 원본은 재출간을 예상해서 ‘주의 기도’를 포함해 다시 쓴 것이라고 한다. 비록 이곳에 와서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당신의 천상 진리로 우리를 길러주시는’ 예수의 데레사의 기도를 마음속에 뇌이며 발을 옮겼다. 

 

 

 

작은 분수가 요정처럼 서 있는 이 수도원의 아름다운 바실리카에서, 지난 1992년에 베를린 필하모닉 유로피안 콘서트가 열렸다. 서곡 ‘운명의 힘’으로 시작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돈 까를로’를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고, 플라시도 도밍고가 돈 까를로의 노래를 아름다운 테너로 청중을 뒤흔들었다. 돈 까를로라는 주인공은 바로 이 엘 에스코리알을 지은 필리페 2세의 아들이어서 그 열기가 상상할 만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은 왕실의 이 비극적 실화는 5막으로 이어지는 1570년경의 스페인이 무대다. 

 

1막은 1568년의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 스페인의 왕자 돈 까를로가 프랑스의 공주 엘리사베타를 만나자마자 둘은 사랑에 빠진다. ‘Mio figlio!’로 두 사람의 아리아가 시작되지만 곧 슬픈 소식을 듣게 된다. 프랑스 왕이 엘리자베타 공주를 까를로의 아버지인 필리페 2세에게 출가 시키기로 허락했다는 것. 둘은 절망의 아리아를 부른다.

 

2막에 돈 까를로는 플랑데르로 망명할 결심을 하고, 친구 로드리고에게 이젠 계비가 된 엘리자베타를 한번 만나보고 떠날 수 있게 전갈을 보낸다. 둘은 만났지만 엘리자베타는 왕비로서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돈 까를로의 애정을 거절한다. 필리페는 눈치를 채고 질투하며 혼잣말 같은 베이스로 아리아를 부른다.

 

3막은 마드리드의 왕비 궁전뜰. 돈 까를로를 짝사랑하는 에볼리 공주의 모함과 반역 음모와 폭동이 이어진다.

 

4막, 필리페2세의 거실. 왕은 수도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로 번민과 명상에 잠겨있다. 그때 종교재판관이 들어와, 돈 까를로와 로드리고의 반란음모를 알린다. 두 사람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와중에 로드리고가 돈 까를로 대신 총에 맞아 죽는다.

        

가장 인상적인 5막의 마지막 무대는 산 주스토 수도원의 달밤이다. 까를로 5세를 위해 부르는 합창이 울리고, 돈 까를로를 사랑하지만 그의 계모가 되어버린 얄궂은 운명의 엘리자베타가 돈 까를로의 조부인 까를로 5세의 봉분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 플랑드르로 망명하는 돈 까를로의 보호를 빌고 자신도 죽고 싶은 심정을 아리아로 부른다. 그때 돈 까를로가 망명길에 엘리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찾아 왔는데, 마침 부왕 필리페 2세가 들어선다. 두 사람이 밀회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돈 까를로를 그 자리에서 잡아 가두려고 하자, 무덤에서 망토를 두른 한 수도승이 나와 돈 까를로를 안전하게 도망시킨다. 왕과 종교 재판관은 그 유령이 돈 까를로를 사랑했던 할아버지인 까를로 5세의 영혼이라고 믿는다는 아리아로 막이 내린다.

 

 

 

 

오페라의 왕, 음악 애호가의 영원한 연인인 쥬세뻬 베르디가 1867년에 내놓은 이 오페라 ‘돈 까를로’는 해마다 이 슬픈 연인들을 위해 잘츠부르크 등 여러 곳에서 연주가 이어진다. 

 

돈 까를로를 위험한 지경에서 구해준 그의 조부 까를로 5세의 무덤은, 스페인 왕조의 무덤이 있는 이 엘 에스코레알 수도원 지하실의 웅장한 판테온궁 안에 자리잡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의 기도가 돈 까를로의 조부의 도움을 받게 만든 현장이다.

 

웅장한 황금장식으로 팔각천장을 뒤덮은 판테온은, 스페인의 자랑스러운 왕조들의 뼈가 묻힌 왕릉이며 화려할수록 더욱 허망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현재 왕의 조부인 알퐁소 13세까지의 유골이 지하실 벽에 차곡차곡 큰 서랍 속에 안치되어있다. 

필리페 2세가 말년에 마드리드에서 여러 날 걸려 타고 왔다는 붉은 꽃가마를 보면 판테온의 화려함의 극치와 더불어 죽음을 나르는 상여가마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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