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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의 기획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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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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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3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꿈꾸는 아이오나 섬과 콜롬바 성인(상)



에든버러에서 하일랜드의 윌리엄 포트까지 멋진 기차여행을 하리라 마음 설레었는데, 전날 확인해보니 산곡의 암반사고로 기차통행이 두절이란다. 그 덕분에 하일랜드의 첩첩산중을 아슬아슬하게 잘 감상하면서 버스를 타고 오반에 내렸다. 그곳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아침에 배로 뮬섬에 가서 다시 아이오나로 가는 페리를 타고 45분을 더 항해했다.
 이렇게 외지고 별 볼일 없는 아이오나 섬(Iona Island)이 성지로 순례자의 기도가 그치지 않는 것은, 콜롬바 성인(521~597) 덕분이다. 바람 거센 황량한 아이오나 섬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의 임무를 다한 콜롬바는 아일랜드의 도네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을 받고 수도원 운동을 폈던 그는 주후 563년에 첫 순례의 길에 오른다. 예수님처럼 12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자신이 옮겨 쓴 시편성경을 옆에 끼고, 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아이오나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 세운 수도원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기독교와 켈트 수도원을 전파하는 중심지가 됐다. 

 


 하늘과 땅 사이가 가장 가깝다는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 아이오나 섬은 푸른 바다의 물결과 하늘의 구름마저 같은 색이어서 뭍에 서 있어도 파도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섬 한가운데 세운 세인트 마틴의 켈트 십자가 밑에 ‘치유의 샘‘ 이라 부르던 신성한 샘(Sacred Well)가에 서서 바라보면, 이 섬은 온통 영혼의 샘을 길어 올릴 작정을 한 듯이 느껴진다.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형국을 한 아이오나 섬, 히브리어로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아이오나 섬은 샬롬-평화 그 자체다. 온화하면서도 로크네스의 괴물을 쫓아버릴 정도로 용감했던 콜롬바. 그의 별명인 ‘그리스도교회의 비둘기’가 머물던 이 섬은 마치 콜롬바의 영혼의 성 같다. 
각지에 복음을 전파하고 아이오나 섬에 다시 돌아온 콜롬바는 말년의 30년을 이 섬에서 명상생활과 수도원 활동 중 597년경,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운 수도원 건물은 그 후 거의 무너졌다. 
1938년에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 장로교 목사인 조지 맥리오드가 피폐한 수도원을 재건하면서 초교파 모임인 아이오나 공동체를 조직하여 콜롬바 성인의 뜻을 이어 그리스도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이왕이면 성 콜롬바 호텔에서 지내고 싶었는데, 이곳은 일 년 전부터 예약해야 한다기에 그 대신 순교자 핀리 로스 호텔에 이틀 묵었다. 중세기 이후로 주민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인구는 100명 안팎이란다. 콜롬바 성인이 병이 들어 몹시 아파하고 있을 때 하얀 말이 찾아와 위로의 눈물을 흘렸다는데, 지금은 인구보다 더 많은 얼룩소와 검은 송아지만 어딜 가나 한가롭게 눈에 띄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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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로크네스의 괴물 네시

 

인버네스 성에서 플로라와 치셤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를 탄 우리 부부는, 로크네스를 따라 남쪽 끝에 호수를 향해 서 있는 어콰트 성채(Urquhart Castle)에서 내렸다. 호수로 걸어 내려가는 둑방길엔 하얀 찔레꽃과 노란 개나리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에서 인버네스와 포트윌리엄 사이에 있는 좁고 긴 단층계곡엔 3개의 호수가 잇대어 있다. 로키, 오이크, 로크네스. 이 중에 제일 유명한 호수가 러크 혹은 네시라는 괴물이 물속에 살고 있다는 깊은 호수인 로크네스다.

 맑은 날씨인데도 호수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짙푸른 정적에 잠겨있다. 호수 앞엔 특이한 구조로 지은 중세기의 고성, 어콰트 성채가 반쯤 허물어진 채 스코틀랜드 역사의 마지막 유물인 양 서 있다. 물안개가 서린 저녁이면 괴물 네시가 나올법한 분위기로.
 어콰트 성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을 이끈 윌리엄 월리스(1272-1305)가 에드워드 1세 왕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최근에 멜 깁슨이 월리스 경을 소재로 한 영화 ‘Brave Heart’에 감독과 주연을 맡아 엉겅퀴 꽃 같은 사랑과 전쟁을 실감나게 연출해서 더 알려졌다. 
 



 
월리스와 에드워드 왕과의 전투에서(1296년) 우리나라 문경새재의 관문과도 같은 이 관문은 에드워드 왕에 의해 거의 파괴됐으나, 스코틀랜드인의 손에 다시 복구되어 1359년에 로버트 치셤이 마지막 성주가 됐다. 
그러나 1692년에 영국의 윌리엄 공이 *자코바이트의 침입을 막고자 이 성을 복구하지 못하게 하는 새 법령을 만들어 반 폐허의 성채로 남아있다. (*1688년에 망명한 영국 James 2세의 지지자들)  

 

 
1707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연합왕국이 되는 서글픈 역사를 안고 있는 이 성채 앞에는, 영국군이 이 성을 향해 쏘아 올린 산같이 높은 투석기(The Trebuchet: 중세기에 사용한 성문 파괴용 투석기)가 총탄으로 썼던 축구공만한 돌덩이 탄알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치열했던 전투를 알 리가 없는 한 어린이가 아빠와 함께 무거운 돌 총알을 쏘아 올렸던 지렛대에 매달려 놀고 있다. 그 당시에 쌓아 올린 전사들의 돌무덤 탑 옆에 젊은 연인들이 주검보다 강한 사랑을 다짐하는 듯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치열한 싸움터가 이제는 스코틀랜드 젊은이들의 결혼식장이 되고 옛 상처를 보상하는 듯 큰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어디선가 ‘여보~ 유니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소리 난 곳을 올려다보았다. 허물어진 성채 망루 꼭대기까지 올라간 남편이 호숫가에 앉아있는 나를 어콰트 성채가 쨍 하도록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알았어요’ 하고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카메라를 들어 중세기의 무기인 양 그를 향해 한 샤트를 쏘아 올렸다.
 


네시의 전설은 아일랜드를 통해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콜럼바 성인의 전기를 쓴 아담난의 글에서 비롯한다.
 주후 584년경에 픽트 족의 왕이었던 말콘 왕 가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콜럼바 성인이 인버네스 성에 사는 부루드 가를 방문하기 위해 이 어콰트 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당시 이 검푸른 호수엔 시도 때도 없이 호수 위로 튀어 올라 사람을 해치는 네시라는 괴물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콜럼바의 한 제자가 호수 위의 보트를 끌어오려고 헤엄쳐 가고 있는데 네시가 돌연 호수에서 튀어 올라 괴성을 지르며 덮치려고 했다. 놀란 수도승의 외침을 듣고 콜럼바는 네시를 향해 두 손으로 십자가를 표시해 보이며 호령했다. “썩 물러서지 못해?! 그 사람 건드리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러자 괴물은 재빠르게 헤엄쳐 달아났다고 한다. 
 문제는 그 후로 계속해서 그 괴물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1933년에 런던의 한 외과의사가 이 호수 위에 떠오른 네시의 사진을 데일리 메일에 내면서 다시 이목을 끌었다. 그 후에도 그럴듯한 네시의 사진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다가 그 외과의사의 사진이 조작임이 1994년에 와서야 들통 났다. 
 그 후에도 네시를 보았다는 극성맞은 관광객들의 사진이 신문과 잡지에 오르내렸다. 2003년에 BBC 탐사팀이 음파탐지기와 위성추적장치로 600차례나 로크네스를 뒤졌으나 네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신비스런 적막감에 쌓여있는 이 호수 위로 네시가 꼭 나타날 것만 같은 야릇한 심리를 뿌리칠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이었을까. 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하나는 놀랍게도 런던의 외과의사가 조작한 사진과 아주 비슷하게 나왔으니까. 
 전설 속의 네스를 아직도 찾는 사람들이 현대에 와서는 하늘을 기웃거린다. 미확인 비행물체 (Unidentified Flying Object)의 하나인 비행접시를 현대판 네스로 만들어간다. 비행접시를 가장 많이 목격한다는 케이프타운의 한 보컬그룹이 올해 들어 정부에 탄원서를 냈다. 
“제발 이 지구를 자주 방문하는 물체의 기밀문서를 정부가 해제해준다면, 더 이상 UFO가 실체가 아니란 생각을 멈출 수가 있겠다”고. 그 기밀문서가 있기나 한 것인지? 이 UFO현상을 믿는 사람들은 의외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란다.
 사도 바울이나 콜롬바 성인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음’의 귀함을 수 없이 가르쳐 주었건만, 이따금 나타났다 사라지는 비행접시에 왜 쓸데없이 마음을 빼앗기는 건지?!
 우리는 성벽 꼭대기에 윌리엄 월리스가 꽂아놓았을 것 같은 스코틀랜드의 푸른 깃발(성 앤드루의 하얀 십자가를 그린)이 여전히 스산한 로크네스의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콜롬바 성인이 살았던 아일랜드의 이오나 성지를 향해 다시 나그네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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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9
(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인버네스 성의 플로라

 

우리 부부가 하일랜드의 스카치위스키 양조장을 구경하고, 영국여왕이 아름다운 도시로 칭찬한 인버네스 마을에 들른 것은 우리들의 친구인 데릭 치셤 박사 때문이었다.

 그의 가문의 한 친척이 전통의상인 킬트 맞춤과 기념품을 파는 옛날상점을 구경하고 오라는 거였다. 그와 결혼해서 토론토에 살고 있는 한국인 화가 김지명씨는 신혼여행을 겸해서 시댁 일가를 방문하려고 이곳에 왔단다.

 

 

동산의 바람이 어찌나 센지 보리밭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다가 가을바람에 넘어졌다고 한다. 인버네스 마을은 하일랜드의 중심도시다. 마을의 랜드마크인 인버네스 성을 찾았는데 플로라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동상 발치엔 그 당시 자코바이트를 도우며 산속을 함께 달렸던 콜리가 꼬리를 흔들며 서 있다. 플로라의 이야기는 월터 스콧 경의 역사책에서 더 유명해졌다.

 1745년에 자코바이트(망명한 제임스2세 지지자들을 일컫는 라틴어)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탈환한 찰스 왕자, 버니는 컬로든 전투에 패하고 컴벌랜드 장군에게 쫓긴다. 그때 플로라 맥도널드는 어머니를 설득해서 토벌대장인 계부 알렉산더 맥도널드경이 찰스를 석 달 동안 숲 속에 숨겨주게 했고, 계부로부터 3명의 통행증과 스카이 섬에 이르는 도강증을 받아낸다.

여자 하인으로 변장한 찰스 왕자와 남복을 입은 플로라와 하녀, 이렇게 세 사람은 여섯 명의 선원이 이끄는 배로 여러 번의 위기를 거쳐 스카이 섬에 닿는다. 그 해안에서 3주 가량 머문 다음 찰스 왕자가 프랑스 함대에 올라 프랑스로 탈주하게 도와준다. 목에 상금이 걸려있는 찰스를 무사히 망명시킨 하일랜드 사람들의 정신과 함께 플로라의 이름도 역사에 새겨진다.

 

 

 찰스를 떠나보낸 스카이 섬 일대는 하일랜드에서도 영국왕실에 불만이 많은 클랜들이 살았던 황량한 지역이다. 찰스가 떠나면서 고마운 악수인사를 받은 휴치셤은 그 성은(?)을 입은 오른손과 팔에 흰 천을 감고 평생을 보냈다고, 에든버러에서 그를 만나 친구가 된 월터 스콧 경이 ‘스코트인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썼다. 플로라의 동상이 서 있는 네스강 하구의 인버네스 성은 원래 기원전 픽트인이 쌓은 성인데 1875년경에 벽돌집으로 개조하고 지금은 지방재판소가 돼있다.

 

 

성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경찰호송차가 한 대 들어오더니 재판 받을 미결수들을 성 안에 들여보낸다. 그들을 호송한 젊은 경찰 팀 남녀가 우리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수갑을 만져보라고 내밀기에 팔목 대신 손가락만 하나 끼고 사진을 찍었다. 명랑한 경찰관과 무슨 인연인지 다음날 아침에 우리와 같은 호텔에서 또 만나 반가웠다.

 스코틀랜드 특히 하일랜드를 사랑했던 월터 스콧이 남긴 일화 중에 남자가 입는 킬트(타탄(Tartan) 체크치마) 이야기가 있다. 자코바이트가 패배하면서 영국통합왕국은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킬트와 백파이프 연주를 못하게 했다. 

 1822년에 잉글랜드의 조지아 왕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을 때 월터 스콧경이 왕의 환영행사 진행을 맡았다. 그는 하일랜드 사람들의 문화를 소개하면서, 백파이프를 부는 악단이 당시에 길게 입던 킬트 모직치마를 짧은 타탄 체크치마로 개조해 입고 연주하게 했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그 전통의상에 왕이 관심을 보이면서 타탄이 다시 보급됐다. 지금도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통행사에는 남자들이 술 달린 흰 양말에 짧은 체크무늬 타탄치마를 입고 백파이프를 불며 행진한다. 

우리가 다니는 킹스웨이 세인트 자일스장로교회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온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데, 창립기념 주일이면 녹색 체크무늬의 타탄치마를 입고 나와 백파이프를 불며 향수에 젖는다.

 

 

‘전통 킬트메이커 치셤 상점’이란 간판이 있는 큰 상점 문을 밀고 들어서자, 33대째의 주인인 덩컨 치셤이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남편은 셜록 홈즈 모자를 사고, 나는 치셤 가문의 그린 체크무늬 조끼를 꼭 사고 싶었으나 맞춤만 가능하기에 치셤 가문의 여름모자만 샀다. 넓은 가게 안은 한산했다. 그의 조부가 사냥해서 걸어 놓은 박제한 뿔 달린 큰 사슴 두상이 박제된 시간의 유물처럼 보인다.  

남녀가 모두 주머니처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스포란이라는 양가죽 주머니는 에든버러의 세인트자일스 교회에서 우리에게 내밀던 스포란 헌금주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덩컨 치셤은 바로 옆집에 아들이 스페인 식당을 한다고 안내해줘 맛있는 스페인 저녁 요리와 올리브를 실컷 대접받았다. 식당은 바로 인버네스 성채 아래 있어서 인버네스 강 건너에서 바라볼 때보다 플로라 동상이 더 잘 보였다. 

 플로라는 잠시나마 목숨보다 더 아꼈던 찰스 왕자, 버니 찰리가 혹여 다시 돌아올까 손을 이마에 대고 지금도 인버네스 강 너머를 멀리 살피며 서있다. 하일랜드의 여걸 자코바이터, 플로라의 용기와 고난의 극복을 찬양하는 듯 킬트를 입은 용사들이 그 옆에서 백파이프를 부는 모습이 저녁노을에 아름답게 비쳐 왔다. 

고딕 교회의 곡선과 인버네스 강 교각의 곡선, 기둥마다 걸려있는 꽃 기둥 밑에 정겨운 옛날 빨래터가 그림처럼 어울리는 인버네스 시. 꽃보다 더 아름다운 플로라로 인해 마을의 이름을 플로라 시라고 바꾸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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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포토 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하일랜드의 스카치위스키

 

 스코틀랜드 하면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가 지은 올드랭사인의 노래와 스카치위스키. 해서 스카치위스키의 본고장인 하일랜드 투어를 빼놓을 수 없었다.

 

 

스카치위스키의 종류는 간단치 않다. 크게 네 종류로 나눈다면 단일맥아 스카치위스키(Single Malt Scotch Whisky: 한 군데에서 100% 맥아로 만든 보리위스키), 혼합맥아 위스키(Vatted Malt Whisky: 두 군데 이상의 증류소에서 만든 단일맥아를 섞어 숙성한 위스키), 혼합곡물 위스키(Blended Grain Whisky: 두 곳 이상의 증류소에서 만든 곡물위스키를 섞어 만든 제품), 단일곡물 위스키(단일맥아 위스키와 곡물위스키를 섞어 만든 것). 

 다시 말해서 한 군데에서 순수한 샘물로 맥아를 증류시켜 만든 위스키냐 혹은 두 군데 이상의 양조주를 섞어서 브랜드를 붙인 위스키냐로 나누어진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바스리갈, 밸런타인, 조니워커 등은 혼합주 브랜드 위스키임을 알고 실망했다. 우리는 단일맥아 위스키로 가장 유명한 글렌피딕보다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글렌튜렛 단일맥아 스카치위스키 투어버스를 탔다.

 에든버러에서 두 시간 거리를 버스로 대관령 넘듯 달려 올라간 하일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전쟁터였음을 보여주는 듯 황량하다. 집도 사람도 안 보이고 넓은 초원에 하얀 점 같은 양떼만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떤 신부님이 쓴 ‘양을 잘 치게!’란 글이 생각났다. 처음 부임하는 그 젊은 사제에게 주교님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 “작은 공소생활이니 자네가 가서 그 양들을 잘 치게!” 하고. 젊은 신부님이 본당에 도착하자 겨우 다섯 명의 신자가 환영한다. 그들보다 더 많은 양떼는 ‘매애~에’ 하며 더 큰소리로 환영했다. 신자를 양떼로 비유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양떼를 키우게 된 이야기였다. 들판에 하얀 점같이 많은 양떼를 보며 실감나게 떠오른 얘기다.

 하일랜드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북쪽으로 스페이강이 흐른다. 남쪽으로는 페이머스 그라우스 양조장이 있는 테이강이 보인다. 강물지형인 V형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닿은 곳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둥근 돌담 위에 날아오를 듯 앉아있는 큰 텃새그림이 든 페이머스 그라우스 양조장이 (Famous Grouse Distillery) 우리를 반겼다.

 스카치위스키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1775년부터 문을 연 페이머스 그라우스 양조장에 들어서자, 어두운 큰 공장 안에 엿기름을 증류하는 큰 둥근 참나무통에서 구수한 보리 냄새가 난다. 성미 급한 손님들은 엎어놓은 배불뚝이 술통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시음하고 있고. 우리는 참을성 있게 그 귀한 단일맥아 위스키의 역사와 제조과정을 지켜보았다.

 

먼저, 구리를 안에 입혀 거품이 일지 않게 만든 이곳 특유의 둥근 토기항아리에 밀가루 같은 엿기름을 넣어 물레 돌리듯 돌린다. 그런 다음에 그 곡물 가루를 둥글고 큰 통 속에 넣고 갈아 으깬다. 곡물을 48시간 동안 발효하면 맥주 비슷한 약한 알코올 성분으로 액체가 변화한다. 

뜨거운 기름으로 불을 지핀 가마 속에서 그 액체에 열을 가하면 알코올 기체 방울이 항아리 목까지 차오른다. 그때 밖에 있는 농축기에 옮겨 담아 식히면 그 통 안에서 제2단계의 양조가 진행된다. 

 이때의 증류주는 3종류로 나뉘는데 가운데 부분만이 위스키가 된다는 것. 이 증류주에 같은 분량의 물을 타서 불룩한 술통에 담아 적어도 6년 이상을 묵혀둔다고 한다. 이 글렌튜렛 양조장에서는 블렌딩 제조도 가능해서 풍성한 재원을 유지한다. 

 페이머스 그라우스가 그 중의 하나로 자체양조장을 가지고 있는 블렌드 위스키다. 우리는 통마다 적혀있는 제품연도를 들여다보고 난 다음에야 위스키 잔을 들어 연한 호박색 스카치를 맛보았다. 코에 스미는 향기는 강렬하고 달콤한 사과, 바나나, 무화과. 여기에 올리브향만 더한다면 이스라엘의 축복받은 나무향이 되리라. 

 

 

이렇듯 여러 단계로 힘겨운 과정을 겪어야 우리 입맛에 맞는 위스키가 탄생하는 것. 예수님이 첫 이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한 번에 변환시킨 그런 기적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위스키는 ‘생명의물’이란 뜻을 지닌 갤릭어 ‘usquebaugh’에 그 어원을 두고 그 발음이 ‘usky’가 되었고, 영국에서 ‘whisky’가 된 것. 그러나 이것은 스카치위스키, 스카치, 위스키란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아무리 뛰어난 위스키를 만들어도 ‘스카치’란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위스키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생명의 물’은 원래 연금술사의 용어이며 라틴어로 아쿠아 비태(Aqua vitae)이다. 이 양조장 안에 있는 둥근 화덕은 1529년경 연금술에서 사용하던 둥근 화덕 같이 생겼다.

 “물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유일한 실체. 그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물, 즉 현자의 유황, 그리고 혼, 기름, 메르쿠리우스와 태양, 자연의 불, 독수리, 눈물(물방울), 현자의 첫째 소재, 완전한 몸의 질료가 담겨있다”고 믿었던 중세기의 연금술사들도 이런 증류의 과정을 거쳐 돌을 금으로 변화시키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저질의 금속을 금으로 변환시키는 일보다 인간의 미숙한 기술을 넓히고 근대 화학의 선구가 됐다.

 

 

“8자루의 보릿겨로 존 카 수도승이 생명의 물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위스키의 시작을 알리는 문헌(1494년)이 있고, 5세기경에 패트릭 성인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터득한 증류주법을 아일랜드에 전수해서 스코틀랜드에 유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되자, 정부는 재원확보를 위해 양조업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겼다. 이때부터 하일랜드 산골짜기 안에 위스키 밀조업자가 생겨났다. 1823년에 영국의회가 소비세법을 개정하자 불법 증류소는 사라져가고 합법 증류소는 장려해서 현대 스카치위스키 시대의 막이 오른 것. 

 13세기에 아랍을 통해 몽골의 침략 때 들어와서 밀조하다가 우리나라 소주의 원조가 된 안동소주처럼 ‘화끈하게 취하고 깨끗하게 깨어나는 것’ 또한 스카치위스키의 특징이다.

 위스키의 향기에 더 빠지기 전에 우리는 그 큰 화덕을 벗어나 테이 강가를 산보했다. 덩켈드 커시드럴의 넓은 정원에 붉은 영산홍과 분홍빛 유도화가 이곳이 옛날 잔인한 덩켈드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임을 잊게 해주는 듯 환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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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9
포토 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

 

“위풍당당하게 뚱보 벅 멀리건은 거울과 면도를 십자로 엇갈리게 얹은 면도거품대접을 들고 나선형 층계 꼭대기에서 밖으로 나왔다. 노란 실내가운을 입고, 부드러운 아침바람에 허리띠는 풀린 채, 그는 면도대접을 높이 쳐들고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가리로다. ”

 이것은 20세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런던 유스턴 역에서 기차를 탔다. 홀리헤드 항구에 내려 아일랜드로 가는 배 ‘B(ritish)&I(reland)’에 올랐다. 풍랑에 3시간 반을 시달리며 닿은 곳이 더블린.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항구도시다.

 

 

제임스조이스박물관이 된 마텔로 탑에 들어가 나선형 층계를 한참 빙빙 돌아 올라가 밖으로 나오면 둥근 포대가 나타난다. 방금 건너 온 넓은 해협의 일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보며, 벅 멀리건이 가짜 신부 노릇을 하며 읊조리던 풍자적인 모습을 떠올린다.

 더블린 거리엔 아직도 스산한 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비를 맞으며 이 골목 저 골목 조이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담한 칼튼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여섯 시, 맑게 갠 하늘 위로 꿈속인 듯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알고 보니 어젯밤 우리가 무작정 걷다가 들어선 이 집이 조이스가 즐겨 산책하던 가디너 스트릿에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중앙우체국이 있는 오코넬 중심가에서 한 불록 뒤에 있다. 종소리가 들려온 교회는 바로 율리시즈의 주인공인 블룸의 집 근처에 있는 세인트조지 성당이었다.
 조이스가,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이 지상에서 사라져도 자신의 율리시즈(마치 더블린 지도 같은)를 보고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 말했듯이, 이 도시는 온통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한 소설가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더블린에서 태어난 제임스 조이스(1882~1932)는 청년기에 ‘Chamber Music’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담긴 시집을 냈고, 입센의 영향을 받은 희곡집 ‘Exiles’가 있다. 그리고 ‘Dubliners’ ‘A Portrait of the Artist as Young Man’ ‘Ulysses’ ‘Finnegan's Wake’ 등 네 편의 소설을 썼다. ‘Dubliners’는 그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출간을 거절당하고 영국에서 출간하는 비애를 맛보며 더블린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이탈리아, 스위스, 파리 등지에서 반생을 보내며 각국의 문체에 통달한다.

 

 

특히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Young Man)’과 ‘율리시즈(Ulysses)’ 등의 작품 속에 심리묘사의 수법으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쓴 것이 유명하다. 이 ‘의식의 흐름’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의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마음속에 흐르는 이야기를 쓰는 수법이다.

호머가 쓴 ‘오디세우스’의 십 년과 ‘율리시즈’에 나오는 더블린의 하루를 몽타주한 이야기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것. 십여 개의 언어와 새로운 문체의 시도, 신화와 상징 등 외면에 나타난 사건보다 영혼이 감지하는 내면의 아리송한 이야기들을 엮은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율리시즈 서문에 쓴 것처럼 율리시즈엔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가 감추어져 있어,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바쁘리라. 이것이 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장담하는 그의 짓궂은 외 알 안경이 떠오른다.
 율리시스 제1부에 크리스토모스(황금의 입, 그리스 웅변가이며 신부인 'St. Christomos'를 상징)라는 단속문체(ellipsis style)로 시작하는 의식의 거대한 흐름은 마지막 제18부 끝의 낱말 ‘yes'로 끝난다. 

 

 

이튿날 비가 그치자 짙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바닷가에 더블린 시의원 윌러비가 조이스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나무와 율리시즈 기념비 앞을 지나 노란 다트 레일을 타고 더블린 시내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번의 전화 끝에 제임스조이스문화센터의 켄 모나함(Ken Monagham) 원장을 만났다.

조이스 누나의 아들인 그는 우리를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라며 반겼다. 그는 이 센터의 내력과 조이스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더블린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그 열기가 대단해지자, 제임스조이스센터를 세워야겠다는 열성을 가진 친지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게 원장을 맡긴 것.

그때 데니스 마기니씨가 이 3층 건물을 센터로 희사했다. 그는 율리시즈에 나오는 멋쟁이 댄스교사인 데니스 마기니와 같은 인물이다. 이 집은 원래 식당이었고 데니스는 1층 무도회장에서 밴드마스터로 있을 때 조이스와 친한 사이였다는 것. 자기 자신이 친구의 걸작품 속에 등장한 보상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조이스와 함께 영원히 그의 이름을 남기는 멋있는 사람이다.
 이 집은 250년 된 낡은 집이어서 당장에 개축해야 하며 센터의 면모를 갖추려면 100만 파운드나 든다고 한다. E.C.커뮤니티의 한 독지가가 이미 50만 파운드를 내기로 약속했으며 나머지는 조이스와 관련된 친지들이 모금에 나섰다고 한다.

남길 역사적 안목이 있는 멋쟁이 친구임에 틀림이 없다. 삐거덕 거리는 층계가 불안해 보이는 250년 된 이 고옥은 당장 개축 공사에 들어가며, E.C.Community의 한 독지가를 비롯해서 죠이스와 관련된 친지들이 모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개축이 완성 되는 내년 6월 17일 Blooms Day(Ulysses의 주인공 Bloom의 이름을 따서 해마다 이날을 기념해왔다.)에 개원축제와 James Joyce 탄일백주년 기념행사를 연다면서 그때 우리도 꼭 참석해 달라고 말했다.

건축가인 나의 남편과 데니스가 건물의 구석구석을 조사하듯 살피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동안 나는 필요한 자료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지고 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화” 한국번역본(한국의James Joyce학회장 김종건 교수 옮김)을 건네주자 깜짝 놀라면서 고마워 했고, 번역문학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조이스의 서한집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번역하고 싶다고 했더니, 기회가 생기면 알리겠다고 하면서 우선 구스타프 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융은 율리시즈에 관한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하고, 조이스에게 율리시즈에 대한 의견을 편지로 보냈다. 율리시즈가 심리학적인 세계를 보여준 데 대한 인사, 율리시즈를 읽고 마음에 새기는 데 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율리시즈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진저리를 쳤으며, 얼마나 투덜거렸으며, 얼마나 찬탄해 마지않았는지 모릅니다. 40페이지나 되는 쉼표 없는 마지막 장은, 참으로 진실한 심리학적 열매를 열게 하는 문자의 행렬이었고요. 마귀할멈도 여성의 심리를 그렇게 잘 알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몰랐으니까요."

 나는 모나함 원장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프로이디언(Freudian)’인가 ‘융기언(Jungian)’인가? 조이스는 ‘Jungian’이었다고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이성과 합리주의 편에서 무의식의 충동을 위험시했던 프로이드 쪽보다는 그 무의식을 존중하여 자기실현의 역사로 끌어내고, 창조의 기능을 발휘하여 종교적인 심성과 원형을 찾는 개성화 과정을 돕는 융 쪽을 더 좋아하는 듯 했다. 나도 융 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조이스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더블린 거리는 나의 무의식이 실현되고, 의식이 합성되어 가는 낯설지 않고 더욱 다정한 거리가 되었다. 모든 이의 사랑을 받으며 더블린 도심을 흐르는 리피강 물처럼, 내 마음속 깊이 조이스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 흘렀다.  

특히 유명한 아버지를 둔 조이스의 딸이 유명한 애인 극작가 새뮤얼 베켓(Samuel Becket)에게 구혼을 거절당하자, 정서불안과 마음의 병을 얻어 사십 년이나 런던의 한 정신병동에서 말년을 지낸 일, 고모인 모나함씨의 어머니와 서신 왕래를 하며 고독을 달랬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마저 아파왔다. 조이스의 아들은 파리에서 관광사업을 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제임스 조이스 기념박물관이 된 마텔로 탑은 율리시즈의 산실이다. 조이스는 어렸을 때 이 근처의 마텔로 테라스 1번지에 살았다. 그의 집 맞은편 험한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성채 같은 마텔로 탑이 그의 어린 마음에 오디세우스 장군 같은 모험심을 키워주어 현대적인 신화의 인물인 율리시즈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율리시즈는 역사, 신학, 철학, 과학, 문학, 미술을 합성해 놓은 20세기의 해설자다. 오디세우스 장군의 통찰력을 지팡이 삼아 인간의 내면의 흐름을 따라 여행한 순례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조이스는 실제로 1904년 9월에 이 탑을 빌려 쓰고 있던 친구 올리버 고가티(Oliver Gogarty)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다. 고가티는 작품 제1부에 나오는 벅 멀리건 이며 스티븐 데달러스는 조이스의 대역이다. 사도시대의 순교자 스테반의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이 더블린 시대의 순교자라는 뜻이리라. 율리시즈는 1904년 6월16일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다.

더블린 사람들은 해마다 이날을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따서 ‘Bloomsday’라고 부르며 블룸이 걸어간 길을 따라 행진하며 축제를 벌인다. ‘J&J산업’이나 ‘Bloomsday’ 가게가 날로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맑았던 하늘이 다시 비를 뿌린다.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 라운지(James Joyce Lounge)에 들어가 이 해협을 다시 건네줄 B&I호를 기다리며 따끈하게 콕 쏘는 아이리시 커피를 두 잔씩이나 마셨다. 율리시즈가 사랑을 가늠해 보며 읊었던 사랑의 독백이 커피 향처럼 스민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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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 '바스의 제인 오스틴'

 

‘캔터베리이야기’에는 '바스에서 온 여인'이 나온다. ‘바스(Bath)’는 목욕탕이란 뜻이다. 즉 기원전 로마정복시대에 지은 온천장을 말한다. 런던 패딩턴 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우리는 그 중간에 “대지의 기둥”인 솔즈베리 성당에 들른 후에 바스 스 역에 내렸다.

 


야트막한 푸른 언덕에 둘러싸인 인구 8만여 명의 아담한 도시. 그 한가운데에 바스의 어원인 로마식 목욕탕(Roman Bath) 건물이 보인다. 영국에서 유일한 자연온천장이며 로마 시대 이래로 파괴와 복구를 거듭했다. 지금은 역사교육장이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넓은 온천장 물은 여전히 푸르고 뜨거운데 물속에 ‘다이빙하지 마시오’라는 표시판이 보인다. 

 로마인의 망토를 두른 광신자 같은 사람이 못가에 서서 기도를 하는지 태권도 대련을 하는지 재미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1층엔 로마시대의 풍습을 희미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하실로 내려가면 아직도 섭씨46도로 샘솟는 온천의 반달형 수로에 노란 광천이 수증기 속에 작은 폭포로 흘러넘친다. 

이 광천수는 2층 펌프룸으로 연결된다. 그곳에서 밍밍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옆방에 큰 펌프룸 식당에 가서 멋진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나게 만든다. 멈추지 않고 흘러 에이번 강으로 유턴하는 이 생명의 물줄기를 왜 구경만 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웅장한 로만 바스 문을 나서면, 광장에 고딕형 바스 사원이 높이 서 있다. 사원 앞엔 여러 개의 길 이름을 적은 팻말들이 귀여운 아네모네 꽃바구니가 매달린 가로등 위에 방향 따라 붙어있어 지도가 없어도 어디나 찾아갈 수 있다.

 이 웅장한 로만 바스보다 더 가보고 싶었던 곳은 18세기 영국의 여류문학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이 5년 동안 살던 이층집이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제인 오스틴 독서회와 2001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오스틴의 가을 축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영국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자랑하는 제인 오스틴의 집 앞엔 배우같이 생긴 문지기가 우리를 환영한다. 제인 오스틴 센터를 돋보이게 할 만큼 가장 조지아풍의 멋진 영국 문지기를 뽑는 데, 몇 백 명이 응모했다고 한다. 바스의 펌프룸에서 일하던 마샬 솔터씨가 뽑혀 하루 종일 문지기와 안내인 역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2층 거실에 들어서자 제인 오스틴의 언니 카산드라가 그린 제인의 초상화가 눈에 확 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앞에 서서 제인의 운명을 추적하듯 그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작가의 눈은 곧 영혼의 창이기에 눈 속에 온갖 사념과 감성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곱슬한 머리 위에 얹은 실내용 모자로부터 풍만한 몸매. 오스틴의 작품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마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1)’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의 패기만만하나 자신의 열정에 굴복하고 마는듯한 아름다운 이마,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1817)’에 나오는 엘리노어의 강한 자존심과 풍자적인 빈정거림이 깃든 신비스럽고 날카로운 눈매, 18세기 바스를 배경으로 쓴 ‘노생거사원(Northanger Abbey, 1817년)’의 캐더린이 호기심에 사건을 추리하는 듯 야무지게 꼭 다문 입술 등, 오스틴의 작품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모습들이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에 조금씩 곁들여져 있었다. 

 


오스틴의 친필 원고와 평론가들의 글, 그 당시 생활풍경 사진 등을 구경하고, ‘I LOVE DARCY!'라고 쓴 책꽂이 하나만 사서 선물사기에 질색인 남편 몰래 가방에 집어넣었다. ‘오만과 편견’의 영화작품에 남자 주인공 다시 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최근작품의 키라와 매튜 사진만 보여주어 실망한 보상이기도 하다. 

 목사의 딸로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바스 사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1801년에 아버지의 은퇴로 바스로 이사해서 5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지만 가정형편으로 1809년 튜턴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8년 후 병이 나자 치료와 요양 차 윈체스터로 갔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42세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윈체스터 대성당에 있는 작가묘지에 안장된다. 

 오스틴은 그의 생전엔 평범한 여성작가로 알려졌다. 20세기에 들어와 더블린의 대주교가 된 훼이틀리의 새로운 평가와 월터 스콧 경이 “이 ‘이름 없는 작가’가 새로운 사실주의전통을 여는 현대소설의 대표자가 되었다(1816 쿼털리리뷰)”고 선언했다. 올바른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제인 오스틴의 ‘서술의 기법’에 있는 것 같다. 범상치 않은 오스틴이 인간생활의 희비극을 짜임새 있는 심리묘사를 전개한 그의 서술체 문학은 그 후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 영향을 주었을 법하다.

 


 

제인 오스틴을 ‘비문의 여왕’이라 칭한 사람은 누구였나? 얼마 전까지 오스틴을 영국문학 천년사에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작가로 칭송한 BBC방송국이다. 오스틴이 발표하지 않았던 원고를 들어서 연구한 학자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그렇게 정리가 안 되어서 출판을 포기한 건 아니었을까? 언제 또 학설이 뒤집힌다 해도 나는 오스틴의 꿈 속 같은 낭만적인 사랑과 끝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말씨에 귀를 기울이리라.

 엇갈리는 작품 평가에 대한 생각을 잊게 해주는 듯 골목길에 ‘Sally Lunn’이라고 쓴 새빨간 깃발 아래 하얀 빵집 창문이 나타났다. 바스의 또 하나의 오래된 명소다. 마침 티타임이라 전통 영국 티와 유명한 샐린 런 번이라는 빵을 주문했다. 정식 메뉴보다 더 비쌌지만 우리의 피곤을 풀어주고 바스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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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5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 '캔터베리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의 도시, 캔터베리가 우리 여행 일정 속에 들어있었다. 캔터베리는 스코틀랜드가 아닌 영국 남부의 내륙지방에 있다. 에든버러의 웨이벌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런던 세인트판크라스 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대학 시절 영국문학사 시간은 언제나 진력이 났다. 그러나 14세기 초에 제프리 초서(1343~1400)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가 나오면 결석하는 학생이 줄어들었다. 14세기경까지도 영국 상류사회의 설화들은 프랑스어나 라틴어로만 쓰였다.
  그 관행을 깨뜨린 사람이 초서다. 서사시체의 설화문학을 영어로 처음 쓰기 시작한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16세기경 우리나라 광해군 시대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한글(언문)로 처음 쓴 것처럼 문학사적인 의미가 크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런던 템스 강변의 타바드 여관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성지인 캔터베리성의 대성당을 향해 가는 이야기다. 31명의 순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갈 때 1편, 올 때 1편씩 들려준다. 초서 자신도 시인으로 해설자로 또 여관주인으로 등장한다. 
기사와 그의 종자, 수녀원장과 사제, 법률가, 탁발수도사, 의사, 옥스퍼드대학생, 바스의 여자 직조공, 선원, 요리사, 방앗간 주인, 목수며 농장주인 등이 성스러운 세계와 속물근성의 성격묘사를 통해 당시 사회풍습과 교회를 풍자했다. 초서는 여관주인 호스트로 많은 무리를 캔터베리라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홀리호스트이기도 하다.

 

 
 

성내엔 ‘캔터베리 이야기’라는 극장이 있다.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 넣은 깃발이 펄럭이는 골목 안에서 초서의 옛날이야기를 매일 공연한다. 이런 퀴퀴한 옛날 얘기는 관심 밖인 남편의 소매를 잡아당겨 깜깜한 캔터베리 이야기의 굴 속을 순례했다. 
 맨 먼저 등장하는 타바드 여관 입구엔 여관주인인 초서가 수도사 복장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물론 밀랍인형으로 변신해서. 우리가 발을 옮길 적마다 만나는 주인공들이 스피커로 넋두리 하듯 이야기해주기 때문에 마치 우리도 그들과 한 패거리의 순례자가 된 기분이다. 
 용감한 기사의 이야기에 이어 바스에서 온 펑퍼짐한 중년여인의 이야기는 거룩한 순례의 길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세상사의 로맨틱한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바스에서 온 여인은 자신이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고, 결혼의 온갖 문제를 다 알고 있다고 큰소리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남편을 몇 명 두어야 한다는 내용이 없을뿐더러,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렸던 솔로몬왕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도 그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여러 명의 남편을 둔 것을 여러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학문을 배우는 것에 비유하고, 자신을 숙련공이라고 자랑한다. 동정을 지키며 순결한 인생을 사는 것은 완전무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바스의 여인과 대조적인 사제의 이야기를 ‘목사님’으로 재미있게 대입해서 쓴 류호준의 ‘옛적말씀에 닻을 내리고’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천둥과 번개 치는 날에도 스스로 심방에 나섰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동일하게 찾아갔습니다. (요즘처럼 목회상담실로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병들었거나(육신적이든지 영적이든지) 혹은 건강하거나 상관치 않고, 또한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걸어서 갔던 것입니다.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았습니다. ” 
 사제의 이야기가 끝나고 큰 장닭이 새벽을 알리며 길게 울면, 촛불이 켜 있는 제단이 나타나고 침상 위에 누워있는 베켓의 금빛 모조상이 보인다. 수녀와 여인들과 초서가 성인의 발치에서 기도하는 것이 보이면서 순례가 끝난다.
 실제로 1164년에 캔터베리대주교였던 베켓은 국왕보다 교회법을 소중히 여겨 영국 왕 헨리 2세와 대립한다. 그는 끝내 이 캔터베리대성당에서 기도하는 중에 헨리 2세의 기사에게 암살당한다. 교황은 베켓의 순교를 선언하고 캔터베리는 ‘성 토머스 베켓의 순교지’가 되고, 캔터베리 이야기도 나오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노가 6세기 말에 초대 캔터베리대주교가 되어 영국교회를 발전시켰고, 1549년엔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쉬운 영문 성공회 기도서가 나왔다. 이러한 단계적인 종교개혁은 세계성공회공동체를 이루고, 그 총본부가 바로 이 남부 잉글랜드의 캔터베리인 것이다. 
 우리는 초서의 꿈속 같은 이야기에서 깨어나 시내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하늘의집’, 캔터베리대성당에 들어가 베켓이 순교한 마루 위에 켜있는 촛불을 바라보며 묵상에 잠겼다. 대성당 밖에는 현대의 캔터베리 이야기꾼들이 왁자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다. 어린 소녀들이 한 길에 둘러서서 멋진 포즈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햇병아리 같은 소녀들이 벌써부터 담배를 피우다니, 사진을 한 장 찍고 나서 한심한 듯 쳐다보자, 그들은 일제히 'No smoking!' 하면서 피우던 담배를 보여주고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는다. 연기가 나지 않는 장난감 담배였다. 눈을 흘겨주려다가 같이 웃어버렸다. 
 캔터베리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개여울에 작은 보트가 떠있고, 그 옆엔 500년 된 위버 올드하우스 식당이 있다. 전형적인 영국식 옛날 집에 들어가 점심 특별메뉴인 영국 불고기를 먹었다. 방금 구워낸 고기에 따끈한 파이가 곁들여 나오는데 맛이 그만이었고 비싸지도 않았다. 
 늦은 점심을 저녁 겸 먹고 나자 해가 기운다. 우리는 피곤한 걸음을 성 밖으로 옮겨 펄스타프 호텔에 돌아왔다. 젊은 호텔 지배인 로베르토가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이것저것 챙겨준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랩탑에 인터넷을 무료로 해준다며 생색을 낸다. 이 호텔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술술 얘기를 풀어간다. 캔터베리 이야기극장의 연장 같았다.
 우선 호텔 이름이 펄스타프라니 설마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4세’에 나오는 뚱뚱보 익살꾼, 그 펄스타프인가 물었더니 맞는단다. 그가 묵었던 방을 기념하는 펄스타프의 방은 바로 우리 옆방이고, 셰익스피어의 방은 2층에 있다는 것.  
셰익스피어 연극 중에 제일 유명한 성격배우인 펄스타프 역을 맡은 존 헤밍스는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배우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판본 편집인으로도 유명한 왕실극단 재정후원자였던 그는 ‘헨리 4세’의 1막과 2막을 비롯해 네 개 연극에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와 친한 벗이어서 둘이서 캔터베리를 찾아오면 이 호텔에 묵고 갔다는 것.

 

 
 

그제서야 호텔 카운터 벽에 걸린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왼편엔 충실하면서도 모사꾼이고 익살꾼인 뚱보 펄스타프의 초상화가, 바른편엔 깃털 펜을 들고 서있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그리고 가운데엔 펄스타프 깃발이 날리는 이 호텔의 옛날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저녁 종이 울리고 성문이 닫히면 성내에 들어가지 못한 나그네들을 성문 밖에 있는 이 호텔에 재워주었다는 미담마저 들려준다.
 셰익스피어의 방은 늘 만원이지만 오늘은 마침 펄스타프의 방이 비어있으므로 구경하고 싶으면 따라오란다. 존 펄스터프 경의 방은 그의 명예에 걸맞게 고풍스런 침구와 가구로 꾸며놓았다. 벽난로 위엔 두 친구가 그 옛날 여관 마당에 사륜마차를 타고 들어서는 모습을 그려놓았고. 
진작 알았으면 셰익스피어의 방에 예약하고 오는 건데 이미 늦었다. 우리도 멋진 검은 사륜마차를 타고 캔터베리 성 밖에 있는 이 펄스터프 호텔에 들어서는 꿈이라도 꾸어야지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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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 '솔즈베리에서 찬양을!

 

런던의 워털루 기차역에서 택시를 내렸다. 워털루 브리지를 지날 때는 영화 ‘애수’가 떠올랐다. 그 비련의 영화는 반세기 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다시 그 50년대로 돌아갔나 싶게 역참엔 실크햇에 검은 정장의 신사들과 온갖 색깔의 야회복에 깃털 모자를 쓴 여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알고 보니 샌다운 파크에 있는 경마장의 연례행사에 가는 길이란다.

 우리는 캔터베리에서 솔즈베리로 그들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모처럼의 고전의상 쇼를 더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솔즈베리 대성당에서도 희한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8세 때 로마교황청에서 영국성공회로 분리한 대성당. 솔즈베리 대성당의 고딕 탑은 404 피트로 영국에서 제일 높다. 교회 앞마당엔 구경하다 지친 사람들이 음료수를 마시며 앉아있고, 발치에 큰 간판이 걸려서 들여다보았다.

“영광과 평화의 전당, 솔즈베리 대성당에서 ‘찬양을 함께 부르는 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교회 찬양대에 열심히 봉사하는 남편이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차라리 참새더러 방앗간을 못 본 척 하라는 주문이 더 쉬울 게다. 그는 벌써 교회 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찬양대 석엔 이미 자원성가대원 남녀와 소년 소녀 대원들이 반 이상 앉아 있다. 젊은 대머리 지휘자님이 남편을 반가이 맞아준다. 악보를 나누어 주면서 어느 파트인가 묻고 자리를 정해준다. 

 남편은 맡아놓은 자리처럼 테너 석에 가서 앉자 발성연습을 한다. 대성당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 여는 공개 찬양의 기막힌 자리에 번개 출연하게 된 것이다. 

 제단을 향해 양쪽의자에 마주 보게 앉은 찬양객(?)들은 신부님이 반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음악감독이며 지휘자인 데이빗 홀스를 따라 헨델의 메시야 곡을 불렀다. “할렐루야!”로부터 56번의 “아멘 송”까지. 

 매일 회중석에서 설교하는 주임사제도 함께 노래하고, 어느 새 구경꾼들이 내가 사진 찍기도 힘들 정도로 몰려들었다. 하느님도 들으시도록 뜨겁고 큰 박수가 교회 천장을 울렸다.

 그 열기를 식히려고 돌아서자 서편 로즈윈도우 가까이에서 시원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2008년에 만든 성수반인데 약 1미터 높이의 분수에서 샘같이 솟는 샘물은 사방 귀퉁이로 흘러 넘친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세례의 신비를 체험하고 싶게 만들었다. 

 로마 베드로 성당의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영국 최고의 현대 조각가 윌리엄 파이가 만든 푸른 쑥빛 성수반 네 가장자리엔 솔즈베리 대주교 데이빗 스텐클립이 써 넣은 이사야의 성경구절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이사야서43:1,2) 

 

 

솔즈베리 대성당이 더욱 유명한 것은 세계에 4개뿐인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라는 라틴어)의 진본 하나가 이 교회의 채프터 하우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1215년 6월 15일 갈팡질팡하는 존 왕에 시달린 귀족들이 런던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을 압박해 템스 강변에 있는 러니 메이드에서 맺은 계약서이다. 이것은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의 권리를 더 신장시켰다. 

‘마그나 카르타 1215’는 작년에 유네스코의 문화재로 올랐다. 이 교회의 유리장 안에 잘 보관하고 있는 이 진본은 솔즈베리 대성당의 전신인 올드 사룸(Old Sarum)교회에서 보관했던 것이다. 

솔즈베리 교회는 원래 이 높은 성채 같은 솔즈베리 북부의 올드 사룸에 1092 년 경 지었는데 번개와 낙뢰로 무너져 버려서 1220년부터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올해 올드 사룸을 배경으로 한 켄 폴릿의 대역사 서사시, “대지의 기둥”(The Pillars of the Earth) 연작이 영화로 만들어져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 교회 옛터의 서사시를 영화로 만들 때 솔즈베리 대성당은 현장 촬영에 협조했다고 한다.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네. 이제 인간은 그 세상 위로 ‘대지의기둥’을 일으켜 세우리! 새 천년이 시작되는 암흑의 중세,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대성당의 시대가 오는도다.”로 시작되는 대 서사시가 솔즈베리 교회신앙의 주제인 ‘영광과 평화의 왕이신 하느님께 찬양!’과 함께 온 누리에 멋지게 울려 퍼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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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1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 '비운의 여왕 메리 스코트'

 

우리 부부의 친구인 이냐시오님이 가끔 오페라 관람권을 보내주신다. 지난봄엔 도니제티가 작곡한 ‘여왕 3부작’의 하나인 ‘마리아 스튜아트’를 보내주셨다. 스코틀랜드 여행을 하는 동안 아름다운 벨칸토 오페라의 여운이 내내 따라다녔다.

 오페라 ‘마리아 스튜아트’의 주제는 스코틀랜드여왕 메리의 비극이긴 하나 실제 역사와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이 극본은 독일의 문호 쉴러가 썼는데, 그는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 한 번도 서로 만난 적 없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스코틀랜드여왕 메리가 무대에 같이 올라 아리아를 부르게 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싸워 승리로 이끈 대영제국의 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엘리자베스의 조카뻘이며 스코틀랜드의 모든 비운을 짊어진 메리여왕의 이 극적인 대면은 오히려 오페라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2막에, 두 여인이 모두 사랑하는 레스터 경은 옥에 갇힌 메리가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애쓴다. 엘리자베스는 막강한 권력과 비범한 지성미를 갖춘 여왕이었다. 자기보다 뛰어난 미모로 모든 남성을 사로잡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무릎을 꿇자 엘리자베스는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그 순간 비브라토로 떨리는 소프라노 메리의 긴 소절의 대사가 오케스트라 반주에 실려 청중을 압도한다.

 

“당신은 (영국여왕의) 자격이 없어. 당신은 사생아가 아닌가 말이야~”

 

너그럽게 풀어주려던 엘리자베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메조소프라노로 꾸짖는다.

 

“이 야비하고 음탕한 여인, 남편을 셋이나 죽인 창녀야!” 그녀는 메리 사형선고장에 서명하고 만다. 

 

 

오페라를 끌어가면서 연극 인물들의 내면세계에 접근하는 바리톤 톨부스 신부가 메리에게 고해성사를 준다. 메리는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마음에 박힌 대못들을 하나하나 뽑는다. 

 프랑스에서 유아기를 보내며 가톨릭이 됐으나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신앙을 이겨낼 수 없었다. 프랑스 왕이던 남편이 1년 만에 죽자 스코틀랜드의 단리와 결혼했다. 여왕의 정부이며 신하인 리치오를 단리는 여왕이 보는 앞에서 죽인다. 메리는 이 남편의 포악한 성격에 놀라 보스웰을 시켜 그를 죽여 버린다.

 단리가 죽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메리는 그보다 더 포악한 보스웰과 결혼한다. 단 하나의 피붙이인 이복오빠 머레이 백작이 마상에서 총격을 당하게도 했다. 그녀의 정신적인 상담자였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아버지이며 ‘벽력같은 스콧트인’이란 별명을 가진 존 녹스가 타이르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네 번씩이나 만나 충고한 일들을 모두 무시해버린 일도 후회 막심하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자신을 18년이나 성에 가두어 버린 엘리자베스를 죽이려고 음모했음도 자백한다.  

톨부스 신부는 금기로 되어있는 가톨릭교회 성찬을 죽음을 앞둔 메리에게 몰래 베풀어준다.

 

스탕달이 말했듯이, 쉴러가 역사적인 사실을 비켜갔다 해도 종합예술인 오페라 ‘마리아 스튜아트’는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에든버러 성에서 동쪽으로 로열마일을 따라 오리쯤 걸어 내려가면 홀리루드 하우스 궁과 마주친다. 시내버스를 타고 그 근처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앞에서 내려 홀리루드 하우스 궁을 찾았다.

1128년 사원을 방문하는 귀족을 위해 지었고, 16세기에 들어와서 메리여왕의 조부인 제임스 4세가 궁전으로 완공했다고 한다. 파괴와 재건의 우여곡절을 겪고 지금은 영국왕실의 공식적인 영빈관이 되었다. 

 프랑스식으로 지은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스콧의 메리가 태어났고 이방인 리치오와의 비극도 벌어졌다. 우리나라 창경궁의 비화가 이 홀리루드 궁 안의 오솔길에도 배어있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여왕 엘리자베스2세가 공식 방문 중이어서 궁 안을 둘러볼 수 없었다. 밖에서 쇠창살문 사이로 여왕이 머물고 있던 안채와 시계탑이 있는 근위연대 초소만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바로 옆에 인접한 홀리루드 공원에 들어가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스코틀랜드의 흑맥주를 음미하면서 맞은편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아서의 의자’라고 하는 언덕이다. 앉기엔 너무 높은 의자, 아서왕의 칼이 있던 자리이다. 옛 무사의 언덕 같은 아서왕의 의자 아래엔 아주 현대적인 건물이 보인다. 마이클 홉킨스가 설계한 ‘다이내믹한 지구센터’다. 그의 특징인 하얀 텐트 천으로 재미있게 지붕을 엮어놓았다. 

다음날 아침엔 에든버러 성채에 올라가 역사적인 운명의 돌, ‘스쿤의 돌’이 있는 박물관을 보러 가기 위해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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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월터 스콧의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

 

- 하일랜드의 가을 들꽃처럼 신선한 향기-

 

 

 몇 해 전에 월터 스콧경의 대하소설,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The Heart of Midlothian " (1818년 출간)을 우리말로 옮겨 쓰는 일을 시도한 적이 있다. 언덕을 굴러 내리는 상쾌한 마차 바퀴 소리에 쏠려 제3장까지 잘 달리다가 그 엄청난 무게에 지쳐서 덮어 놓았다. 

  그런데 올해 에든버러2010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에든버러 시가지를 거닐면서, 역사의 큰 강물이 흐르는 듯한 그의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의 풍경들이 이 도시에 모여 있음을 보고, 그 작품을 우리말로 마저 옮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월터 스콧 경이 그의 기념탑 안에 의연하게 앉아있는 것을 비롯 해, 깃털 펜을 들고 공중다리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은 내게 새로운 도전의 용기가 나게 했다.

 1864.6.21 이후로 더 이상 사형장소가 아님을 쓴 팻말이 붙어있는 그라스 마켓을 지나면, 해마다 8월에 열리는 세계적인 에든버러 페스티벌 홍보센터가 된 톨부스 교회가 로얄 마일 언덕 아래에 버티고 서 있다. 15세기에 에든버러 세인트자일스대성당 앞에 지은 옛 형무소인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은 1817년에 철거되고, 월터 스콧의 웨이벌리 이야기, "나의 지주이야기" 2편에 나오는 월터스콧의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이 그 다음 해에 소설로 부활한다.

 

 

에든버러의 미들로디안 한 가운데에 있는 옛 형무소 자리인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 바닥엔 하트 모양의 조약돌 모자이크가 보인다. 1974년에 지방정부가 에든버러와 미들로디안 지방의 분기점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옛날엔 죄수들이 형무소에 들어가며 침을 뱉어 자신의 행운을 기원했던 자리, 지금은 에든버러 시민들이 이 하트 안에 그린 원 속에 침 뱉으며 자신의 행운을 비는 자리가 되었다. 

그 하트형의 모자이크 위에서 시작한 거리의 축구팀이 지금은 세계적인 축구단이 되었는데, 그들은 이 하트 무늬와 똑 같은 문장과 이름을 가진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축구팀이다. 

 월터 스콧이 쓴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의 이야기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이야기는, 1715년부터 1736년 사이에 일어난 쟈코뱅의 반란기간 중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포티어스 폭동이 시대의 배경이 된다. 밀수업자인 윌슨과 로벗슨이 밀수품을 몰수 당하자 세금징수원의 돈을 강탈한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윌슨은 함께 처형 받는 동료 로벗슨을 도망치게 하고 혼자 사형 받는다. 도망친 동료 로벗슨이 윌슨의 처형장에 나타나리라는 보고를 받은 에든버러 수비대가 군대와 함께 출동하여 경비가 삼엄하다. 

처형장 주변엔 구경 나온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비대장인 포티어스는 윌슨이 처형당하는 순간 사형수에게 돌을 던지는 시민들에게-실은 관례적으로 있는 일인데도-발포령을 내려 많은 시민들이 죽는다. 그로 인해 원래 시민들에게 미움 받던 포티어스는, 그가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으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섭정하고 있던 캐롤린 여왕의 선처로 선고유예를 받지만, 출소 전날 시민폭도들이 형무소를 부수고 그를 끌어내 린치 끝에 처형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건과 대조적인 낭만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이 과정에 참여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서사시 같은 이야기와 엮어져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의 두 번째 테마로 펼쳐진다.

 

 

신실하고 보수적인 장로교단의 가정에서 자란 지니 딘즈와 에피 딘즈라는 두 자매가 등장한 것. 지니는 유아살해라는 누명을 쓰고 갇혀있는 동생 에피를 위해 재판에서 위증한다. 그리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에든버러에서 런던에 14일간의 도보여행을 해서 아가일백작의 도움으로 왕실의 사면을 받는 목적을 이룬다.

 지니가 자신의 종교에 위배되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위증하는 행위는, 마치 예수가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밀 이삭을 잘라 요기함으로써 안식일의 법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귀중함을 알린 일과 비슷하다. 

에피는 포티어스를 감옥에서 끌어내 린치한 주모자, 로벗슨의 애인이다. 로벗슨이 군중을 이끌고 형무소를 습격했을 때 에피도 구출하려 하나, 에피는 자신이 결백하므로 탈출을 거절하고, 정식으로 사면을 받은 후에 로벗슨 역을 맡은 실물, 스텅튼과 결혼한다. 지니는 톨부스교회의 성직자인 루우벤 버틀러 장로교 목사를 사랑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이 작품은 또한 그 당시 유행한 상류사회 주인공 일색이던 것을 중류와 하류계층의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켜, 그들의 언어로 떠들어 대는 스코틀랜드 기질의 활력소를 만들어 냈다. 

스콧의 소설에서 첫 번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니는, 지금까지 남주인공에게 선택되어 온 여주인공의 개념을 깨고 여성의 내면에 잠자던 숭고하고 적극적이고 강한 성격이 신앙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새 여인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 이후에 쓴 "아이반호"의 여주인공 레베카도 신앙의 길은 다르지만 그런 성격의 인물이다.

 

 

지니와 에피 자매와 스코틀랜드의 전통장로교인인 그들의 아버지 데이빗 딘즈, 지니의 수호천사 같은 고귀한 성품의 아가일 백작, 그 외에 희극배우 같은 새들트리 부부와 마부들이 스콧의 긴 소설여정에 함께 웃고 노래하며 지나가는 쉼표 역할을 해준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극의 벌판에서도 그의 유머러스한 풍자적인 대화가 들꽃처럼 신선한 미소로 떠오르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웅장한 자연과 신비스러운 자연의 아름다운 대비 때문이리라.

 "하트 오브 미들로디안"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블랙우드와 브리티시 레뷰(Blackwood and British Review)지는, "자연스럽고 극적인 귀결에 이르기 위해 길게 끌어가는 이야기를 쓴 특수한 소설기법"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의 장편소설 속엔 숨막힐 듯한 극적인 요소에다 이따금 튀어 나오는 서사시들이 라틴어로, 불어로, 영어로 자유자재로 튀어나와 놀라게 한다. 그것도 완전 쉼표가 없는 긴 단락 끝에. 

 저주 받던 사형 장소를 이제는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그 하트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려고 하는 걸 보면, 에든버러는 참으로 축복 받은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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