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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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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이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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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답다. 까뭇까뭇한 작은 포도알이 우윳빛 유리에 덮인 듯 오히려 차분한 빛으로 뭉쳐 있다. 송알송알, 아니 송글송글한 작은 포도송이가 사면팔방을 빠끔거리며 반짝이는 눈동자 같다. 저 흑진주 포도알들을 나무통에 짓밟아 포도주를 만든다지.

 

포도주 중에서도 한겨울, 보송한 털외투를 입고 에스키모 털모자에 하얀 봉오리 장갑을 낀 연인들이 코가 빨갛게 되도록 눈길을 걷다가 산속 오두막집, 따뜻한 벽난로, 아무렇게나 꺾어 온 나뭇가지, 활활 숲 향내 풍기는 불꽃 가에 마주 앉아 함박눈 펄펄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치어스!’ 살짝 술잔을 부딪치며 상긋 미소 짓는 담흑색 와인, 목둘레만큼 가느다란 까만 와인병에서 졸졸 냇물 소리라도 울릴 것 같은 달콤한 와인, 아이스와인을 바라보며 웃는 연인들의 심중에는 어떤 생각들이 오갈까.

 

내가 있어 우주가 존재하는 것. 자기 발끝에서 시작한 만큼의 우주를, 손바닥만 한 가슴 복판에서 퍼져나간 환상의 세계를 날고 있을까. 그것은 우주를 탐색하는 탐험자만큼 나에겐 풀고 싶고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하 참 장황하게도 읊조렸구나.

 

덜 난 사람일수록 화장도 필요하고 치장도 필요하다지. 어차피 발그레한 양 볼은 애초부터 감추기로 작정한 반사 작용이라니까. 아예 민낯으로 대하기로 작심하였다.

 

헛간 벽에 얼개나무 받침대를 세우고 포도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여름내 꿈을 꾸었다. 한 뭉치 포도송이와 굽이 높은 가녀린 수정 와인 잔, 위하여! 더운 날숨을 몰아 쉴 수 있는 마음의 친구. 함께 걸을 겨울 오솔길, 바삭바삭 발자국 소리 숲을 울리는 눈길을 많이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이제 준비 완료. 내일쯤엔 주렁주렁 열린 저 포도를 따서 청량한 가을 햇볕 하루만 더 들이쉬게 한 후 아이스와인 공정에 들어갑시다. 꿈의 여행, 황홀경 일주를 하여 봅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 그렇지 다람쥐가 듣는다’고. 밤사이 포도송이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기를 어언 십여 성상, 오른쪽 팔뚝의 반밖에 안 되는, 내 두 주먹만한 것들을 상대로 싸울 수야 없지 않은가. 실은 속수무책으로 늘 참패 당하기만 했다. 우선 기밀이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가는지 그 경로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한 해는 나무 주위에 망사 천을 둘러보고 또 다른 해에는 포도송이에 하나하나 봉지를 만들어 씌웠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도 전혀 모른다. 종이 봉지 속의 포도를 알맹이만 다 따가고 빈 가지만 대롱대롱 들어있었다. 진짜 어느 분의 탄성처럼 ‘말 다 했다’였다.

 

금년의 포도송이는 정말 보기 좋았다. 원추형의 모양새가 우선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그 포도주를 마신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낭만이 절로 솟을 듯 보였다. 금년에는 기필코 이겨보자.

 

한발 먼저 따기 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95퍼센트만 익으면 더 기다리지 말고 용감하게 따오기로 작전을 세우고 새벽 동틀 때 싹 뚝 두 송이를 따왔다. 만세. 드디어 성공하였다. 금년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놓고 나머지 5퍼센트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라보기만 해도 승리의 미소가 입가에 번짐을 가눌 수 없었다. 까만 눈동자를 데굴거릴 다람쥐들이 생각할수록 재미있어 승전가를 높이 부르며 즐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승리의 환희는 엷어져 가고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상대가 내 팔뚝의 반밖에 안 되는 다람쥐라니. 이건 또 다른 자존심의 문제였다. 먹어도 마셔도 몸속 깊숙이로부터 기쁨이 솟아오를 환희의 맛이 아닐 것이라는 자각이 바늘처럼 찔러댔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바쁘게 도모하는 세상만사 모든 일이 ‘질 수 없다’는 자존심, 자격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쭈글쭈글 말라가는 포도송이를 접시에 담아 데크의 층계에 갖다 놓았다. 나는 따는 기쁨으로 충분하니 다른 것은 다람쥐들에게 양보하자. 어차피 길게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그도 포도 씨를 잉태한 적이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풍년가 울리는 가을 산야에서 모두 함께 합창하는 소리가 바람결 되어 볼에 스친다. 세상사 지고도 이기고 이기고도 지는 섭리를 깊이깊이 삭이는 이 계절, 가을이 무르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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