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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부룩 종합병원 침구과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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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鍼術, Acupunctur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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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한의학에서는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좀 난해하지만 간(肝)의 기(氣)가 위(胃)를 쳐서 그러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차후 기회가 되면 소화기 질병에 대한 칼럼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호에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결국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러한 질병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우리 의학을 공부하는 모두에게 공통된 숙제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현대의 의학은 여러 의학들이 서로 협력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결국 의학의 존재 이유는 질병에 걸린 인간을 병으로부터 회복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약 20여 년 전부터 이미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과 “서니부룩 병원”에 침술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현재 필자가 이 두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종종 주변분들 중 서양사람들도 침 치료를 받으러 오는지 궁금해 하시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당히 많은 서양사람들이 침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전체 환자들 중 80% 이상이 서양 사람들이다. 그 환자들 중에는 서양의학 전문의들도 많이 있다.

 

그 동안 종합병원에서 진료하면서 한인들을 환자로 치료하는 경우는 1년에 평균 5명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어떤 한인들은 서양사람들보다 한의학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오늘날 서양에서도 의학의 한 분야로 인정되고 계속 발전하고 있는 침술의 역사와 침술 치료에 대해 같이 나누고자 한다.

 

침술의 역사

침술의 침(鍼)자의 어원은 폄석(?石)에서 잠석(箴石)으로, 잠석에서 침(鍼)으로 발전해 왔다. 폄석이란 석기시대의 치료 기구로 쓰던 돌의 자기(刺器)를 말하는데,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돌로써 병을 자(刺)한다.”라고 하였다.

 

한의학 고서인 “황제내경” 『소문(素問)』의 이법(異法) 의론(宜論) 제12에 “그의 병은 개옹창(皆癰瘡)이다. 그를 치료하는 데는 폄석이 제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에 종창(腫瘍)을 절개(切開)하는데 돌화살의 선단(先端)과 같이 뾰족한 석편(石片)을 사용하였던 것이 치료 기구로서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전원기(全元起)의『소문(素問)』의 주(注) 속에서도 “고대에는 철(鐵)을 다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돌을 침으로 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신석기시대의 돌조각인 폄석(?石)에서 청동기시대의 잠석(箴石)으로 그리고 철기시대의 침(鍼)으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침술의 시작은 유물과 문헌적 근거를 통해 알려진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인류문명과 함께 시작된 고대의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석기시대를 지나 철기(鐵器) 시대가 되면서부터 연금주술(鍊金鑄術)이 발달되어 금속으로 만들었으나 대부분이 대침(大鍼)으로 밖에 만들지 못하였다. 이때는 금침(金鍼), 은침(銀鍼), 동침(銅鍼), 철침(鐵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음양 오행(陰陽五行), 보사법(補瀉法)으로 쓴다면 금침(金鍼)은 보(補)하는데 쓰고, 은침(銀鍼)은 사(瀉)하는데 쓴다고 하였으며, 동(銅)과 철제(鐵製)의 침(鍼)을 보편적으로 썼다.

 

금(金)은 황실에서만 쓰게 되어 있고, 일반 서민은 쓰지 못하였으므로 서민층에서는 동(銅)을 금(金)과 같이 생각하였기 때문에 좋은 침을 말할 때 동침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대침을 보면 동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중국침술의 역사

침술이 질병을 치료하는 기록된 의학적인 의미의 기원은 약 2,50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침술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500여 년 전 중국 고서(古書)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 12경락(經絡)과 침(鍼)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침술이 동방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중국의 동쪽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동방이 한국의 동이지역 이었으므로 고대 한국이 침술의 발생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침술이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기 어려운 것 같다. 중국 산동 지방에서는 반인반조의 생명체가 사람을 찌르는 것이 묘사된 그림이 발굴되기도 하였고, 또한 중국의 신화집인 산해경에도 비슷한 침술의 유래가 나온다. 하지만 산해경은 신화집에 가까운 내용이므로 사실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침술은 한의의 한 분야로 질병을 치료하는데 계속 의학으로 발전해 오다 청나라에 접어들면서 서양의학과 접하게 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다가 1840년 아편전쟁 당시 중국의 황제였던 도강제는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면서 침술이 의과학(醫科學)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해서 침술과 뜸술을 없애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침술은 점점 쇠퇴하게 되고 1914~1929년 사이에는 중국 정부의 관리자들의 제안으로 침술이 불법 의학이 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전쟁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마오쩌뚱이 1949년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때 마오쩌뚱은 한의학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 들이게 된다.

 

당시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거대한 규모의 농촌 거주민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한의학을 다시 복원시킨 것이다. 당시 중국의 주요 중의약대학(中醫藥大學)들이1955~1956년 개교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부터 한의사들에게 서양의학까지 교육하게 되면서 서양의학을 배운 한의사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고, 결국 중국에서는 서양의학과 동등한 수준과 대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중국 침술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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