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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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생애(1)-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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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아들 이삭이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창 21: 1-4)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는 5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홍수로 물에 잠기는 세상,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12장부터 50장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14장, 야곱과 요셉에 관해서는 12장씩이 할애되었지만 이삭에 대해 기록된 것은 1장뿐이다. 이 때문인지 이스라엘의 3대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에서 이삭의 존재감이나 비중,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그의 역할이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삭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은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그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명하시며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창 12:2)고 말씀하셨다. 75세가 되도록 무자한 그에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하나님은 “네 몸에서 태어난 자가 네 상속인이 될 것이다.”(창 15:4)라 재차 확인해 주셨다.

 

그 후 10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자 사라는 여종 하갈을 남편과 동침시켜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나도 사라에게 아이가 없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그의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낳는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할 것이며, 그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그 말씀대로 일 년 후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되던 해에 이삭이 태어난 것이다.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하나님께서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축복을 해주신 후에도 25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삭이 태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란을 떠난 후 이삭을 얻기까지 사반세기란 세월 동안 아브라함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당한 모든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키신 수단이요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재목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어처구니없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고, 318명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10,000명이 넘는 그돌라오멜의 정규군을 격파하게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하나님을 떠나 하는 일은 실패와 좌절을 당할 뿐임을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는 어리석은 과오를 통해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없다는 귀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생리적으로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노년에 접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사라가 이삭을 가지게 된 것은 마라아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과는 다르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삭은 하나님이 여러 차례 예고하신 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는 이삭은 2,000여 년 후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아나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면서 보내주시겠다고 한 구세주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태어날 것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이삭의 출생은 웃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생리까지 끊어진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었다 (창 17:16; 18; 10-12).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지리라 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자조적인 웃음을 웃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라가 아들을 낳자 그들은 기쁨의 웃음을 웃었다. 특히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으니 이 일을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창 21; 6)라며 기쁨과 행복에 넘친 웃음을 웃었다. 이 같은 웃음은 구세주가 천군천사들의 찬송 속에 오실 것을 예고해 준 것이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던 밤 천사들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보라, 내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고 들려준 것은 이것을 명백히 해준다.

 

이삭이 태어남으로 우울하고 무겁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꽃이 필 수 있었음은 죄 가운데 허덕이는 인간들에게도 구세주의 출현과 함께 웃을 날이 온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아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라 들려주고 있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소망을 자져다 준 이삭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떻게 양육했을까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부부는 지극정성으로 이삭을 돌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그를 애지중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며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심한 질투심을 갖게 되었을 것도 자명한 일이다. 이삭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랑이 그에게서 이삭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느끼며 쌓여가던 이스마엘의 원망과 불만이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폭발했다.

 

당시의 풍습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날 이스마엘은 두 세 살 밖에 안 된 이삭을 괴롭히는 장면을 사라가 목도해버린 것이다. 분노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했고,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내보내게 된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잘못으로 인한 가정적인 문제라고만 여기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이스마엘이 언약의 자식 이삭을 희롱한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받게 될 400년간의 핍박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사건은 믿는 자들은 세상의 박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멸시와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늘나라의 기준과 이 세상의 기준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핍박을 믿음으로 견디며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그 때문에 이스마엘의 조롱과 희롱을 받으며 자란 이삭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제와 박해를 참고 견디는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삭은 후일 블레셋 땅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며 현명하게 대처하여 그들이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같은 불굴의 인내심과 더불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순종의 믿음”을 물려받았다. 젖을 뗀 후 사물을 인지하면서부터 이삭은 아버지가 하나님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모습만을 보며 성장했다. 그런 까닭에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순종의 정신과 믿음”이 몸과 마음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순종의 사람 이삭의 순종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나는 모리아 산에서 그가 제물로 바쳐질 때 의심의 여지없이 나타났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3일을 걸어 모리아 산까지 간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을 산 밑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을 때 이삭은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때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실 것이다.”(창 22:8)라 대답한다.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제물로 쓸 어린 양을 근처 어딘가에 매어놓았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묶어 단 위에 쌓은 장작더미 위에 눕힐 때 이삭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제물이 자기인 것을 알았다. 그때 이삭은 15세 정도의 소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연로한 아브라함을 밀쳐내고 제단에서 뛰어내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순종의 믿음을 지닌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단위에 누워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이 그의 가슴에 꽂히기를 기다렸다. 진정한 순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임과 동시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사 53:7)과 같고,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신”(빌 2:8) 예수님의 모습의 예표였다.

 

이삭의 출생이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면, 모리아 산 위에서 번제물로 장작더미 위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이삭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죄값을 지불해 주실 것을 미리 보여준 엄숙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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