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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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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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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예수님과 그의 아버지 요셉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니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18-25)

 

2000여 년 전, 유대 땅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 요셉이라 이름하는 청년이 살았다. 성경에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과 직업이 목수였다는 것 외에는 기록된 것이 없다. 따라서 그의 집안, 성장과정, 학력 등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지내는 나사렛처럼 작은 고장에서 목공소를 했다는 사실은 그가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임을 말해준다. 이 같은 청년 요셉은 순박하고 아름다운 처녀 마리아와 약혼하고, 단란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설계하며 목공소 일에 더욱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요셉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시엔 약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결혼예식을 올리기까지 동침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음을 의미했다. 더 큰 문제는 율법은 처녀가 임신을 하면 돌로 쳐 죽이기로 규정하고 있었기에(신 22:23-24) 임신사실이 알려지면 마리아의 운명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마리아를 사랑하는 요셉은 그녀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없었고, 그녀와 결혼식을 올릴 수도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심한 고민과 갈등 속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던 요셉은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성경에는 이 같은 그의 결단을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라 말해준다. 


그런 결심을 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심이라.”일러준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마리아의 몸 속에 생성된 생명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며, 태어날 아이는 지은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할 구세주이심을 밝혀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게 추방명령을 내린 에덴의 법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때 하나님은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고,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라 말씀하셨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인류의 구세주를 의미한 것이다. 


처녀에게서 태어날 구세주를 통하며 이루실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에도 나타나 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깊고도 원대한 계획을 요셉이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모르고 있었다면 요셉은 천사가 들려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이 세상에 오실 구세주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녀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몸에서 나오되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 아내 마리아가 그 처녀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가 들려준 말을 믿었기에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거두고 그녀를 그의 아내로 맞아드린다.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분노는 컸을 것이다. 믿고 사랑한 여인이 그를 배신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불륜행위를 율법에 의해 형벌을 받게 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하여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렇게 할 당당한 권리가 있었다. 모세의 율법은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 19:21) 


요셉의 선택은 그가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었다. 마태는 이 결정을 한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 기록했으며, 그 같은 요셉의 의로움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복음의 시대에는 정죄와 보복 아닌 용서와 화해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마 5:44), 다른 사람의 죄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마 18:21-22) 가르치신 것은 복음의 목적은 정죄나 처벌 아닌 사랑과 용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셉이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도 천사의 말을 믿고 그녀를 받아드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자세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의로웠을 뿐만 아니라 순종의 믿음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리아에게 잉태된 생명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드렸다.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고 반문했지만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이란 천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다. 요셉이 믿음의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그의 말씀을 무조건 받아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의 용장이었다. 하란 땅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어째서 여기서 애써 마련한 삶의 기반을 다 포기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먼 곳으로 가라하십니까?”라 항의하지 않았다.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며,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란 땅을 떠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천사의 말을 듣고 파혼하려던 마리아와 결혼한 요셉은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 애급으로 피신하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 즉시 아내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급으로 간다. 온갖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며 남의 나라에서 몇 년을 지내다 헤롯이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은 또다시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르는 이 “순종의 믿음” 이야말로 그가 보여준 의로움과 더불어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잘해낼 수 있었던 요소였다. 


고향에 돌아온 요셉은 나사렛에서 목수의 일을 계속하며 아내와 자식들(예수님 외에도 요셉에게는 적어도 네 명의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을 양육하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았다. 특별히 맏아들 예수가 구세주로서의 능력을 배양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요셉은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유월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소년 예수를 동반했다는 사실로부터도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들 예수로 하여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며 유대종교의 의식을 보고, 듣고, 배우며,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 요셉의 의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12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돌아갔던 마리아와 요셉은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일행 중에 없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3일 후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어째서 혼자 여기 남아 있느냐고 나무라자 어린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몰랐습니까?”(눅 2:49)라 되묻는다. 


이것이 요셉이 성경에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마리아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요셉은 그때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경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할 때 마리아는 13세 전후였을 것이고(그 당시 여자들의 결혼 적령기는 13-14세였다.), 요셉은 30이 조금 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때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45세 정도였다고 하니, 예수님이 30세가 되어 지상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셉은 죽었을 것이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요셉은 높은 학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공헌한 바도 없는 서민의 한 사람으로 2000여 년 전 유대에서 짧은 기간을 살다 갔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졌던 인생의 사명은 구세주의 아버지라는 막중한 것이었다. 요셉은 이 무겁고 중요하면서도 값진 임무를 두려움을 정복하는 용기와 순종의 믿음으로 충실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구세주 예수님이 험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로지 사랑과 헌신과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한 요셉의 삶은 우리들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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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인류 역사상 마리아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여인도 없을 것이다. 시대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고상한 인격과 성결한 여인의 상징인 여자가 마리아이며, 성경에도 그녀를 가리켜서 “여인 중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자”(눅 1:28, 42)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을 받은 여인임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리아가 이처럼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의 인간됨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역할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사람”(마 11:11)이라 하신 것은 그가 역사상 제일 위대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담당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의 중요성으로 인해서임을 상기하면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마리아는 2,000여 년 전 유대 땅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소박한 농촌 처녀였다. 이 사실만으로 판단하면 그녀는 구세주의 어머니는커녕 유명인사의 어머니로서도 적합하지 못한 낮고 천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녀에게서 만민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가 태어날 것이라 말하자 마리아의 놀라움은 컸다. 


남자를 모르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마리아가 항의하자 천사는 성령이 그녀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덮으시므로 그녀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 말해준다.(눅 1:35) 


그러자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지이다.”(눅 1:38)라며 머리 숙인다. 순결을 생명처럼 여기던 그 당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와 사회적 냉대가 어떠리라는 것을 마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순복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강한 결단과 용기의 여인이었나를 말해준다. 동시에 그런 믿음과 결단과 용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축복된 사명이 주어졌다고 믿어 잘못이 없을 줄 안다.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를 잉태한 마리아는 그녀처럼 성령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을 수태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만왕의 왕을 몸속에 지닌 마리아가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걸어 엘리사벳의 집에 도달하자 엘리사벳은 여자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왔다며 마리아를 반긴다.


2,000여 년 전 유대의 어느 산골 작은 집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사실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그의 전령의 역할을 담당한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자리를 같이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꿀 구세주와 그의 전령이 몸속에서 자라나는 귀한 신분들이었지만 두 여인은 겸손하게 무릎 꿇고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때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로 시작하여 드린 찬가 ‘The Magnificant’(눅 1:46-56)는 만인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원하신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인류구원 계획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산속에서 3개월을 함께 지내며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어머니로서의 덕을 쌓으며 인격을 형성하는 경건의 훈련을 하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와 그의 길을 예비할 사자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양육할 자세를 확립했을 것이다.


믿음과 순종과 기도의 여인 마리아의 몸속에서 성령의 인도와 보호가운데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의 어느 초라한 여관 마구간이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의 명에 따라 실시된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나귀등에 태우고 그들이 살던 나사렛에서 130키로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구할 수 있었던 숙소는 허름한 여관의 마구간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구유의 차가운 집단 위에 누우신 아기 예수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캄캄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찬송을 불렀기 때문이다. 

 

때를 같이하여 별의 인도함을 받아 수만리 머나먼 길을 걸어온 페르시아 왕실의 학자들이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예물로 드리며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이와는 반대로 베들레헴 어딘가에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접한 헤롯왕은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지만 천사의 지시를 받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신하자 그 지역의 2살 미만 된 모든 아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애급으로 도피했던 마리아는 그 곳에서 3년 정도를 지낸 후 헤롯이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폭군 헤롯이 죽은 후 그 지역을 통치한 안티파스는 비교적 온순했으며, 나사렛은 크지는 않았지만 애급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는 상인들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어린 예수는 나사렛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며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인이 마리아였다. 어린 예수가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며, 이웃에겐 온정과 사랑을 베풀며 자라도록 모든 정성을 기울인 마리아였을 테니까 말이다. 


30년의 준비기간이 끝나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마리아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을 것이다. 그러는 마리아의 가슴은 한없이 쓰라리고 아팠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온갖 무거운 인생의 짐을 져주심은 물론 천국의 진리를 선포하시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배척하며 멸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왜 그런 고난과 슬픔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를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쓰리고 아픈 가슴을 안고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그 가장 좋은 예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잔치에 참석하였던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자 예수님이 보인 반응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였다. 순간 마리아는 무척 당황하면서도 섭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태연하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4)고 말한다. 


그녀의 청을 일언지하에 묵살한 아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털어놓는 대신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르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한 것은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녀의 아들 아닌 인류의 구주로서 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장면에서는 예수께서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 아닌 구원받아야 할 한 인간으로 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일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동생들과 숱한 무리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일어났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지금 밖에 와 있습니다.”라 말하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나의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시다.”(막 3:33-35)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에게는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 모두 그의 구원의 대상임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마리아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갈보리 언덕에서였다. 그곳에 세워진 3개의 십자가 중 가운데 달리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병사들이 둔탁한 못을 박아대는 망치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리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리아는 예수께서 당장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너부터 구원하라고 야유하는 군중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바로 옆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눅 23:43)라고 즉석에서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을 보며 구세주의 어머니 된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며 인생의 최후 승리자가 된 여인이 마리아였던 것이다. 동시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그녀를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이 몽롱해지는 의식을 바로 잡으며 십자가 밑에 서있는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 지금부터 당신 곁에 있는 요한이 당신의 아들입니다.”라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네 어머니로 모시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마리아는 예루살렘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다 오순절을 맞이한다. 구세주 예수님의 충실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 남은 삶을 주께 바친 여인이 마리아였던 것이다. 


겸손과 슬기, 경건과 믿음, 인내와 용기, 순결과 청결, 사랑과 관용에 있어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여인 마리아는 주어진 인생의 배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믿는 자의 표본”으로 살다간 우리들의 삶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여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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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학생시절에 나름대로 여러 분야의 책들을 상당히 많이 읽었다. 그들 중에는 읽기는 했어도 그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아직도 머리에 입력되어 있어서 설교준비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누군가 그것들 중에서 내 마음의 양식이 되었고, 나의 인격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어준 가장 중요한 책들을 열거해 보라고하면 빼놓고 싶지 않은 책 세 권이 있다. 고등국어 1, 2, 3권이 그것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책들을 무척 좋아했지만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렸던 시, 시조, 수필, 평론들은 내 가슴속에 파고들어 새겨져서 나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중의 하나가 고등국어 2에 수록되었던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은 정상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퍼질 수밖에 없는 숱한 슬픔의 사연들을 나열해주고 있다.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끝나는 이 글을 내가 지금도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여러 번 읽으며 슬픔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 많던 재산을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 남겨 두고 남하한 아버지는 그런대로 6.25사변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셨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부터 우리 집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쪼들리게 되었다. 


용산에 있던 녹색의 장원 같던 집이 폭격으로 없어져 버렸고, 금촌에 있던 정미소를 처분한 돈마저 믿었던 사람에게 맡겼다 회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자유당 독재정권에 아부하기를 거부했기에 우리 8남매는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허덕여야 했다.


 나의 경우 중학 3학년부터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시험조차 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수업료를 기간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교실에서 나가야 했고, 시험 칠 자격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난 버스도 타지 못하고 4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가서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뒷산에 올라 담장을 사이에 둔 비원과 교정을 내려다보며 지낸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산꼭대기 말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5층 건물은 우람하고 장엄했다. 그 본관 앞 좌우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동관과 서관, 크고도 우아한 형태의 대강당과 서울운동장처럼 넓은 운동장이 펼쳐져 있는 교정을 굽어보며 난 흐르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야 했다. 친구들 모두가 학업에 몰두하는 시간에 홀로 산 위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는 나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가련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난 생각했다. 그 글 어딘가에 “정다운 동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지식과 슬기를 넓히고 있는데 수업료를 내지 못해 혼자서 산 위에 앉아 교정을 내려다보며 눈물 짖는 소년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슬퍼진다.”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가난이 가져다 준 슬픔과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학업을 마치고, 군 복무까지 끝낸 후 캐나다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캐나다 정부가 내가 가진 대한민국 여권에 영주권을 찍어준 것은 나의 능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번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 나라의 정책에 순응하여 난 한국에서의 나의 학력과 경력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밑바닥부터 시작하겠습니다.”(I am willing to start from the bottom.)를 되풀이 하며 일자리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민자가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잡아 눈물을 삼키며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살기 위해 허덕이는 이민자로부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개척자로 탈바꿈해야겠다는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난 주저하지 않고 Tyndale Theological Seminary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내 인생의 설계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목사가 되었다.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겸손하게 성도들을 섬기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법정통역을 통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분들을 돕는 현장목회에 열중하며, 여러 신문에 글을 써서 우리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포들에게 주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땅 위에 견고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민1세들의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확인하는 기쁨과 보람도 느꼈다.


우리 모두의 백절불구의 인내와 용기는 심는 대로 거두는 만고불변의 원칙에 따라 우리들이 바라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믿어진다. 한인 이민자들은 불과 50여 년의 짧은 이민역사를 통해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정착한 여러 소주민족보다 더욱 탄탄하고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안톤 슈낙

 


이민 초기에 당했던 갖가지 수모와 억울함과 서러움이나 안톤 슈낙이 들려주는 “첫 길인 어느 촌부락에서의 외로운 하룻밤”같은 날들을 옛 이야기 삼아 하며 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당당하게 활약하는 Korean-Canadian이 된 우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 없고, 아는 것도 없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이민초기의 난관과 고통을 뒤로한 오늘 날의 동포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찾아 드는 슬픔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의리와 신의”, 조금씩 퇴색해 가는 “올바르고, 선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마음의 자세”, 그리고 지금 한국이 처해있는 위험한 현실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슬퍼진다는 말이다. 


먼 타향에서 죽마고우를 만났을 때 출세하고 부유하게 된 신분 때문인지 손을 내밀기는 하나 그 눈빛은 거만하고 냉정함을 느낄 때 슬퍼진다고 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중의 한 대목의 슬픔이 지금의 나의 슬픔인 것 같다.


내 가슴에 찾아 드는 서글픔은 가난과 고통의 시기가 지났다고 “내로남불”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거나, 떠나온 조국의 혼란한 상황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고난의 세월을 함께 극복하며 살던 옛 친구들의 아픔과 서러움을 외면하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나의 진심이 받아 드려지지 않고, 나의 선한 의도가 왜곡 되거나, 그들이 편리한 대로 변형되는 것을 보면서도 슬퍼진다. 지난 몇 달 동안에도 같은 단체에서 일하던 사람과 많은 생각을 공유하던 동료의 충격적인 행동 때문에 그런 슬픔을 느끼며 “부르트스, 너 까지도?”라 외치며 눈을 감아야 한 씨이저의 슬프고 아픈 마음을 되삭여 볼 수 있는 일들을 체험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들로 인해 슬퍼진 것이다.

 

상대의 진심을 왜곡하거나 상대의 선한 의도를 자기 생각의 틀에 맞추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자기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이 함께 짐을 지고,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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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려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스스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1-4)

 

구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에 비교하고 있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사 5:7)이라 했고,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다.”(렘 2:21)고 했으며, 아삽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급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시 80:8)라 들려주고 있다.

모두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급에서 건져내어 심으신 하나님의 포도나무임을 증언하는 말씀들이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포도나무를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받아드렸다.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던 동전에 포도나무를 새겨 넣었으며, 성전입구 벽에 금으로 조각된 포도나무를 붙이고 그 나무에 금으로 만든 포도송이를 만들어 달아 놓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예수께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 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그가 누구신가를 밝히심과 동시에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그들을 향한 준엄한 꾸지람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그의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학정에서 건져내어 기름진 땅 가나안으로 옮겨 심으시고, 그들이 그곳에서 열매 맺으며 풍성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마련해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데 실패했다. 정의 아닌 불의를 행했으며, 고아와 과부와 이방민족을 학대함으로 의의 열매 아닌 악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극상품 포도를 맺기를 원하셨는데 그들은 신 포도를 맺었으며, 그들에게서 정의와 공의를 바랐는데 그들의 포악으로 인한 울부짖는 소리만이 들려왔던 것이다.(사 5:1-7) 그 때문에 하나님은 나는 너를 순종의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째서 나를 대적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형편없는 가지가 되었느냐고 한탄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그가 참 포도나무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달고 맛있는 포도를 맺어야 할 포도나무에서 잡목 같은 신포도 나무로 변해버렸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맺지 못한 열매를 맺을 참 포도나무인 그의 가지가 되어 크고 단 포도를 생산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참 포도나무지만 포도원을 가꾸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라 말씀하신 후 그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하나님께서 모두 잘라내시고, 열매가 달린 가지는 더 많은 열매가 달릴 수 있도록 깨끗하게 손질하신다고 들려주신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수확할 목적으로 심는 나무다. 따라서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쳐내고, 열매가 달리는 가지들은 더 많은 열매가 달릴 수 있도록 손질해 주는 것이다.

우리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들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구원받은 자들로서 맺어야 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려서 버려지는 포도나무 가지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셔서 그가 창조하신 세상만물을 완전한 질서와 조화 속에 관리하시며 역사를 그의 계획대로 운영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걸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열매를 맺으며 그의 형상을 닮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귀족 출신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같은 인생의 목적을 보잘것없는 한 농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러 현인들을 만나러 다니던 중 그는 가난에 찌든 한 늙은 농부를 만나 이야기 하는 중 삶의 목표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고 강하지만 그것을 물리칠 인간의 능력과 의지는 작고도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포도가 달릴 수 없는 가지는 잘라내고, 포도가 달리는 가지에는 더 많이 달릴 수 있도록 손질하시듯 우리들에게서 그가 원하시는 열매를 딸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주시며,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님은 지상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게로 오라.” 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나를 따르라.”하셨다.

그에게 다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은 “내 안에 거하라.”였다. 예수께서 그를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우리로 하여금 그의 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품이 곧 믿는 자의 거처인 것이다. 거기 거해야만 포도나무에 든든히 붙어있는 가지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인간생존의 기본요소인 “의식주”의 문제로부터 해방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시며(마 6:25), 그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주신다.(빌 4:19) 예수님은 그를 찾은 이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실 뿐 아니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능력과 지혜를 부여해 주신다.

이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낮에는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밤에는 예수께서 문이신 우리에 들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잠드는 양들처럼 안락하고 평화롭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가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시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같은 축복은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는 괴로운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인내가 주어지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합당한 기도만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신다고 하신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요 16:23) 후에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고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요1 5:14)

기도하며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이들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로 죽어가는 인간들을 살리시려 그의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나타났고(요1 4:9),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롬 5:8).

따라서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님의 가지인 믿는 자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요1 4:20-21),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자격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맺어야 할 열매들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들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고린도 전서 13장의 결론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인 것도 믿는 자가 맺어야 할 열매 중의 열매는 “사랑”임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요 15:13)이라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길은 우리의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완전하고 든든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절반쯤 꺾어진 상태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포도를 맺지 못한다. 슬프게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주일에는 교인이 되고, 주중에는 세속인이 되어 사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등록교인이 되어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이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은 아니다. 위기에 처하면 예수님을 찾고, 환란이나 역경이 몰려오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예수님을 밀어내는 이들은 잎만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 같이 될 수밖에 없다.

미지근한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의지하고, 인생 전부를 주께 맡기는 이들과 예수님은 동행하시며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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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그들이 당장은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그들은 큰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만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가 떠나시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였다.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본문으로 택하는 말씀이며, 낭패와 실망으로 좌절하는 이들을 위로해주며 그들에게 크나큰 소망을 안겨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그가 먼저 아버지의 집에 가서 제자들이 있을 처소를 마련하여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겠다고 하시며,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가 “저희들은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 말한다.

솔직한 도마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고 직선적으로 한 이 말 속에는 “예수님,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처리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요 11:50)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그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만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하신 것은 그가 곧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기에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도마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신 것이다. 동시에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3년 간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진리가 요약되어 있기도 하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핵심은 하늘나라의 비밀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생의 특권에 관해서였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며,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에 관해 구약은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신5:33)라 하였고, 이사야는 깨끗하지 못한 자는 걷지 못하는 “거룩한 길”을 걸어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들려주고 있다.(사 35:8)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들을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27:11)라 기도했다. 이처럼 많은 가르침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기 위해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그 길이다.”(I am the way.)라 말씀하신 것이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그가 가야할 길을 말로서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키며 “내가 네가 찾고 있는 그 길이다.”라 말씀하신 것이다.

어느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탐색하던 중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진 지도에는 더 이상 표시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그들과 함께 있던 현지인이 말했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내가 길이니 나를 따르십시오.”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명시하시거나 그의 제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 “나를 따르라.”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전부였다. 따라서 주께서 가시는 길을 알려달라는 도마의 요청에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신 것은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너희들은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복음서에 기록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동일하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 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 “자기를 버리는 것”은 세상을 따르며 자신의 이기주의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옛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3:20) 증언할 수 있어야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용서”로 요약될 수 있다고 믿는다. 원래 십자가는 살인이나 반역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그 위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기에 치욕의 십자가 아닌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로 그 의미가 변하였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한없는 고통과 눈물과 불굴의 인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도전하며 반항하는 인간들을 용서하며 사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진정 피하고 싶으셨던 십자가를 향한 길을 끝까지 가셨던 것은 인간을 향하신 그의 크고도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를 조롱하며 비웃는 무리를 보시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23:34)라 하신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외면적으로 충실하게 보이는 신앙생활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면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거짓투성이의 위선자들이었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구약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보지 못했다.

주일마다 빠짐없이 예배 드리고 십일조를 성실하게 바치며 모든 교회행사에 앞장서서 봉사하는 것은 충실한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참된 믿음생활은 교회와 이웃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는 대신 축복하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롬 12:14-15).

이것을 모르는 이들은 해박한 성경지식을 자랑하며 미사어구를 총동원해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가기를 원한다면 충실한 교회생활을 하며 구원의 복음을 말로서 전해야 함은 물론 예수님을 닮은 믿는 자로서 살아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어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는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은 슬픈 일은 길 되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우리들이 원하는 길을 걸어갈 때 일어난다. 이사야는 이것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하고, 위험하다(마 7:13-14).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들어서기를 주저하며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언제나 동행하시며 위로하고 보호하며 인도하신다.

다윗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기에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라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의 손길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언하시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고 밝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 착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면 누구나 천국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점차적으로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실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호하면서도 명확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등 성경에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여러 번 되풀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따라서 예수님 한 분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모두 내려놓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힘차게 천성문을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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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이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맏아들 카인에 의해 살해당한 둘째 아들 아벨의 시신을 부둥켜 않고 슬프게 울었을 것이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비통해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며, 삶의 경계선을 넘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후 되돌아 온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죽음은 퇴치할 수 없는 인간 최대의 적이었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면서도 죽음의 세계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2,000여 년 전 유대 땅 베다니란 작은 마을에서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 11;11)고 죽음에 관해 명확한 답변을 들려주셨다.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베다니에 살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였다. 예수님은 그들 삼 남매를 무척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거기서 가까운 그들 집에서 머무셨고, 그들도 언제나 예수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곤 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는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깨어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사실을 즉시 예수님께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곧바로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그대로 머무신다. 그 곳이 어디며, 예수님이 어째서 나사로가 위독한 것을 아시고도 그냥 계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손길이 필요할 때 곧바로 행동하지 않으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요 2:4)란 반응을 보였으며, 그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그의 존재를 알리라고 했을 때도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요 7:6)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에 따라 일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으로 숨진 것을 아시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하시던 예수님은 이틀 후에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향하셨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였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간 후였다. 문상객들을 접대하던 마르다가 뛰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여요.”라 말했다. 오빠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을 보내면서 그녀는 예수께서 즉시 달려오셔서 그를 낳게 해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한 말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식을 듣는 대로 오시지 않은데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마르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라 대답한다. 그녀의 답변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부활에 관해 일반적으로 지녔던 생각이었다. 


구약에 나타난 뚜렷한 부활신앙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에 오르면서 함께 간 종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고 명한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산에 올라가면서 아브라함이 그를 데리고 오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그가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이 같은 부활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 구약시대에 또 있었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욥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욥 14:14)라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죽음은 생의 종말이 아니고,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그녀의 오빠도 그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당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겠다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먼 훗날에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 답한 것이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 말씀하셨다. 그런 후 무덤에 누워있는 나사로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마르다는 “주께서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함으로 그녀는 예수께서 죽음을 물리치실 권능의 소유자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을 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그는 “부활이며 생명”이시기에 당장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있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살전 4:16-18)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덤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의 시신이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얼굴에 수건을 쓰고 손발이 베에 묶인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나사로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기 때문이다(막 5:35-43; 눅 7:11-1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몇 시간 만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하루나 이틀 후에 장지로 가는 도중 살아났지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 무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죽은 지 몇 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사흘간은 그 영혼이 주위에 떠돌지만 그 후에는 사라져 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숨이 끊어진 후 나흘이 지나면 영혼마저 떠나고 육신은 썩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영원한 생명이심을 증명하신 것이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는 “생명” 아닌 “죽음”일 뿐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주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의 완성이며, 기독교의 교리 자체이기도 하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을 영원으로 들어서는 첫 발 걸음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형체를 지니게 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50)이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와 같은 형체를 지닐 수 없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고전 15:51-52)고 말해 준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의 답변은 직선적이지는 않지만 믿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에 떠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지어졌으며,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 수 있는 형태를 갖추었으며, 새들은 하늘을 나를 수 있도록 그리고 야생동물들은 험한 산속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듯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우리들은 신령하며 썩지 아니할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고전 15:35-49).


사도 요한은 우리들의 변화할 모습에 관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1 3:2))라 들려줌으로 영생을 누릴 이들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 말해주고 있다. 이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현세에서도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향한 욕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용기도 없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 의도나 의지도 없는 비겁한 무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그들은 놀랍게 변화되어 죽기까지 충성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앎이라.”(고전 15:58)란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실천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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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께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1-18)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자들이 있다. 그들 말이 사실이라면 원숭이는 인간을 가장 닮은 동물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 중에는 생쥐의 신체적 기능이 인체와 유사하다는 이들도 있고, 조직적인 집단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개미와 벌은 인간을 닮은 생활을 한다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돌고래 두뇌의 기능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양과 같으며 예수님이 목자라고 말해준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기에(시 77:20),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원히 그를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시 79:13). 이사야도 우리는 모두 잘못된 길을 가는 길 잃은 양 같다고 했으며(사 53:6), 예수께서는 유대 땅 구석구석을 다니시며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목자 없는 양”같다며 그들을 긍휼이 여기시며 “나는 선한 목자”라 선언하신 것이다. 


양을 키우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기에 그곳 사람들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양은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음은 물론 시력도 약하여 무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방향을 잡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다 사나운 짐승들에게 해를 당하거나 험한 골짝이나 산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여인들보다도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여우나 이리가 많았고, 때로는 사자들까지 나타나곤 했기에 목자들은 양 무리가 그런 난폭한 짐승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양을 노리는 도둑이나 강도들에게 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부담까지 지니고 있었다.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가 “끊임없이 양떼를 돌보며,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물러나지 않는 용기를 지니고, 양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배부르게 먹이실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양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을 돌볼 목자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런데 고용된 목자들의 관심은 그들이 지켜야 할 양들이 아니고 받을 삯에 있을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들 삯꾼 목자들은 양을 치다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면 양들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가곤 했다. 


그렇게 되면 양들은 제각기 흩어져 이리나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갈 곳 몰라 헤매다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과 같은 삯꾼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보호하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한 목자 예수님이 그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시는 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로 시작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로 끝나는 다윗의 기도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시 23:1-6). 


선한 목자는 그가 돌보는 양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 하나하나의 특징과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곤 했다. 양들도 목자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응답했으며, 다른 목자들이 그들을 불러도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이 같은 목자와 양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양인 우리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를 밭으며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맡겨진 양떼를 먹이는 대신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그 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병들고 연약한 양을 고쳐주지도 않고, 상한 양을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양을 찾지 않고, 그들을 거칠고 잔인하게 다루며 그들이 흩어져서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거짓 목자들은 그의 진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셨다(겔 34:1-6).


이 경고는 참된 목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가장 충실하게 감당하신 분이시다. 악령에 사로잡힌 불우한 이들과 병마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고쳐주셨으며, 길 잃고 방황하는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고, 영육 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육의 양식을 풍족하게 공급해 주셨으며, 역경과 고통으로 넘어진 이들이 하늘나라의 소망을 보며 일어날 수 있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로서 하신 가장 큰 일은 그의 양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롬 3:23),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따라서 우리들은 죽음이란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위한 순국도 아니며, 기독교를 위한 순교도 아닌 죄 범한 인간을 죄의 값인 사망에서 구하기 위한 대속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께서 대신 오르시어 영원히 죽을 우리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성을 지니지도 않으셨고, 죄를 범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 “너희 중에 내게서 죄를 찾아낼 사람이 누구냐?”(요 8:46)고 물으신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처럼 죄와는 무관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주시며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은 그 말씀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죄 없으신 그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의 형을 당해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와 찬양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대신 그를 배척하고 핍박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발길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는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했지만 묵묵히 십자기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는 죽음의 형벌을 받으셨다.”(사 53:1-7)라 들려주고 있다.


예수님이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귀중한 진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비참한 패배 아닌 빛나는 승리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내가 다시 얻기 위해서다.”라 설명해 주신다. 


죄인들을 위한 그의 대속의 죽음은 생명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 외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 특권이 주어짐을 전파하였다. 


어떤 값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이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예수께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하신 말씀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문이신 우리 안에 거하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결코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신세가 되지 않음은 물론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영원한 삶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지키고 인도하시는 양떼 속엔 그의 몸 된 교회도 포함되어 있다. 그 교회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크기만 하다. 외부적으로는 포악한 짐승들과 도둑이나 강도들이 교회 안의 양 무리를 해하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으며, 내부적으로는 삯꾼 목자들과 사탄에 의해 조종 받는 거짓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탄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수단과 지혜로는 이 같은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교회를 파탄시키려는 사탄의 계교를 무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를 통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행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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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
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1:1-10)

 

“나는 생명의 문이다.”는 예수께서 그 자신이 “생명의 떡”이시며, “세상의 빛”이라 밝히신데 이어 세 번째로 그가 누구신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가 어떻게 양 무리를 먹이며 인도하시는가를 설명해 주신다. 


”목자의 땅“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자들은 언제나 앞에 서서 양들을 인도했다. 잘 훈련된 개들을 데리고 뒤에서 양떼를 독촉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던 다른 지역의 목자들과는 정반대였다. 앞장서서 양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도 목자들은 한시도 그들의 양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무리를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양이 없도록 하며, 다치거나 상처 없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거나 병들어 풀을 제대로 뜯지 못하는 양이 없나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하루 종일 힘들게 양들을 돌보다 날이 저물면 목자는 양들을 이끌고 우리로 향했다. 그 당시 양 우리는 사면이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거나 큰 돌들로 울타리를 치는 식으로 만들었다. 밤에 사나운 짐승들이 양들을 해치지 못하고, 도둑이나 강도가 양을 훔치거나 강탈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바위와 돌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그 같은 우리를 짓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우리에 도달하면 목자는 입구에 서서 양들이 병이 나거나 상하지 않았는지 세밀히 살펴본 후에 한 마리씩 안으로 들여보냈다. 모든 양들이 안전하게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목자는 우리 입구에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아 메고 있던 짐승가죽으로 만든 가방에서 빵과 말린 과일과 치즈를 꺼내 저녁을 먹었다.


그런 후 우리의 입구를 가로 막으며 길게 누었다. 양들이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도 저녁을 먹었으니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 위해 누운 목자가 양 우리의 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큰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누구든지 입구에 누운 목자를 타고 넘지 않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의 목자시기에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의 양떼들에게 접근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신 것은 그가 곧 문이기에 그를 통과해야만 양의 무리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히심으로 그의 허락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안겨주는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문 밖과 안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문 밖에는 차가운 비바람이 불어오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문 밖에서는 어둠과 공포 속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공포 속에 떨어야 하지만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평안한 마음으로 누워 몸과 마음에 산적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 문 안쪽이다.


이 같은 문 안과 밖의 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의 하나가 돌아온 탕자를 위한 잔치자리다(눅 15:11-32). 아버지가 눈물로 회개하는 둘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긴 후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마련한 화려한 잔치자리에 앉은 둘째는 아버지 집 문밖에 나가서 당했던 멸시와 치욕과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집 안에서의 기쁨과 환희를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늦게 돌아온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캄캄한 밤하늘 밑에 홀로 서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동생을 향한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즐겁고 흥겨운 풍악소리를 들으면서도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어야 했다. 문을 사이에 둔 안과 밖의 차이는 이처럼 큰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양의 문이심을 공포하신 것은 그가 눈을 뜨게 해준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출교 당했을 때다. 바리새인들이 눈 뜬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그를 공회에서 쫓아내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그의 문안으로 맞아드린 것이다. “내가 곧 문이니 내게로 오는 이들은 밖에 세워두지 않고 받아드리겠다.”는 약속대로였다. 


예수님은 그를 구세주로 믿고 찾아오는 그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 주신다. 예수님 옆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3)라 하자 예수께서는 즉시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4) 하신 것으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드릴 뿐 아니라 그들이 복되고 의미 있게 살며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 안에 안긴 이들은 누구나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간구함과 동시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를 여쭈어 볼 수 있다. 


1977년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과의 한 시간”이란 프로그램에 방영되었다. 그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과 통화를 하겠다고 970만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대통령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행운아가 될 수 있었던 확률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도 어려웠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과 직접 이야기 하기는 이처럼 힘들지만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직접 아뢸 수 있고, 하나님의 대답까지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핍박과 환란으로부터 벗어나며, 사탄의 어떤 기습공격을 당해도 굳건히 버틸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양의 문이심을 선포하신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초대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사랑의 초대에 응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며,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이 약속을 확실히 믿었던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 들려준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40명의 도둑들은 탈취한 돈과 보물들을 깊은 산속 동굴에 감추고 입구를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았다. 그리고는 동굴에 들어갈 때마다 “참깨야! 열려라.”고 소리치곤 했다. “참깨야! 열려라.”가 그 동굴 문을 여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그 암호를 알고 있으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온갖 보화를 소유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리고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마다 하늘의 기쁨과 풍요를 맛보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요한은 이것을 문 안에서는 “마음대로 드나들며 꼴을 얻는다.”고 기록했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리라.”(빌 4:4:19)고 들려준다. 


믿는 자들이 소유한 세상 재물은 사람들의 눈에는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많은 재물과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으며 살아간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 8:31)란 말씀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그 문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풍성한 삶의 축복까지 허락해 주신다. 그런데도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예수님은 그들을 가슴 문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신다. “볼 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양의 문은 무한정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문이 굳게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그 문이 열려 있을 때 들어가야 한다. 예수께서 간절히 두드리실 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모셔드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늦어져서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며 신랑 집 앞에서 울부짖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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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빛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였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로서 풍성한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할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자손대대로 기억하기 위해 지킨 명절이다. 


이 의미 깊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 외치셨다. 그리고 초막절 행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선포하신 말씀이 그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4개의 거대한 칸델라(밝고 큰 촛불)가 천정에 달린 곳에서 하셨다. 초막절 예식 중의 하나로 4개 칸델라에 불이 켜져서 어둡던 성전이 대낮처럼 밝아지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밤새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두 손을 높이 드시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소리 높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여기 밝은 빛을 발하는 칸델라는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성전을 밝혔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이 찬란한 불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이 불빛은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생명의 빛이니라.”였다.


떠오르는 태양은 캄캄한 세상을 광명으로 물들이며, 만물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열과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의 빛이시기에 죄로 어두워졌던 세상을 환하게 밝히시고, 그 속에서 길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사명은 어둠 속에 갇혀있던 세상을 광명으로 인도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며,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눅 4:18; 사 60:1)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기 전의 세상은 참으로 어둡고, 암울하고, 혼란했었다. 권력과 금력을 지닌 사람들은 온 세상이 마치 자기네 것인 것처럼 여기며 모든 일을 그들 마음대로 하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종속물로 취급하는 무지하고 악랄한 일들을 서슴없이 행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인간사회에서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며,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힘차게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가 그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대열에 끼지도 못했던 어린이와 여인들의 권익이 인정되고 보호받기 시작했으며,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착취하며 핍박하던 악한 무리들이 설 곳을 잃기 시작했으며, 너무도 당연시되던 노예제도의 폐지까지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소수의 지배층들만을 위해 존재하던 각종 제도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등한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도덕관과 윤리관은 정의와 정직을 넘어서는 숭고하고 고상한 고차적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니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 5:44-46)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가장 좋은 예 중의 하나다.


예수님의 빛은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치부도 들추어 내셨다. 그들만이 성결하고 의롭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들의 위선과 숨겨진 죄악들이 예수님의 불빛 앞에서 낱낱이 그 모습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악의 세력에 의해 형성되고 지배되던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밝히며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선교사 Archibald Campbell은 이 같은 예수님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세상은 영적인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들의 딸들과 누이들과 아내들까지도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 인종차별, 인격모독, 가정폭력이 거침없이 행해졌으며, 힘이 곧 정의요, 이기는 사람이 정의의 사도였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며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고통과 슬픔으로 허덕이던 이들이 소망을 지니고 살게 되었고, 역경과 시련으로 인해 좌절하여 쓰러졌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빛으로 다가오셨을 때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현상은 완악한 인간들의 마음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만이 옳고 의롭다는 자세를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으며,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던 이들이 이웃을 배려하기 시작했고, 세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혔던 마음들이 멀리 보이는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었으며,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찼던 가슴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인 것이다.


Archibald Campbell은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이 맺은 가장 대표적인 결실을 손양원 목사에게서 찾았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는 1948년에 일어난 여수반란 사건 때 그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관계당국에 청원하여 총살형에서 구해내어 양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자신을 불법 남침한 북괴군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총살당한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한 분이시다.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가슴에 깃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 양아들로 삼고, 그 자신은 괴뢰군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주의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것은 그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밝히신 것이기도 하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방의 의인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재 가운데 앉아서 “등불로 그의 머리를 비추시며, 그의 빛으로 암흑 속에서 그를 인도하시던 하나님”(욥 29:2-3)을 불렀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 27:1)라며 “주의 빛과 진리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43:1)라 간구했다. 


이사야도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5)며 “영원한 빛이시며 영광이신 하나님의 빛”(사 60:1, 19)에 행하며 살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미가는 “나는 엎어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이로다.”(미 7:8)라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가 세상의 빛이심을 초막절에 밝히신 것은 빛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이 그에게도 있음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란 사실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어둠을 사랑하여 그 속에 거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에게 광명한 세상을 보게 해줌으로써 그가 빛이신 것을 증명해주셨지만 그들을 어둠을 벗어나 빛 되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대신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 주장하고 나섰다.(요 9:1-41) 


그런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엔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그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경탄의 눈으로 보아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이 숨어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 같은 그들의 위선과 죄악이 예수님의 빛에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의지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수천의 알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낳는 거북이와 달리 알 하나를 낳을 때마다 온 동네가 다 듣게 울어대는 암탉과 같은 존재들이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라 하신 말씀은 생명의 길을 밝혀주시는 예수님의 빛을 외면하고 “회칠한 무덤” 같은 그들의 겉모습만을 드러내며 살기 원했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닮은 모두를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빛이 있으라.”였다. 말씀대로 빛이 비추이자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이 같은 창조의 과정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거나 그를 떠나면 어둠 속에서 절망을 벗 삼아 살아야 한다는 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빛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이들은 기쁨과 화평을 누리며 길 잃지 않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갈 수 있지만 빛 없는 암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비참하게 살다 파멸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 같이 슬프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빛이신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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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예수님은 누구신가?-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35,51)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사람에 따라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답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 물으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서슴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 대답한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야,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리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며 그들 칭찬하신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 묻는다면 예수께서는 무어라 답변하실까? 이 물음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각기 다른 표현으로 대답을 들려준다. 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누구신가를 일곱 번에 걸쳐 직접 밝히신다. 그것을 "The Great 'I Ams' of Jesus"라 부르는데, 그 첫 번째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I am the bread of life)이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든 큰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인간을 향한 그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행하신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이 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유대서민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민생고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 6:27)고 말씀하신다.


빈들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보고도 그를 그네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줄 지도자로 삼으려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할 때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여 살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자 예수님은 만나를 내린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고 일러주신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죽어 없어질 “육신의 생명”아닌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가 전날 사람들에게 먹인 떡과 물고기는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배고파질 육의 양식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들이는 그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 영원히 주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해 주신 것이다(요 4:34).


예수님이 그 자신을 “생명의 떡”(I am the bread of life)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I am who I am"라 들려주신 것처럼 그의 신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선언하신 예수님은 무리에게 그에게 와서 그를 믿으라고(Come and Believe)는 초청장을 전달하신다. 구세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에게 오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요한복음 도처에서 되풀이 된다. 


그에게 오라는 것은 세상을 버리고 그를 따르라는 것이며, 그를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그에게 맡기라는 의미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볼 때 제일 처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각도에서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려 노력했지만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성경은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시 36:9) 


“태초에 말씀이(예수님)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는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로 시작되는 요한복음도 예수님이 맨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예수님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준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상부상조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없다. 이 사실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약 1:1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본질은 “영”(Spirit)임을 말해준다.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진리와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지 못하고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며. 그 운명의 종착역의 이름은 죽음이라 일컬어진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예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골 1:16-17). 그래야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생명은 영적인 것이지만 우리들에겐 육의 양식이 필요하다.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육신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심과 동시에 육신도 보살펴 주신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 가 염려하지 말라.”하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어 장정만도 오천 명에 달하는 큰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신 것이다 영원한 삶을 갈망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같은 예수님의 약속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말씀에도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영어로는 “생명의 빵”으로 되어있다.)이신 것은 그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음식으로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결의를 다지면서 살기를 원한다면 “생명의 말씀인 나의 주여/ 목말라 주를 찾나이다/ 해변서 무리를 먹임 같이/ 갈급한 내 심령을 채우소서”라 찬송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신다. 솔로몬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 고백했으며,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전 12:13)라는 것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그의 결론이라고 말해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생의 만족을 가져다 주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하신 것은 이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늘 강건하게 해주셔서 우리 모두가 가쁨과 만족을 느끼며 영원한 나라를 향한 순례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신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지혜와 지식으로 채우시며, 우리의 마음을 화평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다간 사람들 중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최대의 공포의 대상이었음은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전 3:10).


그러나 인간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며(롬 3:23),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롬 6:23) 영생을 갈망하는 인간의 소망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아야 했다. 인간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면서도 지는 죄로 인해 그리로 향할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인간 최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찬란한 천국 문이 열린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소된 것이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들의 생명의 떡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떡을 먹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라 기도하며 전진하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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