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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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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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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예수님의 비유-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비유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 같은 의로운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역사가인 누가는 그들 두 사람을 위선자들인 바리새인의 대열에 합류시키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너무도 대조되는 이들이었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계의 지도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멸시받는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정부에 바쳤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네들은 동족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로마정권에 아부하는 민족적 죄인으로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충성하기 위하여 동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어느 날 융합할 수 없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다. 그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9시, 12시, 3시) 기도 드렸다. 어느 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들어간 곳은 제사장들 아닌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내부 성전이었을 것이다. 거기 들어선 바리새인은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거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또 나는 일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수입의 십 분의 일을 꼭 바칩니다.”라 큰 소리로 기도했다. 


이 기도 속에는 자기 죄를 자백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고 선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를 자랑하는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는 하나님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인가를 알린 것이다.


바리새인은 그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의롭고 훌륭한 사람인가를 보고했다. 그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으며,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짧은 기도를 하면서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 보다 얼마나 성결하고 월등한 인물인가를 밝히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부적절하게 살지만 자기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경탄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셨을 것이다. 그가 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간구가 아니라 그 자신을 최대로 미화하여 발표한 것에 불과한 까닭이다.


성전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들을 수 있게 “거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한 것은 명백한 인권모독이었다. 지금 같으면 당장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했겠지만 세리에게는 그럴 힘도 없었고, 그 같은 모독은 마땅히 당해야 할 그의 숙명이라 여겼을 지도 모른다. 


바리새인은 계속하여 그는 한 주에 이틀이나 금식하며 십일조 생활에 충실함을 밝혔다. 속죄일에 금식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일 년에 한 번하면 될 금식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하곤 했다. 대단한 열성이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생활에도 충실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금식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금식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기 위해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이 금식한 까닭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어김없이 십일조를 바친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칭찬받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린 위선적인 삶을 산다.”(마 23:23)고 질책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담화문 같은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시각에 성전에 들어간 세리는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섰다. 로마정부에 고용되어 세금을 징수해야 했기에 동족들의 멸시와 경멸의 대상임을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던 것도 아니었다. 유대인이기에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했는데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동족들을 괴롭히며 로마에 충성하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수조차 없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처럼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 기도한 것이다. 그가 가슴을 친 까닭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로마정부를 위해 일하는 세리가 된 근원지가 가슴이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원칙과 규정대로만 세금을 걷지 않았다. 책정된 액수 이상의 세금을 받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리들의 횡포는 힘들게 살아가는 유대 서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그들의 행위는 큰 죄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당 잡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거나,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착취하는 것은 죄악이라 말씀하셨으며, 남의 것을 강탈하면 빼앗은 것에 20%을 더하여 갚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레 6:2-5)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며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증거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눅 19“9)하신 것이다. 그 당시 세리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했기에 보상을 하려해도 누구에게 얼마를 해야 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성전안의 세리도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가슴을 두드리며 “하나님,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 기도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유창한 기도에 감탄하며 율법대로 사는 그를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개 숙이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는 세리를 향하여는 “죄인이면 집안에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지 거룩한 성전에는 왜 들어왔느냐?”고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들으신 것은 세리의 기도라는 말씀이셨다. 어째서일까?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기도 아닌 마음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가슴은 그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갈망하는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세리는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 기도했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시 53:1)라 한 다윗의 기도를 닮은 것이었다.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드린 기도에 응답하여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동족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을 도둑질한 죄인을 받아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싸이몬 키스트메이커(Simon Kistemaker)는 “세리는 죄인의 신분으로 성전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왔지만 바리새인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 성전을 나갔다.”고 말해준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다.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다시 한 번 들려주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 주위에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닮은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의 사랑의 손길에 우리들을 맡겨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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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예수님의 비유-불의한 청지기 비유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말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눅 16:1-9)

 

 

예수님의 비유는 쉬우면서도 귀중한 인생의 교훈과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그 특징 중의 하나다.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도 선명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상을 염두에 두고 자세히 읽어보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는 다른 어떤 비유에 못지않은 특수하고도 소중한 믿는 자의 삶의 지침과 하늘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부자가 자기 청지기가 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더 이상 네게 내 재산을 맡길 수 없으니 하던 일을 다 정리하라.”는 해고통지를 한다. 순간 청지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막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부잣집 청지기 경력을 가지고 빌어먹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그는 당면한 난국을 타개 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을 찾아낸다. 청지기는 그의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다 놓고 먼저 온 사람에게 지는 빚이 얼마냐고 묻는다. 그가 감람유 100말이라고 하자 “당신 증서에 50말이라 고쳐 쓰라.” 말한다. 그 사람의 빚을 반으로 탕감해 준 것이다. 그 다음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의 증서는 80석으로 고쳐준다.


이 같이 청지기는 자기 마음대로 빚진 사람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준다.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요리한 불법행위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청지기가 한 일을 칭찬한다. 그 주인에 그 청지기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사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듣는 이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같은 비유를 들려주신 것일까? 이 비유에 대한 의아심을 해소시키며, 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유대사회에서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청지기들은 주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서 주인의 모든 재산을 지키고 관리하는 전적인 책임과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기에 돈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선정한 청지기에게 집이나 농장을 관리하게 하고 장기여행을 하거나 정세가 불안하고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유대 땅을 떠나 안전한 곳에 가서 살기도 했다. 


그러기에 주인의 재산을 돌보는 청지기는 그의 재량권을 최대로 발휘하여 주인의 더 큰 신임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 주인의 재산을 착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다 발각되어 문책을 당하는 청지기들도 있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그런 부류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믿었던 청지기가 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은 주인은 그를 불러 그 동안의 모든 업무기록을 제출하고 그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한다. 그 청지기가 소문대로 주인의 돈을 횡령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파면 당하면서도 침묵한 것을 보면 소문대로 그가 주인의 재산을 가로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가 주인의 돈을 빼돌려 숨겨놓았다면 청지기 직을 그만둔 후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라 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그에 대한 소문을 사실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그의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증빙서류를 위조하여 그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불법 행위였다.


따라서 주인은 불법을 행한 청지기로 하여금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주인은 청지기에게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다며 칭찬했다. 주인이 자기 청지기의 범법행위를 은폐하는 범법을 행한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과 청지기가 행한 불의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율법을 범하는 죄까지 저질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라.”(출 22:25) 명하셨다. 


레위기 (25:36)와 신명기 (15:8, 22:25) 에도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이며,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리대금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이자놀이를 한 것이 당시의 유대사회였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그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채무자들 중 한 사람이 빚진 감람유 100말은 오늘 날의 868 갤론에 해당하는 양이었으며, 이만한 양의 감람유를 생산하려면 적어도 150 그루의 감람나무를 재배해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빚에 대한 이자는 일 년에 100%였다. 밀 100석을 추수하려면 100에이커 땅에 밀을 재배해야 했으며, 밀 100석에 대한 이자는 년 25%였다. 이것은 이 비유의 주인공인 주인과 청지기 모두 유대사회에서 금지된 고리대금업을 행한 범법자들이었음을 말해준다. 


두 사람 모두 불법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주인은 주종관계를 내세워 청지기를 해고했고, 해고당한 청지기는 문서를 위조하여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또 다른 불법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도 주인은 범법자 청지기를 처벌하지 않고 칭찬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청지기가 주인도 모르게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가 불법으로 감람유 100말을 50말로, 밀 100석을 80석으로 탕감해 준 것은 채무자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베푼 처사였다. 따라서 그들은 파면 당한 청지기가 그들을 찾아오면 환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청지기가 문서를 위조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옳지, 내가 이렇게 하면 그네들이 나를 박대하지 못할 것이다.”며 무릎을 친 까닭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청지기 직을 상실했다고 그를 문전박대하면 그와 공모하여 빚 증서를 고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까지 할 계산도 청지기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에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세상에 알리겠다며 그들에게서 금전을 뜯어내던 봉이 김선달 처럼 말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저지른 불법으로 주인은 상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주인은 재산의 손실보다 더 큰 이득을 얻었다. 어려운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부과하기는 했지만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인간미가 넘치는 관대한 사람이란 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것이었다. 


주인은 그의 청지기가 재산관리를 잘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 몰래 문서를 위조하여 그의 재산을 축내었지만 그를 고리대금업자에서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인물로 만들어 주었기에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물질을 어떻게 써야 하나를 일러주신 말씀이었다. 


청지기는 자기 것 아닌 주인의 돈으로 빚진 자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청지기가 이용한 주인의 돈도 따지고 보면 그의 것 아닌 하나님의 것이란 사실이다(대상 29;14). 


따라서 청지기는 결국 하나님의 돈을 사용하여 채무자들의 무거운 빚을 가볍게 해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그들의 소유를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사람들이나 꼭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하신 후에 예수께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말씀하신 것도 우리 주위에서 가진 것 없어 소외 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돈으로 무거운 빚진 자들의 짐을 내려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우리에게 할당된 물질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했더라도 다 남겨두고 빈손으로 생명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가야할 날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 날이 도둑같이 오기 전에 주어진 물질을 우리들이 가야할 하늘나라에 쌓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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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예수님의 비유-무익한 종 비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10)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다우나 안에는 죽을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들은 재물은 자기들처럼 의롭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소유해야 한다는 물질관을 지니고 그네들의 부당한 탐심을 정당화하는 위선도 서슴없이 행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들려주심으로 그릇된 물질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가를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경고해 주시는데 그것들은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알고 실천해야 할 인생의 수칙과도 같은 것들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말씀해 주신다. 


이기심과 악독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가 인간이기에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은 목에 큰 맷돌 짝을 달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이 작은 자”는 철없는 어린 아이나 초 신자들은 물론 힘없고 미천한 이들을 가리킨다. 동시에 그때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이방인들이나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배척 받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올바로 인도하여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항상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할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용서하는 마음은 믿는 자가 필수적인 성품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라면 언제나 또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되 용서하기에 앞서 죄 범한 사람을 “꾸짖고”,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나 생각이 죄일진대 죄악은 믿는 자가 증오해야 마땅하며,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귀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자들은 돌연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 아뢴다. 제자들이 그런 청을 드린 까닭은 만약 그들에게 큰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더 정성껏 돌보며, 그들의 잘못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던져지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랑과 용서는 믿음의 크기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참된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믿음과 기도로 무장하고 전진하는 십자군의 정병들은 그 어떤 험산준령도 넘을 수 있으며, 아무리 간교하고 악랄한 사탄의 기습공격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그때는 고칠 수 없었던 많은 병들이 더 이상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을 때는 할 엄두고 못 냈던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믿음을 지닌 성도들 앞에서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방해요서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연약한 형제들을 돌보며, 그들의 허물과 과실을 감싸주며 용납할 것과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라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 들려주신 것이 “무익한 종 비유”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신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시장할 테니 와서 밥 먹어라.”고 말할 주인이 있겠느냐? 종이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있을 지라도 주인은 “내 밥상을 차리고, 내가 먹는 동안 시중들다 내가 다 먹은 후 네가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시키는 일을 다 했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종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이해하며 일을 시키는 주인은 없었으며,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수고하는 종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대사회의 주종관계는 주인은 종들을 마음대로 부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따를 의무를 가지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주인과 종 사이에는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같은 주종관계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서구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고용주와 고용원 사이에는 상세한 고용계획이 체결되고, 고용원들은 그들이 결성한 노조를 통해 철저하게 그들의 권익을 보호받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종에 대한 갑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일꾼(종)이다(고전 4:2). 그러기에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의무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거기 따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의무를 감당한 후 권리를 행사하게 되는 것이 권리와 의무의 상관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무익한 종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계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할 마음의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막 9:35)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주셨다.(요 13:1-17)


섬김이 주인을 향한 종의 기본태도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심으로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눅 16:13).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마지막 설교에서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저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한 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선언하였다(수 24:15).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하나님만을 위해 우리의 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 비유가 말해주는 또 다른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상급을 받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고대시대에 노예나 종들은 아무리 위험하고 힘들더라도 주인의 명령이라면 아무런 불평이나 항의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떤 대가나 상급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또 기대할 수도 없었다.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인생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일꾼으로 선택된 우리들은 어떤 환란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하는 수고와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으며, 그의 동역자가 되어 그의 역사운영에 동참할 수 있는 축복된 사명까지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나는 무익한 종이다.”란 마음을 지니고 충성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다 천국 문을 두드리면 예수님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주시는 그 상을 받는 순간 우리는 무익한 종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익한 종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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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0
예수님의 비유-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 19-33)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끝내시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며 재물을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언행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의롭고 경건하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들 내면의 생활은 예수님이 “화 있을 진저, 너희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요!”라 하실 정도로 불의하고 추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재물은 선하고 정의롭고 능력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그들의 생각은 그네들의 물질관을 합리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그와 같은 그들의 생각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임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살펴보아야 할 줄 안다.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스럽게 사는 부자가 있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부스럼투성이의 거지가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웠다. 그런 그에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는 멀리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보게 되었다. 그는 큰 소리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에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십시오.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라 외쳤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들을 마음대로 누렸고,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당했느니라.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당하느니라. 그리고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가 없느니라.“ 


이 말을 들은 부자는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어 그의 다섯 형제에게 경고하여 사후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라 말해준다. 그러자 부자는 죽었던 사람이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며 다시 애원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며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참으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가 평소에 입었다는 자색 옷과 베옷은 그 당시 서민들의 삼년 품삯을 모아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다. 그는 그처럼 비싼 옷을 입고 산해진미로 잔치를 베풀며 나날을 즐겼다. 


이러다 보니 “안식일 준수” 같은 것은 생각 밖의 일이었고, 안식일 이외의 6일은 열심히 일하라는 율법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엄청난 물질의 축복을 받고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이 부잣집 문밖에서 거지 나사로는 온 몸에 성한 데가 없이 부스럼이 난 채 부자가 먹다 버리는 빵조각을 주워 먹으며 연명했으니 말이다. 


이 비유의 나사로는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리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와 동일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나사로라는 이름만이 명시되어 있는가에 대해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는 버림받았지만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산 그였기에 (“나사로”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이다.)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해도 큰 잘못은 아니라 믿는다. 


부자와 나사로에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날이 찾아왔다. 나사로의 시신은 참으로 쓸쓸하고 초라하게 이름 모를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에 반해 부자는 성대한 장례예식을 거쳐 특별히 마련된 묘에 안장되었겠지만 그 영혼은 꺼지지 않은 지옥 불속으로 떨어졌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부자와 사람은 물론 개에게까지 멸시받던 나사로의 운명이 생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이처럼 판이하게 바꿔진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얼핏 생각하면 부자는 지옥에 가야 할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다. 특별한 불법이나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일도 없으며, 그의 집 앞에서 문전걸식하는 나사로를 괴롭히며 핍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불행한 이웃을 돌보아야 할 인간의 기본임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를 찬양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산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음은 물론 하나님의 법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에게 주어진 물질은 그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나 그의 집 문밖에 누워 신음하는 나사로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속의 부자처럼 그에게는 “나”만이 중요했고, “오늘의 삶”만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그도 하나님의 일에 힘쓰며,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앞장서서 살지는 못했다. 가진 것도 없고, 몸조차 성하지 못해서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하고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그 같은 존재는 처다 보지도 않으며 매일 매일을 향락 속에 보내는 부자를 원망하거나 그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도움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만을 지니고 살았다. 


이와 같이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다 생의 종말을 맞이한 부자와 나사로의 거처가 천국과 지옥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은 인생이 마감되는 시간이 아니요 영생의 시작임을 말해준다. 그 영원한 삶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지옥의 고통에서 신음하다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바라보는 순간 부자는 큰 소리로 나사로를 시켜 손가락에 물을 찍어다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아브라함은 그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선정해 준 사후의 삶의 거처는 결코 변경되지 않음을 알려준 것이다. 인간법정에는 삼심제도가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한 번의 판결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나사로가 그에게 건너올 수 없음을 알게 된 부자는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 그의 다섯 형제들을 구원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을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며 그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도 부자는 포기하지 않고 죽었던 사람이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며 또다시 간청한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던 사람이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였다. 


하나님은 죄의 길을 따라 파멸로 향하는 인간들에게 그의 놀라운 권능과 사랑을 보여주시며, 또 숱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호소하며, 애원하셨지만 완악한 사람들은 듣지 않았음을 아브라함이 지적한 것이다.


부자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 영원한 지옥 불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았기에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축복 속에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재능과 소유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사용하며 하늘나라의 영화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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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예수님의 비유-불의한 재판장 비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불의한 재판장 비유”는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 11:1-13)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그의 재림에 관해 믿는 자들이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계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하신 후에 하신 것이며, 비유를 끝내면서도 그가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의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해주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어느 도시의 재판장과 과부다. 먼저 재판장에 대해 생각하면 그는 유대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분쟁이 생기면 유대인들은 법정에 가기 보다는 장로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꼭 법의 중재를 받아야 할 경우에는 원고와 피고가 선택하는 판사와 법정에서 지정하는 판사 셋이 그 사건을 다루게 되어 있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판사는 한 명이기에 그는 당시의 유대 왕 헤롯이나 로마 정부에서 임명한 비유대인 이었을 것이다. 그런 판사들은 상부의 지시나 뇌물을 받으면 증거와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 재판의 원칙 같은 것은 무시해 버렸다. 때문에 “도둑 같은 판사”(Robber judges)"란 말이 나돌 정도로 그들에 대한 평판은 좋지 못했다.


과부의 청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재판장에게 계속하여 요구한 것은 “내 원수에 대한 청원을 해결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다. 유대사회에서 과부들은 외롭고 고독했으며, 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핍박은 많고도 심했다.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신 18:5)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신 18:5)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지할 데 없는 과부와 이혼당한 여자들을 돌보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뇌물과 선물 받기를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했다.(사 1:23) 


하나님께서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들을 억압하며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겠다.”(말 3:5)고 경고까지 하셨지만 힘없고 가진 것 없는 과부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늘 억눌리고 짓밟히며 살아야 했다. 


이 비유 속의 과부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녀로서는 악명 높은 재판장을 찾아 다니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기로 소문난 재판장은 가련한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해 버리려 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불쌍한 그 여인을 돕는 것이 그의 의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더라도 그에게 돌아올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의한 재판장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과부는 계속하여 그녀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재판장은 “이 여자가 계속 성가시게 구니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가 매일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 생각하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재판장은 그녀가 매일 법정에 드나들면 그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일지라도 단념하지 않고 매달리는 여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그가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시므로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와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의 핵심은 동일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장 비유”에는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는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비유에는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눅 11:3)는 기도응답의 대원칙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나중 비유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였다. 그러나 두 번째 비유의 주인공인 재판장과 과부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신분상으로 따지면 재판장은 특권층에 속했고, 과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는 가련한 존재였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재판장이 과부의 청원에 손도 대지 않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에게 그녀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재판장이 그녀의 청을 들어준 것은 앞으로는 판사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겠다는 결의에서가 아니었다. 불쌍한 여자를 도와야겠다는 인간애의 발로도 아니었다. 연약한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계속되는 청원에 더 이상 신경 쓰기 싫었고, 그녀로 인해 혹시라도 그의 명성에 악영향이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불의한 재판장은 그녀의 사건을 처리해 준 것이었다.


불의한 재판장은 올바른 동기에서 과부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인자하심이 한없이 크고, 그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시 117::2) 


불의한 재판장이 불쌍한 과부의 청을 들어준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매일 외쳐대는 하소연이 듣기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밤낮으로 소리 높여 기도한다 해도 귀찮아서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언제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계시기에 그의 시간표에 따라 그가 택하시는 방법에 의해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내 아버지시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기도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로 물으셨다. 이 비유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신 후(눅17:20-37) “불의한 재판장 비유”를 들려주셨으며, 비유를 끝내시면서도 그가 다시 올 때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다시 오셔서 공의로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이 되실 분이시다.(행 10:42)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끄기 있게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비유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항상 기도해야 함은 물론 교회적으로도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모든 교회들이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으며, 믿는 자들 모두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믿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과 박해는 크기만 하다. 그러나 십자군의 정병들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천성문을 향한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십자가의 불빛이 어둔 세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는 아직도 세상의 핍박과 박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갈보리 언덕에서 패배한 사탄의 잔당들이 갖가지 악랄하고 간교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교회의 파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끊임없는 기도로 사탄의 계교와 유혹을 물리치며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 저희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며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탄의 달콤한 유혹도 물리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라 보고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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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아들 비유(2)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는 눈물로 기도하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그는 참으로 아들들을 사랑하는 사려 깊은 아버지였다. 둘째 아들이 그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얼마든지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판단이 부족한 아들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며 달래거나 꾸짖어 보아도 생각을 바꿀 아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그의 말대로 해준 후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를 기다리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한시도 편할 수 없었다. 


잘못을 깨닫고 속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가지고 떠난 돈을 물 쓰듯 하며 방탕한 생활에 묻혀 지내다 들판에서 유대인들에게 죽기보다 더 치욕적인 돼지를 치며 연명한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사람을 보내 아들을 데려올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올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었고, 여인이 등불을 켜 들고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것은 은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간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아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범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때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창가에 기대앉아 아들이 떠나 걸어간 길을 바라보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멀리서 그의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거리도 멀었고, 행색도 초라하기 그지없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틀림없는 그의 아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이 광경을 무디 목사는 사랑의 망원경으로 아들이 걸어올 방향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지치고 피곤하고 초라한 아들의 모습이 그의 망원경에 포착되는 순간 농장주의 체면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내어버리고 아들을 향해 맨발로 뛰어갔을 것이라 말한다. 


이상한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 같은 건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 맞춘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라며 그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한다.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 당시 귀한 사람을 맞이하는 예우였으며, 반지를 끼워준 것은 그를 아들로 인정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 신을 신긴 것은 그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노예나 가난한 사람들은 신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녔다. 탕자도 신발을 신지 못하고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게 함으로 그가 집을 나가기 전에 누렸던 그의 둘째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런 후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열라고 분부한다. 목자는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발견하자 동네 사람들에게 은전을 되찾은 감격과 기쁨을 알렸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기쁨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길 수 있는 잔치를 베푼 것이다. 


이 잔치를 준비시키면서 아버지가 종들에게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아왔다.”고 한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죄악 된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아들이 제 정신이 들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단순히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 하지 않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한 것은 죄 속에 산다는 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요, 죄악을 벗어버려야만 살아있다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돌아온 아들에 대한 유산문제가 어떻게 종결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는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은 아들을 아버지가 기쁨으로 맞이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탕자를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풍악이 울리면서 즐거운 잔치가 시작되었을 때 밭에 나갔던 맏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집안에 휘황찬란한 등불들이 켜있었고,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소리를 듣고 맏아들은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께서 그를 맞아드리고, 이같이 잔치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나와서 함께 들어가자고 하자 그는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건만 저를 위해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놀아나며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아버지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이 같이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까?”라 항의한다. 


여기서 맏아들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가 “당신에게는 아들인지 몰라도 내게는 동생이 아닙니다.”란 의사표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너는 나와 항상 같이 있으니 내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해준다. 


아버지는 반항하던 순종하던 모든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심과 동시에 맏아들도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쳐준 것이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참여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예수께서 거기 관해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를 끝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효막심 했던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 주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맏아들이 안으로 들어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간 것만은 확실하다.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던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며 기뻐하자고 권면한 아버지였으니까 말이다. 선택은 맏아들에게 주어졌다. 사랑과 용서와 평안으로 가득 찬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누리느냐 아니면 동생을 미워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어둠 속에 계속 서있어야 하느냐를 결정할 사람은 맏아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시기 전에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세 비유 모두 하나님을 떠나 죄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처럼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는 없지만 죄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와 기쁨과 행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리시며, 그들이 돌아오면 두 팔을 활짝 벌려 맞이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축출당한 후에도 사람들은 끈임 없이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당돌함과 우매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굴의 인내심을 발휘하시며 그들을 멸하는 대신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하지만 구원의 문이 열렸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은총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하여금 길 잃고 헤매는 죄인들을 찾아 나서게 하시고, 성령의 불울 밝히시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암흑 속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게 하셨으며, 하나님 자신은 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죄인들을 발견하면 달려가 맞아드려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잔치를 베풀고 환영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비유는 구원의 역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행해짐을 보여주고 있다.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성자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를, “잃어버린 은전 비유”는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를, “잃어버린 아들 비유”에서는 인류구원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들 세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오늘 날 세상에는 수많은 현대판 탕자들이 방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 우리들 자신이 깨어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행여 우리가 있는 곳이 온갖 풍요와 기쁨과 만족이 있는 하나님의 품 아닌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과 굶주림이 있는 삭막한 들판이라면 즉시 그 곳을 빠져 나와 우리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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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아들 비유(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어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드리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탕자의 비유”로 더 많이 알려진 “잃어버린 아들 비유”처럼 널리 알려진 비유도 없다.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가장 짜임새 있게 쓰여진 “짧은 이야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 중 마지막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것보다 앞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비유”가 지닌 연관성과 그들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한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그들을 피하기는커녕 함께 어울려서 말씀하시며, 음식까지 잡수시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꺼렸다(마 23:15). 


구원은 자기네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믿었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죄인들에게 하늘의 진리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수군거렸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과 은전 비유를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들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아버지를 도우며 농장에서 일했는데 둘째 아들에게 농장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하며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거기다 변화 없는 농장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그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당돌한 요구였다. 장남도 아닌 차남이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아버지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은 둘째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다가 그가 노골적으로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자 그대로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마음이 들뜬 그를 꾸짖느니 보다는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 제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자식들에게 상속되는 유산의 비율은 맏아들에게 삼분의 이, 둘째에게 삼분의 일이 돌아가게 되어있었다(신 21:17).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 돌아간 것은 삼분의 일에 못 미치는 구분의 이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어째든 법적으로 그가 받을 수 있는 재산을 분배받은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나간다.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위에 바벨로니아, 그리스, 이태리, 애굽 등이 있었으니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단조로운 농장생활과 엄격한 유대 가정에서 벗어나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 발을 디딘 젊은 청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발견한 기쁨과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의 능력과 재능을 발휘하며 젊음의 꿈을 이루는 대신 아버지와 형의 제재와 간섭이 없는 상황을 이용하며 방탕한 생활로 빠져든다.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탕진하더니”란 성경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경건한 삶의 원칙들을 집어 던지고 세상의 쾌락 속으로 뛰어들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가진 돈을 보고 덤벼드는 거짓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먼 유대 땅에서 온 돈 많은 젊은 청년이야 말로 힘 안들이고 요리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과 세상을 몰랐던 그의 방탕한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가졌던 돈이 바닥나자 그를 찾아오거나 그와 함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머나먼 타국에서 주린 배를 안고 거리를 헤매는 가련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부잣집 둘째 아들로서 호의호식하던 그가 돈의 위력 앞에 머리 숙였던 간사한 사람들과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해주던 여인들 틈에서 정신 없이 웃고 즐기다 헤어나기 힘든 인생의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했던 그는 들판에 나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된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그 고기를 먹지 않음은 물론 돼지를 치면 저주받은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그가 그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 앉은 그에게 떠나온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다. 넓고 아름다운 농장 한가운데 세워진 사치스러우면서도 아늑한 집에서 많은 종들을 부리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집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을 지닌 아버지의 간섭과 잔소리가 몹시 싫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모든 일들이 답답하고, 고루하고, 진취성이 없다고 느꼈다. 따라서 아버지 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인생이 낭비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황홀하고 달콤한 세상과의 신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세상이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가지고 온 돈이 바닥나면서 그의 곁에서 세상연락을 즐기던 친구들과 그의 환심을 사고자 온갖 아양을 떨며 웃음을 팔던 여인들도 모두 떠나가고 쓸쓸하고 차가운 들판에서 유대인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돼지들 틈에 끼어 그들의 사료인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으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모두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는 이 중대한 사실을 제 정신이 들었을 때(when he came to himself) 깨달았다. 제 정신이 들고 보니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크나 큰 죄를 범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칙 중 인간상호 간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출 20:12)인데 그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이 같은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둘째 아들은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다. 가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며, 그를 아들 아닌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의 농장에는 세 종류의 품꾼들이 있었다. 우선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대를 이어 주인과 함께 사는 일꾼들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품삯을 받고 일하는 정규일꾼들이 있었고(눅12:15), 마지막으로 필요한 때마다 임시로 고용하는 오늘 날의 비정규직 성격을 지닌 일꾼들이 있었다. 


이 세 계층의 품꾼들 중 제일 마지막인 아무 때나 해고당할 수 있는 임시 고용원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짧은 생각과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집을 떠난 그가 진정으로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계하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위대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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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은전 비유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8-10)

 

 

누가복음 15장은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많이 알려진 장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을 “복음중의 복음”이라 말하며 애독하는 까닭은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 비유”(4-7), “잃어버린 은전 비유”(8-10), “탕자의 비유”(11-32)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비유 중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는 내용은 다르지만 그 핵심과 목적은 동일하다.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통해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마다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 중 두 번째 것인 “잃어버린 은전 비유”는 길이가 제일 짧다. 어떤 여자가 그녀의 은전 열 개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전부다. 이 짧은 비유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이 어떤 것 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평범한 서민층의 가정주부였으리라 생각되는 이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 “드라크마”는 희랍 동전으로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되었다. 원래 그녀가 소지했던 드라크마는 열 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열 개의 은전은 그녀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목걸이나 머리장식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때는 여자들이 결혼하면서 은전을 엮어 목걸이나 머리장식 같은 것을 만들어 결혼기념물로 삼는 일이 많았다. 그런 여자들은 그들이 유부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장식물을 지니고 다녔다. 오늘 날 여자들이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듯이 말이다. 그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이 그녀의 결혼기념물에서 빠진 것이라면 그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이 크고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은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였다. 누가 훔쳐갔다면 은전 하나만을 가져갈 리가 없으니 분명히 집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 시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흙 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특별히 창문은 없었고 천정 가까운 곳에 벽돌 몇 개를 떼어놓는 구멍이 환기통과 창문 구실을 했다. 그러기에 집안은 대낮에도 컴컴했다. 하나뿐인 방은 마른 갈대와 각종 풀들을 깔아 놓았기에 거기 떨어져 박힌 작은 물체를 찾아내는 것은 모래 속에 묻힌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 기념물이며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임을 입증하는 은전을 찾기 위해 그녀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우선 어두운 집안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켰다. 기름이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밤에만 사용하는 등잔을 한낮에 밝힌 것이다. 


그런 후 그때 사용하던 종려나무 가지로 만든 빗자루로 집안 구석구석을 쓸었다. 쌓인 먼지를 쓸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종려나무 가지로 엮은 빗자루로 마른 갈대와 풀들이 깔린 방을 쓸면 그 속에 박혀있는 은전과 부딪쳐서 금속성 소리가 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근심과 걱정에 싸여 초조한 마음으로 땀을 흘리며 방안을 쓸며 뒤지다 반짝이는 은전이 눈에 띠웠을 때 그녀의 기쁨은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컸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라 외쳤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마을로 돌아와 친구와 이웃 사람들을 향해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소리치며 기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여자도 “잃었던 은화를 찾았다.”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비유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것과 같은 진리가 담겨 있는 “잃어버린 양 비유”를 하신 후 곧바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그의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따라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의 주제는 동일하다. 어째서 예수님은 인간 하나하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는 세 가지 비유를 연이어 하신 것일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크고 영원하심을”(시 117:2) 강조하기 위함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도 있다. 우선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비유 모두 방황하는 죄인을 기다리며 찾으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을 전해준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첫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간절한 마음과 수고와 희생은 나타나 있지만 찾은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둘째 비유에는 여인이 은전을 찾기 위해 시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나타나 있다. 여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등불을 밝힌 것이다. 대낮이었지만 집안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갈 곳 몰라 헤매는 영혼들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 말씀하셨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요 8:12, 9:5)을 맞아드린 믿는 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의 자녀 된 믿는 자들이 세상을 밝힐 불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등불을 켜든 여인은 온 집안을 샅샅이 쓸었다. 등불을 들었지만 어두컴컴한 방이 환하게 밝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른 갈대와 풀들로 덮인 방바닥 어딘가에 박혀있을 작은 은전이 쉽게 눈에 띠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전이 “나 여기 있습니다.”라 말 할 리도 없기에 그녀는 은전이 종려나무 가지에 부딪쳐 내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으려 한 것이다. 노련한 목자들은 양들의 적은 신음 소리를 듣고도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어 돌보아 주곤 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음성을 듣고 달려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 그러기에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이 여기셔서 응답하소서(시 27:7)”라 간구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들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지치고 피곤하여 어둠 속에 쓰러져 고초 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상처받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죄악의 물결에 떠내려가며 “구해 달라.”는 이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롬 10:17) 때문이기에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줄 책임은 먼저 말씀을 받은 우리들인 것이다.


희미한 등잔으로 어둔 방을 밝힌 방바닥을 쓸다 빗자루에 부딪치는 은전 소리를 듣고, 반짝이는 은전을 집어 들었을 때 여인에게 찾아온 기쁨과 환희는 크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자, 함께 기뻐합시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습니다.”라 외친 것이다. 


이 같은 여인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리라.” 말씀하셨다. 은전을 되찾은 여인이 온 마을과 더불어 기뻐하며 행복에 잠긴 것처럼 하나님은 한 영혼이 회개하면 그의 천군천사들과 함께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은전은 여인에게 너무도 귀중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방탕한 길을 가다 눈물의 회개를 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 비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어리석은 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사 53:6) 우리를 찾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사를 깨달을 수 있다. 


“잃어버린 은전 비유”에서는 여인이 등불을 들고 어둔 집안을 구석구석 쓸며 없어진 드라크마를 찾은 장면을 통해 성령께서 죄로 어두워진 캄캄한 밤에 갈 길 모르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비추심으로 광명한 세상으로 이끄신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 죄 범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어둠 속의 죄인을 회개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의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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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양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를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어린아이들도 많이 알고 있는 “잃어버린 양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데, 두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배경이 다르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마태복음의 경우 “잃어버린 양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는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 묻자, 예수께서 답변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이 비유다. 


누가가 말해주는 이 비유의 배경은 마태의 것과는 다르다. 주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하자 거기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것이 이 비유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기를 꺼렸다(시 1:1-6).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죄인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대화하며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며 비방한 것이다(눅 15:1-2).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이 “잃어버린 양 비유”다. 


예수님 당시에 양을 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때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양을 칠만한 장소도 많지 않았고,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의 지형 또한 좋지 않았다. 고원지대인 산등성이로 양들을 몰고 올라가야 했는데, 목자들이 못 보는 사이에 무리를 이탈하여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다 양 옆의 계곡이나 협곡으로 들어가는 양들은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수렁에 빠지기 쉬웠다. 


그렇게 되면 10미터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양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혀먹거나 굶어 죽은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목자들은 양이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 한 마리를 찾아 험한 골짜기와 계곡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은 양을 집단적으로 사육했다. 개인적으로 자기 소유의 양만을 친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끼리 그들의 양들을 모아 노련한 양치기들에게 맡겨 돌보게 한 것이다. 


보통 백 마리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양들을 둘 혹은 세 명의 경험 있는 목자들에게 맡기면 그 마을의 단합에도 도움이 되고, 양들의 안전도 보장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목자들은 이른 아침에 그들의 양떼를 몰고 산 위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면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반드시 양의 수를 세어보곤 하였다. 


만약 한 마리라도 부족하면 없어진 양을 찾기 위해 목자 중 한 명이 주위의 협곡과 계곡을 비롯한 온 산을 샅샅이 뒤지며 다녔다. 나머지 목자들은 남은 양들을 지키며 기다리다 밤에 양떼를 몰고 산을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러면 온 마을이 걱정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간 목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목자가 잃었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면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위험한 산속을 홀로 헤매다 무사히 돌아오는 한 마리 양은 마을의 경사요 기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없어진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온 산을 구석구석 뒤지는 목자의 강한 책임감과 사랑의 마음이다. 그 당시 목자들은 없어진 양을 발견하지 못하면 밤을 새우면서까지 양을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양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회생되었다는 증거라도 확보하지 않으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자기네 소중한 양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깨닫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배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태에 의하면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 묻자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리키며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 말씀하셨다. 


그런 후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죄 짖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 짝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 하시고, 들려주신 것이 이 비유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가볍게 여기며, 멸시하는 천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심을 밝혀주신 것이다. 


목자가 그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듯이 하나님은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 특히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둘러싸인 주님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까지 먹는다.”며 비난하자 예수님이 들려주신 것이 “잃어버린 양 비유”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온 목자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자, 함께 기뻐합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습니다.”라 외쳤다며 비유를 끝내신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 시대에 세리들은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 찍힌 죄인들이었다. 종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그들을 속박하는 로마정부에 바쳤으며, 많은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하여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리들이나 부도덕한 여인들은 유대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당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를 원하신다고 이 비유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이 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 믿었으며, 이방인이나 그들 눈에 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 사이엔 높고 두터운 장벽이 형성될 수박에 없었다.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 안에서는 의인이나 죄인의 간격이 없어지고, 모두가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같은 사실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나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니라.”(엡 2:14-19)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멸망의 길을 걷던 죄인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기쁨을 참지 못하신다. 회개할 필요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한 명이 영생을 얻으면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 범한 사람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대하며 예수님은 슬퍼하시며 분노하신 것이다. 


한 명의 죄인이 천국 문으로 들어서면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이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모르던 이들이나 비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네들이 구원받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오늘 날에도 우리들 주위에 적지 않다. 


예리하고 단호하게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허물과 잘못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 외쳐대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믿는 의로운 사람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며, 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영혼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찾아 언제든지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멸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라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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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8
예수님의 비유-망대건축과 전쟁준비 비유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 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르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테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33)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수많은 무리가 뒤따랐다. 그런데 그들 전부가 예수님을 인류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현실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그를 끈덕지게 따르는 무리를 향해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 6:26) 하신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둘러쌓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주님을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하러 온 민족 해방자로 믿고, 그가 집권하면 한 자리를 하려는 야망을 품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슬프게도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한과 야고보였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말씀해 주셨다. 그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첫째 조건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하신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으로서 듣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전부였듯이 부모와 형제와 처자는 우리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미워하라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 뿐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과 형제를 네 몸 같이 사랑하라.”하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도 상반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인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니 이 또한 우리들의 논리와 이성으로 받아드리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미워하라”(Hate)는 단어가 상대를 경멸하고 증오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보다 저것을 “덜 사랑하라”는 의미임을 안다면 모든 의아심이 사라진다. 


그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우리가 정성들여 보살피며,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부모와 형제까지를 멀리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람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더 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도 실제로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진정으로 섬기려면 목숨까지도 불사하고 주님께 충성하며, 주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어떤 사람이나 값진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보다 더 진실하고 강해야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충성스런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 또한 듣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며 우리가 진 슬프고 괴로운 인생의 짐들을 다 맡아주시겠다 하신 예수께서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져야만 그와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시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삶의 최고 우선순위로 삼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조건이라면 그를 위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 영광과 권력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말씀이 쉽게 받아질 리 없었다. 그러기에 그의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가 망대건축과 전쟁준비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 소유의 농장이나 포도원에 망대를 세우곤 했다. 거둬드리는 곡식과 과일을 침입자들에게 도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망대가 있는 농장이나 포도원은 그 가치가 망대 없는 것들보다 높았다. 


뿐만 아니라 망대를 세우면 인근 주민들의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세워진 망대는 그 지역 전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농부들은 가능하면 망대를 세우기 원했는데, 간혹 무턱대고 공사를 시작했다 자금이 부족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농장이나 포도원은 가치가 떨어짐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서 무능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까닭은 자신과 그 지방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지만 망대의 높이와 그것을 세우는데 필요한 공사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계속하여 들려주신 전쟁에 임하는 임금의 비유도 내용은 다르지만 취지는 같은 것이었다. 적국이 국경을 범한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어느 나라 임금이든지 국토를 지킬 태세를 갖추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국과 상대국의 국방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침략군과 싸울 것인가 협상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의 군사는 만 명이었고, 상대의 병사 수는 이만 이었다. 따라서 적군의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싸우기 보다는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현명한 결단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듣는 이들이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망대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소요경비를 산출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일러주셨고, 그 다음에는 자국의 병력으로 적을 격퇴시킬 수 있는가를 면밀히 검토한 후에 전쟁과 화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통치자의 올바른 자세임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결단을 해야 하나를 생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두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것들이 있고, 하고 싶지만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그들을 감당할 각오를 한 후 예수님과 세상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두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 말씀하신 조건들은 참으로 받아드리기 힘든 것들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족속들을 나의 제자로 삼으라.” 엄숙한 명령을 내리셨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부당한 말씀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며 예수님이 망대건축과 전쟁준비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그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이들을 돌아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며 그들의 인생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만들라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선택해야 한다면 부모, 형제, 처자에 앞서 예수님을 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 가신 길을 걸어야만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감동만으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가 그러했듯이 첫사랑을 잊어버리게 되고(계 2:3), 예수께서 토해내고 싶다 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 3:15-16). 


예수님은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과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반반씩 가진 제자들을 원하지도 않으신다. 그런 사람들은 돌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드리지만 그 말씀으로 인해 고통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두 개로 나누어진다. 우리들 앞에는 숱한 목표들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어느 길을 걸으며, 무엇을 택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켜 드리기를 원한다면 하늘나라로 가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주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의 인생 전부를 예수님께 바쳐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단을 할 시기는 “지금”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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