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김대억 칼럼

daekim
AB9A2D1B-3642-4104-8056-AAACCFDA4893
58004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18
,
전체: 558,474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메뉴 열기
daekim
daekim
117522
9195
2024-07-25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수도 서울을 장악한 90일 동안 천일공노 할 만행을 저질렀다. 때문에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소위 작전상 후퇴로 다시 한 번 수도를 저들에게 내주게 되었을 때 모든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서울을 벗어났다. 가다가 죽더라도 그들의 포악함과 잔인함을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거리에 인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서울을 떠날 수 없었던 극소수 선량한 시민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바뀌는 세상에 편승하기 위한 악한 무리들의 눈치를 살피며 도시 구석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특수 목적을 지니고 공포의 도시에 남아 있었던 작은 집단이 있었으니,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불행한 시민으로 위장한 국군첩보대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부부, 부자, 혹은 친척으로 행세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정체가 탄로 나게 되자 필사의 적진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피차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아내로 위장했던 여자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저는 틀렸어요, 어서 여기를 벗어나세요.” “당신을 남겨두고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진정과 결의로 가득 찬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부부로 위장한 사랑하는 남녀였던 것이다. 
“당신은 가셔야 합니다. 당신이 사는 것은 제가 사는 것이니까요.” 남자를 올려다보는 여자가 밝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어느 작품의 한 대목이다. 작가도 제목도 내용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지만 숨져가는 여자가 남긴 “당신이 사는 것은 제가 사는 것입니다”란 말은 물망초 꽃잎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만남이 없어도 대화할 수 있고, 함께 호흡할 수 있은 사이가 그들이다. 그네들은 서로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사랑, 부러운 사랑, 해보고 싶은 사랑이다. 그러나 난 이들보다 깊고 참되며, 성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을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타인들이었다. 서로가 무관심하였고, 미워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면서 자신을 회생하며 서로를 돕고 격려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모함이니 질투나 서로를 향한 비난의 감정 같은 것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은 말했다. “보라! 저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라고. 

 

그네들이 살던 시대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모든 것이 변하고 발전하고 풍요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 같은 건 찾아볼 길이 없다. 풍족하고 안락하고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으로 진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슬픔의 늪 속에 빠져있는가 하면 북미 땅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비만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가지만 지구 저편의 제3세계의 어린이들은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슬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랑의 온실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조차 사랑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 

 

어째서 이런 슬픈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왜 교회와 교인들은 날로 늘어나는데 세상은 날이 갈수록 병들어 가고 타락해 가는가? 믿는 자들의 가슴 속에 사랑의 불길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랑하자고 외치면서 실천은 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

우리 모두 우리들 가슴 속의 사랑을 점검해 볼 때다. 그리고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울 때다. 주안에서 형제자매 된 우리들이 먼저 사람으로 하나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사랑이 강권적으로 우리를 그의 형제자매로 삼으셨으매 우리들은 결코 헤어 질 수 없는 사이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는 안 불 것처럼 모른척하며 멸시하고 증오하다 훗날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때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헤어질 수 없는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주안에서 하나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메마르고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어야 한다.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열차에 탑승시켜야 한다. 제각기 멸망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의 대열 속으로 불러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인생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7300
9195
2024-07-18
삶을 체념한 사람들

 

대학시절 은사였던 박 교수님은 참으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영문학과 불문학을 전공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한 그는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중의 한 분이었으며, 강의실 밖에서도 제자들에게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분이었다. 그가 장미동산 잔디밭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문학과 철학과 인생의 이야기 속엔 젊은이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인생행로를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투병기”란 그의 글을 어느 일간지에서 본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반가움으로 그의 특유한 필체가 물씬 풍기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후두암으로 방사선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을 지닌 영문학자이며, 겸손하고 진실한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의 길동무인 그가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불치의 병의(그 당시 후두암 말기 환자들의 회복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희생물이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난 믿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되풀이 하며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암 환자들이 둘러앉은 방사선치료 대기실 환자들에게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삶의 순간순간을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들 사이엔 형식과 체면과 가식이 없다. 병세가 호전된다는 진단을 받는 동료 환자들을 얼싸 안고 어린애처럼 기뻐하는가 하면, 이제는 집에 돌아가 편히 쉬라는 통보를 받은 환자를 껴안고 흐느껴 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방사선치료 환자대기실인 것이다. 

 

삶의 종말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의외로 침착하다. 조용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한다. 맞잡은 손길을 통해 서로의 맥박을 느끼며, 마주보는 눈길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전달된다. “오히려 편안합니다. 조용히 지난날들을 정리하며 남은 시간을 아끼겠습니다. 낙심치 말고 투쟁하십시오. 완치되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차분한 음성으로 생의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 나가는 삶을 체념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등으로 눈물 닦은 이처럼 순박하고 선한 사람들을 다른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박 교수님의 “나의 투병기” 속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투병기라기 보다는 죽음을 앞둔 인간들의 순수해진 마음과 그들 사이에 오가는 참된 이해와 사랑을 묘사한 글이었다. 이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노라는 끝맺음은 인생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선생님의 결의를 나타내 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바닥 모를 때의 심연(深淵)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알려고 하지 않고 나의 삶에 최우선을 두다 보니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모함하고 싸우며 도토리 키 재기를 해가며 바동대는 것이리라. 인생의 막이 내일 내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서로 증오하고 다투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수단으로 방사선치료를 받는 암 환자들에겐 부귀와 권력이나 명예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미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한 그들이기에 남들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그들이 원했던 부귀나 권력 같은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대신 그네들은 피차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짧은 기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거두어질지 모르는 우리의 생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의미 있고 아름답게 살 수는 없을까? 나만을 위한 삶을 버릴 때 그것은 가능하리라. 내 욕망의 실현과 목표 달성만이 우리의 삶의 목표로 남아있는 한 우리에겐 참된 이웃도 있을 수 없고, 나 아닌 남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며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이니까.

 

그러나 내 욕심의 성을 헐어버리면 타인은 나의 이웃이 되고,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될 수 있다. 분열이 있던 곳에 화평이 찾아오고, 혼란과 다툼이 사라지고 안정과 질서와 평화가 우리들의 삶 속에 찾아오지 않겠는가. 이 같은 아름답고 참된 삶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육신이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그래야만 남은 인생의 기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6169
9195
2024-07-11
다윗의 생애 (6)

- 도피 중에도 사울을 구한 다윗 –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들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삼상 24:1-7)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잡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광야 앞 산 길 가에 친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을 알고 ,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삼상 26:1-5)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여러 곳을 방황하던 중 엔게디 광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이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잡으러 왔다. 사울이 이처럼 많은 군사들을 동원한 것은 다윗을 잡으려는 그의 의지와 집념이 엄청나게 강했음을 말해 준다. 동시에 그 당시 다윗에게도 그의 폭정에 항거하여 다윗에게로 간 용맹스럽고 신앙으로 무장된 600명의 군사들이 일었음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엔게디 지역은 석회석 지대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동굴들이 많았다. 때문에 양치는 목자들은 그 중에 적당한 것들을 골라 그들의 생활 주거지로 삼기도 했고, 날씨가 사납거나 추울 때는 가축들의 거처로도 이용하였다. 다윗과 그의 병사들은 이들 동굴 중 하나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 일행을 일망타진 하려 온 엔게디 광야에 온 사울이 용변을 보려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로 들어 왔다. 그러자 다윗의 병사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사울을 죽여 지겨운 도피생활을 끝내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울을 죽일 만한 충분한 까닭과 권리가 있었으며, 그 절호의 기회를 노치지 않고 사울을 죽이면 쫓기는 자의 신세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울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다윗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 부은 이스라엘의 왕을 자기가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사울을 죽여서 편하게 살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살금살금 기어가서 사울의 옷자락만 잘랐다. 그러고는 사울을 죽이기를 원하는 부하들에게 그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쉽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다윗이 그를 살려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사울은 다윗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없애야 할 정적으로 간주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울이 볼 일을 마치고 굴 밖으로 나가자 다윗은 뒤따라 나가서 부하들이 그를 죽이자고 했고, 또 그를 쉽게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의 몸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옷자락만 베었다고 말하며, 어째서 왕은 나를 죽이려 하냐며 그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그로 하여금 편히 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큰 소리로 울며 “네가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을 보니 나보다 낫구나.”라 원수를 손아귀에 넣고도 그냥 놓아준 다윗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용납하거나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바꾼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 이상 너를 찾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사울은 자기의 길을 갔고, 다윗과 그의 군사들도 그들의 은신처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사울은 다윗의 행방을 탐색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윗 일행이 십 광야의 하길라 산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울은 또 다시 3,000명의 정병을 이끌고 십 광야로 가서 하길라 산 길가에 전을 쳤다. 이를 알게 된 다윗은 그날 밤 사울의 진영으로 잠복해 들어가 살펴보았다. 사울과 그의 군사령관 아브넬은 진지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들을 둘러싼 병사들도 졸고 있었다. 이를 본 다윗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와 함께 사울이 누운 곳으로 접근해 보니 사울의 창이 그의 머리맡에 꽂혀있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또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서 단 번에 해치우겠습니다.”라 속삭였다. 그러자 다윗은 단호하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사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집어 들고 그 곳을 떠난다.

 

다윗이 이 번에도 사울을 살려준 까닭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의 때에, 그가 정하신 방법으로 사울의 목숨을 거두실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마땅히 죽여야 할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사실로부터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할 줄 안다.

 

첫째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를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사울이 아무리 잘 훈련된 병사들을 동원했어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다윗에게는 결코 사울이 생각한 대로 그를 밀어내고 왕이 되겠다는 야망이 있거나 그를 해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문제는 사울의 질투와 시기와 오해 그리고 그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기름 부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을 인간들이 공격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윗이 그의 군사들이 권고를 무시하고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것은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공의로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우리도 이 같은 다윗을 본받아 살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며 천성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6002
9195
2024-07-04
다윗의 생애 (5)

-블레셋 땅으로 망명하는 다윗-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며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그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들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삼상21: 10-15)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삼상 27:1-2)

 

다윗이 사울을 피해 놉으로 간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거기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왕의 특수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것도 큰 실수였다. 그로 인해 아히멜렉을 비롯한 제사장 85명과 그들의 가족들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극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그의 판단만 믿고 행동한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다윗의 실수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적지인 블레셋으로 망명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원수지간이다. 때문에 다윗이 피난처로 블레셋 땅을 택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도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고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윗은 그 나름대로 블레셋 땅이 그에게 안전한 은신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가드는 블레셋 영토이며 엘라 골짜기에서 그가 물맷돌로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했다.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그곳에 가면 이스라엘 지경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해 질 것 같지만 다윗은 반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골리앗을 죽인 것은 오래 전 일이기에 가드 사람들이 그 일을 잊어버렸거나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본다 할지라도 그들과 원수지간인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적대관계가 된 다윗에게 우호적일 것이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군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 노래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가 예상했던 대로 전개되지 않자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미친 사람 행세를 한다. 전에는 골리앗을 물리칠 만큼 용맹스러웠지만 미쳐버린 지금을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임을 아기스 왕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윗의 연극은 효과를 거두어서 아기스 왕은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는 다윗을 보고는 “어째서 저런 실성한 놈을 내 집까지 끌고 와서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며 신하들을 꾸짖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한 다윗이 그 같이 추한 모습을 이방 왕 앞에서 보인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인간적인 과오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아기스 왕이 다윗이 정말 미처 버린 것으로 믿게 함으로 그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다윗은 후일 그가 목숨을 구하여 블레셋 땅으로 피했고,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부끄러운 일이었던가를 회개한다. 그리고는 그를 아기스 왕으로부터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라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미친 척하여 가드 왕 아기스의 지역에서 벗어난 후에도 다윗은 사울의 끈덕진 추격을 피하여 아둘라 굴, 헤렛 수풀, 십황무지 등 여러 곳을 방황해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엔게지 황무지와 십황무지 하길라 산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울은 두 번이나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준 것을 알고는 “네가 내 생명을 구했으니 나도 다시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며, 다윗에게 그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 가지 않아 사울이 또 다시 그를 죽이려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여 사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아기스 왕 앞에서 실성한 척함으로 목숨을 구한 경험이 있는 다윗이 또 다시 그에게 가기로 결정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우선, 아기스 왕은 다윗과 사울이 완전히 적대관계인 것을 알았을 것이기에 그를 받아들이면 자기에게 손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리라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아기스 왕을 찾는 다윗에게는 600명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윗이 첫 번째로 가드로 망명했다 돌아와서 아둘람 굴로 도망갔을 때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울의 학정 밑에서 고통 당하거나 부당하게 착취당하면서 불평과 불만 가운데 지내다 다윗과 함께 행동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으며, 그 수는 400명에 달했으며 얼마 안 되어 600명으로 늘어났다.(삼상 23:13) 

 

다윗은 600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온 그를 아기스 왕이 전처럼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다. 600명의 군대를 거느린 다윗을 휘하에 두고 활용하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아기스 왕이 판단할 것이라고 다윗은 생각한 것이다. 그 같은 다윗의 생각은 옳았다. 다윗 일행을 맞이한 아기스 왕은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지 않고 그의 지경에서 지내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다윗이 그의 일행이 조용히 지낼 수 있는 한 성읍을 할당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기스 왕은 두말하지 않고 가드에서 멀지 않는 한적한 시글락에서 그들이 지낼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안전하게 망명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혼란한 시국을 틈타 이스라엘의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행위를 일삼는 그술, 에르스, 아말렉을 공격했다. 그때 마다 다윗은 그곳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가축들과 의복을 약탈하곤 했다. 조국 이스라엘을 도우면서도 이 사실을 아기스 왕이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블레셋 땅 가드로 두 번이나 망명한 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윗은 위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기름 부어 왕으로 택한 다윗과 동행하시며 모든 위험에서 그를 구해주셨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5634
9195
2024-06-20
예수님의 분노

 

 

분노라는 감정처럼 자신과 주위를 괴롭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드문 것 같다. 분한 생각은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뿐 아니라 분별력을 상실케 한다. 그러기에 응어리진 분노는 이성의 절제를 받지 않고 언행을 통해 나타나며,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와 피해를 입히게 된다.

그 좋은 예를 1992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많은 인명과 엄청난 재산 피해를 내며 며칠간 나성일대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폭동의 발단은 경찰의 비인도적인 흑인 탄압에서 시작되었다.

폭동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91년 3월 3일 고속도로 순찰대가 과속으로 질주하던 차량을 붙잡았다. 운전자인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은 음주 상태였으며, 그를 체포하려는 4명의 백인 경찰에게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런 그를 경찰관들은 길바닥에 눕혀놓고 곤봉으로 난타하며 구두발로 짓밟는 등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은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비디오에 담겨서 재판정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때 배심원들은 흑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 계의 미국인과 1명의 아시아 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당한 판결을 보도되자 흑인들은 분노했다. 떼를 지어 거리로 내달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고, 약탈을 했다. 로스앤젤레스를 불법지대로 만든 이 흑인폭동으로 50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천문학적 숫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곳에 거주하던 우리 동포 상인들이 당한 재산 손실만도 5억불을 능가한다고 보도되었다.

비록 잘못은 했지만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인권을 박탈당하고 짐승처럼 두들겨 맞는 동족을 바라보며 느꼈을 설움은 크기만 했을 것이다.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마저 그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는 대신 위법자를 무혐의로 인정하는 불법을 저질렀을 때 끓어올랐을 그네들의 격분된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증오”로 변했고, 그 증오는 살인과 방화, 약탈이라는 “폭력”으로 변해버렸다. 그들의 분노는 자신들을 불법자로 만들었고, 안정된 사회질서를 파괴했으며,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애써 키워 온 꿈을 무참히 깨어 버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분노가 도화선이 되었던 이 흑인 폭동을 보며 예수님이 분노하셨던 경우와 비교해 본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시며 “성내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분노하셨던 경우가 몇 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오른손을 못 쓰는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다. 그때 그 광경을 목도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정죄할 마음을 품는다. 그들의 생각을 훤하게 들여다보신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매매행위가 성행하는 광경을 보셨을 때로 예수께서는 노하셨다. 이 같은 예수님의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내신 적이 없으시다. 그에게 숱한 사랑의 빚을 지고서도 빌라도의 법정에 선 그를 향해 “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 때도 예수님은 한탄하며 분노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외면당할 때 예수님은 분개하셨다. 하나님의 집이 인간을 탐욕으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 분은 노하셨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위선으로 가득한 종교 지도자들이 비웃으며 조롱할 때도 예수님의 가슴엔 분노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한 사랑의 분노이며, 거룩한 분노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분노는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거나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도 없었다.

우리들의 가슴에 솟구쳐야 할 분노는 이 같은 예수님의 분노를 닮은 것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분기충천하여 일어나야 할 때 침묵하며, 인내하며 잠잠해야 할 때 불 같이 화를 냄으로 나와 내 이웃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할 줄 안다.

의로운 분노를 발할 수 있는 우리들 되어야 겠다. 그래야만 우리는 세상이 혼란과 무질서와 악과 불의가 맞서 싸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십자군의 정병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5448
9195
2024-06-13
다윗의 생애(4) - 도피 생활을 시작한 다윗 -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하니, 다윗이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 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삼상 21:1-2)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하고,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액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액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은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 22:16-19)

 

하나님에게 버림받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왕권을 쥐고 있는 사울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기에 다윗의 목숨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졌다. 사울이 언제, 어디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질지도 알 수 없었고, 요나단과 미갈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왕의 뜻을 거역해가며 그를 보호해 줄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라마로 피신하여 사무엘을 만나 그가 처해 있는 형편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때 사무엘은 다윗을 사울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처지는 못 되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다윗에게 일시적인 은신처를 마련해 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다윗을 잡아오기 위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상히 여긴 사울은 직접 다윗과 사무엘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 자신도 성령의 능력에 묶여 그가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사무엘 앞에서 넋을 잃은 듯이 하루를 지내다 돌아왔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윗은 라마로 도피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그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다윗이 스스로의 생각으로 라마로 사무엘은 찾아간 것은 위급한 상황에서 범한 인간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라마로 가셔서 그가 사울에게 잡히지 않도록 역사해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대항 할 수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사울의 창을 피하여 다닐 수는 있었지만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윗은 목숨을 구하여 예루살렘 근방의 놉으로 가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어째서 수행원도 없이 혼자 왔느냐고 묻는다. 다윗은 그에게 왕이 특수 임무를 주어서 홀로 왔으며, 부하들과는 나중에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고 답한다. 사실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명이 위협을 받는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 교묘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대제사장을 속이는 것을 보며 언제든지 미약하고, 비열한 존재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미약함을 실감하게 된다. 

 

은신처를 확보하기 위해 아히멜렉에게 거짓을 말한 다윗의 행위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이기도 했다. 아히멜렉이 다윗이 그를 속이는 것임을 간파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이 아히멜렉을 속임으로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 땅의 제사장 85명과 그들의 가족들이 살해당하게 된다. 이는 다윗이 자기가 살기 위해 85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을 죽게 하는 원인 제공을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거짓말을 한 후 다윗이 심히 지치고 시장하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자 아히멜렉은 그가 최근에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거룩한 빵을 내준다. 그리고는 창이나 칼 같은 무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다윗에게 보관 중이던 골리앗의 칼도 내어 준다. 

 

그런데 다윗이 놉으로 아히멜렉을 찾아온 날, 그들의 만남을 처음부터 지켜본 도액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울의 최측근 중의 하나로서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간신이었다. 후일 사울이 도피중인 다윗의 행방을 알려주는 자가 없다며 신하들을 질책하는 자리에서 도액이 나서서 다윗과 아히멜렉이 만나서 나눈 대화와 아히멜렉이 다윗을 어떻게 도와주었는가를 상세하게 고해바쳤다. 그러자 사울은 분노하여 즉시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들과 놉에 있는 다른 제사장들을 불려드렸다. 그리고는 아히멜렉에게 어째서 다윗과 공모하며 그들 대적하느냐고 문책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다윗처럼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며, 그가 다윗을 도운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당당하게 그의 소신을 밝힌다. 하지만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거룩한 떡과 골리앗의 칼을 내어준 것은 반역행위라며 아히멜렉과 그와 함께 온 모든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한다. 그의 호위병들이 제사장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자 사울은 도액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도액은 제사장 85명을 모조리 칼로 쳐서 죽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액은 사울의 명대로 놉으로 가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젖먹이들까지 제사장들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가축들까지 다 죽여 버렸다.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대량 학살한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 죄악이었다. 하지만 사울의 이 악랄한 범죄행위를 통해서도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었으니, 엘리 제사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의 실현된 것이 그것이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이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고(삼상 4:5-11), 엘리의 집안에 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셨다.(삼상 2:27-36), 사울에게 살해당한 아히멜렉은 엘리 제사장의 증 손자였음으로 아히멜렉의 죽음은 엘리 가족에게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히멜렉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린 순교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놉의 제사장 85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다윗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채 놉으로 가서 아히멜렉을 만났고, 그 만나는 장면을 도액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히멜렉에게 그가 거기 온 목적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는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5221
9195
2024-06-06
다윗의 생애 (3)-사울의 제거 대상이 된 다윗-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이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 18:6-9)

 

엘라 골짜기에서 40일 동안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사울과 이스라엘 병사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백성들도 불안 속에서 전쟁의 결과를 지켜보아야 했다. 블레셋을 물리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압박과 핍박을 받으며 허덕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무명의 목동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적의 장수 골리앗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그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천부장과 기타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주어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다윗은 사울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모든 임무를 효과적으로 또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그를 높이며 그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울을 보좌하는 사람들도 날로 높아가는 다윗의 범민족적 인기에 대해 경계하거나 시기하는 대신 그의 재능과 달란트를 인정하며 지지하게 되었다. 그들 중 다윗의 능력과 재능과 믿음을 누구보다 신뢰하며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람은 사울의 장남 요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요나단은 다윗의 출현을 가장 경계하며 그의 인지도가 높아갈수록 그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며, 그를 시기하여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백성들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울의 신하들이 그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요나단의 몫인 차기 이스라엘의 왕권이 그를 떠나 다윗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의리와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그의 아버지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요나단의 의리와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기만 하다.

 

사울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그의 앞에 섰을 때 다윗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자기 곁에 두고 중요한 임무들을 부여했다. 그러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를 제거할 마음까지 먹기 시작한 것은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올 때였다. 수많은 백성들이 모든 성읍에서 나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사울의 군대를 환영하면서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 노래한다.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사울은 대단히 불쾌해졌다. 그가 죽인 적군은 수천 명인데,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며 백성들이 이스라엘군의 총사령관인 그보다 일개 목동인 다윗을 높인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울은 “이러다가는 저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사울이 범한 결정적인 과오가 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 그것이다. 그 노래의 의미는 사울이 죽인 적군은 불과 수천 명인데,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표현은 “수천 명과 수만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를 표현하는 것인 것이다. 시편 91편 7절과 미가서 6장 7절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자명해 진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91:7)에서의 천 명과 만 명은 실제로 천 명, 만 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도 너는 안전할 것이다”를 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을 기뻐하실까?”(미 6:7)에서의 천천이나 만만도 숫자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수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나온다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느냐?‘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사울과 다윗이 수많은 적군을 죽였다는 뜻이며, 사울의 이름을 먼저 부른 것을 보면 백성들은 블레셋을 격파한 이스라엘의 영웅은 사울 왕이며, 다윗은 그의 휘하 장병으로서 적은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노래하며 승전한 이스라엘군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40일 간이나 골리앗의 도전에 응하지 못하고 피하다 다윗이 그를 죽임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때문에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자기의 입장에서 그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높인다고 잘못 이해하고 다윗을 미워하며 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울의 마음에 다윗을 향한 질투와 증오가 쌓이면서 그는 악령에 시달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을 때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었다.(삼상 10:10)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다윗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자 악령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타주면 악령이 그를 떠나곤 했다.(삼상 16:14-24) 사울의 다윗에 대한 질투가 심해지면서 악령이 더욱 그를 괴롭히게 된 어느 날, 다윗이 수금을 타며 그를 위로하고 있는 중에 사울이 들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해 던졌다. 다윗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이 던지는 창을 피했다.(삼상 10:10-11)

 

다윗을 죽이려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사울은 그의 맏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다윗에게 제의한다. 다윗을 사위로 삼은 후 그를 전쟁터에 내보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윗은 비천한 집안의 아들이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며 사양한다. 그러자 사울은 메랍을 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주었다. 이 일 후에 사울의 또 하나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은 크게 기뻐한다. 미갈을 다윗에게 주고 그녀를 이용하여 그를 함정에 빠뜨려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윗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그가 어찌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겠냐며 물러선다. 사울은 자기는 아무런 예물도 바라지 않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원할 뿐이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은 다윗을 죽이되 블레셋의 손을 빌려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여 그들의 포피를 잘라 왕에게 바치자 사울은 다윗에게 미갈을 아내로 주었다. 미갈은 다윗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그녀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크고도 뜨거웠다. 그들 둘은 다윗을 아버지 사울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4841
9195
2024-05-23
예수님의 고독

 

1962년 10월14일에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쿠바 해협을 봉쇄하고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에게 쿠바내의 소련 미사일 기지를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쿠바 해협에 접근하는 모든 선박들에게 발포할 것을 명령하고, 14,000명의 예비역 공군을 재소집함과 동시에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하는 조처까지 취했다.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쿠바의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 전 세계는 3차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실제로 미 국무성은 그것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는 어느 날,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 그의 집무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진이 Time지에 실렸고, 그 밑에는 “세계에서 제일 고독한 사나이”라 쓰여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권력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있는 미국 대통령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지도 모르는 결정을 앞두고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고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때 케네디가 느꼈던 고독은 우리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들게 깊고도 심각한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고독은 아니었다. 전 세계는 지구를 파멸시킬 수도 있고, 보존할 수도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홀로 앉아 골몰하는 그가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고독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케네디의 고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정 힘들고 비참한 고독을 맛보았던 분이 계셨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독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갈보리 언덕에 올라가야 한다. 나지막한 갈보리 언덕 위에 초라한 십자가 세 개가 세워져 있고, 오른편과 왼편의 십자가엔 흉악한 강도들이 못 박혀 신음하고 있으며, 가운데 십자가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찢어진 몸과 못 박힌 손, 발에서 피를 흘리시며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에 들어온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오셨으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홀로 되신 예수께서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으로 알려진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다.

 

예수께서 죄 짐을 지고 멸망의 길로 향하는 인간들에게 줄 ‘구원’이란 선물을 안고 세상에 오셨을 때 아무도 그를 위해 따뜻한 방 한 칸 내어주지 않았다. 미치광이 헤롯 왕의 칼날을 피해 마리아의 품에 안겨 애굽으로 피신하는 아기 예수의 작은 가슴에 스며들었을 처량한 외로움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나사렛 작은 마을의 목공소에서 매일 그가 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를 의식하며 지내야 했던 예수님을 억눌렀던 고독은 크기만 했을 것이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버림받고 고통 받으며 억눌린 자들을 감싸주셨지만 감사와 찬양을 받기 보다는 언제나 배척당하기면 했던 예수님의 슬픔 또한 컸을 것이다. 그가 당하신 이 모든 고난과 슬픔으로 인해 고독하기만 하셨을 예수님을 사람들은 위로하기는커녕 멸시하고 핍박하다 끝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이마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등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로마 병정들의 채찍을 맞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요한과 여인 몇 명뿐이었다. 예수께 충성을 맹세한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던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으며, 각종 불치의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은 물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를 조롱하는 무리들을 내려다보시며 느꼈을 고독의 깊이와 슬픔을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고독의 정점을 아니었다. 세상은 그를 버렸을 지라도 아버지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광명하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짐을 등에 지신 아들 예수님을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버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등을 돌리시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의 이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우리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나이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만든 것은 그를 판 유다도 아니요, 그를 죽이려 한 헤롯 왕도 아니고,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아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죄를 쳐다보실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버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셨고, 우리들의 죄 짐을 지셨기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셨다. 이 사실을 깨닫는 다면 우리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분을 고독으로부터 해방시켜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하여 “나의 길”을 걸어간다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나이로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4622
9195
2024-05-16
예수님의 눈물

 

눈물 하면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연상한다.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물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의 소산물일 때가 많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이 많이 흘리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남보다 더한 역경과 시련과 좌절과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조건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비록 33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을 이 땅 위에 계셨지만 주님처럼 슬프고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천대받은 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 중 단 두 번 눈물을 흘리셨을 뿐이다. 한 번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고, 또 다른 한 번은 감람산 위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였다.

 

예수님은 고통과 천대와 멸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면서도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다. 온 인류의 숱한 번민과 슬프고 괴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면서도 초연하셨던 예수님이셨다. 그런 예수께서 어째서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셨을까? 그것도 자신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영광 받을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숨진 나사로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을 향하신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라 믿는다. 강한 자와 가진 자들은 부러워하며 두려워하되 약한 자와 없는 자들은 천대하고 멸시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그러므로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은 그들의 슬픔과 고통까지도 외면당하는 쓰라린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 시골 청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머리 숙이고 우신 것이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 외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나사로가 잠든 무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와 슬픔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나사로를 위한 예수님의 눈물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번민하고 고민하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따뜻한 우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정한 벗이 유명을 달리하여 정다운 그의 음성을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깨어진다. 비록 남아있는 정다운 벗들의 위로와 격려가 곁에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각자의 길을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외롭고 슬픈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한 나약한 인간 나사로 만을 위해 우신 것은 아니다. 감람산 위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내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장터는 각종 매매행위로 떠들썩했고, 아이들을 공연히 신이 나서 골목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지인들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빴고, 병정들은 긴 창을 메고 성내를 순시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도 유월절 행사준비를 하노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같이 활기에 찬 성내를 보시던 예수께서 불현듯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활기차고 힘차게 생동하는 삶의 현장을 내려다보시며 예수님은 어째서 우셨을까?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쁨과 희망 속에 그들의 삶을 즐기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환희를 종식시킬 멸망의 그림자를 보셨기에 우신 것이리라. 지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아드리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희희낙락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슬퍼지신 것이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신 예수께서 오셨건만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대신 그를 멸시하고 배척하며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우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을 걸으며 신음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고 계신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슬픔에 젖으셨던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하늘보좌에 내려다 보시면서도 예수님은 지금도 슬퍼하시고 계신 것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모든 인생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힘찬 삶의 행진을 계속해야겠다. 무겁고 힘든 죄 짐을 지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들의 슬픈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슬픔에 동참하며 그 분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것이 될 테니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daekim
daekim
114431
9195
2024-05-09
다윗의 생애(2)

-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이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삼상 17: 45-51)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었지만 다윗은 일개 목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동 다윗에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우뚝 서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가 그 때였다. 그때 이새의 장자 엘리압과 차남 아비나답과 세째 아들 삼마가 그 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이새가 다윗에게 볶은 곡식, 떡, 치즈를 싸주며 형들과 그들의 상관에게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보낸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마주하고 있었던 블레셋의 대장은 골리앗이란 장수였는데, 그는 천하무적의 용장이었다. 그는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으로서 기네스북에 인류 역사상 가장 키가 큰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괴물 같은 체구의 소유자 골리앗은 머리에 놋 투구를 쓰고, 무게가 57킬로나 되는 놋 갑옷을 입었으며,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고, 놋 창을 들고 있었다.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만큼 두꺼웠고, 창날의 무게만도 7킬로나 되었다. 그런 무장을 한 골리앗의 모습은 “인간 탱크”였다.

 

‘인간 탱크’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외쳤다. ‘너희 중 제일 용감한 장수를 뽑아 나와 승부를 가리자. 그가 나를 이기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고, 내가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는 거다.’ 이 같은 골리앗의 도전 앞에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모두들 무서워 벌벌 떨며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러기를 40일을 계속하자 이스라엘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사울 왕의 영도력도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면회하러 온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골리앗은 자기와 싸울 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외쳐대고 있었고, 이스라엘 측에서는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의아해 하는 다윗에게 누군가가 상황을 설명해주며 사울 왕이 누구든지 골리앗을 죽이면 큰 상금을 주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며, 세금도 면제시켜 준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소년 다윗은 격분하여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삼상 17:26) 자기가 골리앗과 대결하겠노라 나선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맏형 엘리압은 건방지게 굴지 말라며 다윗을 꾸짖는다.

 

하지만 다윗의 말을 전해들은 사울 왕은 그를 불렀다. 사울 왕 앞에 선 다윗은 그가 목동 일을 하면서 그의 양들을 해치려는 사자나 곰 같은 맹수들을 죽인 것처럼 골리앗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별다른 방도도 없었던 사울 왕은 다윗에게 출전을 허락하며 그가 착용하고 있던 갑옷과 놋 투구를 벗어주었다. 다윗은 그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그의 칼까지 찬 다음 몇 걸음 걸어보다 그것들을 다 벗어버린다. 그리고는 시냇가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와 물매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걸어갔다.

 

골리앗은 그에게 다가오는 소년 목동 다윗을 기가 막힌 듯이 쳐다보며 그의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에게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다윗은 태연하게 “너는 창과 칼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노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의 시체를 새들과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할 것이다.”(삼상 17:45-47)라 소리치고는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며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 물매로 그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혔다. 다윗은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 높이 들었다. 이로서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을 40일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엘라 골짜기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많은 교훈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무리 능력 있고 용감하더라도 하나님을 경멸하고 그 분을 대적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귀한 진리와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하의 명장 골리앗을 죽임으로 무명의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좌를 향한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벤 후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의 인도로 왕 앞에 섰을 때 사울은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사울과 다윗이 처음으로 만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사울 왕은 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그러자 그의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소년을 불러들여 악령으로 고통 당하는 왕을 위로하도록 했는데, 그 소년이 바로 다윗이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연주하는 수금 소리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다윗을 사랑하며 그의 곁에 있도록 했다.(삼상 16:14-2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다윗에게 수금 타는 재능을 주셔서 그가 사울 왕 곁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제거하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어 사울 왕과 대면했을 때 그의 진정한 인생의 길벗으로 또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곧 사울 왕의 맏아들 요나단이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자였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것을 깨달았기에 그에게 왕위 계승권을 양보했을 뿐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의리와 정의의 사나이였다.

 

권력을 위해서는 의리와 신의 같은 것은 헌신짝 같이 버리며, 친구와 친척은 물론 부모 형제까지 주저하지 않고 배신하는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정한 용기의 소유자가 요나단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향한 사랑을 예표한다고까지  말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
Budongsancanada
부동산캐나다 (Korean Real Estate Post)
1995 Leslie Street,
Toronto, Ontario M3B 2M3, CANADA
TEL : 416-449-5552 FAX : 416-449-0694
[email protected]
Copyright © 2024 Korean Real Estate Pos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