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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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그의 형제자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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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 13:53-58)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요 7:1-9)

 

 오늘 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다는 역사의 한 인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인간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았다. 둘 다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시다.”란 사실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인간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부모님이 계셨고, 형제자매들도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그의 친형제자매들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때 그는 홀아비였으며,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은 요셉의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생각하는 이들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믿고 싶은 사람들이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거의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예수님에게 친형제자매들이 없었다는 명확한 증거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한 사실을 제시한다.(요 19:26-27) 


성경에 기록된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이나 유다가 그의 친동생들이었다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리처럼 들리지만 그때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동생들 보다 제자 요한이 마리아를 더 정성껏 모실 수 있다고 믿었기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맡겼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만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다 돌아왔다는 사실은(마 2:13-15) 예수님이 그들의 맏아들이며, 다른 자식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동생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맏아들인 예수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공소를 운영하며 가족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동생들은 형을 도와 일했겠지만 그들이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란 사실을 알았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30세 되던 해에 목공소 일을 그만두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시는 청년 예수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인정했다면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을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고도 했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들처럼 예수께서 악령의 포로가 되었거나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사회의 주역이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며 배척하자 예수님의 동생들도 형인 예수님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마 12:46-50; 막 3:31-35; 눅 8:19-21) 


그러면서도 예수께서 놀라운 권능을 계속하여 보이시자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의 능력을 보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라고 권유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요 7:3-5) 

 

그들이 그런 권고를 한 까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한자리 하게 되면 그들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했던 민중들의 바람이(요 6:14-16) 예수님의 동생들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그때까지도 주님의 형제자매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메시아이시라 믿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주님이 처형당하시는 갈보리 언덕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몰랐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형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찾은 사람 중의 하나는 바로 밑의 동생 야고보였다.(고전 15:7) 


이 사실이 지닌 의미는 크기만 하다. 야고보는 그의 형인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하시는 동안은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권력의 자리에 앉으시면 한자리 하려는 야심까지 품고 있었던 기회주의자였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동생인 야고보가 그의 부활의 증인이 돼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예수님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십자가를 향한 길을 외롭게 걸으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떨치고 일어나 초대교회를 이끈 중추적인 지도자가 된 야고보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함은 물론 할레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확고한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바리새파 출신 성도들은 “할레와 율법준수의 필연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가 직접 체험한 바를 말하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역설했다.(행 15:6-11) 


이 같은 베드로의 발언에 이어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가 있은 후 그 회의를 주재하던 야고보가 베드로의 증언과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우상에 바친 더러운 제물과 음란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옳다.”(행 15:19-20)는 결론을 내린다. 


할레와 율법준수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초대교회의 공식결정을 내린 이 중대한 회의를 주재한 인물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였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총본부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였던 야고보는 그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무릎이 낙타처럼 굽어지도록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야고보서를 기록하였다. “신약성경의 잠언”으로 알려진 야고보서는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다.”(약 2:14)고 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귀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 유다가 기록한 유다서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배반, 타락한 천사들을 향한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상기시키며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접하면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야고보와 유다 둘 다 그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동생”이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그가 야고보의 형제라는 것까지는 밝혔지만 예수님의 동생이라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법적으로는 야고보와 유다 모두 예수님의 동생들이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시기에 인간 모두가 받들어 섬기며 충성해야 할 대상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다른 동생들인 요셉과 시몬이 초대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도 어머니 마리아와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기도하며(행 1:14)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각자의 위치에서 충성된 주님의 일꾼으로 그들의 인생의 경주를 달렸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과 어떤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는 각자 다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은 인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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