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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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아들 비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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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어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드리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탕자의 비유”로 더 많이 알려진 “잃어버린 아들 비유”처럼 널리 알려진 비유도 없다.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가장 짜임새 있게 쓰여진 “짧은 이야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 중 마지막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것보다 앞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비유”가 지닌 연관성과 그들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한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그들을 피하기는커녕 함께 어울려서 말씀하시며, 음식까지 잡수시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꺼렸다(마 23:15). 


구원은 자기네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믿었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죄인들에게 하늘의 진리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수군거렸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과 은전 비유를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들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아버지를 도우며 농장에서 일했는데 둘째 아들에게 농장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하며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거기다 변화 없는 농장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그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당돌한 요구였다. 장남도 아닌 차남이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아버지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은 둘째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다가 그가 노골적으로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자 그대로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마음이 들뜬 그를 꾸짖느니 보다는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 제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자식들에게 상속되는 유산의 비율은 맏아들에게 삼분의 이, 둘째에게 삼분의 일이 돌아가게 되어있었다(신 21:17).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 돌아간 것은 삼분의 일에 못 미치는 구분의 이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어째든 법적으로 그가 받을 수 있는 재산을 분배받은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나간다.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위에 바벨로니아, 그리스, 이태리, 애굽 등이 있었으니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단조로운 농장생활과 엄격한 유대 가정에서 벗어나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 발을 디딘 젊은 청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발견한 기쁨과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의 능력과 재능을 발휘하며 젊음의 꿈을 이루는 대신 아버지와 형의 제재와 간섭이 없는 상황을 이용하며 방탕한 생활로 빠져든다.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탕진하더니”란 성경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경건한 삶의 원칙들을 집어 던지고 세상의 쾌락 속으로 뛰어들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가진 돈을 보고 덤벼드는 거짓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먼 유대 땅에서 온 돈 많은 젊은 청년이야 말로 힘 안들이고 요리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과 세상을 몰랐던 그의 방탕한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가졌던 돈이 바닥나자 그를 찾아오거나 그와 함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머나먼 타국에서 주린 배를 안고 거리를 헤매는 가련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부잣집 둘째 아들로서 호의호식하던 그가 돈의 위력 앞에 머리 숙였던 간사한 사람들과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해주던 여인들 틈에서 정신 없이 웃고 즐기다 헤어나기 힘든 인생의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했던 그는 들판에 나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된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그 고기를 먹지 않음은 물론 돼지를 치면 저주받은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그가 그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 앉은 그에게 떠나온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다. 넓고 아름다운 농장 한가운데 세워진 사치스러우면서도 아늑한 집에서 많은 종들을 부리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집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을 지닌 아버지의 간섭과 잔소리가 몹시 싫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모든 일들이 답답하고, 고루하고, 진취성이 없다고 느꼈다. 따라서 아버지 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인생이 낭비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황홀하고 달콤한 세상과의 신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세상이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가지고 온 돈이 바닥나면서 그의 곁에서 세상연락을 즐기던 친구들과 그의 환심을 사고자 온갖 아양을 떨며 웃음을 팔던 여인들도 모두 떠나가고 쓸쓸하고 차가운 들판에서 유대인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돼지들 틈에 끼어 그들의 사료인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으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모두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는 이 중대한 사실을 제 정신이 들었을 때(when he came to himself) 깨달았다. 제 정신이 들고 보니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크나 큰 죄를 범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칙 중 인간상호 간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출 20:12)인데 그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이 같은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둘째 아들은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다. 가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며, 그를 아들 아닌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의 농장에는 세 종류의 품꾼들이 있었다. 우선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대를 이어 주인과 함께 사는 일꾼들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품삯을 받고 일하는 정규일꾼들이 있었고(눅12:15), 마지막으로 필요한 때마다 임시로 고용하는 오늘 날의 비정규직 성격을 지닌 일꾼들이 있었다. 


이 세 계층의 품꾼들 중 제일 마지막인 아무 때나 해고당할 수 있는 임시 고용원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짧은 생각과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집을 떠난 그가 진정으로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계하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위대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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