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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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열 처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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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 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 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열 처녀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이것 전에 나오는 두 비유들과 내용에 있어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세 비유 모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것인데 첫 번째 “도둑 비유”(24:42-44)에서는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두 번째 “충성되고 슬기로운 청지기 비유”(24:45-51)는 주님 오시는 날 깨어있어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인 “열 처녀 비유”는 예수께서 오시는 날이 늦어지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준비하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 세 번째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유대의 결혼풍습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 유대사회에서 실시되던 결혼예식의 첫 단계는 결혼서약이었다. 이 절차는 결혼할 당사자들과 그 부모들이 결혼에 합의하는 것으로 오늘 날의 약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양가 간에 결혼하기로 약속하면 동침은 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가 이 약혼기간 중이었다. 결혼 합의가 이루어진 후 일정 기간이 지나 거행되는 혼인예식은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그의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신부 집에서 몇 가지 예식을 끝내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곧바로 혼인잔치가 시작되었다. 


혼인예식의 정점인 이 잔치는 신랑 신부의 가족과 친지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며칠을 먹고 마시며 즐겼던 유대인들의 삶 속에 기쁨과 즐거움의 원동력이 되었던 행사였다. 신랑과 신부도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이 잔치에 합석하여 손님들과 함께 즐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때 혼인잔치가 결혼예식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신부는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었으며, 열 명의 들러리들이 신부를 둘러싸고 예식을 거행했다. 따라서 이 비유에 나오는 열 명의 처녀들은 신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소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시간이 보통 밤이었는데 등불을 들지 않으면 어두워진 거리에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이 가졌던 “등”이 집안에서 사용하는 “등잔”이 아니라 캄캄한 밤길을 밝혀주는 “횃불”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때 사람들이 사용하던 횃불은 15분 정도밖에 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15분 이상 횃불을 들고 밤길을 걸으려면 별도의 기름통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열 처녀 중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지만 나머지 다섯은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열 처녀 모두 신부 집에 모여 신랑이 올 때를 기다렸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밤이 깊어가는 데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치고 피곤해진 들러리들은 잠이 들고 만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졸고 있던 처녀들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몸매를 다듬고 가지고 온 홰에 불을 밝힌다.

열 개의 횃불이 타오르면서 캄캄한 방이 환해지는 순간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그들이 신랑 집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횃불이 꺼질 것을 깨닫고 친구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그들은 “너희에게 기름을 나눠주면 우리도 모자라고 너희도 모자랄 테니 가게에 가서 사라.”고 싸늘하게 거절한다. 


이렇게 되자 기름이 넉넉한 다섯은 신랑을 따라가고, 나머지 다섯이 기름을 구하여 횃불을 밝혀 들고 왔을 때 신랑 집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 사정했지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비유 속의 신랑은 예수님이시다. “만군의 여호와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나 여호와는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었다.”(호 2:19-20)는 말씀만 보아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사탄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정절을 지키다 그를 맞이하는 성결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율법에 정통하면서도 지키지 않으며, 메시아의 출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맞아드리지 않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련하다”고 낙인 찍힌 처녀들은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랑이 늦을 경우에까지 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름이 없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특별히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처녀가 패물을 잊어버리고, 신부가 예복을 입지 않는”(렘 2:32) 기본적인 과실을 범한 것이다. 늦어지는 신랑을 그들과 같이 기다리던 현명한 처녀들도 잠들었지만 그들은 신랑을 따라 잔치에 참여했다. 이 사실 또한 기름 떨어진 들러리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 “준비 부족”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전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 적당히 세상 낙을 즐기며 갈 수 있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 아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 6:24)


이 비유가 말해주는 많은 교훈 가운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세상에는 우리가 꼭 필요할 때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수험생들은 시험장에 들어가 앉는 순간부터 아는 대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격이나 기술도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 즉석에서 쌓을 수도 없고, 익힐 수도 없다.


평소에 꾸준히 준비한 학생들이 자신 있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하는 이들에게 풍성한 인생의 열매가 맺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야만 “주여, 오시옵소서!”(Come, Lord!)(고전 16:22)라 기도하다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 포함되어 있는 또 다른 중대한 교훈은 이 세상에는 결코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꺼져가는 횃불을 든 처녀들은 그들의 동료 들러리들에게서 기름을 빌릴 수 없었다. 그들의 친구들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기름을 나눠주면 열 명 모두가 곤경에 처할 것이기에 현명한 들러리들은 곤경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돈만 주면 무엇이든지 빌려 쓸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대여(Rent) 받을 수 없는 것들이 많기만 하다.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셋을 들라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아닌가 한다. 진실하고 고상한 사랑은 아무리 애써도 사거나 빌릴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더라도 다른 사람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빌려 그것이 내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다.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을 가슴 가득 간직하고 사는 이의 마음을 잠시 빌려가지고 천국 문으로 들어설 수도 없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혼인 잔치 집의 문이 닫힌 후 도착한 다섯 처녀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신랑의 반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냉정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따라 산에 오른 사람들에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마 7:21)라 하시며, 그들이 주를 위해 한 일들을 나열하며 재고해 주실 것을 간청하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할 것임을 밝히셨다. 한 번 닫힌 잔치장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굳게 닫힌 방주의 문이 다시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너희를 모르니 돌아가라.” 하신 예수께서는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심으로 비유를 끝내신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들은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우리 모두 현명한 다섯 처녀들처럼 오랜 기다림에 대비할 준비를 하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빼고는 다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밤이라도 예수님이 오실지 모른다는 자세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처럼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은 없다.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사라지고 찬란한 영광의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축복된 삶이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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