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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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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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는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마 15:32-39)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두 기적은 같은 것인데 목격한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석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 어렵게 만든다. 


두 기적이 같은 것이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별도로 취급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자세히 살펴보면 두 기적은 떡 몇 덩어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근거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때와 장소가 다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시기는 봄이다. 예수님이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푸른 잔디(grass) 위에 앉게 하셨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마 14:19; 막 6:39; 요 6:10). 그러나 광야에서 사천 명을 먹이실 때는 예수께서 무리를 “땅(ground)에 앉게 하셨다.”(마 15:35; 막 8:6)


이 같은 사실은 봄에 파랗게 돋아난 잔디가 뜨거운 여름 햇빛에 말라 땅이 들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두 기적은 봄과 여름에 별도로 행해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도 다르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데가볼리에서 일어났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유대인들 보다는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살았다. 예수께서 이곳에 가셔서 앉은뱅이, 절뚝발이, 맹인, 벙어리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 15:31)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두 기적이 별개의 것이라는 근거는 또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남은 떡 부스러기를 담은 광주리는 유대인들이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들을 거둔 광주리는 이방인들이 쓰던 것으로 유대인들 것보다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사람까지도 들어갈 수 있었다. 다메석에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탈출시킬 때 그를 태워 성 밑으로 내린 광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행 9:25)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살펴봄에 있어 데가볼리 광야에 사천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든 까닭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네들도 소문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를 통해 예수님에 관해 들었을까이다. 


예수께서는 데가볼리 지방에 속하는 거라사인에 가셔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있다(마 8:28-34; 막 1:1-20). 그때 거라사인 주민들은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가라고 요청했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며 그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실 때 병 고침을 받은 당사자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집에 돌아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행하신 큰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막 5:19)고 분부하셨다. 


악귀로부터 해방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권능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수”와 “진정과 신령의 예배”에 관해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외친 것처럼 말이다.(요 4:1-30)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거라사인의 귀신 들렸던 사람의 증언을 듣고 그곳에 모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추측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권능과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며, 얼마나 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셨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세상 끝까지 내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드는 믿는 자의 사명인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는 달리 칠병이삼어의 기적 때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야 한다고 나선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크면서도 자상하며,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잘 아실뿐 아니라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라 했을 때 예수님은 참으로 가슴 아프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주께서 어떤 권능의 소유자 이신가를 직접 보고 들은 그들이었다. 몇 달 전에 빈들에서 예수께서 기도하고 떼어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오천의 무리에게 나누어준 것이 그들이었으며, 그들이 먹고 남은 떡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에 담은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데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그때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배고픈 사람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이 허허벌판인 여기서 무슨 수로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를 실망시키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물으신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How many loaves do you have?) 이 짧은 질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깊고 크기만 하다. 무엇보다 이 물음을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을 꾸짖고 계시다. 


“지난 번 오천의 무리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너희들은 어린 소년이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게 가져오지 않았느냐? 그때 내가 그것으로 어떤 권능을 보였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저 무리를 먹일 방법이 없다고 내게 말하는 것이냐?”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싶으셨던 것은 그들이 떡을 몇 개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가지고 오라는 명령이요, 그러면 그것으로 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떡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일을 하심에 있어 그들이 가진 것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의 권능을 믿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를 원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들을 가져오게 한 후, 기도하시고 떡과 생선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 일곱 개의 떡 덩어리와 두어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예수님에 의해 사천 명이 만족하게 먹고도 남은 조각이 큰 광주리 일곱을 채우는 잔칫집 음식으로 변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사천 명의 주린 배를 채우신 기적은 행해진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그 과정은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두 기적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창조의 능력 또한 같은 것이다.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어야겠다고 말한 분은 제자들 아닌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이다. 배고픈 사람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으셨던 예수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운 하루하루를 살며, 지치고 괴로워서 쓰러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을 파탄시킬 일이 앞을 가로 막을 때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더불어 그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권능의 손길이 우리를 수렁 속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가 떡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하신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각종 인생의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떠는 우리들에게 묻고 계신다.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들을 들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어주시며, 우리의 잔을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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