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577 전체: 522,023 )
예수님의 기적-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
daekim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1-37)

 

 

마가복음에만 수록된 예수께서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고 말 더듬은 사람을 고치신 기적은 주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가나인 여인의 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서 일어난 일이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신”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어째서 그런 경로를 통해 돌아오셨을까 하는 점이다. 두로는 갈릴리에서 북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었고, 거기서 30킬로미터 더 북쪽에 시돈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까지 가실 필요 없이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셨으면 갈릴리까지 빨리 오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로에서 30키로 북쪽에 있는 시돈까지 가셨다.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 데가볼리를 지나 갈릴리까지 오신 것이다. 50 킬로미터만 남으로 내려오면 될 것을 북으로 30 킬로미터를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셨으니 50 킬로미터면 될 여행길이 110 킬로미터로 늘어난 것이다. 


특별히 시돈에서 하실 일이 있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도 않았기에 예수께서 왜 먼 길을 택하여 돌아오셨는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까지 가신 이유 중의 하나는 그를 적대시하며 괴롭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삼아 로마정권에 대항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을 떠나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경에서 하신 일은 귀신 들린 가나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그가 전파하는 천국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신 후 예수께서 시돈으로 올라가신 것은 사람들로부터 떠나 그의 앞에 놓인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며, 제자들에게도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주지시키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계획하신 이 여행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다. 어느 주석가의 말처럼 6개월까지는 걸리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몇 달은 사람들에게 시달림 받지 않고 제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과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으로 생각된다.


마가가 기록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마 8:31)라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이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은 깊은 영적 교통의 시간을 가졌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 있는 여행의 종착지인 갈릴리 호수에 도달하신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으로 가신다. 이 지역은 열 개의 희랍 도시들이 산재한 곳으로 유대인들도 살았지만 많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이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이 듣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 시대가 오면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라(사 35:5)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반벙어리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한 사실로부터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은 이웃을 보살피며 도와주기 원하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간절한 청을 들은 예수님은 그 반벙어리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다. 세상에는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각기 형편과 처지에 맞추어 대해 주시며, 그들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온유하고 자상한 분이 예수님 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더 힘든 법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귀 먹고, 말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닫힌 그의 귀와 말문을 열게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지니시고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분이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낮고 천한 인간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의 무거운 짐을 져주실 뿐더러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데가볼리의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기 위해 그의 두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 그 당시 사람들은 침 속에 독소를 제거하며 불치의 병을 낳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이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한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다. (요 9:6-7)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 하신 것은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드린 기도는 단 한 문장으로서 “에바다”였는데, 그것은 아람어로서 “열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굼”(소녀여, 일어나라)하신 것도 아람어였다.


예수께서 “열리라.” 말씀하시자 닫혔던 귀가 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리면서 귀머거리와 반벙어리였던 사람이 듣고, 말하는 정상인이 되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하신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당부하신다. 예수께서 그런 분부를 하신 까닭은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 아닌 “신유의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을 널리 널리 퍼뜨린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설교는 미사어구를 동원한 유식하고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하게 “예수 믿는 사람”의 향기를 풍기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이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빨리 그리고 멀리 전달되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귀머거리와 반벙어리를 고치시자 사람들은 “굉장한 일이다. 못 듣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다니!“라며 감탄한다. 이 같은 그들의 반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한 번도 예수님 앞에 머리 숙이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이 놀라운 권능을 지니셨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 귀신의 힘을 빌려 병을 고친다며 사탄의 하수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회당에 들어와 앉아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범법자로 몰아 고발하려고까지 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자 예수께서는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까지 가셨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권능 앞에 무릎 꿇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감탄하며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 한 말 속에는 깊은 진리가 포함되어있다. 정작 말을 하는 그네들은 그 의미를 몰랐겠지만 “그가 모든 일을 잘하였도다.”란 말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하신 것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람을 “완전한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시기에 좋게”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완전한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세상을 혼란하고 무질서하며 난잡한 곳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해야만 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우리들의 귀와 입을 열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본래의 자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굳게 닫힌 우리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을 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며 천성을 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 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