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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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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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들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중 세상의 기준과 가장 크게 대립되는 말씀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거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비현실적임은 물론 인간으로선 거의 실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두 가지 가르침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며 최고봉이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이에 해당되는 부분부터 살펴보아야 할 줄 안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당한 만큼 갚으라.”는 뜻으로 고대 바빌로니아 6대 왕 함무라비의 법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불 수 있다. 


 탈리오의 법(Lex Tallions) 또는 복수의 원칙(Tit for Tat)로도 알려진 이 법은 구약에도 나타나 있는데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레 24:19-20)가 그것이다. 혹자는 이것은 구약에 명기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율법 중의 하나라 말한다. 그러나 이 법이 의도하는 목적은 결코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법은 복수의 극소화를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원시부족사회에서는 부족원이 다른 부족사람에게 피해를 입으면 그 부족 전체가 상대방 부족을 공격하며 부족간의 싸움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결과 한 부족 또는 두 부족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거나 심하면 멸족에 이르기까지 했다. 탈리아의 법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문제를 해결함으로 이 같은 비극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학자에 따라서는 탈리아의 법은 “무자비한 법” 아닌 “자비로운 법”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법은 피해자에게 당한 범위 내에서는 보복해도 좋다는 권한을 준 것이 아니라 사건담당 판사에게 제시한 재판지침이었다. (신 19:15-21).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지침에 따라 재판을 진행한 판사들은 ”눈에는 눈“의 선고 대신 적절한 보상을 형벌로 내리곤 했다.(출 21:22-27) 따라서 이 탈리오의 법은 보복행위를 억제함과 동시에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윤리관이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자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당한 대로 갚은 것“이 구약에 나타난 일관된 윤리관이 아님을 아래에 열거한 말씀들을 음미하며 인식할 필요가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레 19:18)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말하지 말지니라.“(잠 24:29)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그에게 마시게 하라.“(잠 25:31)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며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애 30:30) 


 이밖에도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억압하며 괴롭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가를 가르쳐 주시는 귀중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사회의 윤리관이 탈리오의 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법이 잔인하거나 개인의 복수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하심으로 그 법을 배척하셨다. 아무리 그 법이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지키며, 범죄자에 대한 보복을 통제하고 최소화 한다 해도 믿는 자들이 그 법이 허용하는 대로 복수를 감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믿는 자들은 정의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하며, 불의한 자들에게 법적조처를 위하는 대신 참고 견디는 사람과 인내를 보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한 자의 횡포를 보면서도 침묵하고, 악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하나님의 눈은 정결하시므로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기에”(합 1:13)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짓을 묵인해서도 안 되며, 악에 굴복하거나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악에 대항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믿는 자들이 대적하지 말아야 할 악인의 정체를 밝히신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라 말씀하신다. 누군가 우리 오른뺨을 때릴 때 왼편까지 돌려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아해 하기 전에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우리 앞에 선 사람이 오른손잡이라면 손바닥 아닌 손등으로 우리 오른 뺨을 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손등으로 뺨을 맞는 것처럼 큰 모욕은 없었다. 따라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까지 돌려대라는 말씀을 아무리 심한 멸시와 모욕을 당해도 믿는 자들은 분노하여 반격하지 말고 그보다 심한 치욕이라고 감수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것이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가 예수께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다. 당시에 속옷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입었지만 겉옷은 부자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전당을 잡았을지라도 속옷은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 명하고 있다.(출 22:26) 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속옷만은 빼앗기지 않도록 율법이 보호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그 속옷을 달라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속옷은 몰론 더 귀한 겉옷까지도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이다. 


 이 같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자명하다. 믿는 자들은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며, 권리를 내세우는 대신 의무를 먼저 행하고, 특권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인 것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말씀하신다. 그때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있었기에 로마 병정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짐을 지고 오 리를 가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후에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지고 가게 한 것도 그런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27:32) 예수님이 오 리를 가자는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하신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본분임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 가지 상황을 통하여 주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모욕이나 멸시를 당해도 대항하지 말고 감수하며,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의무를 행하며, 하고 싶은 일보다는 남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주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확인했듯이 악인의 악행을 절대적으로 저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경찰력을 동원하여 치안을 파괴하는 폭도들을 제압하여 처벌하거나, 국경을 넘어오는 적군을 향해 포화를 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롬 13:1)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는 믿는 자의 몫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로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같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행한 사람이 마틴 루터 킹 박사다. 미국 침례교 목사이자, 인권운동자이며, 흑인해방운동가인 킹 박사처럼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은 사람도 드물다. 그는 끈임 없는 암살위협에 시달렸으며, 집이 폭파당하고, 20여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동족의 칼에 찔려 목숨까지 잃을 뻔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마음속에 증오의 감정을 품지 않았음은 물론 복수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랑과 인내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하다 39세 아까운 나이에 괴한의 흉탄에 숨져갔다. 누가 그 같은 고난과 슬픔의 험하고 힘든 인생길을 걷다 간 그의 생을 가리켜 비참하고 헛된 것이라고 말 할 것인가?


 믿는 자들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며, 온갖 곤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털 깎은 자 앞에서 양 같이 입조차 열지 않으시다”(사 53:3-7)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23:34)라 기도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살아감이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악한 자들에게 대항하며 그들에게 보복하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보살피고 도와주면서 우리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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