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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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산상수훈: 복 있는 사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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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의 서론이라 볼 수 있는 팔복(The Beatitudes)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반부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시작되어,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이어지는데 이들 네 가지 행복의 조건은 믿는 자의 “영적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영적 파산자임을 깨닫는 단계라면, “애통”하는 것은 그로 인해 슬픈 눈물을 흘리는 지경에 이른 상태를 의미함이며, 허물투성이인 자신과 죄로 물든 세상을 보며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는 “온유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른 이들은 부귀영화나 그 자신만을 위한 헛된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사모하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팔복 후반부의 시작인 “긍휼히 여기는 자”자는 자기보다 못한 이들이나 고통과 절망과 역경에 처하여 신음하는 사람들을 가련히 여기며 돕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하며, 그래야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신 품안에 안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긍휼의 표현을 물질적인 도움에 국한 시켜서는 안되며, 긍휼은 행위 자체보다 그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거리에서 손을 내미는 걸인에게 마지못해 동전 몇 개를 집어주는 것이 값싼 동정심의 발로라면, 그 날 자기 점심 값을 때묻은 그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더욱 귀중한 자비의 실천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이들과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들의 참모습부터 볼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사회적면에서는 우리 긍휼의 대상보다 조금 나을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참으로 빈약하고 불쌍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 우리들을 의탁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느니라.”(약 2:13)는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눅 15:11-32)은 성경에 나타난 “긍휼히 여기는 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험한 산길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도 감수하며 다가가 살린 그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사람의 선행을 들려주시면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겐 거짓과 위선이 깃들 자리가 없다. 깨끗하고, 아름답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성결한 마음을 지니기를 원하신다.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이들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시 24:3-4)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지혜를 가르치시며, 내 마음에 깨끗한 영을 창조해주소서.”(56:6,10)라 간구한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니 화를 면치 못하리라.”(마 23:25; 눅 11:39)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외형만 깨끗하고 우아하게 가꾸려 애쓸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불의한 생각과 분노와 탐욕과 오만과 편견을 몰아내고, 하나님께 사랑과 충성을 바치며,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발 벗고 구제사업에 앞장서더라도 그 목적이 개인의 명예추구나 이기주의적인 욕망의 실현에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청결한 자”의 명단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단에 올라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격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람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화평”(Peace)은 아무런 문제나 근심이 없는 평온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화평은 근심과 걱정과 문제들로부터 해방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된 자는 “화평한 사람”아닌 “화평케 하는 사람”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누리려면 “세상을 화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곱 번째 행복의 조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너져 내린 다리를 다시 놓으셨고, 민족과 민족을 분리시켰던 높고 두터운 장벽을 무너뜨리셨다.(엡 2:11-22) 사람들의 가슴 깊이 뿌리 내린 미움과 질투와 복수의 감정을 몰아내고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채워주셨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겐 그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고, 분열과 분쟁을 소멸시키는데 앞장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새 생명 얻는 자들은 “평화의 도구”가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을 가져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시며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려면 사랑으로 악인들의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릇된 길을 가는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의를 행하는 무리들이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불의와 타협하며, 불의의 현장에서 눈감고 돌아서는 것이 자신이 속한 단체나 사회 또는 섬기는 교회의 화평을 위해 필요하다는 잘못된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한 번도 불의와 부정과 위선의 죄를 인정한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겁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말씀하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도 필요함을 일러주신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일곱 가지 행복의 조건 중 어느 것도 듣는 이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없다. 마지막 것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다른 것들보다 더 큰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다. 핍박과 환난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의를 위하여 살면 마땅히 존경받고 칭찬받으며 상을 받아야지 어찌 박해를 받아야 하느냐는 의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디서 그 타당성을 찾을 것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익숙했던 기준이나 가치관을 버리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지침을 받아들여 준수해야 한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팔복의 조건들은 구비할 수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들 아닌 믿는 자의 필수적인 품성이요 자질인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것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 상반된 기준과 가치관의 차이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힘 없고 수도 적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데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놓고 사람들은 고심하게 되고, 많은 무리가 돈과 권력과 쾌락을 택하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적은 무리는 그네들의 박해를 받으며 험난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과 아픔은 크기만 하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미움과 배척을 받는 것은 부당하고 모순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억울함과 슬픔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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