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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6)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더 큰 분쟁 요소는 행정부의 정치적 역할이다. 행정부 구성원은 영국 왕이 임명하고 의회의 결의를 거부하는 권리를 지니고 있어서 의회의 권한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중인 1793년에 영불 전쟁이 다시 발생하여 영국은 퀘벡 주민이 혁명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믿었다. 사실, Philadelphia에 파견된 프랑스 정부 대표인 Edmond-Charles Genet는 퀘벡 프랑스인에게 독립을 하라고 선도했다. 한편 소규모 프랑스 함대가 캐나다로 항해하다가 겨울이 다가오는 바람에 포기 한 바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영국계 주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자유를 부여 하므로 승자인 영국 문화에 적응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영어 일간지인 Quebec Mercury는 이러한 기사를 썼다.

“정복 후 47년이나 되었으면 퀘벡인도 영국인이 되어야지요.” (Apres 47 ans de possession du Quebec, il est temps que cette province soit anglaise.) 1810년에 당시 총독인 James Craig가 쓴 편지 내용이 흥미롭다. “프랑스인은 마치 독립적 나라의 국민 같이 행동한다.”

 

3.2 영국인의 권력 독점, 부정 부패 Louis Papineau 무장 저항

1825년은 퀘벡 정치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왜냐하면 의원 Louis-Joseph Papineau 가 국회 의장으로 선발 되었기 때문이다. Papineau가 의장으로 선발 되므로 프랑스인의 반항은 더욱 강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분쟁 소지가 있는 문제가 많이 등장했다.

Papineau가 국회 의장이 된 후 프랑스인의 저항은 더욱 체계화 되었다. 저항 이유를 보면, 일도 안 하는 자가 공무원 봉급을 받는 영국인, 행정부의 임명제, 정부의 소비과다, 판사가 의원이 될 수 있는 제도, 특히 구두 투표로 진행되는 총선거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단일 캐나다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또한 퀘벡 주에서는 많은 영국인 이민을 위해 정부는 관대한 토지 분활제를 실시했다. 이들은 Sherbrooke 시를 중심으로 한 Easter Township 라는 토지 제도를 도입하여 일인당 10평방 마일의 토지를 제공했다. 이러한 사건은 프랑스인에게 더 큰 불안함을 고조시켰다.

 프랑스계 주민은 반항을 체계화 시키기 위해 Parti Canadien 라는 정당을 창설 했다. 양 집단간의 분쟁은 1832년의 Montreal 보선에서 본격화 되었다. 투표는 20일간 계속되는 상황에서 구두 투표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져 정부는 군대를 개입시켜 물리적 충돌 사건이 발생하여 3명이 피살 당했다. 불행히도 당시 총독 Lord Aylmer는 잘 했다고 군대를 축하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악화 되었다.

 그 동안 지속된 영국계(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민 때문에 퀘벡의 인구 583,000명 중 프랑스계의 비율이 하락하고 만다. 프랑스인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Parti Canadien 정당은 Parti Patriote (애국자 정당) 정당으로 변하고 저항력은 강해졌다.

1834년에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총 88명의 의원 중 77명이 프랑스계 위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는 Comte de Gosford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사태조사를 지시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친목을 촉진하기 위해 1835년 11월 25일 St-Catherine 축제에 프랑스인을 초대했다. 영국계 주민은 이러한 Gosford 총독의 타협적 태도를 비난하고 200명이 모여 반 프랑스인 단체인 Doric Club를 발족시키고 “프랑스인의 지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자” (A la mort plutot qu’une domination francaise!)고 했다.

Parti Patriote는 Gosford 총독에게 선거제도 개혁을 요청 했으나 거절 당하고 1834년의 Jean-Baptiste 축제는 반 영국 시위로 전환되어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Doric Club의 반 프랑스인 운동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인은 1837년에 Les Fils de Liberte (자유의 아들)라는 과격한 집단을 구성 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계는 British Rifle Corps (영국 소총부대)라는 무장 단체를 출범 시켜 1,200명이 가입했다. 두 집단의 무력적 충돌은 불가피해 졌다. 1837년 10월 23일, 프랑스인은 Saint Charles에서 수 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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