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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부동산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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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부동산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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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2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42)

 

(지난 호에 이어)

 

셋째 퀘벡주나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은 자유시장보다는 정부의 개발 계획에 따라 진행 되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은 1962년을 시작으로 5년 마다 경제 사회개발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또한 10년마다 국토개발 계획을 통해 우리나라 인프라시설을 마련했고, 국가경제의 국제 경쟁력을 제고 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토 개발계획을 통해 균형적 지역개발을 도모했다.

퀘벡주도 당시 유행이었던 프랑스의 제시적 개발 전략(Indicative Planning Strategy)을 도입하여 국가 투자 공사의 리더쉽 아래 민간 기업들로 하여금 주어진 개발 목표 달성을 시도 했다. 퀘벡주의 개발계획은 우리나라와 비교 해보면 정부의 직접개입은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발 계획기관도 비교가 된다. 우리나라는 경제기획원(Economic Planning Bureau: EPB)이 5개년 경제사회개발의 계획과 총괄을 했다. EPB의 구성 공무원들은 전문 지식, 애국심, 봉사정신 및 희생정신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이분들과 더불어 일을 했으며 이분들을 높이 평가한다.

퀘벡주의 개발 계획 주체는 상공부의 경제개발위원회(Conseil economique du Quebec :OPDQ). 필자는 1970년대 OPDQ의 자문위원 이었다.

OPDQ는 고위 관료와 민간 산업 대표로 구성되어 퀘벡 주 경제 전체의 개발뿐만 아니라 퀘벡 주내 지역의 균형개발도 유도 했다. 또한 지역개발 기구로서는 BAEQ가 퀘벡 동부에 있는 Gaspe 낙후 지역 개발을 계획했다.

본 기구의 큰 성과 중의 하나가 공무원 교육이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의 고위 공무원의 상당수가 BAEQ 출신이었다.

넷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계획 성과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인당 GDP 는 1962년의 $87 에서 1991년도의 $6,500로 급증했다. 즉 30년 기간에 75배 증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매년 2.5배 증가한 것이다.

한 국가경제가 매년 2.5배로 성장한다는 것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목격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업적이다. 동 기간에 수출은 5,500만 불에서 719억불, 즉 958배 증가했다. 수입은 국가경제의 능력을 보여주는 또 하의 지수다. 수입은 4.2억불에서 815억 불로 139배 증가했다.

퀘벡 경제기적은 양적으로 우리나라 같이 폭발적 성장은 못했다. 이유는 우리나라는 원래 극단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성장한 반면에 퀘벡 주는 상당 수준에서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퀘벡주의 일인당GDP와 온타리오의 GDP 간의 격차는 1960년의 22%에서 1990년의 5%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퀘벡 주의 생활비는 온타리오의 생활비보다 훨씬 저렴함으로GDP격차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8.3 퀘벡경제 기적의 요인과 파급 효과

퀘벡주의 경제기적을 보여 주는 지수는 많다. 1961-1991 기간, 퀘벡인 기업(French Canadian Firms)에 종사하는 퀘벡인의 비율은 47%에서 65%로 증가, 영어권 기업에서 종사하는 근로자의 비율은 39%에서 26%로 축소, 외국인기업에서 종사하는 근로자 비율은 14%에서 9%로 급감했다.

금융분야에서 근무하는 불어권 종사자는 26%에서 54%로 증가, 건설분야에서 근무하는 불어권 종사자는 51%에서 87%로 각각 급증했다. 그리고 제조업에서 근무하는 불어권 종사자는 22%에서 42%로 증가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영어권 세력이 독점하던 경제권을 불어권 퀘벡인이 장악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퀘벡 경제기적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은 몬트리얼이다. 몬트리얼 산업구조는 원래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는데 퀘벡주 사회개혁 및 경제기적으로 인해 캐내다에서 가장 많은 첨단산업이 집중된 지역으로 탈바꿈을 했다.  

캐나다의 R&D 투자의 50%, 제약산업의 50%, 항공산업, 유전공학 산업의 40% 내지 5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신산업의 40%가 몬트리얼 지역에 집중 하게 되었다.

몬트리얼은 세계에서 Seattle과 프랑스의 쌔Toulouse 다음으로 세 번째의 항공산업 중심지다. 또한 북미의 세 번째 유전공학 중심지, 세계의 애니메이션 중심지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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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41)

 

(지난 호에 이어)

 

제 8 장 St-lauren 강의 경제기적

8.1 퀘벡 경제의 낙후성

퀘벡인의 또 하나의 역사적 업적은 1960-1990 기간에 이루어진 경제 개혁이었다. 본 경제개혁은 규모, 깊이, 내용 및 파급효과를 볼 때 일종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당분간 퀘벡 경제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다음의 과제를 다루고자 한다. 퀘벡 경제기적의 본질 및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과의 비교; 퀘벡 경제의 공업화 전략; 퀘벡 정부의 리더쉽 역할;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시민경제(Social Economy)의 역할; 퀘벡 경제 모델의 재검토 등을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1954년에 퀘벡 시에 있는 Laval 대학에 유학 왔다. 당시 퀘벡주의 경제 상태는 비참할 정도로 빈곤했다. 1960년도의 퀘벡주 일인당 GDP는Ontario 주의 73% 수준이었다. 즉 퀘벡 주민의 소득 수준은 이웃 온타리오 주의 수준보다 27%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퀘벡 산업을 영어권 세력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퀘벡 불어권 주민은 하위급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보험, 금융, 유통업 등은 모두 영어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불어권 퀘백 주민은 2등 시민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에 Jean Lesage 수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사회개혁과 동시에 총체적 경제개혁을 시행했다. 결과는 엄청났다. 30년 후인 1990년도의 퀘벡 주민의 소득은 온타리오 주민소득의 95%로 접근했다.

온타리오 주의 경제는 자동차산업에 기반을 둔 우수한 산업 구조와 연방정부의 편파적인 온타리오 우호적 지원 정책에 힘입어 눈부신 성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벡 경제는 온타리오 경제와 동등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8.2 한강의 기적과의 비교

퀘벡 경제기적은 한강기적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데 주목된다. 첫째, 시기가 동일 하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1962년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 덕분에 경제가 이륙(Take Off) 했다. 퀘벡 경제기적은 앞에서 언급한바 1960년에 Jean Lesage 수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둘째 우리나라 경제기적이 정부 주도하에서 진행 되었듯이 퀘벡 경제기적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퀘벡 정부는 각 주요 산업분야에 정부 출자 공사를 세웠다. 산림사업을 위해서는 Rexford, 농업사업을 위해서는 SOQUIA 공사를 설립 하여 제 1차 산업발전을 촉진했다.

전기공사 Hydro- Quebec 를 국립화하여 저렴한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공업화를 가속 시켰다. 본 공사 덕분에 북미에서 가장 저렴한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는 곳이 바로 퀘벡 주이다.

SIDEBEC 공사는 철광산업 개발의 선두에 나서서 퀘벡 주의 철광 수요를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퀘벡주는 연금기금(Caisse de depot et placement)을 설립하여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산업에 투자했다. 반면에 종합금융공사(Societe general de financement)는 주로 리스크가 비교적 높은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우리나라의 경제 기적도 정부 출자 공사의 눈부신 활약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철광, 전기 에너지, 통신, 중공업(Heavy Industries) 등의 전략적 분야에 정부 출자 공사를 설립했다.

철광산업을 위한 포항제철, 통신 산업을 위한 KTC 등이 대표적 예다. 또한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 조성을 위해 주요은행을 국유화하여 필요 자금조성을 했다

정부출자 공사의 역할은 해당산업의 육성뿐만 아니라 우수한 인재 양성, 경영 기술 개발, 기술 개발 등 중요한 소프트웨어 개발도 포함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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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40)

 

(지난 호에 이어)

 

7.9 사회 복지 개혁

 조용한 혁명의 또 하나의 핵심적 요소는 보건 관련 개혁이었다. 1960년대 이전의 주민 보건 상태는 이렇다. 1941년의 퀘벡인 평균 수명은 불과 63세 (캐나다: 67세)에 불과했고, 타 지역의 수명보다 4세나 낮은 편이었다.

이러한 격차는 퀘벡주민의 보건이 캐나다 타 지역보다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1954 년에 보건에 대한 Tremblay 보고서가 공개 되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퀘벡 주민의 66%가 병원 비용을 부담할 수 없었다. 돈 없이 병원에 입원 하려면 성당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병원 서비스는 재정적 여유 있는 부유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연방 정부 차원에서 Hall 위원회를 임명하여 전국의 보건 상태를 조사했다. Hall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의료 서비스 보험제도가 도입되었으나 보험대상 의료서비스는 제한되어 큰 도움이 안 되었다.

1960년대에 와서 성당은 그 때까지 담당해 오던 의료서비스 체제 운영을 정부에 이양했다. 1970년에는 폭발적 의료서비스 보험 제도가 도입 되었다. 1991년에는 병원 입원 보험제도가 도입되고, 1996년에는 약품 보험제도가 도입 되므로 퀘벡주의 보건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비싼 보건제도가 되고 말았다.

1962년에 정부는 병원 운영 및 보건관련 정부 지출에 대한 법을 통과 시켰다. 그 후 정부 지출은 기하학적으로 증가해 GDP 대비 보건 정부지출 비율은 1964 년의 4.4%에서 1994년의 10%로 급증했다. 일인당 정부 지출은 1965년의 $ 103 에서 1990년의 $ 2,000로 급증했다.

 이러한 보건 제도 도입은 파격적 성과를 거두었다. 주민의 평균 수명은 1874년의 68세에서 1995년의 74.3세로 연장되었다. 유아 사망률은 1960-1990 기간 인구 1천 명당 13.8명에서 4.6 명으로 급감했다.

한편 보건 행정의 효과성 및 효율성 제고를 위해 보건 관리체제를 지역화 및 지방화 시키므로 시민의 편리를 최대한 제공했다. 하지만 퀘벡 보건 문제는 심각하다. 재정 문제다. 1990년대에 와서 문제의 심각성이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  

의료 서비스 제공 기관이 860개에서 513개로 감소, 의사 수는 1,300명 감소, 인구 1천 명당 병원 침상은 6개에서 2.5개로 축소. 입원자수는 11.5% 줄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인구의 고령화다. 1996-2016 기간에 노령화(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9%에서 14%로 증가할 전망이다.

치매 환자 수 비율은 65-74세 경우 1%, 80세 이상인 경우 26%. 기동력이 없는 인구 비율은 70세 이상인 남자의 경우 22%, 여성의 경우 32 %나 된다. 엉덩이나 무릎 수술 환자 수는 매년 8%, 백내장 수술 환자는 매년 30% 증가된다.

보건 개혁은 조용한 혁명의 중심적 요소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위대한 보건 개혁을 통해 사회정의 확립, 경제적 생산성 제고, 사회 평화 유지 등을 제공 했다. 반면에 공동체가 부담해야 할 재정 부담은 막대하다.

 

7.10 요약

조용한 혁명은 퀘벡 공동체를 영어권 퀘벡인의 지배 및 성당의 억압에서 해방 시켰다. 퀘벡인으로 하여금 자부심 및 자존심을 재확인하게 하고 창의력을 회복 하게 했다.

프랑스어의 지속적 보전 및 발전을 보장했다. 퀘벡인으로 하여금 경제권을 장악하게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조용한 혁명은 퀘벡인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정체성의 미래 발전의 사회적 문화적 틀을 마련 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퀘벡인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경제적, 사회적 및 정치적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자신감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조용한 혁명은 퀘벡인의 이민자에 대한 태도가 부정적 시각에서 긍정적 태도로 전환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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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1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9)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1977 년에 Levesque 정부는 유명하고도 말썽이 많았던 법101를 채택한다. 이 법은 전례 없는 강력한 법이다. 모든 공동생활에서 불어는 의무 언어가 된다. 가장 핵심적 부분은 이민자녀에 관한 조항이다. 부모가 영어로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경우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하교까지 무조건 불어 학교에 입학 시켜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법101호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이민의 비중은 매년 커지는 상황에서 이민자녀들이 불어 학교에 입학하게 하려면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력한 조치 없이는 이민자녀는 영어권 학교에 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Levesque 정부는 이 법에 입각해 불어청(Office quebecois de langue officielle : OQLF)를 창설해 법 시행을 감독하기로 했다.

 법101호의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이민자녀들의 불어화(francisation)는 퀘벡 사회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본 법 전에는 이민자녀의 20%만이 불어를 사용 했는데, 법 후에는 80%가 불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민 자녀들이 놀 때 보면 자기들끼리는 불어로 의사 소통을 한다. 자녀들이 불어를 하니깐 부모도 심지어는 조부모도 불어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80대 어르신네들이 불어를 배운다.

퀘벡 입장에서 보면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민들이 불어화 되면 불어의 미래 즉 퀘벡공동체의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영어권 세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UN 회원 국가 중 30% 이상이 불어권 나라다. 불어는 아직도 주요한 국제언어다.

2004년에 있던 일이다. UN 산하기관인 Habitat 라는 부서가 있다. 이 부서는 세계의 주택을 포함한 정주체제에 관한 부서다. 마침내 사무총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한국인이 지원하면 유리하다고 했다.

필자의 동료 두 분이 지원했다. 필자는 그분들의 이력서를 불어로 번역해 드렸다. 이 두 분은 서류 심사에서 통과해 UN 본부에 가서 UN 사무총장과의 면접까지 했다. 그러나 불어를 못해서 두 분다 실패했다.

우리 자녀들이 불어를 하기 때문에 취직에 많은 도움이 된다 한다. 직장에서 진급 할 때도 유리하다고 알고 있다. 불어를 한다는 것이 취업 및 사회 활동에 유리한 것도 있지만 불어를 하면서 불어권 문화를 접촉하고 세계관 및 인생관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 101호는 프랑스 퀘벡인의 경제권 장악에도 막대한 힘의 되었다. 이 법이 통과한 전후 많은 영어권 기업들이 몬트리얼을 떠났다. 고속도로 401번으로 Toronto 로 많이 갔다. 그래서 법 101호를 법 401호라고 하기도 했다. 많은 경우 떠나는 기업은 싼 값으로 불어권 퀘벡인에게 매각했다. 특히 Outremont에 사는 퀘벡 중산층에 매각되었다.

결과적으로 퀘벡인은 퀘벡산업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불어가 활성화 되다 보니 세계 불어권(Francophonie)에서 퀘벡주가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퀘벡주는 불어권 세계의 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퀘벡주의 지도력은 대학교육, 문화, 경제 면에서 특히 나타났다. 주목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법 101호의 가장 중요한 파급효과 중의 하나가 퀘벡인의 이민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퀘벡인은 이민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불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권 세력에 합류하기 때문에 이민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법 101 후 이민 특히 자녀들이 불어화되므로 이민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 시각에서 긍정적 시각으로 변했다. 결과적으로 이민들의 주류사회 진출에 도움이 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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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8)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 후 왕권지지자들이 대다수 캐나다로 오는 바람에 1791 년에 캐나다를 이분화시켜 상 캐나다와 하 캐나다로 분리시켰다. 하 캐나다(퀘벡)에서는 불어를 허용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무역을 포함한 모든 경제 활동은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침략 우려, 상 캐나다(Ontario)의 재정 적자문제 및 영국관세 특혜 삭제 등으로 인해 1840년에 상 캐나다와 하 캐나다가 합쳤다. 이때부터 불어는 다시 금지되어 버리고 만다.

드디어 1867년에 캐나다 건국이 이루어졌다. 동기는 서부 개발에 필요한 철도 건설, 시장규모 확대로 인한 경제의 규모 혜택의 필요성, 미국과의 합병운동의 확산 예방 등이다.

헌법(British North American Act)에 따라 불어를 공식 국가 언어로 채택했지만 원칙론에 불과했고, 특히 온타리오 주의 반대로 2 중 언어제도는 유명 무실이었다. 결국 1867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불어 사용은 퀘벡주와 New Brunswick 및 Ontario 북부(Sudbury) 지역에 국한되고 말았다.

 Trudeau 수상이 정권을 장악한 1970년대 및 1980년대에는 이중 언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 되었다. 이중 언어 사용자는 공공기관에 취업시 특혜를 받았다. 많은 영어권 정치인, 교수, 공무원, 법제 인사들이 불어를 배워 출세했다. 문제는 퀘벡인은 미리 이중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별다른 혜택을 못 받았다.

 1960년대만 해도 불어에 대한 영국계 캐나다인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1966년 하루 필자는 Toronto 지리학 교수 Potvin 교수와 Toronto 지하철을 이용한 바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어로 회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었던 백발 노부인이 우리를 향하여 말을 했다. “Why don’t you speak white?” 뜻은 이렇다. 왜 당신들은 문화인의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천한 불어를 사용 하느냐?

필자는 놀랬다. 이러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처음 경험하는 사건이다. 당시 Eaton Center에 가서 판매원의 서비스를 불어로 요청하면 대꾸도 안 해주고 불친절하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

St-Catherine 가로에서 불어를 하면 지나가던 영어권 사람들이 ‘Frog’ 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Frog(개구리) 라는 표현은 퀘벡인을 멸시하는 욕설이다. 식당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으려면 영어로 주문을 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꾸준히 참아왔던 퀘벡인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고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언어 개혁은 1960년대에 와서 본격화 된다. 1967년에 당시 단기간 집권한 Bertrand (Union National 정권) 수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언어법 63호를 채택했다. 법의 내용은 직장에서는 불어를 사용하고 광고는 불어로 해야 한다. 이민 학부모는 언어별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민 학부모는 영어 학교를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퀘벡 사회는 영어권 캐나다인이 지배를 했기 때문에 이민은 약자인 불어권 퀘벡 보다는 강자인 영어권 퀘벡을 선호하여 자녀들에게 영어 학교에 진학 시켰다. 결국 이 법은 불어 보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로서 1974년에 Bourassa 정권이 법 제 22를 통과시킨다. 본 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 광고, 법정 그리고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불어가 의무화 된다.

다만 언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시 정부 및 기업의 본사에서는 불어 사용이 의무적이 아니다. 이러한 예외 조항 때문에 이 법도 유명 무실화 되고 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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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8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7)

 

(지난 호에 이어)

당시 대학 교육제도의 문제는 협소한 학업, 진로, 진학의 지역별 계층별 차등화, 경제개발에 필요한 전문가 육성에 대한 교과목 부족 등 이었다. 해결은 퀘벡 주립대 창립이었다.

 캐나다에서 Sudbury 의 Laurentian 대학을 비롯해 퀘벡대학은 드문 주립대다. 퀘벡주립대 전체의 총장은 교육부 장관이 임명한다. 퀘벡주립대는 대학교육의 민주화, 전문화 그리고 특히 산학 협조 체제의 구축에 둘도 없는 기여를 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기여는 지역개발에 대한 역할이다.

퀘벡 영토의 각 지역에 10개의 campus가 있다. 10 만 명 이상의 학생, 수 천 명의 교수, 수 천명의 직원이 각 지방에 분산되고 있다. 이러한 지방 캠퍼스는 지역개발에 원동력적 역할을 한다.

우선 지방 캠퍼스가 지출하는 비용은 지방 내수 확대의 중심적 요소다. 소규모의 지역에서는 교수, 학생 및 직원들은 지방 시장에서 제반 제품을 구매 한다. 지방 캠퍼스는 대학 행정에 필요한 다양한 학용품을 사들인다. 학생의 소비도 만만치 않다.

지방 캠퍼스의 소비는 지방내수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 퀘벡 주립대 지방 캠퍼스 때문에 그 동안 학비 및 체류비 문제로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하던 지방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퀘벡 주립대의 지방 캠퍼스는 수 많은 연구소를 통해 산학 공동 연구를 하여 지방의 천연자원을 개발하고 지방의 상대우위를 개발 및 강화 시키는데 전략적 기여를 했다.

교육개혁의 성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 할 수 있다. 고등교육의 민주화, 전문화, 대중화, 주민의 대학에 대한 친밀감 강화 및 지역개발 등 분야에 미치는 영향으로 집계 되겠으나 계량화하기는 쉽지 않다.

계량화가 가능한 기준이 있다면 고등교육 수혜자 수의 급증이다. 2005년도에 고등교육(CEGEP 이상) 졸업자율은 Ontario 의 65% 에 비해 69% 이었다. 학사 취득자 수는 인구 천명 당 110명(온타리오 112명) 이었다. 인구 천명당 석사취득자 수는 25명(온타리오 26명), 인구 천 명당 박사취득자 수는 4.68명 (온타리오 (6.20). 한편 고등학교 학생 수는 1960년의 204,700명에서 1970년의 591,700명으로 급증했다.

 

7.8 언어 개혁

앞에서 수 차례 언급한 바 있으나 프랑스어의 보전 및 개발은 불어권 퀘벡인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생사 문제다. 3억 5천 명이라는 인구를 갖은 북미는 근본적으로 영어권이다. 불어권 퀘벡은 거대한 북미의 영어권이라는 막대한 문화적 바다에 떠있는 극소한 문화적 섬이다.

영국 식민지화 후 불어를 보전 못했으면 퀘벡이라는 공동체의 존재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북미 문화에 완전히 흡수 되었을 것이다. 불어가 없어지면 영어권 북미의 압도적 경제력, 자본력 지배 때문에 퀘벡인의 경제적 진출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불어사용 권리가 없으면 퀘벡인은 정체성이 없는 집시 같은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즉 불어 문제는 단순히 언어 문제가 아니다. 불어는 퀘벡 민족의 민족으로서의 삶과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세기 반의 퀘벡 역사는 영국계 캐나다와의 정치적 싸움의 역사라고 했다. 이러한 정치적 싸움의 중심에는 언어 싸움이 있었다. 구 프랑스시대(1534-1760)에는 언어 문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퀘벡이 프랑스 영토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오랫동안 모국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현지 인디안 언어를 불어에 편입시켜 파드와(Patois) 라는 사투리 불어를 개발했다는 것이었다. 1760년에 영국에 항복한 퀘벡에서는 불어가 금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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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6)

 

(지난 호에 이어)

 

7.7 교육 개혁

7.7.1 교육제도의 취약점

앞에서 이어 수 차례 언급을 한바 1960년대 이전의 퀘벡 고등교육은 이른바 고전적 교육(cours classique)으로 시작해 대학 교육까지 갔다. 고전 교육의 목적은 의사, 변호사 및 신부의 양성이었다.

고전 교육의 내용을 보면 희랍어, 라틴어, 철학, 윤리학 등을 통해 사회 엘리트 층을 형성하는 것이 사명 이었다. 그리고 고전 교육은 성당에서 운영하는 것이 관례이었다. 극소수만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고등학교 수준에서 산업화에 필요한 전문 교과목은 전무 했다. 따라서 대학은 문학, 철학, 종교학, 의학, 법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공과 대학은 있었으나 인기 없는 분야로 취급 받았다.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정치학자 양성은 전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퀘벡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이렇다. 첫째, 고등교육은 극소수인 지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즉 고등교육은 비 민주주의적이었다. 둘째, 지방에는 대학이 없었다. 따라서 고등교육은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셋째, 퀘벡의 산업화에 필요한 숙련 기술자 교육은 전무했다. 기술자가 없다 보니 경제개발이 될 수가 없었다. 넷째, 사회문제를 분석하는 사회학자, 경제개발을 관리할 경제학자, 노사 관계를 개선할 전문가, 사회복지 제도를 설립하고 관리할 전문가가 없었다. 즉 사회 과학대학이 없다가 Laval 대학에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Levesque 신부가 설립했다.

 

7.7.2 교육제도 개혁 내용

 이러한 미개한 함정에서 탈피하기 위해 퀘벡 정부는 몇 개의 역사적 조치를 도입했다. Laval대 총장, Alphonse Parent 주교는 1964년에 교육 개혁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따라 다음의 조치를 취했다.

 첫째,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부가 창설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육은 성당 당국에서 정부로 이양되었다. 둘째, 초-중-고등 교육이 법적으로 의무화 되었다. 셋째, 55개의 불어권 교육청과 9개의 영어권 교육청을 창설했다.

교육청을 통해 교육행정의 효율화와 합리화를 도모했다. 교육개혁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CEGEP 제도와 퀘벡 주립대 창설이었다. CEGEP 제도는 독일, 프랑스 등의 제도를 본받아 다양한 산업 기술인력을 배출하고 동시에 대학교육을 허락하는 세계에서 가장 신축성 있는 제도다.

CEGEP는 두 개의 진로를 허용한다. 하나는 2년 후에 대학으로 직접 진학하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3년 동안 기술을 습득하여 노동시장에 합류하는 길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3년 후 다시 대학으로 진학할 수도 있다.

한편, 2년 후 대학에 진학했다가 졸업한 후 다시 전문 노선으로 편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CEGEP에서는 수 백 개의 전문기술 교육이 있다.

더군다나 퀘벡에는 우리나라 같이 소모적 학벌주의가 없다. 천한 직업이 없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자기 능력 및 취향에 따라 직업 진로를 선택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CEGEP는 퀘벡 경제의 효율화와 경쟁력 강화에 획기적 기여를 했다.

또한 CEGEP는 퀘벡 영토 어디에 가나 있으므로 고등교육의 지방화 및 민주화에 선두 역할을 했다. 퀘벡 영토는 한국의 17배나 되는 막대한 영토다. 1960년대 전만 해도 불어 대학은 퀘벡시의 Laval 대, 몬트리얼의 몬트리얼대 및 쉘부르크의 Sherbrooke대 밖에 없었다.

영어 대학은 몬트리얼의 McGill 및 Concordia대, Lenoxville의 Bishop대에 한정 되어 있었다. 그 외의 지역에는 대학이 전무했다. 또한 Laval대와 Montreal대는 오래 동안에 쌓인 관습, 편견 등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교육 과목을 도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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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5)

 

(지난 호에 이어)

그러면 지성은 어디에서 오나. 지성은 가정교육, 학교교육, 독서, 건전한 신앙생활, 대인 관계 등에서 배운다. 지성은 누구나 습득할 수 있다. 문제는 의지다.

좋은 일, 남을 위한 일, 사회 정의를 위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그 의지는 어디에서 오나. 의지는 하고자 하는 행동의 고귀함을 믿을 때 생긴다. 특히 자기보다 더 중요하고 자기보다 큰 존재 (가족, 교회, 동포 공동체, 민족, 국가, 인류)를 위한 행동이 고귀하다고 믿을 때 의지가 생긴다.

모든 인간은 가족, 동포 단체, 교회, 국가, 민족, 인류라는 공동체의 하나의 부분이다. 동물도 공동체를 형성 한다. 동물도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기능을 다 할 때 인정 받는다. 하물며 동물보다 우수한 인간의 가치는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수행 할 때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의지란 공동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결단을 할 때 생기는 심리적 성숙화다.

문제는 누가 이러한 의지를 가르칠 수 있느냐다. 학교에서? 가장에서? 교회에서? 성당에서? 절에서? 근본적으로 가정교육에서 의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곳에서 의지를 키울 수 있다. 교육요점은 공동체를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Levesque 신부는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은 경제학, 사회학, 노사관계학, 사회복지 서비스학 등을 배운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 퀘벡경제가 왜 미개발되었는지, 세대간의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 노사 관계를 어떻게 개선 해야 하는지, 서민의 비참한 빈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러나 배우는 것만으로는 소용없다. 지식은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지식은 퀘벡 사회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즉 사회 과학은 사회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 과학자의 의무는 앞장서서 사회발전에 헌신 하는 것이다.”

Levesque, 신부의 이러한 철학적 가르침은 많은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게 했다. P.E. Trudeau, Jean Chretien, Pauline Marois, Jean Marchand, Guy Rocher, Rene Levesque 등 강력한 지도자를 배출시켰다. 이들의 공동 특징이 있다면 지성을 구비한 행동의 사람(Wise Men of Actions) 들이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시회 철학가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필자의 세계관 및 인생관도 이 신부님의 가르침에 입각한다. 필자도 오직 행동으로만 진리의 길을 볼 수 있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7.6.2 자성인의 거절

 George Henri Levesque 신부는 조용한 혁명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도자였다. 실제로 지성인, 예술가,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 ‘거절’ 이라는 선언을 했다. 그 내용은 필자가 벌써 밝힌바 있으나 근본적으로 퀘벡인의 비참한 미개발 상태는 퀘벡인이 비겁하고 만사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퀘벡인은 오랫동안 성당의 억압 속에서 살다보니 공포 속에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여건하에서 두 분의 신부님이 성당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두 분 다 Levesque 신부님의 제자고 또 필자의 스승이다. P. O’Neil 신부 및 Gerard Dion 신부는 공개적으로 성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들은 카톨릭 성당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고 설득했다. 변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이해 못한다는 것이 성당위기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에 관한 토의를 요약하자. 종교 개혁을 통해 퀘벡 사회는 242년이라는 긴 세월의 교회 독선, 독재 및 억압에서 해방 되었다. 이로 인해 퀘벡인은 전통적 가족관계, 성(sex) 관계, 믿음생활, 결혼과 이혼, 신부의 사회 위치 등에 대한 회의감을 강력하게 느끼게 되었다.

전통적 가치관에서 해방되면서 개개인의 행복이 인간존재 이유(raison d’etre)라는 것을 파악했다. 이러한 가치관 전환은 개개인에게 자기에 대한 자존심,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것이 또한 창의력으로 연계 되었다. 즉 종교개혁은 퀘벡 사회의 현대화, 민주화, 산업화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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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4)

 

(지난 호에 이어)

 

7.6 종교 개혁

7.6.1 카톨릭성당에 대한 불만

 앞에서 언급한바 퀘벡 카톨릭 성당은 1763년에 퀘벡이 영국 식민지가 된 후 퀘벡인의 카톨릭 종교 유지, 프랑스어 보호 및 프랑스문화 보전에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카톨릭 성당은 학교 재정조달 및 운영, 의료 서비스, 병원 경영, 구제 사업 등을 정부를 대신하여 제공했다. 그 반면에 카톨릭 성당은 여러 면에서 주민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1960년대에 들어 오면서 가속화되고 심해졌다.

우선 성당은 퀘벡인의 사생활에 철저한 감시 및 간섭을 했다. 주민은 이에 대해 분노했다. 이러한 감시간섭으로 인해 퀘벡인은 자주성, 자발성 및 창의성이 상실 했다고 사회학자들은 지적했다.

퀘벡인은 하루에 세 번, 네 번 고해성사 (신부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를 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죄의식 속에서 살고 극단적 보수주의적 사상에 빠지곤 했다. 배우자 선택은 교구신부의 승낙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다 보니 결혼에 실패하면 신부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취직 할 때는 신원조회를 한다. 목적은 구직자가 철저한 카톨릭 신자인지를 확인하는데 있었다. 취직이 안 되면 결국 신부의 탓이라고 불만했다.

그런데 외부의 접촉이 많아지므로 퀘벡인은 자신들의 비 정상적인 입장을 파악하게 되었고 성당에 대한 항의를 시작했다. 더군다나 당시 피임약이 도입 되면서 젊은이들의 성 생활의 자유화 운동이 시작되어 교황청를 비롯한 카톨릭 성당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성당은 퀘벡 경제 개발의 걸림돌이기도 했다. 많은 성당 지도자들은 경제 행위는 비 종교적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Trois- Riviere 주교는 돈 노리는 죄라고 했다. 또한 성당은 영어권 캐나다 기업에서 일을 하는 것은 비 도덕적이라 했다.

 

요약하면 당시 카톨릭 성당의 극단적 보수주의, 절대권위주의 그리고 외부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해 퀘벡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고 사회가 고립되고 공동체의 정상적, 사회적, 문화적 및 경제적 발전이 지연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반 카톨릭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신부를 포함한 지성인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리더쉽은 도미니캔(Dominican) George Henri Levesque 신부로부터 왔다. 이 신부는 1940년대 후반에 Laval 대학교 안에 사화과학 대학을 세웠다.

필자는 1954 년에 이 대학으로 유학하여 Levesque 학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분이 필자에게 카톨릭 철학가 및 신학이론가인 Thomas Acquinas 의 종교관 그리고 계몽시대의 합리주의 철학에 입문하도록 도와주신 분이다. Levesque 학장은 필자의 정신적 지성적 은사다.

필자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강의가 바로 Levesque 신부님의 강의 이었다. 제목은 « Morale et techniques d’actions » (지혜로운 행동), 강의의 핵심은 이렇다. 지혜로운 행동은 지성(Intelligence)과 의지(Will Power- volonte) 간의 조화다. 지성이 수반 되지 않은 행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지성이 뒷받침 하지 않은 행동은 원칙도 없고 합리성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 무조건 밀어붙이기 하는 지도자가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나라발전에 치명적 타격을 준 적도 있었다. 지성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반면에 지성은 있는데 의지가 결여되어 행동을 못하는 것도 비극이다. 그 동안 쌓은 지성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교수를 포함한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용기가 없어 행동을 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극적인 지성인들이다. 좋은 학교를 나와 쌓이고 쌓인 지성을 활용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인들은 공동체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성인들은 말만 하고 뒤에서 남을 비판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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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3)

 

(지난 호에 이어)

Hydor-Quebec 공사는 Robert Bourassa 시대에 와서 유명한 Bay James 메가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퀘벡 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다.

 넷째, Lesage 정권은 당시 퀘벡 금융계의 꽃이던 퀘벡종합금융공사(Société général de financement: SGF)를 창립했다. 퀘벡 경제 개발의 전제 조건이 개발 자금 조달이었다. 그런데 금융권은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퀘벡 기업은 자금 확보가 별 따기 이었다.

퀘벡 기업을 체계적으로 융자 해준 금융기관은 오직 Caisses Desjardins 이었다. 이 금융기관은 금융조합이며 1900년에 창립되었는데 동기는 영국계가 독점하고 있는 은행에서 자금 조성지원을 못해 주어서 당시 신문기자이었던 Alphonse Desjardins 씨가 창립한 것이다.

Lesage 정권은 또 하나의 금융기관을 세웠다. 바로 Caisse de dépôt et placement CDP) 이었다. 이 금융기관은 공무원 및 교사의 연금을 중심으로 자금을 조성한 기관이다. 이 두 개의 금융기관은 기능이 다르다. SGF는 정부산하 산업공사의 자금 마련, CDP는 벤처캐피털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 주어진 기능이었다. 이러한 금융기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Bombardier 같은 다국적 기업이 탄생 못 했을 수도 있다.

 Lesage 수상은 1940년대 후반에 시작한 의료 보험 제도를 구체화 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제도로 발전시킨 것이다. 다음에 자세히 보기로 하자.

더 큰 업적은 교육제도의 총체적 개혁이었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이른바 Cours classiques (중세기의 스콜라스틱의 계열) 체제하에서 철학, 라틴어, 문학 등 의사 변호사 특히 신부가 될 젊은이들을 교육 대상으로 하는 제도 이었다.

경제의 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는 전혀 배출하지 못했다. 1960 년대 후반에 Laval 대학교 총장인, Alphonse Parent 주교의 보고서가 지금의 CEGEP 와 퀘벡 주립대 건립의 기초가 되었다.

 보수당인 Union Nationale 정당은 Daniel Johnson (부친) 1866-1968 기간 정권을 잡았다. 후 Daniel Johnson(아들)도 잠깐 수상이 되었다. Daniel Johnson 정권이 한 것이 바로 CEGEP 와 퀘벡 주립대학이다. 이 문제도 다음에 자세히 보자.

 

7.4 Bourassa 수상의 업적

 조용한 혁명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 Robert Bourassa 수상이었다. 앞에서 언급한바, 이는 1970년 총선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1970-1976 기간 그리고 1985-1994 장기간 정권을 독점했다.

Bourassa 수상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Bay James 라는 메가 수력 발전소 개발이었다. 이러한 수력발전소는 퀘벡 산업에 북미에서 가장 저렴한 전기 에너지 공급뿐만 아니라 전기 에너지 생산의 20% 정도를 미국 동북지역에 수출도 가능케 했다.

Bourassa 수상의 업적 중의 하나가 언어법 제 22 호다. 당시 이 법은 회기적 법이었다. 공공기관은 물론 소규모 기업을 제외한 민간기업 그리고 학교에서 불어가 의무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이유는 부모가 언어별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업적은 지금의 의료보험 제도 도입이었다.

René Lévesque 수상은 1960년대 Lesage 내각의 가장 뛰어난 장관이었다. 그러나 연방 체제하의 퀘벡 미래구상에 대해선 Lesage 내각의 구상과는 다르게 봐 1968 년에 자유당을 탈당하여 퀘벡 독립당을 세웠다. 그는 1976-1985 장기 집권을 했다.

 

7.5 Lévesque 수상의 업적

조용한 혁명과 직접 관련된 업적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동차 보험 제도 또 하나는 정치자금 개혁이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업적은 언어법 101호 이었다. 이 법에 따라 비 영어권 이민자들의 자녀는 무조건 불어 학교에 입학할 의무가 생겼다.

뒤에서 충분히 설명을 하겠으나 법 101은 한 개의 언어법 이상이었다. 이 법 덕분에 퀘벡 사회는 불어를 유지하게 되었고 퀘벡인에게 자존심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경제권 회복에 절대적 영향력을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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