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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부동산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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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부동산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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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0)

 

(지난 호에 이어)

구체적으로 보면, 주정부의 권한은 의료 서비스, 교육, 민법, 교도소, 시 정부 관리 등 주민의 복지와 직결된 활동범위라면 연방정부의 권한은 캐내다 전체의 복지와 관련된 활동에 대한 권한이다. 상업, 우체국, 국방, 해운, 화폐, 측량, 저작권, 시민권, 원주민, 외교 등의 권한이 연방 정부에 속한다.

그러나 2 회의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주정부 권한의 일부가 연방 정부에 이양 되어 원래의 권한 분배가 다소 수정 되기도 했다.

두 번째 도전은 언어 관련 문제였다. 이중 언어(영어 및 불어)는 법정 및 국회 기록에 국한되어 있고, 실제로 타 공공 분야에서는 선택 사항이었다. 불어권 캐나다(주로 퀘벡)와 영어권 캐나다간의 갈등 관계는 건국 후에도 해소되지 못했지만 건국 전과 건국 후의 다른 점은 불어권 캐나다의 지도층이 연방주의자와 퀘벡 자주주의(autonomy) 혹은 과격한 독립주의자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연방주의의 핵심은 퀘벡 주가 연방체제하에서도 얼마든지 정체성을 유지하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건국시 퀘벡인으로써 연방 주의를 내세운 정치인은 Jean-Etienne Cartier다. 그는 1867 년의 St. Baptiste 축제 시 이러한 선언을 했다.

‘‘ La confederation c’est un arbre dont les branches s’etendent dans plusieurs directions et qui sont fermement attachees au tronc principale. Nous, Franco-canadiens nous sommes l’une des branches. A nous de le comprendre et travailler au bien commun. Le patriotisme est bien entendu est celui qui ne lutte pas avec un esprit de fanatisme, mais qui tout en sauvegardant ce qu’il aime, veut que son voisin ne soit pas plus moleste que lui-meme. Cette tolerance, Messieurs, est indispensable. C’est par elle que nous nous associons a la grande œuvre, dans laquelle il convient a notre ambition de reclamer une part d’honneur.” (연방체제는 사방으로 퍼진 가지가 줄기에 강하게 붙어있는 나무와 같다. 우리 프랑스 캐나다 인은 이것을 이해 하면서 공동이익을 위해 노력 해야 한다. 애국심이란 과격 주의가 아니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간직하고 동시에 이웃을 존중하는 자세다. 여러분 필수적인 관대함이 있어야 우리의 몫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Lacoursiere pp. 119-120).

이러한 Cartier 사상은 오늘 날의 퀘벡 연방주의의 원칙적 기반이다. Cartier 의 연방주의에 대응하는 사고 방식은 당시 퀘벡 자유당이었다. 퀘벡 자유당의 연방체제에 대한 불만은 이렇다.

첫째, 불어와 카톨릭종교가 위협을 받는다. 둘째, 연방정부의 동서 철도 프로젝트(East-West Railway Project)는 세금의 인상이 수반 된다. 셋째, 연방체제는 프랑스 캐나다인의 강제 징병으로 연결이 된다.

연방체제는 영어권 우대 정책 때문에 퀘벡 경제가 불리 해진다. 흥미 있는 것은 카톨릭의 태도다. 성당 당국은 근본적으로 연방주의에 우호적이고 퀘벡 자유당의 주장을 반대했다.

이유는 100여 년 동안 계속된 갈등에 시달리던 퀘벡 사회를 연방체제가 안정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입각한 것이다. Trois-Riviere의 Thomas Cook 주교는 “우리 카톨릭인은 연방주위를 받아드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카톨릭은 퀘벡 자유당을 진보적 정치관 및 사회관 때문에 빨간 정당이라고(parti rouge) 미워했다. 지금도 PLQ는 빨간당이라고 부른다. 1871년에 카톨릭은 퀘벡 자유당을 비난했다.

“Il est impossible de le nier, la politique se relie etroitement, a la religion, et la separation de l’Eglise et de l’Etat est une doctrine absurde et impie. L’adhesion pleine et entiere aux doctrine catholique romaine en religion, en politique et economie sociale doit etre la premiere et la principale qualification pour les electeurs catholiques doivent exiger du candidat catholique”(Lacoursiere p.123-124)

(정치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성당과 정부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요 성스럽지 않다. 종교, 정치 그리고 시민경제 분야에서 카톨릭 사상을 받아드리는 것이, 카톨릭 유권자가 카톨릭 후보자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정치에 개입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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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9)

 

(지난 호에 이어)

4.5 연방제도 도입 시도

1864년에 캐나다정부 대표단은 영국 식민지인 Prince Eduard Island (P.E.I), New Brunswick(N.B.) 그리고 Nova Scotia(N.S.) 주를 방문하여 이들 주의 연방제 가입을 유도하러 나섰다.

1864년 10월 10일에 Quebec시에서 역사적 회의가 마련되었고 본 회의에서 이른바 국부(Peres de la confederation)들이 연방 제도설립에 합의했다. 연방제에는 하 캐나다(Quebec), 상 캐나다(Ontario), P.E.I., N.B., N.S. 등 5개의 주가 최초의 연방제 구성원이 되었다.

1865년 3월 10일 국회에서 찬성 91표, 반대 33표로 연방제가 통과 되었다. 퀘벡 의원 62명 중 37명은 동의, 25명은 반대했다. 이와 같이 건국시부터 퀘벡 의원 중 절반이 연방제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연방 정부체제는 일종의 양 민족간의 타협 조치라고 볼 수 있으나 이것으로 퀘벡 주민이 만족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퀘벡 출신 정치 지도자들은 연방 정부체제의 이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연방정부 수상이 되는 George-Etienne Cartier 는 이런 선언을 했다: Les Canadiens francais ne doivent pas avoir peur des Anglais. Apres tout, ils ne sont pas si effrayants. Admirons plutot leur energie et leur perseverance, imitons-les. Pour etre d’excellents Canadiens francais, il faut posseder, avec les qualites de notre race, les meilleurs de celles des Canadiens anglais. (우리 프랑스 캐나다인은 영국인을 무서워하지 말자. 따지고 보면 그들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활기 넘친 노력, 그리고 인내력을 본받자. 훌륭한 프랑스 캐나다인이 되려면 우리민족의 고유장점과 그들의 장점을 결합해야 한다) (Lacoursiere p.117).

 

4.6 캐나다 연방제도 설립

드디어 1867년 2월 26일 영국의회가 연방법을 의결하고 같은 해 3월 29일에 Victoria 여왕의 승인을 받았다. 연방법은 북미 영국법(British North American Act) 이며, 이것이 바로 캐나다의 헌법이다. 그리고 7월 1일자로 헌법은 유효가 되었다. 그래서 매년 7월 1일이 캐나다 건국기념일이다.

이와 같이 1763년 Paris 평화조약 후 104년의 양 민족간의 분쟁과 갈등을 포함한 우여곡절 끝에 일종의 타협인 연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1867년에 헌법을 기초로 거듭난 캐나다가 탄생했다.

연방제도의 배경을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은 정치적 변수, 국방 관련 변수 및 경제적 변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핵심적 정치적 변수는 동부 해안의 3개 주를 포함시키면서 프랑스계 캐나다의 정치적 비중을 축소시켜 영국계 캐나다가 프랑스계 캐나다를 좀 더 쉽게 관리하자는 전략적 변수다.

본 전략은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유는 프랑스계 캐나다를 연방제의 동등한 동업자라로 암시적으로 인정하는 바람에 프랑스계 캐나다의 관리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양 민족간의 분쟁은 현 시점에도 계속되고 있다. 연방제의 또 하나의 이유는 18세기의 미국독립 전쟁 이후 캐나다는 영국 영토인 만큼 항상 미국 군대의 공격을 우려하여 국방력을 강화시킨다는 계산도 변수다.

경제적 이유는 이렇다. 우선 1840년대부터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하는 세력이 커지는 상태에서 캐나다 자체의 독립적 존재가 위협을 받았다. 미국과의 합병논의 핵심은 앞에서 언급한바 거대한 미국 자본시장과의 접근, 선진형 미국 기술 활용, 시장 확대 등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을 막으려면 캐나다의 시장을 확대해야 하는데 연방제가 해법이었다. 철도로 태평양 연안의 Vancouver 시와 서해안의 Halifax시를 연결하면 거대한 시장이 형성된다는 vision 은 이러한 경제적 전략이었다.

또한 동부의 3개 주의 당시 경제력은 지금보다 우월 했으며, 이들 주가 가입 함으로써 중앙지역(Ontario 및 Quebec)에 밀집된 제조업에게는 주요한 시장 확대를 의미한 것이다.

 

4.7 연방제도의 도전

연방제의 첫 번째 도전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권한 분배였다. 본 분배의 원칙은 이렇다. 미국의 경우 권한 분배원칙은 중앙정부의 권한이 아닌 것이 주정부 권한이다. 즉 주정부 권한은 잉여권한(residual jurisdiction)이다. 반면에 캐나다의 경우 그 반대다. 즉 연방정부 권한이 잉여 권한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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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8)

 

(지난 호에 이어)

한편 무역에 사용하는 선박은 영국선박이 해야 한다는 규정에 대해서도 반발이 있었다. 망명했던 Papineau가 돌아와 양 민족간의 분쟁은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컸다. 1848년 총선 때 Papineau는 다시 의원으로 선발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어 일간지, The Morning Courier 기사가 흥미롭다.

“이제는 자유당 보수당간의 분쟁이 아니고 민족간의 분쟁이다.” (Lacoursiere, p. 108).

 또 하나의 분쟁 사유는 1837-1838년의 Patriotes의 무장 반항 사건 시 무자비한 국민 때문에 입은 자산 손실 보상 문제였다. 캐나다 의회에선 보상법이 의결 되었고 당시 총독 Elgin은 영국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사건 때문에 Ontario 주의 한 일간지는 다음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인 및 프랑스인 중 하나는 캐나다에서 없어져야 한다.” (Il faut qu’une des deux races, la saxonne ou la francaise disparaisse du Canada) (Lacoursiere, p.109).

The Montreal Gazette 지는 1849년 4월 25일에 이러한 기사를 실었다: “끝이 시작됐다. 여러분 영국인들, 여러분이 자신에게 충실하다면 여러분의 피와 여러분의 민족적 소속 만이 여러분의 행동을 인도해야 합니다.’’ (La fin a commence. Anglo Saxons, vous devez vivre pour l’avenir; votre sans et votre race seront desormais votre loi supreme, si vous etes vrais a vous-memes.)(Lacoursiere, p.109) 그날 Montreal 의 Place d’Arme 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집회 후 정부 건물에 방화 했다.

 양 민족간의 갈등 및 충돌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 지도급 인사들이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하고 나섰다

 

4.3 미국과의 합병 운동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한 지도급 인사 중에 현 Molson 맥주회사 설립자, John Molson 그리고 유명한 Montreal 의 대기업 Redpath 회사의 창립자인 John Redpath 그리고 퀘벡 수상이 될 Aime Dorion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본 미국 합병의 장점은 이렇다. 우선 미국경제가 캐나다 경제보다 규모가 크므로 자본 확보가 용이해진다. 둘째, 미국의 선진 기술도 사용할 수 있다. 셋째, 확보된 자본으로 숙원인 캐나다 동부 및 서부를 연계하는 철도를 건설 할 수 있다.

 

4.4 카톨릭 단체 유입의 가속화

한편, 1840년대는 많은 카톨릭 단체가 퀘벡으로 유입된 시대였다. Les clercs de Saint-Viateur, les Oblats, la Congregation des Sainte Croix, les Dames des Sacre-Cœur, les Sœurs de Bon Pasteur d’Anges, les Sœurs de Providence, la Congregation des Sœurs des Saints Noms de Jesus et de Marie, Institut des Sœurs des la Misericorde, les Sœurs de Sainte-Anne 등의 종교 단체가 왔다. 이들 종교 단체들은 차후 퀘벡 역사 흐름에 전략적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상당 수의 불어권 기관이 설립 되었다. 1844년에는 La Fondation de l’Institut canadien 그리고 다음해인 1845년에는 Institut Canadien de Montreal이 창립 되었다. 이들 기관의 사명은 퀘벡 프랑스 주민의 지적 수준을 제고 시키는데 있었다.

Institut canadien de Montreal 은 당시 700명의 회원, 100개의 신문, 1,000권의 서적을 구비한 도서관이었다. 이 서적 중 일부분은 이른바 ‘Index’ 대상이었다. Index가 붙어있는 서적은 카톨릭 성당 당국이 볼 때 지나친 진보적 내용을 내포한 서적이었다.

마침내 1850년대 후반이 다가오자 Ontario 인구가 Quebec 인구를 능가했다. Ontario 정치인 George Brown은 이른바 ‘Rep by Pop’ 원칙을 내세워 Ontario 출신 의원수를 늘리자고 주장했다. 물론 퀘벡 출신 의원은 이에 반대했다.

 이와 같이 두 번째 시도한 단일 캐나다 체제도 양 민족간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했다. 마침내 1858년 7월에 당시 Sherbrooke 의원 Alexander Tillock Galt 가 동부에 있는 나머지 영국식민지인 New Brunswick, Nova Scotia 및 Price Eduard Island를 추가로 캐나다에 가입시켜서 연방제(Federal System)를 하자고 건의했다.

 미국의 남북 전쟁도 연방제를 합리화 시키는데 일조했다. 미국의 납북 전쟁은 캐나다의 보안 문제를 야기시켰고 정부는 민방을 위한 민방군제도 도입을 구상했다. 이 사건은 또 한 차례의 분쟁을 유발 시키고 말았다.

1863년 10월 15일 민방법은 국회에서 통과 되었다. 본 법에 따라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남자는 의무적으로 민방 의무를 해야 하게 되었다. 단, 신부, 교수, 판사, 의사, 우체국 국장, 철도요원 등은 제외되었다.

이러한 끊이지 않는 프랑스계 캐나다 및 영국계 캐나다 간의 분쟁은 좀더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영구적 정치체제가 필요했는데 연방체제가 이러한 체제라고 믿는 사람 수가 늘어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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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7)

 

(지난 호에 이어)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간의 무력 충돌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실제로 1837년에 Saint Charles 에서 대규모 반항 집회가 일어났다. Papineau 는 무력보다는 협상을 주장했으나 Wolfred Nelson 은 무력대항을 선언하고 ‘‘주석 숟가락을 녹여서 총알을 만들자‘‘라고 외쳤다.

10월 24 일 Lartigue 주교는 영국정부에 순종하라고 애원했으나 무력충돌은 다가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Gosford 총독은 26명의 애국자를 체포했다. 반란군 (Patriotes)은 Saint Charles 성을 강화했다.

영국군은 1837년 11월 23일 Saint Charles 옆에 있는 Saint Denis를 공격했으나 Wolfred Nelson 은 저항하고 영국군을 잠시 막아 냈다. 그러나 함락 당하고 말았다. 결국 1837년 12월 14일에 마지막 조직적 저항 세력인 Deux Montagnes 의 Patriotes가 항복했다.

 

3.3 Nelson의 퀘벡 독립 선언

그러나 Nelson은 계속 저항을 하고 그는 1838년 2월 28일에 퀘벡 독립 선언을 했다. 독립된 퀘벡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원주민의 동등한 권리 부여, 종교와 정치의 분리, 영지 제도(영주에 하사한 토지 제도) 폐지, 사형은 살인자에 국한한다는 것.

언론 자유, 비밀투표제 도입, 2중 공식언어(불어 및 영어) 제도 확립 등이 독립 퀘벡주의 특징이다. 1838년의 저항은 실패했다. Patriotes 중에서 17명은 교수형을 받았고 130명은 추방 당했다.

 

3.4 Durham경의 건의

Patriotes 저항 사건 후 영국의 Lord Durham이 퀘벡에 와서 사건을 수습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Lord Durham의 건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영국계 이민을 대폭 증가해 프랑스인을 흡수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 두 개의 캐나다를 하나로 통합 시키는 것.

 

제4장 2차 단일 캐나다 1840-1867

4.1 캐나다 통합법(Acte d’Union)

 드디어 1840년 7월 23일에 두 개의 캐나다가 하나의 캐나다로 통합법인 Union Act (Acte d’Union)에 따라 시행 되었다. 국회 의원 수는 80명으로 하여 하 캐나다에서 40명, 상 캐나다에서 40명을 선발하게 되었다.

통합은 여러 개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하 캐나다(퀘벡주)의 인구는 상 캐나다(온타리오주)의 10배 인데 의원 수는 동등하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다.

둘째, 퀘벡주의 부채는 95,000 louis 인데 비해 온타리오주의 부채는 1,200,000 louis 였다. 즉 하 캐나다(퀘벡주)가 상 캐나다(온타리오주)의 빚을 부담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 문제는 영어 만이 공식 언어로 채택되어 퀘벡 프랑스계 주민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영국식민지가 된 후 악화되는 양 민jrnjs alswhr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캐나다를 두 개로 분리했지만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개 캐나다를 하나로 통합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바 프랑스계 주민과 영국계 주민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1840년 7월 23일 상 캐나다와 하 캐나다는 한 개의 국가로 통합했다. 통합된 캐나다는 1867년 7월 1일자로 프랑스 민족과 영어권 민족이 동등한 동업자로 캐나다를 건국하게 된다. 제 2 차 단일 캐나다 시대(1840-1867) 역사는 왜 건국이 필요하고 어떻게 건국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시대다.

 

4.2 영불갈등의 심화

통합이 되자마자 양 민족간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갈등 사유는 다양하다. 우선 수도의 입지 문제다. 퀘벡을 대표하는 의원들은 Montreal를 수도로 하는 것을 주장했으나 상 캐나다 의원들은 Ottawa를 선호했다. 그들은 수도는 Ontario 주 밖에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수도 입지 문제와 여타 불만 때문에 1844 년의 총선 때 폭력 시위가 발생하여 군대가 다시 한번 개입했다. 또 하나의 분쟁 사항은 1847년에 만 명의 영국계 이민자가 전염병으로 사망한바 있었다. 프랑스계 주민들은 이 전염병은 영국의 잘못이라고 의심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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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6)

 

(지난 호에 이어)

더 큰 분쟁 요소는 행정부의 정치적 역할이다. 행정부 구성원은 영국 왕이 임명하고 의회의 결의를 거부하는 권리를 지니고 있어서 의회의 권한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중인 1793년에 영불 전쟁이 다시 발생하여 영국은 퀘벡 주민이 혁명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믿었다. 사실, Philadelphia에 파견된 프랑스 정부 대표인 Edmond-Charles Genet는 퀘벡 프랑스인에게 독립을 하라고 선도했다. 한편 소규모 프랑스 함대가 캐나다로 항해하다가 겨울이 다가오는 바람에 포기 한 바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영국계 주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자유를 부여 하므로 승자인 영국 문화에 적응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영어 일간지인 Quebec Mercury는 이러한 기사를 썼다.

“정복 후 47년이나 되었으면 퀘벡인도 영국인이 되어야지요.” (Apres 47 ans de possession du Quebec, il est temps que cette province soit anglaise.) 1810년에 당시 총독인 James Craig가 쓴 편지 내용이 흥미롭다. “프랑스인은 마치 독립적 나라의 국민 같이 행동한다.”

 

3.2 영국인의 권력 독점, 부정 부패 Louis Papineau 무장 저항

1825년은 퀘벡 정치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왜냐하면 의원 Louis-Joseph Papineau 가 국회 의장으로 선발 되었기 때문이다. Papineau가 의장으로 선발 되므로 프랑스인의 반항은 더욱 강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분쟁 소지가 있는 문제가 많이 등장했다.

Papineau가 국회 의장이 된 후 프랑스인의 저항은 더욱 체계화 되었다. 저항 이유를 보면, 일도 안 하는 자가 공무원 봉급을 받는 영국인, 행정부의 임명제, 정부의 소비과다, 판사가 의원이 될 수 있는 제도, 특히 구두 투표로 진행되는 총선거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단일 캐나다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또한 퀘벡 주에서는 많은 영국인 이민을 위해 정부는 관대한 토지 분활제를 실시했다. 이들은 Sherbrooke 시를 중심으로 한 Easter Township 라는 토지 제도를 도입하여 일인당 10평방 마일의 토지를 제공했다. 이러한 사건은 프랑스인에게 더 큰 불안함을 고조시켰다.

 프랑스계 주민은 반항을 체계화 시키기 위해 Parti Canadien 라는 정당을 창설 했다. 양 집단간의 분쟁은 1832년의 Montreal 보선에서 본격화 되었다. 투표는 20일간 계속되는 상황에서 구두 투표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져 정부는 군대를 개입시켜 물리적 충돌 사건이 발생하여 3명이 피살 당했다. 불행히도 당시 총독 Lord Aylmer는 잘 했다고 군대를 축하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악화 되었다.

 그 동안 지속된 영국계(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민 때문에 퀘벡의 인구 583,000명 중 프랑스계의 비율이 하락하고 만다. 프랑스인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Parti Canadien 정당은 Parti Patriote (애국자 정당) 정당으로 변하고 저항력은 강해졌다.

1834년에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총 88명의 의원 중 77명이 프랑스계 위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는 Comte de Gosford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사태조사를 지시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친목을 촉진하기 위해 1835년 11월 25일 St-Catherine 축제에 프랑스인을 초대했다. 영국계 주민은 이러한 Gosford 총독의 타협적 태도를 비난하고 200명이 모여 반 프랑스인 단체인 Doric Club를 발족시키고 “프랑스인의 지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자” (A la mort plutot qu’une domination francaise!)고 했다.

Parti Patriote는 Gosford 총독에게 선거제도 개혁을 요청 했으나 거절 당하고 1834년의 Jean-Baptiste 축제는 반 영국 시위로 전환되어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Doric Club의 반 프랑스인 운동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인은 1837년에 Les Fils de Liberte (자유의 아들)라는 과격한 집단을 구성 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계는 British Rifle Corps (영국 소총부대)라는 무장 단체를 출범 시켜 1,200명이 가입했다. 두 집단의 무력적 충돌은 불가피해 졌다. 1837년 10월 23일, 프랑스인은 Saint Charles에서 수 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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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5)

 

(지난 호에 이어)

 

2 단일 캐나다 시대 (1763-1791)

2.1 퀘벡법(Quebec Act)

 1773년 Boston 주민은 세금의 과다를 반대해 차(tea)를 바다에 버렸다. 이 사건 계기로 미주의 13 개 영국식민지 주민이 독립선언을 하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여 1783 년에 독립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립 운동을 적극 도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영국은 퀘벡인의 반란을 우려하여 식민지의 행정을 체계화 시키기 위해 5 개의 법을 1774년 6 월 22 일에 채택했다. 이 법을 le Quebec Acte (Quebec Act)라 한다. 5개 법은 이렇다.

첫째, 캐나다 영토를 대 호수 지역(Great Lake Area)으로 확대한다. 둘째, 프랑스 민법은 유지한다. 셋째, 형법은 영국 법이다. 넷째, 행정부(Conseil legislatif)를 둔다. 이 행정부 구성원은 총선에서 선거된 사람이 아니고 영국정부가 임명한 사람이며 더 심각한 것은 국회에서 의결한 법을 거부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아 대다수인 프랑스인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카톨릭 신부는 10일조 권리를 유지 한다.

영국계 주민의 Quebec Act에 대한 반발은 강력했다. 그들이 가장 허용 못하는 법은 카톨릭 종교 자유였다. 소수인 영국계 개신교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Montreal의 Place d’Arme 광장에 있는 영국 왕 George 3세 동상에다 나무십자가와 감자를 부쳐놓고 “캐나다의 교왕 혹은 영국 바보”라는 글을 썼다.  

이러한 불만은 미국에 있는 영국계 사람들도 보였고 과격한 무장 집단이 Montreal에 쳐들어와 전투 없이 점령한 바 있었다. 한편 Benedict Arnold는 1776 년 봄 4,800 명의 독일 용병을 데리고 Quebec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3월 25일에는 프랑스인 반항 군이 영국군대와 Montmagny 부근에서 전투를 했다. 카톨릭 성당은 반항을 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공작 Henri Comte d’Estain 은 퀘벡 인에게 미국인 편을 들어 영국과 싸우라고 선도도 했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83년 9월 3일 평화 협정으로 종말 되었다.

2.2 미국 독립후 영국왕권 지지자 망명

 미국이 독립되자 7,000 명의 영국왕권 지지자가 캐나다로 망명하여 영국계 캐나다인 수는 급증 하였다. 상당 부분의 Montreal 지역에 정착 하였고 Eastern Township 지역이 개발 되었다.

 

3 이중 캐나다 시대(1791-1840)

왕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착할 곳을 별도로 요청하여 캐나다를 두 개 지역으로 불리하자고 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캐나다 영토를 Vaudreuil를 기점으로 동쪽은 프랑스인이 과반수고 서쪽은 영국인이 과반수가 되는 2중 캐나다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드디어 1791년 6월 10일 헌법 개정(l’Acte constitutionnel)이 채택되어 동쪽은 하 캐나다(Lower Canada), 서쪽은 상 캐나다(Upper Canada)로 구분되어 새로운 캐나다가 탄생했다.

3.1 정부조직구조, 선거제도, 영불갈등 고조

하 캐나다와 상 캐나다는 각각 국회와 행정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의원 수는 50 명이며 피선거권 조건은 21세 이상, 영국시민권자, 비 전과자 등이고 놀랍게도 여성도 투표권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이 권리는 1849년에 박탈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하 캐나다에서의 양 민족간의 마찰은 1792년 총선 때부터 시작했다. 선거구역수는 20구역이며 선거 구역마다 투표시기가 달랐다.

따라서 한 사람의 후보자는 두 개 선거 구역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투표 방식 이었다. 비밀 투표가 아니고 구두 투표제였다. 따라서 선거 결과의 객관성 및 신뢰성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실제로 하 캐나다(퀘벡주)의 투표 결과를 보면 영국계 주민은 총 인구의 10% 인데 당선자 수는 33% 나 되었다. 이유는 영국이 채용한 프랑스인이 고용주 눈치를 보고 영국계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확률이 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쟁 요소는 국회의장 선발 이었다. 프랑스인이냐 영국계인이냐 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제 1차 국회에선 28 대 18로 프랑시인 Jean Antoine Panet 의원이 의장으로 선발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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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4)

 

(지난 호에 이어)

이 시점에서 신 프랑스 영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군은 초 대규모였다. 대형군함 29척, 2척의 폭탄 선박, frigate (돛대가 3개 있는 군함) 및 corvette (중형 군함) 등의 12척, 80척의 군수 선박, 기타 소형 선박 60척, 1,900개의 대포, 8,500명의 정규군인, 13,500명의 예비군인 등을 포함하는 30,000 명의 군력으로 구성된 어마 어마한 군력이었다. 대조적으로 프랑스 군은 불과 15,000명의 인력으로 구성 되었다.

1758년 6월 30일 퀘벡 성문은 폐문되었고 영국군은 퀘벡시 북쪽 외각에 있는 Beauport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퀘벡시 건너편에 있는 Levis 지역을 방화하고 1,000개의 구조물을 파괴 시키고 7월 12일부터 9월 13일까지 퀘벡시를 폭격 하여 수 백 명의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영국군의 사령관은 Wolf 장군, 프랑스군의 사령관은 Moncalm 장군이었다. Moncalm 장군의 오판으로 프랑스군 대부분이 Beauport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것이 영국 군의 쉬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군은 대단히 열등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관의 전략적 실수로 결과는 뻔했다.

 영국군 사령관 Wolf 장군은 1758년 9월 13일 자정에 현 Abraham 공원 남쪽에 있는 저 지대 Lance au Foulon에 상륙했다. 그런데 프랑스 군은 5시간 후에 이 사실을 시민에게 알렸다. 더 심각한 문제는 Beauport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은 경고 후 1 시간 반이 되어서야 전투 장에 돌아왔다. 전투는 불과 30분 만에 끝났다.

Wolf 장군은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Moncalm 장군은 부상을 입어 다음날 9월 14일 사망했다. 여기서 신 프랑스는 실제적으로 225년의 개척 및 정착 역사의 막을 내린다. 그 후 약간의 전투가 있었지만 무의미 했다.

1760년 4월 28일에 프랑스 반란군이 공격하여 영국 James Murray 장군의 군대를 후퇴 시켰지만, 그 해 여름에 영국 군함이 가세하여 반란군은 Montreal로 후퇴하고 만다. 결국 1760년 9월 8일에 신 프랑스 전 지역의 프랑스 군은 항복하고 프랑스 영토는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7년 전쟁은 구라파에서 계속되고 1763년에 가서 Paris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채결되기 까지 퀘벡은 과도기 상태에 있으면서 영국은 퀘벡 프랑스인에게 다음을 허락했다. 즉 카톨릭 종교 자유, 성당의 십일조 제도 유지, 수녀의 활동 유지 및 원하는 사람의 모국(프랑스) 귀국 허락 등이다. 그러나 억제적 사항도 있었다. 무역은 영국인이 독점한다. 프랑스 화폐는 무효다. 주민은 영국군인을 자기 집에 숙박 시켜야 한다.

 

1.6 빠리 조약

 Paris 조약은 1763년 2월 10일에 Paris에서 체결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으로 요약 된다. 첫째, 카톨릭 종교 자유는 유지한다. 단 이러한 자유는 영국 법 울타리 내에서만 허용한다.

둘째, 조약 제 4조에 따라 원하는 사람은 모국인 프랑스로 귀국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 프랑스의 지도층이 대거 귀국하여 퀘벡인은 지도자가 없는 고아가 되었다.

셋째, 식민지 정부에 의회와 법정을 설치한다. 이와 같이 프랑스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치를 적용했다. 이러한 조치의 동기는 영국인의 수가 너무나 적어서 지나치게 강력한 조치는 프랑스인의 반란을 유발 시키므로 통치가 힘들어진다는 판단에서 온 것이다.

당시 퀘벡주가 캐나다였고, 인구 분배를 보면 프랑스인 90,000명에 비해 영국 민간인은 600명에 불과했다.

1766년에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Francis Masseres는 공개적으로 프랑스 이민은 금지하고 영국계 이민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영국계 주민은 프랑스 법은 모두 폐쇄하고 영국 법만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프랑스인을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불가능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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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

 

(지난 호에 이어)

총독과 카톨릭 주교는 자동적으로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당시의 문제는 Iroquois 원주민 진압 문제와 인구 증가 문제였다. 그리하여 후작(Marquis) Alexandre de Prouville de Tracy 는 원주민 진압 사명을 받았으며 Henri de Chastelard de Saliere 후작 사령관이 이끄는 24 중대(1,200 명의 병사)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1665년에는 5개의 원주민 부족 중 3개 부족이 진압 되었고, 1666년에는 나머지 2개 부족도 진압 되었다.

Iroquois 원주민이 진압 됨에 따라 프랑스 군은 귀국을 하게 되는데 당시 행정관 Jean Talon 은 403명의 군인으로 하여금 귀국하지 않고 식민지에 남아있게 유도 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신 프랑스 인구는 4,219명 이었다. 문제는 여자가 부족하여 인구 증가가 어렵게 되자 Jean Talon 은 1663-1673 기간에 850명의 여자를 이민시켰다. 이 여자들은 왕이 보냈다 해서 왕의 아가씨(filles de roi) 라고 불렀다.

한편 인구 증가 촉진에 필요한 결혼의 가속화를 위해 행정관은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를 의무 결혼 연령으로 규정했다. 또한 가족수당(allocation familiale) 을 통해 출산율 증가를 도모했다.

그 결과 프랑스인 인구는 1673년에 6,700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당시 신 영국 인구는 120,000 명이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인구는 영국인 인구보다 증가율이 열등 했으며 이것이 영국과의 정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의 하나다.

당시 신 프랑스 주민은 낯선 퀘벡 땅에서 생존하려면 원주민의 생활 양식을 도입해야 했다. 우선 프랑스 언어에 많은 원주민 언어를 도입했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물품 중 모국 프랑스에 없는 물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까생(moccasin)(신발), 카누(canoe) 등의 단어가 등장했고 또한 원주민의 생활 양식을 본 받았다. 겨울에는 눈 신발(raquette)을 신고 거동했고 하천에서는 원주민 카누가 주요 교통 수단이었다.

 

  1. 5 7 전쟁 프랑스의 종말

한편 신 프랑스의 영국과의 분쟁은 1670년에 영국 왕 Charles 2세가 Hudson Bay Company를 설립 한 후 더 치열해졌다. Hudson Bay 공사가 등장 함으로 모피 수확은 더 어려워지고 신 프랑스 인은 남쪽으로 사냥 범위를 확대하여 Louisianne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하게 더 심해졌다. 1690년에는 영국 군함 32 척의 해군과 육군이 Richelieu 강을 타고 공격해 Montreal 성을 함락시키고 육군은 질병으로 도중에 포기 했지만 해군은 Quebec 성을 공격했다.

원주민 문제는 당시 총독 Hector Calliere 경이 1670년 8 월 4 일에 39개 원주민 부족과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해결이 되었다. 그 후 1763년에 영국신민지가 되기까지 퀘벡 역사는 영국과의 전쟁 역사였다.

벌써 1711년에 영국은 퀘벡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했고, 그 해 9월 2 일에 영국은 막대한 군사력을 이끌고 퀘벡 성을 공격했다. 군사력은 9척의 대형 군함, 2척의 폭탄 운송 선박, 60척의 군수 선박 그리고 1,200 명의 전투 병사로 구성 되었다.

그러나 퀘벡 동북에 있는 Sept-Iles 부근에서 암초에 걸려 900명의 군인이 사망함으로 퀘벡 공격을 포기했다. 영국과의 전쟁이 지속된 이유 중의 하나가 경제적 이유였다. 18세기에 와서 종래의 모피 산업 이외에도, 철광 등 다양한 광물이 발견 되었고 어업, 산림업 사업이 빠른 속도로 개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인삼 수출도 단기였지만 활발했다. Jesuite 신부인 Joseph Francois Lafitau 신부는 대량의 인삼을 프랑스에 수출했다. 그러나 자연건조 방법이 아니고 인공 방법으로 인삼을 건조하는 바람에 약 효과가 사라져 수출은 1년 밖에 못 가 1752년에 중단 되었다.

처음부터 전쟁은 프랑스에 불리했다. 신 영국 영토의 인구는 신 프랑스 인구의 20배였다. 1744 년에는 오스트리아 왕권 상속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748년에 종말 되었고 영국과의 마지막 전쟁은 프랑스인이 부르는 “7년 전쟁” 혹은 영국인이 부르는 “정복의 전쟁”(Guerre de conquete) 인데 1758년에 시작하여 1763의 Paris 평화 조약으로 막을 내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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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2)

 

(지난 호에 이어)

1.2 모피 교역 및 불영전쟁

 Cartier가 떠난 후 50 년 동안 퀘벡은 프랑스와 연결이 단절 되었다가 1587 년에 Cartier 후손인 Jean 그리고 Michel Noel 형제가 와서 모피 상업에 종사했다. 마침내 프랑스 왕 Henri 4세는 신 프랑스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영토 개척을 지원하게 되었다.

1558년에 Troilus de la Roche de Mesgouez 경은 캐나다의 총 책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만다. 당시 신 영국 영토(New England)는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프랑스는 1603 년에 Samuel Champlain 을 캐나다로 보내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원주민 Iroquois 족을 진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609년에 원주민, Iroquois 족과 평화를 맺어 퀘벡시를 중심으로 하여 모피 교역이 본격화 되었다.

1617년에 프랑스 이주민이 다수 도착했다. Paris 에서는 유명한 Richlieu 추기경이 실권자가 되어 신 프랑스 영토 문제를 직접 챙기기로 했다. Richelieu 추기경은 가장 강한 조치로 신 프랑스 공사(Compagnie de la Nouvelle France)를 설립하여 100명의 유명인사들이 주주가 되었다.

신 프랑스 공사의 중요한 사명은 4000 명의 프랑스 이주민을 이민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628 년에 400명의 이주민이 퀘벡에 도착했다.

 한편 1626년에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이 재발하여 영국 함대가 St-Laurence강을 타고 퀘벡시를 공격하려 했다.

Rimouski시 부근에서 4척의 프랑스 선박을 파괴시키고 영국의 사령관인 David Thomas 및 Lewis Kirke 는 Champlain에게 항복하라고 했으나 전쟁은 계속되어 퀘벡시는 3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1629년에 영국군에게 넘기게 되었다.

 한편 신 프랑스인의 정착은 봉건주의식 토지 분활 제도로 시작했다. 우선 Robert Giffard 영지(Seigneurie)로 시작하여 많은 영지가 개발 되었다. 영지란 봉건주의 시대의 토지 부활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정부가 영주에게 대규모의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말한다.

영지는 보통 1 lieue (5,556 meters)의 정면(frontage) 그리고 1.5 lieue (8,334 meters)의 길이(length)의 토지였다. 영주는 소작인에게 이 토지를 분활 했다. 한편 영지는 주로 St-Laurence강변에 위치했다. Champlain은 퀘벡 성 및 몬트리얼 성 이외에도 Trois-Rivieres 성도 건립했다. 이와 같이 신 프랑스는 점진적으로 개척이 되고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3 종교 단체 유임 시작

17세기 초반 시기는 종교 단체의 유입 시기였다. 카톨릭 종교는 퀘벡 역사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종교 단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의료서비스 제도의 도입 및 개발이라 하겠다. 1615년에는 les Recolletts 단체, 1625년에는 Jesuites, 1639 년에는 Ursuline 수녀 단체 등이 도착했다. Champlain은 1635 년에 사망했다. 즉 그는 1608년부터 1635년까지 27년 동안 퀘벡을 통치했다.

 

1.4 이로꾸와 원주민굴복, 모피 교영의 할성화, 프랑스인의 정착

1641년에는 Paul de Chambly de Maisonneuve가 도착하여 이주민 정착을 집중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1653년에는 120명의 추가 프랑스인이 이민했다. 1650년대는 원주민 Iroquois와의 전쟁 시기였다. Iroquois 족은 모피 상업을 독점 하려고 사방을 공격하여 모피 교류 중심지로서의 Montreal은 위협을 받아 모피 재고가 바닥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신 프랑스의 미래가 불투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1660년에 Adam Dollar des Ormeaux 가 이끄는 상인들이 모피를 공급하여 프랑스 식민지는 보전 되었다.

1660년대에 와서는 신 프랑스 영토개발에 프랑스 왕이 직접 개입하여 신 프랑스는 일개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된 단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1663년에는 프랑스 왕 Louis 제 14세가 직접 나섰다.

프랑스 왕 Louis 14 세는 당시 강력한 수상 Jean Baptiste Colbert로 하여금 신 프랑스에 총독(Gouverneur) 제도를 도입하고, 총독 밑에 행정관(Intendant)을 두고 5명으로 구성된 독립적 위원회(Conseil souverain)를 두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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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1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

 

서론: 퀘벡 역사의 흐름

퀘벡 역사의 흐름을 크게 구분한다면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된다. 즉 신 프랑스 시대(New France, 1534-1763), 영국식민지 시대(British Colony, 1759-1867)와 건국 시대(1867-현 시점)다.

신 프랑스 시대는 Jacques Cartier 경이 1534 년에 Gaspe 지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상륙한 시점에서 1759년에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식민지가 된 시점까지. 이후 영국식민지 시대는 1867년의 건국 때가지 이어졌고, 이후부터 오늘 날까지를 건국시대로 구분한다.

한편 신 프랑스시기의 특징은 새로 발견한 영토의 개척, 이주민의 정착, 인디언들과의 전쟁 특히 영국과의 전쟁이다.

반면에 영국식민지 시대는 단일 캐나다(Unified Canada) 시대(1763-1791), 이중 캐나다(Upper Canada and Lower Canada) 시대(1791-1840), 제 2차 단일 Canada시대(1840-1867), 건국시대(1867-현시점)를 포함한다.

또한 건국시대는 퀘벡 사회개혁 전 시대(Pre-Quiet Revolution, 1867-1960), 사회개혁 시대(1960-1990) 및 사회개혁 후 시대(1990-현재)로 세분화 할 수 있다. 이러한 퀘벡 역사 흐름의 구분은 필자가 정한 구분이며 다른 학자들의 구분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구분이 퀘벡 역사 흐름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개혁 전 시대(1867-1960)의 특징은 영국인과 카톨릭의 절대적 지배였다. 카톨릭은 사회 안정, 종교 보전, 불어 및 불어권 문화 보전 등을 위하여 사회 발전보다는 사회 안정을 선호하고, 영국인의 절대적 지배하에서 퀘벡인은 열등한 위치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시대였다.

그러나 2회의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교통 및 정보 기술의 보편화 등에 따라 퀘벡 프랑스인은 자기들의 열등한 위치를 깨달으며 사회 개혁을 1945-1960 기간에 준비하여 1960년에 Jean Lesage가 이끄는 퀘벡 자유당(PLQ)을 성공 적으로 시도했다.

퀘벡 프랑스인은 자신들의 존엄을 다시 찾았고, 기술적 및 지성적 능력을 확인했고, 경제적 기적을 이루었다. 사회 개혁의 핵심은 교육 개혁으로 인한 CEGEP 제도 도입 및 퀘벡 주립대 설립, 의료보험을 포함한 사회복지 개혁 및 경제 기적으로 요약된다.

필자는 퀘벡주가 어떻게 각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현재의 선진사회를 건설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퀘벡역사는 영불갈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영불갈등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1 신프랑스 시대(1534-1763)

1.1 Jacques Cartier 캐나다 발견

1534년 7 월 24 일 프랑스 귀족 Jacques Cartier는 퀘벡 동쪽에 있는 Gaspe 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를 꽂았다. 이 순간부터 퀘벡 역사는 시작했다. 프랑스 국기에다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을 썼다. 그 지역의 원주민 추장 Donnacona는 Cartier 일행의 상륙을 반대하자, Cartier는 이것은 상륙 장소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추장을 진정 시켰다.

그 당시 벌써 스페인, 바스크 등의 어부들이 Newfoundland 해안에서 대구 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업은 대단히 수익률이 좋았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카톨릭인 구라파 인들은 1년에 150일 동안 고기소비가 금지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Cartier는 Paris로 데리고 갔던 2 명의 원주민과 함께 1535년에 다시 Gaspe로 돌아와 St-Laurence 강을 발견했으면 내륙으로 진입했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강이라고 착각도 했다.

그리하여 Cartier는 퀘벡시를 발견하고 Montreal 지역의 Hochalaga 마을도 알게 되었다. 당시 퀘벡시는 캐나다의 중심지였다. Canada란 원주민의 단어이며 “작은 집의 집단” (amas de petites cabanes) 이라는 뜻이다.

Cartier 는 1536에 Paris로 돌아갔다가 1541 년에 Jean-Francois de la Rocque, (Roberval의 영주)의 부관으로 100여 명의 프랑스 이주민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수정(quartz)과 황철광(동, pyrite de fer)을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착각을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Cartier는 퀘벡 역사에서 사라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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