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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5)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2 단일 캐나다 시대 (1763-1791)

2.1 퀘벡법(Quebec Act)

 1773년 Boston 주민은 세금의 과다를 반대해 차(tea)를 바다에 버렸다. 이 사건 계기로 미주의 13 개 영국식민지 주민이 독립선언을 하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여 1783 년에 독립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립 운동을 적극 도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영국은 퀘벡인의 반란을 우려하여 식민지의 행정을 체계화 시키기 위해 5 개의 법을 1774년 6 월 22 일에 채택했다. 이 법을 le Quebec Acte (Quebec Act)라 한다. 5개 법은 이렇다.

첫째, 캐나다 영토를 대 호수 지역(Great Lake Area)으로 확대한다. 둘째, 프랑스 민법은 유지한다. 셋째, 형법은 영국 법이다. 넷째, 행정부(Conseil legislatif)를 둔다. 이 행정부 구성원은 총선에서 선거된 사람이 아니고 영국정부가 임명한 사람이며 더 심각한 것은 국회에서 의결한 법을 거부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아 대다수인 프랑스인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카톨릭 신부는 10일조 권리를 유지 한다.

영국계 주민의 Quebec Act에 대한 반발은 강력했다. 그들이 가장 허용 못하는 법은 카톨릭 종교 자유였다. 소수인 영국계 개신교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Montreal의 Place d’Arme 광장에 있는 영국 왕 George 3세 동상에다 나무십자가와 감자를 부쳐놓고 “캐나다의 교왕 혹은 영국 바보”라는 글을 썼다.  

이러한 불만은 미국에 있는 영국계 사람들도 보였고 과격한 무장 집단이 Montreal에 쳐들어와 전투 없이 점령한 바 있었다. 한편 Benedict Arnold는 1776 년 봄 4,800 명의 독일 용병을 데리고 Quebec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3월 25일에는 프랑스인 반항 군이 영국군대와 Montmagny 부근에서 전투를 했다. 카톨릭 성당은 반항을 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공작 Henri Comte d’Estain 은 퀘벡 인에게 미국인 편을 들어 영국과 싸우라고 선도도 했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83년 9월 3일 평화 협정으로 종말 되었다.

2.2 미국 독립후 영국왕권 지지자 망명

 미국이 독립되자 7,000 명의 영국왕권 지지자가 캐나다로 망명하여 영국계 캐나다인 수는 급증 하였다. 상당 부분의 Montreal 지역에 정착 하였고 Eastern Township 지역이 개발 되었다.

 

3 이중 캐나다 시대(1791-1840)

왕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착할 곳을 별도로 요청하여 캐나다를 두 개 지역으로 불리하자고 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캐나다 영토를 Vaudreuil를 기점으로 동쪽은 프랑스인이 과반수고 서쪽은 영국인이 과반수가 되는 2중 캐나다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드디어 1791년 6월 10일 헌법 개정(l’Acte constitutionnel)이 채택되어 동쪽은 하 캐나다(Lower Canada), 서쪽은 상 캐나다(Upper Canada)로 구분되어 새로운 캐나다가 탄생했다.

3.1 정부조직구조, 선거제도, 영불갈등 고조

하 캐나다와 상 캐나다는 각각 국회와 행정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의원 수는 50 명이며 피선거권 조건은 21세 이상, 영국시민권자, 비 전과자 등이고 놀랍게도 여성도 투표권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이 권리는 1849년에 박탈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하 캐나다에서의 양 민족간의 마찰은 1792년 총선 때부터 시작했다. 선거구역수는 20구역이며 선거 구역마다 투표시기가 달랐다.

따라서 한 사람의 후보자는 두 개 선거 구역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투표 방식 이었다. 비밀 투표가 아니고 구두 투표제였다. 따라서 선거 결과의 객관성 및 신뢰성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실제로 하 캐나다(퀘벡주)의 투표 결과를 보면 영국계 주민은 총 인구의 10% 인데 당선자 수는 33% 나 되었다. 이유는 영국이 채용한 프랑스인이 고용주 눈치를 보고 영국계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확률이 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쟁 요소는 국회의장 선발 이었다. 프랑스인이냐 영국계인이냐 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제 1차 국회에선 28 대 18로 프랑시인 Jean Antoine Panet 의원이 의장으로 선발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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