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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3)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총독과 카톨릭 주교는 자동적으로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당시의 문제는 Iroquois 원주민 진압 문제와 인구 증가 문제였다. 그리하여 후작(Marquis) Alexandre de Prouville de Tracy 는 원주민 진압 사명을 받았으며 Henri de Chastelard de Saliere 후작 사령관이 이끄는 24 중대(1,200 명의 병사)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1665년에는 5개의 원주민 부족 중 3개 부족이 진압 되었고, 1666년에는 나머지 2개 부족도 진압 되었다.

Iroquois 원주민이 진압 됨에 따라 프랑스 군은 귀국을 하게 되는데 당시 행정관 Jean Talon 은 403명의 군인으로 하여금 귀국하지 않고 식민지에 남아있게 유도 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신 프랑스 인구는 4,219명 이었다. 문제는 여자가 부족하여 인구 증가가 어렵게 되자 Jean Talon 은 1663-1673 기간에 850명의 여자를 이민시켰다. 이 여자들은 왕이 보냈다 해서 왕의 아가씨(filles de roi) 라고 불렀다.

한편 인구 증가 촉진에 필요한 결혼의 가속화를 위해 행정관은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를 의무 결혼 연령으로 규정했다. 또한 가족수당(allocation familiale) 을 통해 출산율 증가를 도모했다.

그 결과 프랑스인 인구는 1673년에 6,700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당시 신 영국 인구는 120,000 명이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인구는 영국인 인구보다 증가율이 열등 했으며 이것이 영국과의 정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의 하나다.

당시 신 프랑스 주민은 낯선 퀘벡 땅에서 생존하려면 원주민의 생활 양식을 도입해야 했다. 우선 프랑스 언어에 많은 원주민 언어를 도입했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물품 중 모국 프랑스에 없는 물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까생(moccasin)(신발), 카누(canoe) 등의 단어가 등장했고 또한 원주민의 생활 양식을 본 받았다. 겨울에는 눈 신발(raquette)을 신고 거동했고 하천에서는 원주민 카누가 주요 교통 수단이었다.

 

  1. 5 7 전쟁 프랑스의 종말

한편 신 프랑스의 영국과의 분쟁은 1670년에 영국 왕 Charles 2세가 Hudson Bay Company를 설립 한 후 더 치열해졌다. Hudson Bay 공사가 등장 함으로 모피 수확은 더 어려워지고 신 프랑스 인은 남쪽으로 사냥 범위를 확대하여 Louisianne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하게 더 심해졌다. 1690년에는 영국 군함 32 척의 해군과 육군이 Richelieu 강을 타고 공격해 Montreal 성을 함락시키고 육군은 질병으로 도중에 포기 했지만 해군은 Quebec 성을 공격했다.

원주민 문제는 당시 총독 Hector Calliere 경이 1670년 8 월 4 일에 39개 원주민 부족과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해결이 되었다. 그 후 1763년에 영국신민지가 되기까지 퀘벡 역사는 영국과의 전쟁 역사였다.

벌써 1711년에 영국은 퀘벡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했고, 그 해 9월 2 일에 영국은 막대한 군사력을 이끌고 퀘벡 성을 공격했다. 군사력은 9척의 대형 군함, 2척의 폭탄 운송 선박, 60척의 군수 선박 그리고 1,200 명의 전투 병사로 구성 되었다.

그러나 퀘벡 동북에 있는 Sept-Iles 부근에서 암초에 걸려 900명의 군인이 사망함으로 퀘벡 공격을 포기했다. 영국과의 전쟁이 지속된 이유 중의 하나가 경제적 이유였다. 18세기에 와서 종래의 모피 산업 이외에도, 철광 등 다양한 광물이 발견 되었고 어업, 산림업 사업이 빠른 속도로 개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인삼 수출도 단기였지만 활발했다. Jesuite 신부인 Joseph Francois Lafitau 신부는 대량의 인삼을 프랑스에 수출했다. 그러나 자연건조 방법이 아니고 인공 방법으로 인삼을 건조하는 바람에 약 효과가 사라져 수출은 1년 밖에 못 가 1752년에 중단 되었다.

처음부터 전쟁은 프랑스에 불리했다. 신 영국 영토의 인구는 신 프랑스 인구의 20배였다. 1744 년에는 오스트리아 왕권 상속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748년에 종말 되었고 영국과의 마지막 전쟁은 프랑스인이 부르는 “7년 전쟁” 혹은 영국인이 부르는 “정복의 전쟁”(Guerre de conquete) 인데 1758년에 시작하여 1763의 Paris 평화 조약으로 막을 내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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