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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배우는 기쁨(97)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미모데 전서 2:4)

지금의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세상과는 먼 거리가 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의-식-주라는 기본 요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개도국에 있는 수 백만의 아이들이 배고픔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소득분배 제도 때문에 빈부격차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연의 관리를 의뢰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짐승을 다스려라’ ” (창세기 1:28)

 

 여기서 “그것을 정복하라” 라는 한글 번역은 자칫 하면 오해 소지가 있다. 영어 성경은 “control” 라고 표현한다. 즉 정복이 아니고 “조정” 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이 파괴 되고 많은 종류의 동물, 식물이 사라져가고 있는 형편에 있다. 이 현상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인류사회는 심각한 병에 시달리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 병을 사회적 죄(Social Sin)라 한다. 사회적 죄는 개개인의 죄를 더욱 악화 시킨다. 이들은 사회적 죄 때문에 개인의 죄가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기독교 교회가 이 사회적 죄를 무시하고 지나 갈 수 있나? 원칙적으로 볼 때, 교회는 사회의 양심이고 사회 윤리를 이끌어갈 의무와 책임이 있다. 개개 기독교인은 스스로 혹은 소속 교회를 통해 사회적 속죄를 위해 기도하고 동시에 사회적 및 정치적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면 과연 한인 이민 기독교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도교인의 의무를 다하느냐? 불행하게 답은 부정적이다. 우선 그들의 공동체 개념이 소속 “교회” 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원래 교회는 하나다. 그런데 몇몇 종교 지도자 및 신학자들의 주관적 진리의 해설로 인해 수 많은 교파가 등장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공동체를 소속 교회로 국환 한다는 것이다.

소속 교회 교인수가 50명도 안 되는데 그것이 유일한 교회라고 생강하고, 비 기독교적 패쇠적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참다운 기독교인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뿐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비극적 및 희극적 현상은 자기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가면 “신앙이 부족해서” “헌금이 부담되어서” 혹은 “협조 정신이 모자라서” 등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대면서 비난한다.

 

떠나가는 이유가 그 교회에 남아 있으면 신앙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 자세가 아니다. 목회자는 이웃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 교회의 구성원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교인의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을 최소화시켜 자기 교회에 남아 있게 하려는 잘못된 목회관을 유지한다는데 있다.

 

어떤 목사는 자기 교회를 떠나면 저주받는다고 공갈하기도 한다. 이러한 목회자는 자격이 없는 목회자다.

이웃 사랑의 비결은 이렇다. 첫째 이웃은 모든 사람이다. 이웃은 자기교회의 교인, 다른 교회의 교인 그리고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웃이다. 둘째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이웃을 세속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친절 해서” “교양이 좋아서” “아름다워서” “정직해서” “유식해서” 등이 기준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기준은 상대방이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현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따라서 인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루터(Luther)의 말 같이 조건부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무 조건부 사랑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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