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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배우는 기쁨(32)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이러한 접근 방법을 이용해 Dewey는 진리(Truth)를 정한다. 진리는 현실을 반영 해야 한다.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진리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chiller는 지식의 세계를 상위지식 세계와 하위지식 세계로 구분한다. 상위지식 세계는 형이상학적 세계, 하위세계는 자연적 경험적 세계다. 하위지식 세계는 변하는 것(정치), 완전하지 못한 것(사람), 부분적인 것(문화)이며 대신 상위지식 세계는 신(God), 의식, 자유 등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기존의 철학에서는 이 두 개의 지식세계를 다루면서 경험주의와 형이상학간의 조화를 무시했다. 경험주의는 상위지식 세계를 다루지 못한다. 형이상학은 하위지식 세계를 이해 못한다. Schiller는 이 두개의 기존 철학간의 조화를 도모했다. 해결은 실용주의에 있다고 믿었다.


Schiller는 Descartes의 3-단계 논법(연역법)을 비판한다. 3-단계 논법은 이렇다.


1. 소금은 물에서 녹는다.
2. Cerebos은 물에서 녹지 않는다.
3. 따라서 Cerebos는 소금이 아니다.


이러한 삼단 논법의 문제는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이지만 물질의 사용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목적이 요리용 소금이라면 이 논리 체제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Cerebos는 요리용 소금이고 물에서 녹기 때문이다. 


소 전제는 “Cerebos는 물에 녹는다”가 되고 결론은 “따라서 Cerebos는 소금이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화학용도라면 결론을 알 수 없다. 


Shiller의 메시지는 빈틈 없는 삼단 논법도 현실에 맞아야 유효하다는 것이다. Schiller는 수학적 진리에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1+1=2는 진리다. 하지만 물방울의 경우는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방울 두 개를 합하면 한 개의 물방울이 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렇다. 진리는 사건이 유효한 결과를 초래해야 하는 것이다. 


Schiller도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형이상학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끊임 없이 변하는 세상을 이해 못 한다. 


그는 경험주의에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 방법은 부분이 전체가 되는 과정을 설명 못 한다. 이 방법은 구체적 현실을 일반적 현실로 연결 못 한다. Schiller 에 의하면 절충책은 믿고자 하는 의지다(The will to believe). 관측된 사실이 일정 목적 혹은 용도를 달성하면 진리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Peirce의 실용주의는 개념의 정확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개념의 정확성을 확보하려면 다음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제 1단계 정확성(가장 낮은 확실성): 불안한 매일 생활: 공중에 있는 안전판 (Safety Board in the Air)에 서있는 사람의 공포; 
제 2단계 정확성(중간 확실성): 공포감의 정의(Definition): 공포감은 중력(Gravity)에 대한 인식; 
제 3단계 정확성(가장 높은 정확성): 중력의 결과(공중에서 떨어지면 사망). 이것이 그의 실용주의의 격율(Maxim)이다. 이것이 그의 저서, “How to Make Our Idea Clear”의 내용이다. 


Peirce의 경우도 진리의 핵심은 현실 사건이 우리가 기대하는 실용적 결과를 도출시킬 때 믿음(Belief)이 생긴다는 것이다.


James는 실용주의를 종교 생활에 적용하였다. James의 종교관의 요점은 인간의 생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만 믿는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가치는 효용가치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의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종교는 각자가 성스럽게 느끼는 경험이다” 단일(Unique) 신은 없으며 기독교의 신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단체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James가 말하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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