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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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Hwanghyunsoo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와 2대를 지낸 재선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임기가 2회까지 가능한 연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당은 종신 집권을 위해 ‘헌법 개정 당시의 대통령은 연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부칙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의도가 뻔한 개헌이라 야당 의원들이 펄펄 뛰며 반대했다. 이승만 정권은 개헌을 하기 위해 의원들을 협박하고 매수, 회유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137명의 개헌 찬성파 의원을 확보한다.

 그러나 1954년 11월, 국회 표결에서 가결 정족수 136명에서 1명이 부족한 135명이 찬성표를 던져 부결된다. 그들이 확보했던 137명 중에 최소 2명이 이탈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그게 왜 부결이야, 다시 계산해 봐라”라고 역정을 낸다.

자유당은 부결 다음날, <번복 가결 동의안>을 상정하고 국회를 다시 연다. 헌법 개정의 가결이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명이 사람을 나눌 수 없으므로 수학적 방식의 반올림을 통하여 의결 정족수는 135명이 바르다고, 이른바 ‘4사5입’이라는 부정한 논리를 내세운다.

 야당 의원들을 강제 퇴장시킨 가운데 <개헌안 번복 가결 동의안>이 통과된다. 이승만은 영구 집권에 성공했지만, 야당과 국민의 반발은 극에 달한다. 4사5입 개헌 파동 이후인 1956년, 이승만은 3대 대선에 출마한다.

야당인 민주당은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진보당은 조봉암을 내세웠다. 이렇게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으로 압축된 <제3대 정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고 그 열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야권 단일화 운동이 시작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 아래, ‘일당 독재를 타도하자’는 민주당 신익희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대세는 신익희에게 기울었고 이승만 체제는 바야흐로 끝을 보는 듯했다. 신익희는 25세에 상해 임시 정부의 헌법인 ‘약헌’을 기초한 3인 중의 한 명이다.

민주공화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그만큼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원들의 선택으로 대선 후보가 되었다. 대선 연설에서는 ‘대통령은 국민의 하인’이라 말하며 “집권하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겠다”며 시민들의 공감을 얻는다.

 1894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난 신익희는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에는 학업을 충실히 하는 한편, 비밀 결사를 조직해 민족 운동에 앞장선다. 고국으로 돌아와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보성전문학교를 출강한다.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쫓겨 중국 상해로 피신한다.

임시 정부에서 내무차장, 법무총장, 외교부장을 지낸다. 1920년대 이후, 임시 정부가 자금난으로 어려워지자 난징으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군 호경익 육군 대장을 찾아간다. 둘은 동경 유학시절 만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호경익과 면담 중, 한중 합작 투쟁이 명분과 승산이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호경익 대장은 신익희를 육군 중장으로 추천하고 경호 군인 70명과 군수 물자를 제공한다.

1927년 중국 정부의 위촉으로 국민군 중장이 된 신익희는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한국 청년 500명과 중국 및 러시아 청년 1100명을 모집해 항일 운동에 나선다.

 

 

그러다가 호경익 대장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임자가 온다. 그 후임자는 신익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는 자금이 부족하다며 ‘아편을 팔아 무기를 구입하라’고 한다. 신익희는 이를 모욕적인 제안이라며 분개하는데, “독립전쟁이 아무리 급해도 사람의 피를 말리는 아편을 중개하라는 것은 한국 혁명가를 모독하는 것이오”라며 중장직을 사퇴하고 상해로 돌아온다.

임시정부로 돌아와서 다시 내무부장을 맡는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효자동에 정착해, 미군정청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대한민국 민의원 의장, 3선 국회의원, 국회의장 등을 지낸다.

신익희는 외교, 법률, 내무에 능통한 문인적인 풍모이면서도 중국군 중장을 지내 무관의 지혜를 갖춘 지도자였다. 민족 운동가와 정치인의 면모가 적절히 배합한 인물로 생애 전반기를 독립 운동가로, 후반기를 이승만 폭정에 맞서 싸우는 야당 정치인으로 보낸다.

 

 

1956년 제3대 대선의 지방 유세에 들어갔다. 그동안 거듭되는 유세와 야당 후보 단일화 회담 등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지방에서의 강연 요청을 멈출 수 없었다. 5월 5일 호남 지방 유세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 전날 집안 식구들은 건강을 염려해 지방 유세를 만류했지만, “내 몸은 이미 당에 맡긴 것이니 당명에 순응하겠다”며 의연히 나섰다.

신익희는 5월 4일 밤 10시, 호남선을 타고 전주로 향한다. 다음날 새벽 열차가 강경을 지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난 신익희는 잠옷을 벗고 와이셔츠로 갈아입던 중에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숨을 거둔다.

64세의 거목은 이렇게 쓰러졌다. 헌정 사상 수평적 정권 교체를 열흘 남겨 놓고 드라마처럼 사라진다. 그의 돌연한 죽음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고 만다. 신익희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빗속에서도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들이 유해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방향으로 운구하려 시도하면서 경찰과 충돌하여 10여 명의 사상자와 함께 많은 시민들이 체포된다. 당시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를 불신했기에 당연히 심장마비라는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10일 뒤 대선에서는 다시 이승만이 3대 대통령으로 뽑힌다. 신익희가 죽은 18일 뒤, 서울운동장에서 2만여 명 조객들이 모여 영결식이 거행된다. 유족과 당 간부, 일반인의 순으로 분향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조지훈이 짓고 나운영이 작곡한 조가(弔歌)를 동덕여고 합창단이 부른다.

영결식을 마치고 장의 행렬이 서울운동장을 떠날 즈음, 모여 있던 시민과 청년들 사이에서 누군가,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기 시작한다. 서서히 군중들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눈물과 열창이 섞여 추모객들의 슬픈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는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 죄도 많은 청춘이야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비 내리는 호남선’은 사실 신익희 사망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가사에 담긴 감성이 그의 죽음을 상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을 만든다. 이 노래를 부른 손인호는 당시 얼굴 없는 가수였는데, 작곡가인 박춘석과 작사가 손로원과 함께 치안국에 불려가 심한 조사를 받는다.

하지만, 애초 이 노래는 신익희가 죽기 3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비 내리는 호남선’은 신익희 사망과 선거판을 타고 히트곡이 되고, 아직도 민주진영에서는 여러 의미로 사랑받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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