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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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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0
오늘은 그냥, 양미리나 먹자!

 

새해, 고국에 있는 친구가 ‘추운데 구워 먹으라고 양미리 한 두름’을 그려 보내왔다. 그 연하장을 보니, 신촌 로터리에 있던 <할머니 주점>의 양미리가 생각난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기본 안주로 양파 몇 조각과 고추장, 반 건조 양미리 몇 마리를 연탄불에 구워 주었다. 또 다른 기억은 ‘겨울 속초’다.

 

 
 

1996년 늦은 봄, 속초에 있는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황 선배, 바쁘지 않으면 시간 내서 속초 한번 놀러 오세요.” “아이고, 고마운데 내가 그럴 여유가 있나” 속초 토박이인 후배는 그곳의 법무법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놀러 오라는 게 아니고, 여기 속초에서 제가 지역 축제 자문위원을 하고 있어요.”하며 전화를 건 사연을 말한다. 작년부터 겨울에 <속초 눈꽃 축제>를 하고 있는데, 지방이다 보니 행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문도 해주고 개막 행사도 좀 도와줄 수 없냐’는 것이다.

 고국은 1995년부터 지방 자치가 시작되어 각 지역마다 각종 축제를 만들었고, 이런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유치하거나 협업을 많이 하게 된다. 아침 프로그램 등에서 ‘내 고향 소식’이나 ‘지역 축제를 찾아서’ 같은 코너들이 만들어지고, ‘KBS 열린음악회’나 ‘MBC 가요콘서트’ ‘전국 노래자랑’ 등의 쇼 프로그램이 지역 축제와 공동으로 제작된다.

속초는 관광의 도시여서 사계절 내내 크고 작은 축제를 개최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중앙의 눈치를 보다 보니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선으로 뽑은 군수나 시장이 인사권을 쥐고 지역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어야만 하는 지방 자치의 시대가 되다 보니,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를 추진한다.

 그렇게 속초 시청 담당자와 만남이 이뤄졌다. 속초시는 “<일본 삿포로 눈축제> 같은 행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 <삿포로 축제>는 1950년에 시작한 세계적인 축제여서 그 규모나 예산, 동원 인력이 어마어마한 행사였다. 1972년 동계 올림픽이 삿포로에서 개최되어 눈 축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는데, 속초에서 그런 행사를 하겠다며 “개막 공연을 MBC에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 출장 간 이벤트 PD와 행사 장소, 예산 등을 협의한 후 돌아오며, 내가 “이 행사할 수 있겠어?”하니, “아니요. 개막 프로그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행사 기획부터 우리가 다시 정리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속초시가 예산도 없으면서 공연히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요?” 한다. 그렇게 시작한 <속초 눈꽃 축제> 프로젝트는 여러 과정을 거쳐 다음 해 1월 말에 개최된다.

처음 우리와 협의를 시작할 때는 개막 공연만을 해주기 원했지만, 담당 PD의 기획서를 받아 본 후, 시간이 지나가며 욕심을 내어 전체 행사를 해 주기 원했다. 마침 우리도 지역 축제를 론칭(launching)하고 싶었기에 행사 전체를 주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행사다 보니 강원도에 있는 기존 업체들의 반발이 심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자기들 행사까지 서울에서 가져가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서울에서 모든 협력 업체가 다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강원 지역 업체에게 무대나 음향, 기념물 설치, 행사 유도 사인 등을 하청(?)을 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방 업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아니어서 개막일이 다가오며 여러 차질과 마찰이 생긴다.

2주일 전부터 속초로 출장 가 있던 담당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장님, 이거 큰일 났어요. 지역 업체들이 영세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요. 제시간에 행사 준비가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리고 더 큰 일은 이곳에 눈이 안 와요. 지금 눈으로 예술 조각을 만들려고 작가들이 내려와 있는데 눈이 없어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뭐? 눈이 없다고…” 속초시와 비상 대책회의를 했다.

우리 생각에 속초는 바닷가에다가 국립공원인 설악산이 바로 옆에 있어서 눈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은 설상가상으로 날씨까지 포근했다. 속초시청은 비상이 걸렸다. 설악산에서 행사장인 속초 공설운동장으로 눈을 퍼 날랐다.

수십 대의 트럭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운동장에 눈을 깔았고, 작가들은 밤새워 눈과 얼음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개막식은 치렀지만, 푸근하고 얄궂은 날씨 때문에 눈조각들이 녹아 내렸다. 행사장 바닥에 깔아 놓은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펄 밭이 되었고 관객들은 신발이 진흙에 빠져 걸음을 옮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개막일 다음날, 처음 행사를 부탁한 속초 후배가 “소주나 한잔 합시다”며 나를 근처 동명항으로 데리고 갔다. “회는 자주 먹었으니, 오늘은 양미리를 좀 먹죠” “어, 좋지” 해풍으로 반 건조된 양미리 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병이 비어 가는 만큼,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이번 행사를 하면서 어려웠던, ‘지역 업체의 텃세’, ‘애초부터 속초에 눈이 이렇게 안 오는데 <눈축제>는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실패 원인을 토로했다. 행사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 서로, “미안하다” 했다. 그러면서 “황 선배, <눈꽃 축제>는 이제 잊고, 우리 이 <양미리 축제>를 한번 기획해 보면 어떨까요?” 한다.

“뭐, 양미리 축제?” “이 양미리가 속초의 명물이에요.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 양미리가 엄청 나오는데…”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오늘은 그냥, 양미리나 먹자!” 우리는 그날, 한 두름의 양미리를 먹어 치웠다.

 두 달 뒤, 속초 후배로부터 우편물이 왔다. ‘황 선배, 내가 양미리 자료 좀 찾아봤어요. 참고하시고 조만 간에 제가 한번 올라 갈게요’ 하는 편지도 함께 있었다.

보내준 자료에는, “양미리는 ‘양’과 ‘미리’의 합성어로 양(洋)은 큰 바다, 미리는 용처럼 생긴 미꾸라지를 말한다. 그러니 ‘바다 미꾸라지’ 다.

등이 푸르고 배는 은백색이며 주둥이가 뾰족해 모양은 미꾸라지보다 꽁치에 더 가깝다. 동해안에서는 양미리라고 부르고, 서해안에서는 까나리라 부른다. 서해안에선 주로 봄에 어린 까나리를 잡아 젓갈을 담고, 동해안에선 겨울에 성숙한 까나리를 잡아 굽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졸여서 먹는다.

동해의 양미리는 겨울부터 초봄까지 연안에 바싹 붙어 알을 낳고 평소에는 굵은 모래 속에 몸을 감추고 산다. 동트기 전에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모래에서 물 위로 한 번씩 튀어 오르는 습성이 있는데, 이를 알게 된 어민들이 미리 바닥에 깔아 놓은 그물에 그대로 꽂힌다. 어선이 그물을 육지에 내려놓으면 쪼그리고 앉아 양미리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아낙네의 모습은 겨울철 동해안의 진 풍경이다.” 나는 그 우편물을 대충 읽고 파일 박스 어디엔가에 쑤셔 넣었다.

그 뒤 토론토로 이민을 오는 바람에 <속초 눈꽃 축제>는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기록을 찾아보니, 행사 장소를 설악산 국립공원 내로 옮겨 개최하고 있다는데, 아직도 강설량이 적어 여전히 애를 먹는 것 같다. 속초 후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속초 양미리 축제>는 2006년부터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양미리를 불에 구우면 하얀 속살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익힌 놈의 꼬리를 잡고 소금에 찍어 머리부터 뼈 채로 먹으면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친구가 보내온 연하장에는 그 양미리의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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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밥’

 

새해 첫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코비드-19> 3차 백신을 맞으러 갔다. 지난 1~2차 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차례가 왔다. 그런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주는데, 주사약이 ‘화이자’가 아니고 ‘모더나’라는 거다. 지난 2번을 화이자로 맞아서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할 때, ‘화이자를 맞겠다’고 했는데, “성인들은 당분간 화이자가 모자라서 모더나로 맞아야 된다”고 한다.

아내는 “뭔가 잘 못 됐다. 모더나를 맞으면 아프고 후유증 있다는데…”하며 주사 맞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어쩌겠나? 다시 예약을 하면 언제나 다시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고 해서, 내가 나서서 먼저 주사를 맞았고 아내도 쭈볏쭈볏 망설이다가 따라 맞았다.

 돌아오며 ‘공연히 찜찜한데 내가 너무 밀어붙였나’ 싶어 은근히 아내에게 미안했는데, 그날 저녁부터 주사 맞은 어깨가 쑤시고 팔을 들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내가 방에서 나오지 않아, 일단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부터 하고 다시 올라갔다.

“여보, 괜찮아? 내가 예쁜 짓 했어!”하며 말을 걸었더니, “뭐… 당신 밥 했어?”한다. “… (잠시 침묵) 아니, 설거지!” 아내의 표정이 좀 실망한 듯해서, “여보, 움직이지 말고 푹 자” 하며 내려왔다. ‘아, 설거지보다 밥을 먼저 해야 하는 건데…’

 ‘새해에는 아내에게 예쁨(?) 받는 남편이 돼 보자!’는 마음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밥을 해 본 지가 언제인가? 아내가 손녀 보러 한국 갔던 4년 전에 하곤 처음인데… 그때 사용했던 전기밥솥을 찾아보니, 어디에 쳐 박혀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알량한 밥 한번 지으면서 아파 누워 있는 사람에게 다시 올라가 ‘전기밥솥 어디 있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냄비에다 밥을 지었다. 하지만, 전기밥솥은 쌀만 씻어 넣고 취사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냄비에다 하는 밥은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쌀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4번 정도 씻고, ‘그래야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 다음에 씻은 쌀을 물에 담가 불리고, 이왕 하는 김에 ‘김치찌개도 한번 만들어 볼까’ 싶어서 참치 통조림을 찾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그 사이에 쌀은 잘 불려졌고, 냄비에 안쳐서 15분 정도 센 불로 끓인 다음, 뭉글한 불로 30여분 뜸을 들이니 나름 ‘자랑스런 쌀밥’을 지을 수 있었다.

밥을 지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음식은 대개 ‘굽다, 볶다, 찌다, 끓이다’로 표현되는데, 밥은 왜, ‘짓다’일까? 농사를 하는 행위도 ‘농사를 짓다’로 하듯, 집이나 건물도 ‘짓는다’라고 하고, 약도 ‘짓다’이다. 좀 세밀한 과정을 거치는 것들을 ‘짓다’라고 하나, 싶었다.

어느 칼럼에 “밥의 기본은 쌀이지만, 1970년 이전만 하더라도 매일 쌀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살림이 넉넉한 가정은 드물었다. 그래서 쌀에 약간의 곡식을 넣어 부족한 양을 메웠는데 보리, 조, 수수, 콩, 팥 등의 잡곡을 넣어 밥을 지었다. 그래서 여러 잡곡을 섞어 ‘짓다’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는 의견이 있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하며 밥 먹고 하자고 보채고, "밥 먹었니?" 하며 인사하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만남을 기대한다. ‘찬밥 더운밥 가리랴?’ 라는 속담도 있고, 요즘 같은 정치판을 빗댄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도 있다. 같이 밥을 먹어야 '식구(食口)'이고,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솥밥' 먹는 사이로 말한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친구들도 같이 밥을 먹은 수만큼 비례해서 친한 정도가 다르다. ‘그 친구 하고는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밥 한번 먹은 기억이 없다’면 벗이 아니라, 그저 같이 학교 다닌 동창이다. 애인을 사귀는 것도 얼마나 자주,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느냐에 따라 서로 사랑의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밥’은 관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일 수 있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그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인다. 생일을 맞거나, 입학, 졸업, 취업 등을 축하할 때도 결혼식, 약혼식 같은 기념일에도 같이 모여 밥을 먹는다. 환갑이나 고희, 하물며 누가 죽어 초상을 치를 때도 밥을 먹어야 서로 위로가 된다.

밥도 안 먹고 갔다고 하면 서로 뭔가 찝찝하고 불편한 관계다. 그러고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밥’이 끼어 있어야 가까워진다. 그냥 커피나 마시는 것과 밥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밥 정’이 없으면 서로 책임과 의무도 없다.

시인 백동흠이 지은 <밥>이라는 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이 보기에도 좋다/ 매일 먹건만 하나도 물리지 않고 전혀 맛 색깔도 없는데 맛이 있다/ 섞여 들어가서 반찬의 맛을 살려 주는 밥은/ 물에 들어가 스스로 풀어지면서 구수한 숭늉으로 살아난다/ 항상 만나도 물리지 아니하고/ 먹은 후 포만감을 주어 든든하게 해 주는 밥 같은 사람이 좋다/ 숭늉 같이 구수한 사람이 너무나 좋다

 

음식은 삶의 질이 나아지며 여러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음식과 재료, 가공과 조리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식생활의 변화는 아주 느린 것 같지만, 꾸준하게 변화했다. 다만,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 흡수하는 형식으로 변해 왔다.

요즘에는 김치찌개에 참치가 들어가고 빨간 고추 대신, 파브리카가 들어간다. 간장과 소고기로 만들었던 전통 궁중 떡볶이는 이제 고추장과 어묵, 치즈가 들어가 대중들이 먹는다. 서로 섞일 수 있는 음식들은 합치게 되고 여러 입맛을 통과하면 새로이 식탁에 오른다.

순대를 먹던 사람이 소시지를 먹고, 소시지는 다시 찌개에 들어가 부대찌개가 된다. 피자나 햄버거에도 불고기나 김치를 넣어 만들고, 녹두 빈대떡에 통조림 콘이나 햄, 치즈 등이 들어가 아이들의 입맛을 맞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음식 문화가 바뀌어도 ‘밥’은 그 고유의 맛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밥을 먹는 일본, 중국, 동남아 국가들이 있지만, ‘한국의 밥’ 짓기는 뚜렷한 특색과 전통을 잃지 않고 있다. 선조들이 지은 가마솥 밥알에는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 반찬과 찌게, 국, 요리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들어지고, 그러므로 밥상의 주인공은 역시 ‘밥’이다.

어린 시절 길들여진 밥맛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손맛이다. 그 어머니의 밥맛은 그전 할머니로부터 또 그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조리법으로 만든 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처럼 토론토에 살면서도 어릴 적 밥맛은 노인이 될 때까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밥맛에 가까이 가고 싶어 진다. 고국보다는 다양하고 맛있는 빵들을 접 할 수 있지만, 빵이 밥을 대신하지 못한다. 빵은 두 끼 이상을 먹으면 벌써 물리는데, 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밥은 전통이고 생명이고 삶, 즐거움이다. ‘밥’을 못 먹으면 사는 게 아니다. 아내가 아프면서도 ‘밥’ 걱정을 한 이유다. 그나저나 코비드 때문에 밥 한번 같이 먹기가 이렇게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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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2021년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LA에 살고 있는 김용현 선배가 보내준 <평화로 가는 길>을 읽는 것이었는데, 오늘 새벽에서야 마지막 장을 읽었다. 지난 10월 말에 책이 들어 있는 우편 봉투를 뜯고, 카톡으로 “잘 받았습니다. 책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독후감도 한번 써 보겠습니다”하며 인사까지 드렸는데, 어찌하다 보니 해를 넘겼다.

 나는 김용현 선배를 1991년에 <MBC방송연구소> 문자방송부에서 만났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약 2년 정도를 함께 근무했으니, 23여 년의 MBC 근무 기간에 비하면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김 선배의 스마트하고 온화한 첫인상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문자방송부는 새로 생긴 부서로 여기저기서 온 ‘용병’으로 만들어졌다. <문자방송>을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는데, 지금의 인터넷 방송의 ‘원조’ 쯤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당시, 뉴미디어인 <문자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20여 명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 부서에서 내보내고 싶은 인원들이 문자방송부로 모이게 된다. 부서장이 평소에 함께 있기 껄끄러웠던 노조 전임자도 있었고, 같이 있기 불편한 직원들이 발령이 난다. 김용현 선배는 교양제작국에서 위원으로 근무했는데, 그에게는 ‘해직 언론인’이라는 딱지와 소속 부서장보다도 선임이라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나도 소속 국장과 사이가 안 좋아서 새로운 미디어 방송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 자원을 했다. 하여튼 그런 인연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김선배가 ‘미국에 가족을 두고 온 기러기 아빠’, ‘해직 사우의 대표로 회사 측과 힘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등의 개인적인 사연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김용현 선배와 가깝게 된 것은 그의 자서전 <자식에게 남기는 이야기>의 편집을 도우면서다. 그는 함께 근무하는 후배 동료들에게 항상 웃음과 편안함으로 대했지만, 나는 선배의 모습에서 ‘겨울나무’ 같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김용현은 1941년 서울 종로구 충신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서울에 살던 그의 식구들은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치하에서 석 달을 보내게 된다. 그의 가족은 9.28 수복 때, 북으로 끌려가게 된다. 추석을 미아리 고개에서 보내고 창동쯤 이르렀을 때, 미군 폭격기가 나타났다. 폭격기는 퇴각하는 인민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격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파편에 맞고 뇌진탕으로 쓰러진다. 어머니는 막내를 업고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군 병원을 찾아 다녔다. 그 와중에 4남매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다. 형과 누나, 김용현, 동생은 행여나 놓칠 세라 서로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를 밀려다녔지만, 북새통 속에 어머니를 잃고 만다.

 

 

 국군을 만난 덕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가 없는 빈집은 너무 무서웠다. 4남매는 어머니를 기다리기보다는 ‘외할머니 댁에 가서 기다리면 어머니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외가가 있는 충북 영동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한강 다리는 벌써 끊어 진지 오래되어, 나룻배를 겨우 얻어 타고 건넌다.

나룻배가 가라앉을 것처럼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한강을 건넜다. 뺨이 터질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영등포역까지 걸어간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때 나이 15살이던 형과 14살이던 누나는 동생들을 살피기에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들을 돌보았다.

외할머니는 4남매만 내려온 걸 보고 너무 놀란다. 몇 날 며칠을 기다리니, 어느 날 어머니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등에 동생을 업고 나타나셨다. 남으로 가는 기차가 영동역에 서지 않자,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머리를 크게 다치신 것이다. 아버지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강원도 철원 어느 야산에 시신을 임시로 묻고 오셨다고 말한다.

외갓집 개울 건너 용암초등학교와 황간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여 년을 시골에서 보낸다. 1957년, 중앙고등학교에 합격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포기하고 일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음 해, 보성고등학교에 들어간다. 1965년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6월에 문화방송에 아나운서로 입사한다.

3년 뒤, 라디오 PD로 옮겨 송해, 이승주와 함께 ‘싱글벙글 쇼’를 제작했고, ‘별이 빛나는 밤에’, ‘젊은이의 양지’, ‘현지 르포, 그 후 그곳’ 등을 만들었다. TV 교양제작국으로 옮겨 ‘여성시대’, ‘터 놓고 이야기합시다’, ‘인생은 60부터’ 등을 연출한다.

1980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 MBC의 차장급 이상의 기자와 PD들에게 사직서를 쓰라는 이진희 사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사표 제출자 중 선별된 74명의 사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소위 전두환의 ‘1980년 언론 대학살’이었다.

1년여를 방황하다가 ‘미국 유학’이라는 핑계로 이민을 간다. 이민 초기에 주유소, 청소 등 노동을 했고 김 선배의 부인은 햄버거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한다. 그 선배도 MBC 아나운서 출신이었는데, 둘 다 견디기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다행히 2년여 만에 영주권이 나왔지만, 샌드위치 가게를 덜컥 사서 더 큰 고생을 한다. 비즈니스를 해 본 일이 없는 부부의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삶은 피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9년이 지난 1989년, 서울 MBC에서 복직 통보를 받는다. 아내와 두 아이를 두고 혼자 서울로 돌아오지만, 기대했던 ‘명예 회복’은 쉽지 않았다. 기쁨은 서러움으로 변했고, 이산가족의 삶 또한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5월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LA로 돌아와 <미주 한인방송>의 보도 책임자로 일하다가 <YK 미디어>를 설립하고, <무궁화 한글학교>를 만들어 교장을 하며 9년 동안 아이들에게 모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LA 지회장>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2008년에 <한민족 평화연구소>를 만들어 분단된 조국의 평화를 비는 여러 행사를 주최하였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김용현 선배는 내가 토론토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안쓰러워하며 여러 조언을 해 주셨다. 자신이 힘들었던 시간을 되씹어 보며 했던 말이었을 게다. 이번에 보내준 <평화로 가는 길>은 김용현 선배의 다섯 번째 책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MBC에서 해직을 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본인은 아쉬운 MBC 퇴직이었지만, 그렇게 이민 온 덕에 ‘고국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고국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꿈틀대는 지성을 보면, 얼어붙은 대지 위에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서 있는 ‘겨울나무’의 믿음직함을 보는 듯하다.

그의 책 219 쪽에 있는 ‘겨울나무’라는 동요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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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시와 무용, 그림을 그리며 놀다’

 

지난 12월 22일(수요일)에 재미난 공연이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재미난 공연이 있을 뻔했다’가 맞다. <한국전통예술공연협회>가 주최하는 <시무화유(詩舞畵遊)>라는 공연이다. 풀이하면 ‘시와 무용, 그림을 그리며 놀다’라는 컨셉인데, 6개월 전부터 금국향 선생을 비롯해서 고전무용팀과 GoGo장구팀이 주축으로 공연을 준비한 것이다.

코비드 시대에 ‘과연 이 공연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노스욕(North York)에 있는 굴딩 커뮤니티센터(Goulding Community Centre)에서 공연 허가를 해 주었다.

 그런데 공연 5일 전에 ‘<긴급> 온타리오 사실상 준 락다운 돌입’이 발표되고 모든 실내 모임은 10명으로 제한되는 등 관객을 모시고 공연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준비를 해 온 출연진과 스텝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행부는 “그러면 관객이 없이 공연을 해보자. 대신 모든 과정을 촬영해 영상으로 관객에게 보여 주자”며 비대면으로 예정된 장소와 시간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요즘처럼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선뜻하게 하면 누구나 조금은 시인이 된다. 자음과 모음을 요리조리 버무려 외로움이나 쓸쓸함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진다. 시인과 세상을 잇는 다리는 ‘글자’다. 외로움, 슬픔, 사랑과 같은 감정을 시어(詩語)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이 같은 정서를 무용가는 춤으로 표현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시에서 춤, 그림으로 매체가 바뀐다면 어떤 느낌일까? 시인과 화가, 무용가는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까? 소통할 수 있을까? 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으로 <시무화유(詩舞畵遊)>공연은 설계를 한다.

시에는 있는데 춤이 표현하지 못한 정서도 있고, 그림만이 나타낼 수 있는 감성도 있다. 같은 감정이라도 그것을 담아내는 매체가 글자, 춤, 그림이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시인과 화가, 그리고 무용가가 만나 같이 협업, 공연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특히 무용가가 판을 벌리고 시인과 화가들을 초대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옛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 가면 그들이 꿈꾼 문화 예술의 풍요로움을 찾을 수 있다. 한발 앞서갔기에 때로는 ‘현실성이 없다’고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같은 꿈을 꾸는 예술 동지들이 있어 의지가 된다.

1950년대 초, 1세대 남성 현대 무용가 김상규의 무용발표회에는 여러 예술인들이 함께했다. 김상규는 구상, 모윤숙, 유치환, 마해송 시인 등의 작품을 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공연에는 조지훈과 구상이 종종 함께 한다. 김상규의 무용 발표회 팸플릿을 보면 구상의 협업 흔적을 볼 수 있다.

백태호 화백 등 여러 화가들이 공연 포스터를 그려 주거나 무대 디자인을 도와준다. 이런 협업은 예술가의 속성이자, 각 장의 영역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격동기, 선배 예술가들의 협업 사례를 보며 <시무화유(詩舞畵遊)>는 용기를 얻고, 차츰 다듬어 지고 완성되었다.

 

 

무(舞) 공연 컨셉에 맞게 첫 번째 출연은 ‘금국향 고전 무용단’의 입춤으로 시작했다. 7명의 단원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마치 나비 같은 자태로 군무를 추었다. 고전무용은 마음속에 있는 덕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서로 간의 조화를 중시하며 손과 발끝을 접고 피며 질서를 지키니, 절제와 예의가 묻어 난다.

시(詩) 사회를 맡은 서한준의 소개로 홍성철 문인협회 회장과 김원희가 시 낭송을 했다. <디셈버> 나의 이 노래를 너의 귓가에 가 닿아/ 머물게 할 바람 한줄기 찾고 있네/ 황량한 벌판을 맨 살로 지나고/ 때론 바이칼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밤하늘 별들의 밀어를 품고 있는/ 그런 바람을 찾고 있네

‘명사 초대석’ 코너에는 이장성 얼-TV 회장의 시를 이영남이 낭송한다. <동백섬> 내가 빨며 자랐던/ 할머니 빈 젖처럼 한 줌 나체로 누워있다./ 동백꽃은 다 저서 없지만/ 눈을 감고 쓸듯이 오르면 한 숨/ 고운(孤雲)선생이 햇님이려니 좌상하고 있다/ 동백꽃은 다 저서 없지만

 탈북자 출신 김민주가 ‘걸어서 100리 길’을 회고하는 동안, 한오영의 무용이 슬픈 사연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회심곡을 부른 황원자에 이어, 금국향과 정미선의 ‘살풀이 춤’이 이어졌다. 살풀이 춤은 ‘살을 푼다’라는 의미다. 가는 해의 ’살’을 풀고 새로 맞이하는 해의 ’흥’을 맞이해, 코비드로 희생된 넋을 기리고 달랬다.

춤사위의 멋스러움은 한국 음식에서 주로 표현되는 ‘감칠 맛’이란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자칫 버려질 수 있는 발효된 음식의 ‘삭다’, ‘곰삭다’와 같은 의미가 춤사위에 녹아 있다.

화(畵) 다가오는 2022년은 호랑이해다. ‘새해에는 호랑이의 기상으로 힘차게 시작하자’는 컨셉으로 차세대 예술가들의 현장 스케치 퍼포먼스가 있었다. 카디널 카터 아트 하이 스쿨(Cardinal carter Art high school) 재학생 6명의 예비 화가들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30여분 동안의 집념으로 그린, 붓 자국들이 모여 차츰 호랑이 형상이 나타나는 진귀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마지막으로 호랑이 눈을 그려 넣으니 ‘호랑이 울음’ 효과음이 공연장을 포효한다.

 

 

유(遊) 마지막 코너로 Go Go 장구팀의 신나는 장단에 맞춰 ‘청춘이어라’와 ‘찔레꽃’이 연주되었다. 흥이 깨질 것을 걱정하듯, 이어서 ‘전사은의 음악 세계’가 펼쳐졌다. 드러머 권순근이 리듬을 보태니 출연자들과 스텝들의 어깨가 흥에 겨워 들썩거린다. 커튼콜에 맞춰 전 출연자들이 인사를 하며 <시무화유(詩舞畵遊)>는 막을 내렸다.

 공연을 마치고 기획을 한 금국향 선생과 인터뷰를 했다. “너무 아쉽지만, 그나마 영상으로 여러분들을 찾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죠. 장소나 음향, 조명 시스템 등이 열악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출연자들과 스텝분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주셔서 무사히 마쳤습니다.”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며 “내년에는 공연장에서 관객들을 모시고 공연을 하고 싶다.”고 해서, 속으로 이제 막 공연을 마쳤는데, 내년 공연할 생각이 들까 싶어, “내년에는 무슨 공연을 할 계획이세요?” 물었다. “내년에는 <배비장전>을 꼭 해보고 싶어요.”하며 <배비장전>에 대해 한껏 설명한다. ‘아, 이런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었다.

 토론토 <한국전통예술공연협회>에서 만든 <시무화유(詩舞畵遊)>는 유튜브에서 ‘시무화유’를 치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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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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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6
한걸음 다음에 고작 한걸음뿐인데…

 

아내가 지난 가을부터 노스욕(North York)에 있는 문화교실에서 고전무용을 배우러 다니는데, 내가 ‘운전병’을 하고 있다. 기다리는 2 시간 동안 근처를 산책한다. 공원도 걷고 동네도 걷는데, 그러다가 아주 좋은 곳을 찾았다. 세미터리(cemetery), 묘지다.

노스욕 시청 뒤에 있는 <섹션 36, 요크 묘지/Section 36, York Cemetery>는 1948년에 만든 곳으로 그 크기가 172 에이커나 된다. 이곳을 한 바퀴 돌려면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색다른 흥미로움이 있다.

묘지가 워낙 크다 보니, 센낙 로드(Senlac Road)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나눠진다. 동쪽에는 국가 영웅, 반란군, 왕족 등 서양인들이 있고, 서쪽 묘지에는 동양인, 대부분 중국인들의 묘지들이 모여 있다.

죽어서도 똘똘 뭉쳐 있는 모습을 보며,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잘 뭉치는 민족성을 보게 된다. 자세히 보니 황(黃)씨 들도 많이 있다. 이 멀리 타향에서 황씨 가문을 만나다니, 우리 선조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맞는 듯하다.

 

이 부지는 원래 1805년에 조세프 쉐퍼드(Joseph Shepard)가 구입해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쉐퍼드 애비뉴(Sheppard Ave)라는 길 이름을 쓰게 되는 것도 쉐퍼드 일가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 이전에는 윌로우데일 비행장으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 묘지가 공식적으로 문을 연다. 동쪽 묘지에는 캐나다 하키 영웅인 팀 호튼(Tim Horton)의 묘지도 있고, 전쟁 기념관, 재향 군인, 헝가리 공동체 묘지 등이 있다.

팀 호튼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Olga Alexandrovna)의 무덤이 있다. 나이 많은 공작과 강제 결혼한 그녀는 황제인 오빠에게 그 결혼을 무효화해 달라고 해, 승인을 받아 낸다. 러시아 혁명 후, 애인 쿨리코프 스키(Kulikovskys) 대령과 크림(Crimean)으로 도피했다가 외가가 있는 덴마크에 머문다. KGB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1948년 캐나다로 이주해 쿡스빌Cooksville)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공작부인은 올가로 알려지기를 좋아했다. 고양이 아가씨로 명성을 얻었고, 예술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60년에 사망한다. 

한국 같으면 묘지 사이로 산책을 한다고 하면 ‘미친놈!’ 하겠지만, 이곳에서는 동네 가장 좋은 위치에 묘지들이 있어 무섭거나 위험하지 않다. 사람들도 별로 없다. 묘지는 혼자 걸어야 좋다. 옆에 누군가 있으면 명상이나, 자연스러움이 덜하다. 말없이 걷다 보면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묘지를 걷는 것은 몸 보다, 정신의 일이다. 나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다.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 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서서히 나타난다. 

<걷기 예찬>을 쓴 프랑스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의 말에 의하면 “한 걸음 다음에 고작 또 한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30 킬로 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려갈 때, 세계는 우리의 바깥을 스쳐갈 뿐이다. 우리 속으로 세계가 들어올 수도 없고 우리가 세계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도 없다. 한 걸음 다음에 또 한 걸음밖에 걸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 한 걸음 사이에 나와 세계를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초조해하든 간에 삶은 한 걸음 다음에 열 걸음, 스무 걸음의 비약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욕망을 우리 실제 삶의 보폭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열 걸음, 스무 걸음의 비약을 꿈꾸는 사람보다, 지금 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사람이 더 멀리 갈 가능성이 크다. 그 한 걸음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 숲의 향기를 느끼고 그 한 걸음 사이에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며 그 한 걸음 끝에 온 생애가 저물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출발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멀리 떠나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묘지를 걸으면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많이 남지 않은 삶 속에서 어떤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정리할 수 있다. 남에 대한 배려가 모자랐음도 깨닫게 된다. 건강을 챙겨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운이 좋아 직장을 다니며 한번도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은 삶이 "당신은 해고됐다(You are fired)"고 하는 통보이다. '해고'되지 않고 ‘백수’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묘지는 대부분 눈 높이 아래에 있다. 그러기에 자연스레 묘비를 눈 여겨 보게 된다. 마치 무언가를 조사하는 학자처럼, 이름과 태어난 곳, 생년 월일과 사망일, 묘지명 등을 자꾸 보게 된다. 그는 누구일까? 어떻게 살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묘비에 이름 하나를 남기려고 그토록 마음 졸이며 살았는가? 조금 더 걸을 수 있었는데 서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 묘지는 죽은 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는 곳이다. 어떠한 삶을 살았던, 대부분 조촐한 묘비만이 죽은 자를 지킬 뿐이다.

오늘 아침, 동창 단톡방에는 ‘투병 중이던 친구 영경이가 죽었다’고 올라왔다. 모두들 추도의 글을 다느라 부산하다. 이제 가슴 뛸 일보다, 슬퍼할 일이 더 많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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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9
코가 뻥 뚫리는 겨자 소스로 버무린 양장피에 ‘빼갈’

 

“그래도 올해 가기 전에 다들 한번 봐야지?” “아, 좋죠. 어디서 뵐까요?” “그 거야, 맛있는 거 잘 아시는 분이 알아서 정해 주셔야지.” 벌써부터 미루고 미뤘던 지인들과의 모임이었다. “그럼, 중국 요리 어떠세요? 빼갈에다가…” “어~우! 좋지. 벌써 입맛이 확 당기네.” 이렇게 해서 지난 일요일에 한 중국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중국 요리는 지역에 따라 북경, 광동, 사천, 상해요리로 구분된다. 북경요리는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수도였으므로 궁중요리를 비롯하여 여러 사치스러운 요리가 발달했고,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광동요리는 아열대에 위치하고 있어 재료가 가진 맛을 잘 살려내는 담백함이 있다.

또한 사천요리는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 매운 요리가 발달해서 마늘, 파, 고추를 많이 쓰며, 상해 요리는 해산물에 설탕과 간장으로 요리를 해 달고 진한 맛이 강하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이 하는 중국 음식점은 중국 북방, 특히 산동요리의 영향을 받은 한국 음식이라고 하는 게 옳다. 특별한 외식 문화가 없던 조선에 1876년 제물포가 개항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식점이 생기는데, 가장 먼저 생긴 것이 상인이나 고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중국 요릿집이었다.

이후, 1898년에 산동반도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며 많은 산동 사람들이 제물포(인천)로 이주해 정착하며 대중적인 음식점이 생긴다. 당시 산동과 제물포 사이에 정기 항로가 왕래했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조선에 살던 화교들이 청요리집을 운영하며 지금의 한국식 중국요리로 발전하여 자리 잡는다.

우리는 코스요리를 시켰는데 누룽지탕과 양장피, 탕수육, 유린기, 쟁반짜장이 나왔다. 그날 저녁은 양장피가 별미였다. 일단 화려하게 야채, 고기, 해산물을 접시 가장자리에 예쁘게 담고, 가운데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피를 놓아,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았다. 거기에 매운 겨자 소스를 버무려 먹으니 고량주 안주로는 더 이상 좋은 게 없는 듯했다.

사실 양장피 맛의 비법은 코가 뻥 뚫리는 겨자 소스에 있다. 연겨자와 조림장, 다진 마늘, 땅콩버터, 설탕, 식초, 요구르트를 섞어 만드는데, 주방마다 레시피가 조금씩 다르다.

 

 

오랜만의 외식 자리인데다가 독한 고량주가 몇 순배 돌아가니 취기가 올라, 여기저기서 두서 없는 대화가 툭툭 오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군만두에다가 이 빼갈을 마실 때…” “아니, 군만두는 비싸서 먹지 못했죠. 양파에다가 춘장 찍어 먹으면서…” “아니야, 짬뽕 국물에다가 이 빼갈 한잔하면 죽여줬지.” 서로들 옛날 중국집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식사를 마쳤다.

다른 날 같으면 “한잔 더 해 야지?”하며 2차를 갔을 텐데, 이날은 눈보라와 강풍이 예고되어 더 이상 호기를 부리지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와 술이 모자라 아쉬웠는지, 고량주 양조장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붉은 수수밭’이 문득 생각났다. 장이머우 감독의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은 1930년대 중국 산동성에서 고량주를 만들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앞에 이야기했듯 우리 한국식 중국 음식의 원조가 영화의 배경인 산동 지역이다.

 여주인공인 18세 처녀(공리)가 50세 양조장 주인의 아내로 팔려 가는데 그는 문둥병 환자였다. 아버지가 나귀 한 마리에 딸을 팔아버린 것이다. 가마에 실려 시집가던 날, 젊고 건장한 가마꾼 장웬과 눈이 마주친다. 결혼을 하고 3일 뒤, 친정으로 나들이 가는 풍습으로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수수밭에 숨어 기다리던 가마꾼 장웬과 마주친다. 그는 공리를 덮치려고 수수밭으로 끌고 가는데, 공리는 반항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깊은 정사를 나눈다.

그 후 집에 와 보니 문둥이 남편이 죽어 있었다. 졸지에 과부가 된 그녀는 죽은 남편을 대신해 양조장을 꾸리고 고량주를 만든다. 이 여주인이 만든 술이 ‘18리 홍’이다.

이 ‘붉은 수수밭’은 감독인 장이머우도 유명하지만, 국민배우 공리의 첫 출연 작이라는 것과 원작 소설의 작가가 모옌(막언)이라는 점이다. 그는 14억 인구의 중국에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붉은 수수밭은 중국어로 홍 고량(紅高粱)이다. 그러니까 고량은 수수를 말하고, 고량주는 수수를 주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증류주다. 본래 백주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백주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속칭으로 '빼갈'이라고도 불린다.

오래된 백주 중 노 백건(老白乾)을 '빠이간'이라고 부르는데, 베이징식 발음으로 빠이걸(白干?)이라 하였다. '빠이걸'이란 발음이 한국에 들어와 '빼갈'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은 모든 이야기가 수수밭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다양한 욕망들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욕망부터 사회적, 국가적 욕망이 녹아져 색다른 시선으로 중국의 숨겨진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양조장에서 평등하게 일하며 즐거워하는 노동자, 일본군의 잔인함을 담아 20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를 축소시켜 보여준다.

 장이머우 감독은 특유의 색채 감각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붉은 가마, 붉은 수수, 붉은 황토, 붉은 석양 등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멋지게 표현한다.

장이머우 감독은 이 ‘붉은 수수밭’으로 국제무대 신고를 마친 후,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킨다. 하지만, 장이머우 감독은 자기가 데뷔시킨 공리와 불륜에 빠져 조강지처와 이혼을 하는 등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혹시 있을 연말 모임에는 고량주를 한번 드셔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지만, 고량주는 53도나 되는 독한 술이다. 독한 술을 마시다 보면 자칫 흥에 취해 말이 많아질 수도 있다.

‘붉은 수수밭’ 원작자의 필명은 모옌(막언/莫言)이다. 문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필명으로 사용하는데, 없을 막(莫)에 말씀 언(言) 자로 ‘말을 삼가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말조심’, 특히 정치, 종교 이야기는 제발 안 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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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2
‘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

 

중학교 시절에 서울 신당동에 살았다. 집 근처에 동화극장, 광무극장, 성동극장 등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극단이 전국을 돌며 노래, 춤, 신파극, 만담 등을 공연했는데, 이런 쇼는 일류 극장보다는 변두리에 있는 극장에서 더 각광받았다.

당시는 극장 포스터를 가게 벽면에 붙이게 해 주면 극장 초대권을 주었는데, 동네에 부모님이 철물점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가 “초대권이 있으니 동화극장으로 쇼 구경하러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

휘황찬란한 오색 조명,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 귀청을 때리는 악단의 팡파르, 유명 가수와 댄서들의 아찔한 스트립쇼까지 더해져 극장의 열기는 대단했고 그런 쇼를 처음 본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가수와 가수 사이에 코미디언 같은 사람이 나와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저 사람이 중앙시장 지나 성동공고 있잖아, 그 뒤에 살아?” 내가, “저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했더니, “만담가야!” “… 만담이 뭐야?”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사람이 바로 만담가 장소팔이었다. 지금은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기가 좋아 지금의 인기 연예인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만담은 조선시대 서울, 경기 지방의 잔치에서 흥을 내주던 ‘재담 소리’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춤 사이에서 흥을 돋우는 말잔치였던 재담은 신불출에 의해 독립적인 장르인 만담으로 재탄생된다.

신불출은 1905년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를 유학했고 학자풍으로 화술과 목소리가 뛰어났다. 유명한 시를 줄줄이 외우는 등 박식하고 재주가 좋아 최초의 만담가로 등장하자마자, 대중 스타로 자리를 굳힌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극장에서는 그가 공연하겠다면 언제라도 무대를 제공했을 정도였다. 본래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던 신불출은 풍성한 해학과 풍자를 담은 정치적 만담을 많이 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영화 동맹>의 간부로 좌익 활동에 참여하였다가 1947년에 월북한다.

북한에서는 공훈 배우와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낸다. 하지만, 신불출은 대본을 검열하는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는 등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을 여러 번 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불출 이후, 만담계는 장소팔과 고춘자가 이어간다. 장소팔은 1922년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남대문에서 모피상을 운영하고 인사동에서도 술도가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사업 확장에 실패해 변두리인 왕십리로 이사 간다.

장소팔의 초기 파트너는 10년 연하의 백금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뚱뚱해 장소팔과 결별 후, 코미디언으로 변신한다. 백금녀 다음, 콤비가 태평양 악극단 소속의 고춘자였다. 평안북도 운산 출신인 그녀는 장소팔보다 한 살 아래로 원래 가수 지망생이었는데, 장소팔과 함께 활동하며 만담가로 인기를 얻는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위문 공연 때 만나 단짝이 된다. 어수룩하면서도 엉뚱한 장소팔과 서글서글한 눈매에 쉰 목소리를 지닌 고춘자의 말재간은 전쟁 이후 지쳐 있는 대중들의 시름을 잊게 해주었다.

 

 

그들은 따발총 같은 속도로 만담을 했다. “춘자야.” “네, 아버지.” “비가 몇 도냐?” “끓는 물은 백도인데 글쎄요, 비는 몇 도예요?” “비가 몇 도냐 하면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유행가에 들어있어. 비가 오~도다.”

이어서, “그나저나 왜 이름이 장소팔이에요?” “아버지가 장에 소 팔러 간 사이에 낳았다고 장소팔이라오.” “어머나, 그러면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형님은 중팔이, 아버지는 대팔이, 우리 할아버지는 곰배팔이라오.”

또 다른 걸작, ‘딸라 부인’이다. “아휴, 저의 집은 딸이 일곱이라 고민이에요” “아이고 무슨 고민을 하나 그랬지. 내가 그 딸들을 아들로 바꿔주는 데를 잘 알아” “딸을 아들로 바꿔 주는 데가 있어요?” “그럼, 내가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웬 부인들이 ‘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라고 속삭이지 않겠어?” 사회 풍자가 살짝 섞인 그의 능청스러운 만담은 배꼽을 잡게 했다.

초기 만담 시대인 1950부터 60년대에는 만담 사이에 민요를 곁들이는 것이 유행하다가 라디오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이야기로만 하는 ‘라디오 만담’이 유행한다. 1970년 TV 시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코미디 장르가 생겨 난다. TBC의 ‘살짜기 웃어예’, MBC ’웃으면 복이 와요’와 TBC ‘고전 유머극장’ 등에서 젊고 새로운 형식의 콩트를 선보이며 개그 시대가 열리며 만담은 차츰 설 자리를 잃는다.

 

 

 

본격적인 칼라 TV 시대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담은 ‘개그의 아버지’로 일선에서 밀려난다. KBS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자키’ MBC ‘청춘 만만세’와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폭발적으로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배삼룡, 이주일, 백남봉, 임희춘, 심철호 등 선배 코미디언들과 함께 전유성, 고영수, 임하룡, 엄용수, 김보화, 이성미, 최양락, 심형래, 김형곤 등 많은 새롭고 젊은 개그맨들이 등장한다.

추석이나 설 특집에서나마 볼 수 있었던 만담 코너는 고춘자가 1995년, 장소팔이 2002년에 세상을 떠나며 아예 TV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만담 보존회>와 몇 명 개그맨들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지만,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 만담이 서민들에게서 멀어졌는가? 현재, <만담 보존회> 회장으로 있는 장소팔의 아들 장광팔은 “만담을 해오면서 스스로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국악이 빠진 채 만담만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예전처럼 만담과 민요와 국악이 어우러져야 ‘제 맛 나는 만담‘이 완성된다고 한다. “국악과 다시 결합하여 젊은 층이 선호하는 스토리로 만들어져야 만담이 생존하고 발전하는 길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단지, 만담뿐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전통과 문화가 하나, 둘 함께 사라져 간다. 그나마 볼 수 있었던 이은관의 배뱅이 굿이나 김세레나의 신민요, 김뻑국의 해악 타령 등 우리 민족의 서민 문화를 붙잡고 있었던 기틀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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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봉굴레산과 장군별장 사이의 ‘보리밭’

 

 어느 목회자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라는 글을 보며, 나의 지난 모습을 되돌아본다. 행복했던 순간이라… 언제였지? 잘 생각나질 않는다. 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숨 바쁘게 살았다. 아내와 결혼한 후 자식들이 생기며 책임은 더 늘어났고 그만큼 은행대출금도 많아졌다. 간부 사원이 되고부터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로워졌지만, 미래에 대한 위기감은 더 느껴졌다. 과감하게 회사를 접고 캐나다로 이민을 왔지만, ‘아, 내가 무모했구나’ 하며 곧 후회를 했다.

 이민생활은 즐거웠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제대로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내가 쓰러지면 우리 가족들도 함께 불행해질 것같아, 그런 생각조차 사치였다. 은퇴한 후에는 무기력과 섭섭한 감정이 찾아왔지만,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하다 보니 나름 의욕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연금받아 생활하며 ‘지금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라고 말하기는 좀 부끄럽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하니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추자도의 해군생활이다. 나는 그곳에서 14개월을 복무했다. 요즘 추자도는 낚시와 올레길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1977년만 하더라도 관광객들이 왕래하기에는 무척 불편한 곳이었다. 이 섬은 완도와 제주 사이에 있는데, 당시는 주민 3천여 명이 살았다. 목포에서 5시간, 제주에서 3시간이나 걸렸고 파도가 심해지면 섬에서 3~4일은 나가지 못하고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곳에 근무하면서는 추자도가 그렇게 좋은 곳인지 못느꼈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목포 3해역사 소속 <202 레이다 사이트> 기지였다. 부대 전 인원이 30여 명이었는데, 하사관과 장교가 15여 명이고 수병이 15여 명 정도였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내 위로 선임수병 1명, 동기 1명, 그리고 후임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내무반 생활도 편했고 과업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인원이 작은 곳이어서 가족같은 분위기였고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부식을 섬에서 자급자족해야 했다.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과업이었는데 고등어가 한창일 때는 싱싱한 회부터 국, 조림, 구이, 튀김뿐만 아니라 김치에다 고등어를 넣어 담아먹기도 하였다.

 추자 어선들이 일손이 부족할 때는 부대원들이 대민봉사로 작업을 도와주곤 했는데, 돌아올 때면 감사의 뜻으로 막걸리와 푸짐한 안주거리를 가지고 왔다. 요즘 최고의 안주거리인 쥐포를 심심풀이로 즐겼다. 마을에서 얻어온 생선을 말리기 위해 당번도 있었다. 발전실은 일년 내내 온도가 높아 생선건조에 최적인 장소였지만, 냄새 때문에 파리가 꼬여 우리들은 돌아가며 파리채를 들고 생선을 지켰다. 싱싱한 홍합, 미역과 다시마, 돌김을 직접 따서 먹는 것은 아무나 누리지 못할 호사였다.
 


 내가 하는 주 업무는 부대입구를 지키는 위병업무와 산꼭대기에 있는 벙커에서 레이더를 보는 일이었다. 우리 기지는 상추자도 영흥면 ‘큰산’ 중턱에 있었는데, 위병을 서다 보면 추자항과 맞은편 봉굴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추자항은 규모는 작지만, 해안을 따라 음푹 들어간 지형조건으로 항구가 발달해 추자도의 중심 노릇을 하고 있다. 각종 행정기관인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이 있고 초등학교 그리고 여러 생활편의시설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위병이라고는 하지만, 영외 거주자들이 퇴근하고 나면 사실상 부대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먼 산을 바라보거나 항구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구경하는 일이 일과였다. 그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그리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곤 하였는데, 평생 편지의 7할은 이곳에서 썼지 싶다.

 우리 부대의 주소는 ‘제주도 북제주군 영흥리 장군별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편지를 받아본 친구들은 ‘장군별장’에서 근무하니 얼마나 좋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군별장’은 통신보안을 위한 거짓 주소였다. 마주 보이는 봉굴레산은 높이가 60미터 밖에 안 되는 야산이었고 당시는 나무들이 없어서 산마루 전체가 훤히 들여다 보여, 몰래 집나온 강아지 조차도 보일 정도였다.

 봉굴레산은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북서쪽 머리 부분에 다무래미라는 섬이 있고, 산 정상은 젖가슴처럼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눠져 있다. 제주말로 ‘봉끄랑하다’는 ‘무언가 풍성하고 빵빵하다’는 뜻인데, 아마 그 말이 변해 ‘봉굴레’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부대가 있는 ‘큰산’(산 이름이 큰산이다)과 ‘봉굴레산’ 사이에는 밭들이 펼쳐 있었다. 배추, 상추, 고추 등을 키웠고 여름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가 제철일 때는 밤에 야간조를 짜서 고구마를 서리를 해서 삶아 먹기도 하였다. 한 번은 부대 앞 고구마 밭주인이 화가 치밀어 부대에 올라와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밭 한 고랑을 다 뒤집어 파가는 건 너무 하는거 아니냐”며 핏대를 올렸다. 영외 거주자들은 대부분 추자 사람 집에 세들어 살거나 현지여성과 결혼을 한 선임하사도 있었기에 그 농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있나? 우리들은 일단 시치미를 뗐지만 그가 밭에서 찾아 가져온 숟가락이 결정적 단서가 됐다. 그 숟가락에는 별표 모양의 표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군에서 사용하는 숟가락이었다. 지난밤 서리 때 누군가 숟가락으로 땅을 파다가 잊어버리고 온 것이다. 그것을 본 기지장은 부식창고에서 쌀 한 가마니를 꺼내 농부의 집으로 보내 주었고, “다음 농사 때 대민봉사를 하겠다”고 약속해 말썽없이 마무리됐다.
 


 고구마를 걷어낸 그 밭에는 11월 중순경부터 보리 파종을 한다. 다음해 4월경에는 푸른 청보리가 온 밭을 뒤덮는다. 항구로 밀려오는 흰 파도만 보아도 가슴이 벅찬데, 거친 바람이 청보리를 춤추게 하면 그 모습은 황홀하다. 바다와 바람의 위대한 조화가 시작되면 이 노래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보리밭’은 시인 박화목이 그렸고, 윤용하가 곡을 입혔다. 황해도 은율 출신인 둘은 1951년 부산에서 만나 “아무리 피난살이지만 보람있는 일을 하자”며 이 가곡을 만든다. 이 노래는 서정적인 멜로디이지만 낭만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격정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다. 윤용하는 외로운 작곡가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를 따라 만주 봉천에서 자란다. 어릴 때 프랑스 신부의 성당에서 노래하고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음악을 배운다. 용정과 함흥 영생여중 교사를 지냈다가 해방 후 남하하여 한양공고와 동북고교에서 음악 교사하며 “낮에 놀다 두고 온…”이라는 동요 ‘나뭇잎 배’를 작곡한다. 하지만, 외로움과 가난에 지친 그는 외로이 단칸방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박화목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남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그는 중앙방송국(KBS)의 프로듀서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보리밭’은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였다. 같은 실향민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감상에 젖는 것은 그런 마음이 통해서이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성품으로 아이들을 위한 동요를 여러 곡 만드는데 ‘과수원길’도 그의 작품이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나는 가곡 ‘보리밭’을 들으면 추자도 ‘봉굴레산’과 ‘장군별장’ 사이에 펼쳐진 보리밭이 생각난다. 그 보리밭은 관능을 자극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섬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삭이 팬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리했던 고구마 밭주인이 그 보리밭의 주인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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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나는 부산 서대신동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부산’이라고 선뜻 말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부모님이 함경북도 출신인데다가, 부산 피난살이 중에 만나 결혼해 나를 낳았고, 정작 3살 때 서울로 올라와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산하면 왠지 정다워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았고 그곳 출신이라고 하면 ‘나도’하며 반갑게 인사하게 된다.

 우리 가족처럼 지방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 ‘서울 공화국’을 만들었다. 2019년 통계를 보면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50%를 돌파했다고 한다. 한 나라 수도가 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흔한 일이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이 서울로 모이는 이유는 진학과 취업이다. 명문 대학과 일자리가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문화 예술에 꿈이 있는 청년들이 서울로 모인다. 그래서인지 제 2의 도시인 부산에서 올라온 연예인도 꽤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배우 김태희, 김혜수, 김자옥, 정유미, 최지우, 공유, 강동원, 장혁, 이준기 등이 부산 출신이다. 개그맨 이경규, 정형돈, 신봉선, 안영미, 김숙, 가수로는 나훈아, 문주란, 설운도, 최백호, 강산에, 김건모, 김수미, 이소라, 이승환, 이택림, 장현, 정훈희, 현철, 정용화, 쌈디 등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최근 조사에 의하면 아이돌 가수의 11% 정도가 부산 경남 출신이라고 알려졌다.

한 연예 기획사 대표는 “부산 출신 연예인들은 지역색인지, 대부분 성격이 괄괄하고 쾌활한 것 같다”며 “아무래도 활발한 성격이 연예계 생활에 도움이 되니 부산 출신 연예인이 많은 것 아니겠냐”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다. 하지만, 부산 출신 연예인들은 소위 말하는 ‘끼’는 많지만, 다른 지역 출신처럼 지역을 홍보하거나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수도권에 정착해 생활한다. 물론 인기가 시들어 지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1970년대 톱 가수였던 이 가수도 TV에서 볼 수 없더니, 슬그머니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 가수’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꽃밭에서’다. 이 곡을 들으면 ‘나의 20대’로 쉽게 돌아 갈 수 있어 즐겨 듣는다.

이 곡의 작사가는 이종택으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세조 12년 강원도 관찰사로 관직을 마친 최한경의 한시(漢詩)를 풀어 쓴 것이다. 최한경에게는 어릴 적부터 마음에 뒀던 박소저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 대상으로 양쪽 아버지끼리 혼삿말이 오간 사이다. 한양에 올라와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고향의 그 이웃집 처녀를 생각하며 지은 애틋한 시다. 최한경이 쓴 ‘花園(화원)’은 세월이 지나 ‘꽃밭에서’라는 음을 달아 훨훨 날게 된다.

坐中花園 膽彼夭葉(좌중화원 담피요엽)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兮兮美色 云何來矣(혜혜미색 운하래의)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其花 何彼(艶)矣(작작기화 하피염의) 아름다운 꽃이여 그리도 농염한지/ 斯于吉日 吉日于斯(사우길일 길일우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君子之來 云何之樂(군자지래 운하지락)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1967년 여름, 부산에서 올라온 17세의 여고생은 남대문 인근 한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피아니스트였던 작은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미 8군 가수들이나 부르던 팝송 ‘러브 레터(Love Letter)’를 유창하게 불렀다. 특유의 미성과 고음에 감탄한 나이트클럽 직원들은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시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작곡가 이봉조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얘는 누구야? 가시나 쪼깐한 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이봉조는 자신이 만든 곡 ‘안개’의 색소폰 연주가 담긴 음반을 소녀에게 쥐어 주며 말한다. “이 곡 멜로디를 꼭 외워 놓아야 한다. 알았지?” 여고생 정훈희는 이렇게 이봉조를 만나 ‘안개’로 1967년에 가수로 데뷔한다.

 

 

 

가수 현미의 남편이기도 한 이봉조는 약간의 비음이 섞인 맑은 음색에 음의 떨림이 전혀 없는 정훈희의 순수한 목소리를 높이 평가했다. ‘안개’로 <동경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그녀는 ‘무인도’ 등의 히트곡을 연달아 내며 높은 인기를 누린다. 그렇게 잘 나가던 정훈희는 1975년에 대마초 파동에 걸려 노래 취입 등 가수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꽃밭에서’는 이봉조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훈희를 위해 만들어준 곡이다. 다른 가수들도 ‘꽃밭에서’를 서로 받으려고 했지만, 이봉조는 “내가 제일 깨끗한 마음으로 작곡한 이 노래는 훈희 것이다”며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송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꽃밭에서’를 부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1978년 열린 <칠레 가요제>에 소리 소문 없이 가서 ‘꽃밭에서’를 불러 최고상을 거머쥐었지만, 우리들에게는 들려줄 수 없었다.

1979년 12월에 해금이 되고 나서야 방송을 타게 되지만, 인기는 벌써 70년대 같지는 않았다. 트로트가 점령한 가요판에서 ‘꽃밭에서’는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로 소수 마니아들에 의해서만 조금씩 불려졌을 뿐이었다.

뜻밖에도 ‘꽃밭에서’는 그로부터 16년 뒤, 조관우가 부르며 크게 히트한다. 소리꾼 조통달을 아버지로 둔 조관우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몽환적인 미성으로 ‘꽃밭에서’를 부활시켰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는 연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고 원곡을 부른 정훈희도 덩달아 조명 받는다.

뜻대로 재기를 못한 정훈희는 1980년 ‘라스트 찬스’의 리더인 김태화와 약혼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히 방송을 멀리하게 되었고 공백만큼 대중 또한 그녀를 잊게 된다.

지금, 정훈희는 부산서 카페 ‘꽃밭에서’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매주 주말에 남편과 자신의 카페에서 공연하며 손님을 맞고 있다. 기장군, 풍광 좋은 아름다운 해변에 있는 정훈희의 라이브 카페에서 ‘꽃밭에서’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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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1
임진강의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1995년 1월, 일본 고베로 출장을 갔었다. <아시아 문화예술진흥 연맹(FACP)> 총회가 그곳에서 열렸는데, 한국에서는 각 언론사의 문화사업 담당자 등 20여 명이 참석하였다.

FACP는 한국, 필리핀, 홍콩,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의 공연 기획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국제적인 공연 예술 협의체로 매년 회원 국가별로 돌아가면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아시아 지역 공연 예술가들의 협의 및 정보 교환을 하는 자리였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의 공연 프로그램을 일본의 공연 기획사가 아시아 지역 투어를 먼저 유치한 후, 가까운 한국, 홍콩, 대만으로 재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들이 판매하는 프로그램은 주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나 뉴욕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급 클래식 연주 단체였다. 그러한 연주 단체들을 초청하려면 출연료도 만만찮지만, 60여 명이나 되는 출연자들의 항공료 및 숙식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단독으로 초청하는 것은 엄두가 안 났던 시절이다. 그래서 FACP는 대개 대형 연주 단체가 일본 공연이 끝난 후, 가까운 나라로 순회공연을 조정하는 일종의 마켓이었다.

1995년 일본 고베 FACP 총회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고베 지진’이다. 당시 총회 일정은 4박 5일이었는데, 출장에서 돌아온 3일 뒤에 고베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출장을 갔던 동료들 사이에선 “하마터면 우리 모두 줄초상 날 뻔했다”는 농담이 오갔을 정도로 위기 탈출을 안도했던 분위기였다.

출장 당시 느꼈던 고베는 깨끗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지닌 도시였다. 1950년대 고베에는 일본에서 오사카 다음으로 한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걷다 보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고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타국에서 한국인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입고 다니면 일본인들이 해코지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런 조선학교는 조총련, 그러니까 북한의 지원을 받는 학교였다.

스스로 소수자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조선인임을 상징하는 흰 저고리를 교복으로 입고 다녔다. 지금은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 세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 전역에 150개 학교에 학생 수도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내가 출장을 갔던 1995년만 하더라도 조선학교의 차별이 심하던 때였다. 당시는 북한이 KAL 기를 폭파하기도 하고, 범인 김현희가 재일 조선인이라는 설도 있었다. 또한 북한이 핵확산 방지조약을 탈퇴하고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이 돌던 때이어서 일본 내 극우 단체를 중심으로 조선학교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물며 조선 여학생 교복을 칼로 베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한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이 있을 정도로 재일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이 깊었던 시절이다.

 

 

고베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합성 피혁 신발 산업에 종사하거나 한국 음식점, 식자재점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소위 ‘케미컬슈즈’라고 불리는 합성 피혁 신발은 일본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판매가 급증하였고, 그 제조 공정의 하청을 한인들이 맡아서 일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초에는 조합 기업이 304개, 총 종업원 수가 6,700여 명이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한인들이었다. 하지만, 고베 지진 이후 한인 신발 공장의 80%가 조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인들이 주로 하는 사업이 야키니쿠 라는 불고기 식당이다. 야키니쿠(소육 ?肉 やきにく)는 한국의 고기구이 문화를 말하는데, 숯불을 피워 석쇠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고베를 찾는 외지인들이 꼭 한번 들려 먹는 맛집들은 주로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다. 2005년, 일본의 주요 영화상을 휩쓴 <박치기>다. 1968년 교토. 히가시 고와 조선고의 불량배들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으로 그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피 튀기는 패싸움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싸우는지는 모르는 채 사이는 점점 악화된다.

그러던 중 진보적 성향의 고등학교 선생 권유로 주인공 코우스케가 조선고에 친선 축구 시합을 제안하러 간다. 거기서 플루트를 부는 경자의 모습에 코우스케는 첫눈에 반한다. 경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금지곡인 북한 노래, ‘임진강’을 배우고 한국어를 공부한다. 코우스케의 순수한 모습에 경자도 마음을 열어가지만, 일본 학생들과 조선 학생들 간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영화 속 ‘재일 조선인’들은 불행의 연속이다. 일본 내 조선인들의 불투명한 정체성과 북한을 고국이라 여기면서도 선뜻 귀향선을 타지 못하는 고민 등이 답답하게 묘사된다.

코우스케에게 경자가 "나와 결혼하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어?"라고 묻는 장면은 모든 재일 조선인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듯하다. 민감한 소재로 아픈 감성을 담아낸, 일본 영화의 깔끔하고 단정함이 오롯이 살아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 흐르는 노래 ‘임진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임진강’은 일본에서 1968년에 <더 포크 크루세더스(The Folk Crusaders)>가 리메이크해 발매했으나 조총련이 저작권 문제를 제기해 바로 금지곡이 된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고향 남쪽 가고파도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북녘의 대지에서 남녘의 하늘까지 날아가는 물새들아/ 자유의 사자들아 누가 조국을 반으로 나누어 버렸느냐/ 누가 조국을 나누어 버렸느냐"

 

이 노래의 원작은 북한 국가를 지은 월북 작가 박세영이 작사한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노래인데, 그래서 남한에서도 민주화 이전까지는 불리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서울 출생인 박세영이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라는 실향의 아픔을 담았다며 한동안 금지된다. 어쩌다 보니 남북한, 일본, 세 나라에서 나란히 인기를 얻고 금지곡도 되고 다시 해금이 된다.

이 곡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재일 동포들의 고향이 임진강 아래인 남한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진강’은 재일 동포 사회에서 ‘재일 아리랑’이라 할 정도로 꾸준히 사랑 받는데, 소프라노 전월선과 박영일, 김연자 등이 불렀다. 한국에서는 양희은, 임형주, 적우, 김연자 등이 불렀고, 드라마나 영화의 테마송으로 삽입되었다.

노래 ‘임진강’은 해금됐지만,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임진강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건 여전히 뭇 새들뿐이다. ‘임진강’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 1957년 이었으니 64년이 지났는데도 임진강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강이다.

희망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어난다고 한다. 똑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왜 이념 타령만 자꾸 하는가? 좋든 싫든, ‘임진강’에서 남북이 만나 평화의 희망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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