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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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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3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해군에 있을 때 <추자도 레이다 사이트>에서 복무했었다. 추자도는 진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섬은 고립의 이미지가 있어 예로부터 유배나 귀양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추자도는 그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오지였다. 육지에서 제주도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그곳을 들려야 했다.

고려 공민왕 때, 제주 목사가 살해를 당하는 등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을 보내는데 제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대피했다.

그때 어민들에게 그물 짜는 법과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어 섬주민들의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최영의 고마운 마음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최영 장군 사당>은 추자도 관광 코스의 하나이다. 나도 섬에 가자마자 사당을 보러 간 적이 있었지만, 막상 가보면 육지의 작은 절보다도 그 규모나 경관이 한참 못 미쳐 실망하게 된다. 그나마도 1970년대 초에 두 번에 걸쳐 나라에서 지원하여 사당을 보수하고 정비한 것이다.

당시 사당에서 만난 안내인은 “건물이야 나라에서 보수해 주었지만, 주위를 가꾸고 관리하는 일은 섬사람들 몫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섬에 조경을 할 만한 잔디나 나무, 꽃들조차 없었기 때문에 궁리하다가, 산에 있는 떼를 가져와 깔고, 해변에 있는 해당화를 뽑아다가 사당 올라가는 길에 심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 계단 옆에 해당화는 내가 심은 거다”라며 우쭐해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해당화(海棠花)는 이름에서 풍기듯이 바닷가 모래땅에서 꽃 피운다. 영어로는 Rosa rugosa가 본명이지만, 해변 장미(beach rose)라고도 한다. 1~1.5m 높이로 자라며 습기와 소금기에 강해 바닷가나 산기슭에 군락을 형성한다. 꽃은 홍자색으로 5~7월에 피고, 7~9장의 깃털 같은 잔 잎이 어긋나 있다. 향기가 강하고 꽃자루에는 자모가 있고 줄기에는 가시가 많다.

또 다른 기억이다. 1988년, 독일에 연수 갔을 때,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에서 관광가이드가 “이 도로를 <자유의 공간>이라고 합니다. 130km라는 권장 속도가 있지만, 법적으로 어떤 구속력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무제한이라고 대부분의 운전자는 110km 이상을 달리지 않고 2차선 만을 이용합니다. 추월할 때만 1차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고가 거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아우토반의 다른 자랑은 도로 중앙 분리대와 양 옆에 심어져 있는 아름다운 해당화입니다. 겨울이 되면 고속도로에 엄청난 양의 소금을 뿌리기 때문에 나무들이 오래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 바닷가에서도 많이 자생하는 소금기에 잘 견디는 해당화를 한번 심어 보자고 했는데 임상에 성공했어요. 그 후, 아우토반뿐만 아니라, 옆 나라인 덴마크에서도 해당화를 심죠”라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겨울에 염화칼슘을 많이 뿌리는 이곳 토론토에도 대형 쇼핑몰이나 도로, 주차장 등에서 해당화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한국 불후의 자장가, 동요 ‘섬집 아기’다. 다시 들어봐도 어떻게 이런 노래가 만들어졌을까 싶을 정도로 잠이 스르르 오는 듯한 명곡이다. 이흥렬이 곡을 붙이고 한인현이 노랫말을 썼다. ‘섬집 아기’의 무대는 함경남도 원산 명사십리 백사장이다.

한인현은 마식령산맥의 끝자락 갈마반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여름만 되면 해당화가 만발한 명사십리 해변에서 뛰어 놀았다. 함흥 사범을 졸업한 그는 6.25 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피난 오게 된다. 당시 그는 고향인 명사십리와 비슷한 송정 바닷가를 즐겨 찾았고 고향을 떠올리며 노랫말을 쓰게 된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워 마라/ 명년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한번 간 우리 인생 낙엽처럼 가이없네/ 어~허아 어허야 어~허아 어허야 아”

 

장사익이 부른 <하늘 가는 길>의 가사다. 이 노래는 장사익의 고향인 광천 지역 상여소리를 엮어 만든 것이다. 죽은 사람을 상여에 메고 나가며 ‘너는 봄에 다시 피잖아’하며 길가에 핀 해당화를 부러워한다.

해당화는 우리 민요와 글에 자주 등장한다. <정선 아리랑>에도 등장하고, <춘향전>에는 “십리명사 아니어든 해당화 있기 만무하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고전소설 <장끼전>에도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한탄 마라. 너야 내년 봄이면 다시 피려니와 우리 님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이별한 지 몇 해냐 두고 온 원산만아/ 해당화 곱게 피는 내 고향은 명사십리”라는 백설화의 노래 <명사십리>에도 해당화는 그리움의 꽃이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뭐니뭐니 해도 ‘해당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이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경재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후, 1954년에 방송 작가로 데뷔한다. 기독교방송국과 KBS에서 프리랜스 라이터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60년대 초에 KBS의 김재형 드라마 피디와 함께 대부도에 놀러 갔다가, 어떤 총각 선생의 사연을 듣고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노래를 만든다. 그리고 같은 제목의 라디오 드라마도 둘이서 함께 제작한다.

노래의 배경이 된, 대난초등학교 주변 바닷가 모래 언덕에는 해당화 군락이 있었고, 철새들이 많았다. 연락선조차 없었던 섬에 외지인이라고는 초등학교 선생뿐이었다. 섬 아가씨들에게 총각 선생님은 당연히 인기가 좋고 흠모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1941년생인 이미자는 문성여상 3학년 때, KBS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등을 한 뒤 19세에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다. ‘동백아가씨’에 이어 ‘기러기 아빠’를 히트시킨다. 감칠맛 넘치는 꺾기와 애간장 녹이는 가락으로 부른 ‘섬마을 선생님‘은 1965년에 첫 돌이 지난 딸을 안고 다니며 노래를 불러 이미자가 유난히 애착을 가지는 곡이라고 한다.

 슬픈 이미지를 지닌 해당화는 어떤 이는 장미라 하고 혹은 찔레라 한다. 꽃 이름에 익숙지 못한 것은 흠이 아니지만, 같고 다름을 구별 못하면서 꽃 이름을 우기는 것은 비단 해당화뿐 아니다.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여 ‘해당’과 ‘찔레’를 구분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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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클래식 음악 시장을 움직이는 ‘유대계 마피아’

 

지난 6월 초에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다. 유대인의 집에 초대되어 방문한 것이다.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다른 민족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다소 긴장되고 조심스러웠다. 우리 부부를 초대한 사람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으로 토론토로 유학을 왔다가 이민 후,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나이는 60대 후반이고 직업은 종약학(oncology) 전문의, 재혼해서 자식을 다섯 두었다. 첫째 부인에게서 난 큰 아들과 재혼한 부인이 데리고 온 두 아들, 그리고 재혼해서 얻은 딸과 아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었다.

 그 가족 모임은 우리 부부 외에도 유대계 친척 20여 명이 함께 했는데, 그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샤부옷(Shavuot)이었다. 샤브옷은 유대교의 3대 순례 축제 중의 하나로 밀 수확의 시작이면서 첫 열매를 제물로 성전에 가져오는 절기를 의미하고, 유대 민족이 시나이 산에서 율법(*토라: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으로 흔히 모세오경이라 한다)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동양인이 가족 모임에 온 것 자체가 그들도 신기했는지, 열심히 샤부옷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올해 샤부옷은 6월 4일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6월 6일 일요일 저녁까지 이어진다”고 하며 “전통적으로 식사 전에 간단한 의식을 한다”고 했다.

먼저 여자들만 하는 촛불 의식인데, 식탁 뒤에 제대가 있었고 거울 앞에 촛대와 작약 꽃이 놓여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해서 몇 장 찍었다. 무슨 주문 같은 기도를 한 후에 참석한 여인들이 차례로 촛불을 켜고, 주인 여자를 따라 기도를 했는데 나의 아내도 참여해 체험을 했다.

다음은 모임 참석자 전원이 부엌의 싱크대로 가서 물로 손을 닦으며 주문(?)을 하는 의식을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히브리어로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올린 거라고 한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가장이 포도 주스를 작은 주석잔에 가득 부어 간단히 기도한 후, 다시 와인병과 포도 주스병에 조금씩 나눠 붓고 나머지는 마셨다. 그리고 레드 와인을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권하고 집에서 구운 호밀빵을 사람 수대로 잘게 썰어 주었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첫 음식으로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할라(hallah) 빵, 샐러드와 부래카(치즈, 으깬 감자, 달걀, 시금치, 버섯 등으로 만든 음식), 소금에 절인 청어, 병아리 콩으로 만든 수프, 대추야자, 아몬드와 호두 그리고 중동 사람들이 빵과 같이 반찬처럼 먹는 양배추와 빨간 무(레드비트) 절임, 우유와 콩으로 만든 소스, 좁쌀과 요구르트로 만든 버터 등의 전채요리(appetizer)가 나왔다.

샐러드는 두 종류로 방울토마토에 레몬즙과 올리브유, 검은 후추, 간 마늘, 식초로 드레싱을 한 것과 그릭 샐러드라 불리는 로메인 상추와 각종 야채, 치즈와 다진 양파, 우유로 만든 크림, 땅콩 다진 것, 꿀 등으로 드레싱 한 것이었다.

메인 음식으로 로스트비프, 채소 꼬치구이, 당근과 감자 찜, 치킨 구이 등을 먹었고, 후식으로는 치즈 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 민트 차가 나왔다. 음식 대부분이 맛과 향이 강하지 않아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원래 샤부옷 기간에는 “율법에 따라 유제품을 먹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요즘은 그 음식 문화가 변형되었다”고 하며, “하지만 돼지고기와 조개류는 가능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 동안 아들과 딸이 계속해서 접시를 갈아주거나, 음식을 나르며 어머니를 도왔다. 이런 가족 모임이 자주 있어서인지 자연스레 각자가 할 일들을 척척 서빙하는 것을 보며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친척들도 음식이 나오는 사이사이에 요리에 대한 설명과 자기들의 문화를 이해시키려고 이것저것 설명도 해주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어 눈치 것 웃으며 이해하는 듯 대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 중에는 진지하게 율법(토라)과 샤부옷에 대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모세가 광야를 건너 어쩌고저쩌고…” 우리들이 흥미롭게 듣는 것 같으니까, 신이 나선지 이야기가 점점 깊어지고 길어졌다.

다른 민족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30대 초반의 큰 아들은 3권의 책까지 가지고 와서 글을 읽고 보충 설명을 하는 진지함을 보였다. 한국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도 많아, K-Pop과 ‘오징어게임’,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등에 대해서도 묻고 답이 오갔다.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교육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하는 <탈무드>가 주는 이미지 때문이지 싶다. 미국 영화를 보면 ‘독일군은 죄 없는 사람들을 가스실로 끌고가 죽이는 나쁜 놈들이고, 유대인은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들’로 기억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느꼈던 유대인 소녀의 서정적인 감정은 오래되었지만, 좋은 정서로 남아 있다. 또한 유대인들이 떠돌아 살아가는 민족의 흑역사가 더 나은 삶을 찾아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우리 이민사와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도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유대인은 세계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술, 철학, 종교, 교육, 과학 등에서 입지를 쌓았다. 내가 관심 있는 대중음악 분야도 그렇다. 유대인들의 음악은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녹아져 있다. 미국 재즈의 전설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이 연주한 ‘랩소디 인 블루’의 도입부에 구슬프게 미끄러지는 글리산도(*glissando: 피아노 건반 위를 엄지손톱으로 미끄러지게 치는 것) 주법은 전형적인 유대 음악 요소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이 연주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대표적인 유대 음악으로 클래식과 재즈, 민속 음악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하바나길라’(havanageela)는 대표적인 히브리 노래로 동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의해 슬라브 선율과 러시아 민요 등에 많이 차용된다. 우리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듣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벌린이라는 유대인이 작곡했다. ‘오 캐럴’도 유대인 닐 세다카의 노래며 작곡이다.

클래식 음악계의 레너드 번스타인, 로린마젤, 유진 오르만디, 바렌보임, 브루노 빌터, 쉰베르크 등도 유대인이다. 성악가나 기악에도 유명한 연주자들이 많다. 20세기 이후, 미국의 클래식 음악 시장을 ‘유대계 마피아’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 음악가로는 폴란드계 유대인인 밥 딜런, 필 옥스, 캐럴 킹, 닐 다이아몬드, 빌리 조엘, 재니스이안, 사이먼 앤 가펑클, 바브라스트라이샌드, 배리 매닐로, 올리비아뉴튼 존, 마이클 볼턴 등이 있다.

현대 재즈 색소폰의 명인인 캐니 G나 영화 주제곡 ‘콰이강의 다리’로 잘 알려진 미치 밀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제곡을 작곡한 맥스 스타이너,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제곡을 작곡한 빅터 영도 유대계다. 미국 영화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대인 작곡가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7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6개인 파라마운트, 폭스, MGM, 워너브라더스, 컬럼비아, 유니버설을 유대인이 설립했다. 나머지 한 개가 디즈니인데, 이 마저 한때 유대인에게 넘어 갔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은 ‘신성 모독죄’에 버금가는 범죄자 취급을 받아 매장될 정도다.

유대인들은 음악가를 가장 존경 받는 직업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가르친다. 음악을 배우면서 부모의 관심을 자연스레 받게 되고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당연히 좋은 음악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유대계 마피아’라 할 정도로 인맥과 조직적인 후원으로 크지만 말이다. 유대인에 대한 평가는 여러 시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발전과 성공, 중심에 끈끈한 민족 사랑과 가정교육이 있다는 점은 본받을 만한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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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2년 전에 고추, 상추, 깻잎, 파, 부추 등의 모종을 심었다가,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바람에 모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종 밭을 만드느라 2주 동안 땅 파고 잔디 걷어 내고, 그 고생을…’ 하며 다시는 모종 근처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올해 그 기억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5월 중순에 날씨가 영상 18도가 넘어가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모종을 심었는데, 밤 기온이 영상 1~2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가슴 조이며 ‘단보루’ 박스로 간이 온실을 만들어 1주일 동안 덮었다가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누군가 ‘농사는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새겨지는 1주일이었다. 다행히 고추 모종 몇 개만 죽었고 나머지들은 상태가 괜찮았다.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주는 것과 기도뿐이다.

어제는 물을 주고 있는데, 담장 넘어 옆집 중국 할머니가 “니@쯔이 하오 ^ #? &% 으@쎠” 하며 소리친다. 내가 준 물이 튀어버린 것인데, 내가 “쏘리” 했더니, 웃으며 “노 프로블럼” 한다.

 고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캐나다에서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언어나 문화, 음식, 습관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웃 할머니와는 3년 전에 그의 집 버드나무가 우리 마당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담장을 고치고 이것저것 상의하느라 가까워졌다. 7미터쯤 되었던 나무를 모두 잘라내고 담장을 다시 고치는데 4개월은 더 넘게 걸린 것 같다.

토론토에서는 자기 마당의 나무가 쓰러져도 시청에서 나와 조사를 하고, 나무를 뽑은 장소에다 꼭 다른 묘목을 심어야 하는 규정이 있다. 물론 묘목 심는 비용은 시청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한다. 옆집도 그렇게 한 것 같은데, 그때 심은 나무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이번에 물 주러 뒷마당에 자주 나가며 담장 넘도록 커버린 나무가 라일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토론토의 라일락은 고국과 다르게 향기가 그리 강하지 않다. 5월 중순경에 피는데 보라색, 붉은색, 흰색이 있다. 라일락은 영어명으로 ‘푸르다’라는 의미의 아라 비어 ‘laylak’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리라꽃이라고 불린다.

몇 년 전에 어쩌다 어느 캐네디언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집안에 라일락 꽃향기가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이민 초에 콘도에 살았을 때는 바로 앞 방에 영국계 할머니가 살았는데, 항상 라일락 향내 나는 초를 켜놓고 지내는 걸 보았다. 간혹 우리집에서 된장찌개라도 끓이는 날에는 복도까지 나와 향내 스프레이를 뿌리고 들어가는 모습에서 그들이 냄새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장품, 비누나 샴푸, 방향제 등도 라일락 종류가 많다.

 

라일락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윤형주가 1972년에 부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라일락 향기가 스며 있는 듯한 멜로디와 낭만적인 가사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를 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이 노래는 원래 피지(Fiji) 사람들이 헤어질 때 부르는 민요였는데, 호주 출신 4인조 그룹 씨커스(The Seekers)가 불러 크게 히트를 친 것을 윤형주가 번안해 부른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윤형주가 의대생에서 통기타 가수로 인생의 향로를 바꾸게 되는 노래이기도 한데, 그의 지적 이미지에도 맞는 곡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번안하며 가사의 내용도 바꾸고 음률도 밝게 부르며 이별가의 맛이 변질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라일락 꽃은 지금처럼 조경 나무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그래도 낭만이 있는 대학 캠퍼스인데 라일락 꽃은 있어야지’ 할 정도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 시절, 라일락 꽃이 피면 달달한 향기가 퍼진 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생각나는 또 다른 노래가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이다.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하는데”

 

이 노래는 이문세가 29세이던 1988년에 발표한 노래로 헤어진 연인과 추억을 떠올리며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곡이다. 이문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노래를 제대로 즐기려면 레드 와인을 글라스에 가득 채워 한잔 마시며 ‘시간 이동’을 해야 한다. 눈을 감고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면 옛 기억이 되살아 난다.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이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은 지금 나의 마음을 알까?’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이런 고백을 술술 하게 된다.

 이 노래는 이영훈이 작사, 작곡을 했다. 1960년생인 이영훈은 원래 연극, 방송, 무용 등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다. 그러던 중 1985년에 당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의 소개로 이문세와 만난다. 서로의 가능성을 알아본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한다.

6개월에 걸쳐 8곡을 완성하는데 그 중 한 곡이 바로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였다. 이 노래는 KBS의 ‘가요 톱 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에서 10주 연속 1위를 거머쥔다. 그 뒤, 4집으로 만든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은 업계 공식 기록으로 150만 장을 판매한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최고의 작곡가와 가수 콤비로 불후의 명곡들을 만든다. 이영훈은 ‘한국적 팝 발라드’를 개척하고 완성했다. 클래식에 우리 정서를 섞어 휘젓고 빚어 한국 고유의 팝 발라드를 창조한다. 아름다운 가사로 대중성을 파고들면서도 품격을 유지해 고급스러운 대중음악을 내놓는다. 하지만, 순수한 음악적 영혼과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작업에 몰두하다가 몸을 해쳐 결국 대장암으로 47세에 짧은 생을 마친다.

 

 

 그가 죽은 2008년 2월 14일 술집, 택시, 버스, TV, 노래방 등에서 이영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모든 라디오 디제이마다 아쉬움의 추모 멘트를 했다. 그는 수많은 노래를 작곡했지만, 평생 이문세하고만 작업했는데, “우리 관계는 말하자면 영화 <록키>에서 복서와 트레이너의 관계죠”라고 한 언론에서 밝힌다.

그가 좋아했던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과 우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짚어봐도 이영훈에게 이문세는 ‘라일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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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살다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지난 주말에 친한 네 부부가 1박 2일로 여행을 갔다. 가는 곳이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 아침에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저 멀리 서쪽 캐임브리지(Cambridge)에서 오는 일행도 있어, HWY 404와 스토우프빌(Stouffville)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니, 주차장이 좁고 자동차들이 번잡하게 다녀, 식사할 분위기가 아니다.

 

“주위에 어디 다소곳한 곳이 없을까?”

누군가, “요 앞에 골프장이 있는데. ”라고 하자, 모두들 눈빛이 반짝였다. 더 이상 말도 필요 없이 시동을 걸어 그곳으로 가서 싸온 김밥과 뜨거운 커피를 곁들여 잘 먹었다.

 

 코티지(cottage)는 할리버튼(Haliburton) 근처에 있었는데,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알곤퀸 주립공원이다. 코티지는 2층 규모로 4베드룸과 화장실 2개로 아름답고 조용한 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인터넷도 가능하고 TV며 당구대, 바비큐 그릴, 모터보트, 카누, 수중 자전거, 물놀이 기구 등이 우리를 맞이했다. 근처 10분 거리 마을에 식료품점, 비어 스토어, LCBO 등이 있는 곳이 있어 코티지가 아니라, 주거용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바라보이는 2층 테라스에 준비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혼자였으면 가격이 비싸, 선뜻 먹을 수 없었던 LA갈비도 굽고 상추, 게장, 동치미, 방울토마토, 샐러드, 산마늘 무침, 풋고추, 각종 밑반찬 등이 한 상 가득 푸짐하다.

 

청량한 날씨까지 우리를 축복하는 듯, 파란 캔버스에 흰 뭉개 구름이 덧칠하듯 펼쳐 있다. 그런 풍광과 맥주에 취해 수다들이 오고 갔다. “바비큐 해먹은 게 몇 년 만이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 “이번에 집 잘 팔고 나왔어. 지금 집 값이 계속 떨어진다고 하던데. ” “스위스에 있는 아들은 잘 있는가?” “장선배는 한국 갔다가 와서 피곤한가 봐?” “홍 단장 따님 결혼식이 언제지?” “요새도 토요일마다 산행하지?” “이 강아지는 한국 갈 때 데리고 가나?”

 

이렇게 두서 없는 말들이 한참이나 오고 갔을 때, “배부른데 1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가지면 어때요?” “좋지!” 누군가의 제안이 없었다면 수다는 아마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을 거다.

 

 낚시, 산책, 카누 타기, 산나물 채취, 당구 등 각자 취향에 맞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맥주 취기가 올라와 야외 선텐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물끄러미 호수를 쳐다보았다. 선착장 근처가 얕은 모래 지역이어서인지, 카누를 타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간혹 유람선 같은 보트들이 지나가며 손짓을 한다. 밥 먹으며 누군가 말했던 “살다 보니. ”라는 말이 지금 딱 어울리는 순간이지 싶었다.

 

 사실, 이민 올 때는 이런 ‘그림 같은’ 세월을 그리며 왔는데, 실제 삶은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권진원이 부른 ‘살다 보면’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살다 보면 괜시리 외로운 날 너무도 많아/ 나도 한번 꿈같은 사랑해봤으면 좋겠네/살다 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 걱정 멀리 던져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

 

 이 노래의 가사는 권진원의 남편, 유기환이 썼다. 1959년에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진주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진주에서 자란다. 아마 망경산과 남강이 없었다면 그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수학 시간에는 영어를 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독학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 한국 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에 입학한다. 대학 4학년 때 맞은 이른바 ‘오월 광주’는 그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그가 지적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바로 거리의 아스팔트 아지랑이 속에서 투쟁하며 보낸 꿈같은 한 해 때문이었다.

 

외무 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공무원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파리 8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지도 교수 자크 네프를 만난다. 그것은 행운이었고, 인생 좌표를 바꾼 계기가 된다. 네프 교수는 문학의 경우, 테제(*정/定)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미학은 ‘미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즉 미술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역사이다. 세상을 보는 방향을 찾는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가장 공들인 분야가 글 쓰기다. 그 후, 다수의 불문학 관련 책을 썼고 모교에서 프랑스어과 교수로 일한다. 지난해에는 총장 후보로 선출될 정도로 중견 교수가 됐다.

 

 ‘살다 보면’의 작곡은 권진원이 했다. 그녀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습작처럼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여고 시절에는 불어를 배우며 샹송을 즐겨 불렀다. 한국 외국어대 네덜란드어 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1985년에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해 자작곡 ‘지난여름밤의 이야기’로 은상을 수상한다.

 

졸업과 함께 유기환과 결혼한 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가입해 민중가요를 주로 부른다. 1991년 함께 활동하던 안치환과 김광석이 탈퇴하자, 권진원도 <노찾사>를 그만두고 솔로 음반을 내놓는다. 당시 그녀는 노래 운동권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여성 보컬리스트였기에 <노찾사>의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솔로 1집은 민중 가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해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지만, 2집 <살다 보면>이 히트하게 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다.

 

<살다 보면>은 결혼하고 6년쯤 지난 어느 날, ‘아, 도깨비방망이가 있어 뚝딱하면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면 좋겠다’라면서 그런 얘길 남편과 하다가 노랫말이 나왔다고 한다. 유기환이 쓴 노랫말은 글을 수채화처럼 표현하는 듯하다.

 

권진원의 외할머니는 함경남도 북청에 살았는데, 6.25 전쟁 당시 9살이던 딸을 시부모님께 잠시 맡기고 왔다가 분단으로 만날 수 없게 된다. 그 사연을 담아, 그녀가 작곡한 노래가 ‘북녘 파랑새’라는 곡이다. 그 외할머니 전초월이 바로 가수 전인권의 고모다. 그러니까 권진원과 전인권은 조카와 삼촌 사이다.

 

‘북녘 파랑새’의 사연을 알게 된 후, 권진원을 만날 일이 있어 “저의 어머니도 함경도 실향민이에요.”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1998년도인가, 그녀가 ‘개인 콘서트를 한다’며 초대권을 보내왔다. 방송사 예능 쪽에 근무하던 때라 그냥 홍보 삼아 보낸 것일 텐데, 아내와 함께 대학로에 있는 <학전>으로 공연을 보러 갔더니 너무 좋아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한참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카누 한번 타세요”하며 불러 눈을 떴다. 모두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덧 해님도 기울고 달님이 나올 채비를 한다. 한낮의 날씨가 27도를 넘었지만, 방안은 벽난로를 땔 정도로 서늘해 모처럼 장작불을 때는 낭만도 즐겼다. 세월도 변하고 생각도 변했는데, 장작 타는 냄새는 여전히 좋다. 이 장작 타는 냄새가 바로 삶의 냄새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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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9
가난한 이 마음 당신께 드리니…

 

동네를 걷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매일 똑같은 코스를 걷다 보면 질린다. 그래서 가끔 다른 동네로 산책을 가는데, 몇 주 전에는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갔다. 단지를 분양한 지 20년이 채 안되어 집들이 다양하고 예뻤다. 주택 주위로 숲이 싸고 있고, 그 사이로 산책길이 있어, 걸으며 남의 집 마당을 훔쳐보는 재미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들풀들이 숲 전체를 파릇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무릎 밑의 작은 풀들이 벌써 꽃을 피워 벌과 벌레들을 유혹한다. 같이 걷던 아내가, “여보 저기 수선화가 있어” 해서 보니,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었다. “수선화는 알타리 꽃이어서 산책길에서는 볼 수 없는 꽃인데, 누군가 일부러 심은 것 같다”라고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또 다른 수선화가 여기저기 보였다.

 수선화는 아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2003년에 개봉된 <빅 피시(Big Fish)>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3년 동안 혼자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마침내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당황한 듯, 여주인공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그런데 어쩌죠? 전 이미 약혼했어요.” 오, 세상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힘없이 돌아서는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다. 여기서 운명이 놓은 장난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싸워 그녀를 쟁취할 것인가? 그 순간 그의 눈은 빛이 나며 독백을 한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하며 외친다.

 며칠이 지났을까? 잠에서 깬 그녀가 창문을 연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마당 가득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고, 그 가운데 며칠 전 사랑을 고백하던 그 남자가 서있다. (*아무리 판타지 영화이지만, 창문 밖에서 수선화를 심는 동안 여인이 모르고 있었다는 건 너무 간 설정이지 싶지만, 명 장면이니 모른 척 눈 감아주자.)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에요” 어디서 이렇게 많은 걸 구했냐는 물음에 “5개 주의 모든 꽃집에 전화해서 말했죠. 아내 될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 남자,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흔들림 없이, 그가 답한다. “제 남은 인생 동안 천천히 알아 가면 돼요.” 수선화 꽃밭을 휘감는 바람이 그녀의 가슴에도 일렁인다. 이 수선화 프러포즈는 원래 원작에는 없는 장면인데, 감독이 노란색을 좋아하는 여주인공에게 어떻게 프러포즈하는 게 좋을까 상상하다가 수선화 1만 송이를 떠올렸다고 한다.

 수선화하면 떠오르는 곡이 있다. 양희은이 1971년에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다. 이 노래는 원래 미국의 <브라더즈 포(Brothers Four)>가 부른 ‘Seven Daffodils(세븐 데포딜스)’을 일부 우리말로 개사하고 어떤 부분은 원곡을 커버해 부른 것이다. 양희은은 데뷔 앨범 1집의 곡들을 채우기 위해 당시 오비스 캐빈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자주 불렀던 이 노래를 넣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힌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산과 들 눈들 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 가난한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리니/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이 곡은 번안 가요였지만, 커피 한잔 사줄 돈이 없어 변변한 데이트도 못하던 그 시절에 어울리는 가사와 낭만적인 음률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금 청소년들은 상상조차 못할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와 청순한 이미지도 한몫 했지 싶다.

원곡을 부른 <브라더즈 포>는 남성 중창으로 환상적인 하모니로 미국의 포크 부흥 시대를 이끈 그룹이다. 1962년에 데뷔한 이들은 몇 차례 멤버 교체가 있었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활동하고 있어 음악을 떠나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다. 올해는 60주년 기념 콘서트를 미주 전 지역을 돌고 있는데, 서 있는 것조차 힘들 것 같은 80대 노인들이 60년 전에 만든 곡으로 아직도 사랑 받고 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요즈음은 수많은 장르의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쉽게 잊힌다. 특히 포크 음악은 느리고 때로는 촌스럽다는 취급도 받을 정도로 각자의 취향이 확연히 갈리지만, 당시는 평온함과 위로, 향수와 정서를 채워주는 음악으로서 세대를 초월하는 힘이 있었다.

 

 

<브라더즈 포>는 각 멤버가 기타, 반조, 만돌린, 업라이트 베이스의 어쿠스틱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그룹이다. 풍부하고 조화로운 음성으로 ‘Greenfields(그린필드)’ ‘Try to Remember(트라이 투 리멤버)’ ‘Seven Daffodils(세븐 데포딜스)’ ‘Green Leaves of Summer(그린 리브스 오브 서머)’ 등 우리 한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주옥같은 노래를 불러 히트 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들을 동경하는 많은 포크 가수들과 <포 다이나믹스>라는 그룹이 그들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포 다이나믹스>는 김준, 박상규, 장우, 차도균이 멤버로 활동했다.

1959년, 워싱턴대학에 재학 중이던 4명의 무모한 꿈이 처음 그들을 탄생하게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클럽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이 우연히 피아니스트 ‘데이브브루벡’의 매니저인 모트(Mort Lewis)의 눈에 띄게 돼 데뷔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브라더즈 포>는 전 세계 수백만의 가슴에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는 그룹으로 성장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게 된다.

당시 록과 블루스의 홍수 속에서도 미국의 자존심인 포크와 컨트리 계보를 지켜주어, 지금도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우상으로 남는다. 1,000여 회에 달하는 콘서트와 미국의 역대 대통령 4명이 그들을 초청해 백악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유명 오케스트라 및 재즈 스타와의 협연 그리고 10여 개국을 투어하며 <미국 음악 사절단>으로 활동한다.

양희은이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는 원곡의 가사를 좀 바꾸어 놓았지만, 난 번안 가사가 더 좋다.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s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전 집도 없고 땅도 없어요/ 당장 제 손에 움켜쥘 지폐 한 장도 없고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 저 굽이치는 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을 보여줄 수 있고/ 사랑의 키스와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릴 수 있습니다.)

 

1970년대나 통할 만한 프러포즈이지, 요즈음에 “사랑의 키스와 일곱 수선화를 드리겠다”면 궁상 떤다며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 결혼한 가수 박군이 자신의 옥탑방에서 아내가 될 한영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보고,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옥상에 마가렛 화분 600개를 심어 놓고 하트 만들어 프러포즈하는 건 좀 아니잖아?” 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며 “가난한 박군이 저렇게 애써 꽃 심고 프러포즈하는 게 얼마나 보기 좋냐”고 한다. 하긴, 나는 아내에게 평생 수선화 한 송이 사준 적이 없으면서 별소리를 다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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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포항에 사는 친구가 카톡으로 꽃 사진을 보내왔다. 가끔 마당에 있는 화초를 찍어 보내곤 하는데, ‘참, 화단을 예쁘게 잘 가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솜씨가 좋다. 내 생각에는 친구가 꽃 가꾸는 것은 아니고, 아마 아주머니의 취미가 아닐까 싶다.

이 친구는 동네에서 함께 자라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공부를 잘 해서 서울대 의예과를 갔고, 졸업 후 정형외과 의사가 됐다. 어렸을 때, 동네 어머니들이 이 친구와 함께 과외 공부시키려고 꽤 애를 썼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서울대학병원과 금강병원 등에서 근무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프랑스 유학도 다녀왔다. 시간 있을 때마다 짬 내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무료 수술도 다니는 등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맞게 ‘베풂의 미덕’을 실천하며 산다. 이렇게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그에게 누군가 솔깃한 제안을 한다. “내가 투자를 할 테니 공동으로 병원을 운영하자”는 거다.

 소머리탕으로 유명한 곤지암 근처에 병실 100개가 넘는 규모의 큰 병원을 세운다. 그때가 아마 40대 중반이지 싶은데, 그 뒤로는 서로 바쁘고 사는 밭이 너무 달라 연락도 소원해진다. 그러다가 들리는 소식으로는 동업자하고 문제가 있어 갈라섰고, 운영하던 병원은 공중 분해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거다. 그 후, 이 친구는 지방 어디론 가로 가서 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민 오는 바람에 그나마 소식도 알 수 없다가, 몇 년 전 초등학교 친구 단톡방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다행히 재기해 포항에서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보내온 꽃 사진을 보고 내가 물었다.

“서원장! 꽃이 참 예쁘네요. 이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양 모란(?) 같네요. 그 잎도 참 찰져 보입니다.” 친구가 답을 보내왔다. “피었니? peony”.

예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꼭 체를 한다. 물론 내가 영어권에 살고 있긴 하지만, 꼭 잉글리쉬로 답을 해야 하나. 피오니(peony)가 뭐지? 사전을 찾아보니 작약이다. 풀에 핀 것은 작약이고, 나무에 핀 것은 모란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포항 친구가 사진 두 장을 더 보내왔는데, 자세히 보니 여러 화초 사이에 모란도 있었다.

작약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꽃잎이 풍성하고 화려해 함박꽃이라고도 한다. 영어 이름 피오니(Peony)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의사’인 피에온(Paeon)의 이름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피에온은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lus)의 제자였는데, 그를 질투한 스승의 노여움을 사서 위기에 처하자, 제우스가 그를 작약(peony)으로 변하게 하여 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피오니는 작약일 수도 있고 모란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작약은 ‘신들의 의사’를 상징하는 꽃이니, 친구가 작약 사진을 보내온 것은 ‘나, 의사 짓 하며 잘 살고 있다’고 사인을 보낸 것이지 싶다. 참, 나니까 똑똑하여 이렇게 해석을 하지,다른 녀석들은 감이나 잡았겠나?

 

 

모란하면 김영란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와 조두남 가곡인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이 생각난다. 그리고 조영남이 부른 ‘모란 동백’이 있다. 하지만, 이 ‘모란 동백’은 사실 조영남의 곡이 아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이 노래의 원작자는 소설가 이제하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러 음반도 냈다. 처음 제목은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었다. 김영랑과 조두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작품 일부를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하는 소설가며 화가이며 가수다. 그는 벌써부터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래 잘하기로 소문이나 기타 들고 여기저기 무대에 자주 서 왔다. ‘모란 동백’은 1980년대 후반에 만든 노래로 음반이 나오기 전에는 지인들끼리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한 것을 돌려가며 들었다.

당시 그가 불렀던 모습이 유튜브로 떠도는데, 노래에 깊이와 철학이랄까,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 어느 날, 조영남이 이 노래를 듣고 반해 이제하에게 부탁해 리메이크를 했다. 제목도 단순하게 바꾸고 가사도 좀 깔끔하게 고쳤다.

조영남은 언젠가 MBC라디오 ‘싱글벙글 쇼’에 나와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모란 동백’을 불러달라”고 애기할 정도로 이 곡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하긴, ‘모란 동백’은 나 같은 한물간 남성들이 좋아하고 삶의 끄트머리에서 들으면 더욱 와 닿는 노래이다.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라는 가사는 장례용으로는 딱 맞춤이다.

이제하는 장르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였다. 1998년 환갑의 나이에 <빈들판>이라는 CD를 만들어 가수로 데뷔한다. 친구들이 환갑 선물 겸해서 돈 모아 음반을 내준 것이다. 여러 재주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소설도, 음반도 경제적으로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해 생계를 위해 대학로 동숭동 근처에 <마리안느>라는 카페를 운영했다.

 

 

이제하는 193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홍익대 서양학과를 5년 동안 다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58년에 <현대문학>에 시로 문단에 오른 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한다. 모두 7권의 소설집과 시집 2권,동화책 2권, 영화칼럼집 2권을 냈다. 그림 전시회도 세 차례 열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등 여러 수상을 한다.

그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그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였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죽은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동해안으로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린 것이다. 그 길 속에 만나는 현실과 환상, 우연과 필연이 엉켜 시와 그림처럼 펼쳐진다. 시나리오 기법으로 리얼리즘에 초현실주의를 가미해, 소설가이며 화가가 아니면 소화시키지 못할 표현들이 곳곳에 묻어 있다.

동숭동 카페 때는 직접 그린 그림과 도자기도 구워 팔았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를 폰트화해서 <길손체>라는 글씨를 디자인해 북디자인 분야에 내놨다. 자음과 모음을 조립한 것이 아니라, 2780자를 일일이 손으로 다 썼다. 도대체 그의 본직은 무얼까, 싶어 한 기자가 물었다.

“저요, 본업이 소설가죠. 그런데 책이 잘 안 팔려요. 먹고 살려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요즈음 이제하는 동숭동 카페를 접고, 제주도 성산포로 내려가 갤러리를 만들어 그림 그리며 가끔 ‘모란 동백’을 부르며 살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민가수 나훈아도 새 앨범에 ‘모란 동백’을 넣었다. 자존심 센, 나훈아가 조영남이 히트 친 노래를 다시 리메이크한 걸 보면 ‘모란 동백’이 대단한 곡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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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5
하늘의 옷은 재봉선이 없다

 

 우리 집 뒤뜰에 목련이 네 그루가 있다. 우리 가족이 이곳에 이사 온 것이 20여 년이 됐고, 이사 올 때 벌써 이들이 있었으니까 꽤 연식이 된 거다. 그런데 이 목련들이 잘 자라지 않는다.

 아내가 투정하듯 “흙도 돋아주고 거름도 주어야 하는데…”하며 잔소리를 여러 번 했지만, 흙 만지는 것에는 도통 취미가 없어 흘려 듣다가, 며칠 전에 화단 가꾸려고 준비해 놓은 흙을 나무 밑에 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 공들인 사역이 ‘얼마나 잘됐나?’ 궁금해 목련을 자세히 보니, 네 그루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 어제 흙을 돋아주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남쪽 담장에 심은 것이 서쪽에 비해 훨씬 잘 자랐고 꽃 봉오리도 많다. 처음에는 크기가 비슷했는데, 이 작은 마당에서도 음양오행이 있는가 보다.

 고국에서는 벌써 목련꽃이 폈을 시기인데, 여기 토론토는 5월 초가 넘어서야 꽃망울이 터졌다. 내가 살고 있는 리치몬드힐(Richmond Hill)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인지,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목련을 많이 볼 수 있다.

 목련은 꽃이 크고 화려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순간으로 피었다가 져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찰나’를 놓쳐 지저분한 꽃잎만을 보게 된다.

 

 

 목련을 소재로 한 여러 시와 노래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송창식이 작곡한 ‘목련’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1983년에 만든 이 곡은 당시 송창식의 다른 곡에 묻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강헌이 그의 ‘목련’을 평한 글이 흥미롭다. “송창식은 ‘목련’이라는 간결한 소묘의 세계에 트로트를 끌어들여 ‘천의무봉’의 솜씨로 녹여냈다”라고 극찬한다.

 ‘천의무봉(天依無縫)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보니, ‘하늘의 옷은 재봉선이 없다’라는 뜻이다. 결국 어느 곳에도 흠잡을 것이 없다고 칭송한 것이다. 하지만, 송창식의 ‘목련’을 다시 꼼꼼히 여러 번 들어봐도 평론가의 말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산나물 맛’ 같은 것을 느꼈다. 젊었을 때는 별로 맛이 없어 좋아하지 않았던 고사리나 곰취, 참나물 같은 ‘쌉싸름한 맛’ 말이다. 아마 강헌은 송창식이 ‘목련’을 통해서 한국적 트로트를 현대화하려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일 게다.

어찌 되었든 송창식의 ‘목련’에 트로트가 녹아져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목련’에 불교 음악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트로트의 5음계 2박자를 썼지만 가사 때문인지 중이 염불할 때 하는 타령 같은 가락이 있는 것 같다.

 

“목련꽃 꽃잎으로 떨어질 때면/ 허공 중에 그 떨음 보지를 마세요/ 목련꽃 꽃잎으로 떨어질 때는/ 봉원사 연못으로 한번 가시지요/ 거기서는 물속 저기서 그림자도 나와/ 하얗게 꽃으로 뜬 잎 봐요”

 

‘목련’의 가사에 봉원사라는 절이 나온다. 봉원사는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안산 자락에 있다. 안산은 인왕산 옆에 있는 산으로 무악산이라고도 불린다.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 그러니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동쪽 아현터널 방향으로 약 1킬로 가다가 왼쪽 산기슭 쪽에 위치한다.

대학 다닐 때, 절로 올라가는 산책길이 좋아 학우들과 어울려 몇 번 갔던 기억이 있다. 풍경도 좋지만 운이 좋아 콧바람 난 여학생들을 만나 수작 걸어보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봉원사는 신라 말기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영조 때 다시 지은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 이 절은 불교 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영산재를 전승하고 보전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 사찰이다.

 영산재(靈山齋)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절에서 올리는 재의 한 형태로 영혼을 달래는 의식이다. 스님들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악기에 맞춰 불교 성악곡인 범패(梵唄)를 노래하고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을 공연한다.

영산재는 야외에서 펼쳐지는 의식으로 일반 대중뿐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춤과 노래를 바치는 무형적인 예술이다. 이 영산재를 계승하고 있는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학과장인 법현스님은 “영산재는 ‘깨달음의 향연’이다. 너도 깨닫고 나도 깨닫고, 음악으로 춤으로 깨닫는데 목적이 있다. 깨달음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이 극락이고, 극락이 곧 깨달음의 세계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에 ‘세계의 정신 사상이나 예술을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로 등재된 스님이다. 법현스님이 한국 음악계에 이룬 업적은 세계 최초로 각필(角筆) 악보를 발견한 것이다. 각필 악보는 끝이 예리한 도구로 경전 위에 음의 굴곡을 표기한 형태를 말한다.

그가 각필 악보를 발견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악보는 세종대왕의 ‘정간보’였다. ‘정간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악보로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낸 것인데, 서양의 오선보도 이에 해당한다.

법현스님이 세계 최초의 불교음악 악보를 발견한 것은 2001년이다. 악보의 역사를 15세기에서 8세기로 앞당긴 쾌거였다. 삼국시대에는 종이가 매우 귀한 물품이어서 경전 위에 먹으로 쓰거나 표시를 할 수 없었다. 대신 대나무 끝을 예리하게 깎아 글자 위에 네 귀퉁이 중 한 곳을 탁점을 찍거나 꾹꾹 눌러 길이를 표시했다. 탁점으로 우리말 사성(四聲: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을 표시해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고, 음의 길이만큼 길게 혹은 짧게 꾹꾹 눌러 자국을 남겼다.

 어찌하다 보니 글이 ‘목련’에서 벗어나 ‘각필 악보’까지 가버렸다. 송창식의 ‘목련’ 노래에 트로트와 불교 음악이 담겨있다고 말하려다, 그만 중심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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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가 “시간 있을 때 <들국화>의 최성원에 대해 한번 써봐. 학교 다닐 때 몇 번 봤는데 음악도 좋고 나름 철학도 있어”라는 말을 들은지 벌써 여러 해다. 하지만, 나는 전인권 말고는 다른 <들국화> 멤버가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그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며칠 전 우연히 <들국화>의 1집을 듣고 ‘이렇게 좋은 음악이 1980년대에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들었네…’ 하며 서둘러 자료를 뒤졌다.

 

 그룹 <들국화>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비틀즈>를 거쳐야 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그리고 링고 스타, 이렇게 4명으로 구성된 비틀즈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음악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들은 1963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가 1969년 마지막 앨범인 ‘렛 잇 비(Let It Be)’를 발표하고 사라진다. 4명의 멤버들은 10대 시절에 하나로 뭉쳐, 20대 초에 슈퍼스타가 되고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내지만 그에 따른 경쟁과 불화도 함께 겪는다.

 

그렇다면 20세기 최고의 음악 밴드 비틀즈는 어째서 7년을 넘기지 못하고 갈라서게 됐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이 1967년 8월 갑자기 약물 남용으로 사망하자 자신들의 돈 문제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인간관계까지도 관리해주던 전문가를 잃게 되었다. 이후 밴드의 주축인 레논과 매카트니는 새로운 매니저 문제로 대립한다. 매카트니가 처갓집 식구들을 매니저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비틀즈 멤버들은 순회공연이 늘어나면서 팬들의 환호 때문에 자신들의 연주소리가 파묻혀 음악활동에 지장을 받자 라이브 공연을 중단해 버린다. 순회공연에서 생기는 안정적인 수입이 사라지자 비틀즈는 점점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레논과 매카트니는 각각 16살과 15살에 만났다.

 

초기 비틀즈의 모든 노래들은 이 둘의 진정한 합작품이었다. 음악가정에서 자라 작곡을 했던 매카트니와 달리 레논은 작곡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작곡을 배운다. 두 사람이 성장하면서 사이가 틀어졌을 때도 애정을 가지고 서로의 스타일을 흉내냈고, 서로 도와 노래를 완성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음악적 견해가 달랐고 그것은 악감정의 싹이 된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적개심은 결국 비틀즈의 해산을 가져온다. 이러한 분열은 곧 증오로 이어지면서 감정이 악화됐다. 깨진 뒤 존은 ‘어떻게 자니(How do you sleep)’란 노래에서 ‘네 예쁜 얼굴은 1년 이상 가지 못할 거야. 내 귀에 네 음악은 엘리베이터 배경음악과 같다’며 폴을 향해 노골적으로 악감정을 퍼부었다. 도저히 세기의 콤비였다고는 볼 수 없는 볼썽사나운 싸움이었다.

 

둘은 가치관도 전혀 달랐다. ‘참여적인’ 존은 서구사회의 혁명대열에 나선 신좌파였던 반면, ‘개인적인’ 폴은 별장에서 은둔하듯 지내며 세상일에 등을 돌렸다. 비틀스 해산 전후 10년 넘게 소원한 관계에 있던 둘의 사이는 1980년 존 레논이 피격 사망하면서 생전 공식적인 화해를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2001년에 조지 해리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폴과 스타만이 남게 되고 비틀즈는 ‘불구’가 된다.

 

 비틀즈는 기존의 로큰롤에 포크음악의 감수성과 인도음악 등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음악을 녹여 퓨전시킴으로써 자신들만의 음악을 만들었다. 비틀즈처럼 그러한 장르적 융합을 통해 독특한 음악을 만든 그룹이 <들국화>였다. 그들의 음악은 록이면서도 포크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연주나 선율이 훌륭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외국 록이나 포크를 따라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독특한 형식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198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에 완성된 한국적 토크를 부르는 토종 <들국화>가 자생된 셈이다. 어떻게 보면 해방 후 받아들여진 서구의 대중음악들이 서서히 한국화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들국화>가 씨앗을 실체로 발화시킨 것이라고 해야 옳다.

 

 

 2007년에 경향신문이 조사한 <한국 대중음반 명반 100>에 <들국화 1집>이 1위로 선정된다. 1985년에 만들어진 이 음반 표지에는 네 얼굴이 등장한다.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이 비틀즈 ‘렛 잇 비(Let lt Be)’ 음반표지와 꼭 닮은 배치로 자리하고 있다.

 

이 네명 중에 두 명이 지금 세상에 없다. 막내이자 피아니스트인 허성욱은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었던 조덕환은 2016년에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결코 짧지 않은 대중음악사에서 한 장의 음반을 고른다는 것은 무리하다. 더구나 현실보다 과대포장되어 온 것이 과거이고 보면 결과물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은 각자 역량을 충분히 갖춘 네 명의 뮤지션들이 만든 작품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전인권의 절규, ‘매일 그대와’로 보여준 베이스 최성원의 감미로운 목소리, 허성욱의 절제된 건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에서 나타난 조덕환의 작곡과 노래. 그들의 노래는 마치 바람에 날린 들국화의 씨앗처럼 당대 청년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지고 퍼진다.

 

 그러나 <들국화>는 2집 이후 실망스러운 후속작들과 잦은 멤버 교체 등으로 밴드의 호흡이 멈춘다. 조덕배는 벌써 팀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1987년 전인권과 허성욱이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되자 최성원은 제주도로 내려간다. 거기서 쓴 곡이 성시경, 유리상자 등이 불러 명곡이 된 ‘제주도의 푸른 밤’이다.

 

최성원의 아버지는 클래식계에서 유명한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이다. 그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이가 고려대 물리학과 1학년이었는데 졸업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으면 했어요”라고 한 언론에서 밝힌다.

 

사람들은 <들국화>하면 노래하는 전인권을 떠올리지만, 사실 이 밴드를 프로듀싱 한 사람은 최성원이다. 1집 중, 6곡이 그의 작곡이다. 각자의 꿈틀대는 개성을 가진 멤버를 하나의 색깔로 만든 것도 최성원이었다. 1954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휘문고와 고려대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독학해 밴드 하는 형들을 쫓아 녹음 세션과 라이브 연주를 다닌다. 이곳 저곳의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대학 졸업 후에는 CM 제작 프로덕션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2년경에 전인권과 허성욱을 만나 셋이서 <모노>, <환타지아>, <뮤직 라보> 등에서 밤무대를 한다. 어느날 <따로 또다시>라는 그룹이 콘서트를 하는데,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그런데 제대로 된 이름이 없어 공연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들국화>라는 이름을 짓는다. 당시 전인권이 캐나다 밴드 <스카이라크(Skylark)>의 ‘Wild Flower(야생화)’를 잘 불렀는데,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주위에서 “남자 밴드 이름이 들국화가 뭐냐?”고 놀림도 당했지만 최성원이 우겨서 계속 쓰게 된다.

 

2집 이후 해체된 <들국화>는 피아니스트 허성욱이 죽으며 1998년에 다시 재결합한다. 하지만 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공연을 한두 번 하고 다시 소식이 잠잠해진다. 그 뒤 전인권이 밴드를 만들어 홀로 방송을 하지만, 그들의 전성기를 다시 찾기 어려웠다.

 

최성원도 음반 작업과 후배 양성도 했지만 평생 TV에 딱 한번 나갈 정도로 ‘매스컴 알레르기 증상’이 있던 그는 대중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2013년에 미국에 있던 조덕환이 귀국해 다시 한번 재건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조덕환은 그렇게 돌고 돌아 <들국화>로 다시 돌아왔지만 2016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최성원이 작사, 작곡한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매일 그대와”의 노랫말처럼 함께 연주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매일 그대와’ 밴드 할 수는 어렵게 됐다. 하지만, <들국화>가 뿌린 씨앗은 세월이 지나도 시들지도 않고 봄마다 꾸준히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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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1
봉준호의 외할아버지, 박태원

 

나의 부모님은 실향민이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가 언론에 나올 때마다 귀 기울이게 된다. ‘혹시라도 북에 남겨진 가족을 만날 수도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어머니께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 ‘언젠가는 우리 가족의 차례가 오겠지’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며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이렇게 찔끔찔끔 200여 명씩 만나면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실향민들이 다 상봉을 하겠나’ 싶었다. 또한 행사에 참여하는 대상을 보면 남북 모두 ‘좀 잘 살고 있는 사람’만 뽑는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를 하자”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쉽게 마음을 접지 못하셨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봉상균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대구 효성여대 교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박소영이다. 봉준호 감독이 세계를 놀라게 하자, 그의 가족에게도 매스컴의 관심이 커진다. ‘북에 살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큰 이모’라는 기사가 다시 언론에 재조명된다.

2006년 6월에 3일간 금강산에서 열렸던 <제14차 남북 이산가족 행사> 때, 봉준호의 어머니 박소영이 북한에 살고 있는 언니 박설영을 만난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월북해 평양 기계 대학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그녀의 아버지 박태원은 1986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박태원과 큰 이모가 6.25 전쟁 중에 월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할아버지 박태원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청계 풍경>, <갑오농민전쟁> 같은 작품들은 들어 보았을 성싶다. 박태원은 작가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문단에서 모더니즘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고, 문인 단체 ‘구인회’의 멤버였다. 일제가 한국 문학을 탄압하던 시절,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스케치 형식으로 묘사하는 모더니즘 방식의 글을 썼다.

박태원은 해방이 되어 조선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한다. 보도연맹은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단체였지만, 6.25 전쟁이 나자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처형했다.

당시 박태원은 구금돼 있었는데,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풀려난다. 벌써부터 충청도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은 처형당하거나 테러를 당했기에 위험을 느낀 박태원은 혼자 북으로 넘어간다. 남겨진 가족들은 1.4 후퇴 때, 서울 이남으로 피난을 가는데, 큰 딸 설영만 외가인 이화동에 남게 된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설영은 북한 정부의 인력 동원으로 뽑혀 병원에서 인민군을 간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에 부역한 자는 처단한다’는 말에 철수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간다.

여러 추측이 있겠지만, 아마도 박태원은 잠깐 피신한 후에 남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분단이 이루어지고 북으로 간 박태원과 큰 딸은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박태원은 191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 제1 고등 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호세이 대학을 다니다 2학년 때 중퇴한다. 1934년에 한의원 김중하의 딸, 김정애와 결혼한다. 신부 김정애는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 여자 사범학교를 나온 재원이었다.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에 반계몽, 반계급주의 입장에서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등의 소설로 명성을 얻는다. 이때 그 소설의 삽화를 그려준 이가 그의 벗, 작가 이상이었다. 모더니즘 하고 파격적인 문체로 속물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렸지만, 좌익적인 계급투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며 남북 분단의 소용돌이에 박태원도 휘말려 ‘요시찰 원숭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남은 가족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박태원의 처, 그러니까 봉준호의 외할머니는 인민군복을 빨래한 죄로 징역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5년으로 감형됐다니, 어머니를 감옥에 보낸 가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태원의 월북을 두고 놀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좌익 비슷한 글을 쓴 적도 없고 서울 태생인 ‘댄디 보이’가 갑자기 북으로 가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북으로 간 박태원은 평탄하지 못했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으로 몰리는 이른바 ‘남로당 숙청의 피 바람’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수로 잘 지내던 그는 남로당 계열로 몰려 4년간 평남 강서 지방의 협동조합으로 추방된다. 이때 영양실조로 눈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는데 이후 복권이 되지만, 그의 시력은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무리한 집필로 뇌졸중까지 찾아와 반신불수가 된다.

하지만, 무척이나 온아하고 세련된 품격을 지닌 그는 그런 형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문학의 혼을 최대한 끌어 올려 집필을 했다. 손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구술로 글을 썼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이다.

다시 이야기를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자리로 옮긴다. 반세기 만에 한자리에 둘러앉은 박태원의 4남매. 눈 오는 날에 태어난 설영은 자신의 바로 아래 여동생 소영의 아들이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말에 놀란다.

“준호라는 조카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러면서 자신도 “조카가 만든 영화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한다. 아마 그녀가 생전에 조카 봉준호의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봉 감독의 어머니, 소영은 “준호가 연출한 3편의 시나리오도 직접 쓰는 등 글 솜씨가 있는데, 이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자랑한다.

그리고 싸리나무로 둘러쳐 있던 성북동의 옛집이며 활달한 성격으로 핸드볼 선수를 했던 큰 언니 이야기, 남편을 그리며 홀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등으로 시간을 뒤집고 헤치며 밤새 울고 웃는다. 다음날 4남매는 또다시 남과 북으로 헤어진다.

2020년 3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자, 북한 ‘통일신보’는 이례적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작가’라는 제목으로 박태원의 삶과 문학을 5,000자의 장문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신문은 봉 감독을 비롯한 남쪽 가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이 대남 매체를 통해 박태원을 새삼 조명하는 것은 봉 감독이 국제적으로 거둔 쾌거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긴, 2006년의 남북 이산가족 명단에 박태원의 큰딸과 봉준호의 어머니가 포함된 것도 다 그런 이유이지 싶다. 남북 정부가 서로 빠듯한 ‘셈’을 하고 있는 사이에 이산 가족들은 구순을 넘고 있으니, <이산 가족 상봉>은 이제 물 건너간 이벤트가 되어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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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재즈 디바’ 나윤선이 온다

 

 동네에 있는 <리치먼드 힐 퍼포먼스 아트 센터(Richmond Hil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가 지난주 문을 열었다. 그동안 공연을 못봐 근질거렸는데 마침 재즈 공연을 한다고 해서 친구 부부, 아내와 함께 갔다. ‘Canadian Jazz All- Stars’라는 공연인데, 훌륭한 연주 기량의 베테랑 뮤지션을 만날 수 있었다. 색소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트럼펫, 드럼, 보컬리스트가 펼치는 연주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음악이었지만, 캐네디언 재즈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도 이렇게 글을 쓰지만, 사실 재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워낙 음악의 폭이 넓고 여러 장르를 스펀지처럼 품어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재즈야!’ 말하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재즈에는 ‘자유’가 있는 것 같다.고국 방송사 근무 때 내가 속한 부서에서 미국의 유명 색소포니스트를 초청해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재즈에 대해 너무 몰라 이것저것 자료도 보고 공부 삼아 이태원에 있던 ‘올댓 재즈’라는 재즈 클럽에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었다.

 고국에 재즈가 상륙한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당시 호남의 대부호였던 백명권이 조선축구단을 이끌고 영국 육군 축구팀과 원정경기를 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난다. 1925년 1월 축구 경기를 위해 떠났지만 백만장자의 화려한 사치를 즐기던 백명권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재즈’였다. 상하이의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재즈클럽이 크게 번성해 미국, 필리핀,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백명곤은 재즈 악보와 색소폰, 피아노 등 악기를 구입해 귀국한다. 이후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피아니스트 홍난파, 트럼페터 한욱동, 드러머 이상준, 노래 이인선, 백명곤 색소폰 등으로 구성된 재즈 악단을 구성한다. 1926년 한국 최초의 재즈 밴드인 ‘코리아 재즈밴드’가 결성되어 공연을 시작했다.

 1930년대까지 재즈는 많은 인기를 누리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적군인 미국을 비롯한 서양음악을 금지하면서 명맥이 끊기고 잊힌 역사가 됐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재즈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 8군 사령부를 비롯해 평택, 오산 등에 자리잡은 미군부대에는 자국의 병사를 위로하기 위한 클럽이 있었다. 이곳에서 재즈가 연주되었으며 여기서 영향받은 한국 연주자들도 함께 배출된다.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중국계 미국인이 ‘올댓 재즈’라는 재즈클럽을 만든다. 미국에서 공수한 재즈 명반을 감상할 수 있었고 연주자들이 재즈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재즈가 일반 대중에게 사랑받기 시작한건 아이러니하게도 배우 차인표 때문이었다. 1994년 방영된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차인표가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는다. 이후에 재즈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재즈를 듣는 대중들이 많아지게 된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음악 축제들이 생겨났고 그중에서도 야외 재즈 페스티벌이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현재 약 20여 개의 크고작은 재즈 축제가 열리고 재즈를 하는 연주자도 차츰 많아진다. 현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재즈 시장에서도 한국 뮤지션이 사랑받고 있다. 유럽의 보컬리스트 나윤선과 뉴욕의 첼리스트 이옥경과 작곡가 이지혜, 네덜란드의 드러머 홍선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허대욱 등이 해외무대에서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다. 그의 재즈는 폭이 넓다. 다양한 레퍼토리와 넓은 음역을 소화한다. 맑은 메조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세밀한 말맛’을 찾아내 전달한다. 사람들의 숨을 멎게도 열정적으로도 만든다. 그렇다고 대단한 성량이나 기교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기 바로 전의 빵빵함이 있다.

 나윤선의 재즈는 일반적인 패턴을 거부한다. 대신 지적이고 세련되며 맑고 깨끗하다. 그가 ‘디바디아~’ ‘슈비두와~’ 등의 의미없는 스캣 창법을 할 때면 신내림을 받은 무녀의 굿판을 보는 듯하다. 그런 나윤선의 음악을 두고 ‘이채롭다’, ‘생경하다’고 언론에서는 평한다.

 

 

 나윤선이 음악을 시작한건 1994년, 그러니까 나이 스물여섯 살 때다.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기에 다른 가수들의 창법을 모방하기보다 자기 목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불문학을 전공한 그녀의 원래 꿈은 ‘불어선생님’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 홍보실에 취직해서 카피라이터를 했다. 그러다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오디션에 장난삼아 데모 테이프를 보냈다가 연출자 김민기에게 발탁된다. 이 뮤지컬에서 주인공 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이듬해 “노래 좀 더 잘하고 싶다”며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 CIM에 입학한 그녀는 무섭게 음악을 파고들었다. 모르는게 너무 많았던 그녀는 한국의 고시생처럼 공부했다. 재즈의 정의며 역사, 유명 뮤지션들의 음악 세계까지를 훑었다. 시간을 쪼개 프랑스 보베(Beauvais) 국립 국악원과 파리 나디아(Paris Nadia &LillBoulager) 콘서버토리를 함께 다녔다. 그런 집념으로 CIM 스쿨에서 4년째부터 장학금을 받았고,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CIM 스쿨 6년 차에는 동양인 최초로 교수 제안을 받는다.

 2년의 교수를 지내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뮤지션들로부터 러브콜이 왔고 본격적인 무대활동이 시작된다. 그녀의 프랑스 순회공연은 세계 재즈 시장에 ‘나윤선’을 순식간 알리는 계기가 된다. 요즘 그녀에게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재즈 싱어’라는 유럽 언론의 극찬이다. 또한 세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인 오피시에(Officier), 슈발리에(Chevalier)를 수훈했다. 방송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정 팬이 상당히 많아 공연마다 늘 매진된다.

 라이브 공연이 생명인 재즈 가수 나윤선도 팬데믹으로 2년간 공연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파구를 찾았다. 그동안 쉴 틈 없이 보내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가사를 쓰고 직접 곡을 만들어 지난 1월에 11집 음반을 냈다. 그리고 다시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

 그 나윤선이 오는 4월 23일(토) 8시 토론토 코에너 홀(273 Bloor St. W.)에서 공연을 한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색채일지 몹시 궁금했는데, 이렇게 토론토에서 만날 수 있다니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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